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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신혜진

신혜진 申惠眞

1973년 충북 충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 석사과정 재학중. 2006년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ich0314@hanmail.net

 

 

 

겨울 유원지

 

 

아침부터 찌무룩하던 하늘이 낮게 내려앉았다.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워 문 원재가 잔뜩 흐린 하늘을 흘낏 올려보았다.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돌아가듯 손가락 두마디만큼 열린 창틈으로 담배연기가 바깥으로 빨려나갔다. 이차선 도로 한쪽에 도로 포장용 골재를 실은 덤프트럭 한대가 서 있었다. 늦가을부터 시작된 공사는 느리게 진행되다 유원지 입구에서 불과 삼백미터도 못 간 지점에서 중지되었다.

유원지로 접어드는 진입로는 큰길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유원지라고 씌어진 팻말을 끼고 급경사 진 길로 올라타서 도로공사 본부와 면한 구불구불한 비포장 흙길을 한참 달려야 한다. 도로 위에 연탄재가 어지럽게 부서져 있었다. 이틀 전 내린 눈과 연탄재가 섞여 지저분해 보이긴 해도 덕분에 길이 미끄럽지는 않다. 원재는 얼음이 얇게 언 갓길 쪽으로 차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주의해가면서 운전을 했다. 길에 깔린 잔돌을 튀기며 자동차가 서서히 유원지로 들어섰다. 유원지는 겨울잠에 빠져 있는 듯 인적이 드물었다. 느닷없는 자동차 소리에 놀란 꿩 한마리가 푸드덕거리며 차창 앞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사위는 고요했다.

유원지 제일 안쪽‘사계절 오리탕’이라고 써 붙인 입간판 앞에 차가 멈춰섰다. 붉은 아크릴 입간판은 돌덩이로 아랫부분을 고정해놨으나 금세 쓰러질 듯 삐뚜름했다. 원재는 식당 입구에 김사무장의 자동차가 주차돼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주차장에는 그 차 말고도 일톤 트럭 한대와 자가용 몇대가 더 있었다. 유원지 식당들은 계절을 타는 탓에 겨울철엔 으레 개점휴업인 경우가 많았으나 몇몇 집은‘특별한’장사로 때아닌 대목을 누리기도 하는 것이다.

오리탕집 마당에 나일론 차일이 시무룩하게 처져 있었다. 그 아래 평상이 너덧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포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쇠락해 보이나마 이곳이 유원지의 식당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따금 슬레이트 지붕에서 기스락 물을 흘리던 고드름이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양달 쪽으로는 햇살을 이기지 못한 눈이 녹아 감은바닥이 드러났다. 비루먹은 개 한마리가 다가와 원재의 바짓자락에 달라붙어 냄새를 맡다가 흥미가 없는지 이내 집 뒤편으로 달아나버렸다. 계십니까? 노크하는 그의 손에 알루미늄 특유의 기분 나쁜 냉기가 느껴졌다. 은색 쌔시 문에는 검은 썬팅지를 바른 간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원재가 헛기침을 해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실내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현관 앞에서 발을 굴러가며 구두에 묻은 눈을 털었다. 문간에는 분홍색 플라스틱 슬리퍼와 나일론 털신 그리고 남자 구두 여러켤레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인기척이 없는 마당처럼 집 안도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얼마간 서 있으려니 가재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실내는 협소했고, 살림살이들은 음식점답지 않았다. 마루에 나와 앉은 밤색 장롱이며 씽크대가 한눈에도 무척 낡아 보였다.

“계십니까? 계세요? 김사무장님 심부름 왔습니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주인을 부르자 방문이 열리며 턱이 조붓한 중늙은이 남자가 얼굴만 내밀었다. 그는 잠기가 채 떨어지지 않은 눈을 순하게 끔벅이며 낯선 손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원재는 김사무장이 불러서 심부름 왔다는 식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김사무장이 이런 음식점을 찾은 이유야 빤한 마당에 괜히 단속 나온 경찰로 오해받아서 좋을 것 없다고 원재는 생각했다. 김사무장은 겨울 들어 사무실에서 말없이 사라지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덕분에 변호사와 사무장 사이를 오가는 일까지 원재가 떠맡게 되었고, 서너차례 ○○유원지를 훑고 난 후에는 사무장이 있을 만한 식당들을 훤히 꿰게 되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천천히 무릎으로 옮겨지는가 싶더니 방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검정색 가죽점퍼를 입은 상체가 드러났다. 마르고 푸석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남자의 체격은 의외로 장대했다. 방 안에서 외투를 입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원재는 집 안에 온기라곤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 서 있는 원재를 향해 남자가 왜 그러고 섰느냐, 나무라듯 일어섰다.

좁은 마루를 지나 남자를 따라 들어선 방 안에는 스무살쯤 먹었을 여자가 비대한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베개를 안고서 TV를 보고 있었다. 마주 보이는 벽면에 벽지를 바른 문이 두개 더 있었다. 내실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그중 하나의 방문을 가리켰다. 뒷산에 면해 있는 작은 창문 하나뿐이어서 안쪽 방은 퍽 컴컴했다. 방 한가운데 휴대용 버너가 놓인 상이 세개 나란히 붙어 있었고, 한쪽 벽에서 가느다란 금실 같은 빛이 허약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빛이 새나오는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 방에, 수시로 자기 자리를 비우는 김사무장이 능청스레 앉아 있을 것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 원재가 상 모서리에 정강이를 부딪혔다.

한 손으로 다리를 감싸고 방문을 여는 순간, 원재의 안경에 뿌연 김이 서렸다. 얼른 안경을 닦아 되썼지만 방 안은 여전히 뿌옇게 보였다. 파리한 형광등 아래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방 한가운데 당구대용 초록색 천이 깔린 탁자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만원짜리 지폐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누런 장판이 깔린 방바닥은 미지근했으나 가스난로가 뿜어대는 열기와 담배냄새, 땀내 그리고 버너 위에서 끓고 있는 오리탕이 풍기는 누린내로 방 안 공기는 끈적거렸다. 끈끈한 열기 속에 앉아 있는 대여섯명의 사내들 틈에 김사무장의 투덕한 목덜미가 보였다. 그는 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손에 든 카드패에 코를 박고 있느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둘은 낯이 익었다.

“사무장니임……”

마침 레이스가 한창이었으므로 원재는 조심스럽게 김사무장의 어깨를 건드리며 말했다. 그제야 김사무장이 두툼한 목덜미에 주름을 잡으며 게으르게 돌아보았다. 넓게 퍼진 콧방울에 기름기가 번들거렸고 M자로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에 깊은 주름이 그어졌다. 삐딱하게 담배를 씹어 문 사무장의 검푸른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던 담배에서 길게 구부러진 재가 스웨터 위로 떨어졌다. 한 손에 돈다발을 들고 한 손으로 패를 쪼느라 담뱃재 털 손이 없었던 것이다. 벌겋게 충혈된 사무장의 눈이 매운 담배연기에 찌푸려졌다. 누가 됐든 성가셔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 바둑 둬? 사무장 건너편에서 지청구가 떨어지기 무섭게, 콜이여, 다이여? 재촉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뭔 노무 패가 이러냐아?”

김사무장이 자기 앞에 깔려 있던 트럼프를 엎으며 끗발 안 서는 게 다 네 탓이라는 듯 원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서슬에 원재가 주춤 물러섰다. 사무장은 궁둥이로 지그시 누르고 있던 서류봉투를 원재의 발 쪽으로 건성 밀어놓았다.

건네받은 서류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마당으로 나선 원재가 가래침을 훑어 올렸다. 점액질의 가래를 사무장의 자가용 쪽으로 길게 뱉었다. 승용차 문에 열쇠를 꽂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일할 시간에 한적한 유원지에 모여 있는 남자들이 아무리 봐도 신기했던 것이다. 초록색 상 위에 쌓여 있던 푸릇한 지폐더미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발밑에서 녹았다 얼어붙은 눈이 버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정오의 햇살이 핥고 지나간 곳에선 어김없이 눈석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에 서류를 가져다주고 원재는 가까운 은행을 찾았다. 365일 자동화기기에 김사무장의 현금카드를 밀어넣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 기계음을 무시하고 얼른 육인치짜리 화면에 손가락을 얹었다. 원재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삐져나왔다. 총알 떨어졌다, 은행 좀 갔다와라. 숫제 명령조로 말하는 김사무장에게 그저 네네,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나서 원재는 복학 전에 등록금이나 벌 요량으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청소와 잔심부름이 고작이었지만 소장의 눈에 들어, 아예 눌러앉으라는 소리를 곧잘 들었다. 일과시간에 싸우나나 노름방에 가 앉아 있는 사무장의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는 것도 그의 일 중 하나였다. 농담도 여러번 들으니 진담 같아서 잘하면 정식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나쁠 것 없었다. 김사무장처럼 수완 좋은 직원이 될 수만 있다면 대학을 졸업해 취직도 못한 채 빌빌거리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 싶었다.

0579,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칠십만원씩 세번을 찾았다. 얇은 종이봉투에 카드와 현금을 챙겨 담고 잠시 동안 명세표를 들여다보았다. 쌍꺼풀 없는 원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원재는 봉투에 명세표 석장을 추려 담아 코트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리탕집 현관에 들어서면서 노크 없이 알루미늄 손잡이를 돌렸다. 아까 방 안에서 TV를 보던 여자가 현관 옆에 붙은 씽크대에서 시들어빠진 파를 다듬고 있었다. 앞을 여미지 않은 누런 카디건 아래 핑크팬더가 그려진 티셔츠가 보였다. 카디건은 심하게 보풀이 져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원재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몸을 완전히 돌리지도, 목례를 하지도 않은 채 그를 뻔히 쳐다보기만 했다. 무뚝뚝한 여자군, 원재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서면서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꼈다. 붉은 목단무늬의 털 담요를 덮고 주인 남자가 벽 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잠이 들었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곁방으로 들어가자 이전과 달리 사무장이 반색을 했다. 역시 방 안은 담배연기로 질식할 지경이었다. 기름때에 전 환풍기가 심한 소음을 내며 열심히 돌아갔지만 환기를 시키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환풍기 아래쪽은 비가 새들어온 흔적이 마스카라 번진 여자의 눈물자국처럼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다. 벽지는 안 그래도 니코틴에 누렇게 찌들어 원래 색깔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원재는 천식이나 폐암 인자가 공기에 가득 차 있다는 객쩍은 생각을 했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돈봉투를 꺼내 사무장에게 내밀었다. 돈과 카드만 챙긴 사무장이 명세표는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봉투째 구겨 버렸다. 원재가 나간 사이 꾼 모양인지 3분의 1 정도 돈을 덜어 옆사람1에게 건네며, 더 찾아오랠걸 그랬나? 혼잣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탁자에 쌓여 있는 판돈에서 만원 한장을 집어 등 뒤의 원재에게 주었다.

“아뇨. 됐습니다, 사무장님.”

“괜찮어, 받어. 밖에 저 애도 한번 갔다 오면 만원씩 챙겨. 그렇잖여? 누군 챙겨주고 누군 군심부름만 시킬 순 없잖여? 워낙이 또 그려, 개평꾼 없는 판떼기는 읎는 벱이여. 놀다 보믄 돈 버는 건 죄다 이 집 식구들뿐이래니께.”

사무장은 카드판의 사내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좌중을 훑어보며 말했다. 마루에서 파를 다듬던 여자가 밑천이 떨어진 놀이패의 은행 심부름을 해주고 만원씩 받아 챙기는 모양이었다. 차 없이 은행까지 걸어 내려가기엔 상당한 거리였다.

“그러게, 은화가 동동거리고 뛰어갔다 와두 이삼십분은 족히 걸리는데 이 친구 시키면 빨라서 좋긴 하겠구만. 자네, 오늘 여기서 용돈이나 벌어가지?”

사무장 건너편에 앉은 사람2이 선선히 동의했다. 원재는 파 다듬던 여자 이름이 은화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머쓱한 표정으로 돈을 받아든 원재는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지갑을 꺼냈다. 그때 쟁반 가득 종이컵을 받쳐든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커피였다. 그녀는 원재가 지갑에 만원을 집어넣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점심은 뭘로 하실래요? 여자가 오리탕 찌꺼기로 더러워진 탁자를 행주질하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은화야, 나, 라면 하나만 끓여주라.”

곱슬머리에 유난히 눈썹이 짙은 사내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여자에게 말했다. 이미 패를 엎은 그의 시선이 상을 닦는 뒷모습, 여자의 푸짐한 엉덩이 부근에 집요하게 엉겼다. 12시 23분, 삐딱하게 걸린 벽시계를 바라보며 원재는 사무실로 돌아가서 점심을 먹을까, 잠시 고민했다. 소장 차를 몰고 나와 서둘러 돌아가야 했으나 시장기가 돌아 일어서기가 싫었다. 저치처럼 나도 라면이나 하나 끓여달라고 할까, 생각하는데 마침 사무장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카드패에 눈을 박은 채였다. 은화야, 백반 되쟈? 이 친구, 백반 한상 벌어지게 채려줘봐. 그녀가 나간 후 밥을 기다리면서 원재는 하릴없이 포커판을 지켜보았다. 앞앞이 놓인 지폐가 한사람당 족히 이삼백씩은 될 듯싶었다. 많이 딴 사람은 방석 아래 돈을 깔고 앉아 느긋한 표정이었다. 딜러는 이전 판에서 이긴 사람의 왼쪽 사람이 보았고, 판은 하프베팅이었다.

“아잇 씨부랄늠덜, 짜구 치나?”

누군가의 외침이 카드판을 덮쳤다. 오종종한 얼굴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탁사장이었다. 원재는 사무장 뒷자리에 앉아 번갈아가며 두 사람의 카드패를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 한 소리인가 싶어 뜨끔하여 뒤로 물러앉았다. 그러나 고함은 라면을 시켰던 남자와 그의 옆에 앉은 사내를 향한 것이었다. 아, 왜 서로 패를 보여줘? 열이 올라 얼굴이 시뻘게진 탁사장이 두 사람에게 당장 주먹이라도 쥐어지를 태세로 으르렁거렸다.

“생사람 잡네. 탁사장, 누가 뭘 보여줬다구 그래애? 니미, 나 진즉 죽은 거 안 봬?”

바투 자른 머리칼, 왼쪽 뺨에 긴 흉터가 있는 사내가 항의했다. 라면 옆에 앉은 그는 한눈에 다혈질로 보였다. 하관이 빨아 안 그래도 옹졸해 보이는 인상이 흉터 때문에 한층 사나웠다. 탁사장보다 적어도 열살은 어릴 것 같은데 대뜸 반말이었다.

라면과 흉터는 사구째 카드를 받고 동시에 다이3를 부른 참이었다. 엎고 나서 보여준 것인지, 엎기로 혼자만 작정하고 미처 다이를 부르지 않은 채 보여준 것인지 애매한 상황이었다. 레이스4를 계속하고 싶은 다른 사람들이 진정시켜보려 했으나, 탁사장은 화가 누그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씩씩대며 원재에게 물었다.

“너는 봤지? 저 씨부랄늠덜이 짜구 치는 거.”

못 본 거 같은데요. 원재가 재빨리 대답했다. 봤어도 부인해야 하지만 원재로서는 정말이지 확실히 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같은데요,는 또 뭐야? 탁사장은 오종종한 얼굴을 잔뜩 우그러뜨린 채 원재를 을러댔다. 흥분한 그를 제지하고 나선 건 김사무장이었다.

“아, 얘가 뭔 잘못이 있다고 그랴. 우리 꼬마 겁먹겄다. 서방질한 예펜네도, 오매 억울한 거, 지금 막 빤쓰 벗은 참인디요, 허면 끝나는 거여. 현장을 제대로 덮치든가 증거가 있든가 안 그럼 말짱 황인 거여. 인품 좋은 탁사장이 참어야 쓰겄네.”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알아주는 입심답게 사무장이 눙치고 들자 탁사장도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세웠던 무릎을 꺾고 도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두고 보자는 듯 두 눈을 칼처럼 치켜세웠다. 노름판에서 서로 조금씩 속이는 일이야 흔한 일일뿐더러 그저 슬쩍 보여주는 정도였다면 증거라는 게 남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김사무장이 말하면‘법적으로’정말 그런가 보다고 탁사장은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김사무장은 드물게 달변이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상대방의 기를 적당히 살려주면서 기분 나쁘지 않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줄 알았다. 짐짓 노회해 보이는 언변이었으나, 왜 그런지 사람들은 그의 말에 너무나 쉽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마는 것이다. 산보하듯 병원과 경찰서 몇군데만 돌아도 의뢰인 몇은 어렵지 않게 물어오는 사무장이었다. 전라돈지 충청돈지 출처가 불분명한 느릿한 사투리 억양은 일면 어눌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역으로 그 촌스러운 말법이 상대의 긴장을 풀어놓는 듯했다. 그의 언변은 변호사 사무실의 밥줄과 직결되었고, 그런 탓에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소장은 사무장을 덮어놓고 해고하지 못했다. 김사무장이 법률자문이나 간단한 법무사 일까지 보아주며 뒤로 의뢰인을 빼돌린다는 것은 사무실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김사무장이 없을 때 소장은 부하직원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사무장 험담을 주워섬기며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소장은 때때로 그를‘돈 먹은 자판기’로 부르곤 했는데, 동전만 삼키는 자판기처럼 속 터지게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자판기는 가끔씩 미친 듯이 음료수를 쏟아내기도 했으므로, 소장의 배포로는 평생 가봐야 그를 자르기 힘들다는 것이 부하직원들의 중론이었다.

“인생이 불쌍해서 봐준다, 내가. 그 집 자식들은 즈이 아빠가 화수분인 줄 아는 모양인지……”

무슨 소리인가 말끝을 꿀꺽 삼키며 큰 선심이라도 쓰는 투였지만 사실 다른 사무실에 다니고 있던 사무장을 스카우트해온 장본인이 바로 소장이었다. 그 집 자식들은 즈이 아빠가 화수분인 줄 아는 모양인지…… 은행에서 원재가 본 명세표에는 잔액이 마이너스 삼천이 넘는 것으로 찍혀 있었다. 연봉에 부수입까지 수입이 상당한 사무장의 재정상태가 실상 깡통,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원재는 사무장의 뒤룩뒤룩한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흰털이 완연한 살쩍부터 목울대까지 푸르스름한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겨우내 검은 스웨터 하나로 버티고 있는 그에게서 담뱃진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원재는 얼마 전, 사무장의 책상에서 서류를 찾던 일을 떠올렸다.

컴퓨터를 켜고 정리되지 않은 파일들을 검색하고 있는데,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 창이 하나 떴다. 자동으로 메신저에 로그인된 모양이었다. 토미섀넌맘: 거기 있어? 원재는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파일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토미섀넌맘: 이번달 생활비가 안 왔어. 어떻게 된 거지? 자꾸 이러면 곤란해. 응답하지 않으면 제풀에 나가겠거니 했지만 메신저창은 계속해서 올라왔다. 토미섀넌맘: 왜 말을 안해? 좀 있다가 애들 픽업하러 가야 해. 거기 없어? 원재는 하는 수 없이 메신저창을 클릭했다. 창 하단에 ‘토미섀넌맘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저기 보이는 저 산: 저, 죄송한데요. 사무장님 외출하셨습니다. 프롬프트가 열번쯤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토미섀넌맘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은화가 커다란 양은 쟁반에 라면과 백반을 차려서 들어왔다. 쟁반이 무거운지 둔중해 보이는 어깨에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벽에 밀어붙여놓은 밥상에 음식 그릇을 내려놓는 동안, 은화는 곁눈질을 해가며 자꾸만 원재를 흘끔거렸다. 원재는 그녀의 눈길이 왠지 불편했다. 라면을 시킨 남자가 은화의 시선을 좇다가 그 끝에 팔을 겯지르고 앉아 있는 원재를 발견하고는, 왜, 암내라도 풍기고 싶냐? 흰소리를 지껄였다. 은화는 뚱뚱한 몸피를 느릿느릿 세우고, 이번에는 곁눈질이 아닌 당돌한 눈빛으로 원재를 내려다보더니 겨드랑이에 쟁반을 끼고 태연히 걸어나갔다. 아, 저년이. 라면을 시킨 남자는 분통이 터지는지 짧게 욕설을 내뱉고 옆자리 흉터에게 무언가 쏘삭거렸다. 두 사람이 원재를 바라보며 킬킬거렸다.

라면을 시킨 남자가 사발을 카드 테이블에 가져다 놓고 먹기 시작했다. 면발을 빨면서 눈으로는 카드패를, 한 손으로는 기술적으로 돈을 세가며 베팅을 했다. 원재도 게임을 지켜보면서 식사를 했다. 인터넷 게임싸이트에서나, 친구들과 놀러가서 심심풀이 포커를 해본 적은 있지만 큰판을 집중해서 본 적이 없는 원재에게 초록색 탁자에서 벌어지는 게임은 보통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표정의 사소한 변화가 중요한 포인트다. 원재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탁사장의 경우, 자신의 패를 얼굴에 다 그려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어지러이 파인 주름을 비집고 얼굴 전체에 화색이 비치면, 그가 든 패는 적어도 줄5 이상이었다. 원재는 이번 판에서 탁사장이 마운틴이나, 하다못해 빽줄은 잡았으리라 짐작했다. 좋은 패를 쥐었을 땐, 괜히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얼굴을 붉혔고, 애써 알쏭달쏭한 표정을 만들어 보여도 여전히 얼굴은 붉었다. 체크나 삥6을 불러 간지럼을 태우듯 낚시질을 시도할 때도 혈액순환 심하게 잘되는 그의 얼굴은 일관되게 붉었다. 표정 관리가 안되는 탁사장은 좋은 패를 들고도 판을 키울 수 없었다.

김사무장의 레이스야말로 만만치 않았다. 사무장 바로 어깨 뒤에 앉아 패를 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원재는 그가 베팅하는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레이스 패턴은 절대로 패턴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뻥카7를 쳐가며, 특유의 입담으로 사람들을 정신없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땐 같은 뻥카인데도 짐짓 심각한 척 장고(長考)에 들기도 했다. 손에 든 패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어떤 땐 능청스럽게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발길을 돌리려고오 바람 부는 데로 걸어도오 돌아써어지 않느은 것은 미련인가 아쒸이움인가 가씀에 이 가아씀에…… 김사무장의 레이스는 화려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김사무장이 초반, 큰판에서 물리고 나서 아직까지 본전도 되찾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재수가 없어서였다. 역시 포커 게임은 밑천이 반, 재수가 반이다. 고만고만한 꾼들의 실력이라야 그저 고만고만할 수밖에. 아무려나 김사무장은 속이야 타들어가거나 말거나, 시종일관 예의 느긋한 말투와 의뭉스런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학생, 참, 학생이 아닌가? 뭐라고 부르나? 뭐 아무튼, 은행 한번만 더 갔다 오지?”

원재가 얼추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는데 탁사장이 말했다. 그의 말에 라면국물을 찔끔거리던 사내가, 어, 나도! 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원재는 김사무장을 한번 쳐다보고, 두 사람의 카드 비밀번호를 수첩에 받아적고 일어섰다. 기집애같이 이쁜 게 밤일낮장두 모르게 생겼지? 자꾸 드나들다 보문 저절로 배워지잖어. 왜 걱정돼? 라면과 흉터가 자신을 두고 나누는 대화를 등으로 들으며 원재는 벽지가 발린 미닫이문을 열었다. 라면의 카드는 유효기간이 몇달 남지 않은 신용카드였다.

차에 시동을 거는데 개밥을 주러 나온 은화가 원재를 발견하고는 멈칫하고 놀랐다. 그녀는 개밥 그릇을 든 채 한 손을 허리춤에 얹고서 운전석에 앉은 원재를 빤히 노려보기 시작했다. 원재가 가볍게 목례를 했으나, 역시 반응이 없었다. 자동차가 언덕을 내려가 안 보일 때까지 은화는 그렇게 서 있었고, 원재는 룸미러로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한 여자네, 중얼거렸다.

원재가 돌아왔을 때, 김사무장은 휴대전화에 귀를 댄 채 입으로는 응응, 대답을 하면서 검지를 입술에 대고 좌중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탁사장은 화장실에라도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탁사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원재가 탁사장 몫의 돈봉투를 들어 보이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흉터가 투덜거렸다.

“몰라, 자네 나가고 바로 따라나가는 것 같더만. 그 노인네 이제 판에 앉히질 말든가 해야지 원. 징징대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밑천도 없이 들러붙어서 괜히 깽판이나 놓으려고 하고 말이야.”

원재가 돈봉투 하나를 라면에게 건네자, 속 시원하게 빨라서 좋구만, 덕분에 은화년 오늘 공쳤네, 라면이 옥니를 드러내고 흐흐흐 웃었다. 그는 방석 밑에 봉투를 집어넣고는 판돈에서 만원짜리 두장을 집어 원재에게 주었다. 원재가 망설이며 사무장 쪽을 보았지만 그는 통화에 열중한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아, 팔 떨어져, 라면이 지폐를 흔들며 말함과 동시에,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통화하던 김사무장이 탁자를 짚고 느닷없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트럼프 몇장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낡은 탁자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이 움푹 꺼졌다가 가까스로 제 모양을 찾았다. 모두의 시선이 김사무장에게 쏠렸다. 아, 글쎄 알았다잖어!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곁방으로 빨려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고, 라면은 여전히 멍청한 표정으로 지폐 두장을 꽃처럼 흔들고 있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탁사장의 돈봉투를 만지작거리던 원재가 반찬이 말라가고 있는 밥상 곁에 앉아 턱을 괴었다. 고추장으로 양념한 오리찜은 빨간 기름이 그릇 가장자리에 엉겨 굳어 있었다. 군데군데 눌어붙은 자국이 선명한 베니어판에 가느다란 쇠붙이 다리가 붙은 싸구려 상은 움푹 꺼져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팔꿈치가 축축해졌다. 팔 밑에 나박김치 국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던 것이다. 원재는 물수건으로 팔꿈치를 닦았다. 수건에 묻어 있던 반찬 찌꺼기 때문에 옷이 더 지저분해졌다. 12시 23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삐딱하게 걸린 벽시계는 여전히 12시 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깐 왜 죽은 시계인 줄 몰랐을까. 원재는 일어서서 기울어 있는 시계를 바로잡았다. 김사무장이 돌아오면 곧바로 사무실로 가야겠다고 원재는 생각했다. 방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은화였다. 탁사장도 김사무장도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행주와 쟁반을 내려놓으며 은화가 원재를 뻔히 내려다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친 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방 냅두고 자알 헌다, 오랜만에 젊은 놈 보니까 거기가 벌름벌름허냐? 딜러를 보기 위해 카드를 추려 셔플8하면서 라면이 공연스레 시비를 붙였다. 그 소리에 원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였지만 불편한 기분은 여전했다. 카드 한벌을 반으로 갈라 휘어잡고 기술적으로 섞는 소리가 다라라락, 경쾌하게 들렸다.

“혹시 사무장님 어디 계신지 아세요?”

그녀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시계 쪽을 가리켰다. 뒷산으로 올라갔다는 소린지, 화장실에 갔다는 소린지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더이상 묻지 않았다.

마당으로 나온 원재는 김사무장이 갔을 만한 곳이 어디쯤인가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사무장의 자동차는 여전히 주차장에 서 있었고, 딱히 그가 갈 만한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겨울이라 잎이 무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뒷산은 갈참나무와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꽤 우거져 보였다. 들어올 때 보았던 개가 다가와 원재의 신발 냄새를 맡았다. 피부병으로 털이 듬성듬성한데다 눈에는 윤기가 없어 귀여운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개였다. 원재는 발을 한번 탁, 바닥에 찍었다. 개가 움찔, 놀라더니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숨기고 눈치를 보며 옆걸음으로 달아났다. 개가 달아난 쪽, 집 외벽에 구형 소변기가 붙어 있었다. 잡다한 물건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벽에 변변한 칸막이도 없이 달려 있는 하얀 소변기가 돌올했다. 손님이 많을 때를 대비해 설치해놓은 듯했다. 날이 추워서인지, 변기를 보아서인지 원재는 갑작스런 요의를 느꼈다.

지퍼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데 오리탕집에 대고 오줌을 갈기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바로 그 순간, 산비탈에서 제법 센 바람이 불어왔다. 오줌줄기가 소변기 밖으로 길게 휘어졌다. 어어…… 원재가 소리치는데, 거기에 은화가 서 있었다. 원재를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오줌줄기가 그녀의 분홍색 슬리퍼와 양말을 조금 적시고 말았다. 놀란 것은 오히려 원재였고, 은화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

원재가 산 쪽으로 돌아서서 지퍼를 올리며 사과했지만 정작 자신은 변기가 있어서 소변을 본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아까 저기로 올라갔어.”

은화가 입을 열었다. 뚱뚱한 몸매와 대조적으로 매우 가느다란 미성(美聲)이었다. 잔뜩 부풀어 호빵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손이 뒷산을 향해 뻗어 있었다.

김사무장을 찾으러 언덕을 오르며 원재는 꼭뒤를 질린 듯 조급하고 불안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경사진 산길은 미끄러웠다. 몸을 앞으로 잔뜩 굽히고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가며 조금 걸어 올라가자, 고목나무 아래 웅크린 사람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사무장은 검정색 스웨터 차림으로 무슨 밧줄 같은 것을 붙잡고 있었다. 줄은 나뭇가지에 묶여 길게 늘어져 있었다. 토미섀넌맘: 이번달 생활비가 안 왔어. 자꾸 이러면 곤란해. 며칠 전 김사무장의 모니터에서 보았던 글자들이 방점을 찍은 채 순식간에 떠올랐다. 나일론줄을 보며, 원재는 불길한 예감의 정체를 확인했다. 김사무장이 나무에 걸린 밧줄을 얼굴 높이까지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사무장님!사무장님!그러시면 안됩니다.”

속짐작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으로 터져나왔다. 나일론줄에 열중해 있던 김사무장이 느릿느릿 뒤돌아보았다. 그 서슬에 밧줄이 당겨져 나뭇가지에서 눈고패가 떨어졌다. 사무장의 검은 스웨터 어깨 위로 하얀 눈이 쌓였다. 원재를 돌아보며 일어선 김사무장 앞에 뜻밖에도 탁사장이 앉아 있었다. 왜소한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원재에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김사무장의 얼굴에 당황한 것도 같고, 겸연쩍어하는 것도 같은 미묘한 표정이 일렁였다.

“넌 또 여긴, 뭐 헐라고 올라온겨? 내 이거만 풀러놓구 내려갈라 그랬는디…… 사람 참, 죽는 건 뭐, 아무나 허는 건 줄 아능가? 개 잡는 철도 아닌데 이게 여기 이러구 흔들려대니께 안 그래도 보통 비위짱 상하는 게 아녔는디. 이 사람이 밥지랄 허느라고 이런 게 다 눈에 띈 모양이여. 이 사람도 나맹키로 이느므 걸 끌러버릴라고 허다가 힘에 부쳤는가.”

김사무장은 혼잣말인지 아니면 탁사장과 원재에게 동시에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때 주저앉아 있던 탁사장이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섰다. 그는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지도 않은 채 원재가 올라온 오솔길을 따라 허정허정 내려가기 시작했다. 망연히 서 있던 김사무장이 말했다.

“저 사람, 공장이 어려웠든개벼. 어디에도 있을 자리가 없다고 허데.”

언덕바지에서 저만치 아래에‘사계절 오리탕’입간판이 굽어 보였다. 개집 옆 장독대로 빨간 고무장갑을 낀 은화가 뒤뚱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해는 눈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은화의 겨드랑이 사이에서 스테인리스 양푼이 이따금 반짝였다. 장독대 주변은 응달이 져 겨우내 내린 눈이 정강이 높이로 쌓여 있었다. 은화의 분홍색 플라스틱 슬리퍼가 눈 속에 파묻혔다 드러나곤 했다.

“내 자리라는 게, 그게 긍께…… 원래부터 없었든 건지, 기냥 눈 녹디끼 살살 없어져부렀는지 영 몰르겄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게…… 참, 그려…… 그치? 난 그냥…… 자네 용돈이나 벌어가라구…… 근데 것두 저애 자릴 뺏는 건 줄 내가 미처 몰랐네. 자네…… 이제부턴 나 찾으러 여기 올 거 읎어.”

김사무장이 쥐고 있던 나일론줄을 힘없이 놓았다. 원재가 멀리서 본 것과 달리 밧줄 끝에는 올가미가 없었다. 매듭 없는 밧줄이 이리저리 함부로 흩날렸다. 김사무장은 맞바람을 고스란히 가슴으로 받고 있었다. 맵찬 바람에 흘러내린 콧물이 인중에서 입술 주름으로 질금질금 배어들었다.

“눈이 오시는구만……”

눈을 가늘게 뜬 김사무장이 먼 데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의 말에, 깜빡 잊었다 떠올린 양, 아침부터 무겁게 내려앉았던 하늘이 진눈깨비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겨울의 유원지로 떼지어 몰려온 진눈깨비가 오리 깃털처럼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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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홍철(38, 보안업체 과장): 도박을 시작하게 된 계기요? 그때가 스물이었나, 스물하나였나, 군대 가기 전이었으니까. 외근하면서 커피 한잔 뽑아놓고 멍때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꽤 긴 게 이 직업이거든요. 선배가 시간 깨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겁니다. 저야 쌩큐죠. 순찰차 대시보드를 뒤적뒤적하더니 카드를 꺼내데요. 포커, 하이로우, 훌라, 전부 그 선배한테 배운 겁니다. 막말로 시간 깨기에 이만한 게 없기는 하데요. 당연히 그땐 짤짤이 수준이었죠. 하다 보니 뱃구레가 커지데요.
  2. 박관호(43, 주방가구 판매업): 한방에 손 턴 경험요? 에휴, 많다뿐입니까. 좀 오래된 얘긴데, 잊지 못할 판이 있기야 허지요. 한번은 삼봉으로 시작해서 깡스 잡나 했어요. 깡스요? 그건 원래 마작에서 쓰는 말인데 포카드를 난 그냥 그렇게 불러요. 하이튼, 내 앞에 와야 할 게 초구에 옆엣놈한테 가드라 이겁니다. 잡쳤다 싶었는데 못해도 집은 짓겄지 뭐, 그랬습니다. 워낙 손에 든 게 좋았으니까. 집이 뭐냐구요? 풀집이라 그러면 아실랑가요? 아니지 아니지, 거 풀하우스, 그걸 그냥 집이라구 그럽니다. 하이튼, 이상하게 그날은 그놈한테 계속 말렸습니다. 뭘 잡았는지 이놈이 마구 지르는데 총알이 모지란 상태라 엎을까 말까 하다가 어리바리 따라갔습니다. 히든에서 집이 지어지데요. 대번에 큰판이 됐지요. 근데 웬걸, 이놈이 사타째에 벌써 포카드를 잡은 거였습니다. 한마디로 좆된 거죠. 그 판에 잃은 돈이 전세 늘려갈 돈이었습니다. 한동안 집에 들어앉아 오관이나 떼면서 자중할라고 했는데 말이죠. 꾼들 핏줄 속이 개미굴이나 한가집니다. 필드 안 나가면 피가 스멀거려 뒈지겠는 걸 어쩝니까? 마약을 끊으면 딱 그렇다고들 하던데 아실랑가요?
  3. 심현준(34, 무직 혹은 소설가 지망생): 다이(die)는 게임에서의 기권을 의미해요. 서양에서는 폴드나 드롭이라 하지만 우리는 통상 다이라고 부르죠. 직설적이고도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어요. 제어드 피어싱의 『감각적 기호의 수사학』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언어는 스스로 자라고 번식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해요. 게임의 기호는 더욱 다채로워서 온갖 전문용어가 돌연 발생했다 허망하게 사라지곤 하는데요. 도박판에서 언어가 변주되는 것을 보면 문학이 따로 없단 생각이 들어요. 아, 저요? 백수가 무슨 돈이 있어요. 그냥 가끔 경험삼아 나와보는 수준이에요. 그래도 구경만 할 수는 없으니까 가끔 아버지 카드를 몰래 들고 나오는데, 잃지는 않아요.
  4. 이근영(50, 건축업): 난 레이스라는 말이 참 맘에 들어. 굉장히 에로틱한 느낌이 든단 말야. 아닌 게 아니라 판돈에 수표가 적당히 섞이게 되면 말이지, 아가씨들 입는, 왜 거 있잖아, 망사팬티 같은 레이스가 슬쩍슬쩍 보이는 것 같단 말이지.
    심현준(34, 무직 혹은 소설가 지망생): 저기요, 사장님. 그거 원래 발음은 레이즈(raise)인데요.
    이근영(50, 건축업): 어차피 양놈들 놀인데 발음 따위 신경 쓰게 생겼나? 자존심이 곧 애국심 아닌가?
  5. 권민선(26, 케이블TV도박채널 진행자): 선수들은 스트레이트를 줄이라 부릅니다. 카드 다섯장의 숫자가 줄 서듯 연속된 것이죠. 스트레이트 중에서 제일 높은 게 마운틴(10, J, Q, K, A)이며, 빽줄(A, 2, 3, 4, 5)은 마운틴 다음으로 높은 스트레이트입니다. 포커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스트레이트, 플러시, 풀하우스 같은, 이른바 족보를 외우셔야 합니다. 머리가 나빠서 이 많은 것을 다 외기가 어려우시다구요? 그럼 일단 직접 도박판에 뛰어들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아이 우윳값, 전셋돈, 등록금 등등을 잃다 보면 외우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머릿속에 각인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천장에서 ♠♦♥♣가 은총처럼 떨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6. 김홍철(38, 보안업체 과장): 저에게 포커를 가르쳐준 선배가 그럽디다. 베팅의 최고봉은‘체크’에 있다고. 판마다 다르지만‘메이드 체크’가 가능한 경우에 심리전에 능한 선수에게 무척 유리하거든요. 우리 탁사장님은요, 체크를 너무 좋아해. 판을 키우지도 못할 거면서. 그래놓고는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짓찧는데 아주 죽갔어요. 누가 탁사장님 좀 말려줬으면 좋겠다니까요.
  7. 권민선(26, 케이블TV도박채널 진행자): 잡은 패가 미미하지만 짐짓 대단한 것을 든 것처럼 상대에게 겁을 주고 허풍을 쳐가며 하는 베팅을 일컬어 뻥카라고 합니다. 어느 도박판이고, 어설프게 뻥카를 쳤다가는 바보로 매장당하기 십상이라는 것 기억하시구요. Good luck!
  8. 심현준(34, 무직 혹은 소설가 지망생): T. S. 그레이엄은 「미학적 셔플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카드 기술의 꽃은 스테키와 셔플이다. 카드 데크(deck) 52장이 테이블 위에서 동양 부채, 탄력있는 스프링, 장쾌한 폭포로 섞이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풍부해질 것이다.” 저는 절대로 돈을 딸 목적으로 판에 앉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예술성이 우선이지요. 「지존무상」 「정전자」 「도성」 「도신」 등은 셔플의 미학적 완성이 시각적으로 잘 형상화된 주옥같은 명화들인데요. 책 출처요? 지금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올해 트럼프북스에서 나온 베스트쎌러를 모르시다니. 이 양반, 참. 정 못 믿겠으면 당장 서점에 가보시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