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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대국과 소국의 상호진화
최원식 崔元植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저서로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근대소설사론』 『문학의 귀환』, 편서로 『제국의 교차로에서 탈제국을 꿈꾸다』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이 글은 2008년 9월 30일 서울에서 열린 제1회 한·일·중 동아시아문학포럼에서 발표한 발제문 「소국주의의 재구성을 위하여」를 개제·개고한 것이다. 발표 당시의 시사성은 두고 논의를 조금 보완하는 절충을 선택한바, 개고의 용기를 북돋워준 백낙청 선생의 논평에 감사한다.
1. 이름의 전쟁
일본정부가, 모처럼 잔잔한 동아시아의 호수에 돌을 던졌다. 2008년 7월 14일 문부과학성은 중학교 사회과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獨島) 영유권 분란을 기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일 신시대를 선언한 한국정부로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사실 아시아 이웃과의 불화를 사양하지 않았던 전임 총리들과 다른 자세를 보인 후꾸다 야스오(福田康夫) 신임 총리에 대해 한국에서도 은근한 기대가 없지 않았다. 후꾸다 총리 취임 이후 한일관계는 오랜만에 평화를 누리기도 했던 터인데, 그는 극적인 반전의 돌팔매를 선택하고 말았다. 도대체 왜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일까? 외교는 내치(內治)의 연장이란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이는 일본 국내정치가 봉착한 어떤 위기에서 비어져나왔기 십상이다. “단기적으로는‘지지율 떠받치기’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가뜩이나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상황에서 우익세력의 집단적인 반발을 사 국정 장악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한국과의 관계 악화를 감수했다는 해석이다.”(『동아일보』 2008.7.15) 지금 와 생각하니 지난 6월 11일 일본 참의원에서 민주당이 제출한 총리 문책결의안이 통과된 것이 이번 사태를 야기한 화근이었던가 보다. 법적 구속력이야 없지만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라는 상징성이 추락하는 지지율과 겹쳐 기어코 이런 거사로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안쓰럽기조차 하다.
일본정부는 그래도 한국을 배려하느라 애썼다고 변명한다. 실제로 그 표현이 너무 온건하다고 일본 우익들은 비판하는 모양인데, 잠깐 해설서 그 부분을 보자. “북방영토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이지만 현재 러시아연방에 의해 불법 점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 등에 대해 적확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와 한국 사이에 타께시마(竹島)를 둘러싸고 주장에 차이가 있다는 점 등도 언급하여, 북방영토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영토·영역에 관해 이해를 심화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같은 신문)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토박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란 말인가? 이 대목의 중심은 확실히 북방영토분쟁이다. 쿠릴열도(Kuril Islands, 千島列島) 남쪽 네 섬, 즉 에또로후(擇捉, Iturup), 쿠나시리(國後, Kunashir), 시꼬딴(色丹, Shikotan), 하보마이(齒舞, Khabomai)를 가리키는 북방영토는 2차대전 이후 소련이 점령한 뒤 현재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섬들이다. 원래 아이누(Ainu)의 땅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 네 섬의 사정은 독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다. 그럼에도 이곳에 독도를 슬그머니 끼워넣은 것은 떳떳함과는 거리가 먼 태도다. 이렇게 교묘히 우회하면서 실제로는 독도문제를 북방영토와 거의 동격으로 올려놓는 일본정부의 꾀 아닌 꾀에 한국 여론이 더욱 끓어올랐던 것이다.
독도사태가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번져간다. 한국과 일본, 두 정부의 힘겨루기가 전개되는 것과 함께 두 나라의 시민들도 오프라인과 온라인 두 전선 모두에서 전투로 돌입한다. 급기야 한일 두 나라 밖으로 불똥이 튄다. 당장 러시아가 강력한 항의를 제기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중국도 짐짓 쾌재를 부른다. “중국이 공격 소재로 사용할 수 있는 논리를 일본이 스스로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동아일보』 2008.7.17) 알다시피 중국/대만과 일본은 미군이 1972년 오끼나와(沖繩)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함께 넘겨준 땨오위따오(釣魚島, 일본 이름 센까꾸尖閣열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중이다.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센까꾸열도를 중국이 일본을 따라 중국령이라고 명기하더라도 일본이 할 말이 적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분쟁영토들을 대상으로 비등하는 동아시아 각 나라들의 민족주의적 충돌이란‘이름의 전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독도 일본에서는 타께시마, 중국에서는 땨오위따오 일본에서는 센까꾸, 한국에서는 백두산 중국에서는 창빠이샨(長白山) 등등, 접경의 특정 장소들을 나라마다 다르게 호명하는 경쟁 속에서 두 이름의 평화공존보다는 한 이름의 독재로 달려가려는 경향, 즉 단일언어를 꿈꾸는 욕망의 정치가 비등한다. 민족주의는 그리하여 변경 또는 접경의 장소를 둘러싼 이름의 전쟁, 정치적 무의식이 격돌하는 그 초점에서 강렬히 폭발하곤 하는 것이다.
2. 무명으로 가는 길
이 난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길은 어디에 있는가? 유토피아에는 이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름이야말로 분쟁의 모태니까. 이름을 바루는 정명(正名)을 근본으로 삼음으로써 이름을 나누는〔名分〕 쟁론에 쉽게 빠져들곤 했던 유가(儒家)와 달리 근본적 차원에서 이름 너머를 사유하는 도가(道家)는 그리하여 무명(無名)을 꿈꿨다. “저녁(夕)에 어두워 누구인지 보이지 않을 때 입으로 불러내는 것(口)을 상형”1하여 名이란 글자가 만들어졌다는 데서 분명히 짚이듯이, 이름은 창조질서의 혼돈을 분화하는 문명의 논리다. 명(名)과 실(實), 요즘식으로 말하면 기표(記表)와 기의(記意) 사이는 자의적이고 강제적이거니와, 도가가‘반듯한 이름의 세상’이 아니라‘이름 없는 세상’의 원초성을‘오래된 미래’로 선취(先取)하려고 한 것은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럽다. 물론 도가도 이름 자체를 완전히 경시한 것은 아니다. “도는 본시 무명〔道常無名〕”2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하면서도 유명(有名)을 그 짝으로 들었던바, 잘 알려진 『도덕경(道德經)』 1장의 그 대목을 보자.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名分이 없는 혼돈)은 천지의 비롯됨이요 유명(이름으로 분별함)은 만물의 어미다.3
현실로서 존재하는 유명의 세상과 그 너머에서 고요히 빛나는 무명의 유토피아, 유명을 축으로 삼는 유가에 대해 도가에 있어서는 무명이 중심이다. 유명을 짝으로 무명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유명을 간과한 것은 아니로되, 도가는 아나키즘답게 일거에 무명으로 비약한다. 비약이라는 근사한, 그렇지만 쉬운, 길이 아니라‘지루한 성공’으로 가는 어려운 길을 유명과 무명 사이로 낼 수 있다면 작히나 좋으랴!
도가가 물론 그저 비약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무명의 유토피아에 걸맞은 사회모형으로 “작은 나라, 적은 인민〔小國寡民〕”4을 제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좋은 권력이든 나쁜 권력이든 권력이란 근본적으로 마성(魔性)을 뿜어내는 것인지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는 패도(覇道)는 물론, 인정(仁政)에 근거한 왕도(王道)를 주창한 유가에도 반대한 도가는 조숙한 아나키즘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소국주의를 지향한 도가가 대국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국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를 시적으로 드러낸 61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大國者 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대국은 하류인지라 천하가 어울리는 곳이다. 천하의 암컷,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써 수컷에 이기니 고요함으로써 겸양하기 때문이다.5
대국을 모든 물줄기가 합수(合水)하는 장강의 하류에 비기는 상상이 아름답다. 이 보드라운 비유에는‘대국’이 흔히 환기하는 강력한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다. 소국들을 집어삼키는 대국의 잡식성 대신, 가없는 포용성이 전경화(前景化)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가의 대국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여성 중에서도 모성이다. 그래서 대국을‘천하의 암컷’으로 찬미한 것이다.
이런 몽상 속에서 대국과 소국의 관계 또한 비(非)산문적이다.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고로 대국은 소국에 겸양한즉 소국을 취하고 소국은 대국에 겸양한즉 대국을 취한다.6
이 대국은 소국들을 속국으로 거느린 패자로서의 대국이나 소국들의 자율성을 파괴한 일통제국(一統帝國)이 아니라 실제태로서의 소국연합을 지칭하는 이름, 즉 무명의 기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대국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면 조금 복잡해지겠지만, 『도덕경』의 대국이란 일종의 유토피아적 몽상인지라 설령 복수라 해도 큰 차이는 없다. 복수의 대국들이 투쟁한들 “천하의 암컷”, 그 지극한 수동성의 경쟁이란 협동에 다름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원리적으로 보면 사실 도가와 유가 사이는 멀지 않다. 유가가 도가보다 권력에 대해 더 관용적이라 할지라도 유가 또한 소국주의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漢) 무제(武帝)에 의해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축성(祝聖)된 이후의 유교를 유가와 그대로 혼동해서는 아니된다, 물론 유가는 유교로 변신할 종자를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망각할 수 없지만. 이 점에서 대국과 소국에 대한 맹자(孟子)의 사유를 한번 도가와 비교해보자.
孟子ㅣ曰以力假仁者ᄂᆞᆫ覇니覇必有大國이오以德行仁者는王이니王不待大라湯이以七十里ᄒᆞ시고文王이以百里ᄒᆞ시니라
맹자 가라사대, “힘으로써 인을 가장하는 자는 패니 패는 반드시 큰 나라를 두고, 덕으로써 인을 행하는 자는 왕이니 왕은 큰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탕이 70리로써 하시고 문왕은 100리로써 하시니라.”7
여기서 패도에 대한 유가의 반대가 대국주의에 대한 거절이라는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유가의 왕도도 도가처럼 소국주의다. 가까운 곳에서 차츰 먼 곳으로 사유를 확장하는 근사(近思)를 핵으로 삼는 유가는 이행의 절차들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인지라 대국과 소국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생각한다. 그 요점이 사대(事大)다. 그런데 사대가 사소(事小)와 짝을 이룬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시 『맹자』를 보자.
齊宣王이問曰交隣國이有道乎ㅣ잇가 孟子ㅣ對曰有ᄒᆞ니惟仁者ㅣ아爲能以大事小ᄒᆞᄂᆞ니是故로湯이事葛ᄒᆞ시고文王이事昆夷ᄒᆞ시니이다惟智者ㅣ아爲能以小事大ᄒᆞᄂᆞ니故로太王이事獯鈇ᄒᆞ시고句踐이事吳ᄒᆞ니이다
以大事小者ᄂᆞᆫ樂天者也ㅣ오以小事大者ᄂᆞᆫ畏天者也ㅣ니樂天者ᄂᆞᆫ保天下ᄒᆞ고畏天者ᄂᆞᆫ保其國이니이다
제 선왕이 물어 가로되,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도가 있습니까?” 맹자 대답해 가로되, “있나니 오직 어진 자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나니 이런 고로 탕이 갈을 섬기고 문왕이 곤이를 섬기시니이다. 오직 지혜로운 자라야 능히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나니 고로 태왕이 훈육을 섬기고 구천이 오를 섬기니이다.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자는 하늘을 즐거워하는 자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이니 낙천자는 천하를 지키고 외천자는 그 나라를 지킬 것이니이다.”8
유가의 국제질서를 대변하는 사대가 실은 사소라는 점을 이 대목은 잘 보여준다. 사대는 사소에 대한 응답이다. 다시 말하면 대국이 소국을 잘 섬겨야 소국이 대국에 귀의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대국주의를 내건 당대의 패도를 부정하되 도가처럼 유토피아로 비약해버리는 대신, 대동(大同)으로 가는 중간에 소강(小康)9을 두듯이, 과도단계로서 패도적 대국을 계몽하여 왕도적 대국으로 변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유가가 꿈꾸는 왕도적 대국은‘천하의 암컷’과 멀지 않다고 보아도 좋다.
맹자의 소국주의에 기반한 사소주의는 물론 실현되지 않았다. 일통제국 진(秦)의 출현에서 보듯이 패도적 대국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대국주의로 개종한 유가, 즉 유교가 한(漢) 이후 제국의 국교로 등극했어도 맹자가 꿈꿨던 사소와 사대의 아름다운 고리는 이룩되지 못했다. 도리어 중국의 역대 제국들은 사소가 아니라 사대만 강조했다. 요컨대 도가보다 현실적인 유가의 소국주의조차 역사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몽상으로 치부되고 말았던 것이다.
3. 중형(中型)국가의 역할
꿈길에 유폐된 소국주의를 어떻게 현실로 불러올 것인가? 근대의 충격 속에 잃어버린 자존을 회복하기 위해 대국굴기(大國答⃞起)를 꿈꾸는 중국, 패전의 폐허를 딛고 이룩한 경제대국을 바탕으로‘보통국가’로 부활하려는 일본, 분단과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드문 경험을 먹이로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 세 나라 모두에 대국의 꿈이 비등한다. 또한 세 나라는 이미 큰 나라 또는 작지 않은 나라다. 중국은 가장 모욕받은 시대에도 소국으로 대접받은 적이 없는 태생적 대국이요, 영토적으로는 손색이 없지 않지만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인 일본 또한 실질적 대국이다. 한국 또한 왕년의 소국이 아니다. 더구나 세 나라가 소속한 동북아시아는 현재 가장 역동적인 자본주의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터가 아닌가? 따라서 세 나라 정부가 충심으로 소국주의를 집합적 강령으로 세운다 하더라도 동북아시아의 대두를 직·간접적으로 경계하는 다른 지역 국가들의 반응이 진지하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소국주의를 어떻게 이 지역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할 것인가? 우선 한·중·일 세 나라의 소국주의 전통에 대한 새로운 점검이 요구된다. 중국은 소국주의론, 최초의 발신자다. 또한 그런 나라답게 제국으로서 군림했던 때나 그렇지 못한 때를 불문하고 기묘한 수동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중국의 역대 제국들이 사대보다 사소를 더욱 중시한 유가의 국제주의를 사대 중심으로 재편한 왜곡을 지적했거니와, 그럼에도 중화(中華)체제는 사소적 측면을 흔적으로 간직하던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시기들이 없지 않았지만 무한히 팽창하는 욕망에 내달리지 않는 드문 자족성을 과시한 터인데, 주변국들이 중화체제의 우산 안으로 들어오면 내정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는 방임주의를 채택한 것 또한 유가의 소국주의 또는 사소의 전통에 말미암았다고 판단된다. 이 흔적은 근대로도 계승된다. 아편전쟁 이후 오래 지속된 반(半)식민지 상태와 단절하고 새로이 출범한 중화인민공화국이야말로 소국적 대국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을까? 이 점에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걸어온 길은 그동안 절제된 대국주의가 전통적 소국주의에 승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과연 중국은 대국주의로 질주할 것인가?
중국은 무모한 나라가 결코 아니다. 오래된 제국들은 물론이고 근대 이후 흥기한 신흥제국들도 사라진, 그리하여 그 최후를 장식할 미국마저 황혼을 맞은 이 시기에 다시금 홀연히 부활한‘지속의 제국’이 체득한 지혜와 책략이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미국의 견제란 또 얼마나 예리한 것인가? 미국의 봉쇄가 결국 소련의 붕괴를 야기한 전설을 여전히 기억하는 중국은 아직도 미국에 대해서 도광양회(韜光養晦)10 중이다. 그런데 고려할 점이 또 있다. 중국은 이미 미국에 깊숙이 의존적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위기를 중국이 도와야 하는 반어적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미국을 돕는 한편 미국을 추월할 기회를 엿보는 양면전술을 구사할 중국이 대국주의로 질주할 가능성은 그만큼 낮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정작 핵심적 문제는 중국이 미국 이후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다.‘급속한 시장화’를 핵심으로 하는‘워싱턴 컨쎈서스’의 파산과 “국가 주도의 점진적 시장개방”으로 요약되는‘뻬이징 컨쎈서스’의 흥기에도 불구하고‘중국모델’이 새로운 국제적 표준이 될 수 있을지 의구하는 분위기가 만만치 않다.(『한겨레』 2009.1.22) 이 점에서 쑹 훙삥(宋鴻兵)의 지적은 음미할 만한 것이다.
아직까지 중국은 서양의 생산기술을 대규모로 모방하는 쪽에만 큰 진전이 있을 뿐 사상이나 과학기술 혁신 면은 한참 모자란다. 특히 사상·문화영역은 문명의 자신감이 많이 부족하다. 이에 (…) 서양에 없는 새로운 시도를 할 엄두를 못 낸다. 따라서 새로운 세계의 규칙을 만들어내고자 시도하는 담력이 부족하다.11
그의 언급이 비록 과도한 단순화라 할지라도 어떤 직정성은 없지 않다. 중국이 그 덩치에 걸맞게 세계의 새로운 규칙을 담대하게 제출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뻬이징 컨쎈서스’가 실다워지기 위해서는 쓰촨(四川)참사(2008) 이후 더욱 새로워진 민주주의의 문제를 독자적이되 설득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다. 뻬이징올림픽 성공을 바탕으로 민주화에 대해 한층 대담해질 때 오히려 양안문제와 티베트문제의 전향적 해결도 가능할 것이다. 최근 양안관계가 비교적 순풍을 탄 점은 다행이거니와, 티베트문제가 답답한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점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독립적 지위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대만도 그렇지만 티베트 역시 중국 내정문제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티베트를 보통의 독립국처럼 여기자는 것은 아니다. 라마교가 원(元)이나 청(淸)과 같은 유목제국 안에서 특수한 지위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티베트가 중국의 완벽한 바깥이라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면성을 잘 감안하여 티베트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것이 중국을 위해서 더욱 좋을 터인데, 소국주의 또는 왕도적 대국의 길을 새롭게 활용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은 대국의 길에 매진(邁進)했다. 그런데 아시아의 맹주를 꿈꿨던 그 시대에도 소일본주의를 주창한 선각적 흐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1884~1973)이 이채롭다. 일찍이 1921년 일본을 파멸로 몰아갈 대국의 환상에서 깨어나 식민지전폐론(植民地全廢論)에 입각해 “학대받는 자의 맹주”로 거듭나자는 주장을 펼친 그의 소국주의론12은 일본을 전범(戰犯)국가로부터 면제할 급진적 대책이었다. 그저 하나의 삽화에 지나지 않았던 소일본주의가 “메이지 이후의 대국주의의 역사적 파산”인 패전으로 결정적 계기를 맞이한 것은 극적이다. 부활한 소국주의는 바로 평화헌법으로 결실을 맺는다. 평화헌법은 승전국 미국에 의해 강제된 이식의 산물만이 아니다. 일본의 선각적 지식인들이 스스로 다듬어온 소국주의 이념이 패전이란 외압을 중개로 현실화한 내발적 성과가 바로 평화헌법이라는 것이다.13 최근 일본 우파는 바로 이 평화헌법의 근간인 소국주의를 수정하려고 한다. 이미 파산한 대국주의로 회귀하는 길과, 대국주의의 유혹을 거절하고 자신과 이웃을 함께 살리는 소국주의로 귀환하는 길 사이에서 과연 일본, 아니 일본 인민은 어느 길을 택할까?
일각에서는 일본의 회심에 비관적인 견해가 비등하기도 한다. 물론 그 내부에는 전전(戰前)의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못내 버리지 못하는 집단도 없지 않을 터인데, 그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경각심을 벼려야겠지만, 일본이 패전 이후 평화헌법 아래에서 오랜 기간 번영을 누려왔다는 점을 망각할 수 없다. 그만큼 민주와 자치의 뿌리가 얕지 않다는 것이다. 설령 일본이 끝내 대국주의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니 그렇다면 더욱이 일본을 성심으로 달래야 한다. 마침 긴 자민당(自民黨) 지배의 끝이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다. 아마도 소국주의의 재평가에 기초한 실천의 숲길이 일본에 새로이 열리지 않을까?
아마도 소국주의의 우등생은 한국일 것이다. 중화체제의 충실한 일원으로서 사대와 교린(交隣)이라는 두 축으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버거운 이웃나라들을 상대해온 조선왕조는 결국 식민지로 추락함으로써 그 혹독한 복수를 받았다. 서구의 충격으로 중화체제가 붕괴하는 근대의 길목에서 대국주의자들이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가난함을 근심하지 말고 고르지 않음을 근심하라〔不患貧而患不均〕”를 모토로 근대적 소국주의를 추구한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과, 중립론으로 조선의 활로를 모색한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 같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자들의 지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개화파들은 거개 부국강병을 추구한 대국주의자였다.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 된다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14고 강조한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은 대표적이다. 일본의 힘을 빌려 쿠데타를 감행해서라도 조선을‘아시아의 프랑스’로 비상시키려고 했던 그는 조숙한 대국주의자였던 것이다. 대국주의건 소국주의건 근대와 마주친 첫세대 개화파들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우등생에 대한 열망은 더욱 내연(內燃)했다.
우등생과 열등생의 차이는 무엇인가? 뜻밖에도 분단 한국이‘네마리의 용’중 하나로 승천하는 순간 소국주의 열등생은 다시 우등생으로 변신했다. 미국과 일본을 끼고 약소국에서 탈출하려는 개발독재파와, 정치적 자유 및 경제적 평등에 기초한 내부개혁을 무엇보다 우선한 민주화투쟁파 사이의 겨룸 속에서 한국은 문득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로 상승했던 것이다. 그런데 개발파와 민주파를 소국주의에 비춰보면 간단치가 않다. 전자는 미·일과 협력적이란 점에서는 소국주의인 데 반해 부국강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대국주의적이다. 개발파의 대부 박정희(朴正熙)가‘부활한 친일파’와‘성공한 김옥균’이라는 두 얼굴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 단적인 예의 하나다. 후자 또한 복잡하다. 개혁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소국주의지만, 통일에 대한 의식이 점차 강조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강력하게 발현되는 대목에서는 대국주의다.
당시 개발파들의 서슬퍼런 단죄(?)에도 불구하고 민주파야말로 숙명처럼 유전된 약소국의 비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날을 열렬히 꿈꾼 한국의 애국자였으니, 민주파가 친일파의 후계적 지위에 있는 개발독재에 대한 저항운동 속에서 민족운동가들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잠깐 상기하자. 먼저 불퇴전의 항일지사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역사 속에서 걸어나왔다. 단정(單政)에 반대하고 결연히 북행을 감행한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더욱 널리 공유되었다. 당시 민주파가 그들을 들어올린 데는 맑스주의 혁명가들을 내세우지 못한 제약을 우회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한편 그런 사이 웅숭한 공감이 배양되었던바, 공유의 진행이 상(像)의 단일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제국을 몽상한 대조선주의자 단재가 무정부주의 혁명가 단재를 압도했다. 남한 민주파 일각에 스민 단재의 꿈은 마침내‘강성대국’북조선에서 비등한다. 무정부주의로 기운 뒤에도 대조선주의가 우련한 단재와 달리 백범은 뜻밖에도 소국주의적이다. 널리 알려진 「나의 소원」은 대표적 문헌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15
백범의 문화국가론은 탈식민국가 지도자들이 항용 취하곤 한 대국주의를 분명히 거절한 드문 지혜의 건국강령이다.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난 발언이 가지는 한없는 위엄으로 환한 그의 소국주의가 도가와 연관된다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거니와 정치에 있어서는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16
도가를 바탕으로 한 소국주의를 꿈꾼 백범사상의 고갱이에 대한 내적 공감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민주파도 담론의 진화 위에서 그 실천적 통로를 탐색하는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과연 한국은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나는 “대국주의를 반성하고 소국주의를 재평가하되, 국제분업의 주변부에 안주하는 소국주의로 전락하지 않는 것”, 즉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내적 긴장을 견지하는 일”17을 한국사회의 과제로 삼자는 주장을 편 바 있는데, 여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소국주의를 멀리 내다보며 대국과 소국이 함께 모이는 중형(中型)국가로 현재 한국의 위치를 조정하는 집합적 슬기를 발휘했으면 싶다. 소국주의의 고갱이를 중형국가론에 접목하는 작업과 함께 우리 안의 대국주의를 냉철히 의식하면서 그를 제어할 실천적 사유의 틀들을 점검하는 일이 우선이다.18 조선왕조의 소국주의를 다시 살피되 그 실패는 엄정히 평가하는 복안(複眼)이 요청된다. 가령 망국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쇄국(鎖國)만 해도 그렇다. 쇄국으로 표현된 전근대 소국주의의 속사정을 섬세하게 짚되 지금은 오히려 활발한 교류가 소국주의의 인큐베이터라는 점에도 새로이 착목하는 것이 종요롭다. 이 점에서 합법/비합법의 경계에서 운동의 혈로를 개척한 개벽종교 원불교의 지혜도 중요한 참조점이다. 특히 강자·약자의 진화에 대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의 법어(1916)가 주목된다. 강자와 약자를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파악하는 그의 사유는 유연하다.
강자가 약자에게 강을 베풀 때에 자리이타(自利利他-인용자) 법을 써서 약자를 강자로 진화시키는 것이 영원한 강자가 되는 길이요,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고 어떠한 천신만고가 있다 하여도 약자의 자리에서 강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여 가는 것이 다시 없는 강자가 되는 길이니라.19
이 대목은 앞에서 거론한 사대·사소와 상통하거니와, 강자의 위치에 선 중국이 아니라 약자의 지위에서 선 조선에서 발신된 바라 더욱 절실하다. “다만 자리타해(自利他害-인용자)에만 그치고 보면 아무리 강자라도 약자가 되고 마는 것”(86면)이라고 넌지시 지적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다만 강자를 대항하기로만 하고 약자가 강자로 진화하는 이치를 찾지 못한다면 또한 영원한 약자가 되고 말 것”(같은 곳)이라고 경고함으로써 우리 내부의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을 제기한다. 소태산의 회통적 사유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이 황혼을 맞이한 오늘날 더욱 유효하다. 다시는 약소국의 비애를 반추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소국주의의 안과 밖을 냉철히 분석하는 한편, 대소국의 차별이 폭력적 위계로 전락하지 않을 후천세상을 준비하는 집합적 노력이 절실하다.
자리타해하는 강자가 자리이타하는 강자로, 자해타리(自害他利)하는 약자가 자리이타하는 약자로 진화하는 그 겸허한 고리에 중형국가가 있을진대, 문제는 통일론의 향방이다.‘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흡수통일을 지향하는 대(大)한국주의적 통일론이,‘남조선’을 무력으로 해방하는 대(大)조선주의적 통일론과 함께 이제는 일단 수면 위에서는 거의 사라져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특히 통일문제에 있어서 대한국주의의 포기를 명백히 선언하는 데 이르지 못한 것은 문제다.‘남한’과‘북조선’이 하나의 나라가 되는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느슨한 연방 또는 국가연합이 통일의 최종단계라도 무방하다는 소(小)한국주의를 국민적 합의 아래 안팎에 천명하는 작업이 긴절하다. 그런데 소한국주의는 어떤 통일에도 반대하는, 또는 냉담한, 소국주의가 아니다. 분단체제의 극복과정에서 출현할 사회란 “한결같이 가난을 나누는 사회라기보다 각자가 넉넉하면서도 검약과 절제를 터득한 사회, 그리고 사회 차원에서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물질적 부(富)를 축적하되 그 처분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즉 “‘공빈(共貧)’보다는‘중용(中庸)’혹은‘중도(中道)’에 친숙한”20 소국주의라고나 할까.
‘논리적 양심’21까지 말살하는 민족주의의 충돌을 근본에서 억지하는 소국주의를 평화의 약속으로 회상하면서 대국 또는 대국주의의 파경적 충돌을 완충하는 중형국가의 역할에 한국이 충성한다면 동북아의 평화도 먼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한·중·일 세 나라의 정부와 시민이 함께, 서로 섬기는 평화체제의 구축에 충심으로 합의할 때 동북아의 내부충돌을 주둔의 빌미로 삼아온 미군의 명예로운 철수와 적대적 국제환경을 탓하며 지연된‘북조선’의 변법자강(變法自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루어질 희망을 가까스로 품을 수 있다. 동북아 세 나라 사이의 협동을 도모할 뿐 아니라 동북아와 미국의 화해도 이끌어낼 이 상호진화의 쉽지 않은 길이 안개를 뚫고 떠오를 때, 한국(또는 남북 국가연합)·중국·일본 세 나라가 문명적 자산에 근거하여 인류의 미래를 비추는 새로운 사회모형을 집합적으로 탐구하고 실천하는 본질적 작업에 매진할 조건이 성숙할 것이라는 예감이 긴절하다.
한·중·일 세 나라 모두 역정(歷程)의 한 중대한 고비에 처해 있는 이때 우리 문학인들의 임무가 중차대함을 새삼 새기며, 식민지시대의 조선 소설가 횡보(橫步)의 발언을 함께 음미하고 싶다.
우리 문학의 도(徒)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 우리의 교유, 우리의 우정이 이것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나가는 자각과 발분(發奮)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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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세춘 『노자강의』, 바이북스 2008, 672~73면.↩
- 蔣錫昌 編著 『老子校話』, 成都古籍書店 1988, 32장 214면.↩
- 같은 책 3면. 이 글의 번역은 기세춘의 『노자강의』를 따랐다.↩
- 같은 책 80장 459면.↩
- 같은 책 372면.↩
- 같은 책 375면.↩
- 『懸吐具解 孟子』 卷二 公孫丑 上, 18~19면.↩
- 같은 책 卷一 梁惠王 下, 30~31면.↩
- 모든 사적인 것의 폐기에 기초한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동세상은 유가의 유토피아다. 이행의 절차를 중시하는 유가는 천하를 한 집안으로 삼는〔天下爲家〕 소강사회를 중간에 두어 혼란을 막고자 했다. 임금을 아비, 왕비는 어미, 백성은 어린애로 비기는 유가의 왕도정치는 소강사회의 전형적 표현인데, 최근 중국공산당은 현단계 중국사회를 샤오캉(小康)으로 규정한 바 있다.↩
- 빛을 감추고 흐릿한 곳에 웅크린다는 뜻으로 『구당서(舊唐書)』가 출전이다. 약자가 강자로 상승하기 위한 냉철한 전략으로,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에 몸을 붙이고 있을 때 부러 못난 짓을 해 의심을 풀고 탈출한 고사는 그 대표적 예다. 떵 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도광양회를 제시했다. 중국의 위상이 높아진 요즘에는 폐기된 지침이라는 판단이 중국 안팎에서 제기되기도 하지만,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쑹 훙삥 지음, 차혜정 옮김 『화폐전쟁』,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427면. 중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금융전문가 쑹 훙삥은 이 책에서 음모론에 입각하여 아시아의 부흥을 저지하는 서양자본의 책략을 폭로한다. 이 책이 중국 독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얻게 된 것은 바로 다음 목표인 중국의 경각심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2007년 뻬이징에서 출간된 후 1백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쎌러다.↩
- 田中彰 『小國主義』, 岩波書店 1999, 136~37면.↩
- 같은 책 194~95면.↩
- 姜在彦 『近代朝鮮の思想』, 紀伊國屋書店 1971, 102면에서 재인용.↩
- 『김구주석최근언론집』(1948),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1992, 70~71면.↩
- 같은 책 66~67면.↩
- 졸고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 『문학의 귀환』, 창비 2001, 429면.↩
- 중형국가론은 “소국주의와 친화적인” 복합국가론과 상통한다. 이에 대해서는, 백영서 「20세기형 동아시아문명과 국민국가를 넘어서」, 『동아시아의 귀환』, 창비 2000, 32~35면 참조.↩
- 『원불교전서』, 원불교출판사 1994, 제1부 정전 제13장 최초법어, 85면.↩
- 백낙청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창작과비평』 2008년 여름호 462면.↩
- 이 말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파울젠(Friedrich Paulsen)에서 따왔다. “내셔널리즘은 극단에 이르러서는 (…) 윤리적 양심뿐만 아니라 논리적 양심까지도 말살한다.” 마이네케 지음, 이광주 옮김 『독일의 비극』, 을유문화사 1984, 69면에서 재인용.↩
- 염상섭 『만세전』(1924), 창비 1995, 16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