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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제15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속물들의 윤리학

정이현론

 

이경진 李京眞

1982년생.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snowbonbon@hanmail.net

 

 

1. 속물성에 대한 단상

 

오늘의 한국문단에서 정이현(鄭梨賢)만큼 우리 사회의 속물성을 신랄하게 묘파하는 작가를 찾아볼 수 있을까? 정이현은‘낭만적 사랑’에 숨겨진 속물성을 적나라하게 들춰낸 작품 「낭만적 사랑과 사회」(『낭만적 사랑과 사회』, 문학과지성사 2003)를 필두로, 우리 사회의 속물적 논리를 영악하게 이용하는 당차고‘쿨’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작품들로 문단에 신선하고도 불온한 바람을 불어넣은 바 있다. 두번째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문학과지성사 2007)에서도 물신적 세계에 환멸을 느끼지만 속물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순적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면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확장하고 있다. 정이현 소설이 선사하는 즐거움은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부유하는 담론들의 속물적 이면을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게 짚어내는 솜씨에 연유한다. 다음은 「위험한 독신녀」(『오늘의 거짓말』)에 나오는 대목으로, 신도시 사십평형대 아파트로 이사 온 친구의 집들이에 모인 여자들의 대화이다.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거니. 기본만 시켜도 가계 경제가 휘청한다니까.” 그 집의 안주인이며 반도체회사 중견 간부의 와이프가 엄살을 떨자, 중앙일간지 정치부 차장의 와이프가 심드렁하게 받았다. (…) “다 부모의 저속한 욕심일 뿐이야.” 똑 부러지게 의사를 표명하고 나선 것은 한국에서 제일 큰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의 와이프였다. 전업주부인 다른 동창들과 달리 그녀는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하는 환경운동가인 동시에 모교의 전임강사로 일하고 있었다.“나는 우리 슬기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반듯하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잖아.” 교육방송 프로그램의 출연자 같은 그녀의 말에 좌중의 여자들이 제각각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변호사와 환경운동가 부부가 그 외동딸의 조기 유학을 위해 보스턴의 유명한 사립초등학교와 옥스포드의 유서 깊은 귀족학교를 놓고 저울질 중이라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248면)

 

작가는 이 여자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언급되는 것은 남편들의 직업과 직급이며, 이‘누구누구의 와이프’라는 호칭이 친구들간의 미묘한 위계질서를 슬쩍 드러낸다. 각자의 발언은 그들의 현실을 교묘하게 감추면서도 드러낸다. 인물들의 속물성은 친구들간의 과시와 무시가 조성하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와 그 뒤에 곧바로 따라나오는 작가의 코멘트가 이루는 묘한 불협화음으로 인해 극대화된다. 이렇게 정이현은 동시대의 입담 속에 깃든 무수한 아이러니를 정확하게 재현할 줄 아는 작가다.

또한 속물성이 근본적으로 계층들간의 차이를 생산하고 공고화하는‘구별짓기’라는 아비뛰스(habitus)에서 나온 것이라면, 정이현만큼 대한민국에서 변별적 기호로‘핫’하게 떠오르는‘머스트 해브’(must have) 아이템들을 민감하게 포착하여 자기 작품의 미장쎈으로 적절하게 배치하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예컨대 2003년에 발표된 작품 「트렁크」(『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외국계 화장품회사의 9년차 차장인‘그녀’는 “막스 마라의 연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반듯한 커리어우먼으로 보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큼지막한 에르메스 가죽백”(42면)을 들며 “안드레아 보첼리의 꼰 떼 빠르띠로”(47면)가 흘러나오는 새로 뽑은 “2002년형 진주색 EF쏘나타 골드”(42면)를 운전하는 여자다.‘값비싼 외제 가방’이라든가‘우아한 클래식 음악’같은 추상적 설명 대신 곧바로 상품명을 대는 이러한 방식은 같은 지시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부(富)’라는 기의를 성공적으로 전달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이 기표들의 환영적 효과를 무리없이 이해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속물적 세계의 일원임을 재확인받는 것이다. 독자는 정이현의 작품에 배치된 수많은 코드들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이 지시체계의 외부에 대한 상상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정이현의 작품을 읽을 때 느끼는 재미이자 씁쓸함일 것이다.

사실 문학에서‘속물성’이라는 주제만큼 독서의 재미를 배가시켜줄 뿐 아니라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방편으로 요긴한 소재도 드물 것이다. 예컨대 제인 오스틴(J. Austen) 소설의 변함없는 인기 요인은 사실 로맨스에 있다기보다는 영국 18세기 시골 귀족들의 속물적 사고방식에 대한 재치있는 풍자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발자끄(Balzac)에게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영광을 선사했던 것도 부르주아 속물근성에 대한 집요한 묘사였다. 그만큼 속물성은 흔하디흔한 소재인 듯하지만, 동시대의 삶에 밀착된 관찰과 탐구가 뒷받침될 때는 사회비판적 잠재력을 얻게 된다. 속물성의 내용이 부나 성공, 명예 등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현실논리라고는 하지만, 그 외피는 시대에 따라 숨가쁘게 변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앞서 집들이에 모인 여성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더이상 강남 8학군에 있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보스턴의 유명한 사립학교나 옥스포드의 유서 깊은 귀족학교” 정도는 돼야 독자들의 시대감각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이현의 소설들을 2000년대 부유한 중산층에 대한 훌륭한 세태소설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정이현의 작품에서 속물성은 이전의 한국문학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위상을 차지하는 듯하다. 이전의 한국문학에서도 속물성은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였다. 작가마다 조금씩 그 양상이 다르겠지만 거칠게나마 두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속물성이 예술가적 자의식과 대치되는 것으로, 주로 60년대 김수영(金洙暎)이나 김승옥(金承鈺)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속물성은 병적인 자기혐오와 이를 극복함으로써 추구되는 예술가성이라는 변증법적 자기성찰의 중요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로 존재론적인 성찰의 성격을 띤다. 다른 하나는 속물성을 허위의식의 무비판적 답습으로 보고 이를 비판하려는 문학이다.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두번째 범주에 들어가겠지만,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으면서 이러한 문학세계를 추구한 대표적인 작가로 박완서(朴婉緖)와 은희경(殷熙耕)을 꼽을 수 있다. 박완서는 근 40년간 급속도로 변화하는 우리 사회의 세태풍속을 묘사하면서 주로 여성들을 옥죄는 이데올로기들, 즉 결혼이나 가정, 이웃생활 등에서 발견되는 속물근성을 꾸준히 비판해왔으며, 은희경은 대표적으로 『마이너리그』(창비 2001)에서 386세대 남성들의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의 기원을 유머러스하지만 날선 언어로 헤집은 바 있다.

정이현의 작품들이 두번째 범주에 들어갈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이현의 인물들이 지식인이거나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고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이현 소설에서 속물성이 예술성이나 도덕성과 딱히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이현의 인물들은 속물적 세계를 경멸하면서 독야청청 순수와 진정성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 타인들의 속물성을 비판할 만큼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지도 못하다. 이것은 아마도 정이현이 파악한 작가의 위상 변화, 즉 작가는 더이상‘신’도 아니고‘천재’도 아니며 단지 한 시대의‘보고자’일 뿐이라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작가에게 더이상 예술성과 도덕성의 우월한 고지가 허락되지 않는‘저자의 죽음’의 시대에 정이현은 작가란 이제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 즉, 작가는 독자를 계몽하거나 어쭙잖게 판관의 위치에 서려고 하기보다는 독자의 눈높이에서 현실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90년대 일본문학풍의 소설들에서 유행했던 개성 넘치는, 자의식 강하고 기묘한 매력이 있는 여성들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속물적이며 어딘가 도식적인 면까지 있는 여성들이다. 90년대에 결혼에 코웃음 치고 일탈을 일삼던 여성들이 이제는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에 집착하는 여성들로 다시‘퇴보’한 것이다. 결혼정보회사가 번창일로를 걷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삶의 공감대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 어쩌면 한국문학의 빈곤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여성작가의 소설에서도 젊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직장생활, 성생활, 소비욕, 우정에 대한 리얼한 묘사보다는 운동권의 후일담 소설이나 결혼생활에서의 불륜, 권태 또는 여러 병리학적 징후들에 관한 작품 등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결핍을 보상하려는 듯이 최근 한국문학계에서도‘칙릿’(chick lit)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다수 출간되었고,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한국‘칙릿’장르의 선두작으로 주목받은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문학과지성사 2006)가 구가한 인기도 이러한 결핍의 보상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정이현이 활용하는 화려한 속물적 세계의 미장쎈은‘칙릿’의 그것과 유사한 듯하지만, 그 효과의 측면에서는 분명 변별점이 엿보인다. 이러한 변별점은 정이현이 제시하는 주체의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분석은 곧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의 윤리나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이어진다.

 

 

2. 이데올로기의 ‘착한 주체’들

 

정이현이 그리는 세계는 결혼정보회사의 세계이다. 모든 것이 점수로 계산되고 등급으로 매겨지며, 같은 등급의 사람들끼리만‘매칭’될 수 있다. 그 결과가 나쁘면 같은 등급의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 만남을 반복한다. 「타인의 고독」(『오늘의 거짓말』)에서 이혼남인‘나’는 재혼전문 결혼정보회사의 분석에 의해 B+등급을 받는다.‘나’라는 한 인간이 지닌 잠재성이 결혼정보회사에 의해 잔인하리만치 분해되었는데도 그는 혐오나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이곳은‘기브 앤 테이크’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니까”(34면)라며 냉소적 태도를 보일 뿐이다. 문제는 정이현의 작품이 이 냉정한 교환논리의 외부를 쉽사리 상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혼자들을 점수매겨 계급에 배속시키는 씨스템은 결혼정보회사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유리는 친구 혜미의 남자친구 이름은 모르지만 그가 서울 위성도시 출신, 중학교 평교사인 아버지, 중류권 대학의 경영학과 학생이라는 조건을 갖췄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리지널 샤넬 백”을 메고 “병아리색 뉴비틀”(24면)을 타고 다니는 혜미가 이런 평범한 조건의 남자와 만나서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에 진정으로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유리는 혜미와 달리 자신이 진짜 명품가방을 구입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혼자 힘으로 척박한 세상과 맞서기로 결연히 의지를 다진다. 그리고 그 방식은 부유한 남자와의 결혼뿐이라고 믿는다. 이를 위해 그녀가 내놓을 수 있는 패는‘순결’뿐(아마도 완전무결한 첫날밤을 치르기 위한 십계명의 완벽한 실천을 포함해서)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그녀가 자신의 순결을 가지고‘베팅’했을 때 돌아오는 것은 사랑이나 결혼이 아니라 “모노그램 캔버스 라인의 진짜 루이뷔똥 백”(34면)뿐이다. 그녀의‘진짜’사랑은‘진짜’명품가방으로 교환된 것이다. 이 세계의 인간관계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교환의 게임으로 운영된다.

정이현의 작품에서 여성들은 마치 동화 속 여주인공처럼 그 세계 바깥으로는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속물적 논리를 답습하고 만다. 마치 결정론적 세계 안에서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믿는 주체들처럼 말이다. 알뛰쎄르(L. Althusser)라면 이들을 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주체라고 불렀을 것이다. 맑스와 알뛰쎄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주체가 그 작동에 무지할 때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2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유리는 바로 무지한 주체 또는 알뛰쎄르식으로 말하면 이데올로기의 작동에 저항하는‘나쁜 주체’가 아니라, 주어진 이데올로기를‘자기 의지’로 굳건하게 실천하는‘착한 주체’이다. 그렇기에 한국문학에서 유리는 한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낯설고 무서운 존재다. 90년대 여성문학이 이룩해놓은 똑똑하고 독립적이며 자기성찰적인 여성인물들의 자기탐구가‘유리’라는 인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공지영(孔枝泳)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푸른숲 1993)에서 똑똑한 대졸 여성들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얼마나 처절하게 싸워왔던가. 비록 그 투쟁방식이 성공적인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그 속에는 지난한 자기와의 싸움과 진지한 자기성찰이 묵직하게 놓여 있었다. 또 얼마나 많은 여성작가들이-은희경, 전경린, 배수아, 하성란, 조경란 등-가부장적이고 속물적인 사회의 금기들을 공격하거나 조롱하는 일탈적이고 도발적인 여성인물들을 탄생시켰던가. 그러나 정이현의‘유리’는 이러한 페미니즘의 세례를 거부하는 낯설고 위험한 존재다. 문학의 윤리가 있다면, 유리는 이를 배반하는‘나쁜 주체’인 것이다. 유리에게는 자기반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녀가 속한 세계가 그것을 허여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이 게임의 승자가 되는 길뿐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이같은 이데올로기의‘윤리’를 실천하는 여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트렁크」에서 성공한 커리어우먼인‘그녀’는 “커피 심부름 때문에 회사생활이 힘들다고 징징대는 여자들”을 경멸하며, 커리어를 위해서 상사들을 만나고 이용할 줄 아는 “조직생활의 마인드”(44면)가 확실한 여자다. 「소녀시대」의‘나’역시 아버지가 저지른 혼외임신을 수습하기 위해 부모의 돈을 뜯어내고, 누드사진을 찍어 활동비를 마련하는 등‘영악하게’어른들의 현실논리를 그대로 활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여성인물들은 처벌받거나 비난받지 않는다. 진정한 인간관계나 소통의 가능성이 폐기된 삶이 처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무참하게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유기해버린다. 따라서 「트렁크」의‘그녀’가 자신의 차 트렁크에 죽은 소녀의 시체를 싣고 다니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함보다는 쓸쓸함을 자아낸다.‘그녀’의 차 트렁크에 유기된 것은 어쩌면 연민을 일으킬 정도로 무지하고 순수했던 소녀시절의 그 모든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성스럽게 꾸민 다이어리에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같은 싯구를 적어놓았을”(46면)‘그녀’의 풋풋했던 스무살 시절, 그러나 결코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스무살 무렵의 환부를 그 죽은 소녀가 뜻하지 않게 건드린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억눌러왔던 그 과거로의 회귀를 은닉하기 위해서 이를 저지하려던 상사를 살해하기까지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죄책감이나 후회도 없다. “이 세상 환난 중에 나 용감히 늘 승리하리라”(60면)는 찬송가를 부르는 그녀에게는‘아직 갈 길이 멀었던 것이다.’

반면 「익명의 당신에게」(『오늘의 거짓말』)에서 임상병리사 연희는‘누군가와 온전한 소통’을 나누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연희가 생각하기에, 그 소통의 조건은 문화적 취향의 공유여야 한다. 연희는 자신이 상현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얼마 뒤면 안과 전문의가 되리라는 세속적 이유 때문만”(296면)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자신과‘왕가위 감독’이라는 취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애써 정당화한다. 문화적 취향이 사회경제적 계급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주요한 기제라는 것은 부르디외(P. Bourdieu)의 유명한 테제이다. 아마도‘왕가위’라는 문화적 기호가 상현처럼 세련된 취향의 부유한 남자를 낚을 수 있는‘미끼’로‘작동’할 수 있음을 이데올로기의 착한 주체 연희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것은, 계급이 취향을 생성하는 것이지 취향만으로 계급을 바꿀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연희는 상현과의 데이트에서 온전한 소통은커녕 어떠한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다. 연희가 굵은 비를 맞으며 질척한 몸으로 상현을 기다리고 있으면, 상현은 쾌적한 차 안에서 “비 참 예쁘게 오네”라고 감탄하며‘요요마와 삐아졸라의 리베르탱고’를 듣고 있는 식이다. 연희는 단박에 느껴지는 상현과의 계급차에‘예상치 못했던 모멸감’을 느낀다. 또한 상현은 “미각에 집착하는 남자”답게 자기가 먹고 싶은 복국을 먹기 위해, 점심도 못 먹은 연희를 오후 다섯시까지 굶주리게 만든다.

 

우리 그냥 저기서 대충 먹으면 안돼요? 연희가 가리킨 옆 식당은 입간판에 돼지갈비, 해장국, 낙지볶음이라는 글자들이 계통 없이 나열된 곳이었다. 상현이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시골 동네 의원이냐. 소아과, 내과, 산부인과 아주 골고루 늘어놨네. 흐흐, 저기서 먹자니, 연희씨, 지금 농담한 거지?” 연희는 힘없이 답했다. “그래요. 재미없는 농담이었어요.”(299면)

 

누군가와 온전한 소통을 나누기 위한 조건이 문화적 취향의 공유여야 한다는 연희의 신조는 잔인하게 입증된다. 그러나 연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자신이 상현과 취향이나 계급차로 인해 온전히 소통할 수 없다는 의혹을 애써 잠재운다. 그러던 중 상현은 종합병원 항문외과에서 일어난 심야 성추행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돌연 태도를 바꾸어 연희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린다. 사실 연희는 상현이 그 사건의 범인임을 짐작하고 있으며 그 범행을 입증할 중요한 단서도 갖고 있다. 그러나 연희는 상현을 고발하는 대신 이를 하나의 기회로 여긴다. “남자가 괴로워할 때는 아무것도 캐묻지 말고 무조건 위로해주어라, 그것이 현명한 연인의 자세일지니.” 연희는 “불멸의 사랑을 위한 이브의 비밀노트”라는 기사를 떠올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제 안의 부적절한 욕망과 대면”(312~13면)하기로 한다. 부적절한 욕망, 사랑의 부서지기 쉬운 이데올로기를 스스로의 힘으로 견고하게 만들어보려는 욕망. 그녀는 진짜‘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일대의 거짓말을 꾸며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연희는 상현에게 구원의 여인이 된다. 비록 그 방식이 심부름쎈터에서 성추행 사건 피해자 부부에 대한 지저분한 뒷조사로 반격을 취해보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정이현의‘똑똑한’인물들은 진정한 소통이란 것이 따로 존재하리라 믿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에 순종할 뿐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 완성하고자 한다. 정이현의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회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유토피아’적이다. 그러나 유토피아가 상실에 대한 애도 자체가 억압되어야 유지되는, 근본적으로 멜랑꼴리를 은폐하고 있는 세계이듯이, 정이현의 세계도 진짜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큐빅처럼 흩뿌려진 서울의 불빛”(「낭만적 사랑과 사회」 35면)처럼 인위적인 해피엔딩을 과시한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다. 정이현의 작품들은 너무나 매끄럽게 진행되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삐거덕거리는 불안의 한숨을, 찬란히 빛나는 상품들의 기표 속에 메마른 공허와 강박의 그림자를 조심스럽게 은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이현의 문학세계는 예컨대 오정희(吳貞姬)의 냉정한 현실인식과 견줄 만하다. 오정희가 폭로하는 현실세계가 그 끝도 없는 깊이의 암울함으로 인해 섬뜩함을 자아낸다면, 정이현은 우리의 현실이 아무런 깊이도 숨기고 있지 않음을 독자에게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불편함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불편함, 즉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유리가 순전한 허위의식을 완벽히 실천하려 들 때 익숙한 담론들에 일으키는 균열의 효과가 바로 정이현의 문학이 불온한 이유일 것이다.

 

 

3. 냉소적 주체와 달콤 살벌한 이데올로기

 

정이현의 작품에서 속물성은 인간관계를 화폐의 교환원리로 환치하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속물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정이현의 작품에서 속물성은 기본적으로 대타자의 인정을 갈구하는 상태로 표현된다. 우리가 덮어쓰고 있는 그 수많은 기표들과 가면들이 무장해제당했을 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이현의 인물들은 대타자의 인정에 언제나 목말라한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나’오은수는 연하남 태오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그가 자신보다 일곱살이나 어린데다 무직이라는 이유로 그를 “그 반듯반듯하고 질서정연한 세계”(130면)에 내놓기를 주저한다. 여기에서‘반듯반듯하고 질서정연한 세계’는 언제나 실체를 알 수 없는, 사회의 비대칭적인 시선이자 규범이고, 라깡(J. Lacan)의 용어를 빌리면 대타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은수는 이러한 규범이 억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이데올로기는 억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달콤한 안락을 약속하기도 한다. 은수가 친구 재인의 신혼집을 찾아 헤매다가 “세상의 아파트들은 왜 다 똑같이 생긴 거야?”라고 투덜대자 친구 유희가 “그래야 안심하거든”(224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속물적이기도 하지만 안락하기도 하다. 재인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업무가 지루하고 반복적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꽤나 안정적으로 신분 보장이 된다는 장점이 있는 회사에 취직한 기분이야”(226면)라고 자평하는 것처럼 말이다.

은수 역시 남들에게 과시할 수 있을‘정상적 인생’의 알리바이가 되어줄 남자를 찾아 자신의 삶의 불안정에서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불안정은 타인의 속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인이 결혼을 심사숙고해보라고 충고하자‘나’는 “일찍 결혼한 동창들은 벌써 학부형이 되기도 했잖아. 넌 결혼이라도 했지. 난 언제 걔들을 쫓아갈 수 있을까. 점점 열등생이 돼가는 기분이야”(260~61면)라고 토로한다. 따라서 은수는 이름부터 평범 그 자체인 남자‘김영수’를 기준점 삼아 인생의 위기를 봉합하려 한다. 그러나 오은수가 기준점으로 삼은 김영수라는 남자는 평범한 남자‘김영수’를 연기하고 있었을 뿐, 허깨비 같은 남자였다. 불의의 실수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는 자신이 상징계의 법에서 배제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타인의 이름을 빌려 살아가는 유령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김영수’를 기준점 삼았으나, 그 기준 자체가 헛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죽었다 깨나도 상상해보지 않았던”(418면) 은수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그 근원적 허구성을 드러내고 다시 붕괴한다.

정이현의 작품에서는 그 누구도 이런 속물적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이는 단지 그들이 무지한 주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이현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냉소적 주체’인데, 슬로터다이크(P. Sloterdijk)에 따르면‘냉소적 주체’란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알면서도 이데올로기의 외부를 상상하지 못하는 주체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 오은수가 바로 그러한데,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결혼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발언들을, 그러나 사실상 무력한 투정들을 여러차례 내뱉는다.

 

사실 결혼이라는 게 별거니? 이혼은 또 대수고?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인데, 정작 인간들은 그 속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꼼짝달싹 못하는 모양새가 너무 우스워.(284면)

 

‘나만은 다를 거야,’낙관적 기대에 몸을 맡긴 채 무턱대고 풍덩 뛰어들기에 결혼의 강물은 너무 차고 깊어 보인다. (…) 그렇다고, 결혼제도 밖에 영원히 머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134면)

 

『달콤한 나의 도시』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유쾌하고 따뜻한 작품이다. 대중성을 노려 인물들의 평범성을 부각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언어의 칼날은 훨씬 무뎌졌으며, 상식적인 담론들을 찔러보는 데 그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렇게 비판적 의식이 약해지는‘변화’가‘칙릿’이라는 장르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현재 한국문단에서‘칙릿’의 인기 비결은 젊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다루는 문학이라는 소박한 정의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칙릿’의 변함없는 인기(그것이 할리퀸 로맨스든, 오스틴류의 고전이든 간에)는 환상에 놓여 있으며,‘칙릿’이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이 환상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사실 이 환상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여성 독자들 스스로가 자신이 속물적이라고 경멸하면서도 믿어왔던 이데올로기의 그 허름하고 초라한 실상을 마주하느니, 차라리 이데올로기의 빈 구멍을 스스로의 몸으로 막아내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작품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데올로기적‘리얼리티’가 훨씬 떨어지는 한국의‘칙릿’보다는 저 멀리 뉴욕이나 토오꾜오의‘칙릿’이 더 인기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는 오정희의 문학처럼 한가닥의 환상도 없는 실로 끔찍한 현실과, 커리어와‘훈남’을 동시에 거머쥐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달콤한 판타지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기 위해 고심한 듯하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여성들의 판타지를 완전히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환상의 허구성을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은수의 마지막 희망이었던‘김영수’라는 존재의 허구성은 물론이며, 재인이 결혼에 실패하고 유희가 뮤지컬 배우로서 좌절하는 것은 확실히 기존의‘칙릿’과 구분되는 우울한 결말이다.3 그러나 이 작품은 냉정한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작가의 전작들에 비해 미적지근한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며, 그렇다고 새로운 소통방식을 꿈꾸는 인물들의‘일탈’도 눈에 띄지 않아 이전의‘무지한 주체’들보다 더 순응적으로 느껴진다. 전작들에서 작중인물과의 동일시를 불가능하게 할 만큼 반성성이 결여된 여성상을 내세움으로써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와의 비판적 거리를 견지하게 했다면,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의 냉소적 주체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의 실패를 불가피하게 여김으로써 이와 유사한 과정을 겪으며 현실에 매여 있을 독자들을 오히려 안심시키는 면이 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너무나 친숙한 연애의 계략들이 실천에 옮겨질 때 산출되는‘친숙하면서도 섬뜩한’효과가 있었다면, 『달콤한 나의 도시』에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효과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지각하든 아니든 간에 모두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착한 주체’로 다시금 귀결되는 것이다.

 

 

4. 문학의 착한 주체들

 

속물적 이데올로기와의 비판적 거리가 사라질 때 오히려 비판적 거리가 산출되는 아이러니가 정이현의 특기였다면, 최근 작품들은 그러한 패턴에서 탈피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그런 시도가 절반쯤 성공했다면, 「위험한 독신녀」(『오늘의 거짓말』)에서는 이전의 영악한 여성인물상이 일관되게 유지되면서도 인간관계와 소통에 대한 내밀한 여운을 남기는 새로운 인물형이 등장한다. 서술자‘나’는 서른여덟살의 독신녀로서 “십수년 전과 똑같은 곳에서 그대로, 붙박이장처럼 늙어”(220면)간다는 자괴감을 느끼는 매우 현실적이고 냉정하기까지 한 정이현식 여성인물의 전형이다. 맞선에 나온 남자가 “본격적인 탐색모드”를 가동하며 재산과 가족상황에 대한 속물적인 질문공세를 퍼부을 때도 “결혼 경력이 없는 서른아홉살의 총각이 흔한 것이 아니”(236면)라는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며 응해줄 수 있는 내공도 갖추고 있다.

그런‘나’에게 어느날, “존재 자체만으로 타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인간”(253면)이었던 고교동창 채린이 15년 만에 연락한다. 부잣집 딸에 얼굴도 예쁜 채린은 학교에 부정입학으로 들어온 사실이 알려져 친구 하나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사실 그녀가‘나’에게 더없이 껄끄러운 존재인 것은 그녀를 따돌린 장본인이 바로‘나’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채린은‘나’가 사모하는 영어선생님이 순정을 바친 대상이었다. 게다가 조소를 일으킬 만한 채린의 순진무구함과 백치미도‘나’가 그녀를 기피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단지 순수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소녀가 아니라, 기억상실로 인해 시대착오적인 순수와 유치함을 간직한‘미친’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브라질 이민생활에서 남편의 학대를 받고 아이까지 뺏긴 뒤, 자기 내부의 시계를 1991년으로, 즉 스물다섯살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사실 그녀의 순수함은 그간의 삶에서 무수히 기만당하고 비난받아왔다.‘나’가 속물성과 현실감각이라는 딱딱한 갑옷을 걸쳐 세상으로부터 받은 무수한 상처에 무뎌지려고 노력했다면, 그녀가 견지하던 순수함은 각박한 세상이 그녀에게 남긴 일종의 상흔이었으며, 또 그 세상에 맞서는 일종의 자기방어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아픔을 알게 된‘나’는 그녀에게 뒤늦은 화해를 시도한다. 그녀에게 현실을 자각시킨다거나 의사의 치료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기로 한 것이다. 위악스럽기만 하던 정이현의 여성인물이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기 위해 과거의 옷을 걸치고 이십대의 해사함을 연기하려는 장면은 가슴 뭉클한 면이 있다. “내후년이면 마흔이었다. 나는, 나를 감당하기에도 벅찼다”(247면)라며 삶에 지쳐 있던‘나’가 그녀와 “더디게 지나가는 삶”(254면)을 함께 견디기 위해 그녀에게 향하는 모습은 정이현이 문학에서 그간 꿈꾸던 진정한‘소통’으로 향하는 자그마한 발걸음이 아닌가 싶다. 정이현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가‘소통’에 대한 염원에 있지만, 자신의 소설은 “다만 이 불감한 세상에 무력하게 내던져진 인물을 통해, 가장 역설적인 방식으로 불모와 소통의 가능성을 동시에 암시할 수밖에 없다”4고 했다. 「위험한 독신녀」의‘나’가 바로 이러한 정이현이 보여주는 문학의‘착한’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제 그녀는‘위험’하다. 속물적 담론의 공허함에 애써 무감각해지려고 노력하던 그녀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그 담론들을 정면돌파하는‘위험’한 행보를 내디딘 것이다.

또다른 위험한‘문학적 주체’의 탄생을 예고하는 작품이 바로 「삼풍백화점」(『오늘의 거짓말』)이다. 이 소설은 1995년에 대한 가벼운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우파의 부모, 슈퍼 씽글 싸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개의 핸드백.”(39면) 그해 봄‘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학생’이라는 편리하고도 안락한 정체성, 평범하고 지루한 청춘, 그리고 삼풍백화점에서 일하는 동창 R과의 짧은 우정. 세상의 각박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던 청춘의 끝무렵에서 서술자‘나’는 R이 내밀어준 손을 잡고서 막막했던 그 시절을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강북 출신에, 대학도 다니지 않고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든 R은 은근한 자기과시가 섞인 농담을 일삼는‘나’의 친구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1990년대 초반 여대생들의 일반적인 계산법”이던 더치페이 대신 R은 자신이 밥을 사주고는, “그럼 내가 커피 살게”(54면)라는‘나’를 데리고 자기 집에 가서 커피도 타준다. 그날, “달착지근한 커피가 부드럽게 혀에 감〔기〕”(55면)듯이 R의 마음은‘나’의 마음에 살포시 감긴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알맞은 거리를 측정”(59면)하느라 고민하던‘나’와 달리 R은 자신의 마음을 무한정 순수하게 열어 보이기도 한다.

 

낮에 가 있을 데 없으면 우리 집 열쇠 줄까? 지금껏 그런 방식으로 말했던 친구는 없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어차피 비어 있으니까 라면도 끓여 먹고 책도 읽고 편하게 있어도 돼. 너 먹은 설거지만 해둬. 집을 대여해주는 계약 조건치고는 참으로 소박했다.(56면)

 

두 친구의 관계는‘삼풍백화점’으로 인해 어그러진다.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삼풍백화점’으로 상징되는 사회생활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다.‘나’는 R의 매장에서 갑자기 하루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연신 실수를 거듭하여 손님의 악다구니를 듣고는 네시간 만에 일을 그만둔다. 그런데 R은‘나’에게 화를 내기는커녕,‘나’를 자신이 매일 겪는 무시무시한 사회 속으로 이끌었다는 것에 더 미안해한다. R은‘나’가 백화점 규정대로 유니폼을 입게 되자, 마치 그 옷이 “죄수복”이라도 된다는 듯, “어린 소처럼 어글어글한 눈망울”로 “너 진짜 괜찮아?”(60면)라고 물으며 연신 걱정한다. 그래서 일이 끝나자마자 얼른 옷을 갈아입으라며‘나’를 탈의실로 떠민다. 실제로‘나’에게 “유니폼은 생각보다 무거웠다.”(60면)‘나’는 죄라도 지은 듯 행동하는 R에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R이 매일 견뎌야 하는 사회생활의 무게와 고단함을 새삼 느끼고는 그녀에게서 도망치듯 멀어진다.

정이현의 글쓰기가 시작되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나’는 R의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안부도 묻지 않음으로써 그녀에 대한 애도를 지연시킨다. 애도작업을 자아가 타자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의 관점을 빌리면, 이미 R을 훌쩍 떠나버렸던‘나’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이러한 갑작스런 분리의 반복을 회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나’는 타자의 죽음에 대한 너무 빠른 애도와 완전한 청산이 오히려 윤리에 어긋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삼풍백화점」은 정이현의 글쓰기가 이러한 멜랑꼴리적 상실의 상태에서 언제나 R과의 내밀한 소통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합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러한 소통에 대한 아릿한 추억과 그것의 중단과 좌절에 대한 안타까움이 작가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소통’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정이현이 보여주는 소통의 주체들은 거의 언제나 진정한 관계맺음에 실패한다. 「그 남자의 리허설」(『오늘의 거짓말』)에서‘그 남자’는 존재의 부패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기도하며, 「어두워지기 전에」(『오늘의 거짓말』)의‘나’는 매사 냉랭하고 무심한 줄만 알았던 남편이 회사 여직원과의 유치한 연애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고 차라리 남편이 잔혹한 유아살해범이기를 바란다. 정이현의 인물들은 앞장에서 분석했듯이 하나같이 흔해빠진 속물들이며,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알면서도 이를 돌파할 용기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현실의 소통 불가능성을 환기함으로써 소통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보이겠다는 정이현의 글쓰기 전략이 유효하다면, 정이현의 문학은 여전히 계몽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정이현은 지금을‘저자의 죽음’의 시대라 진단했는데, 그런 시대에 문학이란 작업이 독서와 해석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면, 정이현의 문학에서 이데올로기의 착한 주체들의 무력한 행동은 독자의 현실에서는 환상을 가로지르는 나쁜 주체, 또는 현실을 성찰하고 소통을 꿈꾸는 문학의 착한 주체들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각의 계기는 여전히 작가의 글쓰기, 애도와 소통, 비판과 성찰의 지향에 달려 있을 것이다. 「삼풍백화점」에서 “호화롭기로 소문났던 강남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대한민국이 사치와 향락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65면)라는 한 여성 명사의 신문 칼럼에 울면서 항의전화를 했던‘나’처럼, 그녀의 글쓰기는 지식인의 속단과 몰이해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변호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삼풍백화점 속에 묻혀버린 한 이십대 여성의 일상과 피로, 꿈과 좌절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2000년대 한국사회의 화장 짙은 무표정한 얼굴 밑에 감춰진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욕망, 불안, 근심 등을 보여주었던 그녀의 문학세계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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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이현 「작가 창작론-바보야,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문학사상』 2006년 5월호 181면 참조.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40~48면, 60~69면 참조.
  3.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는 원작자가 비루하고 가혹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애써 제거해놓은 판타지적 요소를 말랑말랑하고 달콤하게 다시 부풀려놓았다.
  4. 정이현, 앞의 글 182~84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