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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시적 언어의 모험과 시인의 충실성

김경주 시집 『기담』

 

 

이찬 李粲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2007년을 마감했던 한국문학의 세 화두」 「창작과 비평과 산문의 사이, 저‘문학적인 것’의 사유 공간을 위하여」 등이 있음. clandestin@hanmail.net

 

 

하이데거(M. Heidegger)는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라는 글에서 지금 우리 시대를‘세계의 밤이라는 궁핍한 시대’라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의 밤의 시대에는 세계의 심연이 경험되고 감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심연에까지 이르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이‘궁핍한 시대’에 시인의 사명은‘존재의 극단적 망각’을 넘어서 존재 그 자체로 되돌려 그것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통찰은 비단 낭만주의 시대에만 유효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탈(脫)낭만주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 2000년대에도 여전히 시인들은 언어의 자명한 지시체계, 그‘사이’공간의‘틈’속에서‘존재의 가깝게 하는 가까움’, 곧‘우리들 삶의 근원적 처소’를 찾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설혹 이러한 모색이‘존재의 환한 밝힘으로부터 규정된 장소성(Ortschaft)’에 다다르지 못하고, 더 나아가 진리체험의 어떤 단 한순간으로도 데려다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시대 시인들에게 이미 자동화된 저‘화폐로서의 언어’를 넘어서려는 모험과 그 지향성(Intention)이 깃들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시인들의 이 모험이 비록 하이데거가 기획했던‘존재의 개방성’이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탁월한 결과를 산출하지 못할지라도.

김경주(金經株)의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에는 “우리는 조금씩 열렬한 불순물에 가까워질 뿐이다”라는 말로 표상되는 자조의 태도가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또한 “언어를 열고 보면 그 속에 존재하는 멀미와 미로 때문에라도 언어 속의 가로등과 진피가 재구성되어야 한다”(시인의 말)에서처럼,‘존재’에 가까워지려는‘언어’의 모험이 강렬한 힘으로 그 표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시집에서 이러한 자조의 태도는 때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청색 테이프로 붙여주어야지”(「곤조GONJO」) 같은 언어유희로, 또 때로는 “아들: 엄마 그럼 내 취미는‘젠장!’과‘벼락’이에요.//엄마: 얘야, 그럼 엄마의 취미는 뭐라고 생각하니?”(「다섯 개의 물체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 시간」) 같은 시적 발화와 극적 발화가 뒤섞인 장르 혼종으로도 나타난다. 더불어 “인어(人語)와 언어(言魚) 사이에 지느러미가 있다”(「제2막 인어의 멀미」)는 말처럼, 시인은 말과 실재‘사이’의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거리를 첨예하게 의식하고, 그‘틈’에서 여러 형식실험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실험들이 또한‘존재의 환한 열어 밝힘’이라는 지극히 고상한 저 근원에 가닿지 못한다 하더라도, 근원에 대한 자각적 의식이 시인이 만들어낸 새로운‘인어(人語)’의 표면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근원에 대한 시인의 첨예한 자각은 때로 형(形) 이전의‘알 수 없는 사이’와‘언어의 공동(空洞)’과‘알 수 없는 미지의 혀’(「제1막 인형(人形)의 미로」)라는 오브제를 동원한 일종의 가면극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극은 하나의‘가상’(Shein)으로서, 그 자체가 이미 “자기 부정을 수행할 때/열 손가락에서 생겨나는 얼/거짓말의 글쓰기”(「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 식물을 토하고 죽는 짐승이거나」)라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언어의 지시작용이라는 자동화의 운명을 넘어서 사물의 실재에 가닿으려는 시인 자신의 모험이 좌절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은 “인간은 유령이 들고 있는 인형 같은”(「릴리 슈슈의 모든 곳 1」) 저 매트릭스의 참담한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의 계열을 낳는다. 이 시집에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언어, 혀, 인어, 형, 인형, 문자, 연필, 그림자, 문장, 기록 등의 시어는 모두‘실재’의 세계에 다다르지 못하는‘매트릭스’의 말잔치를 표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말과 실재‘사이’의 그‘틈’을 돌파하려는 자신의 모험이 인공어(人工語)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참담하게 자각하는 가운데서도, 아주 가끔은 그 둘이 서로 맞닿는 어떤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을 기록한다.

이 순간은 “가장 높은 안개에 자신의 위도를 세우고/몸의 물관들을 바깥에 모두 열어놓았다/그것은 눈부신 문자의 활공 같은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며, “알겠다 연필 속에서 물새들이 활공하는 소리,/들린다”(「물새의 초경」)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김경주는 사물의 실재에 가닿으려는 자신의 시어들이 매번 좌절되어 결국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역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제1막 인형의 미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또한 “혼란의 형신을 수용할 수 있는 형식을 나는 찾고 있습니다”(「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라는 탐험가의 말을 되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양가적 태도는 그가 말과 실재‘사이’에서 그‘틈’을 쉽게 포기해버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방향을 바꾸어 시적 언어로 철학의 과제를 쉽게 봉인하려 하지도 않는, 그 팽팽한 긴장상태를 견디고 또 살아내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 짐작된다. “이 극은 사이에서 빚어지고 사이에서 지워진다”는 「제1막 인형의 미로」의 한 구절은 바로 포기와 봉인 사이에 놓인 그의 심적 긴장상태를 표현한다. 더불어 그가 이 시집에서 극적 발화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사이’공간을 집요하게 천착하는 데서 발원한다고 생각된다.

다만 나는,‘사이’공간에 대한 천착과 그 장르 혼종의 형식실험들이 다소 편리한 방식의 다성성의 카니발, 또는 지나치게 세련된 인공적 기교로 나아가지 않을까 두렵다. 더 나아가 이 기교가 극단적 형식주의로 함몰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형식화가 번잡할 때는 다시 무의미가 입을 벌린다. 그 무의미의 아가리에 떨어졌을 때 의미는 내용이 형식에서 해방되어 소박한 상태로 복귀하는 운동 속에서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김상환 「대과大過 시대의 글쓰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94면)라는 한 철학자의 예언적 진술은, 나의 염려가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유력하게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진술은 『기담』뿐 아니라 형식실험에 골몰하는 우리 시대 모든 시집이 참고해야만 할 어떤 예지(叡智)를 간직한 것 같다. 형식실험이 몸이 아플 것 같은 무서운 전율의 순간과 이 세계의 상투성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버리는 어떤‘공백’의 순간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상투화된 파괴와 혼종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율과 공백의 순간은 자신의 실존 전체를 걸고 격투하는 시인의‘충실성’을 통해서만 현현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