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 시선과 시선
2009년의 ‘노동자 시인’
백무산 시집 『거대한 일상』
박수연
고봉준
미래를 발견하는 길
박수연(朴秀淵)│문학평론가 qkrtk@chol.com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불필요한 오해,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이라는 오래된 오해를 무릅쓰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백무산의 시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 시작한 것은 그의 시의 내용적 측면 때문이다.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청사 1988)의 주제는 그를 노동자 시인으로 명명하게 했으며, 『인간의 시간』(창비 1996) 이후 전개된 시적 사유의 전환도 형식보다는 내용의 차원에서 드러난 사태들에 직결된다. 그의 시의 형식은 그 내용에 연동되기는 하지만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한층 더 정확하게 내용을 읽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언어들을 배열한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의 표현을 빌리면, 그 형식의 일관성은 “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고요에 헹구지 않으면」)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의 언어적 결과일 것이다.
‘시간’과‘길’이라는 화두가 백무산에게 본격 등장한 것은 『인간의 시간』부터다. 80년대로부터의 커다란 전환을 거치면서 나온 그 시집에서 비인간의 세계와 잠재된 지속의 단절된 시간이 차지하던 의미는 『거대한 일상』(창비 2008)에서도 여전하다. 여러‘길’시편들도 그렇고, 특히‘카이로스’로 지칭되는 시간관은 백무산의 시적 주제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주는 요인이다.
그것은 한순간의‘꽃’과도 같은 시간이다. 창조의 순간이 아마 그럴 것이다. 모든 시인들은 한편의 시로써 이전의 모든 작품을 배반하는 사람들이다. 시적 창조란 그 배반을 적극적으로 의미화하는 용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한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그 배반과 배반 속의 지속과 반복을 찾아내는 일일 터인데, 독자들은 그 배반과 지속, 반복의 교차에서 미적 굴곡을 느낄 수 있다. 이와 함께 백무산의 시적 전환이‘카이로스’같은 몇몇 핵심적 개념을 통해 상당한 비중으로 의미화된다는 사실도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 개념은 개별 시편들의 구체적 굴곡을 통과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적 대상들을 무한으로 놓아버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며 시의 원인, 근거가 무한하게 소급되는 과정의 무모함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창조의 배반’과‘개념의 일관성’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그의 시의 형식적 일관성은 그의 시적 주제의 대대적 전환과 어떻게 병행될 수 있을까?
백무산의 시에 무시할 수 없는 동요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 동요는‘모순의 카이로스’같은 애매한 말로 넘겨버릴 수 없는 사태를 보여주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두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첫 구절, “해가 뜨면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육즙 빠져 쭈그렁바가지가 된 시간이/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기에,//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강조는 인용자)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구절, “렌즈처럼 어느 지점에서 선명하게/고요의 수면을 만들기도 하지만/그것만으로는 출렁이는 문턱을 넘을 수 없지만,//그러나 그곳엔 다른 길의 길목이 있었다/길은 사건이 아니라 꽃이었다”(「길과 꽃」, 강조는 인용자)가 있다. 이 구절들은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중이다.‘고요’는 도래할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능한 것인가? 이것은 그의‘길’과‘시간’에 대한 일관된 화두의, 그래서 거의 개념이 되다시피 한 그의‘길’과‘시간’에 대한 화두의 어디쯤에 놓여 있는가? 이것이 그의 시집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의 그 개념화된 구체로서의‘길’과‘시간’이 『인간의 시간』 이후 대대적인 화두가 될 만큼 명확하게 의미화되었던 것이며, 그 중요성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백무산에게‘길’과‘시간’은 단지 이미지로서의 시적 구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그의 시적 전환에서 가장 무겁고 깊게 작동한 개념이라 할 만하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길」에서‘머무는 일’과‘명명하는 일’의 실패를 분명히 주장할지라도 그렇다. 이것은 묘한 역설인데, 어쩔 수 없는 역설인가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어떤 순간에 해당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매순간의 관계들의 연쇄를 필요로 하지만, 그 순간들의 무한확장, 무한소급을 피하기 위한 전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백무산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질뿐더러 최근 인문학계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스피노자(B. Spinoza)에게 인과들의 수평적 무한관계와 함께 수직적 연역의 한정이 필요한 것처럼, 개념을 통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백무산은 이미‘길’과‘시간’을 그렇게 수행적으로 사용한다. 그것을 시적 수행의 모순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시가 언어형식이라는 점도 주목되어야 한다. 백무산의 언어형식.‘A는 B다’같은 것. 혹은 사태에 대한 단정적 진술들. 그것이야말로 앞의 문제들을 더 예각화하는 언어형식이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시어의 형식들은 그것의 증거다. 「길의 숲」을 보라. 서술어들은 “알고 있었다”“알았다”로 집중된다. 이것은 하나의 사태가 명확한 단락을 맺었을 때만 사용될 수 있는 언어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시는 열려 있지 않다. 그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맑스 이후에서 다시 헤겔과 맑스로 열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시간은 무시간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가 말하듯이 “화석에서 자주 미래가 발견되기도”(「꿈」) 하기 때문이다.
잠재성으로서의 혁명
고봉준(高奉準)│문학평론가 bj0611@hanmail.net
‘경계’라는 시적 전회 이후 백무산의 근작들은 줄곧 혁명을‘생성’과‘잠재성’으로 사유해왔다.‘경계’에서‘광야’로,‘씨앗’에서‘소용돌이’로, 다시‘길’과‘흐름’으로 변주되어온 탈근대적 혁명의 사유는 시집 『거대한 일상』에 이르러‘다른’이라는 시적 언표로 집약된다. 이 혁명은 노동과 자본의 계급적 대립을 포함하지만, 지난날의 과학적 사회주의나 전위정당 모델처럼 전체주의적인 혁명의 길도 아니고, 현실 그 자체를 긍정하는 순응적인 긍정도 아니다. 그의 시편들은‘생명’과‘자연’에 주목하되, 현실적인‘적대’를 포기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나 과학의 이름이 아닌‘흐름’과‘유목’과‘생성’의 혁명을 사유한다. 이 사유 안에서 일상과 비일상, 혁명과 삶, 자연과 인간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백무산은 삶을‘잠재성’(virtuality)으로 사유한다. 시집 전편에 걸쳐 산포되어 있는‘다른’이라는 언표들-‘다른 생’‘다른 이름’‘다른 자유의 길’‘다른 시간’-은‘잠재성’의 시적 표현이거니와, 우리는 이것을 선택의 문제와 혹은 가능성(possibility)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나는 지나온 나의 전부가 아니네”(「생의 다른 생」)라고 말할 때, 그것은 프로스트(R. Frost)의 「가지 않은 길」처럼 또 하나의 길, 즉 선택이나 기회비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과 무관하게 현재적으로 존재하는 잠재성의 영역이다. 가능성이란 부재하는 현실이고, 그런 점에서 현실성과 대립한다. 반면, 잠재성은 현재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일부를 이루며, 때문에 현실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현재의 일부이다. 현재의 연장으로서의 미래와 관계하는 가능성이 아직 현실이 아닌 것일 뿐이라면, 그리하여 현실성과 대립한다면, 잠재성은 현재적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현실의 일부를 이룬다. 잠재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어떤 현실적인 것도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을, 때문에 모든 것을 변화의 가운데에서 포착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는 현재적인 견고함 속에서조차 끊임없이 변하는 생성의 힘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론적 창조성을 의미하는‘잠재성’은, 그러므로‘나의 전부’로 포획되지 않는‘낯선 생’이라는 인식처럼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삶 자체에 이미-항상 내재하는 현재성이다. 잠재성은 비형상적이기에 재현할 수 없고, 전개체적·비인칭적인 세계에 속하기에‘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창조와 생성을 향해 열린 삶의 잠재성은 다만‘다른’으로 언표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잠재성의 영역에서 삶은 정확하게 혁명의 동의어가 된다.
잠재성 안에서‘삶’은 결코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다. 물론 이 말은 삶이 동일한 것의 반복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일상’의 통념적 의미는 정확하게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닌가. 민족, 국가, 제국 같은 근대적인 분할선들 아래에서 계산, 측량, 해석, 부동산, 시계 같은 과학주의적인 관념들에 포획될 때, 삶은 계산될 수 있고 반복될 수 있는 것으로 전도된다.‘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차이의 반복이 산 노동이라면 동일한 것의 반복은 죽은 노동이다. 시인은 생명을‘계산’과‘합리성’으로 포획하는 근대적인 사유의 바깥에서, 즉 차이의 반복을 생명으로서의‘자연’에서 본다. “양귀비는 같은 꽃을 피우지 않는다.”(「다르게 피는 꽃」) 이것은‘자연’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특권의 자리에서 불러 내리는 것일 따름이다.
시인이 자신을‘독도인’이라고 명명할 때, 나아가 자신의 삶을‘유목’이라고 정의할 때, 그것은‘흐름’으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흐름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잠재성과 생성의 한가운데에서 생명으로서의 삶이 지닌 원초적인 역능을 가리킨다. 생명의 사유 안에서 분할선이 없다는 것, 실체가 없다는 것은 결코 결핍이 아니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고착시킬 수 없는 것, 재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인은 이 낡은 분할선들과의 절연이야말로 모든 죽은 것, 즉 낡은 것과의 절연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과의 연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명과의 연대, 즉 “들을 지키는 일”(「허망을 위해」)은 그곳을 비옥하게 만들거나 근대적인 방식으로 개발하는 데 있지 않다. 다만 흘러가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런 까닭에 백무산의 시는‘자연’을 환경의 수준에서 사고하는 인간중심적 생태학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흐르게 하는 일은 살리는 일/모든 길과 모든 생명은 머물지 않네/모든 실제는 오직 흐를 뿐, 생명은 머문 실체가 없어/지킬 수도 없네 만질 수도 없네.”(「돌아오지 않는 길」)‘생명’이란 인간이나 유기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백무산의 시적 사유 안에서 자연학과 윤리학은 구분되지 않으며, 삶에 대한 윤리와 혁명론의 구분 역시 불가능하다.
이 구분의 불가능성, 나아가 임금노동의 고단함과 일상의 비루함에 비추어볼 때,‘자연’표상을 앞세우는 긍정의 사유나 잠재성 운운하는 사유가 현실을 벗어난 추상과 관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백무산의 시가 보여주는 잠재성의 사유는 우리가 노동시나 생태시에서 기대하는 그 이상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잠재성은 곧 내재성의 세계이다. “봄이 밖에서 오면/욕망만 우북이 자라버리지”(「봄이 밖에서 오면」, 『초심』, 실천문학사 2003)처럼 혁명은 이제 밖에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꿈틀거리며 솟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삶과 혁명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청한다. 이 요청을 관념이라고 치부할 때, 현실의 비루함을 내세워 잠재성으로서의 삶을 사유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시적 사유를 부인할 수는 있지만 부정할 수는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