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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남윤수 南潤秀
1982년생.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essego@hanmail.net
당신의 얼굴
긴장 탓에 새벽녘에 깨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데 문밖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누군가 수화기를 집어들었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거의 열흘 만에 들어보는 아버지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수화기에서 새어나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네 형이야, 인마. 너는 나보다 잘살면서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동생이 돼서 형이 잘살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빚 독촉이나 하고. 그러고도 네가 동생이냐. 세상이 정말 어찌되어가는지. 돈이 피보다 진하다는 게 실감나는구나. 하긴 넌 같은 피도 아니지,라고 쏘아붙이며 아버지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나는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면서 슬며시 잠금 버튼을 눌렀다. 벌써 아버지와의 대화가 단절된 지 수개월이 지났다. 그걸 빌미로 아버지가 홧김에 내 방으로 들어와 시비를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옆방 문이 열리며 어머니의 발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와서 가스레인지 점화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왜 이제야 아침을 준비하느냐며 괜한 신경질을 부렸고 어머니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학사정보 씨스템으로 들어가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확인 버튼을 클릭했다. 눈을 떴다. 예비합격번호 2번. 포털싸이트 검색창을 띄워 작년 추가합격자 현황을 확인했다. 내 예비번호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다시금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국이 왜 이리 짜. 김치는 왜 이리 싱겁고. 반찬은 이거밖에 없어? 반찬 살 돈 한푼 안 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어머니는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언성은 금세 높아졌고 어머니는 몇마디 대꾸하다가 언제나처럼 꼬리를 내렸다. 말대답만 늘어가지고는. 아버지는 다시금 수저를 들었다. 아버지가 입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진짜 안 갈 거야? 어떻게 가요. 염치도 없이. 돈이야 벌어서 갚으면 되는 거지, 그래도 명절인데. 어머니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짜서 도무지 못 먹겠다. 다시 가져와. 아버지 말에 끙, 하고 어머니는 일어났다. 아버지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거, 한 십만원 정도 없어? 한참 후 어머니가 말했다. 막내 병원 갈 돈도 모자라요. 아버지는 혼자 뭐라고 실룩대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나는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신발 신는 소리가 난 후 현관문이 바닥을 끌며 열렸다가 닫혔다. 아버지와 사이가 어떻든 간에 나는 며칠 후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야 할 것이다. 나는 종손이었다.
의사는 동생의 병명이 갑상선항진증이라고 했다. 심각한 병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약물치료와 통원치료를 병행하면서 길게 싸워야 한다고 했다. 고생할 동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동생 치료비로 들어갈 내 통장의 잔고를 생각했다. 입학처 교직원은 확신할 순 없지만 곧 내 순번이 올 거라고 했고 등록금을 미리 준비해두는 편이 좋을 거라 했다. 병원비가 예상보다 초과된다면 학자금 대출을 받고도 입학 후 생활비 명목으로 또 대출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나는 망연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이층 양옥으로 된 작은아버지 댁이 눈에 들어왔다. 스피커에서 종점을 알리는 안내멘트가 나왔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차벨을 눌렀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가 아침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차례는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왜 이제 왔냐? 작은아버지가 나무랐다. 얼른 와서 앉아라. 밥 먹고 할아버지께 세배 드려야지. 나는 작은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엉거주춤 앉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다가 국을 떴다. 아버지는 나를 한번 힐끔 보고는 밥을 떴다. 내가 앉은 자리에는 수저가 없었다.
부엌으로 들어섰다. 숙모는 씽크대 앞에서 김치를 썰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숙모는 이마를 훔치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숙모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프지? 얼른 가서 밥 먹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수저가 없다고 했다. 그래? 숙모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씽크대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거실 쪽에서 숙모에게 김치 아직 멀었냐, 소리치는 작은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숙모는 가져가요, 하고는 수저통을 들여다보고 씽크대 서랍을 열었다. 남는 수저가 없는 모양이었다. 놔두세요. 집에서 아침 먹고 왔거든요. 그래도 뭐 좀 먹어야지. 그때 다시 한번, 작은아버지가 김치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잠깐만. 숙모는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지금 가요, 숙모는 거실 쪽으로 소리치며 식탁 위에 있던 접시를 들고 와서 잘라놓은 김치를 담았다. 행동이 왜 그리 굼뜨냐. 가져오라고 한 게 언젠데, 거실 쪽에서 작은아버지가 나무랐다. 내 시선은 식탁 위, 소쿠리에 담긴 차례음식에서 떠나지 않았다. 숙모 혼자서 저 많은 걸 다 만든 건가.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지 이 상황이 낯설었다. 숙모는 나를 지나 빠른 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어머니의 뒤태가 겹쳐지는 숙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부엌을 나와 슬그머니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아무 책이나 빼들었다.
문이 열리며 작은아버지가 들어왔다. 밥 안 먹어? 배가 안 고파서요. 작은아버지는 책상 옆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이리 늦었어? 아르바이트 때문에요. 할아버지가 계속 너 찾았다. 그래도 네가 종손인데. ……차례 때 보니까 정수가 몸이 안 좋아 보이더라. 얼굴색도 누렇게 뜨고 목도 붓고. 아까 약 먹고 방에 들어가 잠깐 누웠다. ……어머니는 잘 계시지? 계속 식당 일 나가시고? 고생 많으시다. 네가 잘해야 된다. 나는 작은아버지의 말에 짧게 대답하며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작은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다음주 할머니 제산 거 알지? 그땐 늦지 말아야 된다. 오늘 할아버지가 많이 기다리셨어, 작은아버지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이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나와서 떡국이라도 한숟갈 들어. 설날이잖아. 네, 좀 이따 갈게요. 작은아버지는 문을 닫고 나갔다. 굳게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설 연휴가 끝나고 이틀 후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 몇개의 독촉장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신발을 벗으며 그중 하나를 집어들었는데 어머니 앞으로 온 것이었다. 스멀스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자기 앞으로 독촉장이 날아온 사실, 즉 아버지가 어머니 카드를 몰래 들고 나가 도박에 쓰고 다닌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집이 경매로 넘어간 사실을 알았을 때, 그때 아버지는 벌어서 갚으면 되지, 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그래도 난 네 아버지야,라고 했다. 그 네 아버지야라는 말이 가슴팍을 파고들어 지금까지 거미줄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다. 나는 아버지 앞으로 온 나머지 독촉장들을 집어서는 잔뜩 구겨버렸다.
거실이라고 해봤자 세평 남짓한, 부엌과 겸한 곳이다. 거기로 들어서는 순간 고기 냄새가 콧속으로 옅게 배어들어왔다. 오늘이 어머니 월급날이었던가. 씽크대 개수대에는 고기를 구웠던 프라이팬, 기름장 접시, 밥그릇 등이 쌓여 있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옷을 추스르며 밖으로 나올 때, 화장실 거울에 언뜻 내 얼굴이 비쳤다. 뜬금없이 나는 저게 내 얼굴인가 싶어 무심코 얼굴에 손을 갖다댔다. 어머니가 말했다. 일찍 왔네. 후번 근무자가 일찍 왔거든요. 나와 시선이 마주친 어머니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머리 그렇게 해서 다니지 말라고 해도 또 그렇게…… 어머니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덥수룩한 게 꼭 네 아버지 같네. 안 지저분하니? 정리 좀 해라. 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니는 씽크대 쪽을 힐끔 보고는 매트에 발을 닦으며 말했다. 너 퇴근시간 맞추기가 참 힘드네. 다음에 같이 먹든지 하자. 어머니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어김없이 그렇게 변명을 했다. 어머니는 나를 지나 설거지를 하기 위해 절뚝거리며 씽크대로 걸어갔다. 식당 주방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퉁퉁 부어버린 어머니의 종아리. 어머니는 걸을 때마다 종아리가 자기 종아리가 아닌 것 같다고 버릇처럼 말했었다. 제가 할게요.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씽크대로 다가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힐끔 뒤를 봤을 때 어머니는 일을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는 거실 바닥에 생각에 잠긴 듯 앉아 있었다. 식당 주방에서 또 하루를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던 걸까. 어머니의 얼굴에 가득 서려 있는 아득함. 나는 씽크대를 행주로 마저 닦은 다음 바닥에 떨어진 설거지물을 걸레로 훔쳤다. 정리를 끝내고 어머니 곁에 앉아 종아리를 주무르려고 할 때, 됐다, 늦겠다, 어머니는 내 손길을 슬며시 뿌리치고는 힘겨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멈칫하다가 일어났다. 어머니는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정수 일어나면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고 저녁 챙겨줘라. 네, 다녀오세요. 나는 어머니에게 다가서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닫히다 만 현관문을 닫으려 손잡이를 잡았을 때 열린 문틈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어머니의 작고도 꾸부정한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여태까지 나를 이곳에 붙잡아온 어머니의 뒤태였다.
상에 널브러진 빈 약봉지를 집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한뼘 정도 열린 문틈. 불이 꺼진 걸로 보아 동생은 내가 오기 전 약을 먹고 방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을 꺼냈다. 컵을 꺼내려 찬장을 열었을 때 포개놓은 접시들 뒤로 검은 봉지 하나가 보였다. 그 안에는 동생이 좋아하는 과자가 들어 있다. 내가 보지 못하게 어머니가 숨겨둔 것이다. 그 아래칸, 포개놓은 밥그릇들 뒤로 새로운 검은 봉지가 하나 더 보였다. 봉지 안에는 동생의 비타민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어느새 씽크대와 찬장 여기저기를 열어보고 있었다.
언뜻 스치다 본, 재활용품 분리수거통에 들어 있던 것은 오륙십만원을 호가하는 디엠비폰 상자였다. 속 알맹이는 어디 갔는지 껍데기뿐이었다. 한달에 방세 이십오만원도 제때 못 내는 걸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빚 갚기도 벅차면서.
한뼘 정도 열린 동생의 방 문틈에서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폰 상자를 수거통에 넣고 다가가 문을 밀었다.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 동생이 웅크려 신음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동생이 등을 돌렸다. 엄마? 나는 불을 켰다. 동생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뒤범벅돼 있었다. 목이 풍선처럼 부어올랐고 연신 손을 떨어댔다. 형. 목이 또 이상해. 형. 동생은 내 쪽으로 기어와 손을 뻗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동생이 쥐고 있는 새 디엠비폰에서는 누군가와의 통화가 연결되고 있었다. 수신자는 어머니였다. 형아. 나 죽는 거 아니지. 형. 동생의 눈이 돌출되고 있었다. 디엠비폰 너머에서 정수야, 정수야, 하고 어머니가 소리쳤다. 한참을 가만히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점점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때 현관 쪽에서 다급히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나는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재바르게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윽고 덜컥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급하게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왔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니는 동생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 어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동생 머리맡에 앉아 얼굴을 살피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쳤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디엠비폰을 집어 일일구 버튼을 꾹꾹 눌렀다.
어머니가 의사와 이야기하러 간 사이 나는 동생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동생은 평안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보호자 침대에 모로 누웠다. 어머니는 늦둥이인 동생을 유난히 아끼고 귀여워한다. 가정형편 때문에 유치원조차 보내지 못한 미안함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병마와 싸우는 동생이 안쓰러워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노골적으로 제쳐두면서까지 동생을 챙기는 것은 단지 그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아까 뒷걸음칠 때 봤던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옅은 눈썹과 긴 눈꺼풀, 오뚝한 코, 그리고 하얀 피부. 동생은, 쌍꺼풀 없이 길게 찢긴 눈, 매부리코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나와는 달랐다. 그런 동생 얼굴을 볼 때면 항상 누군가의 얼굴이 살아나 어른거렸다. 어머니 얼굴이었다. 동생의 이목구비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닮았다. 그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단지 아버지의 이목구비와 닮은 나와 달라서였을까. 아니면 나에게 늘 돈만 요구하는 어머니가 떠올라서였던 걸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는 수술비와 입원비, 약물치료비로 이백만원 정도가 들 거라고 했다. 네 아버지는 돈 구해온다고 해놓고 또 연락이 없더라. 어머니는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제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어머니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주눅 든 표정이 다시 한번 내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제가 한번 구해볼게요. 나는 어머니를 지나쳐 병실 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도박을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눈치챘다 한들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확실한 사실은 아버지의 도박은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것이다. 지난주에도 아버지는 도박자금 때문에 집에 들어왔을 테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빚쟁이를 피해 서둘러 나간 게 틀림없다. 그날 아버지가 나가고 나서 빚쟁이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부엌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들은 벌써 몇달째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먼저 냄새를 맡고 나와 동생, 어머니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아버지. 덕분에 내가 어렸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머니가 빚쟁이들을 홀로 감당했다. 빚쟁이들이 휘몰아치고 간 집에서 어머니는 늘 주저앉아 메마른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는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피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어머니의 확대된 동공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에서 누군가를 본 것일까. 그 경멸과 독기 섞인 눈빛. 그때마다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낮은 음성으로 아버지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수납완료 후 영수증을 받았다. 액수가 적힌 영수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통장 잔액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합격만 하면 학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니 등록금 문제는 무난히 해결될 것이다.
동생은 수술 후 일주일 정도 입원해야 했지만 추가로 드는 입원비가 만만치 않았다. 의사의 허락하에 병원으로 다시 올 때까지 집에서 요양하기로 했다. 안내데스크까지 따라온 간호사는 어머니에게 병원으로 올 때 구급차를 부르면 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십킬로미터 이내는 기본요금 이만원, 초과시 일킬로미터당 팔백원씩 추가된다는 구급차 이용안내서를 건넸다.
추가합격 문자메씨지가 온 건 오후 세시 즈음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이내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축하드립니다. 추가합격하셨습니다. 입학처 교직원은 나의 합격을 예상했다는 듯 호기롭게 말했다. 등록했던 학생이 등록금을 환불해 가버렸어요. 덕분에 학생 순번까지 왔네요. 오늘 다섯시 반까지 등록금을 납부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다섯시 반요? 네, 다섯시 반까지 입금확인이 안될 시 입학의사가 없다고 판단하여 합격이 취소됩니다. 유의하시고 신속한 납부 부탁드립니다. 좀더 연장해주시면 안되나요. 그건 곤란합니다. 오늘까지 반드시 등록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다음 순번으로 넘어갑니다. 학교 방침이 그렇습니다. 만약 기간을 연장해준다면 위법이며 감사 때 지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 입금 후 연락주세요. 전화는 끊어졌다.
같이 일하는 학생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편의점을 나왔다. 피씨방으로 가면서 정부 학자금대출 포털로 전화했다. 죄송합니다. 추가합격인 경우 바로 대출이 불가능합니다. 사비로 등록금을 먼저 낸 후에 발부된 영수증을 가지고 해당 은행으로 가면 대출해줄 겁니다. 방침이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점장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오늘까지 일한 돈을 가불해달라고 했다. 그래도 삼백만원이 모자랐다.
컴퓨터 앞에 앉아 대출싸이트를 검색했다. 제일금융권은 부모의 신용을 원했다. 제이금융권을 찾았다. 여러개의 상호저축은행이 떴다. 전화번호를 찾아 꾹꾹 눌렀다. 본인의 신용만 깨끗하다면 대출이 가능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안내원이 말했다.
지금 바로 주민등록등본, 병적증명서, 통장 사본, 신분증 사본 구비해서 팩스로 보내세요. 네. 휴대전화를 닫았다. 몇가지 서류는 집에 있을 것이다. 피씨방을 나와 집으로 달렸다. 매달 월급의 삼분의 이가 방세와 병원비, 생활비로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어머니는 항상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 이젠 네가 이 집 가장이나 마찬가지야, 항상 나에게 당부하듯 말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스쳤다. 재수하겠다는 말은 그때마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 어머니의 월급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늘 떠다니던 고기냄새. 나는 늘 한발 늦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가 한발 빨랐을지 모른다. 등록금이 해결되어 합격만 된다면 이곳을 벗어나 학교를 다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늘 원했던,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달리는 허벅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안내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부모님 신용문제 때문에 심사에서 탈락된 것 같네요. 부모님 신용은 상관없잖습니까? 제 신용만 깨끗하다면 문제될 게 없다고 했잖습니까?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심사는 제가 하는 게 아니라서 어떻게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심사하는 분 바꿔주시면 안되나요? 규정상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전화가 끊기고 다른 곳을 알아봤다. 다른 곳도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몇번 거절당한 뒤 연락한 상호저축은행이었다. 심사가 통과됐다고 했다. 본인의 신원확인을 위해 부모님 연락처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머뭇거렸다. 등본만으로는 안되나요? 규정상 전화로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인의 신원만 확인하고 바로 끊는 것이니 염려하실 필요 없을 겁니다. 부엌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곧 은행 대출업무가 끝날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불렀다.
오후 다섯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상담원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봤지만 밀린 상담이 많아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해달라는 녹음된 안내멘트만 흘러나왔다. 잠시 뒤 다시 전화를 했을 때 상담시간이 종료되었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휴대폰을 닫았다. 부엌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등록금 입금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짜로 입금을 해주셔야 합니다. 학생 때문에 직원들이 퇴근을 못하고 있습니다. 듣고 계십니까? 나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닫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입학처 직원의 음성이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부엌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집어 일어났다. 씽크대 서랍을 열었다. 아까 등본과 통장 사본을 찾느라 서랍 안은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서랍을 통째로 꺼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정리를 시작했다. 정리한 서류와 통장들을 모아 간추릴 때, 빼낸 칸의 아래쪽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손가방 하나가 박혀 있었다. 여러 서류를 덮어놓은 게 어쩐지 숨기려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손가방을 집어들었다.
‘우체국 대학생 장학적금’표지를 넘겨보았다. 강정수. 성명란에는 동생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개설일자는 내 고등학교 졸업연도와 같았다. 매달 오늘 날짜로 삼십만원씩 입금되어 있었다. 입금자는 어머니였다. 오늘, 통장정리를 하고 급하게 넣어둔 모양이었다. 천천히 통장을 덮었다. 통장을 손가방에 집어넣고는 굳게 닫힌 동생의 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램프가 깜박이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발신자는 작은아버지였다.
버스기사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나는 내가 어디에 와서 앉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사가 종점이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버스 안임을 깨달았다.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무슨 힘에 이끌려 작은아버지 댁에 갈 생각을 했던 건지, 기억은 어렴풋했다. 뿌리 깊이 박힌 종손이라는 의무감이 날 여기까지 이끈 것일까. 꼭 와야 한다는 작은아버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홀린 건 아니었을까. 앞쪽에서 밀대를 빨아온 기사는 첫차는 다섯시간 후에 있다며 어서 내리라고 재촉했다. 나는 겨우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제자리에 한동안 서 있다가 작은아버지 집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수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도무지 못 올 것 같더라고요. 작은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은 가봤어? 네. 거,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작은아버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저께 작은아버지는 유학 간 아들의 생활비가 떨어져간다며 어서 이자라도 부쳐달라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자는 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지금까지 빠져나간 이자는 내 등록금과 맞먹는다. 작은아버지가 말했다. 어서 준비하자. 나는 작은아버지와 거실 한가운데서 병풍을 폈다. 그때 현관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아버지가 신발을 벗고 있었다.
제사는 자정이 넘어서 시작되었다. 남자들은 거실에 차려진 제사상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상에 놓인 할머니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머니와 할머니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눈매 하며 표정들이. 언뜻 보면 어머니가 사진 속에 들어가 있는 착각까지 일기도 한다. 어느새 향이 타올랐고 모두들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영정 속의 할머니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따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등골 전체로 번지는 전율은 할아버지가 앞으로 나가 영정 앞에 절을 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향 위로 술을 돌리고 들어온 다음 아버지가 나가 절했고 다같이 절을 했다. 아버지가 들어오자 나는 제사상을 향해 무심코 발을 내디뎠다. 그때 작은아버지도 함께 발을 내디뎠다. 내 차례가 아닌가. 작은아버지 차롄가. 순간 헷갈렸다. 작은아버지와 나는 서로 눈치를 봤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순간 멈칫거렸다.
작은아버지는 할머니의 친아들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도박판에서 만난 내연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작은아버지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차. 나는 그제야 몇년 전부터 나이순으로 작은아버지가 먼저 술을 올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영정 앞에 작은아버지가 섰다. 작은아버지는 무슨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작은아버지가 꿇어앉아 잔을 들자 아버지가 다가가 술을 따랐다. 향 위로 잔을 돌리는 작은아버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사가 끝나고 거실에 상이 차려졌다. 남자들은 상에 둘러앉았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수저를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수저를 들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지난번에는 설날이라 말 안했었는데 아무래도 이거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네, 뭘요? ……대체 왜 평소에 찾아오질 않냐. 아버지는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할아버지의 잔소리는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생일에도 오지 않았고 기념일에도 오지 않았던 상황을 들먹이며 아버지를 타박했다. 아버지는 실실 겸연쩍은 웃음만 흘렸다. 한참 후 할아버지가 말을 마치자 아버지는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사정도 여의치 않고 게다가 빈손으로 어떻게 찾습니까. 염치도 없이. 내가 니들한테 돈이라도 바라는 줄 아느냐.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전에 얼굴이라도 자주 비쳐야 되는 거 아니냐. 어찌 그리도 모르냐. 그래도 자식 마음이 그게 아니죠. 그러면서 아버지는 나를 향해 턱짓했다. 쟤는 예전에 수업료하고 급식비 못 내줬다고 이젠 아비 취급도 안하는데. 도대체 대화가 오간 지가 언젠지. 이놈의 돈이 뭔지. 피보다 진한 게 돈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할아버지는 옆에 앉아 있던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게 참말이냐? 돈 안 줬다고 그러는 게 세상에 어딨냐? 돈은 순간이야. 아무리 못해줬다 해도 네 아버지 아니냐. 허 참. 명색이 종손이라는 놈이. 자고로 종손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점지해준다더라. 그런 네가 그러면 안되지. 안 그러냐. 할아버지는 나를 살짝 밀쳤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숟가락으로 국을 떴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어 우물우물 씹다가 상 위에 내뱉고는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가, 나물이 왜 이리 짜냐. 간을 어떻게 했길래. 도저히 못 씹겠다. 그 소리에 숙모가 앞치마를 두른 채로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할아버지는 보란 듯이 수저를 탁 내려놓고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들어갔고 아버지는 그 모습을 힐끔 본 뒤 숟가락으로 탕국을 떠먹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부엌에 주저앉고 말았다. 씽크대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바닥만 바라봤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한뼘 정도 열린 내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틈으로 보이는 방 안은 어두웠다. 어둠은 문틈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어둠은 머릿속을 암전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에 모로 웅크리고 누웠다.
화들짝 열리는 문소리에 눈이 떠졌다. 비몽사몽간에 상체를 일으켰다. 어머니가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그건 영정 속의 할머니 같기도 하고 부엌에서 홀로 일하고 있던 숙모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숙모의 이목구비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취향이 비슷해서 그런 것일까. 그게 핏줄일까. 과연 내 몸에도 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을까. 그리고 어머니의 피도 흐르고 있을까.
그날 정수 아픈 거 알고 있었지? 흐릿하게 보이는 어머니를 똑바로 보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몇번 흔들었다. 아니요. 그날 전화는 왜 안 받았어? 일하는 데 두고 왔어요. 정수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정수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환각상태였다고요. 헛것을 봤겠죠. 의사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어머니는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병원 갈 거다. 이따가 구급차 올 테니까 준비해라. 아직 며칠 더 남았잖아요. 걱정돼서 안되겠다. 어머니는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 나는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아까 내가 정리한 씽크대 서랍을 살피고 있었다. 누가 건드렸냐? 아니요. 어머니는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서랍을 뒤졌다. 어머니는 의료보험증을 꺼내 서랍을 닫고는 나를 지나쳤다. 나는 어머니의 곰 같은 잔등을 보며 화장실로 걸었다. 어머니는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집어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제 어디서 전화 왔더라. 내가 네 어머니냐고 묻더라. 나는 화장실 손잡이를 돌리다 말고 멈춰섰다. 학자금대출 건으로 전화했다기에 우리 집에 대학 갈 사람 없다고 했다. 어머니의 음성이 커졌다. 넌 이제 이 집의 가장 아니냐. 대학이야 나중에 얼마든지 갈 수 있고. 뭐가 순서인지 모르겠어? 급한 불부터 해결해야지. 게다가 나한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아무튼 그렇게 된 걸로 알고 있어라. 그리고 집에 신경 좀 써라. 나는 외투에 팔을 끼며 말하는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아까 손가방에서 나왔던 동생의 통장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급하게 외치던 입학처 직원의 목소리와 부모님 신용문제 때문에 심사에서 탈락됐다는 상담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 집의 가장 아니냐,라는 어머니의 말이 매미 우는 소리처럼 맹렬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성큼 부엌으로 가 힘껏 씽크대 서랍을 열었다. 손가방을 꺼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손가방은 어머니 앞까지 미끄러졌다. 손가방이 열리면서 도장과 서류, 통장이 어지러이 쏟아졌다. 나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의 시선이 동생의 통장으로 갔다가 나에게로 왔다. 어머니는 널브러진 서류와 통장을 서둘러 손가방에 주워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이게. 어떻게 네 아버지하고 하는 행동이 똑같냐. 툭 하면 집어던지는 게. 나는 너를 잘 알아. 그래서 더욱 겁이 나. 네가 아버지를 닮게 될까 봐. ……네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데 결국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갔잖아. 언제 인간 될래.
나를 잘 안다는 말.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내 거죽만을. 내 찢어진 눈과 매부리코, 엷은 입술, 넓적한 얼굴형을. 아버지의 얼굴을.
닮을까 봐,가 아니라 닮았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나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놀랐다. 몸속 깊은 곳 어디에 그런 말을 숨겨놓았던 건지.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얼마나 화가 치밀던지.
어머니는 뭔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머뭇거렸다. 잠깐 방에 들어가 있어라. 신경 사납다. 내가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자 어머니는 내 시선을 이기려는 듯 어서 들어가라고 삿대질을 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한걸음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다가 문턱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다가오는 어머니를 피해 컴컴한 방 안으로 엉덩이를 밀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닮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 말이 사라질 때까지 질끈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위로 닮은 내 얼굴이 겹쳐졌다. 얼굴들을 지우려 고개를 젓고 또 저었다. 얼굴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다가오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거대한 살덩어리였다. 덜렁대는 젖통과 출렁이는 뱃살, 철렁거리는 허벅지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한 젖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말할 때마다 입 밖으로 터져나오는 구린내에 숨이 콱 막혔다. 어느 순간 방 안이 눈부시게 환해지고 있었다. 부신 빛 사이로 옅은 미소를 띤 살덩어리의 얼굴이 나타났다. 살 껍데기 위로 자글자글 흘러내리는 기름기. 살덩어리는 더욱 빛났다. 그동안 신경을 못 써줬구나. 괜찮으니 가까이 오렴. 살덩어리는 입을 떼지 않고 있었으나 육성은 방 안 전체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악취는 더욱 강도 높게 콧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리고 언제 닿게 될지 모를 가로막힌 벽을 향해 엉덩이를 꾸역꾸역 밀어갔다. 구급대가 오기를. 어서 빨간 불을 번뜩이며 집 앞에 도착하기를. 구급대원들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오기를. 나는 빌고 또 빌었다.
심사평
응모된 3백여편의 소설들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만큼 여타 문학공모전 출품작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젊고 예민한 감성, 환상에의 뚜렷한 경도, 순수함과 치기, 앞날에 대한 무력감과 초조함이 두드러져, 이즈음 대학생들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일차로 추려낸 작품들은 「장롱에 갇힌 남자」 「그 여자의 화장법」 「뜬구름」 「성냥팔이 소년」 「캐러멜 원피스」 「밤의 잔상」 「당신의 얼굴」 등 7편이었다. 「장롱에 갇힌 남자」는 상상력과 세부묘사가 좋은 작품이지만,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킬 때마다 서툴고 작위적인 기법을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 여자의 화장법」은 화장품점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사회의 비열함과 냉혹함을 나름의 생생한 화법으로 그려냈으나, 모호하고 냉소적인 결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뜬구름」은 풋풋하고 아기자기한 감성으로 따스한 세계를 보여주었지만, 밀도와 긴장감을 갖추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4편의 작품들은 일정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 「성냥팔이 소년」은 성냥갑 같은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직장 초년생의 내면을 기지있게 형상화했다. 민감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문체가 인상적인데, 중간 중간 퇴고를 충분히 거치지 못한 문장들이 눈에 띈다는 점과‘섬 아가씨’의 설정이 다소 익숙한 소재라는 점이 우려되었다. 「캐러멜 원피스」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학원강사의 지독한 일상을 그려내 호감을 주었는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화자의 내면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고, 소품의 느낌이 들 정도로 급하게 결말을 지은 점은 아쉬웠다. 「밤의 잔상」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강렬한 소재, 성실한 디테일, 대담한 입담이 어우러진 수작이었다. 취재와 상상을 균형있게 소설의 밑그림으로 삼은 점, 안정적인 필력을 갖춘 점이 신뢰를 주었다. 「당신의 얼굴」은 거론된 소설들 중 가장 진지한 작품으로, 이 시대 젊은이의 가난과 좌절, 혈연과 의무에 대해 무겁고 간곡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낮고 정직한 시선, 결말에 이르러서야 어렵게 폭발하는 절제된 고통이 여운을 남겼다.
두 작품 「당신의 얼굴」과 「밤의 잔상」을 놓고 숙고한 끝에, 「밤의 잔상」의 대담한 필력보다 「당신의 얼굴」의 진지함에 손을 들어주기로 심사위원 전원이 합의했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아쉽게 탈락한 응모자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최인석 공지영 한강
수상소감
소설을 우편으로 보내고 며칠 후 집에 도둑이 들었다. 이틀 뒤 급성간염으로 2주간 입원했다. 얼마 후 수상소식을 들었다. 액땜이었나 보다.
먼저 수많은 소설의 아수라를 돌파한 내 글에 감사한다. 늘 배고파 서성이던 나를 따듯하게 보살펴주신 대구덕원고 서무실 분들 그리고 일학년 담임이셨던 임동규 선생님, 대학 등록금을 구해주신 대구산업정보대 주차소장님께도 감사드리며, 친구 권영훈, 누나 남윤정에게 감사한다. 늘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던 종수와 힘들 때마다 웃음을 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박지선, 창작극 동아리 만남의 시도 회원들, 수상소식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신 모은영 조교님과 학업에 신경 쓰라며 늘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박이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년 동안 내 소설을 합평해준 문창과 학우들에게 감사한다.
소설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박기동 교수님, 김미월 교수님, 윤성희 선배님, 김기우 교수님, 매섭지만 따듯했던 김혜순 교수님, 네 아픈 기억과 세월이 언젠가 네 재산이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해주신 정승호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어릴 때는 그 누구보다도 책 읽는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 책보다 만화책을, 단순한 액션, 멜로, 코미디 영화를 좋아했다. 중고등학교 문학시간이면 잠만 잤고, 아직까지 동사가 뭔지, 형용사가 뭔지, 명사가 뭔지도 잘 모른다. 지금까지도 여러 문학상 작품집을 보면서 과연 이 작가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영문을 모를 때가 많다. 이런 내가 상을 탔다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배우가 하고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몸뚱이 하나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와서 거의 8년 가까이 많은 일을 겪었고 예기치 못한 상황들과 부딪쳤다. 잘 데가 없어 노숙하는 날도 많았고 굶기도 많이 굶고 배가 고파서 일하는 곳에서 뭘 훔쳐 먹다가 걸려 잘리기도 했다.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도 많이 했다. 이제 앞가림 잘하는 인간이 되어야겠다.
얼마전 용산 철거민 다섯명과 경찰특공대 한명이 농성 대치중 화염 속에서 숨졌다. 정부는 용역업체와 담합하여 오래전부터 그들의 생존권을 도시재개발의 이름하에 압박해왔다. 궁지에 몰린 철거민들은 한 건물에 들어가 생존권을 부르짖으며 격렬히 저항했다. 저항은 불이 되어 번졌고 여섯 생명이 불 속에서 꺼졌다. 무명배우 두명이 자살했고 외국에서 한 남자가 인터넷으로 자신이 자살하는 장면을 생중계했다. 생중계를 지켜보던 몇몇이 그 자살을 부추겼고 아무도 그의 죽음을 말리지 않았다. 얼마 안되는 돈 때문에 생명을 앗아가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이런 소식들을 대면하는 나 자신도 점점 무덤덤해진다. 무서운 일이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그 어둠을 글로써밖에 증언 못하는 무력한 인간이 되겠다. 절망, 고립 그리고 이 저주받은 운명을 긍정하겠다. 등 뒤로 꺾어지는 벼랑 끝에 서서 심연에서 갈아온 칼날로 늘 나를 겨누고 있겠다. 저기 두 눈을 번뜩이고 대열을 지어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경건히 맞이하겠다.
남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