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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연수

김연수 金衍洙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스무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등이 있음. larvatus@netian.com

 

 

 

장편연재 1

바다 쪽으로 세 걸음

 

 


│연재를 시작하며│

 

십여년 전 삼십대에 세편의 장편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세편 다 지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이었다. 이미 두편은 썼다. 『꾿빠이, 이상』과 『밤은 노래한다』. 세번째가 이 소설이다. 그간 “왜 자꾸 역사 속으로 숨느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 질문에 답하자면, 자료를 열심히 읽고 취재를 다녀야만 쓸 수 있는 소설을 한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쓰고 싶어서였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올해 기축년, 만으로 서른아홉살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소설을 다 써야 십여년 전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셈이 될 텐데, 매번 약속을 지키면서 살았던 사람이 아닌지라 그런 건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끝까지, 내가 쓰고자 원했던 그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앞서의 두편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오래전에 읽은 짧은 문장에서 시작했다. 운이 좋아서 신복룡 선생이 정리한 스물네권짜리‘한말 외국인 기록’씨리즈를 천천히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임진왜란 당시에 에스빠냐 신부를 만난 조선인 소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왔다. 그게 H.B.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에 나오는지, F.A. 매킨지의 『대한제국의 비극』에 나오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인 불가능이다. 이사한 뒤로 내 서가는 엉망진창이라 그 책들을 찾을 수가 없다. 어떤 책인지에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조선인 소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풍문처럼 적혀 있었다. 풍문 같은 것이어서 나는 그 문장에 매료됐고, 지난 십년간 틈틈이 그 소년들에 대해 찾아봤다.

 

여기까지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과정이고, 다른 얘기를 좀 해야겠다. 한동안 다른 기축년, 그러니까 1589년을 다룬 조선왕조실록을 하염없이 읽었다. 실록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이 많이 들었다. 그게 다 지난해 정권이 바뀐 뒤, 권력이 역사를 아름답게 분식(粉飾)하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실록의 아름다운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닫게 됐다. 도움이 된 것도 있다. 망루에 올라간 용산 철거민들을 진압하는 걸 지켜보면서 조선시대 관군과 관리의 성격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알게 됐다. 싸이코패스가 아닌 다음에야 불에 타죽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그걸 직시하지 못하면 이 소설을 끝낼 수 없게 돼서 더욱 괴로웠다. 첫회를 쓰는 동안, 여러날 그 죽음들이 생각났다. 명복을 빈다.(2009.2)


 

 

바다 쪽으로 세 걸음

 

 

1

 

마침내 그 일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끝마쳤을 때, 나는 내게도 그와 비슷한 무용담이 하나쯤은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나는 훌륭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손뼉을 치고 모두에게 술을 권했다. 뜨거운 지방의 냄새 나는 술이나마 바꾸후(幕府)의 배신자들이자 사교의 추종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 무사들에게 죽음의 상인으로서 나는 얼마든지 술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이럴 때, 내게도 들려줄 무용담이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나는 건 모두 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구차하게 저지른 죄악뿐이어서 아쉽기만 했다. 난 살아 있는 인간의 살점을 뜯어내어 먹어보거나, 손바닥에 대못을 박아 십자가에 매달고 과연 며칠 만에 숨이 끊어지는지 관찰하거나, 혹은 끓는 기름에 통째로 밀어넣었다가 너무 빨리 죽은 걸 알고 아쉬워해본 일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달리 죽음의 상인으로 악명을 떨쳤겠는가? 이제 나는 죽음을 사거나 팔 뿐, 직접 죽음을 만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지난 십여년 동안 나는 충분한 양의 은을 모았으므로 이제 오랜 꿈을 이룰 일만 남았다. 마르내(乾川洞)로 돌아갈 때는 다시 착하고 순한 완(宛)이 되고 싶었다.

“이 짐승들이 국왕폐하의 포도주 맛을 알까?”

털북숭이 가스빠르에게 뽀르뚜갈어로 물었더니, 독설이 돌아왔다.

“차라리 돼지 똥구멍에 쏟아붓는 게 낫지 않을까. 구더기 썩는 것보다 더 더러운 이야기를 들었네. 오, 주님이시여.”

그러면서도 가스빠르는 웃는 낯이었다. 가스빠르는 늘 일본인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두개의 단검을 두려워했다. 그렇게 겁이 많은 주제에 은화만 준다면 돼지 똥구멍을 핥으러 지옥까지라도 갈 녀석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는 걸 보고는 그 일본인이 소리를 질렀다.

“저 돼지 똥구멍이 자꾸 벌렁대며 나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네. 어떻게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는데. 난 포도주를 가져올 거야.”

“아깝지도 않아?”

가스빠르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 말했다.

“어차피 여름이 오기 전에 다 마셔야 돼.”

밖으로 나갔더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기척을 듣고 벽에 붙어 있던 도마뱀 몇마리가 어둠 속으로 황급히 몸을 감췄다. 다행이었다. 아무도 내가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땀이 식으면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멍하니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건너편 초희와 아이가 있는 방에서 불빛이 어른거렸다.

“당신은 헛된 꿈을 좇고 있어. 당신이 모을 건 은화가 아니고, 당신이 갈 곳은 그 끔찍한 왕국이 아니야. 난 하느님의 나라로 갈 거야. 당신을 따라가지 않을 거야. 절대로.”

버림받을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드는 여자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려 들기 때문에 성가시기만 하다.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남자들의 무릎을 꺾어버리는 유일한 무기는 말뿐이었으므로 그녀들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쉬지 않고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하지만 초희가 내게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나는 무감각해졌다. 내가 저지른 죄가 있다면 고작 이런 것들뿐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함으로써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버리는 일. 임종 자리에서 그런 걸 죄라고 고백하다간 두고두고 교구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빠드레(神父)들은 그런 일들까지 시시콜콜 얘기하는 순진한 신자들을 살인자보다 더 싫어했다. 그들의 고백성사는 식사시간이 되어서도 끝날 줄을 몰랐으니까.

나는 두 손으로 빗물을 받았다. 저 돼지 똥구멍 같은 입을 가진 일본인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자면 일단은 잘 드는 칼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람을 죽여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거렸다. 이 악마의 자식들! 우리가 실수하기라도 하면 쎄스뻬데스 신부는 그런 욕을 퍼붓곤 했다.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나의 불쌍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욕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형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형은 그냥 형이었고, 나는 형의 그림자였다. 그림자가 없어도 형은 형이었지만, 형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모두 고인이 됐다. 먼저 정답고도 사나운 우리의 쎄스뻬데스 신부님이. 그다음에는 형이. 형이 죽었다는 소식은 방금 전에야 처음 들었다. 이런 얘기 그만하고 싶지만, 요점은 간단한다. 쎄스뻬데스 신부에게서 그 욕설을 들을 때마다 살의를 느꼈더니, 나중에는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 말이 귀에 들렸다. 이 악마의 자식들! 그러니까 지금 그 소리가 내 귀에 들리고 있는 것이다. 신부님이 살아 계셨다면, 매로 나를 다스렸을 것이다. 비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나는 손에 받은 빗물로 얼굴을 씻었다.

고개를 드는데, 맞은편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거기 어둠 속에서 파란 눈동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무 밑에서 꼬리깃을 활짝 펼친 수컷 공작이었다. 어딘가에 암컷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수컷의 꼬리깃에 있는 그 외로운 무늬들, 푸른색의 타원들을 보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생각났다. 이건 말하자면, 쎄스뻬데스 신부님이라면 넌더리를 낼 만큼 길고도 지루한 고백성사인 셈이다. 이 악마의 자식들! 이 악마의 자식들! 그렇지만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신부님도 내 죄를 용서하실 수밖에 없을 테지. 하지만 용서받지 못해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해도 이젠 어쩔 수 없다.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종말을 고하고 싶을 뿐이니까.

 

 

2

 

여섯살이 되던 해 여름, 말레이 공작 한쌍이 배를 타고 부산포로 들어왔다. 공작 옆에는 조총(鳥銃)이 두자루 있었는데, 그 이름 때문에 공작들이 호신용으로 가져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건 나중에 겁에 질린 조선인들이 날아가는 새도 맞혀서 떨어뜨린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니까. 그때는 일본인들이 소개한 대로 철포(鐵鍜)라고 불렀다. 철포에 대해서 말하자면, 조선(그렇다, 나는 조선인이다) 정부는 그런 신무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조선 정부는 되도록 고전적인 무기를 선호했는데, 우선 당시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은 기근과 부역에 시달리다가 유리걸식한 뒤 결국 도적 무리가 되는 백성들이었으므로 굳이 신무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진압이 가능했고, 둘째로 공연히 강력한 무기를 들여왔다가 반역집단들에게 넘어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고, 셋째로 군포(軍布)를 내지 못해 군문에 남게 된 병사들에게는 그 무거운 무기를 들고 다닐 만한 열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총이야 그렇다 치고 공작이야 구경할 만하지 않겠느냐마는 관리들에게는 그것 역시 처치곤란의 동물에 불과했다. 대마도에서 오는 세견선이나 특송선을 굳이 받아들이는 것은 남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들을 달래려는 고육책이기도 했지만, 나름 그 배를 통해 들어오는 물품이 유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컨대 후추와 소목(蘇木)과 주석과 단향(檀香) 같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교역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견선(別遣船)이었던지라 관리들이 왜관의 다례의(茶禮儀) 자리에 올라가 붉은색 도서(圖書)가 찍힌 서계(書契)를 들여다보니, 거기에 달랑 두가지 물품, 즉 공작과 철포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조선 관리들에게 그건 꽤 난감한 진상품이었던 게 분명했다. 바로 그때 수컷의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구슬프게 들렸다. 그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보니 남방의 기이한 새는 더욱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선물처럼, 심지어는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일본 정부가 성의를 담아서 보내온 물품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관리는 즉시 공작과 철포가 입국됐다는 내용의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물론 거기에 울음소리나 불길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한달이 지나서야 절차에 따라 공작과 철포를 서울로 보내라는 명령이 조정에서 내려왔다. 한달이면 졸지에 공작을 돌보는 일까지 떠맡게 된 관노(官奴)들의 저주를 받아 공작 내외가 돌연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건만 그 새들은 쌀가루를 집어먹으면서도 무럭무럭 살이 찌기만 했다.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몇끼 정도 굶는 건 일상다반사였으니(굶는 게 일상다반사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형이여? 역시 이 세상에 형이 없다고 생각하니 무엇도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다) 공작이 먹을 쌀가루를 훔쳐먹는 걸로 모자라 자식에게 먹이려고 훔쳐가는 관노까지 있는 마당에 공작 내외로서도 죽는 시늉을 하기에는 좀 미안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찰방(察訪)의 명령을 받은 역졸들은 공작을 각각 우리에 넣은 뒤, 조총과 함께 수레에 실었다. 그때 읍민들이 모두 공작을 구경하려고 성 밖으로 나왔는데, 우리에 갇혀서 그들을 바라보는 공작들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성으로 압송되는 수괴 내외처럼 흉악해 보였다. 옆에는 조총까지 있었으니 그 섬뜩한 효과는 더했다. 모이면 폭도가 되고 흩어지면 양민이 되는 게 그 나라 백성들의 처지였으므로 역졸들이 해산하라고 창으로 위협했건만 사람들은 뭔가에 단단히 홀린 듯 계속 수레를 따라왔다. 행렬이 이어지자, 성 밖에서 개들과 함께 흙을 파먹고 살아가는 천민들까지 따라붙었고, 후미에서는 두달 전 관아의 창고를 습격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졸들이 공작들을 강변까지 끌고 가서 목을 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리하여 강가의 미곡창에 도착했을 때는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서 공작을 죽이지 말라는 소리가 하나둘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만난 역졸들은 수레 쪽으로 밀고 드는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외쳤으나, 일단 흥분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개중에는 임박한 공작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과 집으로 가서 농기구를 들고 오겠다고 설레발을 치는 자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뜻밖의 강경한 저항에 역졸들은 당황해서 사람들을 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그 바람에 울던 아이 하나가 팔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생김새로 봐서는 노비의 자식이 분명한 그 아이는 창에 찔려 아프기도 했지만, 하라는 심부름은 하지 않고 공작을 따라갔다가 몸까지 다쳤으니 나중에 주인에게 매 맞을 일이 더 두려워서 피를 흘리며 땅에 뒹굴었다. 역졸들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사람들은 역졸들을 밀어내고 수레를 둘러쌌다.

“공작을 죽이지 마라. 아이를 살려내라.”

사람들은 두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는데, 역졸들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작을 죽일 생각도 없었고, 또 아이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그들은 급기야 두달 전 관아를 습격했다가 처형된 농민들의 신원(伸冤)을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폭도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해산시킨 것은 금성을 데리고 하늘 높이 오른 초승달이었다. 어스름이 내리자, 사람들은 모래알갱이처럼 흩어져버렸다. 약한 자들은 늘 밤을 두려워했다. 어둠에 둘러싸이자, 그들은 아이의 부주의함을 책망했다.

그 공작들을 말라카에서 나가사끼까지 데려간 사람이 자신이라고 내게 말한 사람은 뼛속까지 사악한 뽀르뚜갈 상인 호르헤였다. 세상에서 딱 한명만 죽일 수 있다면, 한동안 고민해야겠지만 결국 그자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은 열명 안에도 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천국에서도 신부님은 다행으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는 그 소원을 이룰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그간 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까. (“이 악마의 자식들! 이 악마의 자식들!”) 어쩌면 백발이 된 호르헤를 다시 만난다고 해도 나는 그의 심장에 칼을 꽂기는커녕 죽은 아버지를 다시 만난 듯이 반가워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뼛속까지 사악한 조선 상인 완(宛)일 게 분명할 테니까. 아버지는 어쩌자고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준 걸까? 부드러운 곡선을 가리키는 글자. 언덕이나 눈썹 모양, 혹은 복희씨와 신농씨가 살던 평화로운 옛 고을의 이름을 가리키는 글자. 여자의 이름에나 어울릴 만한 글자. 여자처럼 나약했던 조선 아이 완이 뼛속까지 사악한 뽀르뚜갈 노예상인 호르헤를 결국 죽이지 못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아직 멀었다.

말라카에서 그 저주받을 호르헤의 배에 끌려간 게 사실이라면, 공작들은 칠월에나 마카오에 도착했을 것이다. 거기서 상선은 일년을 꼬박 기다렸을 테지. 포모사(대만)해협을 항해하려면 마카오 총독의 허가를 얻어야만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호르헤 같은 인간이 항해허가가 없다고 바다로 나가지 않을 리는 없고, 일년을 마카오에서 기다렸을 거라고 추측하는 까닭은 그 큰 배에 가능한 한 많은 비단을 채워넣어야만 그자의 탐욕이 충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을에 광동(廣東)에서 열리는 비단 시장에 가서 구매자의 관상을 보고 제멋대로 가격을 책정하는 중국 상인들과 흥정해서 다음해 봄에 생산될 물량을 미리 예약하자면 호르헤는 그 재수 없는 낯짝을 펴는 데만 한 계절은 보냈을 게 분명했다. 일단 계절이 한번 바뀌면 바닷물의 방향도 변해 동쪽으로 가고자 해도 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일년 뒤, 그 공작들은 비단 사이에 누더기처럼 끼인 채 나가사끼까지 항해했겠지. 그 사나운 바다를 건너온 공작이라면 조선이나 일본의 웬만한 수군보다 경험이 풍부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바다의 용왕은 호르헤만큼 탐욕스러워 죽음의 아가리를 수만개나 가졌으니까. 반평생 그런 바다를 왕래했으면서도 죽지 않고 리스본으로 돌아가 손자들의 재롱을 볼 수 있게 된 그 운 좋은 뽀르뚜갈 선장은 그게 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기도한 덕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아직까지 사나운 바다에서도 죽지 않은 행운아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르다. 조선인 완이 살아 있는 한에는 말이다.

어쨌든 그런 바다를 건너온 공작들이 공포에 떨거나 두려워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작들에게 파도가 없는 내륙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 따위는 식은 죽을 삼키는 일보다 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 어둠 속 어딘가에 있었을 파란 눈동자들을 상상하면,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밤새 강가의 창고를 지키던 역졸들이 단 한번이라도 문을 열고 어둠 속을 들여다봤더라면 분명 그 이상한 무늬들을 발견했겠지. 달빛도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 그 어떤 감정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다만 눈동자 같은, 빛을 받으면 색깔이 달라지는 호르헤의 눈동자 같은, 어둠 속에서 이쪽을 쏘아보는 듯한 그 파란 눈동자들 같은 것을. 그랬다면 그게 얼마나 이상한 무늬들인지, 그게 얼마나 신비로운 무늬들인지 알아차렸겠지. 이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새들의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무늬. 이튿날, 공작들을 태운 배는 노란 돛을 올리고 잠자리 날개만큼이나 투명해진 팔월의 노란 빛 사이로 느릿느릿 지나갔다. 그 물길은 두달 전 일본 사신 일행이 지나간 바로 그 길이었다.

 

 

3

 

완이 여자 이름이라면, 규(揆)라는 건 남자 이름일 것이다. 뭔가를 헤아려 법을 만들어내는 벼슬아치들에게 어울릴 만한 이름. 그런 뜻의 이름이라면 형이 아니라 내게 붙였어야만 했다. 형에게는 오히려 완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보자면 인생의 모든 일들은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간다고 말하는 게 제대로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이라는 것도 그렇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은 고향 같은 것이라 어느 때고 돌아가고 싶다고만 말하지만, 막상 그때로 가보면 끔찍한 공포의 순간들이 대부분이란 걸 알고는 깜짝 놀랄 것이다. 나와 형이 보낸 어린 시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충신과 효자와 열녀의 나라에 태어났으니까. 그런 곳에서는 오직 강하고 대담한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머뭇거리다가는 당장에 목이 날아갈 테니까.

그 나라의 가을은 북동풍이 불면서 시작됐다. 가을바람은 구름을 높이 띄우고 밤을 길게 만들었다. 우리가 아직 어렸던 시절, 밤이 길어지면 할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가래가 끓는 낮은 음성으로, 느릿느릿. 외적이 침입하자 집을 불태운 뒤 가족과 함께 연못에 뛰어들어 죽거나, 왕이 그 미색을 탐내 후궁으로 삼으려 들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코를 베어버리거나, 병든 아버지를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낸 사람들을 칭송하는 노래를. 이따금 타구에 가래를 내뱉으면서.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운화지(雲花紙)를 바른 벽에서는 두개의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그러니까 코를 잘라내고, 연못으로 뛰어들고,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나와 형의 그림자들. 고통이 완벽하게 제거된, 아름다운 삼강(三綱)의 세계. 소리가 없는, 책 속 목판화처럼.

한없이 이어질 것 같던 노래가 끝나면, 할머니는 죽는다, 죽는다 앓는 소리를 내며 귀신이 되어서도 우리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되는지 지켜보겠노라고 몇번이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질세라 그 무릎에 엎드려 오른손 검지를 내밀었다. 할머니가 병들어 자리에 누우면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서,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서 피가 흐르면 할머니 입에 넣어 드리리라고. 할머니가 병들어 자리에 누우면 도끼로 손끝을 잘라내, 도끼로 손끝을 잘라내 불에 태워 그걸 빻아 입에 넣어 드리리라고. 노래하듯이, 우리도. 그럴 때면 할머니의 그림자는 좋아서 쭈글쭈글한 입을 벌리며 웃었다. 할머니의 입 안은 침으로 끈적거렸다. 당장이라도 먹어치울 것처럼 이빨이 빠진 입으로 우리 손가락을 번갈아가며 빨아댈 때, 나는 뱀이나 개구리, 혹은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의 코로 들락거린다는 손가락만한 하얀 쥐 같은 것을 떠올리곤 했다.

형은 마당을 기어다니며 흙을 집어먹고 나는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던 시절, 아버지는 서인(西人)의 우두머리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섰다가 함경도 땅으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근사록(近思錄)을 좀 읽고 싶기도 하고, 쉬고 싶기도 해서……”라는 게 만삭의 어머니에게 남긴 아버지의 이별담이었는데, 그 일로 가세는 완전히 기울어 노비들도 대부분 팔아치워야만 했다. 아버지의 여러 친구들이 먹을 것을 보내주긴 했으나, 자존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들어오는 음식이나 옷감 혹은 물품 같은 것들을 모두 다른 집에 선물로 다시 돌려보낸 뒤, 가재도구를 챙겨 어린 형을 이끌고 친정인 전주로 내려갔다. 그때 할머니는 땅을 파먹는 한이 있더라도 마르내 집만은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안방에서 나와보지도 않았는데, “독하다 독하다 하지만 그렇게 독한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한 게 할머니인지, 어머니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쏭달쏭하다. 어쨌거나 “필시 내 꼴이 보기 싫어서 떠나는 게지”라는 건 독설의 대가인 할머니의 말임에 분명했다.

유배기간 아버지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집안 사람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형이나 친척들에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그리고 내 기억 속의 아버지란 동상으로 오른쪽 발가락 두개가 잘려나가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걸었던 탓에 멀리서 봐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함경도 갑산에서의 독서와 휴식은 아버지의 건강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한 일년 정도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다 보면 다시 옥당(玉堂), 그러니까 홍문관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게 그 젊은 관리에게 탄핵을 사주했던 자들의 말이었는데, 세번의 겨울을 보내고 나서도 서울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그 일로 아버지의 마음은 크게 다쳤다. 삼년이 지나 달관한 듯한 풍모로, 또 달리 말하면 어딘가 다른 세상을 헤매다가 온 사람처럼 넋이 빠진 채 유배에서 풀려난 아버지는 서울 마르내 큰 집이 귀신이나 살 만한 폐가가 되어 있고, 그 집에는 정말 귀신이라 해도 좋을 만큼 늙어버린 노모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불원천리하고 형과 나를 빌린 말에 태우고 서울까지 올라갔다가 며칠째 대성통곡하는 아버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만하면 생각보다 집은 멀쩡하오. 상것들처럼 소리내어 울지 마시오.”

어머니의 말에 할머니가 발끈했다.

“그럼 너는 이 집이 얼마나 박살났으리라고 생각했단 말이냐? 그래서 삼년 동안 코빼기 하나 안 보인 모양이니, 네가 바로 공자님 뺨을 때릴 아이로구나.”

“몸종인 봄동이는 걸어간다고 치더라도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면 말을 두 필은 빌려야만 하는 것인데, 제가 무슨 수로 두 필씩이나 빌릴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도 아이들을 앞뒤로 태우고 천릿길을 다녀보시고 나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나중에 할머니는 어머니의 그 상경 소감을 두고두고 씹어댔다. 할머니의 충효교육에 매번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불충하고 불효하는 이는 바로 우리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의 자식들인 우리가 충신과 효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으니 할머니의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갑산에 유배를 갔으니 유배 삼년이 삼수갑산에 간 것과 같다고 말해도 무방하겠지만, 그래봐야 아직도 관직에 남은 친척들이 수두룩했고, 마르내의 그 큰 집이 엄연하게 유지되고 있었는데 그 삼년의 일들이 나중에 어른들이 즐겨 들려준 회고담처럼 매양 끔찍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형 역시 전주 외가에서 보낸 시절을 늘 즐겁게 회상했다.

그렇긴 해도 그 삼년은 아버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권력은 언제나 무상한 것이었지만, 또 그렇게 무상한 탓에 쥐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감미로운 것이기도 했다. 나는 마카오에서 머물던 시절에야 비로소 주희(朱熹)의 책을 처음 읽어볼 수 있었는데, 그 책에서‘君子之遇艱阻 必自省於身’(군자는 막힘과 어려움을 만나면 반드시 자기 스스로를 반성해본다)이라는 구절을 읽으며 변방의 참혹한 땅으로 떠나는 젊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산에 이르러 아버지는 자기 스스로를 반성했을까? 그때 내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으로서는 유배지에서 아버지가 『근사록』을 읽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서울로 돌아온 아버지는 기왓장이 부서지고 풀들이 돋아난 지붕을 수리했고, 마당의 잡초를 제거했다. 곧 아버지는 다시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했고, 백비(伯嚭)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반대세력을 권력에서 몰아내는 데 열을 올렸다. 그 결과 우리 가족은 부평초처럼 뿔뿔이 흩어져버렸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런 기질을 사랑한다. 죽는 일이 그저 잠자는 일이라도 되는 양 겁내지 않고 삶의 적들을 끝까지 쫓아가 섬멸하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기질은 형도, 나도 물려받았으니까.

아버지가 유배에서 돌아온 뒤로 몇년간은 우리 가족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던 마르내의 그 집에는 다시 활기가 넘쳤다. 지방 수령으로 내려간 친척 어른이나 아버지의 친구들이 보내오는 곡식과 음식과 이런저런 토산품들이 철마다 배에 실려 서울까지 올라왔다. 명절이 되거나 중국 사신이 다녀가면, 임금은 또 연회에 쓰고 남은 귀한 음식이나 중국에서 들여온 옷감을 보내왔다. 비록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의 앙금은 전혀 풀리지 않았지만, 녹봉도 밀리지 않고 받았기 때문에 그 시절의 우리 집에서는 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키리시딴(キリシタン)을 저주하면서 나가사끼 항구를 떠난 내가 크리스탕(Kristang)들의 마을에서 삶을 마감하리라는 사실을 천국에 계신 우리 형이 안다면, 빙그레 웃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뽀르뚜갈 남자와 말라카의 현지 여자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인 크리스탕들이 믿는 신과 일본의 천주교도들인 키리시딴들이 믿는 신은 같아야만 했지만 둘 다 경험한 내가 보기에는 키리시딴의 신이 더 잔인했다.) 여기에서 내가 사는 집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유명한 아 파모사(A Famosa) 요새만큼이나 훌륭하다.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인생에서 가장 풍족했던 집은 마르내의 그 집이었다. 나는 세살부터 여섯살까지 그 집에서 살았는데(고작 삼년이라니, 주여!), 그때 나는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그 집에서 우리는 보호받았고, 그 집에서 우리는 평안했고, 그 집에서 우리는 행복했다. 그 시절에 우리는 하나의 불빛을 바라보며 잠들곤 했다. 새우를 잡는 크리스탕들에게 물어보면 성인 중에는 어부였던 싼 뻬드로가 제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친구들에게 새우를 얻어먹으려면 그 말에 동의하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한다. 고지식한 친구 마리오처럼 크리스탕의 신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절대로 새우를 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호를 그을 마음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키리시딴의 신을 생각하면 미치광이처럼 분노를 터뜨린다. 키리시딴의 신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멸망하는 게 정의로울 그 엉성한 왕국(내게 용맹스런 스페인 군인 천명만 준다면, 나는 그 왕국을 지금 당장이라도 멸망시킬 수 있다)의 불빛 하나만큼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 불빛은 밤마다 마르내의 집에서 곧바로 올려다 보이는 산의 봉우리에서 타올랐다. 그건 남쪽의 해안과 북쪽의 변방에 주둔한 수비대와 연락하는 봉수대의 불빛이었다. 불빛이 하나라면 온 나라는 평안하다는 뜻이었다. 만약 다섯개의 불빛이 모두 밝혀진다면, 그건 외적이 침입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외적이 침입해 도성이 함락되는 일이 생긴다면, 제일 먼저 집을 불태우고 성문 밖 남쪽 연못으로 가서 함께 줄로 몸을 묶은 뒤에 뛰어들자고 형과 나는 맹세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신의 효자들이었으므로. 매일 밤, 우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어두운 산을 올려다봤다. 그 집에 사는 동안에 불빛은 늘 하나였다.

 

 

4

 

그해 기축년, 소의 해에 형은 아홉살, 나는 여섯살이었다. 아홉살이 되자, 아버지는 형을 봉수대가 있는 산속에 초가를 짓고 사는 노인에게 보냈다. 아버지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 노인은 젊은 왕의 신경질적인 반응 앞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볼 수 있었던 유일한 판서였다고 했다. 노인에게는 충청도에 농장도 있었고, 마르내에 큰 저택도 있었다. 죽은 할아버지(기생이 아닌 다음에야 세상 누구에게 손톱만큼도 득될 게 없었던, 집 밖에만 나가면 둘도 없는 호남이자 미남이라고 할머니가 주장한)와는 절친한 친구였던데다가 같은 동네에 사는 어른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역시 그에게서 주자의 책들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그때만 해도 사화(士禍)의 기억이 생생했던지라 사람들은 주자의 책을 일부러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스승이니 아들의 교육도 맡기면 될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하인만 수십명이라는 마르내의 집을 마다하고 봉수대를 관리하는 봉졸들도 올라가기 싫어하는 남산 기슭에다가 초가를 지었다는 사실에서 아버지는 뭔가 수상쩍은 낌새를 알아챘어야 했다. 그 수상쩍은 낌새를 나는 글을 배우러 간 첫날, 벌레들이나 먹을 만한 솔잎을 잔뜩 들고 산에서 내려온 형이 배가 아파 죽을 것 같다면서 데굴데굴 마루 위를 구를 때부터 알아봤다.

“아이고. 어릴 때부터 애가 마당을 기어다니며 검은 흙을 주워먹는데도 생전 내다보지도 않은 독한 어미 때문에 드디어 우리 맏손주가 죽는구나.”

아침까지 멀쩡하던 아이가 사색이 되어 죽을 것 같다고 소리를 지르니까, 놀라서 달려온 할머니가 형을 안고는 한발 늦게 들어온 어머니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연세와 상관없이 할머니는 매사에 동작이 빠르고 셈에 밝았고 어머니는 느리고 신중했는데, 결국 풀리지 않고 끝이 난 두 사람의 갈등은 이런 성격차이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저는 집안일이 많아서 못 봤지만, 검은 흙을 먹는 걸 두고 본 분도 계셨던 모양이네요. 멀쩡한 녀석이 죽는다 죽는다, 앓는 소리를 하는 건 누구한테 배웠을까? 좀 일어나면 어떻겠니?”

야단법석인 할머니와 달리 어머니의 목소리는 짐짓 궁금한 게 있다는 듯이 차분했다. 그토록 느릿느릿한 어머니였건만 우리가 꾀를 피우는 건 범처럼 재빨리 알아차렸다.

“누구한테 배웠냐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어머님도, 참. 그걸 알면 제가 공연히 왜 물어보겠어요?”

“사사건건 어디다가 말대꾸냐? 네 말에 뼈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애가 아프다는데, 어미로서 그게 할 말이냐? 누구한테 배웠냐니? 왜 말이 없느냐?”

할머니가 소리쳤다.

“왜 말이 없느냐고?”

“말대꾸하지 말라고 하시니, 말대꾸하지 않는 것이지요.”

어머니가 꼬리를 내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태어난 곳은 충신과 효자와 열녀의 나라라고. 기세등등하게 시작해도 어머니가 늘 할머니에게 질 수밖에 없는 데는 정책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곽의원을 불러서 침을 좀 맞아야 될 것 같네. 봄동아, 내려가서……”

할머니의 분통을 가볍게 누르며, 어머니가 말했다. 명례방 곽의원은 해동(海東)의 편작(編鵲)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십년간 『황제내경』을 탐독한 뒤, 편작의 침술을 상고해서 일반 의원들의 침보다 두배는 큰 침으로 시술하는 방법을 알아낸 괴짜였다. 그 방법에 부작용이 있다면 통증도 두배에 달한다는 점이었는데, 덕분에 명례방 곽의원이라고 하면 앓던 아이도 싱글벙글 웃음을 지을 정도였으니 꾀병에 있어서만은 편작의 경지에 이미 이른 셈이었다. 형은 명례방 곽의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한쪽 눈을 살짝 뜨고 주위를 살피더니 열병으로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침보다는…… 곶감 하나만 먹으면 될 텐데……”

그 말에는 할머니도 대를 이을 맏손자의 엉덩이를 후려갈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가 아프다는 형의 말이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다. 형의 얘기에 따르면, 초가에 올라가자 노인은 빙긋 웃으며 막 올라온 형을 데리고 계곡으로 한참 내려가 복사꽃 아래 시내에서 발을 씻고는 햇살 아래에서 한동안 병든 닭처럼 졸고 있다가 느닷없이 “어때, 예쁘지?”라고 물었다고 한다. 복사꽃이 예쁘다는 것인지, 햇살이 예쁘다는 것인지, 아니면 번쩍 눈을 뜰 때의 그 솔방울 같은, 마치 형을 책망하는 듯한 그 눈동자가 예쁘다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충군사상에 입각해서 형은 무조건 예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아이라고 형을 칭찬한 뒤, “그럼, 오늘 배울 건 다 배웠다”며 점심이나 먹고 그만 내려가라고 말했다. 밥 준다는 소리에 형이 흐느적거리는 몸을 추슬러 초가까지 다시 기어올라갔더니 거기 하인이 마루에 올려놓은 지승반 위에는 솔잎이, 그것도 한움큼 들어 있는 놋그릇만 달랑 두개 놓여 있었다. 노인은 그걸 점심이라고 쩝쩝 소리를 내면서 맛있게 먹었고, 형은 어른이 다 드실 때까지는 숟가락(같은 게 있을 리 없었지만)을 들지 않는 게 어린 군자의 기본이라는 듯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노인이 솔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그걸 먹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고, 마침내 형은 솔잎을 입 안 가득 집어넣었다. 하지만 덥석 씹었다가 쓴 물만 잔뜩 나오는 통에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데 마루 옆에 선, 피골이 상접한 얼굴의 하인이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듯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표정에 지기 싫어서 형은 씹지 않은 솔잎들을 꿀꺽 삼키고 나서는 “정말 맛있네요, 이거”라고 웃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형이 들고 온 솔잎이 가득 든 보따리는 그 웃음의 댓가였다.

대궐에서 숙직하고 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하니, 아마도 선생께서 도(道)로 돌아가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고 평했지만(누군가의 행동을 자꾸만 평하려는 건 대궐에서 하는 일 때문에 생긴 아버지의 오랜 병이었다) 뱃속에 거지떼가 들어 있는 내 눈에는 노인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미치광이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노인은 가르쳐준다던 『소학(小學)』은 펴보지도 않은 채, 숨이 한없이 길어지면 일월(日月)의 운행이 멈추기 때문에 늙음을 피할 수 있다는 둥(그러니까 그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 얼굴로!), 땅은 비단과 같은 것이어서 펼치면 들판이 되고 접으면 봉우리와 계곡이 되니 신선들은 이동할 때 땅을 접어서 한 걸음에 백리씩 뛰어다닌다는 둥(그렇다면 세 걸음이면 삼백리!), 횡설수설 말도 안되는 소리를 끝없이 늘어놓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오늘은 뭘 배웠느냐?”고 묻는데 축지법을 배웠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형은 혼자서 『소학』을 공부해야만 했다.

“‘솔성지위도’라는 게 솔잎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말이지?”

내가 묻자, 형이 내 뒤쪽을 가리켰다.

“저걸 다 먹으면 내가 가르쳐주지.”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엔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그럼 나는 그냥 그런 거 모르고 살래.”

어쨌거나 책이라는 게 묘한 것이어서, 그게 아니라면 형이라는 사람이 묘한 이여서, 혼자서 뜻도 모르는 책을 중얼중얼 읽었을 뿐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됐다. 형은 책에서 읽은 걸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 초가에 다니기 시작한 지 한달이 지나지 않아 형은 첫닭이 울면 세수하고 양치질한 뒤에 머리를 빗었으며, 두짝문과 외짝문을 출입하거나 자리에 나아가고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어른들의 뒤에 하는 법을 알게 됐다. 밤의 삼강이라면 새벽의 육덕(六德)이라는 소리인지 내게는 유독 새벽에만 형이 열심히 도를 닦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까닭은 새벽부터 일어나 중얼중얼 책을 읽는 통에 내가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덕의 세계에 빠진 뒤로 형은 더이상 그림자놀이도 하지 않고, 전쟁놀이도 하지 않았으니 나로서는 좀 심심했다. 내가 같이 놀자고 조르니 형은 내게 동서남북도 모르는 녀석이라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남산이 있으면 거기가 남이요, 대궐이 있으면 거기가 북이고, 해가 뜨면 거기가 동이고 해가 지면 거기가 서인데 내가 어찌 동서남북을 모르겠는가,마는 형이 말하는 동서남북을 모르는 녀석이라는 소리는 『소학』에 나오는, 아마도 뽀르뚜갈 사람들 같은 야만인들을 지칭할 때 쓰는 그럴듯한 말이라서 “동서남북을 내가 왜 몰라? 날 무시하는 거야?”라고 내가 빡빡 대들자, 형은 또 형 나름대로 답답해했다.

그즈음부터 형에게 생긴 새로운 버릇은 자꾸만 시를 지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건 아마도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는 뒷간에서 솔잎 먹은 설사를 해댈 때마저 “잠시 서쪽 마루에 앉으니 강물처럼 시원하구나(少坐西軒淸似水)”라고 읊조리던 솔잎 노인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형이 지은, “겨울이 가니 아름다운 봄이 찾아오고, 매화꽃 지니 마음 하나 남았네(冬去佳春來 梅落一心在)”라는 시는 지금도 기억 난다. 그때 나는‘아, 시를 짓는다는 건 아무렇게나 써놓고는 해석하기 나름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그 노인의 영향을 받아 아홉살의 나이에 형이 그런 알쏭달쏭 알듯말듯한 소리를 종이에 늘어놓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평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아버지의 동료들은 이구동성으로 형이 위대한 문장가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자기 편인가 아닌가를 따져보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런 하나마나한 소리를 칭찬으로 듣다가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인생 망치기 십상이었다.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버지였으니까(뭐, 그렇지 않더라도 제 자식을 천재라고 말하는 건 사대부의 망신이니까) 아버지는 형이 정적(政敵)이라도 된다는 듯이 아까운 종이만 버리는 녀석이라고 평했다. (“그는 매화를 업신여기고 종이를 매우 가볍게 여겼으니 파직시키기를 청합니다.”) 그 말을 들은 형은 하루종일 종이에다가 먹을 칠했다. 시를 쓰는 건 모르겠으나 그건 상당히 재미있어 보였기에 나도 옆에서 종이를 펼쳐놓고 나름 분위기 잡아가면서 먹을 칠했다. 그 일로 우리는 아버지에게 무릎이 꺾이도록 종아리를 맞았다. 형은 몰라도 나는 얼떨결에 종아리를 맞은 게 하도 억울해서 없는 눈물까지 쥐어짜면서 울어댔으나 형은 노인에게 종아리를 돌로 만드는 법이라도 배웠는지 맞으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아까운 종이를 버리는 일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줬으니까 형은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우는 소리에 득달같이 달려온 할머니는 맞으면서도 환하게 웃는 형을 보고는 그게 다 어릴 적에 마당을 기어다니면서 집어먹은 검은 흙 때문이라고 말했다. 맞으면서도 환하게 웃는 형이라. 눈에 벌레가 들어갔는지 또 물 같은 게 나오려고 하는데, 지금 내 눈 모양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일단 방에 가서 안달루시아에서 만든, 날이 하도 날카로워 잘못 위협하다가는 인질이 죽는 수가 있으니 절대로 목 같은 데 칼날을 대는 일을 하지 말라고 엔리께가 신신당부하던 그 단검을 가져와야겠다. 저 일본인들이 왜 죽는지도 모를 정도로 취하기 전에 말이다.

 

 

5

 

복사꽃이 모두 떨어진 지 오래라 볼 게 없어서 책만 열심히 들여다봤기 때문이든, 아니면 노인이 형에게 축지법까지는 모르겠으나 축서법(縮書法) 정도는 전수했기 때문이든 봄과 여름이 지나 가을이 시작될 무렵, 형은 『소학』을 다 읽었다. 사실 우리에게 『소학』의 내용은 새로울 게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불효에 크게 상심한 할머니가 밤이면 밤마다 잠도 못 자게 괴롭히면서 연못에 뛰어들고, 코를 베어내고, 허벅지 살을 잘라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우리 머릿속에 주입했기 때문에 우린 어른만 보면 피해다니는 걸로 충효사상을 실천하고 있었으니까. 내 나름대로 주석을 달자면,‘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란 아무리 맞거나 칼에 찔려도 아프지 않은 경지를 뜻하는 것이요,‘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라면 그러므로 웃으면서 연못에 뛰어들고 코를 베어내고 허벅지 살을 잘라내는 일을 뜻했다. 그런 까닭에 “너는 형 따라 글 배우러 가고 싶지 않느냐?”는 할머니의 물음에 짐짓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일찍이 마당을 기어다니면서 검은 흙을 파먹었다는 사람이 뭐 그런 것들을 계절이 두번 바뀌도록 배워야만 아는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들려주려니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속마음을 말하자면 나도 그 책을 읽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해 가을이 시작될 무렵, 솔잎 노인은 나무상자에서 책 한권을 꺼내더니 책상에 올려놓고는 또 한참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기보다는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드디어, 결국, 노인이 솔방울 같은 눈(사실 노인이 파직된 건 다 그 눈 때문이었다. 노인은 그냥 보는데도 게으름 피우는 노비들은 다들 자신을 째려본다고 생각했다. 그건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예수회 학교에서 배운 연역법에 따라, 왕은 게으름 피우는 노비와 마찬가지다.)을 뜨고 책을 펼쳤는데, 그때 은화 상자를 본 호르헤처럼 형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컸다. 노인은 듣고 있자니 답답해서 미칠 정도로 느릿느릿 그 책의 첫 문장을 읽었는데, 더구나 중간중간에 마른기침을 내뱉느라고 쉬는 통에 안 그래도 길었던 그 1절(節)이 더욱 더 길어졌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뒤에도 노인은 그 절을 읽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1절을 다 읽은 노인이 차가운 물을 한모금 머금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가렵냐?”

형에게 묻는 노인의 목소리. 하지만 나한테 말하는 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사실 거기 들어가 있으려니 온몸이 가려웠던 것이다. 형은 몸을 긁어대느라 정신이 없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좋겠다, 네 놈은. 몸도 가렵고.”

노인이 다시 말했다. 묵묵부답. (‘뭐야, 혹시 잠든 거 아니야?’)

“얼마 전부터 내 몸에서는 이가 사라졌느니라. 해서 나는 너에게 이 책을 가르칠 수가 없게 됐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몸에 있던 이가 가르쳤다는 말?’) 너는 이 책을 나 말고 다른 선비에게 배우는 게 좋겠다. (‘다른 선비라면 제정신을 가진 선비를 뜻하는 것인가?’하지만 그런 복은 우리에게 없었다.) 그래도 읽긴 읽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을 덮기는 아쉽겠지?”

“솔잎만 드시던 분이 느닷없이 책을 많이 읽으셔서 건강을 다치실까 두렵사옵니다.”

형이 말했다. (사실 형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고, 그런 취지로 말했으리라는 게 내 추측이었다.)

“내 몸은 겨울나무처럼 말라드나, 아직 입은 살아 있으니 할 말은 하고 죽어야겠다. 일년 동안 내가 가르친(‘뭘 가르쳤다는 소리지?’) 『소학』과 더불어 이 책은 정암(靜庵) 선생이 그 자구 하나하나를 그대로 실천에 옮긴 귀한 책이다. 하지만 구부러질 대로 구부러진(‘나를 말하는 것인가?’) 사악한 간신들이 이익에 눈이 멀어 선생의 그 올곧음을 시기해 모략을 꾀하고 마침내 역모의 누명을 씌워 죽이니, 그 착하지 못함이 하늘을 찌르고, 바른 뜻이 거꾸로 서고 말았느니라. 이에 성균관의 유생과 백성들이 광화문에 모여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을 호소하는데도 쥐새끼(‘쥐새끼? 혹시 여기에도?’) 같은 간신배의 졸개들이 방패와 창으로 그들을 위협하고 주모자를 체포하자, 그들이 모두 자진해서 포승을 지고 옥으로 들어가 감옥 바깥이 오히려 죄인들의 세상이 됐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백년도 지나지 않아 그 더러운 이름들이 역사에 길이 남아 세살배기 아이부터 여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침을 뱉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게 다 무엇을 뜻하겠느냐? 간신배들의 말에 초심을 뒤집은 임금은 지금 뼈만 남았지만, 이 책은 백년이 지난 지금도 글자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 책을 읽은 선비들이 옥에 갇혀 죽임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꼿꼿했던 건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지금 네 목에 칼이 반쯤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읽어야만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그 칼날이 점점 네 목을 파고든다면 너는 어찌하겠느냐? 그래도 읽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끝내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으니 그게 정암 선생이 세상에 남기고 간 뜻이고, 아름다운 선비들의 나라에 네 이름 한줄이라도 올릴 수 있는 길이니라.”

겨울나무처럼 말랐다면서도 그 안에다가 샘이라도 숨겨뒀는지 마른기침을 추임새 삼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유장하게 노인의 말이 이어졌으니 나로서는 혼절이 아니면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다가 노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주위를 살펴보니 아니나다를까 삐쩍 마른 쥐 한마리가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마루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안 그러던 사람이 진지한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좀 어색했던지 노인은 낮잠을 핑계대며 안으로 들어갔고, 형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방금 그 문장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무극이 곧 태극이다. 태극이 움직이면 양이 생기고, 그 움직임이 극에 이르면 고요함이 된다. 이 고요함에서 음이 생기고,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다시 움직이게 된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하고(無極則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그때, 서당쥐 삼년에‘솔성지위도’해서 글을 알게 된 놈이었는지 그 쥐가 한번 움직여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으므로 나는 한번도 고요하게 있지 못하고 마루를 뛰쳐나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 집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솔잎밖에 없으니 그 불행한 쥐가 나를 먹어치우려 든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형이 『근사록』을 읽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날 저녁, 하인을 시켜 사랑채로 형을 불렀다. 나는 부르지 않았다는 게 하인의 말이었지만, 뭔가 낌새가 이상했으므로 부득불 나도 따라나섰다. 아니나다를까 아버지는 나 몰래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 집에서 내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형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앉고 보니 아버지는 늘 하던 대로 정암 조광조 선생의 인물됨에 대한 평을 잔뜩 늘어놓더니 노인이 했던 말과 대동소이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소학』과 『근사록』을 읽는다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끝까지 실천하겠다고 맹세하는 일과 다름없다는 둥 지루하고 따분한 이야기들 말이다. 덕분에 나는 그 노인이 뭔가 색다른 교육방법을 시도했다면 말년에 이르러 솔잎 생식법을 전수한 것이 있을 뿐, 평생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기회를 봐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창문 아래 붓통과 도자기를 얹어놓은 문갑을 열고는 그 안에서 끈이 달린 막대기 같은 걸 하나 꺼냈다. 을(乙)자 모양의 납작한 나무자루로 가운데에는 구리장식이 있었다. 아버지가 고리를 풀고 자루를 양쪽으로 잡아당기자, 왼쪽은 칼집으로, 오른쪽은 칼로 나누어졌다.

“이건 패도(佩刀)라는 것이다. 나 역시 아홉살에 침을 묻히며 처음 『근사록』을 넘기기 시작했을 때, 너희 조부에게서 산 것이다. 여기 칼등에 보면‘일편심(一片心)’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건 처음 대한 듯 평생 늘 새롭게 마음속에 성현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뜻에서 새긴 것이다. 패도는 물건을 자를 때 쓰는 것이라 서로의 정의가 끊어질 것을 걱정해서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 사고팔아야 한다. 갑산에서 고생하던 시절에 몇번이나 이 칼을 손에 쥐었다가 놓았는지 너희는 모를 것이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천만금을 준대도 내 몸에서 뗄 수 없는 것이지만, 네 조부에게 시 한편을 팔고 이 패도를 샀으니, 나도 이제 시 한편에 이 칼을 네게 팔겠다.”

아버지가 다시 칼날을 칼집에다 넣고는 형에게 내밀었다. 형은 그 조그만 칼이 뭐가 그리 무서운지 벌벌 떨면서 손에 쥐었다. 비단 갑산의 일들뿐 아니라 2대에 걸친 고난의 사연이 묻어서인지 갈색 자루가 만질만질했다. 패도를 손에 쥔 형은 사약을 앞에 두고 절명시를 읊는 선비처럼 앞에서 말했던 그 시, 매화 지니 마음 하나 남았다는 시를 느릿느릿, 그러니까 솔잎 노인에게서 배운 음송법에 따라 외웠다. 형의 음송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기다려(형의 낭송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좀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도 느릿느릿 시를 읊었다.

“처언하아초온거언처언 오오지지아안수우하안.”

느닷없이 내가 목을 빼고 소리를 지르자, 아버지와 형은 깜짝 놀라서 미친놈 보듯이 나를 바라봤다. 좀 창피하기는 했지만, 눈을 감고 끝까지 다 외웠다.

“그게 뭐냐?”

“제가 지은 시입니다. 天下村乾川 吾之眼水旱. 하늘 아래 마르내, 내 눈의 물기 가무네. 저도 어서 주세요.”

내가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내가 시를 지을 줄 안다는 사실에 좀 놀란 표정이긴 했지만, 곧 아직 내게 칼은 위험하니까 안된다고 말했다. 둘 다 시를 읊었는데 왜 형은 주고 나는 주지 않느냐고 내가 반박하자, 더듬더듬 『동몽선습』이나 다 떼고 나면 사주겠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주겠다. 사주겠다. 사주겠다. 그 말만 내 귀에 맴돌았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에게는 아들한테 물려줄 패도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하늘 아래 마르내, 내 눈의 물기 가무네’라고 시를 읊은 후 얼마나 지났을까,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매번 얘기하기를, 동생은 형을 대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대하는 것처럼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임금한테는 물려줄 칼이 있고 신하한테는 없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래놓고서는 어떻게 왕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꼿꼿했던 신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처언하아초온거언처언 오오지지아안수우하안.”

내가 처량하게 시를 읊자, 그 꼴을 더이상 두고 보지 못하겠는지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아버지는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를 들어보니, 어머니가 있는 안채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둘이서 어색하게 사랑방에 앉아 있었다. 송편 모양으로 생긴 자라병 옆에 펼쳐놓은 합죽선(合竹扇)이 보였다. 부채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칼 한자루 없는 신하나 살 만한 초라한 기와집 한채가 그려져 있었다. 한참 뒤에 아버지가 가져온 패도는, 그러나 그 자리에서 당장 꺼내보니 칼날이 없는 벙어리 장도였다. 궁여지책으로 어머니에게서 얻어온 모양인데, 칼날 없는 칼이라니. 왜 아버지는 그런 칼을 내게 주셨을까? 장차 내가 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일 운명이니, 벙어리 칼로 나를 깨우치려 한 뜻이었을까? 멋진 칼을 볼 때마다 나를 위해 사가지고 온 정다운 친구 엔리께는 여러번 내게 왜 그렇게 칼에 집착하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그냥 웃고 말았는데, 지금쯤은 그 이유를 알게 됐겠지.

 

 

6

 

내 비록 마루 밑에서 쥐새끼와 함께 『소학』을 뗐어도 포부만은 원대했다. 그 시절에 이런 말을 했다면, 지금은 뼈로 남았을 그 궁색하고 옹졸한 왕은 변명할 틈도 없이 나와 아버지와 형의 사지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였겠지만 나는 내 아름다운 왕국의 세자가 되고 싶었다. 그 왕국의 경계는 남쪽으로 하루종일 학생들이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리는 남학(南學)에서 북쪽으로 도성의 온갖 오물이 흘러가는 청계천까지, 서쪽으로 책을 펴내는 교서관(校書館)과 활자를 찍는 주자소(鑄字所)와 음악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장악원(掌樂院)에서 동쪽으로 붉고 푸른 옷을 입은 군인들이 활을 쏘는 훈련원까지였다. 갈릴리 해변을 거닐던 예수처럼 나는 하루종일 그 몽상의 왕국을 거닐면서 나와 함께 사람을 낚을 어부들을 찾아다녔으니, 그리하여 남산의 소나무들을 정승으로 받들고, 여름 꽃들을 판서들로 삼아 그 푸르름 아래 도열시켰으며, 초파일 집집마다 내건 연등 불빛을 백만대군으로 삼았다.

그 나라에도 백성들의 귀감이 되는 충신은 있어 책을 엮어야 할 테니, 내가 보기에는 공작이 적임자였다. 내가 처음으로 공작을 본 건 그해 백로 무렵이었다. 백로에는 비가 내려야 좋다는데, 그해에는 그 며칠 전부터 이미 서리가 내리고 날이 쌀쌀해져 흉년이 불가피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광희문 남쪽의 포구 두모포(豆毛浦)에 일본에서 온 공작들이 도착했다는 소문이 온 장안에 퍼졌다. 진귀한 구경거리가 있다면 청계천 조산(造山)에 굴을 파고 들어가서 사는 깍정이들도 하루 구걸을 포기하고 새옷 차림으로 나서는 게 서울의 풍습이었으니, 생전에 다시 오지 못할 그 구경거리를 서울 사람들이 놓칠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공작을 보러 가자는 내 말에 형은 콧방귀를 뀌었다.

“최근에 스승님 말씀하시길, 금성이 하늘에 올라 몇번이고 가로지르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는데 혹시 너는 그런 거 본 적 있냐?”

형이 말했다.

“글을 아는 쥐새끼가 마루 밑을 가로지르는 걸 본 적은 있지.”

“그게 다 불길한 징조인데, 용의 해(辰年)에 일어나면 구할 수 있다지만, 뱀의 해(巳年)에 일어나면 못 구한다니 참으로 큰일이다. 갑자기 평생 가야 한번 보기도 힘든 공작이 도성 안까지 들어온 것도 좋은 일만은 아니다.”

형이 어린 솔잎 노인처럼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어가며 말했다.

“그럼 나 혼자 가서 보고 올게.”

형은 나라가 걱정된다고 구시렁거리면서 내 뒤를 따라왔다. 공작이 도착하기로 돼 있던 장원서(掌苑署) 앞마당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쪽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애 어른 상놈 양반 할 것 없이 서로 엉겨붙어 좀체 우리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그때 앞쪽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다들 무슨 일인가 해서 발을 치켜들고 목을 뺐다. 궁금해서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하는 수 없이 사람들 발밑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손이 밟히는데 아픈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맨 앞줄로 빠져나왔다. 거기서 나는 봤다. 꼬리깃을 펼친 수컷 공작을. 그리고 그 꼬리깃에 점점이 박힌 파란 눈동자들을. 그 공작을 보는 순간, 내가 사는 나라는 운화지 위에 비친 그림자의 나라처럼 누추해졌다. 그때 나는 내가 사는 그 나라 말고도 다른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참 지나, 결국 나를 따라서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기어온 형은“공작이라는 게 왜의 꿩이었구나”라며 공작을 깎아내렸다. 그때는 수컷이 꽁지깃을 내리고 난 뒤였다. 나는 형에게 말했다.

“형은 대사간이 될 거야.”

형은 그 말에 무척 기뻐했다. 그러니 판서가 될 거라고 했으면 아버지도 나를 둘도 없는 효자처럼 바라봤을 것이다. 형이 대사간이라면 아버지는 몽조(夢曹)판서로 삼을 만했다.(그런 식이라면 아마도 그 옆에서 송조松曹판서인 노인이 솔방울 같은 눈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겠지만.)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끝내 읽어야만 한다는 둥 얘기했지만, 사실 아버지는 주희의 책보다 꿈속의 일들을 더 신봉했다. 갑산에서부터 이런 습관이 들었는데, 거기서 서울은 천릿길이라 그 어떤 방법으로도 소식을 전해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에게 패도를 물려주면서 은연중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시피 갑산에서 아버지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여러차례 자살을 결심했는데, 그렇게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를 구한 건 바로 꿈이었다. 서울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당신이 만삭의 몸으로 규와 함께 말을 타고 전주로 내려가는 걸 갑산에서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태연스레 “마음이 한번 움직이면 천리도 눈앞인 모양이네요”라고 대답했지만, 그때 어머니를 모시고 전주까지 내려갔던 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안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던 할머니까지 모두 기절할 뻔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꿈에서 그 광경을 봤다. 아버지의 꿈에는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내며 밥을 먹는 할머니도 나왔고, 막 태어나 그다지 볼 만하지 못했던 나도 나왔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꿈속에서 살구꽃이 핀 나무 아래에서 아리따운 소녀인 어머니를 만난 이야기를 했을 때, 어머니는 호호 웃으며(어머니는 그 어떤 일에도 절대 놀라지 않는, 정말 놀라운 성격을 가졌다. 말하고 보니 나는 어머니를 닮지 않은 모양이다.) 자기도 그 꿈을 꿨다고 했다. 그러면서 두분은 꿈속에서 서로 한 말을 맞춰봤다는데, 나로서는 천리나 떨어진 부부가 꿈속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때 나눈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꿈속에서 신나게 놀다가도 깨어나면 나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갑산에서 돌아온 뒤에도 아버지는 그 재주를 묵히지 않고 열심히 갈고닦기로 결심했는데, 덕분에 아침이면 형 때문에 새벽잠을 설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 앞에서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따뜻한 집에서 편안하게 잠을 잔 내가 어찌 멀리 변방 유배지에서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매번 꾼 꿈을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해서 나는 아침마다 이런저런 꿈을 지어내야만 했다. (뒷날 쎄스뻬데스 신부님 앞에서 고백성사할 때 이 일이 큰 도움이 되긴 했다.) 그렇게 매번 이런저런 꿈을 지어내면서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꿈이 어떤 종류인지 알게 됐다. 아버지는 어딘가 낯선 땅, 이를테면 복사꽃이 떠내려오는 신선세상 같은 곳에서, 그게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나오는 꿈을 무척 좋아하면서 길몽으로 여겼다. 그건 아마도 살구꽃 아래에서 소녀인 어머니와 재회한 꿈을 꾼 뒤에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형이 고지식하게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해 아버지로 하여금‘혹시 이 아이에게는 아무 재주가 없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동안에도 나는 할머니에게 들은 신선 이야기에 내가 본 화려한 꽃이나 무지개 혹은 공작 같은 동물들을 잘 엮어내 아름다운 여인들과 꿈속에서 만난 일을 떠들어대느라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도 간밤에 꾼 꿈을 우리에게 들려줬는데, 그중에서 호랑이를 만난 이야기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다.

그 꿈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 화창한 봄날, 아버지는 재주 많은(그러니까 꿈 잘 꾸는?) 한 친구와 주자의 책에 대한 얘기를 재미있게(설마?) 나누면서 복사꽃이 만발한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돌아보니 그 친구는 온데간데없고 호랑이 한마리가 아버지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아서 계속 친구에게 말하듯이 호랑이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오래 굶주려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너처럼 흉악한 괴물은 이 세상에 둘도 없겠구나. (일단 그렇게 평부터 하고.) 그러나 굳이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도 배가 부를 수 있는 길은 여러가지니 내 그중 한가지를 알려주겠노라.”

“그게 뭔가?”

호랑이가 물었다.

“아침에 해가 뜨면, 그 해를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고 기운을 들이마시면 저절로 배가 부를 것이다. 해가 떠오르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으니 그걸 익히면 평생 배고플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이미 늦었다. 모든 게 틀려버렸다.”

그 말과 함께 호랑이는 울면서 아버지 곁을 떠나버렸다. 이 꿈은 길조가 될 여러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음에도(복사꽃이라든가, 재주 많은 친구 등이 나왔으니까) 호랑이가 떠나는 걸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나 애달팠기 때문에 아버지는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결국 그건 불길한 징조가 맞았다. 아마도 꿈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혼이 빠져나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될 테니까 그것 역시 불길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에서도 우리는 그런 일을 잘 경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년 정도가 지난 뒤, 나는 아버지의 그 꿈을 떠올리며 만약 그때 아버지가 그 꿈이 끝날 무렵,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과연 무엇을 봤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아마도 아버지는 친구와 마찬가지로 흉악한 괴물 호랑이가 된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예지몽이었다. 그것만 봐도 아버지는 꿈의 판서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셈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꿈꾸는 능력은 그즈음 더욱 발달해 급기야는 식전에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오후에 찾아올 손님을 맞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비가 내리는 옥 같은 산에 너희와 함께 서 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두 남매가 찾아오더라. 그 남매는 하늘에서 살 때 너희와 한 형제였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가 말했던 남매가 찾아왔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형과 함께 사랑채로 가보니 한 남자와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형이 그 남자를 보더니 공순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남자가 솔잎 노인이 평생 가르친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건 나중에 형에게서 들었다.

“누가 완이냐?”

그 남자가 물었다. 형이 나를 돌아봤다.

“전데요.”

“네가 꿈속에서 돌아가신 우리 누님을 만났다고 하더구나.(‘도대체 누가?’) 일전에 네 아버님에게 전해 들었다. 꿈속에 광상산(廣桑山)에 갔었다면서? (‘광상산?’) 구슬과 옥으로 만들어 눈부신 봉우리가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다고 했는데, 맞느냐?”

뭐, 꿈속의 일이란 으레 그런 곳에서 일어나야만 아버지가 좋아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거기 기이한 새들도 있었겠지?”

“예, 깃털이, 울긋불긋.”

그러니까 닥치는 대로 꿈 이야기로 끌어들인 나의 충신 공작 말이다.

“맞구나. 정말 맞구나. 네가 정녕 누님을 봤구나.”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누나가 죽기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산에 올랐다. 구슬과 옥으로 만들어진 봉우리들이 겹겹이 두른 산이었다. 흰 구슬과 푸른 구슬이 서로 반짝여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지개 같은 구름이 그 위에 서려 오색이 영롱했고, 서로 부딪치면서 옥을 굴리는 맑은 소리가 났다. 그때 아름답게 생긴 두 아이(‘하나라면 내가 분명했지만, 둘이라면?’)가 나타나 그녀를 산으로 이끌었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기이한 풀과 이상한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때 공작이 나와 좌우로 날면서 춤을 췄다. 온갖 향내가 나무 끝에서 풍겨났다. 드디어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동쪽과 남쪽은 큰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온통 파랬다. 그 파란 세상으로 붉은 해가 솟구쳤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두 아이가 입을 모아 광상산이라고 말했다. 거기가 바로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라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바다, 바다, 바다. 광대한 바다 건너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그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으니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살이었다. 스물일곱개의 붉은 꽃잎이 차가운 달빛 서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다음에 누님을 꿈속에서 또 만나거든, 이 말을 꼭 전해다오. 내가 무척 보고 싶어한다고. 이 세상과 그 세상 사이에 사람의 몸으로는 건너갈 수 없는 깊고 푸른 바다가 있지만, 결국에는 그 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동안 못다 이룬 꿈을 펼치시라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 손을 잡았다.

그제야 아버지는 그 사람에 대해 설명했다. 그해에 생원이 된 그는 여덟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해 열다섯살에 이르러 이미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스무살에는 나라에서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지방의 시회(詩會)에는 그를 사칭하는 사람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원래는 마르내에 살았는데, 그때만 해도 그 남자의 아버지가 살아 있어 막 갈라진 양대 정치세력의 한 축을 이끌었던지라 한동네에 살던 아버지도 자연스레 그의 문하에 속했다. 그런 그 남자도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책 좀 읽어본 축일 뿐, 문장을 잘 짓는다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워낙 두루두루 문재(文才)가 뛰어난 아이들이 많았던 집이었다. 그해 봄이 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유배에서 풀려난 그의 형이 왕의 미움을 받아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고 변방을 떠돌다가 객사하고,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 누나가 스물일곱살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버지가 누나 얘기를 하자,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 아이는”이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여자아이를 봤다.

“이 사람의 동생인 초희다.”

보자마자 나는 그 아이가 공작이 충신인 나라의 세자빈이 되리라는 걸, 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옆에 앉은 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희는 형을 보고 있었다. 형도 초희를 보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