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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다산학단문헌집성』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8
정약용사단의 학문적 집대성
심경호 沈慶昊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sim1223@korea.ac.kr
학술지성사의 연구는 자료 수집과 정리에서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 실증적 학풍이 발달하면서 자료 집성과 분석을 중시했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이른바 국고(國故) 정리를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일본의 경우도 같은 과정을 거쳐 현대적 연구를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그런데 한국학의 경우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자료들이 흩어져버려 개인, 학맥, 시대상을 연구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근대에 들어와 국학의 기초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학맥을 살피고 시대적 문제를 논하며 지성사의 계보를 기술하려 할 때 늘 자료상의 문제에 맞닥뜨려왔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대한 연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산의 저술이 신식 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4년부터 정인보(鄭寅普)와 안재홍(安在鴻)이 편집과 교정을 담당해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76책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간행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산의 학문이 당대와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만족스런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강진 유배시절에 다산은 마치 집체창작을 하듯이 제자들과 공동저술을 행하여, 그 스스로 편(編)과 저(著)를 구분하기까지 했다. 강진의 제자들은 흔히 18제자라고 일컬어져왔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른바 18제자가 다산의 문학 및 사상, 학문 방법을 계승한 양상에 대해서는 관련자료의 미비 때문에 깊이있게 고찰되지 못해왔다. 이러한 면에서, 올해(2008년) 3월에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다산의 자제들과 외손자 그리고 다산의 훈도를 입은 여러 제자들의 관련문헌들을 수집해서 『다산학단문헌집성(茶山學團文獻集成)』(이하 『집성』) 9책을 영인한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방대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각 저작에 대해 해제를 붙였으므로 열람에 편하기까지 하다.
편집책임인 임형택(林熒澤)은 다산학단을‘다산 선생의 제자들 내지 학연을 지닌 인물들’로 정의했다. 곧 이 『집성』에는 다산을 포함한 9인의 주요 저술 가운데 23종이 원본 형태로 영인 수록되었다. 대상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산 이외에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丁學淵), 정학유(丁學遊)와 외손자 윤정기(尹廷琦), 다산이 강진 유배 때 가르친 황상(黃裳), 이청(李å), 이강회(李綱會), 이시헌(李時憲) 그리고 해남 윤씨의 윤종벽(尹鍾璧), 승려 혜장(惠藏) 등이다. 자료의 판종(版種)을 보면, 1939년 석인본인 윤정기의 『방산유고(舫山遺稿)』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필사본들이다.
이 가운데는 일본 오오사까 부립(府立) 나까노시마(中之島)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사대고례(事大考例)』 26권 10책이 들어 있다. 이 책의 편자는 이시승(李時升)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임형택은 이 저술이 정약용과 이청의 공동저술임을 밝혀냈다. 또 이시승은 다산의 훈도를 입은 인물이므로, 이 책의 간행에는 다산학단의 공동작업 결과가 담겨 있다고 판별했다. 이 사례는 다산학단의 학문적 성과와 그 외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다산의 제자 가운데 이강회는 경세학에 특히 관심을 보인 인물이다. 조성산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중국의 이상적 정치문물제도를 기술한 『주례(周禮)』를 기준으로 삼아 현실의 개혁안을 제시하고자 했고, 제주도의 인문지리와 사회경제 사항을 조사해서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을 남겼다.
한편 황상은 다산의 시풍을 계승한 인물로서 생전에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 자료의 소개와 관련 연구를 통해서 황상은 다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농촌에서 자행된 폐정(弊政)의 현실들을 고발했음이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이철희는 “다산이 가렴주구와 횡포가 자행하는 이속(吏屬)의 전형을 창조했다면, 황상은 안일과 향락에 빠진 양반관료의 전형을 창조한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 검토의 내용은 다산학단의 학문사상과 문학의 계승과 변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한편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다산학단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정학연은 서울에 거주하는 학자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학단 내부의 학문적 성과를 다른 학맥에 접맥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 듯하다. 김영진(金榮鎭)은 정학연의 이러한 위상에 주목하는 한편, 황상, 이청, 이강회가 만년에 모두 서울에서 홍석주(洪奭周), 서유구(徐有榘), 신작(申綽), 김정희(金正喜), 김매순(金邁淳)의 가문과 교유하였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이같은 사실들에 주목하면, 이번 『집성』의 학술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산학단이 학문사상의 어떠한 원리를 공유했는지 판단하는 일차자료가 된다. 둘째, 다산의 학술사상이 당대에 확산된 양상과 다산의 학문이 한국지성사의 역사적 맥락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가늠하는 데 귀중한 근거가 된다. 셋째, 다산학단의 성원들이 당대의 다른 지성들과 교유한 양상을 살펴, 19세기 지성사를 다각도로 검토하는 데 필요한 단초를 마련해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산학』 12호(2008년 6월호)에 수록된 송재소(宋載邵), 임형택, 조성산, 김영진, 이철희의 논문을 참고할 것을 권한다.
다만 이 『집성』에서 다산학단을 규정하고 문헌을 집성한 방식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우선 다산학단의 범위를 한정하고 주맥(主脈)과 방계를 변별하지 않았다. 이번 『집성』에는 초의(艸衣)선사의 『초의대사전집(艸衣大師全集)』도 수록 대상이되, 다른 자료집에 소개되었으므로 제외했다고 한다. 또 『아암집(兒庵集)』은 수록하지 않았으나 혜장의 『연파잉고(蓮坡剩稿)』는 수록했다. 『집성』에서 이 선승들을 다산학단의 주맥이나 방계로 설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학맥을 대상으로 자료를 정리할 때는 학안(學案)의 형태를 활용해 주맥과 방계를 망라해서 제시하는 일이 있다. 이 경우라도 주맥과 방계를 혼재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집성』의‘학단’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애매하다.
또한 이번 『집성』에는 다산학단이 펴낸 문헌이되 이미 다른 형태로 출간된 것들을 수록하지 않음으로써‘집성’의 이름에 조금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 곧 정학유의 『시명다식(詩名多識)』, 윤정기의 『시경강의속집(詩經講義續集)』, 다산이 감정하고 기어자굉(騎魚慈宏) 등이 편집한 『만덕사지(萬德寺誌)』, 정약전(丁若銓)의 저술이되 이청이 편찬에 관여한 『어보(魚譜)』 등은 제외했다. 다산학단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선본(善本)들을 선정해서 재수록하는 것이 좋았을 듯하다.
이러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 『집성』은 비단 다산에 관한 연구영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학 관련 기초자료를 집성한 주요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끝으로 이번 『집성』의 간행을 계기로 다산학단이 급속하게 쇠퇴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냉철한 탐구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 학단이 학통과 혈맥의 축으로 이루어져온 전통 학맥의 양상과 판이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학문의 이념과 방법을 공유했음에도 학문권력이나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학문적 결속력이 강하지도 않은데다가 학단의 구성원들이 다산의 학술을 계승할 만한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이것은 오늘날 공적자금으로 조직된 각종 교육연구사업단들이 학문의 이념과 방법을 창출하고 계승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연관되는 심각한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