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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당신의 독서는 위험한가

김경욱 소설집 『위험한 독서』

 

 

강지희 姜知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식물-되기’」가 있음. iskyyou@hanmail.net

 

 

초점_김경욱_위험한-독서

지금 지루한 표정으로 책을 펼쳐든 당신의 독서는 안전하다. 무감동하게 글을 읽어가는 당신도, 무엇인가를 얻어가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는 당신도, 거기 눈을 날카롭게 뜨고 저자의 논리에서 흠을 찾아낼 준비를 하는 당신의 독서도 지극히 안전하다. 김경욱(金勁旭)이 말하는 위험한 독서는 이성을 담보로 지식을 교환하고 사유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와 글자 사이 공백을 타고‘바깥으로’빠져나가는 어떤 것이다. 허구의 세계가 실세계에 침투해 비밀을 속삭이고, 욕망을 부추기고, 중독시킨다. 표지를 열고 들어와 표지를 닫을 때까지 그 안의 사유만을 잘 따라가는‘착한’독서가는 김경욱에게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김경욱의 소설세계에서‘무엇을 보느냐’의 문제는 그 사람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작동해왔다. “우리가 쓰는 것에 따라 현재의 우리가 된다”는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말은 김경욱을 읽어나가는 동안 이렇게 바뀐다. “우리가 보는 것에 따라 현재의 우리가 된다.”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문학과지성사 2005)에서 “당신이 어떤 채널을 선호하는지, 어떤 프로그램을 즐겨보는지 말해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다”(「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확신에 찬 문장은 이번 소설집에서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위험한 독서」)로 목적어만 바뀐 채 반복된다. 감각적인 대중문화의 기표들을 적극 차용함으로써 영상세대를 대변하는 작가로 일컬어져온 김경욱은 이제 스크린을 응시하는 대신 활자를 통해 세상을 읽어낸다. 그래서 『위험한 독서』(문학동네 2008)는 책이라는 매체와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적 사유로 가득 차 있다.

표제작 「위험한 독서」의 주인공은 독서치료사로, 칠년 사귄 남자친구를 정리하려고 찾아온 여자를 상담해준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 독서치료사가 근대 이전 이야기꾼의 모습과 닮아 있음을 인지해낼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W. Benjamin)이 말한 대로 진정한 이야기의 본질은 유용한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야기꾼이란 듣는 사람에게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조언 대신 책을 건네는 남자는 현대의 이야기꾼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문제는 독서치료가 본래 의도했던 대로 여자를 치유하고 난 후이다. 여자는 독서를 통해 치유되고 떠나갔는데, 정작 치료한 남자는 그녀를 잊지 못한다. 남자에게 여자는 중독된 하나의 책이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독서는 위험한 것으로 변모한다. 이성적 의지와 시선으로 이루어지는 독서 가운데 숨어 있던 통제 불능의 호기심이라는 강렬한 본능이 드러난다. 이제 독서에 의한 사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이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의 구조다. 〔{(책을 읽는 여자)를 읽는 남자}를 읽는 독자〕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가운데, 김경욱은 괄호체계를 슬쩍 교란시켜 허구 속에 또다른 허구가 숨어 있는 것 같은 혼란을 던져준다. 그것은 독서치료사에게 상담하는 여자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이다. 소설 초반부에 책에 생겨난‘붉은 얼룩’은 독서치료사와 여자가 자고 난 후 여자의 처녀성의 표시로 남겨진 침대시트의‘붉은 얼룩’과 묘하게 겹쳐진다.‘붉은 얼룩’으로만 남은 여자의 실상이 혹시 독서치료사의 손에 놓여 있던 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환상은, 화자가 직접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또 쉽게 자신이(여자의 독자) 원하는 결말을 선택하는 데서 한층 명확해진다.

「위험한 독서」의 여성인물이‘또 하나의 책’이 되어 읽히는 것처럼, 소설집 곳곳에는 소설 속에 구축된 허구와 현실이 혼재되는 지점들이 자리한다. 소설 속 여주인공‘나오미’가 재수학원생들에 의해 아침 구보 때 부딪히는 한 여학생에게 투영되면서 허구에서 실세계로 이동하기도 하고(「황홀한 사춘기」),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읽어본 것처럼 보이는 신비한 아내에 대해 말하는 소설 속 화자는 마지막에‘아내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기도 한다(「천년여왕」). 이렇게 현실과 허구의 오묘한 경계를 흐리면서 소설은 뫼비우스 띠처럼 구성된다.

김경욱 소설의 새로운 리얼리즘은 이 지점에서 창출된다. 이딸리아 현대미술가 폰따나(L. Fontana)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캔버스를 찢었다. 평면에 대해 공간감을 창조하는 원근법을 넘어, 캔버스의 찢겨진‘틈’을 통해 환영이 아닌 직접적인 공간을 캔버스 위에 창조해낸 것이다. 김경욱의 소설은 정교한 허구의 직조물을 찢어 틈을 낸다. 김경욱의 작품집에 나오는 또다른 허구로서의 책들은 허구 속 현실과 상호작용하면서 더 강한 리얼리티를 내포한 환상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경욱은 이렇게 허구와 현실을 교차시키는 기법적인 실험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책에서 벗어나 현실로 들어서서 본질을 은폐한 채 작동되는 자본주의를 응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황홀한 사춘기」의 주인공은 소각장에서 한때 탐닉했던 소설집을 불에 태워버림으로써 어른이 되며, 「게임의 규칙」에서는 자신이 생각 없이 암송한 문장으로 인해 세들어 살던 대학생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위험하고 불결한 문장들과 결별해 숫자의 세계로 넘어간다.

책을 버리고 그들이 진입한 세계는 감미로운 감상이나 환상이 제거된 자본주의 세계이다. 인물들은 전지구적 생산 네트워크가 구축된 유통시장 안에서 위험수당에 따라 세상을 인지하며(「맥도날드 사수 대작전」), 아내는 햇볕이 잘 드는 전셋집을 얻고자 대리모가 되어 자궁을 거래한다(「달팽이를 삼킨 사나이」). 이처럼 비가시적인 위협과 그에 대응하는 효율적이고 자동화된 방식, 뭐든지 거래되는 인터넷 싸이트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더이상 자본주의‘이후’나‘너머’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일한 댓가로 임금을 받고 거래하며 살아가는 동안, 돈은 자신의 본질을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우리는 체제의 성실한 성장동력으로 거듭난다.

이 모든 것을 무겁거나 쓸쓸하지 않게 적절한 거리를 두며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은 바로 김경욱의 유머감각이다. 그의 소설집에서 독서라는 행위는 인물들에게 황홀한 위로로 다가오지만, 그가 허구의 직조물에 낸 틈 사이로 보이는 세계는 분명 개인을 고독으로 내몰며 추문을 타고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제 물어야 한다. 당신의 독서는 위험한가. 김경욱 소설의 미학은 소설 내부의 안온함을 만끽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비틀고 빠져나와 현실을 바라보는 데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는 이 책을 보는 내내 그리고 책장을 덮은 후에도 계속해서 물어야만 한다. 나의, 그리고 당신의 독서는 위험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