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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나리오
김주성 金柱成
1986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friofriofrio@naver.com
상흔록(傷痕錄)
기획의도
당신이 한 일…… 정말 사랑 맞습니까?
우리는 타인의 사랑을 함부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규격화된 사랑의 양태와 다를 경우, 우리는 쉬이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이라는 감정을 정의내릴 수 있을까?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씨놉시스
1410년, 조선. 영의정 김성로는 명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입궐한다. 어린 시절부터 세자를 직접 가르쳐온 김성로는 애틋한 마음으로 세자를 맞이하고, 세자 또한 명나라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에게 서신을 보내준 김성로와의 해후가 감격스럽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 황제가 자신의 황녀와 세자를 혼인시키고 싶어하며 세자를 다시 명나라로 불러들이려 한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이 소식을 들은 김성로는 세자를 염려해 동궁전을 찾았다가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다. 세자가 임금의 후궁인 효빈과 밀회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를 들킨 세자는 김성로에게 비밀을 지켜달라며 목숨을 구걸하고, 김성로는 세자에게서 다시는 효빈을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자신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는 다짐을 받아내며 세자의 죄를 눈감아준다. 다음날, 세자의 혼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임금에게 김성로는 자신의 딸 연화를 세자빈으로 천거하여 세자와 혼인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주청한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황녀와의 혼인을 제의받기 전에 세자는 이미 혼처가 정해져 있었다고 거짓을 보고하여 세자를 지키자는 것이다. 세자는 김성로에게서 연화는 이미 평생을 약속한 다른 사내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의 제안을 따를 수밖에 없다.
연화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궐하고 혼인준비가 시작된 가운데, 김성로는 세자가 아직도 효빈을 몰래 만나고 있음을 감지하고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세자는 계속되는 김성로의 집착에 점점 두려움을 느끼며, 숨겨왔던 그의 욕망과 마주하게 되는데……
*지면사정으로 작품의 일부만 싣습니다.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요 등장인물
김성로(50세) 영의정.
세자(18세) 조선의 왕세자.
연화(16세) 김성로의 딸.
분례(45세) 김성로 집의 종.
부인(45세) 김성로의 부인.
이현(22세) 명나라 대신의 수행 관리.
효빈(20세) 임금의 후궁.
황엄(40세) 조선에 상주하는 명나라 대신.
임금(38세) 조선의 왕.
암전된 화면 위로 자막 오른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허구임을 밝혀둡니다.”
(전략)
2. 우물가 (밤)
“헉헉-”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도망치는 소년,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발이 꼬이면서 그대로 엎어질 듯하다.
소년 (겁에 질려서 돌아보며) 엉엉.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그러다 그만 자기 발에 걸려 엎어지는 소년, 악착같이 기어서 우물에 기대어 서더니, 손에 쥐고 있던 인두를 휘두른다. 풀어 헤쳐진 저고리 사이로 보이는 소년의 마른 몸.
소년 오지 마…… (악에 받쳐서) 오지 마!
헐렁한 바지춤이 다시 흘러내리면서 발목 아래로 걸쳐진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뒷걸음질치는 소년.
소년 (인두를 다시 휘두르며) 오지 말란 말이……
순간 바지를 밟고 중심을 잃는 소년, “어어어-” 우물 안으로 빠져버린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컴컴한 우물 속이 한참 동안 보이고, 출렁이는 검은 물 위로 남자의 그림자가 비친다.
(김성로) 허억……
3. 김성로 집 / 사랑채 (아침)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에서 깨어나는 김성로, 땀이 흥건하다.
(부인) 그리도 좋으십니까?
<Cut to>
매끈한 놋대야에 담긴 물이 출렁이면서 손이 담긴다. 물기 가득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듯이 얼굴을 닦는 김성로. 그의 옆에 앉아 빳빳하게 풀 먹인 수건을 건네는 부인.
부인 밤새 뒤척이시어 그런지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눈 좀 붙이시지요. (김성로, 놋대야를 밀어낸다.) 입궐하시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 아니옵니까?
수염 끝에서부터 정성스레 물기를 닦아내는 김성로의 절도있는 손짓. 부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뭔가에 홀린 눈빛이다. 그런 김성로를 서운하게 쳐다보는 부인.
4. 저잣거리 (아침)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는 김성로, 관복을 입고 평교자 위에 앉아 있다. 땀이 나는 이마를 슬쩍 닦으며 관모를 고쳐 쓰는 김성로.
김성로 뭣들 하는가, 어서 서두르게.
동시에 “예” 하고 대답하더니 발걸음을 재촉하는 가마꾼들. 사람들, 길옆으로 비켜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5. 궁궐 일각 / 동궁전 앞길 (아침)
급히 동궁전으로 향하는 김성로, 순간 멈칫하며 멈춰선다. 동궁전에서 나오는 중전과 그 뒤로 서너명의 후궁들, 궁녀들이 보인다.
김성로 (허리 숙여 인사하고) 마마, 평안하십니까?
중전 (인자하게 웃으며) 동궁전으로 가시는 겝니까?
김성로 예.
중전 역시 영의정 대감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신례들이 대감의 반만큼이라도 세자를 위한다면 내 바랄 게 없겠어요.
김성로 망극하옵니다, 마마.
중전 세자가 이 어미를 보고도 대감의 안부부터 묻는데…… 어찌나 섭섭하던지요.
김성로 (담담하게) ……그러셨습니까?
중전 두 해가 지났을 뿐인데 몰라보게 장성하셨습니다. 타지에서 마음고생이 많았을 터인데도 쾌활하고 늠름해지셨어요. 이게 다 대감의 가르침 덕분 아니겠습니까.
김성로 (고개 숙이며) 황공하옵니다.
중전 얼른 가보세요. 기다리십니다.
가볍게 목례하며 다시 길을 가는 중전과 그 뒤를 따르는 일행들. 김성로, 후궁들 가운데 유난히 앳된 태가 나는 효빈과 눈이 마주친다. 효빈, 자신을 힐끗 바라보는 김성로에게 목례하며 지나간다.
6. 동궁전 (아침)
정성스레 큰절을 올리는 김성로. 상석에 앉아 그런 김성로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하는 세자, 이제 막 사내의 태가 나기 시작한 청년의 얼굴이다.
(중략)
119. 의금부 / 감옥 안 (낮)
머리가 풀어 헤쳐진 채로 칼을 쓰고 앉아 있는 김성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이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이내 옥문이 열리고, 김성로 앞에 묵직하게 접힌 종이가 툭 하고 떨어진다.
김성로 ?
김성로, 뭔가 싶어 고개 돌리니 옥 앞에 임금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다.
김성로 전하……
임금 ………
김성로 전하…… 소인의 딸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임금,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젓더니 돌아선다.
임금 고생…… 많았소.
김성로, 시야에서 사라지는 임금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종이를 주워 펴보는데, 글을 읽어나가는 그의 표정이 점점 경직된다. 빽빽하게 써내려간 부인의 유서다.
김성로 ……!
얼이 빠진 김성로, 유서를 쥔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하더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 그때 의금부 관군 둘이 들어와 김성로를 일으켜 세우더니 밖으로 끌고 나간다. 쥐고 있던 유서를 놓치는 김성로, 끌려가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유서를 바라본다.
120. 중궁전 안 (아침)
정성스레 큰절을 올리는 세자. 상석에 임금과 중전이 나란히 앉아 있다. 탐탁지 않은지 고개를 돌리는 임금, 수염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세자 소자, 이제 떠나옵니다. 다시 뵐 때까지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임금 으흠……
세자, 임금의 답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어 임금을 보지만, 끝내 냉정하게 세자를 바라보지 않는 임금.
중전 안 좋은 기억은 다 잊고…… 여기서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더 큰 사람이 되어 돌아오세요. 그리하면 됩니다.
세자 예, 명심하겠습니다.
중전, 애써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숙인다.
세자 울지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중전 에미가…… 미안해서 그래요.
세자 (안타깝게) 어마마마께서 왜 미안해하신단 말입니까?
중전 모르겠습니다. 그냥 세자에게는 모든 게 다…… 미안합니다.
121. 저잣거리1 (낮)
말을 탄 세자와 명나라 대신 황엄이 길을 지나간다. 그들의 뒤로 역시 말을 탄 명나라 호위병 열댓명이 뒤따른다. 길가로 물러나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들.
황엄 (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이 좋습니다.
세자 ………
황엄 밤새 편히 주무셨습니까?
경직된 얼굴의 세자, 딴 생각에 잠겨 있다.
황엄 아시지요? 먼 길을 가셔야 합니다.
세자 ………
망설이듯 뒤를 돌아보는 세자,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갑자기 말을 돌린다. “이리야!” 따라오던 호위병들 대열이 무너지면서 비켜서고, 속력을 더해 달리는 세자.
122. 저잣거리2 (낮)
나무로 된 함거(호송수레)에 갇혀 끌려가는 김성로, 꼿꼿하게 앉아 있다. (4씬에서) 김성로가 관복을 차려 입고 평교자에 오른 채 지나가던 그 길이다. 속닥거리며 김성로를 벌레 보듯 구경하는 사람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남자 하나가 다가와 침을 뱉더니 돌을 던진다.
남자 퉤! 에잇, 더러운 새끼!
“퍼억-” 김성로, 머리에 돌을 정통으로 맞는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는 김성로. 사람들, 그때부터 사정없이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김성로, 움직이지 않고 계속 날아오는 돌을 맞는다.
김성로 욱……!
그때 사람들 뒤로 세자의 말이 서고, 세자는 말에서 뛰어내린다. “뒈져버려!”“에이, 퉤!” 시끄럽게 소리치는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는 세자. 뒤따라온 황엄, 세자를 잡으려는 호위병들에게 그냥 두라고 손짓한다.
피투성이가 된 김성로, 점점 감기는 눈을 들어 옆을 보고,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처참한 김성로의 모습을 보며 울고 있는 세자.
(김성로) 저하……
123. 추억 몽따주
궐내 숲/과거 (낮)
김성로에게 업혀서 조근조근 노래를 부르는 어린 세자. 함박웃음 지으며 노래를 경청하는 김성로.
(김성로) 저하, 이것이…… 소인의 끝인가 봅니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울어주실는지요.
동궁전 안/과거 (낮)
머리를 긁적이며 더듬더듬 무언가를 외우는 세자. 앞에서 회초리를 들고서도 흐뭇하게 웃고 있는 김성로.
(김성로) 저하께선 아무런 잘못도 없으십니다.
동궁전 안/과거 (낮)-1씬
김성로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는 세자.
(김성로) 그저 소인이…… 저하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저하를 마음속에 품었을 뿐입니다.
김성로 방 안/과거 (낮)
세자에게 온 서신을 정성스레 인두로 다리는 김성로.
(김성로) 허나……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숲 (낮)-66씬
쏟아지는 빗속에서 처량하게 세자를 기다리는 김성로.
(김성로) 저하를 위해…… 소인의 모든 것을 버렸사온데…… 저하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강화도 길 (낮)-111씬
피가 멈추지 않는 고통에도 절룩거리며 걷는 김성로, 핏기를 잃고 갈라진 입술을 힘겹게 깨물며 멈추지 않는다.
(김성로) 왜…… 소인은 아니된단 말씀이십니까?
(세자) 아니야……
강화도 초가 부엌 (밤)-92씬
기둥에 묶여서 발버둥치는 세자.
세자 (애원하듯) 이건…… 아니야.
김성로 ………
124. 저잣거리2 (낮) / 122씬의 계속
그칠 줄 모르고 계속 김성로에게 돌이 날아온다. 화면의 모든 소리가 걷히고, 김성로의 마지막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린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김성로, 남은 힘을 다해 자기 가슴을 툭툭 내리친다.
(김성로) 이것이……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김성로에게 침을 뱉으며 계속 돌을 던진다. 사람들 뒤에 서서 이를 악물며 지켜보는 분례. 세자, 눈물을 훔치더니 바닥에서 돌을 주워든다. 돌을 부서져라 꽉 쥐는 세자. “아아아악!” 악을 쓰는 세자의 모습과 함께 걷혔던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세자, 울분에 차서 다른 사람들처럼 김성로에게 돌을 던지려는데…… 차마 김성로에게 던지지 못한 돌이 옆쪽 바닥에 그대로 꽂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는 세자. 처참하게 숨을 거둔 김성로, 이젠 미동도 없다. 그 위로 돌은 계속 쏟아진다.
125. 냇가 구석 (낮)
관군 두 사람이 멍석에 싸인 시체 하나를 들고 온다. 시체더미에 들고 온 멍석을 내던진다. 파리떼가 시체더미 사이로 시끄럽게 날아다닌다. 손을 탁탁 털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관군들. 멍석 밖으로 보이는 축 늘어진 김성로의 팔, 인두에 덴 흉터가 낙인처럼 선명하다.
126. 에필로그 / 강화도 바닷가 (새벽) / 94씬의 계속
흉터가 그대로 이어지면서, 손으로 흉터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 김성로. 수평선 너머로 해가 뜨는 모습을 쓸쓸히 지켜보며 흉터를 만지작거린다. 마치 그러면 흉터가 지워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김성로의 초라한 뒷모습과 함께, 그 옆으로 묶어놓은 나룻배가 보인다. 엔딩 크레디트 오른다.
심사평
인간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갈래지만 아무래도 인간은 유희적 동물임이 틀림없다. 응모된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내내 그 생각이었다. 사람의 관계설정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사람살이의 상황을 이렇게도 만들어낼 수 있구나 싶은.
아직은 습작품이 많아서 상황 보기와 인간묘사가 덜 숙성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다양한 세계와 서사에 대한 욕망을 보노라면 나 스스로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특히 올해는 역사와 공리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높았다. 청년들의 세계관에 무엇보다 안도감이 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는 또한 한국의 서사업계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다.
각설하고, 첫번째 산을 무사히 넘어온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모던의 거리」 「컨닝으로 대학가기」 「Two heart」 「순결한 아들」 「북방한계선」 「소녀가 소년에게」 「자정 12시」 「보헤미안 랩소디」 「귀신결혼식」 「달빛 아래 무엇으로…」 「안개꽃비」 「상흔록」 「도깨비불」 「오픈 캔버스」 「쇼」 등 모두 15편이었다.
읽는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미심쩍은 작품은 끝까지 읽고, 신뢰가 가는 작품은 줄거리와 본문의 반 정도만 읽고 일단 밀쳐두었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모두 반쯤만 읽고 밀쳐두었다가 다시 읽은 것들이다.
그야말로 서사의 성찬이었다. 꼼꼼하게 재독한 결과 다음 산을 넘어와준 작품들은 모두 일곱이었다. 「컨닝으로 대학가기」 「모던의 거리」 「북방한계선」 「자정 12시」 「귀신결혼식」 「상흔록」 「쇼」. 그리고 또다시 이런저런 시비를 걸면서 마지막까지 세 작품이 남았는데 「북방한계선」 「귀신결혼식」 「상흔록」이었다.
「북방한계선」은 분단의 비극을 이제껏 한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상황으로 풀어낸 수작이었다. 노련한 구성과 자연스러운 대사, 게다가 고증까지 철저했다. 별 이변이 없는 한 수상작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귀신결혼식」을 읽었다.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심사의 피로가 일시에 없어졌다. 자분자분 이야기를 잘도 끌고 가는 원고였다. 다음이 어찌될까 궁금했고…… 마침내 빨리 읽는 게 아까워 천천히 읽는 나 자신을 느끼는 순간, 내가 지금 심사중인 거 맞아? 그럼 된 거 아닌가? 무슨 구구한 말이 필요하랴 싶었다.
그러나 「상흔록」의 무게감 앞에선 「귀신결혼식」의 유쾌함은 무력(?)했다. 원고를 덮는 순간, 여러 문장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웅얼거린 한마디, “세상에~!”였다. 이렇게 괴상망측하게 관계를 설정한 사극은 또 뭐란 말인가. 어쩌자고 제멋대로의 상상력을 겁도 없이 마구 흩뿌려놓았단 말인가. 어찌 이리도 참혹한 사랑이 있단 말인가. 망설임 없이 수상작으로 올릴 수 있었다.
한국 영화업계에서 쉽게 나올 작품이 아니었다. 이 작품을 미리 볼 수 있게 된 것이 이번 심사에 참여한 가장 큰 기쁨이었다.
김전한
수상소감
“교실에 들어가면 자리 서른다섯개가 있어. 그 안엔 니 자리도 있고, 내 자리도 있지. 근데 넌 지금 니 자리가 아니라, 옆에 있는 딴 놈 자리에 가 앉아서는 여기는 내 자리다, 배 째라, 하고 있는 거야. 주인 애타게 기다리는 니 자리는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서.”
지난가을, 동이 틀 무렵, 씀벅씀벅한 눈을 비비며 이런 대사를 썼더랬다. 나는 누군가의 입을 빌려 스스로를 야금야금 타이르고 있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절대 행복한 게 아니라고. 하고 싶은 일을‘잘하는’게 중요한 거라고. 그러니 이제 악다구니는 그만 쓰고 비켜서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어쩌면 내 자리는 거기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우습고 간사해서 수상소식을 전해듣고는, 시치미 뚝 떼고 좀더 뻔뻔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기로 했다. 어째 평생 남의 자리일 것만 같은, 하지만 내 자리일지도 모를, 아니 내 자리였으면 좋겠을‘이야기꾼’이라는 자리에 말이다. 과연 여기가 내 자리일까, 하는 의심은 잠시나마 거두고, 이제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보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잘할’수 있도록 안간힘을 써보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모난 글을 어여쁘게 봐주신 심사위원 김전한 선생님과 대산문화재단에 감사드린다. 대산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다. 너무나도 가볍고 얕아서 당장이라도 날아가버릴 것 같은 나를 늘 붙잡아주고 격려해주는 연세대 문학특기자 모임 선후배들에게도 감사한다. 당신들 덕분에 토익책을 펼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항상 낮밤이 뒤바뀌어 사는 못난 아들을 품어주시는 어머니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
김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