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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장대익 『쿤&포퍼』, 김영사 2008

과학은 뭔가 특별한 것이어야 하는가

 

 

김기윤 

한양대 강사, 과학사 kiyoonkim@hanmail.net

 

 

촌평_쿤n포퍼30여년 전부터 불과 몇해 전까지 간호학, 교육학에서 회계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 특히 사회과학 대학원 과정의 학생들 대부분이 토머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다. 한 분야 이론들의 부침을 살피고 나아가 새 이론을 개진하는 등의 연구활동에서 쿤의 패러다임 개념 또는 이론들 사이의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개념이 매우 유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과학 자체의 의미나 그 사회적 가치에 관심이 있는 자연과학자들은 쿤 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카를 포퍼(Karl Popper)의 반증주의(反證主義)에 훨씬 더 친밀감을 느낀다. 경험을 통해 반증될 수 없는 명제는 과학이 될 수 없다는 포퍼의 지적은 자연과학 지식이 다른 분야와 달리‘과학적’일 수 있는 이유를 명쾌하게 보여주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올바른 과학적 지식이 형성될 수 있는 시민사회란 민주적이고 반(反)전체주의적인 열린 사회임을 주장함으로써 과학자들을 감동시켰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적어도 한번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은 포퍼의 반증주의에 매료되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패러다임 이론이나 반증주의가 어떤 역사적·논리적 배경에서 출현했는지 알려주는 책은 국내에 거의 없었다. 하물며 그 개념들이 왜 사회학자나 자연과학자들에게 그토록 호소력이 있었는지 논하는 책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장대익의 『쿤&포퍼-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쿤과 포퍼를 중심으로, 그간 널리 이야기되면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던 과학지식의 성격을 과학철학의 역사적 맥락에서 알기 쉽게 서술한 책이다. 『쿤&포퍼』는 김영사 지식인마을 씨리즈의 스물다섯번째 책인데, 이 씨리즈는 국내 필자들이 과학, 역사, 철학, 경제학 분야에서 읽기 쉬우면서도 수준 높은 저술을 훌륭히 써낼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즐거움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저자 특유의 일상 속 유비를 통해 쉽지 않은 내용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이 책도 그같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베이컨(F. Bacon)과 꽁뜨(A. Comte) 이래 올바른 지식이란 경험을 통한 귀납지식이자 집적되면서 점차 진보해가는 실증지식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믿음은 20세기초 슐리크(M. Schlick), 카르납(R. Carnap), 헴펠(C. Hempel) 등을 거치며 철학으로부터 형이상학과 신학을 배제하려는 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들 논리실증주의 또는 논리경험주의 철학자들은 모든 유의미한 지식은 실증적인 자연과학이 보여주는 것처럼 경험적으로 의미있는 언어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전파해나간다. 포퍼의 주저 『탐구의 논리』와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모두가 사실은 모든 학문을 유의미한, 즉 과학적인 지식체계로 아우름으로써 통합과학의 꿈을 좇는 논리실증주의적 기획의 일환으로 출판되었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논리실증주의가 지닌 뼈아픈 맹점을 보완하는 성격을 띤다. 저자는 귀납주의와 가설연역적 방법을 논리실증주의가 띄운 두 척의 배로 표현한다. 그런데 귀납주의는 흄(D. Hume) 이래 잘 알려져 있는 약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찍이 베이컨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기 위해 귀납추론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그 귀납추론을 통해 도출된 일반화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본 백조가 모두 흰색이었다 해도, 그 많은 관찰들이 바로 내일 검은 백조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논리적 필연성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퍼는 일단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백조는 흰 새라고 추측한 뒤, 반례가 나타나면 그 과학적 지식을 폐기하거나 변형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도서분류학이나 정신분석학은 반례를 통해 폐기될 수 없는 종류의 이론들로 구성된 지식체계이며, 이렇게 그 이론을 폐기할 수 있는 어떤 반례가 존재하지 않는 이론 또는 명제는 의미있는 과학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포퍼가 과학이란 이래야 한다는 이상을 말하고 있는 데 반해, 쿤은 과학자들이 실제로 어떤 심리적 상황에서 과학활동을 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결과, 포퍼의 반증주의가 다분히 실증주의적 지식관을 보완하는 성격을 띤다면, 쿤의 패러다임 또는 공약 불가능성 개념은 과학지식이 경험의 집적을 통해 진보해간다는 실증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쿤은 과학이론이 정치적 혁명이나 제도개혁처럼 비교적 단기간에 과학자들의 세계관, 과학관, 지식관이 바뀌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고 주장한다. 많은 독자들은 과학자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다른 과학이론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는 쿤의 논의에서 과학의 사회구성적 성격의 씨앗을 읽었다. 쿤 자신은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거듭 말했지만, 많은 사회학자들이 쿤의 명제들에서 과학지식의 사회구성적 성격에 대한 영감을 얻었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쿤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말을 빌린다면, 그는 사회구성적 혁명을 완성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분명 과학지식의 사회구성적 논의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었다.

책의 내용에서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예를 들면 과학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점을 보이려는 저자의 의도 때문에, 포퍼와 쿤 이후 과학의 중층적 성격이나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준 이언 해킹(Ian Hacking)과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이 주로 사회구성적 시각을 반대하는 사람들로 표현되었다. 해킹이 과학의 실재론을 옹호하거나 사회구성론의 허점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많은 사회학자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과학은 하나가 아니며 다양한 스타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 데서 해킹의 학문적 성과를 본다. 갤리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과학의 사회구성적 성격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향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이론이 자의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도록 한계를 부과하는 자연의 실재를 강조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통찰력은 과학이 뭔가 특별한 구성요소와 함께 그리 특별하지 않은 요소의 부정합해 보이는 결합과 혼효 속에서 형성되고 작동한다는 분석 속에서 드러난다.

과학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과학만이 뭔가 특별한 점을 지니고 있을까? 과학지식의 근간이 되는 귀납추론의 허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던 흄 자신은 그 허점 때문에 심각하게 불만스러워하지는 않았다. 흄은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 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때 그는 우리에게 이성 또는 과학으로부터 뭔가 특별할 것을 지나치게 기대하지 말라고 넌지시 타이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