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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배수아

배수아 裵琇亞

1965년 서울 출생. 1993년 『소설과사상』으로 등단.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바람 인형』 『그 사람의 첫사랑』, 장편소설 『붉은손 클럽』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당나귀들』 등이 있음.

 

 

 

무종

 

 

그날 밤 나는 한 모형비행기 수집가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강 위쪽 도로를 달려갔으나, 늘 그렇듯이 강물이 검은 기름의 눈동자를 번득이는 것은 철제 난간과 흉한 화단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전에는 정원 딸린 빌라들이 늘어선 부자들의 주택가를 통과했고, 불이 꺼진 중앙역사와 문을 닫은 상점들, 역사 주변의 호텔과 여행사들, 유리 몸체들이 어두운 광채를 발하는 높은 건물들의 지역도 지나왔는데, 나는 그사이 발등을 덮는 흰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바닥에서 손바닥 하나 정도 살짝 허공으로 들린 것 같은 걸음걸이로 길을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건물들 뒤에 자리잡은, 울퉁불퉁한 돌이 깔린 좁은 도로를 덜컹거리며 지날 때마다 몸집이 작고 어깨가 다부진 택시 운전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웅얼거리며 불평을 토해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귀를 기울였지만 여전히 바람이 쉭쉭거리는 듯한 이상한 소리만 들려왔고, 그래서 우리는 고장난 라디오가 그를 대신해서 그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는데, 예상했던 대로,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외국인이었고, 그는 짧은 콧수염을 기르고 손등에 털이 난 외국인이었으며, 그의 피부는 검었고, 처음에 택시에 탔을 때는 단어 그대로 석탄처럼 검다고 생각했는데, 그 검은 얼굴은 내가 몇년 전 이곳저곳 도시의 동물원에서 하루를 보내며 살 때, 커다란 러시아제 구형 카메라를 들고 나에게 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내밀던 어떤 외로운 아프리카인을 연상시켰고, 나는 서툴게 셔터를 눌렀는데 이상하게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아, 굵은 창살이 쳐진 흰꼬리안경원숭이 우리 앞에 인내심을 갖고 홀로 앉아 있는 덩치 큰 한명의 아프리카인을 향해 여러번이나 카메라를 겨냥해야 했으며,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눈부신 대낮이었고, 렌즈 속으로 들어온 광경은 당혹스럽게도 시커멓게 그늘진 창살 우리 주변과 한없이 과장된 백색의 섬광뿐으로, 우리 속의 흰꼬리안경원숭이도 아프리카인의 모습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므로 매번 당황한 채 다시 눈을 카메라에서 떼면, 그들은 모두 내가 그늘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어두운 무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음이 밝혀지곤 했다. 그늘인 채로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갑자기 그늘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던 아프리카인의 기억. 하지만 마주 오는 자동차의 번득이는 불빛이 운전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춘 다음 사선으로 미끄러지는 순간에는, 그의 얼굴은 우유가 많이 들어간 카푸치노 빛깔로 반짝였으며, 모형비행기 수집가가 노골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는 점점 생명이 없는 회색으로 변하여, 마침내 운전사가 고개를 뒤쪽으로 돌린 한순간, 나는 납빛 촛농으로 굳어진 러시아인의 얼굴 위로 기어가는 벌레 한마리를 보았거나, 정말로 러시아인이 모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운전사의 언어는 믿기 어려울 만큼 풍부한 모음의 묶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묶음은 너무도 거대하여 아무도 들어올릴 수 없는 바람의 다발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은 이상한 긴장 속으로 상대편을 몰아넣기에 충분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운전사는 간혹 이유 없이 낄낄거렸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예의 없이 물어댔는데, 그런 그의 질문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그는 우리가 말한‘문학’이란 단어를 이해하지도 못했으므로, 따라서 우리가 이미 그에게 말해둔 주소와 행선지를 그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것도 분명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불안해졌다. 그러나 운전사는 우리의 불안을 눈치챈 듯이 거울을 통해 우리에게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 보였는데, 그것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느끼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운전사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려는 행동 같았다. 내가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나에게 우리가 이제 앞으로 가게 될 장소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것은 그의 친구이기도 한 어느 작가의 작품 낭독회인데, 낭독회가 있을 장소는 무종의 탑이며, 우연히도 그 작가의 이름도 무종이라고 하고, 그가 새로 쓴 책의 제목은‘광대들’인데, 작가 자신이 알고 있다는 모든 광대들의 초상을 백과사전식으로 모아놓은,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혹시 그중에는 오옴진리교의 교주로서 토오꾜오 지하철에서 독가스테러를 일으킨 장본인인 일본의 광대도 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해하고 있지만, 아직 그 책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므로 거기에 대한 대답은 알지 못한다면서, 이제 얼마 후면 우리는 그 대답을 듣게 되겠지, 하고 말했다. 책에 등장하는 유명인 광대로는 카스파 하우저와 교황, 달라이 라마와 페터 한트케, 그리고 찰스 황태자 등이 있다더군, 오사마 빈 라덴은 물론이고, 하고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덧붙이자면, 그 작가는 기이하게도 새빨간 양말을 즐겨 신고 다니며 다듬지 않은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것은 물론이고, 낡아빠진 복장에 흐느적거리는 몸짓과 말투로 이미 유명한데, 손가락으로 뜨거운 국수를 집어먹는다는 소문도 있지, 그런데 참고로 설명하자면 무종은 성공한 기업가였어, 하고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계속 말했다. 오늘 작품 낭독회를 하는 작가 무종 말고, 그 낭독회가 열리는 장소인‘무종’의 원래 주인이었던 사람을 말하는 거라고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덧붙였다. 그는 프랑스의 위그노 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한 집안 후손인데, 18세기말 여러 도시를 방랑하며 수업을 쌓는 젊은 비누 제조장인의 몸으로 처음 이 도시로 온 다음 일자리를 잡았고, 자신의 직장이던 사업체를 인수해서 정착했으며, 그의 사업체는 이후 번창을 거듭하여 마침내는 지금 무종의 탑이 있는 그 자리에 비누와 화장품 제조공장을 차렸다. 무종 회사의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제품은 1차대전 직후에 출시된‘무종강력효과크림’이고, 무종 회사의 화장품공장은 나중에 덜 복잡한 구역으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원래 공장 자리에는 30미터 높이의 탑을 포함한 무종 회사 본사건물이 들어섰다. 그 탑은 이 도시 최초의 고층건물이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1972년 회사는 매각되었고, 건물도 무종의 탑만 남기고 모두 헐렸다. 이후로 그곳은 여러 형태의 독립예술 행사를 위한 시설로 재탄생했고, 사람들은 그곳을 최초 건립자의 이름을 따서 무종의 탑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무종의 탑은 예나 지금이나 이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존재이고, 특히 택시 운전사들에게는 마치 백악관이나 자금성과도 같은, 의혹 한점 없는 명백한 명칭이어서, 택시를 타고 운전사에게 단지 무종의 탑, 그 이름을 말하기만 하면 운전사는 예외 없이 고개를 반쯤 돌린 채 손님을 쳐다보면서, 나는 책이라고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잡지 말고는 한권도 읽지 않지만, 연극이나 발레 혹은 낭송회도 결코 구경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이름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안답니다, 당연하지요, 나는 이 도시의 택시 운전사니까요! 하고 주장하는 몸짓을 해 보인다고,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설명했다. 오늘 우리는 박물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고, 이 택시를 타고 박물관에 도착한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이미 어느정도 불안해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내가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대뜸 무종의 탑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는 한시간 정도 떨어진 인근 다른 도시에서 볼일을 마친 다음 거기서 이 택시를 집어타고 왔는데, 택시 운전사가 지리에 총체적으로 어두울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무종이라는 이름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종의 탑이라는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그 탑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정확한 주소를 대라고 했는데, 수집가가 불러준 주소는 운전사의 내비게이터에도 입력되지 않으며, 그래서 운전사는 그 주소가 맞는지 의심스러워하고 있지만,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매년 빠지지 않고 무종의 탑에서 벌어지는 문학행사에 참석해온데다가 매번 택시를 탄 것은 물론이고, 그때마다 단 한번도 주소를 틀리게 기억한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절대로 틀릴 리가 없으며, 유명한 작가의 낭독회와 그보다 더욱 유명한 비누-화장품 제조자의 이름을 가진 예술극장으로 가는 일이니, 만일 운전사가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주소를 알려줄 필요도 없이 당장, 벌써 한시간 전에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주었을 거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이봐요, 당신이 그 거리를 찾지 못한다면, 쎈터에다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쎈터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던가요. 내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습니까? 하고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운전사를 향해 정중하면서도 차갑게, 예의바르지만 냉정한 비난을 숨기지 않으면서 말했다. 운전사가 다시금 입속으로 우물거렸는데, 그것은 내게, 조금 전에 쎈터에 이미 물어봤지만 그 주소는 입구가 아니라고 했어요, 하는 말처럼, 그러나 그 온전한 의미를 전달할 능력은 전혀 없는, 그런 불명확한 어휘의 묶음으로만 들렸다. 하지만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운전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꼬리를 잡아채듯이, 나는 무종의 탑이 있는 거리를 잘 아는데, 난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 탑을 잘 알고 있었는데,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 여기는 절대 그 거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운전사 양반! 하고 쏘아붙였다. 우리는 어느 어두운 도로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골목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뒷길이었는데, 불 꺼진 집들이 활 모양으로 휘어진 보행자도로를 따라 배부른 거인들처럼 죽 늘어섰으며, 검은 창들은 모두 약간씩 어딘지 모르게 비에 젖은 듯한 눈길을 하고 있고, 사실상 아주 가는 빗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중이기도 했는데, 빗방울은 간혹 지나가는 택시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아 아우성치는 벌레들처럼 우리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반쯤 가리다가, 곧 우리가 택시 안에, 그러나 매우 불안한 상황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골목들이 여기저기로 구부러진 그 거리는 내가 그 도시에서 만나본 거리 중 가장 어둡고 좁았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춥고 스산한데다가 포석이 깔린 길은 미끈거렸으며, 나는 이런 상황을 택시 안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검고 축축한 높은 벽들이 스스로 모퉁이를 돌아 앞으로 다가오는 듯했기에, 이런 밤이라면 30미터 높이의 탑이 어둠의 겹을 뚫고 당장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둥그스름하게 휘어진 모퉁이 저 너머에서 파랗게 반짝이는 작은 섬광의 그림자들이 나타나나 싶더니 금방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것은 십자로로 이어진 다른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었으리라. 우리는 벌써 여러번이나 같은 장소를 뱅뱅 돌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자동차의 내비게이터가 더이상의 정보를 줄 수 없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그 장소에 대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매우 독특한 어느 기억에 의하면, 정말로 추운 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소매가 없는 얇은 코트를 걸친 사람들 한 무리가 웃으면서 지나갔고, 그들 중 여자 한명은 봄의 축제 때 그러는 것처럼 여신의 흰 튜닉 스커트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으며, 그들은 어느 공동주택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그다음 다시 복도로 향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공동주택의 커다란 현관문은 온통 차가운 유리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서는 짧은 순간 열린 문틈으로 맹렬하게 짖어대는 개의 검은 주둥이를 볼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발로 땅바닥을 차듯이 걸었던 것이 기억난다. 마치 새처럼. 그들의 신발 모양을 자세히 보려고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으나, 보도에 흩어진 물웅덩이마다 하나의 밤 전체가 고여 있었고, 늪보다 진하게 지상 가까이 가라앉은 어둠은 웅덩이의 수면에서 더욱 검게 반사되어, 이 세계의 아래쪽은 긴 수도복을 입은 배우들의 발 모양을 들키지 않게 검은 연기를 깔아놓은 무대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새들이 얼어붙은 땅에서 먹이를 찾을 때 그러듯이, 비록 구두 모양은 보이지 않았으나, 탁탁 가볍게 뛰는 스텝을 밟으며 걷던 사람들. 마치 새처럼. 도대체 쎈터에 전화를 할 거요, 안할 거요? 하고 모형비행기 수집가가 다시 운전사를 다그치고 있었다. 운전사는 할 수 없다는 몸짓을 보이고는, 과장되게 한숨을 쉬면서 쎈터와 연결을 시도했는데, 운전사의 뭔가 할말이 있다는 반항적인 태도가 수집가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했다. 『광대들』에는 시대를 망라한 255명의 바보 광대들이 등장하는데, 그중에 여자들의 숫자가 확연하게 적은 것이-여자는 심지어 광대나 바보로조차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단 말인가?-어떤 의미에서든 여성주의 평론가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고,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운전사가 쎈터에 전화하는 동안 나에게 말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초보자를 위한 소규모 광대학’이라는 아이러니한 부제가 붙은 그 책은 진짜 대책없는 위대한 광대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흔히 영웅이나 현자로 기억되고 있는 이들의 광대성과 어리석은 일면을 모아놓은 것이기도 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기담과 엉뚱한 에피쏘드에 호기심을 느끼는 이들에게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인데, 거기에 작가의 재치있는 입담과 방대한 백과사전식의,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잡다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식도 함께 즐길 수가 있다고,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말했다. 운전사는 쎈터에 다시 한번 무종이라는 이름을 말하고 주소를 물었고, 쎈터의 남자는 다시 한번 우리가 있는 지점의 주소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긴 그곳이 아니야! 하고 모형비행기 수집가가 버럭 외치다시피 말했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무종이 화장품공장을 차렸을 것 같습니까? 이런 어두침침한 뒷골목길에? 당신은 왜 좀더 구체적으로 정확히 묻지 못하는 거지요? 우리는 이미 늦었단 말이오, 그것도 당신 때문에. 벌써 같은 모퉁이를 몇번째 돌고 있냔 말입니다! ‘당신 때문’이란 말에 과도한 힘을 주며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말했다. 운전사는 고개를 움츠렸는데,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하고 그 눈빛은 말하고 있었지만, 모음으로 이루어진 그의 구멍투성이 언어는 차마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여, 처량하게 입속으로만 웅얼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할 수 없군 구제불능이야, 우리는 여기서 내리겠어요, 하고 외치다시피 말했다. 당신은 택시 운전사로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군그래! 하고 매섭게 덧붙이면서. 그러나 그때 운전사는, 갑작스러운 결연한 몸짓으로 어떤 버튼을 누르며, 요금의 숫자가 더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만든 다음에, 마치 그것만이 자신의 권력하에 있으며,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확실한 영역에 힘을 발휘하고는 그것을 한껏 과시하는 난쟁이 제왕의 몸짓으로, 어쨌든 자신이 다시 찾아보겠다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목구멍을 통과하는 거대한 바위처럼 힘겹게 밀려나왔다. 이것 보세요, 제가 요금이 더이상 올라가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보이시죠? 그리고 근처를 좀더 돌아다녀보면 당신이 안다는 그 탑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그렇게 해봅시다. 운전사는 그렁그렁 힘들게 말했는데, 모형비행기 수집가가 태양이라도 얼어붙어버릴 냉정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으므로 운전사의 말소리는 상대적으로 더욱 느리고 더듬거렸고, 더할 수 없이 외국인다웠으며,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운전사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더이상 요금을 받지는 않겠다는 타협안이 전부가 아니라, 지금처럼 정보가 불충분할 경우라면, 도시의 모든 택시 운전사가 알고 있을 거라는 그 문제의 탑을 모른다고 하여 그것이 순전히 자신의 탓이겠느냐는 항변이겠지만, 그리고 수집가가 가르쳐준 무종의 탑 주소가 정확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않느냐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운전사는 모형비행기 수집가에게 분노를 표현하지는 못했고, 수집가는 다시 한번 망치로 내려치듯이, 교육받은 지식인의 흠잡을 데 없는 발음으로, 이 도시의 택시 운전사가 그 이름을 알아야 하는 건 직업상의 의무란 말입니다, 하고 강조해서 말했다.

우리는 마침내 무종의 탑 앞에서 택시를 내리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탑은 우리가 오랫동안 헤매고 다니던 그 휘어진 골목에서 겨우 한 블록 떨어진 모퉁이를 가볍게 살짝 돌기만 하면 나타나는 장소에 있었다. 역시 비슷하게 좁다랗고 그늘진 골목길인데, 무종의 탑은 두 골목 사이에 위치한 좁은 땅을 거의 다 차지하고 서 있는 형국이며, 그중 하나의 골목은 탑의 이름을 따서 무종 거리라고 불리고 있으며, 반대쪽 골목에는 탑의 입구가 자리하고 있는 그런 구조였으므로, 사람들은 습관처럼‘무종 거리의 무종의 탑’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모형비행기 수집가의 말에 따르자면 어쨌든 다른 모든 택시 운전사들은 신기하게도 아무 어려움 없이 그 탑 앞으로 손님들을 실어나르고 있다는 얘기였다. 사방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으며 탑 바로 옆 건물 1층에는 조그마한 식당 간판이 보였다. 사각형의 창을 통해서 테이블에 켜둔 촛불과 주석 촛대, 격자무늬 테이블보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느껴지는 그곳은 이딸리아 식당이었다.

우리는 벌레가 빛을 따라가듯 그곳으로 스며들어가 두 접시의 이딸리아 국수를 주문하게 되겠지만, 그리고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침묵 속에서 국수를 뒤적이고, 그러다가 마침내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나에게 뭔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한 일이라도 있느냐고 침울한 채 묻게 될 것이고, 나는 그런 일은 없으며 단지 당신의 마음이 불편한 것을 상상하는 게 나에게 불편할 뿐이라고 대답하게 되겠지만, 그런 다음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는 채 서로를 아주 잠시 서글프게 바라보게 될 것인데, 그 바라봄은 심장에 통증과 부자유를 유발하는 종류의 것이고, 우리는 그릇을 반도 비우지 못했으나 무종의 낭독회에 가기 위해 서둘러 일어서야 하겠지만, 아직은 그 어느 사건도 시작되기 이전이었다.

무종의 탑은 검은 하늘을 향해 둔중하게 치솟은 평범한 사각형 벽돌 덩어리처럼 보였다. 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 들었던 설명에 비추어볼 때 좀 실망스러울 정도로 평범하게만 보였으며, 그것이 탑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늦가을 밤에 어울리는 모양으로 지어놓은 사각형 대형 굴뚝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주차장에는 여러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지만 사방은 인기척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기에는 너무나 싸늘한 밤이었으므로 다들 도착하자마자 바삐 탑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 같았다. 택시 운전사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른 운전자에게 무종의 탑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아야만 했고, 다른 운전자는 너무도 간단하게 탑 입구가 있는 거리를 가르쳐주었으므로, 그렇게 하여 마침내는 원하던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제는 더이상 택시조차도 마음 편히 타지 못한다는 건지, 그것도 제 돈을 다 지불하고서 말이야!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말했다. 게다가 아무리 한심하고 불편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불평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당장에 외국인 혐오자라는 낙인이 찍혀버릴 테니 모두들 고개를 움츠리고 두려워하고만 있지! 도대체 이 도시의 택시 운전사가 무종의 탑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게 외국인 혐오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화난 채로 몇걸음을 성큼성큼 내딛다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 발걸음을, 그것도 조금 서글프게, 누구를 향한 어떤 종류의 서글픔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지켜보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생각이 났지만, 이제 곧 이딸리아 국수를 먹으면서 우리는 다른 일에 관해서도 떠올리게 될 터인데, 그가 사실은 식당의 의자가 아니라 파일럿의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이며, 그는 비행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고, 그의 발아래로는 희게 빛나는 긴 산맥이 공룡의 등뼈처럼 가로놓였는데, 이미 알려진 대로 그의 비행기는 추락하는 중이고, 그는 이미 추락한 비행기에 타고 있던 서글픈 조종사였는데, 어느날 나는 흙속에서 파낸 그의 등뼈를 지팡이처럼 허공으로 들어올리게 될 터이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모두 무감각한 가운데 그것을 알고 있고, 나는 그때 젖은 포석을 탁탁 소리나게 밟으며 걷고 있었는데, 나는 기쁨과 슬픔에 겨워 가볍게 뛰어올랐으며, 그걸 본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입을 벌려 나에게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고, 하지만 나는 오른쪽 구두를 벗고 안에 들어간 젖은 모래를 털어내는 중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많은 모래 알갱이들을 털어내는 동안, 그제야 내 구두가 굽이 높으며 발등을 덮는 모양에다 보름달처럼 환한 광택을 내뿜는 흰빛인 것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웹써핑 도중 우연히 한 인터넷잡지 기사에서, 스위스 베른에서 열리는 모형비행기 전시회에 관한 사진들을 보게 된다. 스위스에서 가장 큰 전시회라는 타이틀 아래에는, 양옆으로 활짝 편 붉은 날개의 폭이 11미터에 이르는 슈퍼 모형비행기도 등장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고, 뿐만 아니라 실제와 마찬가지로 4개의 엔진을 장착한 에어버스 A380의 처녀비행도 있을 예정인데, 만드는 데 1년여의 시간이 걸린 그 에어버스 모델의 비행시간은 약 12분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일생동안 단 한번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없었던 그 기계적 사물들의 사진을 한동안 쳐다보고 있게 된다. 실물의 형태와 기능을 축소해서 모방해놓은 쌍둥이 사물들. 실제로 무선조종이 가능한 모형비행기나 모형기관차, 사각형의 박스 모양 라디오, 희귀우표나 중고 그림엽서 혹은 살아 있는 파충류와 나비 수집가들을 나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는 그런 수집벽을 가진 사람들이 내 짐작보다는 아주 많으며, 그것은 어린시절의 일시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많은 경우 평생 지속되고, 그들은 최소한 단 한번이라도 자신들의 수집품 전시회를 열고 싶어하고, 그들의 일생 최고의 꿈은 개인 박물관을 여는 것이며, 실제로 그런 개인 박물관들이 여기저기 숨겨진 골목에 생각보다 많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나면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서며, 현관을 통과한 다음 바로 오른쪽으로 꺾으면 그곳은 1층의 메인 거실인데, 한가운데에 그 박물관의 가장 커다란 전시물이자 수집가의 생전 큰 자부심이었던 폭 5미터짜리 꽁꼬르드가 날개를 펴고 사뿐히 착륙해 있고, 이어지는 좁은 복도를 따라 설치된 유리 진열장 속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미니어처 항공기들, 여러개의 모형비행기 상점을 그대로 옮겨온 것만 같고,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설계에 따라 그대로 만든 비행기인데, 지금의 눈으로 보면 마치 박물관 측이 설치한 감시카메라처럼 보이며, 반대편 벽에는 20세기 초의 발명가들이 만든 비행기의 진귀한 흑백사진들, 지금은 폐쇄된 오래전 공항들의 황량하게 드넓은 활주로들의 사진, 험준한 산맥과 사막에 자리한 전투기용 임시 활주로, 고고학자와 탐험가 혹은 도굴꾼이나 스파이 들을 위한 오지의 활주로들, 그리고 일정기간 동안 폐쇄되어 있던 서베를린을 위해 비행기가 보급품을 실어나르던 공중기지의 사진,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이제 모형비행기들은 원래 침실과 서재, 주인부부의 식당이었을 각 방마다 시대별로 구분되어 전시되는데, 그들은 무선조종 엔진이 장착되었을지라도 크기가 작은 미니기기일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 방과 저 방을 무작위로 돌아다니다보면 반드시 어느 한 조그만 방에는 비디오시설이 있어서 나른한 모노톤의 성우가 설명해주는 「비행의 역사 Ⅲ-1927년부터 1945년까지」 같은 흑백필름을 앉아서 관람할 수가 있고, 1927년 5월 20일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 비행장을 기우뚱거리며 이륙한 후 다음날 빠리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던 당시의 환희의 장면을 담은 무성영화를 반복해서 볼 수도 있으며, 간혹 수집가의 관심사가 단지 사물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을 경우에는, 『야간비행』이나 『대양을 넘어서-린드버그 전기』 등의 책들이 꽂혀 있는 작은 서가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방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는 다른 방문객들과는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카펫에 눌린 발자국이나 방명록의 필체, 진열장 유리에 서린 입김 흔적으로 우리를 앞서간 그들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을 뿐인데, 얼핏 문 뒤로 사라지는 그림자들, 옆방에서 울리는 나직한 기침소리와 팸플릿 페이지를 뒤적이는 소리, 그리고 어느 방 안으로 문득 들어설 때, 방금 전까지 진열장의 B-58 허슬러기 모형을 매혹된 채 바라보던 어떤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고, 그 사람은 벽에 걸린 리히텐슈타인풍의 팝아트 그림 앞에서도 분명 한번 걸음을 멈추었을 것인데, 계란처럼 노란 머리칼의 여인이 한 남자의 목에 매달려 울부짖는 그 그림, 커다랗게 확대된 여자의 눈동자와 입술, 그리고 뒷머리만 보이는 남자, 거칠고 굵은 테두리와 과장된 표현, 하지만 무엇보다 강렬한 특징은 번쩍거리며 눈을 파고드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평면적인 원색들, 만화나 극장 간판, 혹은 1920년대의 화장품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그런데 그들 남녀의 저 뒤편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출발준비를 마친 비행기 한대가 날개를 활짝 편 백조처럼 활주로에 서 있으며, 아마도 그들은 공항에서 마지막 작별을 나누는 중인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의 머리 위로 그려진 말풍선 속에는‘I’ll miss you…… please write’라는 문장이 들어 있고, 비행기의 몸체에는 boeing 747이라고 선명히 적혀 있으며, 그림의 한귀퉁이에는 검은 인쇄체로, 아마도 이 그림이 미술회화가 아니라 정말로 어떤 상품을 위한 광고인 것처럼 보이도록,‘우리는 세계의 교차로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라는 애매한 문구가 들어 있다. 3층은 사무실과 작업실이 자리잡고 있어 방문객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데,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디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왜 어떤 인간은 비행을 특별히 사랑하는가, 단 한번도 깃털 날개를 달고 직접 하늘을 날아본 적이 없지만, 왜 어떤 인간은 비행용 기기를 특별히 사랑할 뿐 아니라 그것을 소형 모델로 만들어 자신의 집에 두기를 원하며, 자신의 집을 다름아닌 그것으로 가득 채우고, 자신의 집을 그들에게 상속하며, 나아가서는 그들과 함께 집에서 가능하면 영구히 머물기 위하여, 그들이 떠나버리지 못하도록 집안에 그들을 위한 활주로와 항로, 공항과 관제탑을 비롯하여, 항공기 창 안쪽에 씰루엣으로 드러나는 미지의 승객들과 함께 수하물 운반인과 정비사 들을 준비하여 모형비행의 순간을 더욱 완전한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갑작스러운 어떤 재난으로 인하여 집이 젖빛 안개에 감싸일 때면 어디에선가 나타나 깃발을 들고 서 있게 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비옷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활주로 안내자까지 마련해두는가, 하는 감탄어린 의문이다.

엔진이 달린 모형비행기나 도자기 설탕그릇, 근대 이전의 세계지도 혹은 그림엽서 같은 인쇄물, 색이 들어간 유리제품, 유명한 인물들의 초상화, 마리오네뜨 인형, 거리 이름이 적힌 표시판, 새의 박제, 화장품광고포스터 또는 팔찌 같은 장신구 수집가들을 나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나는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임시로 구한 셋방에서 살았던 시절이 있는데, 필요한 짐을 모조리 싸서 아주 커다란 여행가방에 넣은 다음, 택시와 버스를 갈아타고 공항으로 가서, 긴 줄의 끝에 서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하여 도착한 작고 낯선 방들, 몇달 동안 여행을 떠나온 사람에게 주어진, 몇달 동안 여행을 떠난 누군가의 방들. 그 방들과 집주인들의 취향을 떠올려보아도, 아주 약간이라도 수집취미의 흔적을 느낀 적은 없었다. 물론, 어느 누구나 갖고 있게 되는 그림액자와 여행지의 기념품, 소소한 인형들과 천장에 매달린 한두개의 장난감 비행기들은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개인적 흔적이 살아서 남아 있는, 혹은 그 흔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방에서 몇달 동안 사는 것은 늘 기묘한 느낌인데, 내가 주로 살았던 곳은 바로 그런, 원래는 다른 사람의 것이나 당분간만 임시로 대여된, 가구와 커튼, 책과 장식품, 장난감과 실내화와 침구 등을 공유하는 셋방이었다. 사실 빈방은 도시 전체에 많이 있었으나 방을 임대하는 집주인들은 대개 장기거주자를 선호했기 때문에, 두세달 동안의 비교적 짧은 기간을 위하여 셋방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간에 맞는 적당한 방을 구하지 못한 최악의 경우, 나는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고 이 도시 저 도시로 아는 사람과 친구들의 혹은 친구들이 소개해준 모르는 사람들의 집을 힘들게 전전해야 했는데, 기차가 연착하거나 파업으로 중앙역이 마비되다시피 한 날은, 플랫폼에 가방을 놓고 그 위에 웅크려 앉은 채 한없이 기차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애써 할인 기차표를 구해 전국을 가로지르는 일이 싸구려 호텔에서 거주하는 편보다 과연 얼마나 비용이 더 절약될 것인가, 소득 없는 의문에 잠기곤 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삶의 피곤에 점령당하게 스스로를 놓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때면 나는 의도적으로, 내가 어느 겨울 일주일 동안 살았던 홍콩의 인터컨티넨털 호텔을 즐거운 마음으로 회상하곤 했다. 호텔 접수계는 독일 여자였으며, 흰 이불보는 씰크처럼 매끄러웠고, 항만을 사이에 두고 홍콩섬의 야경과 설날 저녁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방 안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혹은 어느 여름, 보덴 호수에서 휴가를 보낼 때 열흘 동안 지냈던 별장을 떠올리기도 했다. 세개의 침실과 두개의 커다란 거실, 지하실과 부엌과 식당, 각각 정원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두개의 발코니가 갖춰진 별장. 그 별장의 마당으로 처음 들어섰을 때, 그때는 저녁이었고 진입로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으므로 내가 타고 온 택시가 돌아 나가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비현실적으로 커다랗게 들려왔고, 그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아무도 모르는 외딴섬에 불현듯 도착하여 홀로 배에서 내린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나는 한 친구에게 그때의 감정을 전달하면서, 나에게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곳은 그 운명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그런 예외의 섬이었다고 설명했다. 마치 꿈속에서 또다시 꿈을 꾸듯이, 여행지에서 다시 여행을 떠나온 마음. 그러나 정반대되는 경우의 셋방도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가녀린 새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집주인, 그러나 그의 집은 무엇보다 좁고 습했으며, 담배냄새가 사방에 스며 있었고, 결정적으로 다음날 아침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자 잡동사니와 먼지, 온갖 버려진 물건들과 녹슨 정원의자, 악취 나는 축축한 흙과 잡초들이 쌓여 있었으며, 주변 건물의 가장 흉한 벽면들이 서로 마주하며 모여 있는 널찍한 안마당이 나타났다. 여행지의 거처를 미리 마련한 다음 한국을 떠나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매번 셋집의 환경을 일일이 체크하기란 불가능하므로, 그런 불운을 만날 가능성은 모든 모퉁이마다 항상 도사리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여행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싸고 적당한 셋방을 구하기 위해 겪었던 어려움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내 여행은 자연이나 모험,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휴식을 찾아 떠난 것이 아니라, 낯선 이들과 함께 거주하는 셋집을 전전한 여행이기도 했으며, 나에게 여행이란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셋방”이란 말과 사실상 거의 동의어였기 때문이며, 그러는 사이 셋방을 구하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메일을 썼고, 셋방을 중개하는 인터넷 싸이트의 자기소개란에 종종 올라오듯이,‘다인거주 셋집의 경험이 풍부함’이란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매번 셋방을 구하는데 성공한 것은 중개싸이트가 아니라 항상 우연한 만남 혹은 친구들을 통해서였다. 운이 좋았던 어느해는 독일의 한 문학단체가 제공하는 빌라에서 지낼 수 있었는데, 마침 독일 국내선 항공사가 파업을 하는 바람에 공항에서 여러 복잡한 일들을 겪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단지, 빌라의 어느 외벽에 금고가 붙어 있고, 금고의 비밀번호는 A19***이며, 비밀번호를 누르고 금고를 열면 내 방 열쇠와 함께 방 위치와 번호 등의 내용이 적힌 안내문이 나오리라는 것이었다. 비가 내려 부드러워진 정원의 흙은 발이 푹푹 빠졌으며, 그 위로 무거운 여행가방을 힘겹게 끌면서, 나는 과연 빌라의 외벽이란 곳이 어디일까 사방을 두리번거렸는데, 현관에 켜진 희미한 전등 이외에는 어디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정원의 흙에 절벅거리며 스며드는 소리만이 무섭도록 크게 들려왔으며, 스무시간에 걸친 여정을 마친 나는 비를 맞으면서 한동안 침묵한 채 서 있었는데, 이것이 내 집인가, 이것이 내 꿈인가, 혼돈과 동시에 어떤 육체적 피곤과도 비슷한 몽환이 몰려왔기 때문이고, 그것은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 뒤면 으레 나타나곤 하는 증상으로, 시차로 인한 정신의 산란인지 혹은 비행중 과도하게 작용하는 방사선의 영향 때문인지, 이 커다란 빌라에 아무도 살지 않으며, 모든 방들은 비어 있고, 그날 오후 내가 공항에서 몇시간 동안 길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오늘밤 동안 길을 잃을 것인데, 마치 오래전에 꾸었던 꿈속으로 잘못 미끄러져 들어온 나의 현재라는 시간처럼, 여기서 길을 잃을 나와 그 나를 지켜보고 있을 나는 잠시 동안 서로 이별할 것이고,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기도 전에 이미 그 방을 보았으며, 그 공간을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고,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곳에서 일어나거나 내가 하게 될 일들까지도, 절름발이 악사가 들고 다니던 만화경처럼 장면장면 머릿속으로 느리게 지나갔는데, 지나가는 장면들은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나중에 등장하는 장면들 사이에 불규칙하게 끼어들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반복해서 나타났고, 그래서 나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니, 그때의 적막하고도 압도적인, 그러면서 동시에 확신에 찬 몽환은 시간이 지나도 나를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으며, 그날 이후로 나는 머릿속에 잠시 떠올라 나를 가만히 차지한 다음 불현듯 꺼져버리는 비연속적인 상들이 나의 단순한 상상의 산물인지, 아니면 깨어 있는 상태로 꾸는 건조한 꿈인지, 혹은 이미 내가 예전에 보았던 광경이거나 아니면 내가 보았다고 느끼게 될 앞으로의 영상들인지를 도저히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불안하게 돌아다니던 임시 거주지들 중에는 소개를 통하여 들어가게 된 프랑크푸르트 홀바인 거리의 집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작년 도서전 기간 동안 일주일을 머물렀다. 오래된 그 집은 아주 쾌적하고 편안한 구조였으며, 집주인 부부는 비어 있는 손님용 침실을 나를 위해 내주었다. 손님용 침실 곁에는 손님용 욕실이 딸려 있었는데, 도착한 첫날 욕실에 놓인 커다란 화분에서 떨어진 붉은 낙엽이, 마치 일부러 그렇게 장식해놓은 듯이, 부드러운 카펫 위에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흩어져 있던 것이 기억난다. 은퇴한 엔지니어인 집주인 남자는 나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예전에 여러 도시로 출장을 자주 다녔는데, 특히 대규모 박람회가 열리는 기간이면 시내의 호텔을 잡기가 아주 어려울 때가 있어서, 간혹-지금의 나처럼-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으로부터 방을 빌려 며칠 동안 지내곤 했는데, 그런 방들은 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원래 집주인 가족의 방이며, 그래서 한번은 사방의 선반에 축구공과 비행기모형들이 빼곡히 들어찬 한 소년의 방에서 지낸 적이 있고, 뿐만 아니라 침대 아래의 상자 속에도 온갖 모형들이 가득했는데, 그날 밤 잠에서 문득 깨어났을 때, 희미한 미등을 깜박이며 전자잠자리처럼 공중을 선회하던 모형비행기 모빌을 발견했고, 엷은 날개가 서로 마찰하며 떨리듯 나직하게 숨죽여 부르릉거리던 비행기의 흐릿한 소음을 꿈속에서 계속해서 들은 것도 같았는데, 그때의 기분이 아주 묘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우리는 그때 사과주를 앞에 놓고 서로가 일생동안 임시로 살았던 거주지들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나는 한번 머물렀던 셋방을 이듬해에 다시 빌린 적은 없다. 나에 의해서 사용된 셋방들은 어떤 제3의 의지에 의해 조용히 용도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지도를 펼치면, 내가 살았던 이곳저곳의 셋집들과, 한때는 내게 낯익은 것이었고 그곳으로 내 우편물이 도착하곤 했던 집주인의 주소들, 그들이 빌려주던 방과 그 안의 소박하고 간소한 가구들, 저마다 다른 표정이었던 창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썼던 글들, 그곳에 머물던 몇달 동안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었던 지하철역의 이름들과 함께, 주변 거리의 사소한 풍경들, 아이스크림가게와 빵집과 주말에만 파는 브런치를 먹던 야외 까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한다. 나는 항상 길을 걸어다녔는데, 문득 고개를 들고 보면 자전거를 탄 집주인들이 나를 지나쳐가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수년 동안, 나 자신이 스스로 정한 휴가 규칙에 따라 돈과 시간이 있을 때마다 거의 매번 한 도시를 향해 날아갔으며, 그 도시의 여기저기에서 한때의 시간을 살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종종 셋집의 지하실에 가방을 맡겨놓거나 책과 옷가지 등의 급하지 않은 짐을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마치 이듬해에도 다시 이 도시를 찾게 될 것이 확실한 것처럼 자신있게 행동했고, 집주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내 가방이 거기 있으므로 당연히 다시 그곳에 오게 되리라고, 그렇게 믿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게도 그 집들을 다시 찾게 되지 않았으며, 짐을 찾아가라고 나에게 일부러 연락해오는 집주인도 거의 없었다. 단 한번, 나는 베를린에서 예상치 못하게 몹시 추운 늦여름을 맞았으며, 그래서 할 수 없이 예전에 가방을 맡겨놓았던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지하실에 둔 가방에서 겨울 스웨터를 몇벌 꺼내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 허락을 얻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그 집의 지하실에는 내 가방뿐만 아니라, 나 이후 그곳에 세 들어 살았던 방랑하는 세입자들의 가방과 짐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그래서 가장 안쪽에 박혀 있는 내 가방을 꺼내기 위해 집 한채처럼 무거운 다른 가방들을 모조리 들어내야만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단 한명의 승려가 머물던 베를린의 불교사원과 좁고 그늘진 벽돌집, 멋지고 아름다운 파싸드를 가진 건물들의 맞은편에 위치한 덕분에 전망이 화려했던 빠리 거리의 집, 텅 빈 거리 한가운데 솟아 있는 엄격한 사각형의 사회주의 건물, 아랍인 시장이 서던 운하 근처와 골동품상인들의 거리, 실업급여 신청자와 전출입 신고자들이 새벽부터 몰려드는 뮌헨 관공서 바로 곁, 침대 없이 바닥에 매트리스만 깔고 지냈던 방, 무엇보다도 유리창이 커다랗고 말할 수 없이 싸늘하던 겨울의 방들, 좁은 뒷문 부엌 층계를 통해 드나들던‘문학의 집’숙소, 그리고 운이 좋았던 어느 일주일 동안은 무성영화시대의 여배우를 연상시키는 아름답고 낡은 호텔에서 살았는데, 그 호텔은‘문학의 집’맞은편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개는 빈약한 난방시설을 가진 고독하고 추운 방들에서 살았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싸늘한 겨울 별자리들이 펼쳐지는 창가의 침대. 나는 깊숙하게 그늘진 차가운 벽 아래서 잠들었고, 침대 속에서, 나에게 돈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우선 좋은 난로를 사겠다,고 한 릴케의 글을 읽었다.

홀바인 거리의 집주인 부부는 나를 자신들의 주말 정원에 초청했다. 집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도시 근교에서 흔히 보이는 잘 구획된 녹지와 숲 언저리가 나오고, 거기에 주말 정원이 있는데, 입구를 통과하자 그곳은 일반적인 모습의 주말 정원이 아니라, 작은 규모의 과수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넓고 나무가 많았으며, 바닥은 기분좋게 기다란 풀들로 덮였고, 꿀빛 햇살이 분화구처럼 고여 있는 정원 한가운데는 긴 통나무 식탁과 의자가 있고, 정원에서 딴 익은 사과가 한 바구니 그득, 조그만 주방과 테라스가 딸린 정원 하우스 외에도 자전거와 원예도구들을 넣어두는 창고가 있는데, 정원에 숭숭 뚫린 수많은 구멍들을 보면서 주인 여자는 두더지들을 없애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남자에게 말했다. 도서전의 막바지, 가을의 한가운데였다. 우리는 두터운 숄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햇빛은 차갑고 환한데다 대기는 맑았으며, 늘 느끼는 거지만 공기의 싸늘함과 태양빛의 따뜻함이 각자의 성격을 분명하게 유지한 채로 혼재하는 독일 전나무의 기후 아래서, 정원의 통나무 식탁에 앉아 뜨겁게 끓인 커피를 마시며, 주인여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집 서재를 정리할 일이 있었어. 갖고 있던 책들 중 일부를 도서관에 기증하게 되었거든. 우리는 그 집에서 벌써 30년 이상이나 살아오고 있는데, 서재의 오래된 책들을 꺼내다보니 구석에서 아주 낡은 상자가 하나 나왔고, 내 것이 분명한 그 상자는 이미 오래전에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듯이 보이는 물건으로, 아마도 지난 십수년 동안 난 그것에 대해서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해. 그 상자 속에는 편지가 가득 들어 있었어. 1960년대에 오빠가 나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주 사이가 좋은 남매간이었어. 나보다 몇년 앞서 집을 떠나 외지에서 대학을 다녔던 내 오빠는, 당시 갓 대학생이 되어 독립해서 살게 된 나를 많이 걱정해주고 돌봐주려고 했어. 우리는 서로 다른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오빠와 나는 주로 편지로 연락하곤 했는데, 사소한 사건이나 일상적인 일들도 모두 편지로 써서 서로에게 알려주었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는 참으로 친밀했어. 그런 시간이 다 지나가버린 지금 나는 우연히 그 옛날의 편지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과거에 미처 몰랐던 미세한 감정들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렸던 것들, 다시 오지 못할 것들,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것들, 잊혀질 것들, 아무도 모를 것들이며, 이제 세상의 다른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릴 일들이 그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시간을 관통하여 내 앞에 하나하나 되살아나는데, 기억은 우리의 유령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우리의 실제의 일부인지, 우리는 언제 몇시에 기차역에 도착할 것이고, 우리는 플랫폼에서 서로를 만나게 되며, 함께 휴가를 보내러 갈 것이고, 혹은 부모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기다리고, 너의 행운을 빈다, 진심으로 나는 너를 위해서 걱정해, 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어, 감기가 빨리 낫기를, 이러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사말들을 나누었는데, 그리고 우리들만이 알고 있는 어린시절의 추억들과 일화들이 편지 사이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그런데 지금 다시 살아 돌아오는 그러한 일상적 말과 장면들은 오랜 시간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발휘되는 어떤 성분들로 충만하고, 그것은 이제 오빠와 내가 일흔을 전후한 나이이며, 우리가 곧 서로에게 보이지 않게 되리라는 것, 어쩌면 그 순간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차분한 예감과 닿아 있는 것도 사실일 텐데, 젊고 다정한 한때의 사람들이 이미 수없이 우리의 눈앞을 지나쳐갔으며, 그들 또한 우리에게 매번 고유하고도 비밀스러운 작별의 몸짓을 보냈을 테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면서, 더없이 소중한 이름을 부르듯이 그 편지들을 들여다보았고, 이제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 그것 또한 우리가 지나쳐온 이 길처럼 아름다울 터이니, 나는 오래된 편지로 인해 다시금 불러일으켜진 그 정체모를 그리움과 아픔이 바로 내가 생의 최후로 간직하게 될 행복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그런 지 얼마 후 오빠의 일흔세번째 생일이었는데, 나는 생일파티에 가서 오빠가 내게 썼던 편지 중의 한통을 읽었어. 종이가 누렇게 변색한 1962년 5월 어느날의 편지, 아마 오빠 자신은 그 편지의 내용을 까맣게 잊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리고 대단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단지 내가 새로 이사간 집에서 몸이 아팠고, 오빠는 다른 도시에서 내 건강을 걱정하는 편지였을 뿐인데, 그 안에는 어떤 절실함의 연계, 고백하지 않는 애정, 더이상 함께 살지 않게 된 젊고 가난한 오누이가 서로를 생각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토록 오랜 시간의 저편에서 다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현재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란 것 때문에, 나는 차마 편지를 끝까지 다 낭독할 수 없었고, 눈물을 닦아내는 오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지. 그날 편지를 읽었던 것을 나는 두고두고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에게 찾아온 소리없이 격렬하면서도 고요한 그 행복감을 오빠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길을 모르고 말았을 테지. 그해의 생일은 오빠가 이 세상에서 맞은 마지막 생일이었고, 당시 이미 암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오빠는 그 얼마 후에 영원한 세상으로 건너가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주인여자는 약간의 사이를 두고 남편을 향해 덧붙였다. 여보, 우리는 정원의 두더지들을 없애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그러고도 우리는 한동안 더 정원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은 채 조용히 사과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정원의 나무에서 직접 딴 사과는 황금색과 붉은색이 섞여 있었고 표면이 매끄럽지는 않았으나 단단하면서 맛이 좋았다. 우리는 웃었고, 햇빛과 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있었으며, 각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 도시의 특산품인 사과주를 칭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여행가방은 주인 부부의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 있었고, 나는 곧장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주인여자에게 내가 지난밤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연히도 그 꿈속에는 우리가 서로 잘 알고 지냈던 한 사람, 내게 홀바인 거리의 부부를 소개해주었고 그래서 도서전이 열리는 그 한주 동안 그들의 집에 머물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인 모형비행기 수집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인 강변 이쪽과 저쪽을 산책하고 있었다. 저녁인지 아침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추운 날이라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강의 폭만큼 떨어져서 걸으면서 각자 다리 아래를 지났고, 내가 고개를 들자 다리를 지지하는 콘크리트 받침대의 틈새에 커다란 거미줄이 커튼처럼 길게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저것이 이제 앞으로 내가 살게 될 새로운 내 집인가. 쇠와 거미줄의 빛깔인 강은 천천히 흘렀다. 나는 강 반대편을 걷고 있는 모형비행기 수집가에게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홀바인 거리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 말은 소리가 없었으나, 나는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강 건너편의 모형비행기 수집가가 듣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나는 반대편 강변에 있는, 검은색 베이스캡을 썼으며 트렌치코트의 깃 속으로 고개를 비정상적으로 깊이 파묻은 채 걷고 있는 그 사람이 모형비행기 수집가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잠든 것 같은 모습으로 움직임 없이 걸었다. 그는 형체도 없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참으로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곳은 이상하다고. 당신과 함께한 모든 장소는 나에게 이상하다고. 이질적인 공기와 흙, 고여 있는 바람과 평평한 하늘과 허공에서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새, 그리고 살갗을 감싸며 흐르는 기묘한 따스함까지 모두가 이상할 뿐이라고. 나를 구성하는 이 외부의 물과 그림이 낯설다고. 이 독특한 비현실성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것이 곧 내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가 까닭을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이어서 그 이유도 설명했다. 나는 무종의 탑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 이름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 탑을 눈앞에 본 다음에도 그런 탑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무종이라는 이름의 탑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으며, 당신이 마치 추락하는 비행기의 조종사가 무전기에 대고 외치듯, 무종의 탑, 무종의 탑으로, 하고 절규하다시피 말하고 있을 때조차도 줄곧 나는 그것이 탑이 아니라 프랑스의 어느 시골에 있는 작은 지역박물관 이름을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 말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던 것은, 이 모든 장면이 단지 꿈속을 지나가는 그림자이며, 우리가 간직한 모든 비현실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의 통증이나 부자유 또한, 실제의 우리를 전혀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를 가장 훌륭하게 꿈꾸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통증이나 부자유일 것이므로 그것에 저항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사실상 어느날 이후부터인가 나는 항상 내가 역사나 이야기의 외부인이자 기록되지 않는 바보 광대라고 느꼈으므로. 그러나 설명하는 중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다른 기억들이 흘러갔는데, 어느날 약국 진열대에 전시된 화장품 중에서 무종강력수분크림이란 것을 발견한 적이 있고, 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는데, 그것을 본 순간 어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인하여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진열장에 가까이 다가가 튜브에 든 길죽한 모양의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았으며, 무종 회사가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도 그런 이름의 크림이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그날 듣지 못했으므로, 그 순간 복고풍의 곱슬머리의 모델이 천사처럼 미소짓고 있는 광고판 아래, 당신의 피부는 절대 피곤하게 보여서는 안됩니다,라고 적힌 옛날의 문구는 마치 나를 역사박물관의 1950년대 방으로 데리고 온 것 같았다고,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한 모형비행기 수집가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강 위쪽 도로를 달려갔으나, 늘 그렇듯이 강물이 검은 기름의 눈동자를 번득이는 것은 철제 난간과 흉한 화단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고. 택시를 타고 박물관에 도착한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이미 어느정도 불안해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내가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대뜸 무종의 탑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알지 못했다고. 나는 바닥을 살짝 디디면서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가볍게 허공으로 뛰어올랐는데, 내 구두는 흰빛이었고, 지상은 온통 희박한 어둠과 연기로 덮여 나는 내 구두를 볼 수 없었지만, 내 몸이 땅에서 항상 반뼘 정도 위로 들려 있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을 본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코트 속에 깊숙이 파묻힌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이미 깊이 잠든 얼굴로 소리없이 말했는데, 나는 그의 동공과 혀를 어느 순간 이후부터 단 한번도 볼 수가 없었으므로, 그 말은 그의 꿈의 세계에서 내 꿈의 내부를 향해 울리는 것 같았으며, 투명한 벽들을 관통하여 마음속에 자리잡는, 마치 “마치 새처럼,” 하는 두 마디의 어휘처럼, 그렇게 들렸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