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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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제국의 교차로에서 탈제국을 꿈꾸다』 최원식 외 엮음, 창비 2008

주변이 제국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로 들어가기

 

 

김영호 金泳鎬

유한대 총장, 국제동아시아공동체학회 공동대표

 

 

촌평_제국의교차로동아시아가 형성 도상에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연구도 붐을 이루어왔다. 동아시아 연구는 국민국가를 이룬 국가들, 그중에서도 대국의 동아시아지역 진출, 다시 말해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의 진출을 주로 다뤄온 편이다. 또 국가와 자본과 상품의 움직임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남재단 창립 20주년 기념 동아시아 순회토론을 책으로 묶어낸 『제국의 교차로에서 탈제국을 꿈꾸다』(최원식·백영서·신윤환·강태웅 엮음)가 주목을 끈다.

이 책에서 동아시아 연구를 주도해온 학자들은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문학과지성사 2004) 출간 후 “주변을 동아시아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열쇠로 삼는다”는 생각에서 “주변에 더욱 주목하기로”(8면) 다짐하고 주변 현장을 찾아 현지 지식인들과 함께 열띤 연구회를 벌였다. 그래서 그런지 현지의 육성이 생생하고‘제국의 교차로’에서 보이는 동아시아의 풍경이 색다르다.

공동연구 그룹이 택한 공간은 바로 오끼나와, 호찌민, 타이뻬이다. 이들은 각각 일본의 남쪽 끝, 베트남의 남쪽 끝, 중국의 동쪽 끝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구조적으로 연결된‘제국의 교차로’다.(10면) 동아시아 문맥에서 새로 발견한 오끼나와요, 호찌민이요, 타이뻬이인 것이다.

오끼나와는 옛 류우꾸우(琉球)왕국이 메이지정부에 무력 귀속되어 태평양전쟁으로 근 10만의 민간인이 희생되고 패전 일본에 의해 천황제 보존을 위하여 미군에 공여된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조선인과 대만인을 차별했던 가해자였다. 또한 결과적으로 천황제 유지와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전후청산의 한계를 구조화했을 뿐 아니라, 그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의 지원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한·미·일 군사안보의 요충이 된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전체와 구조적으로 연관된다. 이 책에는 오끼나와의 피해자적 측면과 가해자적 측면이 가지는 양면성에 대한 분석이 도처에 절절하다. 오끼나와측 참가인사들, 가령 야까비 오사무(屋嘉比收) 교수는 “저도 (…) 외국에 가면 일본인이라고 하지 않고 오끼나와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가서 한때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 저는 일본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23면)라고 고백한다.

오끼나와를 동아시아적 문맥에서 재발견한 것은 동아시아 풍경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오끼나와라는 자물쇠를 푸는 작업이 동아시아론의 미래를 열 열쇠의 하나라는 깨달음이 소중하다”(9면)는 최원식(崔元植)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다. 그리고 이 열쇠를 만드는 핵심은 오끼나와의 주민이 “(일본) 국민도 아니며 현실에 무책임한 비국민도 아닌”(백영서 125면)이들을 초월한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전망한다. 새로운 주체의 성격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아시아 시민’의 탄생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동아시아라는 열쇠가 있어야 오끼나와라는 자물쇠를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역리(逆理)를 불러온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양면성에 이은, 동아시아 모순의 열쇠이면서 자물쇠라는 양면성이다.

타이뻬이 편에서는 2차대전 이후 민족국가 열차에 올라타지 못한 대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천민이라는 우 루이런(吳叡人)의 성격규정이 사뭇 인상적이다. 경제적 상상력 면에서는 선진국의 문턱까지 온 대만이 씨스템적으로는 주변적 지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대만이 홍콩화할 가능성은 대만이 오끼나와화할 가능성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아울러 “타이완의 내성인과 외성인 간의 성적(省籍) 갈등이 표출된 통/독의 분열을 타이완섬 내부의 문제 또는 양안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고 동아시아의 냉전세력과 식민주의세력이 연동된 결과”(253면)라는 천 꽝싱(陳光興)의 분석이 흥미롭다. 그는 대만을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재발견하면서 문제 해결방안 역시 동아시아의 탈냉전과 탈식민 과정에서 찾는다. 구체적으로는 동아시아 비판적 지식인의 연대, 즉‘비판권(批判圈)’의 활성화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대만 역시 오끼나와와 비슷하게 동아시아라는 열쇠로 열 수 있는 자물쇠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을 터이다. 이것은 대만의 내부개혁 문제와 연관된다. 이런 점에서는 천 팡민(陳芳明)이 대만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피해를 어떻게 혜택으로 바꾸어내느냐”(231면)에 있다고 설파한 대목이 감동적이다. 스페인, 네덜란드, 중국, 일본, 국민당정부, 미국, 다시 중국에 의한 지배의 그림자가 드리운 대만으로서는 뤼 샤오리(呂紹理)의 지적처럼 “다중주변 다중중심”으로 “제국에 대한 상대감”을 갖게 되고 여러 식민지 경험을 “새로운 창조력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개방적 태도”(231면)를 보이면서 어느덧 피해를 혜택으로 바꿔낼 전망이 서지 않을까. 최원식이 타이뻬이의 다민족, 다종교의 열린 포용력 그리고 개방적 문화공간을 보고 느낀‘문화의 생명력’‘새로운 문화 창출력’에 동아시아 문제를 풀 열쇠, 포용과 연대의 동아시아를 열 열쇠가 예비되고 있기를 기대해본다.

호찌민 편에서는 베트남측의 요청으로 원래의 제목 대신‘동남아와 동북아의 대화’를 제목으로 삼았다는 것이 상징적이다. 이는 탈제국에 성공한 국민국가의 실용주의 그리고 도이모이(쇄신)정책과의 괴리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법하다. 그들은 경제발전을 위해 제국들과의 실용주의적 교류협력이 필요할 터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저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반레(Van Le)의 반응이 감동적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 분노와 원한을 갖는다면 어떻게 역사 속에 살아남아 이 길고 긴 전쟁을 이길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떠나는 적군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길을 열어준다. 전쟁이 끝나면 화해의 손길을 우리가 먼저 내민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가장 베트남적인 정신의 발로로서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것이다.”(133면) 시적 함축이 넘치는 말이며, 베트남인들이 한국 같은 베트남전 참전국에도 유연하고 우호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오끼나와도 대만도 베트남도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여러 제국과 상대하며‘다중주변 다중중심’을 경험했다. 그러나 오끼나와는‘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임을 자각하고, 대만은‘피해를 어떻게 혜택으로 바꾸어내느냐’를 고민하며, 베트남은 전쟁이 끝나면 화해의 손을 내밀고 실용주의적 협력의 자세를 취한다. 이 세 곳의 이야기에 일맥상통하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주변부가 종속이론에서와 달리 피해자의 저항적·혁명적 입장을 넘어서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여러 제국이 지배한 데서 생기는 일종의 교차로 현상, 즉 제국들이‘상대화’되고 그 지배의 정당성이 약하며 인권의식과 주민자치의 신장으로 다원적인 거버넌스 혹은 공치(共治)의 틀이 가시화되어 종속이론에서의 주변부와는 다른 다양한 길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주장하듯이 초국경적인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 혹은 지식인의 연대를 위한 공동의 기초 중 하나는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 그리하여 공동의‘비판권’형성이라 할 수 있다. 평자도 동아시아 시민사회 성립조건으로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 바 있다. 아울러 오끼나와의 가해자 의식, 대만의 피해를 혜택으로 전환하는 의식, 베트남의 적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의식을 공유하는 것도 동아시아 형성에서 공동의 기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백영서(白永瑞)의 문제제기처럼 “동아시아 공동체와 한국 내부의 개혁이 어떻게 서로 연동되는 것인지”(249면) 하는 물음은 천 꽝싱의 “국민국가의 밖에서 이뤄지는 국가간 통합과정과 국가 안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참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의 내부개혁 과정이 쌍방향적으로 추동되어야 한다”(255면)는 주장으로 통한다. 한국에서도 동아시아공동체와 한국 내부개혁을 연동한 논의는 미흡하다고 평가되는데, 이 책 저자들의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총체적 개혁운동이 동아시아 평화구축에 핵심적 의미를 갖는다”는 시각이 평가받는 것이 이 지점일 것이다.

끝으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동남아에서 동아시아공동체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평자는 동남아와 한국의 반주변적 국가간의 연대가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서 거론한 다른 주변과의 다양한 연대의 일환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외환위기와 지금 금융위기로 금융협력과 화폐통합에 중점이 두어진 금융 아시아를 넘어서 이제 휴먼(human) 아시아, 씨빌(civil) 아시아 혹은‘사회적 유럽’(Social Europe)과 유사한‘사회적 아시아’(Social Asia)가 이루어지는 단계로 가지 않을까 상상한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책이 그리고 있는 주변부내 시민들의 자발적·초국경적 연대에 의해 가시화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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