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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새로운 글쓰기를 찾아서
권성우 평론집 『낭만적 망명』
이수형 李守炯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나’·타자·커뮤니케이션」 등이 있음. yeesooh@hanmail.net
책 표지에 사진이 올라 있는 인물들, 세명의 비평가 임화(林和), 에드워드 싸이드(E. Said),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과 에쎄이스트 서경식(徐京植) 등의 면면은 권성우(權晟右) 비평집 『낭만적 망명』(소명출판 2008)의 전체 틀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지침을 준다. 총 4부로 구성된 『낭만적 망명』에는 비평, 소설, 에쎄이를 대상으로 한 논의(1~3부), 문학과 영화 및 역사의 관계에 대한 논의(4부)가 더불어 전개되고 있으되, 아무래도 『낭만적 망명』의 성격을 좀더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비평과 에쎄이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비평과 권력』(2001) 『비평의 희망』(2001) 『논쟁과 상처』(2006)의 시기를 거치면서 문학제도에서의 비평의 역할이라는 문제에 골몰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문학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권성우만큼 많이 던진 비평가는 드물다. 이에 대한 답변이 『낭만적 망명』에서는, 가령 1940년을 전후한 시기 임화가 발표한 비평과 산문을 검토하는 대목에서 “역사성과 사회의식을 상실하여 문학 내부로만 침잠하는 문단과 평단에 대한 단호한 문제의식”(24면), “가치평가와 해설(해석)이라는 비평의 주된 두가지 기능 중에서 후자에 주력하는 비평적 추세에 대한 비판”(26면), “미디어와 문학장을 실제 움직이는 구조, 문학작품의 유통씨스템, 문학과 언론의 역학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민감한 의식”(27~28면) 등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여러모로 중요할 터이지만,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권성우의 비평관을 살펴보는 것 역시 흥미롭다. 첫 비평집 『비평의 매혹』의 한 대목에서 권성우는 “진정으로 훌륭한 비평문은 글쓰는 주체의 마음의 흐름이 지극히 섬세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문학비평은 고급한 에쎄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라고 비평관을 밝힌 바 있다(296면). 그리하여 비평집 곳곳에서 시, 소설 등의 문학작품과 견주어봐도 에쎄이로서의 비평에서 “정신의 직접성과 체험의 순도가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며 또 그것을 읽음으로써 “타인의 삶의 섬세한 결로 스며들어 그 타인의 욕망과 편견, 열정의 그림자, 삶의 무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가 산견된다(37면).
권성우 자신이 비평사를 전공한 연구자일뿐더러 비평을 대상으로 한 비평을 상대적으로 많이 쓰기도 했지만, 이같은 언급이 단지 비평도 문학·예술(적)일 수 있거나 그래야 하며, 그런 이유에서 비평 읽기를 통해 비평가의 내면풍경을 이해하는 것이 가치로운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비평가의 에쎄이 혹은 에쎄이로서의 비평에 대한 관심은 시, 소설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바, 이런 연유로 문학비평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서경식, 김현, 고종석(高宗錫) 등의 에쎄이에 대한 비평의 자리가 『낭만적 망명』의 3부에 마련되어 있다. 예컨대 서경식의 에쎄이들-대표적인 것으로 『소년의 눈물』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등이 있다-에 대한 논의에서 권성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산문에는 이 시대 한국문학이 아직 충분히 펼쳐놓지 못한 타자와 소수자, 디아스포라에 대한 곡진한 공감과 진지한 자기성찰이 있고, 억압받는 타자에 대한 따뜻한 연대의 마음이 존재한다. (…)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여, 그것을 한편의 텍스트로 변용시키는 것이 문학의 소임 중의 하나라면 서경식의 산문은 이 시대 한국어로 발표된 어떤 문학텍스트 못지않게 그 기능을 넉넉하게 담당하고 있다.”(283~84면)
권성우의 이전 비평집에서도 시, 소설 작품보다 비평에, 또 시인, 소설가나 비평가의 산문집에 주어진 한층 애정어린 시선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지만, 서경식의 경우처럼 문학과는 거리가 먼 듯한 저자의 에쎄이를 문학작품으로 대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는 좀더 문제적이다. 원론적으로는 에쎄이 역시 문학의 한 장르이겠으나, 이미지나 사건에 의한 형상화라는 개념에 익숙한 탓에 시, 소설이 아닌 글쓰기를 문학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적지 않은 낯설음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따지면 문학비평은 문학인가?
“문학상의 한 부문을 평론에서 논픽션문학 일반으로 넓혀 여러 갈래의 글에 문학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은 글쓰기 자체가 문학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킬 것이라는 고종석의 지적 역시 이러한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대산문화』 2005년 여름호), 이는 비평적 작업에 의해 정초된 근대적 문학제도에 대한 괄호치기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글쓰기 자체가 문학”이라는, 일종의 문학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처럼 문학제도에 대한 권성우의 비판의 근원에는 다른 무엇보다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을 구획하고 비평과 에쎄이를 구획하고 혹은 비평과 논문을 구획함으로써 글쓰기(〓문학)의 가능성을 제한한 데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또 그런 측면에서 『낭만적 망명』과 이보다 조금 앞서 출간된 『횡단과 경계-근대문학 연구와 비평의 대화』(소명출판 2008)는 새로운 글쓰기 공간에 대한 권성우의 모색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 새로운 글쓰기가 펼쳐지는 곳이, 모든 것이 글쓰기이므로 그들간에는 가치를 잴 수 없다는 식의 무차별적인 공간만은 아닐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규정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던 제도의 바깥에서야말로 어떤 기준이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 제도의 외부에서라면 그 기준은 아마도 글을 쓰고 있는‘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바, 권성우가 해설이 아닌 가치평가에서 비평의 사명을 찾으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실은 판단의 기준으로서의 비평가‘나’를 드러내라는 주문에 다름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문청시절 이래로 권성우가 에쎄이적인 비평에 매혹되었던 것 역시 거기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나’를 만났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일인칭 주어를 쓰거나 내면을 고백할 때 드러나는‘나’는 단지 사회의 한 개인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나’가 어떻게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낭만적 망명』은 재일조선인 서경식은 물론 임화, 에드워드 싸이드, 카라따니 코오진이 보여준, 온갖 제도와 관습,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나’를 구하려는 고투를 기리기 위한 책이다. 그렇게 자유로워지라는 윤리적 명령이 바로‘나’의 기준이며, 그 기준을 따를 때 비로소‘나’가 찾아진다. 그리하여 끝내는 일인칭 주어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고백이라는 제도로부터,‘나’라고 믿어왔던 어떤 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려 할 때‘나’가 드러난다. 그‘나’가 드러나는 글쓰기, 혹은 그‘나’를 찾아가는 글쓰기의 조건이 망명이라면, 망명이 필요한 것이 권성우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