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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장은정 張銀庭
1984년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riyunion@naver.com
기하학적 아우라의 착란
김행숙·이근화·하재연의 시들
1. 시적 흐름의 판단중지
우리는 최근에‘흩날리는 시’들의 목록을 갖게 되었다.1 이 시들에 대해 자아의 해체와 다양성, 환상의 분출, 분열증적 시 구조 등의 관점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들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서정시’와‘젊은 시인들의 시’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대립구도의 논의가 도출하는 결과는 언제나 동일하다. 이 흩날리는 시들은 기존의 서정시가 지닌 여러 요소들을 전복하고 해체한다는 것이다.
권혁웅(權赫雄)은 김행숙(金杏淑)의 시가 “정확히 감각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2고 했다. 이장욱(李章旭)은 이근화(李謹華)를 두고 “무언가를 말한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다르게 느낀다”3고 썼다. 생각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논리를 통해 무언가를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이데아의 전제’와‘코기토의 전제’를 전복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데아와 코기토로 일컬어지는‘본질’에 대한 거부는 이들의 시 구조 자체를 새롭게 배치시켰다. 신형철(申亨澈)은 이 낯선 구조들에 집중한다. “시적 소실점은 근원적으로 진리가 발생하는 장소다. 그래서 시적 소실점이 흔들리거나 사라질 때 가장 중요한 현상은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고 전달하겠다는 의지의 소멸이다.” 그는 서정적 원근법을 벗어던진 “이들의 시에서 시적 소실점은 없거나 최소한으로 약화되어 있다”4고 말한다. 시적 소실점이 사라지는 자리에서는 신념과 의지의 뜨거움이 사라지고 나른함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흩날리는 시’들의 해체와 전복을 단지 기존 서정시들에 국한된 반발로만 본다면 그것은 너무 협소한 규정이다. 서정시와 젊은 시인들의 시의 대립구도는 전통 예술작품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대립구도로 전환되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은 관람자에게 근원적인 형태의 소망을 충족시켜주는 그 무엇을 투영하고 있어야 했다. 그 무엇을 투영한 작품들은 교감을 가능하게 하므로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몰입을 제공하곤 했다. 이런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들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아우라는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은 어떤 지각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다. 작품을 둘러싼 아우라의 이 신성한 빛을 단 한번이라도 마주하게 되면 그 빛 속에서 관객들은 무한한 연상작용을 통해 작품과의 교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정시는 대상을 끊임없이 낯설게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 낯설음은 잊혀져온 은폐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아무리 사물을 낯설게 보더라도 그 사물과의‘교감’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서정시는 여전히 전통 예술작품에 속한다. 주체가 대상을 응시하고, 대상이 일상성을 벗어던지고 내밀한 본질이 드러난 상태로 주체를 바라볼 때, 대상과 주체 사이가 이어지면서 세계의‘전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우리가 서정시에서 느꼈던 기쁨은 일종의‘합일’체험이었다.
벤야민(W.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복제기술의 두가지 표현양상인 예술작품의 복제와 영화예술이 이런 전통적 형태의 예술에 각각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피고 있다. 복제기술은 사물을 언제나 현재화한다. 이러한 현재화는 사물의 역사성을 제거함으로써 대상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와 현존성까지도 제거해버린다. 복제사진이 바로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그림에서 존재하던 일회적·지속적 성격은 사진에서 일시적·반복적 성격으로 대체된다. 즉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5 흩날리는 시들은 바로 이 아우라와 현존성이 벌어지는 틈에서 시작한다.
두 명의 아이가 손바닥을 맞추며 놀고 있을 때
세번째 아이는
담장에 장미넝쿨이
장미화, 장미화, 장미화를 팡 팡 터뜨렸을 때
두 명의 아이가 줄을 잡고 돌리며 들어와, 우리 집에 들어와, 우리들은 재밌다는 듯이 부를 때
세번째 아이가 줄을 넘을 때
네번째 아이는
너희 집은 어디니? 어른이 물을 때
다섯번째 아이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요
이 구슬은 누가 흘리고 갔을까?
구슬을 굴리면 색깔이 바뀔 때
두 명의 아이가
세번째 아이를 골목이 사라질 때까지 쫓아갈 때
골목이 사라진 후에
두 명의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마주 보았을 때
-김행숙 「두 명의 아이」(『이별의 능력』) 전문
이 시는 두 아이가 손바닥을 맞추며 노는 것으로 시작해서 팔을 늘어뜨리고 마주 보는 것으로 끝난다. 그동안에 세번째 아이와 줄넘기를 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대해 어른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두 아이는 세번째 아이를 “골목이 사라질 때까지” 쫓아가는데, 놀랍게도 정말 골목이 사라져버린다. 우연히 공간을 잃어버린 두 아이는 손바닥을 맞추며 놀던‘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둘은 “이상하다는 듯이” 서로를 우두커니 보게 되는 것이다. 손바닥을 맞추며 놀던‘연결’이 끊어진 채로 두 아이는 각자 따로 서 있다. 이 “이상하다는 듯이” 마주 보는 순간은‘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 정지하는 순간이다.
단절과 끊어짐의 순간에서 시작하는 흩날리는 시들은 전통, 종합적 기억, 현존성, 무한한 연상작용과의 단절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이 단절은 서정시에 대한‘얕은’반발이 아니라 전통 예술작품들에 대한‘깊숙한’반발에 시작점을 두는 것이다. 논의의 영역은 훨씬 더 넓어져야 한다. 모든 반발과 전복은 시작점일 뿐 도착점이 아니다. 허나 우리는 그동안 이 시들의 협소한 시작에 대해서만 말해왔다. 이 시들이 도착한 곳에서는 기술복제시대의 현대성을 지닌 새로운 아우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 흩날리는 시들은 서정시와의 이항대립 구조를 벗어던지고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2. 동시다발적인 공간들
시가 단절과 끊어짐의 순간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시 속의 안정된 정황과 일관된 목소리도 함께 소멸한다는 뜻이다. 각 구절들을 이어주고 하나의 맥락으로 모아주던 사유와 의미의 연결고리들이 끊어짐으로써 한편의 유기적인 완결성과 통일성은 구절의 완전성으로 대체된다. 한편의 시를 관통하는 직선적 시간을 잃어버린 이 흩날리는 시들의 각 구절에는 서로 다른 공간이 고여든다. 물론 이 공간은‘보이는’대로 구성되는 사실적 정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간들은 단절을 토대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동일성을 가지지 못한다. 의식적인 연관성 없이 떠오르는 공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할 때 시공간은 무한하게 분할된다. 이렇게 분할된 세계에서는‘특히’중요한 것이란 없다. 매 순간이 중요하고, 그 중요성은 지워지고, 또 매 순간 끊어지는 순간들의 나열만이 있는 것이다. 이제 1초 뒤에는 2초가 따라붙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1초가 따라붙는다. 한편의 흩날리는 시에는 이와같은 서로 다른 시공간들이 함께 북적거리고 있다. 따라서 시들은 결코 안정성을 얻지 못한다. 이 동시다발적인 공간들의 출현은 어긋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집 만두와 저 집 만두 사이
배달통과 전화벨 사이
오토바이의 시간과
신호등의 시간 사이
깜박이는 눈동자와 떠오르는 낡은 추억 사이
배기통의 푸른 연기와 날아가는 헬멧 사이
처녀와 처녀가 빼문 붉은 혀 사이
신호등과 플래카드와 피켓과 예수회의 구원 사이
사이사이 사라지는 무한정 아름다운 꼬리와 단 하나의 꼬리 사이
귀신과 귀신의 출몰과 출몰의 이야기 속의
당신의 공포와 공포의 색깔 사이
웅크림과 웅크림 속의 푸른 알약 사이
잊혀진 손맛과
사라진 만두 사이
입맛을 바꾸어 가는 사람들과
신호등이 예비하는 발걸음 사이
당신의 무고함이 울리는 오랜 경적 소리, 소리들.
-이근화 「눈뜬 이야기」 전문
이 시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선명한 시적 정황이 아니다. 오히려 시적 정황을 파악하려 할 때마다 그 노력을 끊어놓는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의 숱한‘비어 있음’들이다. 한 행, 한 연을 읽어나갈 때마다 의미가 쌓이며 색다르게 직조되던 기존의 서정시들과 다르게 이 시는 읽어나가면서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각 구절은 시가 끝나기도 전에 각자의 고유한 완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집 만두”와 “저 집 만두”의 “사이”는 닫힌 상자같이 이미 완결되어 있다. 이 상자 곁에 또다른 상자들이 놓인다. “배달통과 전화벨 사이” “오토바이의 시간과 신호등의 시간 사이” 등등. 이 완결된 “단 하나의 꼬리” 같은 구절은 “무한정 아름다운 꼬리”들로 북적거린다.
이 구절들은 시간이 정지된 채 완결된 상자‘속’에 들어 있기에 자신만의 느낌을 훼손받지 않고 지속시킨다. 각 구절들은 깊은 생각 속으로 점차 침잠하는 대신, 완성된 일초 뒤에 따라붙는 또다른 완성된 일초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들은 눈을 감고 자신과 세계를 느낀다는 점에서 활짝 열려 있지만 그들 내부를 관통하는 미세한 느낌들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깊숙하게 파묻혀 있다. 이 각기 따로 존재하는 일초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부피와 밀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공간과 공간의 틈, 상자와 상자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서정시에서는 이 비어 있는 틈을 의미들과 사유가 구석구석 채워가며 메웠다. 그 방식은 전통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가진 의미의 연상작용의 근본구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흩날리는 시들이 구절들의 사이를 채우는 방식을 살펴보면 아마 우리가 찾는 현대적 아우라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3. 기하학적 착란
점
앞서 이 흩날리는 시의 각 구절들이 전혀 다른 부피와 밀도로 가득 찬 입체적인 공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살펴보았다. 서로 다른 상자들이 이렇게 한편의 시에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할 때, 입체의 상자들은 평면의 차원으로 옮겨진다. 각자의 부피를 지닌 서로 다른 바둑돌이 바둑판의 평면 위로 옮겨지듯, 이제 닫혀 있는 상자 각각은 평면 위에서 좌표를 지닌 하나의 점(點)으로 전환한다. 기하학에서의‘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다. 점은 시간적으로도 가장 간결한 형태이며, 최고로 억제된 자세와 관련된 일종의 주장을 표시하고 있다.6 그 자신에 침잠해 있는 점은 결코 이 고유성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는다. 깐딘스끼(V. Kandinsky)는 이러한‘점’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최고로 그리고 가장 개별적으로 침묵과 언어를 잇는 연결7이라고 했다. 이 흩날리는 시들의 공간은 침묵과 언어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자리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떨림이나 울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의 보이지 않는 둘레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둥그런 무늬가 일그러지거나 또 다른 고리를 만드는 것을
만약 당신이 선택하는 자라면 옆에 있거나 떠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그 여자는 울거나 웃었거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는 것을
-하재연 「이동」 전문
독일式 화이버를 쓴 남자는 일 초 전이나 일 초 후의 내 자리를 지나고 휘파람을 씨익 불지만 저기 멀리 달아나는 오토바이의 시간
-이근화 「피의 일요일」 부분
「이동」에서는 그 여자의 떨림이나 울음 같은 표정이나 감정을 안다고 해서 그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여자는 자신만의 공간의 경계인 “보이지 않는 둘레”를 가지고 있다. 그 공간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그 드나듦으로 인해 그 공간의 경계에 “둥그런 무늬가 일그러지”기도 하고 또다른 고리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 여자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 입체적인 공간 안으로 들어가보는 것이 아니다. 그 여자가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깊숙하게 들어앉아 있는 존재의‘본질’이 아니라 존재의‘위치’이다. 「피의 일요일」에서는 일초 전이나 일초 후에 있었던 내 자리를 오토바이를 몰고 남자가 지나간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의 선을 살고 있고 그 선은 단 한번 겹친다. 그 겹치는 단 하나의‘점’을 지나 우리는 영영 “저기 멀리 달아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과 또다른 한 사람이 만났다가 영영 헤어지는 어떤 우연적인 찰나를 이토록 세련되고 정제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위치’가 주는 시적인 느낌을 화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깐딘스끼는 내적 울림을 증발하게 하는‘부가적인 것’을 배제하는 작업이 회화적인 표현에서 최고의 간결성과 정밀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점과 선, 면들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순수한 형태는 스스로 살아 있는 내용과 혼연일체가 되고 있다”8고 덧붙인다. 이같은 언급들은 이 시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펄럭임’이나‘떨림’이나‘울음’은‘부가적인 것’에 해당한다. 이 부가적인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당신이나 그 여자의‘이동’은 최대한의 간결성과 엄밀성을 부여받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공간과 공간 사이를 평면적인 구도로 옮긴다면 점과 점 사이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가 그 사이의 비어 있음을 채운다.
선
복도의 끝에
아이가 있다
복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동안
아이는 큰다
머리가 고슬고슬하다
발자국이 울릴 때마다
아이는 줄넘기를 하고 자라고
비를 맞는다
창문에서는 햇빛과 어둠이 교대로
아이의 뺨을 때린다
복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동안 아이는 키가 크고
희미해진다 하얗게 웃는다
머리카락이 발등을 덮고
창문들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바람 소리를 내는 목구멍 속으로
검은 창이 하나 보인다
바람이 아이를 통과한다
-하재연 「복도의 아이」 전문
「복도의 아이」의 기본적인 형태구조는 “이쪽”의 점과 “저쪽”의 점을 잇는 선분이다. 아이는 복도 끝에 있고, 복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동안 점차 자라나기 때문이다. 조금씩 자란다는 것은 그전의 모습을 잃는 것이고 이는 아이의 의지를 넘어선 일이다. 따라서 성장은 아이 자신에게는 뺨을 맞는 것과 같은 파괴와 폭력의 과정이다. 물론 성장에 대한 이러한 섬세한 인식이 반영된 구절들은 아름답지만 이 시가 빛날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시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복도의 형태 때문이다.
긴 직사각형통 모양의 복도 끝에서 끝으로 아이가 기차처럼 유유히 흐르기 시작한다. 낮과 밤이 차례로 아이의 뺨을 때리며 드리워질 때마다 아이는 조금씩 커지면서 희미해진다. 복도에 일렬로 늘어선 창문들이 열렸다가 닫히고 희미해진 아이를 바람이 통과한다. 긴 직사각형통 속을 천천히 흐르는 긴 선분으로 아프게 스며드는 수많은 바람의 선들. 어딘가 통증이 느껴지는 이 외로운 선분은 시 전체에 가느다란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이 시는‘자란다’는 시간적인 의미를 긴 선분의 형태로 구성하여 정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대체시켜놓는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사이 단절의 틈을 선분(의 형태)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못된 아이들은 이렇게 항상 머리 위에서 논다. 106호 고독한 남자는 갑자기 참을 수 없었다. 천장이 아니라 천둥 같잖아. 오늘밤은 조용해야 해.
오늘밤은 쉬어야 해. 106호 고독한 남자는 206호 고독한 여자가 된다. 우리 집엔 애들이 없어요. 그리고 난 쭉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306호는 살인사건 이후 칼 한 자루까지 사라졌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집이 됐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좀더 올라가봐야 해요. 못된 아이들은 빠르게 기어올라요.
어디쯤에서 배꼽은 쑥 빠질까요? 옥상까지 올라온 우리들은 43명이다. 우리들은 일제히 하늘을 노려본다. 1206호 별빛같이 고독한 남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김행숙 「오늘밤은 106호에서 시작되었다」(『이별의 능력』) 전문
아파트는 층층이 단절된 공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곳이다. 벽이 아니라 바닥과 천장으로 단절된 이 공간들은 평행하게 겹쳐져 있다. 가장‘아래’에 살고 있는 106호 고독한 남자는 위층의 아이들이 내는 소음을 참지 못하고 2층으로 씩씩대며 올라간다. 하지만 206호에는 고독한 여자가 아이들 없이 혼자 살고 있다. 206호 여자도 소음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함께 위층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잔뜩 화가 난 이들의 움직임은 긴장과 역동성으로 팽팽하다. 소음의 근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계속 더해져서 마침내 43명이 옥상에 모이기에 이른다. 더이상 오를 층이 없는 그들은 “일제히 하늘을 노려본다.” 그때, 1206호 별빛같이 고독한 남자가 울음을 터뜨린다. 위를 향해 날카롭게 솟아오르던 직선의 분노와 긴장이 아래로 흐르는 울음의 방향과 충돌하며 서서히 젖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공간들을 일시에 꿰는 상승의 팽팽한 날카로운 속도감이 하강하는 물기로 점차 고요해질 때, 고독은 시 속에서 그만의 고유한 투명한 형태를 부여받는다.
도형
나는 늘 회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생을 통해서 알았다. 기계는 원을 그리며 회전하면서 놀랍게도 초콜릿을 생산해낸다. -뒤샹
당신의 자장가야
고운 가루약이야
당신을 재우지
천천히 시작되지
부드러운 초콜릿같이
썩은 이빨을 보이지
깨물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엄마
언니
그런 여자들
초콜릿과 밤하늘은 분간이 안되고
비명 소리는 분쇄되지
기계는 말없이
생산해내지
엄마
언니
그런 여자들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고 싶어
당신은 어른이 됐지
천천히 시작되었지
알루미늄 원반 위에서
-김행숙 「초콜릿 분쇄기」(『사춘기』) 전문
이 시는 언뜻 보면 초콜릿 기계가 회전하는 안정적인 정황을 품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출발에 불과하다. 곧이어 이 기계가 만들어내는 원의 형태는 숱하게 다른 이미지들을 품으며 끊임없이 회전한다. 초콜릿 분쇄기의 반복적인 회전은 자장가의 나른한 따뜻함과 달콤함의 원으로 이어진다. 고운 가루약이 몸속에서 천천히 회전하며 졸음을 불러오고, 당신은 점차 빙글빙글 잠에 빠져든다. 이 원은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썩기 쉬운 엄마와 언니, 여자들까지 그려낸다. 이 원 속으로 초콜릿 같은 밤하늘, 밤하늘 같은 초콜릿도 섞여 들어간다. 이 기계는 비명소리까지 분쇄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없이 그저 생산해낼 뿐이다. 그 원은 계속해서‘천천히’돌면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까지 닿는다. 기계가 가진 회전의 치밀성과 메마른 반복은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고 재우는 리듬으로 이어져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부 보여준다. 이 원은 사랑이라는 완전성과 폭력이라는 단절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이 원은 여자들의 형태이고 또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류가 겪는 시간들의 형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 원은 탄생과 성장, 죽음을 원시적이거나 생물학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천천히 시작”되었다. “알루미늄 원반 위에서”라고 말하며 우리의 기원을 기계의 메마른 반복성에서 찾고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동그라미가 형상을 고립시킬 수 있는 매우 간단한 수법”이라 했다. “격리는 재현과 단절하고 서술을 깨뜨리기 위해, 삽화성을 방해하고 형상을 해방하기 위”한9 전략이라는 것이다. 원을 이루는 선들이 빙글빙글 차갑고 날카롭게 돌면서, 달콤해서 썩기 쉬운 것들을 쉴 새 없이 생산해내고 있다. 초콜릿 기계의 회전에서 시작된 회전은 자장가와 수면, 여자와 엄마, 언니 그리고 한 인간의 성장과정으로 이어져 시간의 폭력성들과 함께 빙글빙글 돈다. 이 원은 우리를 섬뜩하게 장악하며 우리 내부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4. 기하학적 아우라의 착란
이 시들을 통해 정서들과 감정들, 세계는 형태를 부여받는다. 그때 세계는 “뼈처럼” “단순한 윤곽을 드러낸다”(김행숙 「검은 해변」, 『이별의 능력』). 그 윤곽은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형태의 점과 선, 면들의 다양한 각도와 모양, 방향성과 색깔과 크기들을 지닌다. 쑤전 쏜택(S. Sontag)에 따르면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그리고 비평-에서 가장 고상하고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10이기 때문이다. 이 직접성을 통해 투명한 세계의 윤곽이 떠오른다. 이 형태들이 바로 흩날리는 시들이 제시하는 현대적인 아우라이다. 과거 전통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대상과 나를 사유와 기억의 연상작용으로 이어줌으로써 세계와 나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을 풍부하게 직관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사유와 기억의 단절에서 시작한 이 현대적인 아우라는 모두 따로 떨어진 대상들이 공통적으로 내재한 형태성을 통해 전체를 구성한다.
이 현대적 아우라의 가치는 후썰(E. Husserl)에 의해 더 확고하게 해명된다. 후썰이 등장하기 이전 기하학의 일반공리들은 인간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차원에서 우리를 초월해 있는 객관적 체계라고 생각되어왔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세계의 의미란 의식의 현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후썰의 전제는 기하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는 『기하학의 근원』에서 순수하고 정밀한 공간과 시간의 관념성의 구성에 앞서 기하학적 개념들의 산출의 의미를 묻는다. 기하학의 공리들은 결코 인간 의식을 초월한 객관적·절대적 체계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벌써 하나의 근원적인 의미 형성의 결과이다. 공리론 일반은 의미의 침전을 이미 전제한다.”11 이 시들은 점·선·도형·면 들이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고 억압되어온 풍부한 의미의 침전으로 되돌아간다. 감정과 정서, 감수성으로 듬뿍 젖은 이 투명한 형태들은 세계에 가장 내밀하게 스며 있는 주관성의 모습이다. 그 형태는 대상에 이미 포함된 것을 발견하는 수동적인‘보기’나‘듣기’가 아니라 전적으로 능동적인‘읽기’로써 형성된다. 다만 이‘읽기’란‘착란의 읽기’이다. 객관적인 본질을 엄밀하게 탐색하는 거리를 둔 읽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혼란스럽지만, 객관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근원적 경험으로 들어가기에 가장 풍부한 읽기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시는 바로 의식 현상에 들어온 그 자체로서의 세계를 포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김행숙의 “나는 쓴다, 쓰고 나서 지우지 않고 쓴다”(「손」, 『이별의 능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지우지 않고’라는 부분이다. 지운다는 것은 받아들이고 느꼈던 것들을 거리를 두고 다시 한번 반성하는 일이다. 이 반성은 후썰에 따르면 오히려 근원적인 경험에서 멀어지는 과정이다. 반성된 곳에서는 세계와 주체가 이미 분열되어 있다. 세계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세계와 분리되는 것이다.
허나 이 시들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의미가 곧 (우리의) 세계이므로 그 의식 현상 안에서는 세계와 주체가 행복한 합일을 이루고 있다. 이 형태성은 구체적인 기억과 의미의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지 않기에 오히려 세계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인 이 낯선 아우라는 전통적인 아우라보다 더욱 근원적인 생생한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즉, 이 시들은 비록 기억의 단절에서 시작했지만 그 단절은 더욱 근원적인 합일의 경험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후썰의‘괄호치기’(epoch, 판단중지)에 불과하다. 세계에 대한 느낌들과 감정들이 평면 위의 점과 선 등으로 형태를 부여받는 이 시들의 단일성에서, 우리는 세계의 투명한 물질적 구조를 만난다.
그 안에 “네가 있었고, 주위는 조용”하다. “어디선가 비가 내리듯/바깥이 젖는 것 같았다.”(하재연 「우리는 만난다」)
심사평
이번 응모작은 총 17편, 작년 대비 2배 이상이고, 예년에 비해서도 꽤 늘어난 편수다. 양적인 성장에 걸맞게 수준도 높아졌다. 흐뭇한 일이다. 17편을 차례로 통독하면서 우선 4편에 주목했다. 그중 「영화비평 슈퍼히어로물 고찰」은 문학평론이라고 보기 어려워 부득이 제외한 후 3편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대도시를 배경으로 일과 사랑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리던 칙릿소설이 그나마의 현실주의조차 버리고 욕망의 환상적 충족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단계로 진화한 양상을, 최근에 출간돼 돌풍을 일으킨 『압구정 다이어리』를 중심으로 분석한 「원나잇 스탠드를 꿈꾸다」는 흥미로웠지만, 문학평론이라기보다는 문화비평에 가까운 점이 아쉬웠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김재영의 단편 「코끼리」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장뤼끄 낭씨의 숭고라는 열쇳말로 검토한 「숭고, 벌거벗어도 악착같이 여기 남아 있는 삶」은 난해한 개념들을 구사할 줄 아는 사변의 힘이 느껴지지만, 작품과 해석이 평행을 이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작품은 이론의 사냥터가 아니다. 시야를 확보하면서 작품과 고투하는 자세를 가다듬는다면 크게 이룰 것이다.
김행숙·이근화·하재연 등 이른바 미래파로 일컬어지는 젊은 시인들을 탐사한 「기하학적 아우라의 착란」은 쟁점을 발견하는 문제의식이 돋보인다.‘서정시와 젊은 시인들의 대립’이라는 기존의 틀을‘전통 예술작품 대(對)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수정한 뒤, 그를 논증하는 과정이 그럴듯하다. 물론 허점도 있다. 세대적 비연속성이 강조되면서 그 연속성이 간과된다든지, 세대적 동질성을 확인하는 데 열중하는 바람에 그 개별성이 지워진다든지, 그리고 무엇보다 해설에 그쳐 비평의 생명인 평가가 실종되는 점 등이 그렇다.
세 작품을 놓고 고심하다가 그래도 문장이 가장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논쟁적 패기를 갖춘 「기하학적 아우라의 착란」을 수상작으로 삼는다. 정진하기 바란다.
최원식
당선소감
어린 시절 집에 가려면 굴다리를 지나야 했다. 한낮에도 굴다리 속에 있으면 세상이 정전된 듯 잠깐 고요해지곤 했다. 거기서 한참을 멍하게 서 있던 일이 잦았다. 그 안에서는 작은 돌멩이 구르는 소리도 텅텅 크게 울리는 게 좋았다. 이 비평을 쓰는 내내 그 굴다리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시 한구절 한구절이 내 안에서 텅텅 울렸다. 이 4권의 시집은 오래도록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마음을 쓰다듬어주던 시들에 대해 쓴 글이 첫 지면을 얻게 되어 기쁘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의 소중함을 믿어주는 가족,‘비평가가 될 수 있을까’머뭇거리던 때에‘비평가가 되겠다’고 결심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신수정 교수님. 시를 읽는 것이 더 간절해진 것은 지현오빠 덕분이다. 함께 읽는다는 것, 함께 쓴다는 것, 함께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알려준 친구 미옥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애인을 만나고 난 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들에 대해 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내가 쓸 글들이 이들의 곁을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장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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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시집은 다음과 같다. 김행숙 『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 김행숙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사 2007;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민음사 2006; 하재연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사 2006.↩
- 권혁웅 「감각의 논리」, 『미래파』, 문학과지성사 2005, 24면.↩
- 『칸트의 동물원』에 실린 이장욱의 추천사.↩
- 신형철 「미니마 퍼스펙티비아minima perspectivia」, 『문학과사회』 2007년 가을호 285면.↩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8, 204면.↩
- 바씰리 깐딘스끼 『점·선·면』, 열화당 1996, 24면.↩
- 같은 책 17면.↩
- 같은 책 104면.↩
-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12~13면.↩
- 쑤전 쏜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33면.↩
- 자끄 데리다 지음, 배의용 옮김 『기하학의 기원』, 지만지고전천줄 2008 참조. 인용은 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