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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자유주의를 넘어 어디로?

 

동아시아의 지역간 협력체제 추진을 제창한다

 

 

최태욱 崔兌旭

한림국제대학원대 국제학과 교수. 저서로 『세계화시대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경제』 『정부개혁의 5가지 방향』(공저) 『한국형 개방전략』(편저) 등이 있음. eacommunity@hallym.ac.kr

 

 

1. 신자유주의 패권체제의 한 대안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지난 30년간 맹위를 떨쳐온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더는 대세가 아니라는 인식이 전지구촌에 확산되고 있다. 그러면서 (기왕부터 진행돼오던) 다음 두가지 논의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새롭게 고조되고 있다. 하나는‘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패권체제 이후의 국제협력’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다양성’논의에 따르면 각국의‘생산 레짐’(production regimes)은 그것을 구성하는 노사관계, 직업훈련 및 고용체계, 기업지배구조, 금융체계, 기업간 관계 등의 제반 제도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어떠한 조정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르다.1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생산 레짐, 즉 자본주의의 성격은 나라마다 제각기 다른 것이다. 다만 유형화는 가능한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영미형이라 불리는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y)와 유럽형이라는‘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다.2‘자본주의의 다양성’논자들의 상당수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시장의 자유, 즉 시장 참여자들간의 자율조정을 강조하는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의 위기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들은 (미국까지 포함하여) 그동안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해오던 국가들이 이제 그 대안을 국가나 사회에 의한 시장개입과 조정을 중시하는 조정시장경제에서 찾아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혹자는‘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는 이들은 차제에 자본주의적 요소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경제체제를 모색해보자고도 한다.

패권체제 이후의 국제협력 문제는 197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80년대 후반까지 매우 활발히 진행됐던 논의이다.3 1970년대 초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와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 등은 미국 패권의 몰락 징조로 해석되었고, 이에 전세계적으로 패권 부재상황에서 국제협력을 어떻게 성취하여 세계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해갈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 해법은 크게 세가지로 압축됐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제도론(neo-liberal institutionalism)4과 집단지도체제론(collective leadership theory) 그리고 지역간 협력체제론(inter-regional cooperation theory)이 그것이다. 앞의 두 대안은 국제협력체제의 형성과 유지를 가능케 해온 단일 패권국가의 주도 역할을 국제기구나 레짐의 강화 혹은 소수 강대국들간의 리더십 분담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번 위기 발생 이후 제기되는 신브레튼우즈체제의 형성이나 G2, G8 혹은 G20의 강화 필요성 등은 모두 이와같은 맥락에서 나온 대안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지역간 협력체제론은 일차적으로 글로벌 차원이 아닌 지역 차원에서의 해법 모색을 권한다. 이는 글로벌 차원에서 바로 국제협력을 성취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인데, 그 근본 이유는 그러한 협력에 참여하는 국가행위자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사실 올슨(M. Olson)의 명제대로, 행위자 수가 많은 집단일수록 거기서는 무임승차의 유인이 강하며, 따라서 집단행동의 문제는 심각해지기 마련이다.5 그러나 EU나 NAFTA등에서 드러나듯, 각 지역 내의 인접국가들이‘역내’협력체제를 형성하는 일은 비교적 용이하다. 역내국가의 수는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지역간 협력체제론자들은 글로벌 차원의 최종 해법이 국제체제가 이러한‘지역 하부체제’ 중심으로 개편돼가면서 점차 완성될 것으로 본다. 국가보다는 지역협력체가 세계 정치경제의 주 행위자로서 부상하기 시작하면 이‘지역행위자’들은 이제 상존하는 글로벌 차원의 협력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하여 이제‘지역간’협력체제 구축에 힘쓰게 된다. 그런데 이 지역간 협력체제 구축은 역내 협력체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위자 수가 많지 않은 소집단의 협력문제에 해당한다. 전세계의 지역협력체들은 기껏해야 소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 어렵지 않은 협력작업이란 의미이다. 이것이‘지역간주의’(inter-regionalism) 방식에 의한 글로벌 협력체제의 점진적 구축이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는 주장의 핵심 근거이다.6

이 글에서는 이러한 두가지 논의로부터 도출 가능한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패권체제의) 대안체제 하나를 제시한다. 2장에서 간단히 설명하겠지만, 그것은 각기 제 나름의 자본주의 유형을 갖춘 소수의 지역협력체들간에 형성되는 글로벌 경제협력체제이다. 즉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지역별로 최대한 반영되는 지역간 협력체제 구축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진보의 핵심 가치가 약자 배려에 있다고 할 때, 이 대안이야말로 앞서 말한 패권체제 이후의 세 대안 중 가장 진보적인 것에 해당한다. 집단지도국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는 물론 국제기구를 통한 국제협력체제 역시 소수 강대국들만의 이익을 위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기구의 주도권은 실질적으로 소수 강대국들에 의해 과점될 것이며, 그것은 결국 비(非)참여국 혹은 비(非)기여국으로 분류될 대부분의 약소국들을 국제협력체제의 이익 분배과정에서 소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간 협력체제는 약소국들일지라도 일단 지역협력체에 참여하면 그들 모두를 글로벌 협력체의 동등한 구성원이 되게 한다. 예컨대 베트남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베트남이 집단지도체제를 직접 구성하거나 세계적 국제기구의 주도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글로벌 협력체제가 지역간 협력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라면 베트남은 이 체제의 참여국으로서 그에 합당한 권리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 나라는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의 회원일 것이며, 동아시아 지역협력체는 지역간 협력체제의 주요 주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사실 베트남만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동아시아 지역협력체가 EU나 NAFTA등과 더불어 지역간 협력체제를 구성한다면, 그 지역협력체의 구성원인 동아시아의 약소국들은 모두 세계체제의 당당한 회원국들로서 글로벌 차원의 협력과정에 참여하고 거기서 나오는 모든 이익을 동시에 그리고 빠짐없이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 유리한 이 지역간체제의 발전이 크게 기대되기 어려웠던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동아시아 자체의 지역협력체가 발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이‘동아시아 문제’를 해소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문제해소 의지와 노력 또한 중요하다. 3장에서 이에 대한 논의를 상세히 다루고, 마지막 4장에서는 지역간 협력체제 구축과정에서의 한국의 기여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본다.

 

 

2.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지역간 협력체제

 

지역간 협력체제의 주체가 될 지역행위자의 확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비록 그 제도화 혹은‘행위자적 성격’(actorness)의 구비 정도는 아직 EU에 못 미치지만 북미, 동남아, 중동, 남아프리카, 중남미 등 전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많은 국가들이 나름의 지역협력체를 발전시켜왔다.7NAFTA, ASEAN, 남미공동시장(MerCoSur),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등 비교적 잘 알려진 지역행위자 외에도 남미국가연합(SACN), 걸프협력회의(GCC), 남아프리카관세동맹(SACU),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 등이 도처에 버티고 있다. 지역주의 혹은 지역 경제통합은 이미 세계적 대세인 것이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경제통합의 제도수렴 효과다. 지역 경제통합은 역내국가들간의 상품, 써비스, 기술, 자본 등의 흐름과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경제통합이 심화될수록 이 이동성은 더욱 증대된다. 자본을 예로 들 경우, 경제통합의 심화과정이란 곧 자본 이동의 자유를 저해하는 각종 장벽들의 제거를 의미한다. 만약 특정 국가의 금융정책이 역내의 자본 흐름에 방해가 된다면 경제통합의 심화과정에서 그 나라는 해당 정책을 다른 역내국가의 것들과 양립 가능하도록 수렴시킬 것을 요구받게 된다. 일종의 장벽 제거인 셈이다. 그렇게 제거돼가는 장벽들에는 일국의 정책뿐 아니라 제도와 규범 그리고 종국에는 사회경제체제까지도 포함된다. 결국 지역 경제통합은 역내국가들간의 제도 및 체제수렴을 결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EU나 NAFTA등 상당한 정도의 경제통합을 이룩한 지역협력체의 회원국들이 서로 비슷한 자본주의 유형을 공유하게 됨은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것이다.

이같은 두가지 사실, 즉 지역 경제통합은 세계적 대세이며 그 통합은 역내국가들간의 제도수렴 과정을 내포한다는 사실은, 현재 이 지구촌의 각 지역에 제 나름의 자본주의 유형을 형성해가는 지역협력체들이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북미의 NAFTA는 미국형 자유시장경제, 유럽의 EU는 유럽형 조정시장경제, 그리고 남미의 SACN은 남미형 조정시장경제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발전시켜가며 각기 하나의 지역행위자로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다른 지역으로 계속 확산되면 종국에는 국가보다 지역협력체가 글로벌 정치경제의 주 행위자가 되는 지역간주의 혹은 지역간체제 시대가 완성될 것이다. 그 시대에는 당연히 글로벌 협력의 문제가 서로 다른 시장경제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들간이 아닌) 지역행위자들간, 즉 (국제國際가 아닌)‘역제(域際)’차원에서 다루어진다. 글로벌 경제협력체제는 지역간주의 혹은 역제주의 방식에 의해 형성되리라는 것이다.8

사실 지역간 협력체제의 태동은 이미 가시화된 상태다. 지역행위자의 형성 및 확산과 마찬가지로 그 주도세력 역시 EU다. EU는 자신의 지역주의가 성숙해지면서 타 지역들과의 협력관계 구축을 모색해왔고, 남미나 남아프리카지역기구 등과의 지역간 협력관계는 이미 상당수준에 이르렀다. 남미 국가들과는 1995년 이후 EMIFCA(EU-Mercosur Inter-regional Framework for Cooperation Agreement)를 통해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2000년 코토누협정(Cotonou Partnership Agreement)을 맺어 지역간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동아시아의 ASEAN+3 국가들과의 정례모임인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도 10년 넘게 꾸준히 운영해오고 있다. 북미와의 지역간 관계 형성을 위해서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밖에도 EU가 주도하는 지역간 FTA에는 EU-ASEAN, EU-걸프협력회의, EU-남미공동시장 등이 있다. 걸프협력회의나 남아프리카관세동맹 등 제도화가 상당수준에 이른 여타 지역협력체들 역시 지역간 협력체 구축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들은 각각 남미공동시장 및 유럽자유무역연합과 지역간 FTA를 맺고 있다. 한편 이같은 지역간 협력틀의 경우보다 훨씬 느슨한 형태이긴 하지만 동아시아와 중남미지역 간에도 동아시아-라틴아메리카협력포럼(FEALAC)이라는 협력틀이 존재한다.

물론 이렇게 마련되고 있는 지역간 협력틀들이 발전을 거듭하여 (어느 시점에 서로 제도적으로 굳건히 연계되어) 종국에 하나의 글로벌 협력체제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 그중에서도 아마 가장 핵심적인 조건은 동아시아가 상당정도의 지역행위자성을 확보하는 것일 게다. 동아시아는 유럽 및 북미와 함께 세계경제의 3대축을 구성하는 주요 지역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참여 없이 유의미한 지역간 경제협력체제의 형성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경제협력체 발전상황은 다른 두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돼 있다. 비록 1997년의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역내국가들이 ASEAN+3의 이름으로 모여 지역주의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으나, 공동의 위기의식이 옅어지면서 그 움직임은 오래 가지 않아 동력을 잃고 표류하게 되었다. 결국 현재까지도 동아시아는 어떤 의미와 수준에서 보더라도 결코 지역행위자로 인정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지금의 동아시아 상태가 지속된다면 지역간주의 방식에 의한 글로벌 협력체제의 구축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아시아 지역주의가 이와같이 정체된 상황에서 그 발전을 새롭게 자극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미국발 금융위기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가 첫번째 자극이었다면 2008년의 이 미국발 위기는 두번째 자극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과연 그럴 만한 것인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 영향은 어느 정도일지 다음 장에서 짚어보기로 한다.

 

 

3. 미국발 금융위기와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발전전망

 

태평양 수지균형 관계의 위기

미국 변수의 대(對) 동아시아 영향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양자의 관계를 규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맥락에서 볼 때, 그 관계는‘태평양 수지균형’(transpacific balance)이라는 개념으로 가장 정확히 표현된다. 한마디로, 미국의 쌍둥이적자 경제와 동아시아의 수출지향경제 간에 균형이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한다.9 수출주도 성장전략에 매달려온 한·중·일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동안 대미수출로 번 막대한 달러를 미 재무부채권 매입 등 달러화 자산 보유확대, 즉‘달러 흡수’에 쏟아부어왔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수출시장인 미국의 통화가치가 하락되지 않도록 (즉 자국통화가 평가절상되지 않도록) 하여 대미수출 조건을 좋게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미국은 동아시아의 달러화 자산 매입 덕에 환류되는 달러로 자국의 고질적인 재정적자와 경상적자를 지속적으로 보전하면서 거대한 소비경제를 누려왔다. 결국 이 균형관계에서 동아시아는 대미수출에 의존하며 고도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고 미국과의 이러한 관계를 즐기는만큼, 자신의 독자적 지역주의 발전에는 관심이 적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발 금융위기는 이 태평양 수지균형 관계마저 위기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특히 다음 두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더는 자신들만의 노력으로 달러가치의 하락을 막기가 어렵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발 금융위기는 그 자체로도 미국 달러의 신뢰도 하락 요인이 된다. 그것은 이미 일고 있던 브릭스(BRICs)나 동아시아 신흥시장국가들의 유로화 등 달러외 통화 사용 증대경향을 부추기고 있다.10 예컨대,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발 금융위기 발생 직후인 2008년 10월말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에 이의를 제기하며 양국간 교역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와 루블화로 결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비슷한 시기 남미공동시장 국가들 역시 회원국간 무역거래에서 달러화 결제를 줄이고 역내통화 결제를 늘리는 방안을 협의했다. 한편, 11월에 유럽의 주도로 열린 G20 회의에서는 각국 정상들이 달러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더이상 달러화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2009년 4월에 다시 열릴 G20 정상회의에서는 달러화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다른 대체통화를 기축통화로 하자는 내용까지도 포함될 수 있는 신브레튼우즈체제 발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유의해서 볼 것은 위기극복을 위한 미국정부의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과 유동성 과잉공급이다. 이는 중장기적으로 달러가치 하락 혹은 적어도 달러가치 유지의 불확실성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위기시 안전자산 선호현상으로 인해 달러화가 강세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미국의 경제침체가 지속되는 한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여러 요인으로 인해 드디어 달러가치 하락이 가시화되면 이미 자신들의 준비금을 다양한 통화로 분산하고자 하는 유인과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예컨대 러시아나 남미국가들은 서서히 달러를 청산해갈 것이다.11 보유자산의 가치하락을 두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외국가들이 외환보유고에서 달러 청산을 확대하기 시작하면 동아시아 국가들도 자신들만의 달러 흡수 노력만으로는 달러가치 하락을 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그 경우 그들 역시 달러화 청산 대열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는 태평양 수지균형 관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태평양 수지균형 관계의 위태로움을 전망케 하는 또다른 이유는 미국의 금융 및 실물경제 위기가 장기화할 경우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미국의 소비경제는 (자신들의 달러 흡수 노력과는 관계없이) 어차피 위축될 거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중·일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위기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즉각 심각한 정도의 수출 감소 문제를 겪고 있다. 그렇다고 주식가격 폭락 등으로 인한 미국의 소비수요 감소가 단기간에 증가세로 돌아설 기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대다수의 경제분석가들은 미국의 소비경제 침체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진단한다. 설령 어느 시점에 금융위기가 극복된다 할지라도, 향후 미국의 민간소비가 과거처럼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지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울 전망이다. 위기 극복과정에서 쌍둥이적자 감소 등을 목표로 하는 미국경제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축소될 미국시장을 위해 기회비용이 상당한 달러 흡수 노력을 왜 (과거와 같은 정도로) 지속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동아시아 국가들로서는 이제 그러한 노력보다 미국을 대체할 안정적인 대안 수출공간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터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아시아의 대미수출 부진현상은 오래전부터 관찰돼온 일이다. 동아시아의 최대시장은 이미 미국이 아니라 바로 역내시장 동아시아이다. 전통적인 대(對)역외시장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은 이제 한계에 달하고 있다는 분석이 동아시아 내외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기도 하다.12 그리고 실제로 이미 상당수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통화의 저평가정책에 기반을 둔 수출주도 성장모델에서 서서히 벗어나려 하고 있다.13 동아시아 최대의 대미 수출국인 중국 역시 그중 하나다. 중국은 현재 점진적인 위안화 평가절상 및 내수시장 확대를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동아시아 전체로 확산될 것이며, 이는 결국 태평양 수지균형 관계의 효용감소론 혹은 무용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 금융통화협력

이렇게 동아시아와 미국 간의 균형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동아시아 국가들간의 역내협력 강화 필요성은 점차 고조될 것이다. 크게 세 영역에서의 협력 강화가 예상되는바, 첫째는 단연 금융통화협력이다. 달러가치의 지속적 하락이 예상되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결국 달러에서 이탈해갈 경우 그들은 유로화 등 대안적 준비자산으로 이동하거나 동아시아 채권시장의 발전 등을 도모함으로써, 외환 준비금의 상당부분을 역내통화 표시자산으로 대체해갈 수 있다. 역내 채권시장의 활성화는 역내통화에 기초한 외채 발행을 가능케 함으로써 동아시아 국가들의 달러의존도를 줄여준다. 차제에 지난 2003년 동아시아 채권시장 조성을 위해 ASEAN+3 재무장관회의에서 합의했던‘아시아채권시장 이니셔티브’(ABMI)를 구체화하자는 주장이 대두되는 배경이다.

그밖에도 이참에 달러에 대한 취약성을 극복하여 국제금융시장의 충격에서 지역경제를 지키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역내의 인식이 강화되면서 다양한 금융통화협력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우선 ASEAN+3 국가들은 외환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유동성 협력으로 8백억달러 규모의‘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 다자화 공동기금을 2009년 상반기까지 조성키로 합의했다. 일부에서는 CMI형식으로는 현재와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대처하기에 역부족이라며, 동아시아의 엄청난 외환보유고를 역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 논의를 재개하자는 주장이 분출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 IMF로부터의 자율성 증대가 동아시아의 지역행위자성 확보에 필수요건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주장이기도 하다.

유동성 협력을 넘어 좀더 장기적으로는 외환을 보유해야 할 필요성 자체를 줄이기 위한 동아시아 단일통화 도입이 모색돼야 한다는 의견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개진되고 있다.14 다만 현실적으로 더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제안은 지역 통화통합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므로 그 중간단계로 환율공조를 위해 아시아공동통화단위(ACU) 같은 공동통화바스켓을 형성하자는 안이다. EU와 유사한 통화통합 경로를 밟아가자는 주장인데, 이에 대한 지역내 논의는 향후 점차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15

 

동아시아 통상협력

두번째 협력영역은 통상이다. 앞서 말한 대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의 소비경제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과거 역외시장 중심의 수출주도 성장전략은 머지 않아 그 유효성을 더욱 상실하게 되리라는 불안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내수 확대를 위한 지역내 협력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다시 말해 충분한 역내시장 창출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경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 소비경제를 동아시아에서 창출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당한 잠재력을 가졌으나 아직 일부밖에 개발되지 않은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북한의 민간 소비시장을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관건은 그들 나라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그 혜택의 고른 분배를 어떻게 담보하느냐에 있다. 예컨대, 중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그 내부의 격차문제도 같이 해결된다면 중국의 중산층은 두터워지고 낙후지방의 구매력은 증가할 것이며, 이는 중국의 소비재시장 확대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동남아나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이 중국과 북한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성장과 내부격차 해소를 도울 경우 이는 그 국가들은 물론 한·일 두 나라에도 도움이 되는 동아시아 소비경제의 확대라는 지역공공재 창출 효과를 낳게 된다. 요컨대, 역내국가들 모두의 지속성장과 고른 분배의 달성은 지역 차원의 공동 통상과제로서 협력하여 추진할 만한 일이란 것이다.

여기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복지와 사회안전망 확충이 지닌 격차해소 및 내수확대 효과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소득층과 달리 저소득층의 가처분소득과 소비는 사회안전망 강화와 복지증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늘어난다. 만약 앞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동안 태평양 수지균형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던 (달러 흡수) 비용을 각국의 복지 및 사회안전망 확충에 사용함으로써 내부격차 해소에 힘쓴다면, 이는 역내 내수시장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 국가들간의 국제격차 해소 역시 각국의 내부격차 해소와 마찬가지로 역내 소비재시장을 확대하는 효과를 내게 된다. 따라서 이른바‘동아시아 복지사회’건설을 위한 지역 차원의 국제협력도 긴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격차해소를 위한 노력은 단순히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위기에 처한 동아시아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공통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16 역내국가들의 지속성장과 고른 분배를 공동목표로 삼는 이러한 지역 통상협력이 동아시아자유무역지대(EAFTA) 등의 건설을 통해 안정적인 제도틀 내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때 더 효과적일 것임은 물론이다.

 

동아시아 제도수렴 협력

역내협력의 마지막 영역은 경제통합의 제도수렴 효과와 관련된 부분이다. 앞에서 살핀 대로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역내국가들간의 금융통화 및 통상협력관계가 강화되는 것은 곧 지역 경제통합의 심화를 의미한다. 경제통합이 지속적으로 심화된다면 거기서는 이제 그에 따른 제도수렴 효과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한다. 말하자면 동아시아가 어떠한 제도, 정책, 규범 등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유형으로 수렴 발전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지역간체제 시대의 도래가 요구하는 동아시아의 지역행위자성 확보 노력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아직 생경한 분야로 인식된 탓인지 이 문제에 관한 기존 연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17 알려진 바로는 한국과 일본 등의 몇몇 학자들이 현재 이 연구를 진행중이라는 정도다. 매우 중요한 과제이니만큼 여기에는 앞으로 더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자되어 범지역 차원의 현실적 대안이 구체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다만 역내국가들간에 합의 가능한 기본원칙 몇가지를 상정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앞에서 소개한 양대 유형론에 따르자면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유형은 조정시장경제체제여야 한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지구촌 전체가 신자유주의나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때이니만큼 이에 대한 합의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동아시아형 조정시장경제체제는 무엇보다 격차문제 해결에 유능한 체제여야 한다. 동아시아는 공동체 지향의 역사와 문화전통이 강한 지역이다. 역내의 대다수 나라들은 격차 용인 정도가 높을 수 없는 인구밀도와 산업구조를 갖고 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중국, 베트남, 라오스 등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도 발전해가고 있다. 게다가 앞서 말한 대로 역내 내수시장 확대와 그를 위한 격차문제 해소는 지역의 공통과제이기도 하다. 이 모든 조건들이 동아시아에 합당한 자본주의는 자유시장경제가 아닌 조정시장경제이며, 그것도 특히 격차문제의 관리와 조정에 뛰어난 체제여야 함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셋째, 시장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중시하지만 그 국가의‘질’, 즉 효과적인 민주적 통제가 가능한 거버넌스의 안정적 운영은 철저히 보장되는 체제여야 한다. 한마디로, 민주적 조정시장경제체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4. 한국의 기여 가능성과 한계

 

앞서 3장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어떻게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태평양 수지균형 관계가 불안해지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금융통화 및 통상영역에서의 역내협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갈 경우, 동아시아는 경제통합 심화에 따른 제도수렴 과정을 거쳐 일정한 시장경제체제 유형을 갖는 하나의 지역행위자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된다면 1장에서 언급한 예의‘동아시아 문제’는 해소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지역간 협력체제의 부상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외부조건의 성숙 못지않게 개별 동아시아 국가들의 지역주의 발전에 대한 흔들림 없는 정책선호와 추진의지 및 수행능력 유지 또한 매우 중요하다. 여러 제약으로 인해 역내 모든 국가들을 살펴볼 수는 없고, 여기에서는 과연 한국은 어떠한지를 간략히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만일 패권체제 이후의 대안체제를 앞서 말한 제도론이나 집단지도체제론에 의거해 마련해간다고 할 때 한국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이 앞서 예로 든 베트남 같은 약소국이 아니라 소위‘강중국’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세계경제질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제기구나 레짐을 주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집단지도체제의 핵심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간주의 방식에 의한 글로벌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경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ASEAN+3를 놓고 볼 때 한국은 동아시아 3대 경제대국 중 하나다. 게다가 동북아에서는 중·일간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에서는 동북아와 동남아 간의 교량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최고의 적임국가로 평가받는 위치에 있다. 물론 분단국가라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객관적 위상은 지역협력체의 발전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정도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역간주의 방식에 의할 경우 한국은 동아시아 지역협력체를 경유하여 글로벌 협력체제의 형성과 운영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그 영향력이 언제나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건대, 적어도 다음 세가지 조건은 갖춰야 한국의 그 잠재적 영향력은 현실화될 수 있다.

첫째, (너무나도 당연한 조건이지만)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지역협력체 발전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추진의지가 있어야 한다. 지역간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비할 정도의 시대감각도 요청된다. 이에 관한 한 한국이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때는 김대중정부 시절이었다. 당시는 한국이 ASEAN+3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협력체 형성의 주도국이었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정부는‘동북아시대’라는 지역주의 구상을 내놓았지만, 내용도 모호했고 실천의지도 박약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둘째, 자본주의의 다양성 개념을 충분히 숙지하여 한국에 맞는 자본주의,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 맞는 시장경제유형을 분별 또는 창안해내고 그 유형의 확립과 안정화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지역간주의가 요구하는 동아시아의 지역행위자성 확보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동아시아에 적합한 시장경제유형이 자유시장경제가 아닌 조정시장경제일 거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보다 (동아시아에도 널리 적용가능한) 한국 고유의 조정시장경제체제 발전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에서 본다면 한국의 상황은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개선되지는 않고 있다. 물론 김대중정부 시절에는‘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그리고 노무현정부 때에는‘동반성장’등을 지향하며 한국형 조정시장경제 발전을 시도하기도 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이 10년 동안에도 신자유주의의 침투는 점증적으로 허용되었고, 따라서 그러한 시도들이 성공할 여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침투 허용과 그에 대한 견제라는 양면이 존재하는 가운데 전자가 주조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셋째, 북한을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의 구성원으로 끌어안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북한이 지금의 상태로 고립돼 있는 한 동아시아의 진정한 통합과 지역협력체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언제든 동북아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차원의 분단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김대중과 노무현 양 정부가 햇볕정책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북한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시킨 것은 높게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런 것들이 지역간주의 방식에 의한 글로벌 협력체제의 부상에 한국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이라고 한다면, 현정부하의 한국에서는 그러한 영향력 발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명박정부에 와서는 한국에 동아시아 지역주의 정책이 존재하는지 그 자체를 모를 정도이고, 한국형이나 동아시아형 시장경제체제를 모색하는 노력은커녕‘역주행 정부’라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철지난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맹렬히 매달리고 있으며, 지난 10년간 공들여 쌓아올린 성과를 일거에 무너뜨리며 북한과의 대립과 갈등을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고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정부를 봐서는, 한국은 동아시아 지역협력체 형성을 위한 수행능력이나 추진의지 그리고 심지어는 정책선호조차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정부가 그렇다고 하여 한국의 소중한 잠재력을 이 정부의 임기 동안 그대로 썩혀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가 안된다면 당분간은 민간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앞서 언급한 한국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세가지 조건의 충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때가 되어 동아시아 지역협력에 적극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그 정부가 한국의 영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놓아야 한다. 사실 찾아보면 그때까지 민간 차원에서 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할 준비 및 연구과제는 참으로 많다. 예컨대 첫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ASEAN+3와 동아시아정상회의(EAS) 간의 대립문제에 관한 우리 나름의 해법을 연구해야 한다.18 2005년 말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 두 선택지를 두고 어디를 중심으로 지역협력체를 만들어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이는 대표적인 중·일갈등 문제로 비화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의 최대 걸림돌로 떠오르고 있는데, 한국이 어떤 태도를 취하며 중재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그 파장과 여파의 상당부분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지역협력체 형성상의 수월성, 그 협력체가 확보 가능한 지역행위자성의 정도 그리고 형성 이후 지속가능성 등 주요 변수를 두루 고려하여 어느 방안이 동아시아의 이익에 더 부합할 것인지 잘 판단해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첫째 조건과 관련된 또다른 과제의 예는 그동안 동아시아 국가들간의 연대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던 미국 변수의 변화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준비다.19 물론 동아시아는 오바마의 미국으로부터 과거보다 더 큰 자율성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정부는 과거, 특히 부시정부의 일방주의적 간섭외교 기조에서 벗어나 다자주의적 국제협력을 중시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하고 있으며, 이는 동아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역시 경상수지 적자의 획기적 감소 등과 같은 스스로의 시급한 필요에 의해서도 점진적으로 태평양 수지균형 관계의 해소에 순응해갈 것이다. 결국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에 호조건이 형성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동아시아는 여전히 미국의 가장 중요한 관리 대상지역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더구나 정책 및 제도적 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함으로써 미국 변수의 부정적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일은 앞으로도 긴요하다. 예컨대 유럽이 그러했듯, 동아시아도 지역경제협력체는 역내국가들만으로 형성·발전시켜가되 안보협력체는 미국이 포함된 다자체제로 간다는 식의 유연한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요는 미국의 역내 영향력은 일정하게 보장해주는 가운데 동아시아 경제통합의 심화·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이른바‘서울 컨쎈서스’의 작성을 예로 들고 싶다. 워싱턴 컨쎈서스가 신자유주의 혹은 미국형 자본주의의 특성을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형 자본주의가 담아야 할 핵심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서울 컨쎈서스로 명명하자는 것이다.20 서울 컨쎈서스가 동아시아 국가들이 충분히 수렴 가능한 새로운 유형의 시장경제체제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이것의 작성만으로도 한국은 동아시아 경제협력체의 발전과 그후 전개될 지역간 협력체제 형성에 상당한 기여를 하는 셈이 된다. 그에 상응하는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들고자 하는 것은 셋째 조건의 충족 노력에 해당하지만 서울 컨쎈서스의 작성과도 연관이 있는 일이다. 국가연합을 지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경로로 여겨지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과정에서는 상당수준의 남북한간 경제통합과 그에 따른 경제체제의 수렴이 진전될 것인바, 우리는 그것을 동아시아형 시장경제체제의 수렴 혹은 창안 작업과 선순환 구도를 이루도록 유인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한반도의 분단경제체제 극복과 동아시아의 경제통합 및 지역협력체 발전이 서로를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서울 컨쎈서스가 장기적으로는 북한의 동의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내용으로 작성돼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에서는 주로 민간이 담당할 수 있는 연구과제들을 예시했지만 직접행동으로 노력할 수 있는 부분도 물론 있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민간교류 증대, (이미 체결된 대로의 한미FTA비준 반대 등을 통한) 신자유주의의 역내침투 저지운동, 역내국가들간의 양자 및 다자간 FTA관계의 확산 지지, 6·15 및 10·4 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 촉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모두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 등의 직접행동이 소기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결국 정부의 호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난 1년간 직접 경험했듯, 한국의 현 거버넌스구조하에서는, 정부가 마이동풍으로 일관하면 아무리 큰 비용을 치르더라도 시민사회의 집단행동은 무위로 끝나기 일쑤다. 시민사회의 참여가 보장되는 새로운 국가거버넌스 구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21 결국 또다른 연구과제의 제시로 글을 맺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니 어쩔 수가 없다. 시민참여형 국가거버넌스 창출을 위한 정치제도 등의 개혁이 급선무인 듯하기 때문이다. 거버넌스 개혁의 방향과 그 방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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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eter A. Hall and David Soskice, “An Introduction to Varieties of Capitalism”, P.A. Hall and D. Soskice, eds., Varieties of Capitalism: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of Comparative Advantage, Oxford Univ. Press 2001.
  2. David Soskice, “Divergent Production Regimes: Coordinated and Uncoordinated Market Economies in Contemporary Capitalism”, H. Kitschelt, P. Lange, G. Marks, and J. D. Stephens, eds., Continuity and Change in Contemporary Capitalism, Cambridge Univ. Press 1999. 이 양대 유형을 처음 제시한 쏘스키스가 자유시장경제를 영미형이라고 불렀을 때의 영국과 미국의 자본주의는 2차대전 이후 197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케인즈주의 모델의 그 자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가 말한 영미형 자유시장경제의 전형은 1970년대 말 이후 영국과 미국을 지배해온 신자유주의체제라 할 것이다.
  3. 이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물로는, Robert Keohane, After Hegemony: Cooperation and Discord in the World Political Economy, Princeton Univ. Press 1984; Duncan Snidal, “Limits of Hegemonic Stability Theory,” International Organization, vol.39, 1985; Kenneth Oye, ed., Cooperation under Anarchy, Princeton Univ. Press 1986 등을 들 수 있다.
  4. 국제정치학에서의 신자유주의는 경제이념으로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국가를 자국의 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합리적 행위자로 파악할지라도 그들간의 국제협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장을 신자유주의론이라고 한다.
  5. Mancur Olson, 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 Public Goods and the Theory of Groups, Harvard Univ. Press 1965.
  6. 더 자세한 설명은, 졸고 「일본의 부상과 국제공공재에 관한 고찰-동아시아 약소국의 시각에서」, 『평화논총』 4권 1호.
  7. 여기서‘행위자적 성격’(이하‘행위자성’)이라 함은 특정 지역협력체가 갖추고 있는 글로벌 정치경제의 일개 행위자로서의 요건과 자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해당 회원국들의 (협력체로의) 권한 위임 정도 등을 포함한 지역협력체의 제도화 수준에 비례하여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8. 다양한 성격의 지역 자본주의 혹은 지역 시장경제체제간에 형성되는 이 지역간 협력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지역간 경제통합과정을 거치며 그에 따른 지역간 제도수렴 효과로 인해 최종적으로는 단일 글로벌 경제체제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현재로선 그 글로벌 경제체제가 어떠한 형태일지 예상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한 유형일 수도 있겠으나,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제일 수도 있다.
  9. 배리 아이켄그린 지음, 박복영 옮김 『글로벌 불균형』, 미지북스 2008.
  10. 그렇지 않아도 지난 10여년간 달러화는 유로화 등 다른 주요 통화에 대해 약세를 보여왔다. 이에 유로화 자산을 거래하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고 그 매력이 특히 신흥시장의 중앙은행들 사이에서 증대되고 있는 실정이다(같은 책 66면). 중남미 국가들의 달러 회피는 오래전부터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에 이어 중국과 한국 등은 달러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자국통화의 국제화정책을 이미 추진하거나 구상중에 있다. 특히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중국정부는 다양한 방안을 동원하여 위안화의 국제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11. 같은 책 118면.
  12. 박번순 「동아시아의 경제협력: 중국의 역할과 한계」, 『SERI경제포커스』 2008.11.3.
  13. 아이켄그린, 앞의 책 121면.
  14. 김필헌 『동아시아 지역의 금융통합 논의 현황과 시사점』, 한국경제연구원 2008, 34면.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의 통화통합 움직임은 다른 지역에서도 활발해지고 있다. 남미국가들은‘남미은행체제’를 건설하고 지역 공동화폐를 발행하자는 협의를 본격화했으며, 중동의 걸프협력회의 6개 회원국들은 2010년에 지역 단일통화를 출범시키자는 데 합의했다.
  15. 만일 동아시아의 금융통화협력이 가속도를 내어, 예컨대 조만간 ACU가 형성되고 그것이 오래지 않아 지역 통화통합으로까지 이어진다면, 동아시아의 경제통합은 유럽과 역순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통화통합은 바로 실물경제 통합을 견인하는 효과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EU는 영역별 시장통합의 점진적 확대 등 실물경제의 통합에서 시작하여 통화통합에 이르는 순서를 밟았다.
  16. 카네꼬 마사루(金子勝)의 발언, 권태선 칼럼 「격차극복, 동아시아 공생의 길」(『한겨레』 2008.11.9)에서 재인용.
  17. 여기서 라모(J. Ramo)가 제시한 뻬이징 컨쎈서스를 동아시아 시장경제유형에 관한 미래담론으로 인정할지 여부에 대하여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뻬이징 컨쎈서스는 그저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발전경험을 간략히 요약한 것일 뿐, 역내국가들의 수렴 가능성이나 그들에 대한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동아시아형 발전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뻬이징 컨쎈서스의 내용에 대해서는 Joshua Cooper Ramo, “The Beijing Consensus,” The Foreign Policy Centre 2004. 그리고 그에 대한 비평은 조영남 「중국의 소프트파워와 외교적 함의」, 손열 엮음 『매력으로 엮는 동아시아』, 지식마당 2007 참조.
  18. 2005년 말에 발족한 EAS는 ASEAN+3+3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기존의 ASEAN+3 회원국에 호주, 뉴질랜드, 인도 세 나라가 추가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 EAS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지역협력체를 형성해가야 한다고 주장하나 중국은 ASEAN+3가 여전히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19.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에 대한 미국의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졸고 「한미FTA와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미래」, 『사회비평』 2007년 가을호 참조.
  20. 참고로 현재 이 작업은‘한국형 자본주의의 모색’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팀과 동아시아연구회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바, 그 결과물은 공히 2009년 종반 무렵 출간될 예정이다.
  21. 이 맥락에서의 선도적 주장은 백낙청, 「거버넌스에 관하여」, 『창비주간논평』 2008.12.3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