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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시평
일본의 사회현실과 『게 공선』의 부활
노마 필드 Norma Field
미군 점령기 일본에서 일본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시카고대 일본문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가 있으며, 최근 일본에서 『코바야시 타끼지: 21세기에 어떻게 읽을까(小林多喜二: 21世紀にどう讀むか)』(岩波書店 2009)를 출간했다.
* 이 글은 필자가 본지의 청탁을 받아 집필한 글로서, 원제는 “Commercial Appetite and Human Need: The Accidental and Fated Revival of Kobayashi Takiji’s Cannery Ship”이다. 이 글의 원문은 창비 영문 홈페이지(www.changbi.com/english)에서 볼 수 있다. ⓒ Norma Field 2009 / 한국어판 ⓒ 창비 2009
창비 독자들은 일본에서 가장 잘 알려진 프롤레타리아소설, 코바야시 타끼지(小林多喜二, 1903~33)의 『게 공선(蟹工船)』이 2008년 뜻밖에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전 노동인구의 3분의 1에 달한다고 추정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층의 빈곤 심화에서 이 소설이 부활한 원인을 찾고 있다는 점도 알 것이다. 이들 비정규직층 대부분은 연간 수입이 2백만엔(당시 환율로는 약 2천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점점 더 두드러져가는 그들의 존재 때문에‘격차사회(格差社會)’나‘워킹 푸어’(working poor, 근로빈곤층) 그리고 더 최근에 이르러‘상실의 세대(로스제네)’같은 용어들은 일상적이며 친근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 해도 “1929년에 출판된 소설이 부활한 이유가 중대한 사회경제적 변화 때문”이라고 정식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남는다. 현대소설을 통해 현대 상황을 파악하면 안된단 말인가? 어떻게 80년 전 소설이 오늘날,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밝혀주는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붐’이 일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을 넘어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서로 맞물려 있다.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건 간에 그것은 우리가 현재를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표현, 다시 말해 우리 의식의 표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왜 뜻밖의 현상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뜻밖의 ‘붐’
개인적 경험을 짧게 이야기하겠다. 대략 5년간 나는 코바야시 타끼지를 중심으로 이른바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을 연구해왔다. 나는 이 작가가 성장한 일본 최북단의 섬 홋까이도오의 항구도시 오따루(小樽)에 장기간 체류한 적이 있다. 내가 그를 연구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자, 적어도 그의 이름쯤은 들어보았을 그곳 사람들조차 대부분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대개 호의를 담은 놀라움이었지만, 회의적 태도로 바뀌기도 했고, 특히 지식인들의 경우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비록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아니 특히 그렇게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왜 지금 그런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거요?”라는 비난을 읽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정치의 계절’은 1960년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의 재개정에 반대해 벌어졌던 대중투쟁이 궤멸한 뒤, 그리고 1960년 공표된‘소득배가’계획의 결과로 생성된 관료적·경쟁적·소비자중심적 사회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1968~70년 학생투쟁이 패배감만 널리 확산시킨 채 막을 내린 뒤인 1970년대초에 끝났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는 코바야시 타끼지 같은 작가가 남긴 유산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질까? 29세의 나이에 특무고등경찰에게 고문당해 숨졌을 당시 그는 불법단체이던 일본공산당 당원이었다. 60~70년대 좌파지식인들은 그에게 다소 공감했을 법도 하지만, 그가 지식인들을 통제하고자 했던 당의 당원이었다는 점 때문에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또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계급에 기반한 혁명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작품들이란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중년이 된 좌파들이 보여주는 이 적대감에는 분명 당원 여부나 지적 진영의 차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타끼지라는 이름은 (자신들이) 타협적으로 정치에서 물러섰다는 까맣게 잊혀져가던 과거를 일깨웠고, 그것은 둔탁하지만 성가신 질책이었다.
젊은이들에게 그는 단지 알려지지 않은 존재 또는 기껏해야 일본 현대작가 목록에 들어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의 이름일 따름이었다.
‘붐’은 만들어진 것이자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
‘붐’이 시작되기 전 5년 동안 여러가지 상황이 벌어진 덕택에 타끼지에 대한 흥미가 소규모 추종자층을 넘어 확산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은 분명하다. 사노 치까라(佐野力)는 타끼지의 모교인 오따루 상과대학 졸업생이자 성공한 사업가인데, 그가 맹활약하고 주도한 덕분에 타끼지도서관이 설립되었다.1 도서관은 정보가 모이는 집결지가 되었다. 도서관은 또한 젊은 독자층을 겨냥한 만화판 『게 공선』을 포함해 열권의 저서 출판을 후원했고, 대학과 공동으로 일련의 국제학술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때가 왔음을 알려라, 타끼지(時代を擊て·多喜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2가 개봉되었고, 영화 상영을 계기로 새로운 타끼지 관련 모임이 형성되었다. 타끼지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운 덕에 영화는 헌법 제9조(평화조항)를 유지하려는 국민적 운동과 연계될 수 있었다.
이 시도들은 그 자체로 중요한 성취였고, 그 결과 새로운 인터넷 활동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반전(反戰)이라는 시각이 코바야시 타끼지에 대한 광범한 흥미를 촉발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위기에 대한 광범한 인식의 확산뿐 아니라, 나아가-자신들을 단일한 중산층으로 여겨온 사회로서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채택된 해결책이라는 것들이 심각한 불평등을 초래했을 뿐이라는 점에 대한 인정이 필요했다. 1990년대초 거품경제가 붕괴한 후 구조조정의 맹습이 시작되었다. 1998년을 시작으로 자살률이 급증했다(연간 자살자 3만명이라는 수치는 이후 10년간 유지되었고, 일본은 자살률에서 G8 국가 중 러시아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3년경 경기‘회복’의 징후가 찾아왔고, 미디어들은 이를 반겼지만 그 댓가로 소득격차가 증가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코이즈미 총리 자신이 그같은 인식을 방해했는데, 그는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하는 돌출행동을 일삼고 야스꾸니신사 참배를 통해 애국주의를 과대선전하면서, 자신이 대다수 일본 시민들에게 실제로 어떤 해를 입혔는지를 호도했다. 이와 동시에 정부가 이라크에 억류되었던 세명의 젊은 인질들에 대응하는 과정에서‘자기책임(自己責任)’이라는 용어로 압축되는 피해자 탓하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2006년을 대표하는 핵심용어 열개 중 하나로‘격차사회’가 선정되었는데, 그것은 설사 경기가 회복되는 중이라 해도 그 방식이 소수에게만 득이 되고 다수에게는 해가 된다는 점을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징표였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고 실업자가 청년층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프리터’(freeter)라는 표현에서‘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더이상 적절치 않았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파견노동자로 일하거나 그밖의 비정규직에 종사했는데, 이는 그들이 더는 정규직에 얽매이기를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였다. 불안정한 처지의 젊은이들은(이들을 지칭하는‘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신조어가 생겼는데, 그것은 이딸리아어‘위태롭다’precario와‘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라는 두 단어를 합성한 벽 낙서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때 우파 펑크록 밴드 가수였다가 노동운동가이자 작가로 변신한 아마미야 카린(雨宮處凜)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대변하는 투사를 발견했다. 아마미야는‘고스 로리(ゴスロリ)’3풍 복장으로 미디어의 큰 주목을 받는 인물이다. 그녀가 쓴 책의 제목 중 하나가 반빈곤운동의 표어가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를 살게 하라(生きさせろ)”였다. 이것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청원이 아니라 요구라는 점에서 신조어였다. 아마미야는 『게 공선』이 부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붐’의 전개과정을 시간순으로 짧게 요약해보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두편의 신문기사가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다. 전국지인 마이니찌(每日)신문 2008년 1월 9일자에 아마미야와 명망 높은 소설가 타까하시 겐이찌로오(高橋源一郞)의 대담이 실렸는데, 그 글에서 아마미야는 『게 공선』을 읽으며 그 소설에 묘사된 상황이 현재 젊은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왜 아마미야는 그 소설을 읽고 있었을까? 그녀는 『민슈우분가꾸(民主文學)』에 발표될 문학과 노동에 관한 토론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그 잡지는 공식적으로 독립지이면서 일본공산당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30대 초반인 아마미야는 구좌파와 신좌파, 신신좌파, 자유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출판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아마미야의 논평은 여러 사람들 사이에 널리 인용되었고, 마침내 중대한 영향을 끼친 두번째 글로 이어졌는데, 이는 자유주의 성향의 주요 일간지 아사히(朝日)신문 2월 16일자 기사였다. 그 기사에서 선임논설위원 유리 사찌꼬(友里佐知子)는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게 공선』 독후감 공모전에 대해 언급했다. 타끼지도서관과 오따루 상과대학이 공동주최한 이 공모전은 25세라는 나이제한을 두어 젊은 독자층을 겨냥하면서도 장년층과 홈리스 같은 특별 독자들이 인터넷 까페를 통해 응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게 공선』, 더 엄밀히 말해 도서관이 2006년 출간한 만화판 『게 공선』의 독후감들에 상당액의 상금을 제시했다. (사실 공모전 수상자들은 그후 소설을 읽었고, 그 과정은 응모작들을 모은 책인 『우리는 어떻게‘게 공선’을 읽었나』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책 역시 베스트쎌러가 되었다.)
보급판 서적 구매를 담당하는 서점 직원은 아사히신문 기사에 흥미를 느껴 그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녀는 소설이 프리터로 살아온 자신의 3년간의 삶을 너무나도 적절하게 해석해준다는 점에 놀랐고, 문고판의 출판사 신쪼오사(新潮社)에 소설 150부를 주문했다. 출판사는 솔직히 잊혀진 지 오래인 책을 주문받고 당황했다. 입고된 뒤 책들이 진열되었는데‘워킹 푸어’의 상황이 바로 『게 공선』의 모습과 꼭 같다는 주장을 담은, 손으로 쓴 소개광고와 함께였다.‘워킹 푸어’는 이미 익숙한 용어였는데, 낯설지만 현실을 구체적으로 연상시키는 『게 공선』과 여기서 환상의 짝을 이루게 된다. 처음 책에 주목한 것은 중년 남성독자들이었고 이후 20대 젊은이들이 그 뒤를 잇기 시작했다. 그후 큰 뉴스거리가 없는‘황금연휴’기간에 일본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보수 일간지 요미우리(讀賣)신문은 5월 2일 『게 공선』 붐-아직 붐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은 없었다-을 석간 기획기사로 다루었다. 곧 텔레비전 방송사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이 뜻밖의 인기주제를 다루기 시작해, 카메라를 들고 서점을 찾았고 공모전 수상자들을 촬영했다. 5월말까지 출판사는 20만부를 다시 찍었고, 12월말까지 서점에 출고된 신쪼오사 판본만 해도 60만부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다른 출판사들도 뒤를 따랐다. 슈우깐킨요오비(週刊金曜日) 출판사는 소설에 묘사된 노동상황과 오늘날의 그것이 어떻게 유사한가를 꼼꼼히 분석한 아마미야의 서론을 덧붙인 양장본을 출간했다. 현재 시장에는 4종의 만화판이 나와 있으며, 홋까이도오 방송국이 제작한 타끼지의 일생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NHK가 제작한 주요 작품들을 제치고 문화청에서 주는 대상을 거머쥐었다. 2009년 더 많은 책들이 출간될 예정이고, 연극 상연과 장편영화도 계획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열성적 영화애호가이자 찰리 채플린의 열렬하면서도 비판적 팬이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다가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예술형식에 관심을 보였던 타끼지에겐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이 연속적인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순전한 우연과 절대적 필연의, 상업적 욕망과 인간적 필요의 놀라운 일치인 듯싶다. 몇몇 단체들이(그중 대다수는 일본공산당과 관련을 맺고 있다) 수집, 편집, 재출판, 회보 발행, 타끼지 기일 기념 등의 활동으로 타끼지와 그의 작품에 노력을 쏟지 않았더라면 그 자료들을 이 역사적 순간에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타끼지는 그렇게 십년을 보내다 애호가들이 차츰 나이가 들어 죽으면서 함께 사라져갔을 수도 있다. 타끼지도서관의 활동 덕분에 그에게 새로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지는 않았다. 그들이 서로를 안다면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타끼지가 먼지 쌓인 도서관 책장에서 벗어나 되살아나기 위해선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즉,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1929년작 소설과 오늘날 정치사회적 질서가 만날 필요가 있었고, 그 만남은 후자의 압박 아래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가슴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성향의 신문에 실린 두편의 기사와 최초의 150부 주문, 그후에 나온 보수신문의 기사로 미미하던 관심이 한데 모여 큰 강물을 이루게 되었다. 미디어의 주요 관심사는 팔릴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는 것이고 기대했던 대로 판매는 급증했다. 뉴스거리가 된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출판사들은 더 많은 책을 찍어냈고, 서점들은 더 넓은 공간을 제공했으며, 그것은 미디어의 더 큰 관심을 끌어 책의 증쇄로 이어졌다.
대체로 상업적인 이 일련의 과정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0월 옥스퍼드대학에서 2008년 코바야시 타끼지 기념 심포지엄4이 개최되었는데, 키따무라 타까시(北村隆志)는 발표문에서 이 소설에 대한 보도방식이 변화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유사점을 인정하는 흔한 이야기에서 시작한 보도가 이제 단결된 저항만이 사회변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소설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주장을 되풀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에 흥미를 갖고 주목하던 저널리스트들이 그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깨닫기 시작했고 자신의 욕망을 활자와 방송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착취당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카니 코오센’(게 공선)은 일본사회에서 2008년을 대표하는 열개의 핵심 표현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일종의 메타포가 되었다.‘게 공선’은‘워킹 푸어’‘상실의 세대’‘격차사회’같은 용어들을 하나로 모았고 그것들을 착취의 불가피성이라는 이미지로 묶어냈다. 공선(工船)은 소련 근방 얼음바다에서 조업중인 공장이자 배라는 이중적 성격 때문에 국제해상법과 공장법 그 어느 쪽의 통제도 받지 않으며, 이 극악한 노동상황에서 다양한 전력을 지닌 노동자들은 별것 아닌 이득을 위한 경쟁에 내몰린다. 사실 이 배의 노동상황-노동자들이 배에 갇혀 노예 감독관과 다를 바 없는 관리자라는 눈에 보이는 적과 마주하고 있다-때문에 몇몇 이들은 이 소설이 과연 현상황에 적합한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현상황에서 임시노동자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있고 착취의 형태는 추상적이거나 비인격적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끼지가 작품에서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은 첫째, 위계질서에 따라 분열되고 잡다한 인간들로 구성된 노동자집단이 연대만이 살길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은 너무도 느리고 험난한 과정이라는 것, 둘째, 그들의 진짜 적은 눈앞의 잔혹한 감시자가 아니라 토오꾜오의 은행가들, 제국의 군대 그리고 전지구적 자본으로 구성된 구조라는 것이다. (사실 소설에서 노동자들의 최초 봉기는 실패로 끝나는데 그 원인은 그들이 제국의 해군이 부당한 감독들에 맞서 제국의 충성스런 신민인 노동자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헛된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교훈을 얻은 뒤에 노동자들은‘다시 그리고 또다시’봉기해야만 했다.) 타끼지는 그후의 주요작품 『부재지주(不在地主)』(1929)에 대해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소설에서 소작농들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그들이 비참하다는 사실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소작농들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사실이 아니라, 왜 그리고 어떻게 소작농의 비참한 상황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소작농들간의, 나아가 도시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밖에 없음을 그는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지난 수십년간 일본은 소비자로서의 쾌락만을 강조하는 탈정치화의 시기를 보냈다. 교육과 일터에서의 경쟁에 의해 조장되고 개인주의를 가장한 원자화를 수반했던 이 시기에‘노동’이라는 단어는 과로사 현상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잊혀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문학작품들이 착취와 저항 양자를 통찰력 있게 그려내지 못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전세계적 불황에 내몰리고 있으며, 우리가 우주비행사들을 보며 아찔한 흥분과 희망을 느끼던 시기에‘우주선 지구’(spaceship earth)가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였던 것에 비견할 만큼‘게 공선’은 어느 때보다 지금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고 있다.
‘게 공선’의 이미지 중 여전히 과소평가되고 있는 측면은 군대에 대한 인식이다. 계급체계와 식민주의 그리고 제국주의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예리하게 간파했던 타끼지는 계급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결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에서 두번째 작품이자 1933년 그가 살해당한 뒤 출판된 『당 생활자(黨生活者)』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중국)대륙에서 사용하기 위해 방독면을 생산하라는 명령이 갑작스럽게 떨어지자 동지들과 함께 조직화를 시작한다. 목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과 더불어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는 싸움을 함께하자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값싼 임시노동자들의 침해로부터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 했고, 임시노동자들은 전쟁 때문에 비록 단기간이긴 해도 임금노동의 기회를 얻은 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 조직화의 임무가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짐작 가능하다.
어렵지만 올바른 원칙과 분석이었다. 오늘날 일본 활동가들은 대개 안정된 중산층에 속해 있고 교육수준은 높으며 중년 이상의 연배다. 그들이 주로 역사의식, 군 위안부, 평화헌법 9조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을 뿐 젊은이들의 반빈곤운동(反貧困運動)에는 가담하지 않았듯이, 젊은이들 역시 반전운동을 과제로 삼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과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전적으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1920년대말과 1930년대초 타끼지와 그의 동료들의 의식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래서 현재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기 위해서는 반빈곤운동과 반전운동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세대간 단절뿐 아니라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종파주의적 잔재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 진행중인 논의와 움직임에 대해 알려주는 두개의 새로운 인터넷 잡지로 20대 초반의 비영리단체 회원들에 의해 운영되고 노동문제를 주로 다루는 『POSSE』와‘범좌파 잡지’를 표방하는 『로스제네(ロスジェネ)』가 있다.5
연대와 투쟁의 새로운 담당자
『게 공선』 붐이 일어나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적 냉담함이 만들어낸 외로움과 냉소주의 속에서 집단성과 행동주의에 대한 갈증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일본공산당 입당자는 월 1천명으로 증가했고, 이는 주류 미디어의 관심을 끌었다. 전국에 걸쳐 새로운 종류의 노동조합이 생겨나고 있는데, 그들은 개인단위 가입을 환영하고 법률상담과 지원을 제공하며 파견노동자들도 단체교섭을 추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들 노동조합과 주류 노총들을 포함한 20여개의 단체들이 모여 12월 31일부터 1월 5일까지 반빈곤운동의 일환으로 “새해맞이 파견노동자마을(年越し派遣村)”을 열었다.6 설연휴 기간에 행정부처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계약이 일시 중지되어 갈 곳이 없어진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토오꾜오 중심부 노동청 바로 코앞에 위치한 히비야공원에 텐트가 세워졌고 음식과 법률상담이 제공되었다. 무엇보다 뜻깊은 것은 다른 이들과 함께 전국민의 눈앞에서 새해맞이를 했다는 점이다.
일이 이렇게 발전해가는 것을 보았다면 타끼지도 분명 기뻐했을 것이다. 그가 빈민여성 문제에 적극적이었고 조직가로서의 여성들의 능력을 소설에서 종종 묘사했던 점에 비추어볼 때, 아마도 이와가미 아이(岩上愛)의 사례가 특히 흥미를 끌었을 법하다. 이와가미는‘고스 로리’패션브랜드 중 하나인 베이비(BABY)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에 근무하다 부당해고를 당했다. 그후 그녀는‘고스 로리’풍의 긴 검정색 드레스를 입고 노동절 집회와 노동자권리 공부모임에서 연설하곤 했는데, 주름장식이 잔뜩 달린 분홍색과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고객들이 그녀 주위를 둘러싸곤 한다. 그녀는 새로운 노동조합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자신의 사건을 법원에 제소했다. “노동자들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왜 문학인가
『게 공선』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서 타끼지는 식민지에 대해 그리고 경찰의‘반(半) 식민적’야만성에 대해 종종 언급했다. 그에게 주변부는 후진성과 가능성 모두를 의미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 작가들이 현대문학의 핵심적 문제들을 제기했다는 점을 주시하며, 자신에게도 그들과 동일한 열망, 즉‘부재작가(不在作家)’-토오꾜오의 중심부에‘부재’하고 반 식민적 주변부 홋까이도오에 자리한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위대한‘부재작가’는 식민지들에서, 곧 한국과 대만에서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게 공선』의 새로운 한국어 번역본(양희진 옮김, 문파랑)이 2008년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분명 타끼지를 기쁘게 했을 것이다. 또 이전 번역본이 재발견되고 번역자 이귀원(李貴源)과 발행자 이상경(李相炅)이 2008년 2월 아끼따(秋田)현에 위치한 타끼지의 출생지를 방문하여 연설을 했다는 점에도 감격했을 것이다. 이귀원은 부산에서 지하활동을 하면서 일본어판 맑스와 레닌의 저작들을 번역하던 중 문학작품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때 처음으로 타끼지의 작품들과 만났다고 말했다. 『게 공선』뿐 아니라 국가폭력을 묘사하는 「1928년 3월 15일」과 지하투쟁을 그린 「당 생활자」에 크게 공감했던 그는 이 세편을 번역했으며, 그의 친구인 이상경이 나중에 전두환정권이 막을 내린 뒤 이것들을 모아‘게 공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왜 이귀원은 문학작품이 필요하다고 느꼈을까? 이야기 나온 김에, 왜 타끼지와 그의 동지들은 그토록 바쁘고 위험천만한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 중에 문학을 생산할 필요를 느꼈을까? 그것이 문학작품이라는 점이 『게 공선』의 부활에 얼마나 중요할까? 제목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현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메타포를 제공했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작품 전체로 볼 때는 어떠한가?
낯설고도 익숙한 이 시대에, 소설의 방식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경험이 과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도록 할 것인지, 또 어떤 방식으로 그럴지는 앞으로 지켜볼 문제다. 노동의 필요성에 대해 연대하며 다시 한번 모든 이들이 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꿈꾸기 시작한 이들이 원자화된 소비자들의 집단에서 시민들의 공동체로 변모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번역 김영아│한성대 언어교육원 교수, 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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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한 내용은 www.takiji-library.jp참조.↩
- http://home.b09.itscom.net/takiji참조.↩
- 일본 10대와 젊은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는 복장으로, 유치해 보일 정도로 어리게 차려 입는 것을 뜻한다. Gothic과 Lolita두 단어의 합성어로 1997~98년 시작된 청년 하위문화다-옮긴이.↩
-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모은 『타끼지의 관점에서 본 신체, 지역 그리고 교육』이 2009년 2월 키노꾸니야 쇼뗑(紀伊國屋書店)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 『POSSE』는 www.npoposse.jp/magazine, 『ロスジェネ』는 www.losgene.org참조.↩
- 이에 대해서는 www.k5.dion.ne.jp/~hinky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