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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오늘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임화의 삶과 문학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모래 위의 시간』 등이 있음 mwyom@ynu.ac.kr

* 이 글은 지난 10월 17일 개최된 임화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총론으로 발표된 발제문을 필자가 보완 정리한 것이다-편집자.

 

 

1

 

주지하듯이 이 제목은 저 엄혹하던 시절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지하 출판된 책에 붙여진 것이다. 대표저자는 소설가 황석영(黃晳暎)이었으나, 실은 당시 광주에서 문화운동에 종사하던 활동가들과의 공동작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제목은 세겹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는 군부권력에 의한 시민학살의 사실, 즉 무고한‘죽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죽음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다. 항쟁중에 벌어진 허다한 살상은 단순히 정치군부와 광주민중의 우발적 충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심층에 역사적으로 축적된‘시대의 어둠’, 즉 우리 현대사의 잠재된 모순을 표상한다. 셋째, 그 제목은 비극과 모순을‘넘어’역사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전망과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85년에 출간된 이 책은 1987년 6월에 일어날 사건의 예감을 이미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 제목의 이러한 복합적 암시성을 나는 여기서 임화(林和, 1908~53)의 삶과 문학을 반추하는 거울로 삼고자 한다.

다들 인정하는 대로 임화는 살아서 활동하는 동안에나 비명에 죽은 지 55년이 된 지금이나 우리 문학사상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는 불과 스물서너살의 젊은 나이에 카프(KAPF, 1925~35)의 서기장이 되어, 일제시대 유일의 문예단체라 할 이 조직을 사실상 끌고나갔다. 그는 카프를 대표하는 시인들 중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날카롭고 공격적인 수많은 평론의 집필로써 우리 근대문학비평을 건설한 주역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카프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카프의 간부답게 명확한 당파적 입장에서, 그리고 카프의 해산이 강제된 뒤에는 식민지 현실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해가면서 반대파와의 문학이론적 공방을 거듭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비평적 생애는 논쟁의 연속이었고, 그의 비평담론들은 그때그때의 실천적 필요를 반영하는 미학적 처방이었다. 1930년대 말경 정세가 더 악화되어 이론투쟁의 공간이 극도로 좁아지자 그는 현실과의 접촉면이 상대적으로 적은 역사적 연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가 구성한 신문학사론은 이후 모든 근대문학사 연구자들에게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계승 또는 극복의 대상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일제말 대부분의 문인들이 그러했듯 마지못해 친일어용단체에 이름을 걸고1 앙앙불락 세월을 보내던 임화의 인생에 8·15해방은 극적인 전환의 계기가 된다. 그는 놀랍게도 일제의 항복선언 불과 이틀 뒤인 8월 17일에 김남천(金南天)·이원조(李源朝)·이태준(李泰俊) 등과 함께‘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들었다. 카프 해산 이후 10년간 접었던 조직운동에 복귀한 것이다.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그는 누구보다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했고, 1947년 11월 월북하기까지 언제나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해방후 재개된 그의 운동노선과 활동방식은 카프시대와 비교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현실과 동떨어진 과격한 계급주의를 지양하고 광범한 계급연합에 기초한 민족문학-민족문화의 건설을 이념적 목표로 삼게 된 점이다. 이것은 임화의 노선에 대한 반공냉전시대의 음해성 비방과 달리 중간파를 포섭하기 위해 급조된 전술적 위장이 결코 아니다.2 그는 이미 1930년대 후반 카프운동의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박래품(舶來品) 계급주의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있었고, 신문학사 연구 및 출판사 학예사(學藝社)의 운영경험을 매개로 민족문화 전통의 근본적 중요성에 깊이 눈뜨고 있었던 것이다.3 물론 해방공간에서의 그의 활동은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고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전망이 약화됨에 따라 점점 더 정치화되고 급진화되어 초기의 포용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둘째, 해방후 임화의 문학-문화운동은 정치적 지도부와의 명백한 위계적 연결 속에서 전개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민족문학론은 한편으로는 방금 지적했듯이 카프식 계급주의의 반성을 통한 이론적 자기쇄신의 산물로 획득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익지도자 박헌영이 8월테제에서 제시한 이른바‘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단계’론의 윤곽 안에서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일제시대의 국내 좌파운동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조직 내부의 파벌주의 및 객관적 조건의 미성숙 등으로 인해 지리멸렬함을 면치 못했으나, 부문운동인 카프가 오히려 상대적 독자성을 발휘해-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국제조류에 끊임없이 우왕좌왕하면서도-그 나름의 지속성과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반해 해방후의 문화운동은 임화의 예에서 보듯이 현실정치의 격변과 갈등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러한 변화는 임화가 생산한 각종 문학텍스트의 성격변화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짐작건대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상황의 압박과 실천적 임무의 과다는 그에게 글쓰기를 위한 충분한 숙고와 사색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후 그의 글에는-시든 산문이든-급변하는 정국의 필요에 부응하는 시사성(時事性)과 정론성(政論性) 및 그 결과로서의 선전·선동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지난날에도 그가 관조적으로 현실을 바라보거나 한가하게 세월을 보낸 적은 없었다. 길지 않은 일생 동안 그가 소화해낸 활동량은 실로 경이에 값한다. 특히 1933년경부터 십여년 동안 그는, 때로는 당파성 과잉 때로는 논리적 섬세성 결핍의 혐의를 받을 만한 부분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서와 사색과 집필에 혼신의 열정을 쏟고 있음을 입증하는 다수의 평론을 써냈고, 이를 통해 그는 부단한 이론적 전진을 거듭했다. 그런 점에서 임화의 1930년대는‘한 비평가의 지적 성장과정’이 곧‘근대적 비평문학의 형성과정’에 해당하는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4

이에 비해 일제시대의 그의 시들은 지금 다시 읽어보면 발표 당시의 고평(高評)에 유보 없이 찬성하기 어렵다.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등 1929년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소위‘단편서사시’들이 카프시의 메마른 구호성을 넘어서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사적 인물들간의 관계설정이 작위적인데다가 화자의 격앙된 감상이 시종 작품을 압도하기 때문에 저자가 의도한 노동계급적 당파성의 시적 형상화는 표면적인 데 그치고 있다. 카프 해체 이후의 야심적인 작품들, 예컨대 「해협의 로맨티시즘」 「밤 갑판(甲板) 위」 「해상(海上)에서」 「현해탄」 「눈물의 해협」 「바다의 찬가」 등 바다를 주제로 한 연작 성격의 시들도 일제 파시즘의 중압에 맞서려는 시도로서는 감정의 사치가 과하다. 그렇기에 후일 김동석(金東錫)이 시집 『현해탄』(동광당 1938)의 쎈티멘털리즘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병든 지식인의 자의식이 낳은 비애”라고 일갈했던 것은 조금도 혹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5

그런데 이제 해방을 계기로, 특히 월북과 전쟁 발발을 계기로 그의 삶과 문학은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역사의 급류에 휘말리게 된다. 그 역사적 급류의 꼭짓점에서 만나는 것이 납득할 수 없는 죄목에 의한 그의 처형인데, 이‘죽음’을 결과한‘시대의 어둠’이 어떤 것인지 따져보지 않는다면 어둠을 넘어 광명을 꿈꾸는 일은 아예 체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2

 

남북한 문단의 인명록에서 자취없이 청산된 임화를 다시 진지한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인 것은 근대문학사 연구의 많은 분야에서 늘 선편(先鞭)을 행사한 김윤식(金允植) 교수이다. 그의 기념비적인 역저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한얼문고 1973)에 부록으로 수록된 「임화연구」는 반공냉전시대의 금기를 깨고 이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인물을 문학사 연구의 공식석상에 다시 호출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이 논문이 일으킨 이념사적 파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컨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6월항쟁과 민주화에 이어진 해금조치(1988)를 전후해 월북·재북 문인들의 작품이 독서시장에 쏟아져나오고 그들에 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함으로써 비로소 임화 연구는 본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김윤식의 『임화연구』(문학사상사 1989), 김용직의 『임화문학연구』(초판은 세계사 1991; 새미 1999) 등 중진학자들의 두툼한 저서를 비롯해 다수의 논문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각대학 국문과 석·박사 학위논문에서 임화가 가장 인기있는 주제의 하나로 다루어진 최근 20년간의 형편은 잘 알려진 바이다.

나는 수많은 임화 연구들 중에서 극히 일부밖에 접하지 못했다. 임화 자신의 텍스트도 산발적으로 읽었을 뿐, 아직 제대로 통독하지 못했다. 다행히 최근 『문학의 논리』에 수록되지 않은 평론들 상당수와 해방 전후의 시들 대부분을 읽을 기회를 만났고, 그 결과 임화에 관한 나 자신의 상투적 이해와 선입견을 포함해 우리 문단의 임화관이 아직 냉전시대의 잔재를 충분히 씻어내지 못했음을 알았다. 무엇보다 임화의 저작 중 많은 부분이 아직 접근하기 쉽지 않고 그의 행적도 불분명한 구석이 많아, 오해와 오류가 적지 않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물론 내가 읽어본 한에서 하는 말이지만, 임화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특정 장르, 특정 시기 또는 특정 주제에 시선이 고착됨으로써 임화의 문학세계 안에서 각각의 항목들이 맺고 있는 총체적 연관성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때로는 연구자 자신의 방법론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임화문학의 이해에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지 않았나 여겨지기도 한다. 가령 김윤식 교수의 경우에 그런 면이 느껴지는데, 그의 놀랄 만큼 방대한 실증적 조사와 꾸준한 작업에는 경의를 표해 마땅하지만, 그러나 임화의 생애와 작품을 일련의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의 복합체로 환원하는 자의적 해석방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가장 최근의 저서인 『임화』(한길사 2008)는 자신의 선행업적들을 대중적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라 짐작되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허다한 논리적 비약과 견강부회가 그의 소중한 실증적 노력에 손상을 입히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가 몇차례 시도한 백철(白鐵)과 임화의 비교연구도, 거의 고생물학자를 연상케 하는 집요한 자료탐사에는 경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일종의 역사왜곡이다. 백철과 임화, 두 사람은 나이가 동갑이고 성장환경과 교육여건이 정반대인데다가 백철의 문단데뷔 때부터 임화의 월북 때까지 십수년간 독특한 우정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호사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비교대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난세를 헤쳐가는 뛰어난 처세철학자의 능력을 제외하면 백철은 어느 면에서도 임화의 상대역이 아니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역사에 대한 헌신성, 시적 감수성과 비평적 장악력, 그 어느 것에서도 임화는 자신의 학벌 좋은 동갑내기에게 경쟁심을 느껴야 할 이유를 갖지 않았다. 오래전에 읽어서 전거를 대기는 어렵지만, 백철 자신의 회고록에 의하더라도 그는 일제말이나 해방 직후 시국이 위태로울 때마다 임화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그에게 의존했다. 반면에 임화는 백철이 일찌감치 카프 노선에서 이탈해 자유분방한 논설을 펼칠 때에도 매정하게 배척하기보다 비판적으로 포용했고, 일제말 매일신보 입사를 의논할 때에도 이를 용납했으며, 해방 직후 조선문학건설본부 결성 때에는 백철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고자 배려했다. 정지용(鄭芝溶)을 비롯한‘기교파’시인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던 임화가 왜 백철 같은 어중간한 인물들에게는 그토록 유화적이었는지,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불가사의하다.

유종호(柳宗鎬) 교수의 『다시 읽는 한국시인』 중 임화 부분은 소설로 치면 중편에 해당하는 분량의 독립적인 임화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논문은 텍스트에 대한 꼼꼼하고 예리한 감식력과 당대의 문학현실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에서 국문학계의 정형화된 논문체제를 타파하고 있다. 임화문학에 대해 전반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면서도 “좁은 서정시의 세계에서 사회현실에 기초한 서사충동을 추구하여 그 세계를 넓”힘으로써 “부족한 대로 20세기 한국시에 정치시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잊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임화 시의 미숙성을 단지 개인적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에게 가하는 한국 문학전통의 허약성과 문학사적 단계의 초기성(初期性)에 관한 문제로 인식의 지평을 넓힌 다음의 대목도 적절한 지적이다.

 

임화에게는 언어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이모저모로 습득하고 훈련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러한 기율의 자각적 부과를 부단히 촉구하는 전통, 즉 살아 있는 과거의 생산적인 압력도 없었다.6

 

그가 홀대하고 비방한 기교라는 것은 사실 한편의 시를 시로 책봉해주는 기본적 형태 요소였으며, 우리 현대시가 넓은 의미의 습작기에 있었던 20년대와 30년대에는 특히나 방법적으로 세련시킬 필요가 있는 기초적 국면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지엽적이며 말초적이라는 함의가 짙은 기교라는 말로 평가절하함으로써 임화는 시의 위상과 개개 시편의 성취도를 떨어뜨리는 불찰을 자초하였다.7

 

이런 통찰과 함께, 임화가 시인적 측면 이외에 “평론가, 문학사가, 문화정치 실천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했고 이들은 긴밀히 상호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 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나는 “임화는 무엇보다도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고 그의 다양한 활동 중 시간의 부식작용에 가장 의연할 수 있는 것은 시 분야라 생각”8한다고 언급한 대목에 공감하기 어렵다. 임화의 비평에 대한 그의 불신은 주로 『문학의 논리』에 수록된 평론들의 분석에 기초한 것인데, 가령 「카톨리시즘과 현대정신」의 한 대목을 예증으로 들고서 그는 “임화의 문장은 너무나 생경하고 투박하고 독백적이어서 섬세하고 엄정한 사고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자기 나름으로 치열하게 사고했다기보다는 그가 참조한 준거집단의 구호적 사고나 유행적 성향에 동조 내지는 추종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9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비판이 임화의 일부 평론이 아니라 그의 비평세계 전체를 겨냥한 것이라면, 그것은 당대비평의 일반적 수준에 비추어 불공정하고 임화 비평의 전체적 성취에 비추어 부당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구호적 사고나 유행적 성향’의 폐해에서 임화가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좌우를 가릴 것 없이 우리 문학사에 반복 감염을 일으킨 중증질환의 일부였다. 아무튼 시와 비평 모두에서 임화가 일본 좌파문학의 맹렬한 학습자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학습된 좌파이론의 핵심을 추종하면서도 다만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식민지 현실의 고유한 내적 필연성 안에서 논리화하고자 남다르게 고심했다. 이것이 일제시대의 신문학사론이고 해방후의 민족문학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임화의 다양한 활동들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시간의 부식작용’을 가장 잘 견뎌내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나는 유종호 교수와 견해가 좀 다르다. 시간의 불가사의한 마술이 빚을 결과에 대해서는 물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일제시대로 범위를 한정해서 말한다면 나는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우리 근대시의 발전에 임화의 시가 불가결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30년대 후반의 그의 평론활동과 신문학사 서술 및 해방공간의 민족문학론을 제거한다면 해당 분야에 치명적인 결락이 발생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3

 

8·15해방을 계기로 임화의 삶과 문학이 통제할 수 없는 역사의 격류 한가운데로 빠져들었음은 이미 지적한 바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넋을 잃고 어쩔 줄 모르던 8월 16일 새벽에 벌써 그는 조직의 재건에 착안해 주요 문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17일에는 그렇게 소집된 문인 30여명과 함께 논의 끝에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으며, 18일에는 미술·음악·연극 등 타 장르도 끌어들여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조직했다. 실로 전광석화 같은 놀라운 기민성이라 하겠는데, 내가 갖는 한가지 의문은 이 민첩한 행동이 임화·김남천·이원조 등 몇몇 주동자들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어떤 정치적 배후와 연계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임화는 박헌영이 해방정국에 등장한 이후 그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임화가 언제부터 박헌영의 정치적 입장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가령 임화가 해방후 처음 발표한 시 「9월 12일」(부제: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수령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이 시는 미군의 서울 진주 다음날(1945.9.10) 있었던 조선공산당 가두시위를 소재로 한 것이라 하는데, 첫연의‘위대한 수령’은 주지하는 대로 박헌영을 가리킨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수령의 연설을‘유행가처럼’이라고 묘사한 불손한 비유법뿐 아니라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개아미마냥 모여드는/천만의 사람”들과 시적 화자 사이에 있는 심리적 거리이다.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하는 군중의 대열 앞에서 그는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기보다,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鋪石마다 널린

서울 거리는

비에 젖어

 

라고 자책과 회오의 감상을 토로하는 것이다. 아마 이 자책은 그가 일제말 어용문학의 강압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한 사실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어떻든 「9월 12일」은 한편의 시로서는 해방공간에서의 민중적 열광과 소시민 지식인의 실존적 고뇌를 선명한 대립적 구도 안에서 뛰어나게 노래한 수작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임화는 분명한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된다. 그가 해방후 처음 발표한 논문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문화전선』 1945.11)는 제목부터가‘8월테제’로 통칭되는 박헌영의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8.20)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임화는 8월테제가 제시한 정세분석에 기초해, 여기에 자신의 문학사적 인식을 결합한 민족문학론과 문화운동론을 구성한 것이다. 그는 「인물소묘, 박헌영」(『신천지』 1946.2)이라는 글에서도, 박헌영이 조선민족 속에서 점하는 비중은 소련에서 스딸린이 점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찬양했다.10 그런데 박헌영은 은신해 있던 광주를 8월 17일에 출발해 18일에야 서울에 들어왔고, 도착 당일 저녁부터 경성콤그룹 간부회의를 개최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11 그렇다면 임화는 언제, 무슨 계기로 박헌영 진영에 가담한 것인가. 후일 유진오(兪鎭午)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나는 임〔林和〕을 다시 만나자 우선 그가 조선의 정치적 현단계를 어떤 성격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부터 물었다. 그것을 알아야 그가 구상하는 문화운동의 성격을 윤곽이나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임화는‘물론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지’하고 언하에 대답했다.12

 

여기서‘다시’만났다는 것은 8월 16일 새벽 임화가 집으로 찾아와 만난 이후 다시 만난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론을 제시한 8월테제 문건은 박헌영이 8월 20일경 처음 작성한 뒤 내용이 얼마간 추가되어 9월 20일 당 중앙위원회에서 채택 공표되었다고 한다.13 따라서 유진오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론을 임화는 9월 20일 이후 그리고 논문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 집필 이전, 다시 말하면 1945년 10월경에 접했을 것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인물이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 1905~49)이다.14 그는 학예사에서 고전문학 관련 편저들을 간행하면서 임화와 긴밀한 지적 협력관계를 맺은 것으로 믿어지는데, 그러던 중 1941년 1월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것이 드러나 검거되었다. 1943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이듬해 말경 좀더 결연한 반제투쟁을 위해 중국 옌안(延安)으로 망명, 거기서 해방을 맞았고, 얼마후 귀국길에 올라 그해 11월 서울에 도착했다. 곧바로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탄생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고, 12월 28일 박헌영이 신탁통치 문제를 김일성과 협의하기 위해 북으로 넘어갈 때 그를 수행했다.15 이로써 미루어본다면 김태준은 시종일관 임화보다 더 강인한 투사의 길을 걸으면서 일제시대에는 임화에게 민족문학론으로 가는 통로를 제시하는 고전교사(古典敎師)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해방후에는 그를 박헌영에게 연결시키는 정치적 중개자 노릇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임화의 이러한 정치적 선택이 그의 문학행위 속에 어떻게 구체화되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해방후 발표된 그의 글을 통독하지 못한 나로서는 극히 유보적인 소견을 말할 수 있을 뿐인데, 앞의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 및 「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161 「민족문학의 이념과 문학운동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17 그리고 그의 해방후 논문목록을 훑어본 바에 의하면 대략 다음의 몇가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의 모든 산문이 문화운동의 방향과 민족문학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바쳐져 있어, 좁은 의미의 문학평론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실제비평의 현장을 벗어나 점점 더 문화정책 이론가 내지 문화운동 조직가의 역할에 몰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그의 자유의지의 행사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역사의 필요가 그의 양심과 재능에 강제한 불가항력적 족쇄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이념과 문화운동론이 상위개념으로서의 정치노선에 무자각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해방정국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규정짓는 문제에서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단계론을 충실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외재적으로 주입된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시사한 바 있듯이 1930년대 후반에 이미 그는 근대문화로서의 시민문화가 서구에서와 달리 우리의 경우 아직 달성되지 않은 과제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고, 카프시대 프로문학론에 결여된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적 단계에 관한 그러한 주체적 인식임을 누차 반성하고 있다. 해방후 그의 민족문학론은 그러한 반성의 산물로서, 이제부터 수립될 민족문학은 특정한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라 계급연합에 기초한 진보적인 민족문학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일제시대 시·소설·비평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이론적·역사적 고찰을 수행하는 비평가 임화와 해방후 새로운 객관적 조건에 부응해 민족문학론을 모색하는 문화정책가 임화 사이에는 유기적인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임화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 분야는 시인 것 같다. 앞의 「9월 12일」이 행동의 노래가 아니라 행동 앞에서 갈등하는 고뇌의 노래라고 지적했지만, 이어서 발표한 「길」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시의 화자는 해방전사들을 추모하는 행사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전사를 찬양하고 기리지만, 그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공허감이다.

 

홀로 돌아가는

길가에 밤비는 차거워

걸음 멈추고 돌아보니

회관 불빛 멀리 스러지고

집집 문은 굳이 잠겨

길이 멀어 외로운가

생각하니 말 실행할

의무 무거워

空腹과 더불어 곤함이

등골에 사모친다

 

「9월 12일」에 그려진 것은 말하자면 군중 앞에서의 시인의 소외감이다. 이런 소외감에도 불구하고 노래·만세·깃발 등 시청각을 가득 채우는 군중적 이미지는 시에 역동적인 활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길」의 배경은 오직 암울하고 적막하다. 만약 이 시의 화자가 임화 자신이라면, 역사전환기의 임화 내면에 파고든 고독과 피로감, 임화의 영혼을 심층에서 가로지르는 자아의 분열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18

그러나 곧 그는 이러한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당대의 현실상황과 직결된 참여시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소련군의 진주를 환영하는 송시(頌詩) 「발자욱」을 시발로 조선청년단체총동맹에 바치는 「헌시(獻詩)」, 학병들의 귀환을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노래한 「학병 돌아오다」, 1946년 1월 19일 새벽의 싸움에서 전사한 영령 앞에 드리는 선동시 「초혼(招魂)」 등을 잇달아 발표한 것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그때그때 행사의 필요에 따라 제작된 목적시이고 행사시이다. 그러나 이런 계열의 임화 시들이 당장의 시사적(時事的) 목적에만 사용되고 버려질 일회용 소모품인 것은 아니다. 방금 거명한 작품들에도 임화 특유의 시적 재능이 잘 발휘되고 있지만, 특히 「3월 1일이 온다」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손을 들자」 「깃발을 내리자」 같은 작품들은 특정한 사건 또는 행사와의 연관성이라는 시대적 맥락을 넘어 보편적인 감동을 창조하고 있다. 독자들의 가슴을 흔드는 탁월한 선동성, 낭송의 호흡을 배려한 긴박한 언어적 리듬, 단순하면서도 직정적인 비유들, 자유와 해방에 대한 열렬한 갈망이라는 점에서 해방후 임화의 성공적인 참여시들은 하이네, 브레히트, 네루다의 정치시들이 그렇듯이 억압에 저항하는 인간정신의 발현으로서, 그리고 한국시의 영역에 새로운 문학적 표준을 개척한 뛰어난 선구(先驅)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4

 

알다시피 해방공간에서의 좌파들의 활동은 정판사 위폐사건(1946.5), 일부 좌익신문들에 대한 강제적 폐쇄조치와 박헌영 등 공산당 간부 체포령(1946.9.6), 남로당 결성(1946.11.23), 여운형 피습 사망(1947.7.19) 그리고 좌익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예컨대 1947년 8월 11일부터 나흘간 1천여명 검거) 등 미군정의 가중되는 탄압으로 점점 위축되어갔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임화는 해방 초기의 심리적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문학론에 기반한 논문들 및 미군정 지배하의 남한 현실을 규탄하고 이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다수의 시들을 연속적으로 발표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제 미군정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자 서울에서의 합법적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박헌영 자신이 1946년 9월말 서울을 떠나 10월 6일 평양에 도착해 근거지를 북으로 옮겼고, 이듬해 1월에는 대남사업을 위해 해주연락소를 설치했다. 이런저런 사건으로 신분이 노출된 남로당 간부들도 하나둘 월북했고, 그중 일부는 해주연락소에 차려진 인쇄소와 출판사에서 대남사업을 전개했다. 박승원·임화·이원조 등 10여명이 그들인데,19 그러나 임화가 월북해 해주연락소에 합류한 것은 좀 늦은 1947년 11월이다.20

이 무렵 임화의 정치적 입장은 어떠했던가. 두말할 것 없이 그는 남로당 문화선전부문의 간부로서 박헌영 노선의 추종자였다.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 창간호(1947.6.19)에 발표된 임화의 시 「박헌영 선생이시여,‘노력인민’이 나옵니다」가 거의 개인숭배적인 찬양으로 채워져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시를 쓰기 조금 전에 발표한 논문 「북조선의 민주건설과 문화예술의 위대한 발전」21에서 “인민의 정권만이 문화예술의 발전에 이러한 조건과 환경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문화인의 역할에 대하여 이야기한 다음과 같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위대한 영도자 김일성 장군의 말 가운데서 우리는 그 구체적인 증거를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지적하고, 이어서 김일성 자신의 말을 인용한 다음, “그렇습니다. 이 위대한 지도자의 말이야말로 북조선에만이 아니라 남조선에 그대로 적용되는 금과옥조입니다”라고 높이 공감을 표하고 있다. 또한, 시 「노력하자 투쟁하자 5·1절이다」22에도 “머리 위에 우러러 받든 우리의 수령이신/김일성 장군께서” 운운하는 구절이 들어 있다. 임화가 박헌영 대신에 김일성을 찬양한 것이 현실권력의 향배를 의식한 하나의 보신책이었는지 혹은 아직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균열이 생기기 전 국가의 최고지도자에게 바치는 의례적인 존경의 표시였는지, 그것은 나에게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박헌영에게 바쳐지든 김일성에게 바쳐지든 상투적인 수사로 장식된 개인숭배적 찬송시에서 발견되는 것은 참된 시정신의 증발로서의 어용문학의 탄생이다. 그것은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나 「깃발을 내리자」 같은 강렬한 비판적 참여시의 언어를 용도변경해 체제순응의 포장지로 사용한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6·25전쟁의 발발과 함께 임화는 그리던 서울로 내려왔고,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했다. 그러나 그가 서울 입성 후에 발표한 시 「서울」(『해방일보』 1950.7.24)에서 “이 자랑스럽고/영광스러운 서울이/이 아름답고 수려한/우리들의 수도가”라고 감격에 겨워 노래한 대목은 평양중심주의자들에게 무심하게 보이지 않았다.23 그에게는 운명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1952년 12월 15일 노동당 제5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김일성은 “당성을 강화하고, 자유주의와 종파주의의 잔재와 투쟁할” 것을 호소하면서 “만일 우리들이 종파주의의 잔재들과 투쟁하게 될 때 종파주의자는 결국 적의 스파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라고 지적한바, 이 발언에는 이미 내무성이 내사를 진행하던 남로당계에 대한 고발이 반영되고 있다고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교수는 해석한다.24 그리하여 1953년 1월부터 이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이원조, 설정식 등 십수명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심한 고문에 의해 당국이 원하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25 또다른 증언에는 1953년 3·1절 기념행사를 마치고 박승원의 집에 모인 이승엽·임화 일당의 대화가 심상치 않아, 이를 그 집 식모와 운전사가 고스란히 사회안전부에 보고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고도 한다.26 그러나 이 증언은 떠도는 소문을 옮긴 것이라 믿기 어려운데, 같은 증언자의 다음 글은 당시 남한 출신자들의 북한에서의 불안한 위치 및 남로당계 숙청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53년 7월말, 남한에서 월북한 이승엽, 조일명, 이강국, 임화, 박승원, 안영달, 조용복, 설정식 등이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 그러나 이승엽 사건의 조짐은 이미 훨씬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군에 있을 때인 1952년 12월, 당간부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상 검토작업이 시작되고,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 사이의 미묘한 갈등문제가 비판대상으로 오를 때, 이미 이승엽 등 남한 출신 당간부들이 체포되고 있었다. 그뒤 까마귀 날면 배 떨어진다고,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사단장에게 불려가 하루아침에 중위에서 중사로 강등되었다. (…) 나 역시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은 항상 짙게 깔려 있었다.27

 

임화 등 12명에 대한 재판은 휴전 일주일 뒤인 8월 3일부터 최고재판소 특별군사재판으로 열려, 내리 3일간 피고인 및 증인 신문이 진행되었다. 피고 전원이 기소사실을 인정했고, 증인도 기소장이 사실임을 증언했다. 넷째날인 8월 6일, 이승엽 이하 피고 전원은 자신들이 중대한 범죄를 범했기 때문에 어떤 형벌도 감수하겠다고 최후진술을 했다. 3시간의 휴정 뒤에 이승엽 등 10명에게 사형, 이원조에게 12년형을 선고하는 판결문이 낭독되었다.28 판결문에 기록된 임화의 죄상은 “1935년 일제경찰과 야합하여 카프를 해체했으며, 친일‘문인보국회’이사의 직위에 있으면서 소위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등 민족반역 행위를 감행하여왔으며, 8·15해방 후에는 미국 정탐기관의 간첩으로 가담하여 이승엽 도당들과의 연계 밑에 간첩행위를 감행했”29다는 것이었다.

이 재판이 하나의 정치재판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와다 하루끼 교수도 은연중 암시하고 있지만, 1952년 12월 15일자 김일성의 발언(“종파주의자는 결국 적의 스파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은 아직 내사단계인 남로당계 인물들에 대한 형벌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부연해 당 기관지 『근로자』 1953년 1월 25일자에 실린 한 논문은 제5차 전원회의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세계 혁명운동의 역사는 우리에게 종파분자들의 말로를 산 경험으로 보여주고 있다. 뜨로쯔끼, 부하린, 리꼬프, 지노비예프, 까메네프 들은 결국 적의 정탐으로 되어 인민의 심판을 받지 않았는가.”30 여기 거명된 여러 인물들 가운데, 예컨대 부하린은 레닌이 유서에 “당에 둘도 없는 최대의 이론가”라고 격찬한 헌신적인 혁명가이자 탁월한 경제학자였음에도 1938년 1월 재판에서‘반역죄와 간첩행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부하린이 처형되던 무렵,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던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趙明熙)도 활동지 하바롭스끄에서 다름아닌‘일본간첩’의 누명을 쓰고 총살되었음을 우리는 상기한다. 그러니까 이승엽·임화 등의 운명은 1952년 12월 15일의 시점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의 입에서 종파주의적 활동의 몇가지 사례가 발설되도록 강압하는 일만 남아 있는 셈이었는데, 체포에서 재판에 이르는 반년 남짓한 동안 그들은 종파주의자에서 민족반역자·미제간첩으로 격상되었다. 재판의 실상을 실감하기 위해서 검사와 피고 사이에 오간 문답을 한 대목 옮겨보자.

 

검사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피고가 해왔던 문학운동은 계급적 문학운동이었던가?

임화 아닙니다. 그것은 일제의 어용문학이었습니다.

검사 미군을 환영하는 사업을 조직한 일이 있는가?

임화 약 3백명의 문화인을 동원시켜 미군환영 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31

 

임화의 답변이 자포자기의 절망감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극도의 공포감 때문이었는가. 또는, 명백한 허위를 말함으로써 자신의 답변이 후일의 역사를 위한 통렬한 반전(反轉)의 증거, 즉 법정 전체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알리바이로 남겨지기를 기원했던 것인가. 고문으로 피폐해진 임화의 머릿속에서 그런 고도의 책략이 작동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떻든 비열한 행위들로 단죄된 임화의 참혹한 최후는 그의 치열한 삶에 합당한 예의바른 등가물이 아니다. 부하린은 1988년 고르바초프 시대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바로 그해 9월 30일 소련 공산당 맑스-레닌연구소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처형 직전 감옥에서 썼던 부하린의 편지는 54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노년에 이른 그의 부인 라리나 부하리나에게 전달되었다.32 그보다 먼저 1956년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는 조명희와 관련된 1938년 4월 15일자 선고를 파기하고 무혐의로 처리한 후 그를 복권시켰다. 그리고 1988년에는 따슈껜뜨의 알리쎄르 나웨이 문학박물관에‘조명희 기념실’이 만들어지고, 얼마 후에는 모스끄바와 레닌그라드(현 쌍뜨뻬쩨르부르끄) 등의 고려인사회에‘조명희 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이런 선례에 따라 김태준과 임화를 비롯한 수많은 비극적 죽음들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불가피한 어둠으로부터 구출되어 진정으로 해방된 민족사의 공간 안에 명예롭게 자리잡아야 한다. 어둠의 실체로서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업은 당연히 이런 일을 포함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전진이고, 그런 전진을 위해 애쓰는 것이 살아 있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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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화의 친일문제는 논쟁적인 주제의 하나이다. 1953년 8월의 북한 군사법정에서 그는, 1934년 카프 2차 검거사건 때 이미 자신이 일제에 영합할 마음을 품었고, 1939년에는 일본정신을 고취하는 일본어 논문을 발표해 본격적으로 친일에 나섰다고 진술하고 있다. 김윤식 『임화연구』, 문학사상사 1989, 699~700면 자료 참조. 그러나 1940년 전후 임화의 글과 행적을 검토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그의 친일에 부정적 내지 회의적이다. 예컨대 김용직(金容稷)은 임화가 일제식민지 당국의 국책(國策)에 카프시절처럼 단호하게 저항하지는 못했어도 결코 동조적이지 않았음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김용직 『임화문학연구』, 새미 1999, 115~28면.
  2. 다음과 같은 서술에도 그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는 듯하다: “임화의 이와같은 부르주아혁명단계이론과 그에 따른 문화통일전선론은 물론 계급문학운동의 위장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김용직, 같은 책 148면.
  3. 학예사에서 간행한 조선문고(朝鮮文庫) 제1권은 김태준(金台俊)의 해설논문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과 임화 자신의 「예언(例言)」 등이 권두에 붙은 『원본 춘향전(原本春香傳)』(초판 1939.1.10)이다. 1953년의 법정진술에 의하면, 임화는 2년간의 마산 요양 끝에 1937년 9월 상경해 다음달 금강기업 주인이던 최남주(崔南周)의 자금지원으로 학예사를 설립 운영했다. 발행인 최남주의 이름으로 된 「조선문고 간행의 辭」는 1938년 11월에 씌어졌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원본 춘향전』 제3판(1941.3.12) 뒤에 실린‘기간서목(旣刊書目)’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데,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학예사의 출판활동이 상당히 높은 수준과 활기를 보이고 있었다는 것, 임화가 김태준 등의 고전문학 연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해방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주력부대가 그때 이미 임화 주위에 은연중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응수(李應洙) 편주 『상해 김립시집(詳解金笠詩集)』, 김태준 교열 『청구영언(靑丘永言)』, 김태준 교주 『고려가사(高麗歌詞)』, 임화 편·김재욱(金在郁) 해제 『조선민요선』, 김태오(金泰午) 편 『조선전래동요선』, 신귀현(申龜鉉) 역주 『역대여류시가선』, 임화 편 『현대시인선집』, 김태준 저 『증보 조선소설사』, 김재철(金在喆) 저 『조선연극사』, 서인식(徐寅植) 평론집 『역사와 문화』, 김기림(金起林) 시집 『태양의 풍속』, 김남천 단편집, 이효석(李孝石) 단편집, 유진오(兪鎭午) 단편집, 이기영(李箕永) 단편집, 박태원(朴泰遠) 단편집, 채만식(蔡萬植) 단편집, 안회남(安懷南) 단편집, 이태준 단편집, 김태준 편 『이조가사(李朝歌詞)』. 이 중 마지막 책은 인쇄중이라고 되어 있어 미간(未刊)임을 알 수 있다.
  4. 임화의 비평세계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이 글의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최근 임화전집을 준비중인 소명출판의 호의로 신두원·하정일 두 분이 꼼꼼하게 교열한 『문학의 논리』(학예사 1940) 미수록 평론들을 미리 훑어본 바로는, 임화는 우리 근대문예비평의 건설자라는 호칭을 들어 마땅한 존재이다. 그는 창작의 현장에서 수다한 월평·연평 들을 썼을 뿐 아니라 이런 실제비평의 논리적 일반화로서 세태소설론·본격소설론·생산소설론·리얼리즘론 등을 구성했고, 카프시대 문학의 관념성과 공식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인직(李人稙)·이광수(李光洙) 등 신문학 초기 작가들의 역사성을 재평가하고 이를 「신인론(新人論)」(『비판』 1939.1~2), 「소설과 신세대의 성격」(『조선일보』 1939.6.9~7.2), 「시단(詩壇)의 신세대」(『조선일보』 1939.8.18~26) 등에서 주목한 신세대문학의 현재성과 연결함으로써 신문학사의 줄기를 설계할 수 있었다. 그가 신문학사의 방법론으로 제출한 소위 이식문학론(移植文學論)은 얼마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신승엽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창작과비평』 1991년 가을호)과 임규찬 「임화‘신문학사’에 대한 연구 1, 2」(『문학과 논리』 및 『한길문학』 1991)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잡지문화론」(『비판』 1938.5), 「문학과 저널리즘의 교섭」(『사해공론』 1938.6), 「문화기업론」(『청색지』 1938.6), 「문예잡지론」(『조선문학』 1939.4~6), 「신문화(新文化)와 신문(新聞)」(『조광』 1940.10) 같은 논문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권성우 『횡단과 경계』(소명출판 2008)의 제1장 「문학미디어 비판과 문화산업에 대한 성찰」이 적절하게 정리하고 있고, 「언어와 문학」 「조선어와 위기하의 조선문학」 「언어의 마술성」 「언어의 현실성」 「예술적 인식표현의 수단으로서의 언어」 「언어와 문화의 교류」 「문학어로서의 조선어」 등 1934년부터 39년까지 발표된 일련의 논문에 대해서는, 김재용 「프로문학 시절의 임화와 문학어로서의 민족어」(임화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발제문, 2008.10.17)가 일제하 조선어학회의 어문정리사업과 연관지어 검토하고 있다. 「비평의 객관성 문제」(『동아일보』 1933.11.25~12.2), 「조선적 비평의 정신」(『조선중앙일보』 1935.6.25~30), 「의도와 작품의 낙차와 비평」(『비판』 1938.4), 「비평의 시대」(『비판』 1938.10), 「비평의 고도(高度)」(『조선문학』 1939.1), 「최근 10년간 문예비평의 주조와 변천」(『비판』 1939.5~6), 「창조적 비평」(『인문평론』 1940.10) 그리고 「비평의 재건」(『독립신보』 1946.5.1) 등의 논문으로 지속된 임화 자신의 비평가적 자의식과 당대비평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좀더 본격적으로 고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5. 김동석 「시와 행동—임화론」, 임화 시집 『현해탄』, 기민사 1986. 김동석의 『현해탄』 비판에 먼저 주목한 것은 유종호(柳宗鎬) 교수이다. 『다시 읽는 한국시인』, 문학동네 2002, 100~101면.
  6. 유종호 『다시 읽는 한국시인』 42면.
  7. 같은 책 95면.
  8. 같은 책 20면.
  9. 같은 책 19면.
  10.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282면.
  11. 같은 책 207~10면.
  12. 유진오 「편편야화(片片夜話)」, 『동아일보』 1974.5.4, 김윤식 『임화』 149면에서 재인용.
  13. 임경석, 앞의 책 214면, 219면.
  14. 조선공산당의 영향하에 임화 주도의 조선문학가동맹이 탄생하고 이 과정에서 김태준이 일정한 역할을 한 데 주목한 글로는, 김용직, 앞의 책 145~61면 참조. 뒤늦게 구해본 김용직 『김태준 평전』(일지사 2007) 287면, 298면에 따르면, 김태준은 1940년 5월경 경성콤그룹에 가담, 이현상·김삼룡·박헌영 등을 차례로 만나 조직활동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15. 김태준 지음, 정해렴 편역 『김태준문학사론선집』, 현대실학사 1997, 501~503면 참조.
  16. 1946년 2월 8~9일에 개최된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의 기조연설문. 조선문학가동맹이 발행한 『건설기의 조선문학』(1946.6)에 수록됨.
  17. 1946년 7월 창간된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 제3호(1947.4)에 수록됨.
  18. 그런 점에서 「길」은 시인으로서의 임화의 출발을 알리는 20년 전의 작품 「무엇 찾니」(『매일신보』 1926.4.16)의 고독한 방황을 놀랍도록 유사하게 반복한다. 「무엇 찾니」의 한 대목을 보자. “죽은 듯한 밤은 땅과 하늘에/가만히 덮였고/음울한 대기는 갈수록 컴컴한/저 하늘 끝에서 땅 위를 헤매는데(…) 남모르게 홀로 뛰는 혼령아/이 어둔 비오는 밤에도 쉬지 않고 날뛰며/무엇을 너는 찾느냐?”
  19. 임경석, 앞의 책 393면. 전직 북한 관리의 증언을 인용한 이 책은 1947년초 해주연락소에서 활동한 인물들 명단에 김태준을 포함하고 있으나, 김용직의 『김태준 평전』에는 이에 관한 언급이 없다. 어떻든 김태준은 1949년 1월 이후 무장투쟁노선을 택한 남로당에서 최고간부의 한 사람으로 유격대 지원사업을 지휘하다가 그해 7월 26일 서울시 경찰국 형사에게 체포되어 9월 27일부터 4일간 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을 받은 끝에 11월 처형당했다. 『김태준 평전』 588~92면 참조. 이렇게 보면 김태준과 임화는 극히 대조적인 경로를 통해 남과 북에서 각각 동일한 귀결점에 이른 셈인데, 일제하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며 간고한 투쟁을 이어오던 수많은 투사들이 해방된 조국의 남과 북에서 불의의 최후를 맞은 것은 가슴아픈 역설이다.
  20. 1953년의 법정진술에서 임화는 “1947년 11월 20일 이승엽의 지시에 따라 입북해 해주 제일인쇄소에서 일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윤식, 앞의 책 701면 참조. 여기서 이승엽의 지시에 따랐다는 말은 꼭 믿지 않아도 되겠지만 11월 20일이라는 날짜는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21. 『문학평론』 1947년 4월호(제3호).
  22. 『노동신문』 1950.5.2, 김재용 편 『임화문학예술전집』 제1권, 소명출판 2008.
  23. 김용직 『임화문학연구』 218면에 그 점이 날카롭게 암시되어 있다.
  24. 와다 하루끼 지음, 서동만 옮김 『한국전쟁』, 창비 1999, 278~79면.
  25. 북한 내무성 부상(副相)이었던 강상호(姜尙昊)의 회고록 「내가 치른 북한 숙청」, 『중앙일보』 1993.4.6, 6.28; 와다 하루끼, 앞의 책 280~81면 참조.
  26. 강원도 명주군 출신 남로당원으로 6·25 때 인민군 군관으로 전쟁을 겪고 후에 남파간첩으로 체포되었던 장기수 출신 김진계의 증언. 김진계 「박헌영 간첩사건의 새로운 전모」, 『말』 1994년 11월호;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 333~36면 참조.
  27. 김진계 구술·기록, 김응교 보고문학 『조국』 상권, 현장문학사 1990, 220면.
  28. 와다 하루끼, 앞의 책 320~21면 참조.
  29. 김윤식, 앞의 책 717면 참조.
  30. 와다 하루끼, 앞의 책 281면에서 재인용.
  31. 김윤식, 앞의 책 702~703면 참조.
  32. 스미느로프 편, 김명호 옮김 『부하린』, 소화 2003, 9면, 375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