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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연수

김연수 金衍洙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스무살』『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장편소설『꾿빠이, 이상』『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밤은 노래한다』등이 있음. larvatus@netian.com

 

 

장편연재 3

바다 쪽으로 세 걸음

 

 

13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밤의 칠정(七情)을 알게 됐으므로. 칠정이란 기쁨, 성냄, 근심, 깊은 생각, 슬픔, 놀람, 두려움으로 이뤄져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가 알던 밤의 감정은 오직 두려움뿐이었다. 나는 밤의 기쁨이나 성냄, 혹은 밤의 근심이나 슬픔 따위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 목에서 피를 흘리는 형을 안은 시오를 따라 달려가노라니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귀신들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귀신들은 하나같이 충신이거나 효자거나 열녀거나 절부인 것처럼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채 구멍이란 구멍으로는 죄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귀신들과 눈이 마주친 내가 그 자리에 멈춰서 한걸음도 떼지 못하자, 앞쪽 어둠속에서 시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한번 더 나를 채근했다. 형을 어깨에 둘러멘 시오가 내 쪽으로 와서 피 묻은 손으로 내 뺨을 후려치고 난 뒤에야 내 말문이 막혔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왼뺨에 피가 묻고 비린내가 풍기자, 귀신들은 아래턱을 움직이며 소리없이 웃더라. 죽은 듯이 시오의 어깨에 늘어져 있던 형과 마찬가지로 나도 곧 삼강의 세계로 들어올 사람처럼 보였던 게지.

귀신은 우리가 찾아간 명례방 곽의원의 집에도 붙어 있었다. 거기 바람벽에는 군기시 앞에서 팔다리가 잘려나간 노란 초립의 사내가 고독한 표정으로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떨어져나간 목은 다시 붙였으되 팔다리만은 너무 먼 지방으로 내려가 여태 찾지 못했는지 그저 상체뿐이었다. 그런 몰골로 그는 “왕후장상에 영유종호리오까?”“왕후장상에 영유종호리오까?” 그 말만 되뇌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피부를 채 갖추지 못해 내장이며 핏줄이며 힘줄 따위가 다 비치는 그 투명한 몸속이 햇살 아래 꿈틀대는 잉어의 비늘처럼 영롱한 빛을 뿜으며 아래위로 울렁거렸다. 그때부터 속이 메스껍기 시작했는데, 그게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식이던 솔잎노인의 학풍이 사후세계까지 이어지는 걸 확인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에게 피부가 필요한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기 때문인지는 나로서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내가 덜덜덜 떨면서 그 사내를 가리키자, 형의 목에 난 상처를 살펴보던 곽의원이 그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법 잘 그렸지? 개중에는 배꼽이 너무 툭 튀어나왔다고 말하는 작자들도 있지만, 사상과 오행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의 잠꼬대 같은 소리지. 원래대로 그리자면 저거보다도 훨씬 더 둥글게 그려야만 하는 거야. 뭣도 모르는 상놈들이야 항상 뱃가죽이 등짝에 들러붙어 있으니 오장(五臟)이 오행(五行)을 따른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저 같은 줄 아는 거지. 염병에 걸려서 당장 북망산 가는 날이 오늘내일 해봐야 내 말이 귓구멍에 가서 걸릴까 말까. 끄끄끄.”

자수성가한 내력 그대로 매사에 남 깔보기를 좋아하는 곽의원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그친 뒤에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건 죽은 초립의 사내가 아니라 사람의 뱃속에 든 내장과 척추 따위를 그린 해부도였다. 효자는 되고 싶으나 차마 자기 살을 벨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곽의원을 소개해주고 싶다. 오행의 섭리로 최소한 병신이 되어야만 나온다는 의금부의 친국청(親鞫廳)에서도 살아나온 사람이니 그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라는 데 나는 은화 3백냥을 걸 수 있다. 그 방 역시 임금이 직접 심문한다는 공포의 친국청과 다르지 않았다. 죽은 듯이 창백한 얼굴로 누운 형의 옆에는 곳곳에 검은 먹으로 혈을 표시해놓은, 갓난아기만한 크기의 나무인형이 나란히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속출한다면 반드시 빛을 발할 게 분명한 날카로운 작두가, 구석 책상에는 크기별로 줄을 세워서 꽂아놓은 침들이,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면 들보에는 내장만 빼고 그대로 말려 시커멓게 변해버린 두꺼비와 지네와 검은 뱀이 매달려 외풍이 들 때마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의 뼈를 잘 말린 뒤에 숯으로 만들어 겨우내 화로에 태우면서 한기를 덜었던 방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방에 배었을 고린내 같은 게 가득했다. 가히 턱이 없어서 항상 웃는 듯한 표정의 백골들이나 동트기 전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에 들렀다 갈 만한 방이었다고나 할까.

“제기랄, 병 두번 걸렸다가는 네놈 손에 제명을 채우기 어렵겠다. 저게 침이냐, 칼이냐? 저렇게 굵은 놈으로 환부를 쑤셔댄다니 병은 둘째치고라도 살아남을 몸이 어디 있겠누? 필시 저 그림도 직접 배를 갈라보고 나서 그린 것이겠지?”

시오가 곽의원에게 어쩐지 무람없이 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원스레 쏘았다.

“몇년 만에 변성명해서 나타난 이 미친놈의 자식이 무얼 믿고 의원님께 환부 운운하는 것일까? 네 마누라마저도 네놈이 갑동이가 맞는지 의심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던데, 지금 어디 한번 배를 째볼까? 지금도 간뎅이가 부었는지 안 부었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게지. 끄끄끄.”

“사람 백정 겉은 끔찍한 소리는 여전히 잘하는구나. 죽인다 죽인다 해도 예전에는 빈말이더니만 이제 칼과 침까지 구비했으니 내뱉는 말마다 사생결단이 나겠구나.”

“남만놈과 붙어먹은 이 종놈의 자식이 지금 해동의 편작더러 사람 백정이라고 말했나?”

곽의원이 딱히 내게 묻는 것도 아니면서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바라보면서 말했다. 꼭 내게 동의를 구하는 것 같아서 나는 “해동의 편작이나마나 저 형한테는 곶감 하나만도 못해요”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저 어버버버,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뿐. 곽의원은 너라도 입을 다물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보아하니 이 도련님은 피를 많이 흘렸는데, 사람 백정이 무슨 방법이 있어서 살릴 수 있겠나? 난 못하겠네.”

곽의원이 진맥을 보던 손을 내려놓고 돌아앉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시오가 당황한 듯, 얼른 말을 바꿨다.

“사람 백정이라는 말은 취소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본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제대로 나오지 못해서 입 모양이 험하네. 그래서 내뱉는 말도 생김새가 안 좋아.”

“종놈이 의원님한테 반토막으로 말하는 것도 어머니 해산 핑계를 대려면 대려무나. 내가 무슨 해동의 편작이라고 다 죽은 사람을 살리겠나?”

“그래, 그래, 아니, 그러겠습니다. 내가 사과할 테니, 어서 좀……”

“입 모양은 험하게 생겨도 피리구멍에는 둘도 없이 딱 맞는다고 생각하겠지?”

곽의원이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시오에게 물었다.

“여보, 시오. 여보시오. 아무튼 이름이 이상해. 난 원래대로 갑동이라고 부르겠네. 갑동이, 나는 말이야 소원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편작의 침술을 구사한 명의가 아니라 피리소리로 귀신을 감동시킨 해동의 환이(桓伊)로 누대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야. 뭔 말인지 알겠나?”

시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떤가?”

곽의원이 재차 물었다.

“빌어먹을, 제기랄, 염병할. 딴 건 몰라도 피리만은 내가…… 에라이,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라, 아니, 하시오. 해동의 환이가 되든지, 해동의 환장이 되든지. 대신 이 도련님만은 꼭 살려내라.”

그러자 곽의원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암, 진작에 그랬어야지. 어디 보자. 분노와 슬픔이 서로 얽히고설키면 그 고르지 못한 기가 위로 솟구쳐 후두를 막아 하루가 지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사흘이 지나면 목구멍에 솜뭉치가 들어찬 것처럼 숨이 차고, 아흐레가 되면 음양이 다 끊어져 절명하게 되니 족소음경맥(足少陰經脈)에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내보내는 게 급선무인데, 이거 어쩌지? 이 도련님은 스스로 나쁜 피를 빼냈으니 더이상 내가 손볼 일이 없다네. 이대로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니 내가 더 할 일이 없네. 다만 그리하여 몸은 살게 됐으나 마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마음 살리는 비방이 차차 필요할 것이네. 일단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급한 불은 꺼놓았으니, 보혈약은 차차 짓기로 하고. 우선은 저기 저 아기 도령의 막힌 후두부터 뚫어야만 할 것이야.”

그렇게 말하고 곽의원은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침들을 하나하나 꺼내 등잔불에 비춰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침 같은 건 맞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어버버버라는 소리뿐이었고, 그 소리에 곽의원은 더더욱 침을 놓아서 실어 증세를 고쳐야만 하겠다고 말했다. 손을 내저으며 무릎으로 뒷걸음치는 내 몸을 시오가 꽉 붙들었다. 곽의원이 선택한 침은 도낏자루로 쓸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나는 내 몸이 여섯 조각으로 잘리는 광경을 상상했다. 군기시 앞에서 그 처형 장면을 볼 때처럼, 나는 글을 아무리 배워도 역모 같은 건 절대로 꾀하지 않을 테니, 정말 착하고 순한 완으로 살아갈 테니 한번만 살려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눈에는 한번에 싹둑 잘라내면 좋으련만 술에 취한 망나니가 제멋대로 휘두른 칼에 반쯤만 잘린 채 너덜너덜해진 내 목의 살이며 핏줄이며 뼈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생각할 즈음, 마침내 곽의원이 침으로 내 목을 찔렀고, 목구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더니 입에서 검고 끈적끈적한 핏덩어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물인 듯 장판지 위에 떨어져서는 조금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그 핏덩어리에서 핏물이 번졌다.

“이 아이의 목숨은 일단 구하게 된 것이네.”

곽의원이 말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웃기 시작한 것이다. 아래턱이 떨어져나간 귀신들처럼. 하하하하. 곽의원과 시오가 미친 듯이 소리내어 웃어대는 나를 어쩌지 못하고 빤히 쳐다봤다. 남들보다 두배나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 나는 80대 노인보다도 더 늙어버렸다. 그래서 옛일을 생각하면 기억이 아득해 그게 진짜 일어난 일인지 망상 속에서 내가 지어낸 얘기인지 헷갈릴 때가 많지만, 이 사실만은 분명하다. 곽의원에게 침을 잘못 맞은 뒤로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 즐거울 때도 웃었지만, 슬플 때도 웃었다. 나중에 형은 내가 폭소를 터뜨릴 때면 그게 좋아서 그런 것인지 슬퍼서 그런 것인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렇게 자꾸 울어야 할 때 웃게 되면, 나중에는 나 자신마저 헷갈리게 된다. 과연 나는 지금 기뻐하는 것인가, 슬퍼하는 것인가.

그러니 웃다 지쳐 잠든 내가 이런 꿈을 꾸게 됐다면 아버지는 기뻐했을까? 아마도 기뻐했을 것 같다. 그 꿈속에서 뻘건 빛으로 물든 얼굴로 크게 웃은 것으로 봐서는. 그건 사대부의 어엿한 자제나 꿀 수 있는 꿈이 분명했다. 그 꿈이라는 건 한장의 목판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선들이 흐릿하고, 그림 속의 얼굴은 자세하지 않아서 장담할 수 없었는데도, 나는 그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이 나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림 속에서 네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내 모습은 칼로 목판을 깎아내어 만든 선으로 남았다. 첫번째. 맨 아래 오른쪽에서 그림 인간이 된 나는 충신인 아버지가 역적의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자, 의금부 바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두번째. 그 그림 인간은 대각선 왼쪽 위의 여백으로 올라가 이번에는 차가운 얼음 위에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패도를 높이 치켜들고 제 목을 찌른다. 세번째. 목에 칼자국이 난 채로 어진 임금께서 그 효성을 높이 사서 내린 정표(旌表)를 받기 위해 약간 위쪽으로 걸어간다. 네번째. 여전히 목에 구멍이 난 나는 마지막으로 맨 위쪽으로 움직여 옥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를 위해서 잔치를 베푼다. 그렇게 그림 인간이 된 내가 한번 자세를 잡을 때마다 그림 속에 그 흔적이 남아 오른쪽 아래에서 점차 위쪽으로 보면 이야기의 순서를 알게 된다. 이로써 완은 『삼강행실도』에 효자로 오르게 됐으니, 어찌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효자 완의 상처라고는 목에 난 칼 구멍뿐이라는 사실(그림에서는 피 한방울도 튀지 않았다)이 좀 불안했다. 할머니가 누누이 말했다시피 효행의 길은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자해의 길이 아니었던가? 『삼강행실도』에 오른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왕무자(王武子)의 아내는 병든 시어머니를 위해 다릿살을 베고, 석진(石珍)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 그런 (효행에) 미친 인간들이 모범사례로 등장하는 마당에 그 정도 자해로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우리 어진 임금께서 선뜻 정표를 내린다는 게 좀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맨 위쪽 마지막 그림에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잔칫상에 올라간 그릇마다 피가 고여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보게 된 그림의 제목은‘허완혈연(許宛血宴)’이었다. 아아아, 그건 마르내 허완이 억울하게 죽은 부모님과 할머니를 위해서 피의 잔치를 벌이는 그림이었다. 그때, 잔칫상 뒤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섰다. 꿈속의 목판제작자는 이 부분에 공을 들였는지 그분들의 무릎에 박힌 사기조각과 골절되어 흐느적거리는 팔다리가 선명하게 묘사돼 있었다. 피투성이 몸으로 서서 그분들은 맛난 음식을 먹어서 참 기쁘다는 듯이 하하하 호호호 웃으시고는 그림 속 완에게 손을 흔들더니 몸을 돌려 그림 바깥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림 속 완은 그분들을 만류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원래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상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먼 길을 간다면, 아버지나 할머니는 몰라도 어머니라면 한번쯤 다시 돌아와 완을 안아줄 텐데, 절대 매정하게 돌아서서 한번에 떠나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이상해, 이상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동안, 그분들은 모두 그림 속에서 빠져나가고 네명의 완과 휘장 속의 어진 임금만 남게 됐다. 네명의 완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고, 어진 임금은 난감하다는 듯이 부채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영영 이별이었다.

그로부터 몇달 뒤, 우리 형제가 거지꼴이 되어서 전국을 헤매고 다닐 때, 우연히 무슨 말인가를 나누다가 그날 형도 나와 똑같은 내용의 꿈을 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목판화 속의 그림 인간들이었지만, 형은 행장(行狀) 속의 문자들이었다. 내 꿈에서와는 달리 아버지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몸으로 형의 꿈에 나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붓에 핏물을 적셔서 종이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붓은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아버지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어 하얀 종이는 금세 붉은 글자로 가득 찼다. 아버지는 그 글을 형에게 읽어줬다고 한다. 글의 주인공은 한 남자였다. 아버지는 그 남자의 이름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의 조상은 어떤 자들이며, 그는 몇년에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등을 중얼중얼 되뇌었다고 한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이 꿈의 핵심은 아버지도 이제 솔잎노인과 같은 반열에 올라 아직 살아 있는 그자가 몇년에 죽게 되는지도 예언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형은 그걸 예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은 그걸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형의 꿈에도 제목을 붙일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허규혈맹(許揆血盟)’이 될 듯하다. 손을 흔들며 멀리 떠나는 부모님을 보면서 형은 뭔가를 계속 맹세했다. 그날 형이 꾸었다는 그 꿈, 나중에 내가 형을 비난할 때 제일 먼저 거론해 형의 마음을 발기발기 찢어버린 그 꿈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꿈속에서 형이 한 맹세에 대해서는 며칠 뒤 바로 듣게 됐다.

 

 

14

 

곽의원은 형의 목에 난 자상 부위에 쥐의 뇌를 바른 뒤, 그 위를 절인 물고기의 부레로 덮어 피를 멎게 만들었다. 그리고 들보에 매달아둔 말린 두꺼비를 내려 기와 두장 사이에 끼워넣은 뒤 불에 달궜다. 엄동설한인데도 두꺼비를 태우는 곽의원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내가 옆에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자, 곽의원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런 걸 어떻게 먹겠느냐고 말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이 녀석아, 조물주가 내신 이 세상 만물 중에 쓰지 못할 게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 모두 쓸 데가 있는 것이라면 약 아닌 건 또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그런 소리가 나와? 심지어 사람의 오줌과 똥도 다 약에 쓴다. 오줌은 기침을 그치게 하고 심폐를 좋게 해주며 눈을 밝게 하지. 똥은 말려서 쓰면 미쳐서 날뛰는 사람을 진정시키는 데 즉효고. 두꺼비 태워서 먹는 건 우리 의원들 사이에서는 산해진미에 속한다.”

“우리 형은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부모님과 할머니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형이 미쳐서 날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랄까. 제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형은 그 잿물을 하루에 세번씩 받아마셨다. 하지만 워낙 솔잎 같은 형편없는 음식으로 단련된 몸이라서 그런지 두꺼비 태운 잿물로도 형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과연 곽의원이 언제 똥을 말릴 것인가 궁금했다. 아마도 그때 형은 이 세상을 잠시 떠나 있었던 것 같다. 몸만 이 세상에 두고 정신은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가 있었던 게다. 그것도 너무 오래 가 있었던 게다. 그 뒤로 아홉 겹의 마음 중, 그 제일 안쪽에 있는 형의 마음은 영영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이 세상으로. 초희와 형과 내가 함께 올려다보던, 구월 초이튿날의 자미성 아래,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으로. 그렇게 해서 형의 마음 가장 깊은 부분은 텅 비어 있게 됐다. 형의 정신이 좀체 돌아오지 않자 당황한 곽의원은 오음(五音)으로 치료하면 된다며 한밤중에 피리를 불거나(그 피리소리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마저 정신을 잃게 만들 정도로 지루했다) 귀신으로 인해 생긴 병이니 명매기〔胡燕〕의 똥을 먹으면 된다며(드디어 사람의 똥을 먹기 직전 단계까지 도달한 것이다) 정월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제비집 속을 뒤졌지만,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대감들(주로 종기로 고생한)과도 말을 터놓고 지낸다는 곽의원이 뒷배를 봐준 덕분에 시오는 전옥서(典獄暑)에서 부모님과 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해 광희문 바깥 어느 염장이 집에 모셔놓았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곽의원은 마지막 수단으로 가슴에 맺힌 울혈을 없애는 약인 도체산(導滯散)을 짓기로 했다.

“그게 왜 마지막 수단인가요?”

그 말을 듣고 내가 곽의원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 그, 그게 나는 원래 개나 소나 다 생각할 수 있는 처방은 안, 안, 안하기 때문이다. 나, 나,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병을 고치고 싶은 것뿐이다. 하, 하, 하지만 한번쯤은 남들처럼 약을 지어도 괜찮겠지.”

당황하니까 곽의원은 말을 더듬거렸다.

“마지막 수단은 똥 아니었나요?”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곽의원 앞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미쳐서 날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니까. 처음부터 도체산을 지었으면 됐을 텐데, 그 알량한 자존심이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도체산에 들어가는 약재 중 사향을 구할 길이 없어서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동평관에 머무는 일본 사신들이 중국 운남성에서 나온 사향의 판로를 알아보고 있다는 소문을 시오가 듣고 왔다. 사향을 구하기 위해 시오와 함께 동평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 자존심 강해 대감이든 영감이든 예사로 반말을 쓰는 곽의원이 사실은 천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치 거머리처럼 사정없이 피고름을 잡아빼는 속칭 곽머리 침술은 모르겠으나 피리 부는 일만은 곽가보다 자신이 윗길이라는 말을 떠들어대던 끝에 시오가 들려준 이야기 덕분이었다. 곽의원과 시오가 서로의 피리 실력에 그토록 민감한 이유도 그때 들었다.

곽의원의 아버지는 본래 충주의 관노로 피리를 잘 부는 통에 장악원(掌樂院)에까지 들어가게 된, 보기 드문 악공이었다. 어머니는 정승집 사비였으므로 곽의원도 신분상 시오와 별다를 바 없는 사노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출세하면서 식구들이 모두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른살이 되어 그 아버지가 종기로 앉아 있지도 못할 형편이 되자, 10년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아버지의 병든 몸을 상대로 고래(古來)의 침술을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게 환부를 침봉으로 절개해 피고름을 다량으로 뽑아내면 종기의 뿌리를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그 방법을 알아내기 전에 죽었는데, 소문에 따르면 종기로 죽은 게 아니라 급기야 종기를 만악의 근원으로 생각하게 된 아들이 종기와 함께 생살을 모두 도려내는 통에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죽었다고 한다. 나쁜 소문일 뿐 사실일 리는 없겠지만, 그 소문은 곽의원의 이름을 팔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삼강행실도』의 목판화들에 묘사된 이야기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그 나라에서, 제 살이 아니라 병든 아비의 생살을 잘랐다면 그게 비록 소문일지라도 곽의원은 종묘사직의 근본을 파괴하는 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죽은 뒤 그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건, 양반들에게 종기란 그처럼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문에서도 암시되다시피 곽의원의 미덕이라면 차라리 제 손으로 환자를 죽일지언정 환자가 병으로 죽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무서운 집념이었다. 본디 미덕이란 뒤집으면 악덕이 되는 법 아닌가. 병에 대한 그런 오만한 태도는 치병을 통해 모은 돈으로 화려한 옷감과 값비싼 물품을 사들여 자신의 출신을 치장하려는 욕망으로 해소됐다. 사람들은 그가 화려한 빛깔의 중치막에다 몽고산 담비털 외투를 입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뒤에서 수군거리곤 했다.

도성 안에 그런 곽의원을 깔볼 수 있는 단 한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린 시절 장악원을 들락거리며 곽의원과 함께 그의 아버지에게서 피리를 배운, 그때만 해도 이름이 갑동이였던 불알친구 시오였다. 두 사람은 평생에 걸쳐서 자기가 더 피리를 잘 분다고 서로 우겼는데, 그래 봐야 종기가 나면 그 부위가 어디든 꼼짝없이 곽의원에게 까보여야 하는 시오 쪽이 좀 불리했다. 그렇게 되면 약점을 잡은 곽의원이 종기를 볼모로 자신의 피리 실력이 더 낫다는 걸 인정하라고 다그칠 게 분명했으니 시오는 늘 종기를 두려워하며 살았다. 그런 평생의 노력이 우리 형제 때문에 허사로 돌아가게 됐으니 시오가 내게 피리만은 자신이 곽의원보다 윗길이라고 말하고 또 말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의 피리소리를 모두 들어본 바에 따르면, 곽의원은 오행을 너무 숭상해 피리마저도 오음의 조화를 강조했고, 시오는 자기 마음의 행로를 따라, 때로는 오음에서 벗어날 듯 벗어날 듯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아무래도 시오 쪽의 피리소리가 사람의 애간장을 더 녹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말로는 절대 지지 않으려는 게 그때까지도 끈끈하게 이어지던 오랜 우정의 습관이었고, 그 우정에 아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외국에서 들여오는 진귀한 약재와 상품 들이었다. 일찍이 풍랑을 만나 남쪽 바다를 표류해 타국을 떠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시오는 나라에서 외국인과의 사사로운 무역을 엄격하게 금했음에도 원하는 외국산 물품을 척척 구해오는 재주를 지녔으니까. 약재도 약재이거니와 외국의 진귀한 물건들은 곽의원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고 싶은 것이었다.

도주(島主)의 아들과 함께 몇달째 동평관에 머물고 있던 대마도의 하급관리들은 시오가 가져간 인삼에는 큰 관심을 보였지만, 사향은 애당초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소문만 믿고 동평관 출입을 통제하는 남부의 관리들에게 상당한 양의 인삼을 바치고 난 뒤 겨우 들어가게 된 동평관이었던지라 그들의 대답에 시오가 여간 실망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시오가 인삼을 싼 보자기를 접으려고 하자, 사향은 아니지만 교역할 물건들은 많으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시오는 눈썹을 시옷자로 만들고 사향이 아니면 안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대마도 사람들이 그를 놓아줄 리 만무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말로만 재보다가 흥정을 깨는 것도 아니고 제 발로 동평관 경내까지 들어온 조선 인삼을 그냥 돌려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시오는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자기 인삼도 아닌데다가 필요한 건 사향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시오는 쉽게 보자기를 접지 못했다. 오랜 장사 경험으로 시오의 망설임을 간파한 대마도 사람들은 시오의 소매 끝을 잡아챘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주고받는 그 말들이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서로 대화하면서 시오는 조선말로, 대마도 사람들은 일본말로 말했다. 그때만 해도 어떻게 서로 그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지 않았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싶으면 시오는 일본말로, 대마도 사람들은 조선말로 얘기했다. 놀라운 일은 그때 일어났다. 말이 바뀌는 순간, 사람들의 얼굴도 바뀌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면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인삼과 바꾸겠다며 여러가지 진귀한 물품들을 마루에 꺼내놓았다.

“우린 운이 좋습니다요. 사향보다 더 좋은 약을 구했습니다.”

내놓은 물건들을 훑어보던 시오가 오른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내 쪽을 향해 나지막이 말한 뒤, 한쪽 눈을 찡끗 감았다. 시오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저건 포도아(葡萄牙, 그 괴상한 발음은 정말 괴상한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에서 만든 유리병, 이건 유구의 물소 가죽으로 만든 손가방, 저건 여행자들을 위한 휴대용 등잔, 이건 마찬가지로 여행하는 부녀자들을 위한 거울이 달린 간이경대…… 시오는 고향의 특산품들을 설명하듯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내게 설명했다. 그 외국의 물품들은 남해를 떠돌아다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모양이었다.

“다 사치스러운 것들일 뿐, 요긴한 물건은 하나도 없소.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우리 조선인들한테 이런 사치품이 다 무슨 소용이겠소? 멀리 가다가 불이 필요하면 눈에 불을 켜고 걸으면 될 것이요, 부녀자 따위야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족하지, 무슨 여행이란 말이오. 다 필요 없소. 조선 인삼만한 게 없소.”

시오는 침을 뱉어 손을 탁탁 털고는 과장되게 보자기의 양쪽 끝을 잡았다. 그러자 대마도 사람이 말린 잎을 가리켰다.

“조선인들도 이건 좋아할 거야.”

시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흉년이나 풍년이나 조선 사람들 만날 먹는 게 풀이라서 그렇게 맛이 고약한 잎은 안 먹소.”

시오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때 우리 뒤쪽에서 중문 사이로 누군가 고함을 지르며 걸어왔다. 돌아보니 회색 하까마에 푸른색 하오리를 걸친 젊은 일본인이 칼을 찬 무사 두명을 거느리고 객사 마루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루에 있던 대마도 사람들이 모두 내려와 예를 표했다. 시오도 그를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그 젊은 남자는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단 한사람, 그러니까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옆에 선 시오가 “이번에 부사로 온, 도주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내게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도 그를 빤히 쳐다봤다. 시오는 내게도 절을 하라고 손시늉했지만, 그가 나를 그렇게 쳐다본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쳐다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도주의 아들이라면, 나는 충신의 아들이니까. 그것도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그는 시선을 시오에게 옮기더니 무슨 질문인가를 던졌다. 시오는 일본말로 오랫동안 대답했다. 시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도주의 아들은 뭐라고 소리쳤고, 그 말에 대마도 사람들이 복명했다. 다시 객사를 나서기 전,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내게 내밀었다. 그가 처음 나타났을 때, 내 눈에는 그 염주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었다. 겨울 햇살을 받아 그 염주 끝에서 뭔가가 반짝 빛났었다.

“도련님께 드리는 선물이랍니다. 받으세요.”

나는 도주의 아들을 한번 쳐다본 뒤, 내미는 염주를 받아들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더 하고 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시오는 인삼을 주고, 포도아제 유리병과 유구제 손가방을 챙겼다. 필요없다던 그 잎은 덤으로 받아 유리병 안에 넣었다.

“저 사람이 뭐라고 한 거냐?”

등짐을 메고 걸어가는 시오에게 내가 물었다.

“형님을 살리고 싶으면 그걸 손에 쥐고 열심히 기도하랍니다.”

“이 염주를?”

“그건 염주가 아니라 로싸리오입니다. 왜 거기 십자가가 달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모님한테 기도하라는 뜻이죠.”

입을 씰룩거리며 시오가 말했다.

“성모님이 뭐야?”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몰라서 내가 물었다. 시오는 방금 빠져나온 동평관 입구에 서 있는 포졸들을 힐끔 돌아본 뒤, 재빠르게 오른손을 놀려 머리와 가슴과 양쪽 어깨를 차례로 짚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야소(耶蘇)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님이죠.”

“일본말로 하지 말고 조선말로 얘기해.”

“지금 조선말로 얘기하고 있잖아요. 야소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님.”

 

 

15

 

형은 지금도 인정하기 싫겠지만, 내가 키리시딴이 된 건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경인년 정월 초아흐레의 일이었다. 형보다 내가 먼저라는 얘기다. 어릴 때 배운 대로 실천했다면, 그때 우리는 이미 죽어서 영계를 떠돌고 있어야만 했다. 쥐의 뇌와 절인 물고기의 부레와 말린 두꺼비가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형은 죽었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곽의원에게 받은 도움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다. 오히려 곽의원의 멍청한 침 덕분에 나는 평생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됐을 뿐이다. 뭐, 그 뒤로 내가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 덕분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우겨도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그때 곽의원의 침술은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신에 그 로싸리오와 십자가와, 더 중요하게는 도무지 조선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던‘야소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님’같은 시오의 말들이 나를 살렸다. 들판의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대양을 건너온 제비들의 지저귐 같은, 나로서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렇지만 분명히 위로가 됐던 그 말들. 계속 이어지던 이런 말들.

“아기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이외다. 저 높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굳이 이런 세상에, 그것도 목수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느냐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하도 구슬피 울어댔기 때문이랍니다. 힘이 있다고 멀쩡한 사람들을 태워서 죽이고, 때려서 죽이고, 찔러서 죽이니 이 세상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러니 남은 사람들이 밤낮없이 또 얼마나 울겠습니까? 사람들이 울어대거나 말거나 우리 나랏님들처럼 귓구멍에 말뚝을 박아놓고 살면 될 텐데, 그 울음소리가 불쌍해서 하늘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분이 땅에서는 제일 낮은 곳에서 태어났단 말이우. 우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죽음은 모든 일의 끝이 아니며 우리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고. 지금 영영 헤어지는 것 같겠지만, 언젠가는 모두 다시 만나게 된다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어쩌다 여기 말라카까지 오는 조선인들은 모두 노예들이고, 또 하나같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조선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서로 살아온 내력을 말하고 또 들었다. 하지만 먼저 공작과 조총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로싸리오가 들어왔다고 얘기하면 대부분 성호를 그으면서도 그때부터 나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조선에 십자가가 들어왔다는 내 말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두 손을 펼쳐서 그들에게 보여준다. 텅 빈 두 개의 손바닥. 이런 곳에서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육친에 가까운 정을 느끼지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게 되지만, 우린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두 손을 펼쳐서 그들에게 보여주는 그 깊은 밤에도 나는 발목에 작은 칼을 차고 있다. 그들의 인생사는 비슷하다. 제일 먼저 포로가 됐다가 그 다음에는 노예가 된다. 삼단논법처럼 마지막은 언제나 키리시딴이 되는 일이다. 그런 순서를 밟은 사람들은 그게 누구든 사람의 말을 절대로 믿지 못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피차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다.

내게 그 누구의 말도 믿지 말라고 제일 먼저 가르친 사람은 최생원이었다. 형이 정신을 차리는 대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므로 동평관에서 나온 우리는 땔감을 사서 마르내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땔감을 사면서 술도 한잔 걸쳤으므로 시오의 입에서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마르내 초입에 이르러 우리는 최생원을 만났다. 그의 얼굴은 길바닥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마르내 집에는 지금 의금부에서 나온 도사(都司)와 나장(羅將) 들이 우리 형제를 잡아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으니 절대로 가면 안된다는 그의 말들도 입에서 나오는 순간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버렸다. 귀에 들어온 그 말들이 다시 녹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 뜻을 이해했다. 역모사건을 계기로 다시 왕의 신임을 얻어 우의정에 오른 그 사람이 장차 화근이 되리라 생각하고 우리 형제마저 죽이려 한다는 걸. 그는 내 손을 잡고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 초동 쪽으로 걸어갔다. 등짐을 짊어진 시오가 뒤뚱거리며 우리 뒤를 따랐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느냐? 네 형은 어디로 갔느냐? 전옥서에도 다녀왔다. 부모님의 시신은 누가 수습해간 것이냐? 인수문서에는 너희 이름은 보이지 않고, 해동환이시오(海東桓伊是烏)라는 괴상한 이름만 적혀 있더라. 어떻게 된 것이, 대역사건을 다루는 관가의 일이 그처럼 주먹구구로 처리됐다.”

최생원은 질문을 쏟아냈지만, 한때 솔잎노인의 제자로 함께 공부했다는 그 사람이 동문 후배를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아들들까지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내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가족을 몰살하려는 이유가 단지‘왕후장상에 영유종호아’라는 그 말 때문이라니.

“형은 지금 두꺼비 태운 재를 먹고 있어요. 그래야 낫는대요. 자기 목을 스스로 찔렀거든요.”

“자기 목을 스스로 찔렀다고? 네 형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생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형의 정신이 돌아오려면 사향이 필요한데, 그걸 구하러 동평관까지 갔다가 구경도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에요.”

“지금 형은 어디에 있느냐?”

“명례방 곽의원 집에 있어요. 그런데 정말 우리를 죽일 작정인가요?”

“누가? 내가?”

내가 한참 있다가 말했다.

“아니, 그 사람 말이에요.”

“그 사람? 누구?”

“벽제 어른이라는 분이요.”

내 말에 최생원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내 양쪽 어깨를 잡았다.

“내 말을 잘 듣거라. 너는 이제 그 어떤 사람도 될 수 없다. 너는 이제 어떤 경우에도 역적의 아들일 뿐이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한에는 그렇다. 내가 만약 너라면, 이제 누구의 말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설사 내 말이라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 말이 빠졌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네 부모님의 시신은 도대체 누가 수습했느냐?”

최생원이 경계하는 듯, 자꾸만 시오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시오가 가까이 다가왔다.

“해동환이시오가……”

“누군지 저희도 모릅죠. 어디로 수습했는지도.”

자칭 해동환이가 말했다. 최생원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도 모자라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사향이라면 내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해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온 종숙댁에 사향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그걸 가져올 테니 그때까지 꼼짝 말고 곽의원 집에 붙어 있거라.”

그렇게 말하고 최생원은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는 시오를 힐끔거리다가 절대로 마르내 집으로 가면 안된다고 다시 한번 신신당부한 뒤, 우리와 헤어져 청계천 쪽으로 내려갔다. 길을 걸어가는데 최생원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이제 그 어떤 사람도 될 수 없다는 말. 이제 어떤 경우에도 나는 역적의 아들이라는 그 말. 그 나라에 살고 있는 한. 걸어가다가 왜 최생원에게 부모님의 시신에 관해 거짓말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시오는 그 사람이 사대부처럼 보여서 그랬노라고 대답했다. 사대부처럼 보인다고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는 원래 사대부라는 게 좀 거짓말 같은 것이라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시오의 말이 맞았다. 사대부라는 게 원래 좀 거짓말 같았다. 어제는 사대부, 오늘은 역적. 그 나라에 사는 한 말이다.

곽의원은 시오가 인삼과 바꿔온 진귀한 물건이라며 꺼내놓은 유리병과 손가방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봤다.

“속병 앓는 우리 정경부인이랑 소등에 올라타고 피리 불면서 팔도 유람 다닐 때 참 요긴하게 쓸 물건들이네. 괜찮아. 좋은데. 그런데 심장에 울혈이 맺혀서 의식을 잃어버린 이 도련님은 이제 어떻게 하냐? 사향을 구해오랬더니 이딴 계집애들 소꿉 같은 걸 구해오다니. 이런 미친놈의 종놈 같으니. 네놈이 만수무강하겠답시고 인삼을 낼름 잡숴버리고 오리발을 내놓는대도 내가 이렇게 화가 나진 않겠다.”

“네놈 말대로라면 마누라께서 근본도 모르는 의원놈이랑 붙어먹는다는 것도 모르는 그 판서양반에게 정일품이 될 팔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린가 뭔 소린가? 잘 놀아보게나.”

곽의원의 말에 시오가 이죽거렸다.

“이런 경을 칠 놈 같으니라고!”

“그게 포도아에서 아홉개의 바다를 건너서 온 것이니, 장차 정경부인에게 선물하면 꽤 후사받을 걸세. 정작 보여주고 싶은 건 이것이라네. 사향보다 더 좋은 것.”

시오가 말린 잎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곽의원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시오의 장광설이 이어졌다. 늘 사람들에게 떠들어대듯이 남양(南洋)의 사나운 물결에 운명을 내맡기고 석달 보름을 가면 여송국에 닿는데, 거기에서는 부모나 어른을 만나면 그 손을 끌어다 냄새를 맡는다는 둥, 은으로 만든 가짜 발톱을 단 닭들끼리 싸움을 붙이는데 죽는 쪽은 그 은을 바친다는 둥, 청개구리가 무척 많은데 소금을 뿌리면 바로 죽는다는 둥,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여송국에 표류한 시오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복건(福建) 사람들을 만나 그 배에 올라타고 마카오를 향해서 출발했다. 하지만 항해 이튿날부터 시오는 학질 증세를 보이며 고열에 시달렸다. 여송국은 사시사철 더운 나라라 조선에서는 못 보던 벌레들이 많았다. 시오는 하품하다가 그 벌레들 몇마리를 삼킨 일을 떠올렸고, 필시 그 때문에 풍토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그 말을 들은 복건인들이 그 잎을 먹어보라고 권해서 삼켰더니 배에 들어갔던 벌레들이 모두 죽어 고열 증세가 사라졌다. 그렇게 해서 시오는 그 잎의 신기한 효험을 알게 됐다. 다음은 의원 시오의 설명. 술을 마시고 다음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플 때마다 이 잎을 먹으면 두통이 사라지며, 칼로 생긴 상처에 이 잎을 짓이겨 바르면 상처가 금세 아물며, 오랫동안 이 잎을 장복하면 피부가 고와지고 혈액이 잘 순환돼 젊음을 되찾을 수 있고, 나아가 깊은 밤 고요한 가운데 홀로 앉아 이 잎을 먹으면 우주의 운행원리가 눈에 들어오니 자연히 도를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잎이라는 게 말로만 듣던 빈랑(檳榔)이라는 소리로구나.”

시오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의원이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건 담파고(淡婆姑)라는 것이다. 빈랑처럼 씹어먹는 게 아니라 불을 지펴 그 연기를 단전까지 빨아들인 뒤 굴리는 것이다.”

시오가 말했다.

“그렇다면 두꺼비를 태운 재를 천금누로탕(千金漏蘆湯)에 섞어 하루 세번 마시는 것과 원리에 있어서는 상통하네.”

“그건 연기를 날려보내고 남은 잿물을 마시는 것이지만, 이건 재를 버리고 연기를 마시는 것이니 체(體)를 버리고 용(用)을 택하는 것이다. 용을 태워버리고 체를 택하는 두꺼비약과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식자우환이라더니, 상것이 유식한 친구를 둔 덕에 문자가 조선에 와서 고생이 극심하구나. 네놈의 말을 들으면 이 담파고라는 것이 만병통치약인 모양인데, 의원이 먼저 맛을 봐야겠다.”

“불로초라도 되는 줄 알고 들러붙는 모양인데, 의원은 곽머리 침술로나 치병하시는 게 어떨까?”

시오는 일단 자신이 연기를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노라며 대마도 사람에게서 함께 받아온 대나무를 꺼냈다. 그 대나무의 앞쪽에는 작은 종지 같은 것이, 뒤쪽에는 물부리가 달려 있었다. 시오는 작은 종지에 말린 잎을 재워넣은 뒤, 몇번 입술을 오므렸다가 펼치면서 우리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작은 종지에 넣은 잎에다가 불을 붙이고는 빡빡 소리가 나도록 물부리를 빨아당겼다. 말린 잎이 빨갛게 타들어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시오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나왔다. 시오는 꼭 불을 입안에 품고 불꽃을 내뿜는 것 같았다.

“염화국(厭火國)에 가면 백성들이 불을 내뿜는다더니, 꼭 그런 우스운 꼴이구나.”

곽의원이 말했다. 시오에 이어서 담파고의 맛을 본 곽의원의 평에 따르면, 그건 독수초와 비슷하다고 했다. 독수초는 골절에 처방하는 풀인데 이따금 피우면 좋다고 했다. 내 느낌에는 모든 근심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나도 담배를 피웠느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시오의 설명에 따르면 그건 추운 몸을 덥혀주고 폐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명약인데, 나라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담배연기를 한번 들이켜고, 두번 빨아들이니 정신이 아득해지고 팔다리가 노곤해지면서 부모를 잃은 고통이 무뎌졌다. 시오는 담파고가 귀신에게 홀려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들을 다시 불러올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튼 만병통치약이니까 뭐라도 상관없었다. 설사 그게 치질이든 여드름이든. 하지만 문제는 형은 의식이 없어서 단전까지 그 연기를 넣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자 연기를 머금고 있다가 형의 입에다 밀어넣으면 된다고 시오가 말했다.

“그렁데 누우가?”

연기에 취해 입이 풀린 내가 물었다. 시오와 곽의원이 나를 바라봤다.

 

 

16

 

그 입술의 촉감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서로 입을 맞추는 연인처럼 나는 형을 사랑했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그 사람 하나뿐이라는 듯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찍이 남자끼리의 사랑에 소질을 보였다는 걸 말하려는 건 아니다. (키리시딴의 신 다음으로는 남색가들이 내 저주의 대상이다.) 그건 역적의 아들들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극단적인 친애의 한 형태였다. 그 뒤로 우리 형제는 단 하루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림자처럼 형을 따라다녔다. 한동안 나는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늘 담뱃대를 물고 다녔는데, 그건 형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동안의 불안감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호르헤의 배에 자진해서 오르기 전까지는. 형의 눈앞에서 키리시딴의 신을 저주하는 욕설과 함께 한때 내 목숨을 구했던 로싸리오의 끈을 이빨로 끊어 그 십자가와 구슬들을 나가사끼 앞바다에 내던지기 전까지는. 그 배에 오르면서 인간으로서 나는 서서히 몰락해갔다. 그렇다면 형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술에 취한 저 일본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그렇다고 한들 이제 하늘나라에 올라가신 우리 형이 자신의 삶을 후회할 리는 만무하다. 그건 두번째의 삶이었으니까. 그날 코와 입으로 담배연기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면서 깨어난 형은 앞으로 자신의 삶이란 여분의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건 애당초 예정되지 않았던 삶이니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지금 나처럼 이미 젖은 사람은 아무리 물을 쏟아붓는대도 더이상 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번 죽었던 형을 죽일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 밤에 정신을 차린 형은 누워서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아마도 옆에서 곽의원이 담배를 분석해보겠다며 작두로 잘게 썰고 있었으니 꼭 지옥에 온 것 같았으리라)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완아, 부모님과 할머님은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제 죄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잠시 담배에 취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형의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형은 이제 낮고 굵은, 눈을 감고 들으면 아버지의 목소리와 거의 흡사한 어른의 목소리로 말했다. 곽의원은 형의 몸 안에 든 피를 완전히 갈았기 때문에(그러니까 두꺼비의 검은 재로!) 몸의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곽의원에게 병든 몸을 두번 맡겼다가는 임금도 종으로 바뀌리라. 시오가 자기 집안은 대대로 우리 집의 외거노비였다고 설명한 뒤, 그 인연으로 그분들의 시신을 이미 수습해 광희문 바깥에 모셔놓았다고 형에게 말했다. 형은 그럼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 어른들에게 얼른 부고를 띄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시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해가 바뀐 뒤로는 상을 당해도 부고를 안 띄우는 것으로 성안의 풍속이 바뀌었습니다. 되도록 절차를 간소하게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시오가 뜬금없는 소리로 미적거리자, 곽의원이 나서서 설명했다.

“이런 잡놈 같으니. 똑바로 말하지 않고 무슨 헛소리야. 의금부에서 너희들뿐만 아니라 이번 역모사건에 가담한 집안의 식솔들을 모두 잡아가려고 도성 안에 포졸들을 쫙 깔아놓았는데, 무슨 수로 부고를 띄운단 말이냐. 초상 치르다가 여러 집안 초상나기 딱 좋은 시절이야. 내 생각에는 일단 가매장한 뒤에 후일을 기약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시신이나마 훼손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곽의원의 말도 옳았지만, 시오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난 뒤에는 성의 안팎을 막론하고 사람이 죽어도 부고를 띄우지 않는 게 예사로운 일이 됐으니까. 『주자가례』도, 『예서』도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는 시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만 남들보다 조금 일찍 그 시기를 겪었을 뿐이다. 그날 형과 나와 시오는 광희문을 빠져나와 이미 습렴을 마친 세분의 시신을 인근 산으로 옮겼다. 초혼도 없었고, 곡성도 없었다. 우리에게는 차려입을 상복도 없었고, 뒤따를 상여도 없었다. 까마귀들만이 부는 바람 타고 골짜기를 넘어갔다. 정월의 산등성이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서산으로 저무는 해가 화문(花紋)처럼 길게 드리웠던 붉은 무늬를 모두 데려가고 세상의 모든 약속과도 같은 무수한 별들을 매달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우리는 땅을 파내려갔다. 밤마다 그렇게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건 세상에 이뤄지지 못한 약속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고 나는 들었다. 그게 아무리 이루기 힘든 약속이라 해도 죽지만 않았다면 어떻게라도 해볼 텐데, 이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별빛만 봐도 눈물을 흘릴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으리라는 걸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세명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번갈아가며 땅을 팠다. 고개를 들면 거대한 북두칠성이 금방이라도 땅에 떨어질 듯 또렷하게 하늘에서 맴돌고 있었다. 우리는 그분들과 영영 작별하기 전에 두가지 상례를 지내기로 했다. 하나는 부모님과 할머니의 생애를 기리고 그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문을 읊는 일. 하지만 제문이란 어떻게 읊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나름대로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먼저 형이 말했다.

“호천왈명, 급이출왕, 호천왈단, 급이유연, 무일물지불체야(昊天曰明, 及爾出王, 昊天曰旦, 及爾遊衍, 無一物之不體也).”

시오와 내가 어둠속에서 형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뜻을 모르는데 무슨 수로 기리겠는가. 사정을 눈치챘는지 형이 뜻을 풀었다.

“위대한 하늘은 밝아서 너와 함께 나아가며, 위대한 하늘은 환해서 너와 함께 자유롭게 돌아다니니, 한 물건이라도 본체가 아닌 것이 없도다.”

형의 조사는 그게 다였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하지만 내가 형처럼 멋진 문장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잠시 생각해보다가 나도 소리 내어 읊었다.

“구슬과 옥으로 만든 봉우리에 무지개 같은 구름이 걸려 오색이 영롱하고 옥을 굴리는 맑은 소리가 난다네. 기이한 풀과 신기한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고 공작과 난새가 좌우로 날면서 춤을 춘다네. 그러면 봄이 오는 것일 테니, 이제 봄이 찾아오면 꼭 다시 만나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봄이 오면 꿈속에라도 한번 나와주세요.”

그리고 나는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내 웃음소리에 맞은편 검은 봉우리들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는가 싶더니, 향기 머금은 따뜻한 비가 얼어붙은 땅에 내리고, 붉고 노란 꽃들이 앞다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아마도 위대한 하늘의 저 반대편 끝에서 공작과 난새가 날아와 나의 좌우에서 춤을 추었다.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세분을 모두 꼭 끌어안으려고 했는데, 꼭 끌어안고 절대로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봄의 환상은 거기까지였다. 그 풍경들이 조금씩 흐릿해지면서 정신을 차려보니 형이 내 몸을 흔들고 있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막은 것처럼 형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나는 형에게 소리쳤다.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나 때문에.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야.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말들이 입술 끝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붉고 노란 꽃들은 시들고 공작과 난새 들은 날개가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구슬과 옥은 모두 깨져 쏟아져내리고 거기에는 시커먼 봉우리만 남았다. 도저히 우리의 힘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봉우리. 거대한 장막처럼 인간들의 욕망을 가리고 선, 아름다운 이름들의 봉우리. 충(忠)을 씨줄로, 효(孝)를 날줄로 해서 만든 어마어마한 그물. 욕망을 감춘 비열한 자들이 세상의 모든 착한 사람들을 잡는 데 사용하는, 착하지 못한 이들의 착하지 못한 그물. 그 그물에 붙잡혀 우리는 한번 역적의 아들이 되어 이제는 영원히 그 어떤 사람으로도 살아갈 수 없게 됐다. 그 나라에 사는 한.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하하하하.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형은 제발 정신을 차리라며 내 몸을 흔들었다.

웃음이 저절로 끊어지고 내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나는 형의 품안에 있었다. 시오가 설명한 대로 내게서 슬픔이 사라졌다면, 자신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형은 말했다. 형은 나를 안고 언젠가처럼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어 얼어붙은 듯 검은 밤하늘에 붙박힌 자미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른의, 낮고 굵은 목소리로.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목소리로.

“저 별은 지평선으로 내려가지 않아. 평생 우리 머리 위에 떠 있을 거야. 설사 구름이 하늘을 가린다고 해도 그 너머에는 저 별이 떠 있을 거야. 그러니 저 자미성에 맹세하자. 우리는 어느 누구도 먼저 죽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 둘만 이 세상에 남았으니. 한날한시에 우린 같이 죽는 거야. 그리고 오늘 일을 죽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된다. 너하고 나, 반드시 살아남아서 복수하자.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를 죽인 자들을 모두 우리 손으로 죽이자.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평생 함께 지내며, 평생 그 맹세를 지키고 살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심장에 새겨두도록 해라.”

형은 어둠속에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은 세번에 걸쳐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을 말한 뒤, 나더러 외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형이 다시 세번에 걸쳐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을 읊조렸다. 나는 덜덜덜 떨면서, 그건 아마도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형의 말을 따라 외웠다. 제일 먼저 임금의 이름이, 그 다음으로 영의정과 우의정과 좌의정 등 국청(鞠廳)에 나와 아버지를 문초했던 위관들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고문에 가담했던 의금부 관리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형이 시키는 대로 나는 자미성에 맹세했다. 오늘 일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반드시 살아남아서 복수하겠다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를 죽인 자들을 모두 우리 손으로 죽이겠다고. 갑자기 불길에 얼음이 녹아내리듯 땅의 한쪽이 푹 꺼지는가 싶더니 산이 크게 한번 좌우로 흔들렸다. 멀리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흔들림은 잠시 뒤 멎었다. 그 뒤로 땅은 두번 더 흔들렸다. 그 나라에서는 한번도 땅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는 듯이 그 사실을 공표하거나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해 몇차례는 더 일어날 지진 중 제일 먼저 일어난 지진이었다. 그것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일어났던 몇가지 이상한 일들, 그러니까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하늘에서 물고기들이 떨어져내리고, 비석에서 피눈물이 흘러 십리 길이 젖어들던 기이한 일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우리의 짧고도 유복했던 유년은 모두 끝났다.

 

 

17

 

그렇게 우리의 유년은 끝났지만(그러므로 형보다 내가 삼년쯤 더 억울했지만), 몇가지 이야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건 술을 만들면 남는 술찌끼 같은 것, 바로 사랑의 역사다.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당시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여분의 이야기들, 예컨대 내가 처음으로 초희의 입술을 자세히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 같은 것들. 양쪽 끝이 약간 위쪽으로 올라간, 그래서 늘 웃는 듯한 그 입술. 관상학에서 말하기를,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평생 부유하게 살게 된다는 그런 모양. 나중에 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때, 내가 처음 본 그 입술로, 약간 위쪽으로 올라간 양쪽 끝으로 돌아갔다. 기억 속에서 나는 마치 그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 입술을 바라본다. 그럴 때면 이상한 일이지만 처음 그 얼굴을 보기 전부터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가 진짜 남자라면, “그렇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렇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었다!” 몇번이나 초희의 귀에다 대고 들려주고 싶었던 그 말. (여섯살? 고작 여섯살의 몸으로?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이미 서른아홉살이기도 했으니까.) 사랑의 역사는 사랑보다 먼저 시작되고, 사랑이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런 이야기, 귀신들이나 알아들을 수 있을 테지만, 조금 더 해보자.

나는 까스띠야에 쌀라망까라는 도시가 있다는 걸 안다. 우리 쎄스뻬데스 신부님께서는 쌀라망까 대학의 학생이었다. 쎄스뻬데스 신부님이 회한에 차서 들려주던 학창시절의 이야기 중에는 루이스 데 레온이라는 교수가 자주 등장했다. 오르간 음악을 좋아하고 시를 즐겨 썼던 그는 「아가」(말하자면, 이건 이상한 방식으로 성서에 들어간 또다른‘사랑의 역사’다. “그리워라, 뜨거운 임의 입술, 포도주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를 주해하는 일에 열중하다가 급기야 이단적 학설을 유포한다는 혐의로 종교재판소에 회부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감옥에 갇힌 그는 서서히 병들고 지쳐갔다고 한다. 그렇게 4년이 흐르고, 혐의를 벗은 그는 대학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러번 상상 속에서 그의 첫 수업을 떠올렸다. 돌로 만든 서늘한 대학 강의실, 길게 놓인 책상 뒤에는 학생들이 앉아 있고 루이스 데 레온이 단상에 올라간다. 그의 뒤쪽 세로로 긴 창으로는 빛이 들어온다. 과연 무엇을 말할 것인가? 자신의 견해를 취소할 것인가? 아니면 종교재판소가 틀렸다고 말할 것인가? 그때 루이스 데 레온은 입을 연다. Dicebamus hesterna die.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사랑의 역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제 우리가 나눴던 얘기를 계속하자면……” 무엇도 그 역사를 막지 못한다. 모든 게 끝난 뒤에도 어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그날 산에서 내려와 광희문에 도착한 우리는 성문이 굳게 닫혔다는 걸 알게 됐다. 인경 종소리가 울리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므로 갑작스러운 성문 봉쇄에 발이 묶인 사람들이 누각 위 병사들에게 소리쳐 물었지만, 그들은 이유를 설명하지도, 그렇다고 성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 그저 역모사건이 벌어져 여러 선비들이 옥사하는 와중이고, 더불어 흔치 않은 지진까지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추측뿐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흥인문 밖 최생원의 집으로 찾아가기로 하고 성곽을 따라 오간수문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에도 성곽 위에 횃불을 밝히고 병사들이 서 있었다. 오간수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남자들 몇몇이 수문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수문의 철책은 얼어붙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방울소리를 찾아서 길을 걸었다. 방울소리가 들리면 흥인문이 멀지 않다는 뜻이었으므로. 흥인문 앞에는 육조거리에서 나무를 파는 나무꾼들을 위한 주막이 몇채 있기 때문에 늘 바람을 타고 마소의 목에 묶어둔 방울소리가 들린다고 시오가 말했다. 나무꾼들은 주로 새벽에 찾아오기 때문에 주막의 처마에는 밤새 등롱이 켜져 있었다. 멀리서 찾아오는 나무꾼들은 대개 그 주막에 들러 뜨거운 국밥으로 몸을 덥힌 뒤, 봉놋방에 누워 토막잠을 잤다. 흥인문 앞에 이르니 그 어른거리는 주막들의 등롱 불빛 너머 초아흐레 반달의 은은한 빛을 받은 안암산 송림과 멀리 솟아오른 용마산과 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남한산의 경계가 모두 눈에 들어왔다. 형의 몸이 불같이 뜨거워져 온몸에 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우리가 알게 된 건 거기 주막의 불빛 아래까지 걸어갔을 때였다. 주막에서 쉬어갈까도 생각했지만, 봉놋방이라는 게 사람들로 가득한데다 의금부에서 우리 형제를 잡으려고 한다는 소리까지 들은 터라 일단 최생원의 집까지 시오가 형을 업고 가기로 했다.

“어제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내가 어떤 사랑의 역사에 대해서 전해들은 건 바로 그 밤길에서였다. 임금과 세자와 대신들의, 논리정연하고 버젓한 한낮의 역사, 법의 역사가 아니라 평민과 아래턱이 떨어져나간 귀신과 인간에게 이름을 빼앗긴 나물의, 앞뒤도 맞지 않고 수시로 변신을 일삼는 한밤의 역사에 대해. 그건 사관이 붓으로 책에다 적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봉우리와 바위와 자줏빛 풀들이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반복해서 들려주는 역사다. 제일 먼저 우리가 걸어가던 길 왼쪽에 우뚝 솟아 있던 바위 봉우리가 말했다. 열여덟살에 사랑하는 왕을 잃은 뒤, 젊고 예쁜 왕후가 머리를 깎고 그 봉우리에 올라가 육십년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고. 그건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나는 봉우리에게 더 들려달라고 빌었다. 봉우리의 뒤를 이어 나물이 말했다. 자신을 총애하던 임금의 부탁을 저버리고 어린 나이에 옥좌에 오른 그 손자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던 한 신하에 대해서. 자기 동생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뒤 그 어린 왕을 동쪽 먼 지방으로 유배시킨 사람은 그의 숙부였다. 그 신하는 왕이 된 숙부에게 장차 화근(그러니까 그때 우리 형제 같은 신세)을 없애려면 아내와도 헤어져 지방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내는 그 어린 왕을 살해하라고 조언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그 신하를 나물로 변신시켰다.

“정말 사람이 나물로 변할 수도 있는 거야?”

눈이 휘둥그레져 내가 물었다.

“그럼요. 그게 바로 숙주나물이잖아요. 그놈의 절개를 닮아 여름이면 어찌나 금방 쉬어버리는지 서울 사람들은 무치는 족족 그 자리에서 창자를 끊어먹듯이 질근질근 씹어버린답니다.”

시오가 설명했다.

“창자를 끊어먹듯이.”

시오의 말을 내가 따라했다. 웩, 다시는 숙주나물을 먹지 못할 것 같았다. 형과 달리 나는 식성이 까다로웠으니까. 그 다음은 돌다리가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아가」에 나오듯이‘머리는 금 중에서도 순금이고, 머리채는 종려나무 잎새 같은데 검기가 까마귀 같으며 눈은 흐르는 물가에 앉은 비둘기, 우유로 목욕하고 넘실거리는 물가에 앉은 모양’같았던 어린 왕과,‘입술은 새빨간 실오리, 입은 예쁘기만 하고 너울 뒤에 비치는 볼은 쪼개놓은 석류 같으며 목은 높고 둥근 다윗의 망대 같아 용사들의 방패를 천개나 걸어놓은 듯싶고 젖가슴은 새끼사슴 한쌍, 나리꽃밭에서 풀을 뜯는 쌍둥이 노루’같았던 왕후가 봉우리 앞 다리 위에서 이별했다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운명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영영 이별인 줄도 모르고. 이번에는 봉우리 옆 계곡에 피어난 자주색 풀들이 말했다. 사람들이 남편을 잃은 왕후를 불쌍히 여기자, 왕이 된 숙부와 그의 하수인들은 누구도 그 왕후에게 먹을 것을 전해주어선 안된다고 공표했다고. 나라의 거대한 입술로. 법의 준엄한 음성으로. 왕후는 시녀들과 함께 계곡에 피어난 자주색 풀들을 뜯어서 옷감에 물을 들였다. 그 옷감으로 만든 댕기와 저고리깃과 고름과 끝동을 시장에 내다팔아 밥을 해먹었다. 푸른 하늘 아래 펄럭이는 자주색 통곡들. 마지막은 강가에 버려진 관이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숙부의 아들은 열일곱살에 살해된 조카가 한번도 가닿지 못했던 나이 열여덟살에 세자가 됐다고. 그날부터 서울은 거대한 의문에 휩싸였다고. 과연 그래도 된단 말인가? 하늘이, 하늘이, 하늘이! 나와 함께 나아가며 나와 함께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 이 세상에 본체가 아닌 게 하나도 없다던 그 하늘이 어떻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의문은 소용돌이쳤고, 그로부터 이태가 지난 뒤 세자는 죽은 어린 왕의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오래전 어린 왕을 낳은 뒤 사흘 만에 죽은 그 여인의 혼백이 자신을 저주한다고 말하며 숨을 거뒀다.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왕이 그 어머니의 능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강에 버리던 날 밤, 모든 귀신들이 몰려와 하하하 호호호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서울 사람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하하 호호호, 너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줄 알았느냐고. 하하하 호호호, 이미 죽은 우리를 어떻게 다시 죽이겠느냐고.

왕후가 고독 속에서 물들이던 천처럼, 모든 사랑의 역사는 물들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처음 알아보는 순간은 백색의 천에 떨어지는 물감과 같다. 떨어진 물감이 번지듯이 최초의 순간은 중심에서 주위로 번진다. 사랑의 역사는 법의 역사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원인에서 결과로, 그러므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의 역사는 사방으로 번져갈 뿐이다. 먼저 기쁨(봄과 같은 노란색)과 행복(따뜻한 분홍색)으로. 다시 슬픔(구름이 잔뜩 낀 하늘처럼 회색)과 분노(왕후를 기념해서 자주색)로. 다시 눈물(흔적만 남을 뿐인 하얀색)로, 피(의심의 여지 없이, 빨간색)로. 뒤죽박죽 누벼진 채, 서로 관련이 없는 세상의 사물들이 동시에 들려주는 다채로운 빛깔의 이야기. 그게 바로 사랑의 역사다. 그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우리는 최생원의 집에 도착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는 시오가 봉우리는 물론이거니와 나물과 돌다리와 자주색 풀들과 강에 버려진 관의 음성까지 흉내낼 수 있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시오가 아직 살아서 나 대신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여러분들은 지루함을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시오의 방식대로 얘기하자면, 그 입술의 음성을 흉내내야만 할까? 아, 아니다. 나는 계속 나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슬픔을 느끼는 법을 잃어버린 완의 방식대로. 최생원의 집은 십여호가 모여 사는, 절 아래 동네의 제일 안쪽에 있었다. 최생원네는 형이 객사하고 누나가 죽으면서 급속히 가세가 기울어 마르내의 기와집을 내놓고 거기로 이사했다. 그 시절, 최생원은 한때 천재들로 가득했던 그 집안의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마르내의 기와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그날, 모든 사람들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야망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최생원의 초가에 도착했을 때는 셋 다 고드름처럼 얼어 있었다. 사람을 부르자 찬모가 나오더니 최생원은 아침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이미 성문이 닫혔기 때문에 성안에 남았다면 그날 밤 안으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시오가 말했다. 마치 부모님과 할머니의 시신을 땅에 묻기 위해서 잠시 정신을 되찾았던 것인 양 최생원의 집에 도착하자 형은 다시 정신을 잃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곽의원이 다 피워버릴까봐 시오가 챙겨온 담뱃잎이 없었다면 형의 상처는 더욱 곯아빠졌을지도 모른다. 시오는 상처 부위에 담뱃잎을 비벼댔다. 그러자 형이 목을 움찔거리더니 비명을 토해냈다.

“피라는 게 말입죠, 아픔을 전하는 물길입니다. 그러니 아픔을 느낀다는 건 피가 통한다는 뜻이고, 피가 통한다면 당연히 기가 통하게 되죠. 그러니 아픔을 느낀다면 그건 살아 있다는 것, 즉 죽은 살이 되살아난다는 증거지요.”

시오는 더욱 세게 담뱃잎을 비벼댔다. 이윽고 형의 비명이 사라졌다.

“그렇게 치자면 나는 남들보다 백배는 더 살아 있는 사람이겠네. 그런데 혼절한 것 아니야?”

창백하게 질린 형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시오도 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글쎄요. 제 눈에는 이제 편안해져 잠에 드신 것처럼 보이는데. 귀한 약을 아낌없이 발랐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죠.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이건 비상용으로다가.”

시오는 남은 담뱃잎과 담뱃대를 방 한쪽 구석에 놔둔 뒤, 동망봉 못 미쳐 있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겠다며 방을 나섰다. 마루에 서서 떠나는 시오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을 돌렸더니 앞산 아래, 겨울밤 공기에 까물거리는 인가 불빛이 차가웠다. 시오가 떠나는 기척이 들리자 찬모와 초희가 방에서 나왔다. 함께 최생원의 방으로 들어간 초희는 거기 누워 있던 형의 안색을 살피더니 이윽고 찬모가 물에 적셔서 가져온 수건을 형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초희는 내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찬모와 초희의 눈치를 봤다.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들. 방에 돌아가서 내려놓은 바느질을 계속하라고 초희가 말하자 찬모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고문으로 돌아가신 걸 알고 형이 스스로 제 목을 찔렀어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내가 말했다. 초희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형의 목 부위를 다시 살폈다.

“마음의 고통이 저 상처보다도 컸던 모양이네. 어때, 너는 괜찮니?”

초희가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 역시……”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초희가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때, 형이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떨어댔다. 악몽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상처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인지. 자꾸만 몸을 일으키려 드는 형의 양쪽 어깨를 내가 두 손으로 눌렀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도주의 아들에게서 받은 로싸리오를 손에 쥐고 제발 형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라는 사람에게. 그때만 해도 어떻게 기도하는지 몰라 그저 제발 형을 살려달라고만 빌면서. 초희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가 시오가 두고 간 담배가 생각났다. 나는 로싸리오를 바닥에 내려놓고 담뱃대를 집어든 뒤 서둘러 담배를 쟁여넣었다. 비명소리가 조금 줄어드는가 해서 돌아봤더니 초희가 한 손으로 형의 손을 꼭 쥐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자꾸만 담뱃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번 해봤던 대로 담배연기를 빨아들인 뒤, 형의 입에다 그 뜨거운 연기를 불어넣었다. 몇번이나 반복해서. 이윽고 형이 더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고, 몸의 꿈틀거림도 잦아들 때까지. 형에게서 물러나 가만히 그 모양을 지켜보던 초희가 담뱃대를 가리키며 그게 뭐냐고 내게 물었다.

“음, 이건 재를 버리고 불을 뿜는 용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그러니까 불로초 같은 약초예요. 담파고라고 하지요. 포도아라는 곳에서 아홉개의 바다를 건너서 온 것이에요. 두꺼비 태운 재를 마시는 것과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지요. 이 약초를 태워서 생긴 연기를 단전까지 빨아들이면 고통과 근심이 사라져요. 식자우환 같은 약은 절대로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 오라버니에게도 방금 네 얘기를 들려주면 좋겠구나. 식자우환 같은 약으로는 절대 고통과 근심을 없앨 수 없다는 걸.”

그렇게 말하고 초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오라버니가 어디선가 듣고 온 말로는 내가 왕자에게 시집갈 팔자라고 하더구나. 허망하고도 허망하여라. 가세가 기운 뒤로는 그 가당치도 않은 말들에 매달려 오라버니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 가족들이 서로 희망에 찬 말들을 주고받던 시절에는 우리가 점쟁이의 부질없는 말에 그렇게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지. 하지만 좋았던 시절은 이제 모두……”

그쯤에서 말을 끊고 초희는 바람소리가 울리는 벽을 바라봤다. 거기엔 그림자들, 우리가 고요하게 머물러 있어도 우리 뒤에서 너울거리는 욕망의 무늬들만이.

“그게 정말 고통과 근심을 없애주는 약이라면, 내게도 연기를 불어넣을 수 있겠니?”

형은 스스로 담배를 피울 수 없어 내가 입을 맞추고 그 연기를 불어넣어준 것일 뿐, 원래는 혼자 피우면 된다는 말은 절대로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초희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 어, 어떻게?”

내가 더듬거렸다.

“방금 네 형한테 한 것처럼.”

방금 네 형한테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초희가 형의 옆에 누웠다.

 

 

18

 

그래서? 그래서 그녀는 고통과 근심을 잊게 됐는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입안으로 연기가 들어가자, 초희는 기침을 토해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 내 입술과 그녀의 입술이 맞닿는 그 순간, 내가 고통과 근심을 잊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당시의 고통과 근심뿐 아니라 앞으로 내가 경험하게 될 그 모든 고통과 근심을. 모든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곽의원의 침술로 인한 부작용으로 제일 먼저 슬픔을 느끼는 법을 잃어버리고, 그 다음으로 초희와의 입맞춤으로 죽을 때까지 경험할 모든 고통과 근심을 잊게 되면서 지금의 나, 바꾸후의 배신자들이자 사교의 추종자들을 찾아내 일본에서 온 밤의 손님들에게 팔아치우면서도 늘 웃음을 머금고 사는 말라카의 조선 상인 완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탄생설화를 가진 인물이라면 지옥마저도 감미로워할 것이다. 조선어와 일본어와 중국어와 뽀르뚜갈어와 스페인어 등 만나는 사람에 따라 사용하는 말을 바꾸고, 또 그때마다 얼굴도 바꾸는 변신의 천재이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번째 손을 재빨리 놀려 그들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거머쥐고 놔주지 않는 검은 마술사.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젖은 옷을 모두 벗은 뒤에 수건으로 축축한 머리칼과 몸을 닦고 벌거벗은 채 서서 오랫동안 정성 들여 담뱃대에 담뱃잎을 쟁여넣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담배연기를 들이켰다. 불을 삼키듯이 조심스레, 천천히. 살아남는 기술에 관한 한 명례방 곽의원만큼이나 오만했으므로, 나는 어쩌면 이생에서 피우는 마지막 담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연기를 내뿜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왜 그 순간만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그때 맞은편 집에서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내가 서 있는 창 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초희였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만난 다섯번째 초희. 나의 인생에서 다섯명의 초희라면 그건 너무 많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 적은 것일까? 그간 내가 초희라고 이름 붙였던 여자들. 몇몇은 키리시딴이었고 몇몇은 이교도였다. 모두들 불행했고, 대부분 나를 두려워했으며, 몇몇은 죽도록 나를 사랑했다. 지금의 초희는 그 몇몇에 해당했다. 나방이 불꽃에 끌리듯 두려워하면서도 죽도록 나를 사랑하던 몇몇. 착한 여자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지난 일이 돼버렸다. 그녀는 왜 내가 자신을 초희라고 부르는지 안 뒤부터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기는커녕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워하는 일 역시 사랑의 일부분이라는 걸 나는 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한, 사랑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나 역시 키리시딴의 신을 지금도 사랑하는 게 되는 셈인가? 좋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게 된 어떤 사랑의 빛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해보겠다. 그 다음날 오후, 우리는 의금부 나장들이 우리를 잡으러 오고 있으니 어서 피하라는 초희의 말을 듣고 정신없이 그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를 보호하던, 아니, 우리가 아끼고 가꾸던 삼강과 육덕의 세계로. 마르내 우리 집으로. 나장들은 우리가 최생원의 집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장들이 우리를 잡으러 온다는 사실을 초희는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에게 그런 의문이 든 건 몇년이 흘러간 뒤의 일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 몇년이 지옥과도 같았다고 회상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라카에 정박한 스페인 배 위에서 열린 노예시장에서 찾아낸 다섯번째 초희, 가느다란 종아리에 빗물을 튀겨가며 지금 나를 향해 달려오는 열여덟살의 저 아이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고. 죽음은 우리를 영영 갈라놓을 것이라고.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기뻤는지 슬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상상하는 지옥이 꼭 그런 모습이었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착한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만큼이나 죄를 많이 저지른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더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곳. 죽고 나면 나는 홀로 그런 세상의 끝에 떨어져 있을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자들만이 모인 곳, 심판관이 있어서 불에 달군 쇠부지깽이로 거짓말을 많이 한 혀를 잡아뽑고, 삼지창으로 간통한 몸을 찔러 펄펄 끓는 기름 속에다가 집어던지는 곳이 지옥이라면 나는 이미 그런 지옥을 지상에서 경험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을 지옥이라고 회상하지 않는다. 그때 내 곁에는 늘 형이 있었으니까. 사람이 더이상 먹지 못하고, 사람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신음하다가 죽고,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죽은 사람들이 모두 귀신이 되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형은 늘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잠을 잘 때마다 머리맡에 놔두던 단검처럼. 혹은 다섯명의 초희들처럼. 곁에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잠잘 수 있었던 불안한 밤들의.

지옥과도 같았다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그 이태 동안을 이적(異蹟)의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최생원의 집에서 도망친 우리는 철새들처럼 본능적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에는 외가가 있었고, 더 가면 바다가 나왔고, 그 바다를 건너가면 어쨌든 우리가 역적의 아들로 살지 않아도 좋을 나라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겨울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밤새 정월의 바람소리와 추위를 견디지 못한 아이들의 칭얼거림에 잠을 설쳤던 시골 여인들은 종종 볏짚을 뒤집어쓰고 아궁이 옆에서 잠든 사람들을 발견하곤 했는데, 우리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시골 사람들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여력이 없어서 늘 민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자비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의 자비를 원했다. 한주먹 정도도 좋았지만, 두주먹이라면 매우 기뻐했다. 죽은 솔잎노인의 교육이 그즈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형은 솔잎을 따서 절구를 빌려서 가루로 만든 뒤, 솔잎가루 10에 곡식가루 1을 섞어서 솔잎죽을 쑤었다. 쌀가루라면 더 바랄 게 없었지만, 보리나 기장, 그때 막 강남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강냄이라고 불리던 옥수수도, 심지어는 옥수숫대도 괜찮았다. 그도 저도 없을 때는 그냥 솔잎가루로도 먹을 만했다. 형이 솔잎죽을 만들어 먹는 걸 보고 다른 사람들도 이를 따라했다. 하지만 그들은 먹는 족족 설사를 내질렀다. 솔잎을 상식(常食)하는 건 그처럼 힘든 일이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 있으면 형은 신선처럼 얼굴이 맑아 보였다. 그 목의 상처만 없었다면. 우리가 유랑걸식하던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형은 솔잎죽을 다 먹고 나면 이따금 『근사록』의 구절들(“몸에 가득 찬 것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뿐이로구나滿腔子是 惻隱之心”라거나 “가득히 꽉 차 있고 빈 곳이 없으니, 칼로 베어도 아프고 침으로 찔러도 아픈 것과 같다彌滿充實 無空缺處 如刀割著亦痛 針箚著亦痛” 같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가련하게도 헛배만 부르고 온몸이 아프다는 이야기)을 중얼거리곤 했다. 또한 모두들 서울을 향하는데, 우리만 그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서울에 가면 훈련도감 앞에서 구휼미를 나눠준다고들 했다. 훈련도감이라. 지금도 나는 눈을 감고도 마르내 집에서 훈련도감까지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훈련도감에서 그런 일을 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이름과 신분을 속였지만, 본성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내가 사관이라면 그 이태, 경인년과 신묘년을 볼거리가 참 많았던 해로 기록할 것이다. 그만큼 먹을거리도 많았다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낸 태평성대였다고 평할 텐데. 경인년에는 자연의 기이한 움직임(해일, 지진, 폭우, 흰 무지개, 천둥과 번개 등등)이 볼 만했고, 신묘년에는 괴상한 동물들의 출현(흰꿩, 오색이 찬란한 까마귀, 머리 하나에 몸통이 둘 발이 넷 날개가 넷인 병아리, 해안을 가득 메운 날개미떼 등등)이 대단했다. 그 두해를 지나는 동안, 절에 매달아둔 종들이 저 혼자 우는 일이 많았다. 부모를 잃고 유랑걸식하는 마르내 완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세상의 모든 종들이 소리내어 울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그건 그만큼 자주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성문이 무너지고 민가의 지붕이 내려앉는 장면을 목격한 뒤에 듣게 되는 그 종소리는 말세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즈음, 우리는 사람이 본디 하나에서 태어나 여럿이 됐다가 죽으면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라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얘기하기도 했다. 남쪽으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심심찮게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굶어죽은 그 시체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시체들은 전신이 검고 야위었으며, 마른 장작처럼 온몸이 뻣뻣했다. 손과 발은 모두 쭉 뻗은 채, 얼굴을 보면 눈을 꼭 감고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어금니만은 앙다물었다. 아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의 구별에 따라 크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뼈가 드러난 몸이며 시커먼 얼굴은 한결같아서 나중에는 아침에 본 시체를 낮에 또 보고, 낮에 본 시체를 저녁에 다시 보기도 해서 우리가 지금 같은 장소를 맴도는 것은 아닌지, 혹시 지금이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꿈결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결국 우리는 『근사록』에 나오는 말이 옳았음을 알게 됐다. 모든 건 하나의 태극에서 나와 무극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니 나는 시체를 봐도 감각이 없었고, 이미 한번 죽은 사람이니 형 역시 두려움이 없었다. 우리가 피해다닌 건 우리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었다. 아마도 만나보면 그 아이들의 얼굴은 우리 얼굴과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굶어죽은 시체들의 얼굴이 그렇게 한결같다면 굶어죽기 직전의 우리 얼굴도 당연히 닮아 있었겠지. 그 아이들은 어려서 부모를 잃거나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뒤, 살아남기 위해 작당해서 들개들처럼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다. 먹을 것을 찾아서 인가를 습격하기도 했고, 길 가는 사람들의 소지품을 빼앗은 뒤에는 나무에 묶어두고 도망가기도 했다. 한번은 그렇게 나무에 묶인 남자를 우리가 발견한 적이 있었다. 끈을 풀어주려고 하자, 그 남자가 말했다.

“가던 길을 그냥 가려무나. 나는 그냥 이대로 묶여 있고 싶어. 풀려나봐야 이제 움직일 기력도 없어. 지붕이 무너진 초가에는 노모가 병으로 누워 있고, 아이들은 흙벽을 파먹으며 울고 있지. 사흘 밤낮 2백리 먼 길을 걸어가서 간신히 먹을 것을 구했는데, 오늘 도적들을 만나 모두 빼앗겼으니 애석하도다. 너희가 나를 풀어주면 나는 또 어찌하지 못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방천지를 헤매다녀야 할 신세니 그냥 이렇게 묶여 있다가 산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게 더 낫겠다. 노모와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내 손으로는 도저히 자진하지 못하겠으니.”

“아저씨의 사정은 잘 알겠지만,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지 않고 떠나면 우리의 측은지심은 어떻게 달래나요?”

내가 물었다. 나무에 묶인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측은지심? 너희는 아직 도적의 패거리는 못되는구나. 그게 뭔지 나는 모르겠다. 굶은 지 오래되어 내 몸에는 오장육부도 남아 있지 않은데,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지.”

하지만 우리는 싫다는 그를 나무에서 풀어줬다. 죄를 짓지 않고 떳떳하게 사는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고통일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그때 처음 알게 됐다. 바닥에 쓰러진 그 남자는 우리에게 갖은 욕설을 내뱉었다. 하는 수 없이 형은 모아둔 솔잎가루를 그에게 모두 주면서 솔잎죽을 만들어먹는 방법을 일러줬다. 그 가루가 대단한 양식인 양, 양생(養生)이니 운기조식(運氣調息)이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핵심은 설사를 하게 되면 그나마 먹은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반년 넘게 그 솔잎죽으로 끼니를 때운 내 경험에 따르면, 설사를 하지 않는답시고 아랫구멍을 틀어막으면 반드시 입으로 그 죽을 토해내게 돼 있었다. 내가 그렇게 죽을 토해내면, 형은 땅에 떨어진 죽을 집어서 다시 삼키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싫다고 소리쳤지만, 결국에는 그 죽을 다시 집어서 삼키고 말았다. 형이 부모님의 복수에 대해서 말하면, 나는 그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솔잎죽을 먹고 설사하지 않은 것만은 천만다행이었다는 사실. 형이라면 그것도 다시 삼키라고 했을 테니까. 그게 누구라도 그런 지경에 이르면 미쳐서 날뛰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 치료약도 오직 사람의 똥이라니!)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걸어가야 하는 걸까, 형?”

어느 아침, 길을 걸어가다가 내가 물었다.

“살아남을 때까지.”

형이 말했다.

“우린 지금 죽어가고 있는 거야, 그치?”

“아니야, 우린 죽음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이야. 지금 우리는 남쪽으로 가고 있어.”

“남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지?”

“바다.”

“바다.”

내가 형의 말을 다시 되뇌었다.

“형은 바다를 본 적이 있어?”

“없어.”

“나도.”

바다. 다시 나는 그 말을 되뇌었다.

“바다는 어떤 곳일까?”

“푸른색이라고 들었어.”

“거기 가면 물밖에 보이지 않는다지?”

나는 둘러놓은 천이 발기발기 찢어진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움막을 봤다. 어떤 마을의 입구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땅이 둥글다는 걸 볼 수 있다더구나.”

“하늘만 둥근 게 아니구나. 땅도 둥글구나. 형,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바다까지 못 갈 것 같아.”

“왜?”

형이 내게 물었다.

“이상하지. 하늘이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그리고 나는 쓰러졌다. 하지만 하늘이 눈에 보이지 않기는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일식이었으니까. 그해에만 일식이 두번이나 일어나서 나중에는 임금이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리기도 했다.‘나는 부족한 덕(아시는군요!)으로 조석으로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니어 감히 안일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그런데 천심이 즐겁게 여기지 않아 온갖 재앙이 함께 일어나서 수재, 한재, 역질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살별이 나타난다는…… 내 비록 몽매하여 그 형상을 살필 수 없으나 하늘의 경계에 그 영향이 이미 나타났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해 동안 일식이 두차례나 있었으니 이것만도 이미 놀라운데 더욱 심한 것은 이달 12월 17일에는 서울에 지진이 발생하여……’그 교서에서 임금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모두 용납할 테니, 그런 재이(災異)를 불러온 까닭은 무엇이며 그 재이를 사라지게 하는 방도는 어디에 있는지 말해보라고 크고 작은 신하들과 벼슬하지 않는 선비들에게 물었다. 나한테 물었다면 금방 대답해줬을 텐데 말이다. 그 까닭은 충신을 모함해 억울하게 죽였기 때문이며, 사라지게 하는 방도는 이제 없다는 것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무슨 방도가 있었을 텐데 이제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버렸으니 임금도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시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그게 믿기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보라고. 꽉 차게 해를 가린 달을.

그러나 내가 쓰러진 건 일조량이 갑자기 줄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돌림병이었다. 나를 업고 동구밖에 움막이 쳐진 그 마을에 들어가서야 형은 그게 폐촌이라는 걸 알게 됐다. 동구밖의 움막에는 병으로 죽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이자 이웃이었을 그 시체를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안전한 지대로 모두 대피했다. 마을의 입구에 세워둔 장대 끝에서는 검은 깃발이 힘차게 나부끼면서 거기가 돌림병으로 사람이 죽은 마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 마을을 떠나는 게 상책이었지만, 내 가슴에 장미꽃 모양으로 반점들이 피어오른 것을 확인한 형은 모든 걸 포기했다. 형은 그 마을에서 그나마 제일 깨끗하고 좋은 기와집을 하나 골라서 나를 방안에 눕혔다. 돌림병이 돈 마을이어서 들개처럼 몰려다니는 도적들도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그 집에는 쌀까지 남아 있어 형은 밥을 지었다. 몇달 만에 보는 쌀밥을 나는 그저 손끝으로 만져봤을 뿐, 삼킬 수가 없었다. 이불을 몇채씩이나 뒤집어쓰고도 나는 이빨을 부딪쳐가며 덜덜덜 떨었다. 밤새 형은 내 곁에 앉아서 찬물에 적신 천으로 내 몸을 닦았다. 그런 밤이면 형은 숟가락으로 문고리를 걸었다. 그러면 동이 틀 때까지 귀신들이 자기들도 좀 들어가자며 문을 두들겼다.

“담파고가 있으면 좋을 텐데. 로싸리오라도.”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헛소리가 심하구나. 헛것이 보이는 모양이네.”

내가 바짝 마른 입으로 그렇게 말했더니, 형은 내 이마를 만지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제야 나는 서둘러 도망치느라 로싸리오를 초희의 집에 놔두고 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 밤, 나는 그 로싸리오를 두 손에 쥐고 빌고 또 빌었다. 형을 제발 살려달라고. 그런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초희의 입술이 떠올랐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바늘을 삼킨 것처럼 목이 따가웠다. 로싸리오도 없다고 생각하니 어쩐 일인지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싸리오만 있었더라도. 그게 아니라면, 초희라도 있었더라면.

“형은 어서 여기를 떠나. 형까지 병에 걸리면 복수할 사람이 없잖아. 부모님이 너무 불쌍하잖아.”

내가 말했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면 절대로 죽어서는 안돼. 죽어도 살아나야 해.”

“형처럼?”

내가 힘없이 물었다.

“그래, 나처럼. 저 귀신들처럼. 네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오는, 몇번이고 혼절했지만 다시 깨어났던 봉우리의 그 왕후처럼. 삼도천까지 갔다가도 돌아와야 해.”

“난 형하고는 다르잖아. 난 게으르잖아. 힘든 일은 안하잖아. 솔잎도 잘 못 삼키잖아. 형도 알잖아. 자꾸만 졸려. 피곤해. 나무에 묶여 있던 그 남자처럼 나도 이제 지쳤어. 바다까지 간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잖아. 살아난다고 마르내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돌아가도, 부모님도 할머니도 이젠 없잖아. 우린 역적의 아들이잖아.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어.”

이 나라에 사는 한.

그 말은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들이 문밖에서 합창했다.

“그래, 이 나라에 사는 한. 졸려, 형. 눈을 못 뜨겠어.”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원래대로라면 모든 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도주의 아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 살려달라고. 성모님, 야소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님,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살려달라고. 이윽고 나는 감은 눈으로 많은 것들을 보게 됐다. 밤새 차가운 물수건으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내 몸을 닦아내던, 하지만 이제는 나와 마찬가지로 내 옆에 쓰러진 형을. 형의 목에 난 상처와 그 아래 가슴으로 조금씩 피어나던 장미꽃 무늬를. 방바닥에 쓰러진 형과 나를 바라보는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높이 올라갔다. 어두운 하늘 아래로 저 멀리 남쪽에서 메뚜기떼가 들판을 향해 시커멓게 날아들고 있었다. 거대한 원을 만들며.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조금 더, 조금 더 위로 내 몸은 솟구쳤다. 빛을 찾아서. 천공으로. 하늘에는 해가 보이지 않았다. 종이처럼 얇은 달이 뜨거운 해를 가리고 있었다. 임금인 해를 신하인 달이 가리자, 그 빛에 가려져 있던 뭇별들이 모두 아름답게 제 몸을 밝혔다. 어두운 천공으로 아름다운 별자리들이 한땀 한땀 수를 놓듯이 하나둘 밝혀졌다. 수천수만의 촛불을 밝혀놓은 것처럼 천공이 환해졌다. 생명으로 물결치는 반디들의 바다인 양. 자미성 아래,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의 빛으로. 힘없고 나약한 작은 촛불들이 한데 모여서 밝히는, 하지만 어둠속에서는 태양보다도 환한 빛으로. 착하지 못한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무리 없애려고 불태우고 때리고 죽이려고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 환한 빛 속으로. 한촉의 촛불인 것처럼, 한마리의 반디인 것처럼, 한개의 별인 것처럼, 나도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루, 이틀, 사흘? 알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방안에는 여전히 하늘에서 본 그 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빛이 나는 쪽을 바라보니, 저고리에 치마를 갖춰 입은 부인이 두 손을 모으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부인은 환한 빛 속에서 두 손을 펼쳤다. 손가락 사이로 빛의 알갱이들이 부서져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형의 몸을 흔들었다. 불꽃을 만지는 것처럼 형의 몸은 뜨거웠다. 내가 본 그 장미꽃 반점은 진짜 생겨난 것이었다. 형도 돌림병에 걸렸던 것이다. 형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머리를 흔들었다.

“누, 누구세요?”

힘없는 목소리로 형이 그 부인에게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안도했다. 그 부인의 모습이 형에게도 보인다는 사실에. 나는 열병 때문에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집의 주인마님이신가요? 마음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동생이 돌림병에 걸렸거든요. 죽어가고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

형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릴 부모님 곁으로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

내가 물었다. 형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난 너희를 부모님 곁으로 데려가려고 온 게 아니야. 너희의 병을 낫게 하려고 온 거야.

부인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부인은 몸을 수그리더니 우리의 머리를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인의 손에서는 향유를 뿌린 듯 좋은 냄새가 풍겼다. 형은 넋이 나간 듯 그 부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내가 또 물었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모두 환한 빛의 세계로 들어가셨단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나요?”

형이 물었다. 그래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부인의 소리없는 말들이 형에게도 들린다는 사실을.

너희는 죽지 않을 거야.

그 말에 나는 부인의 발치에 몸을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도 나는 그때 성모님을 만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분은 그렇게 세상에 내려와 열병으로 죽어가던 나와 형을 살렸다. 그게 설사 거대한 환영이라 할지라도. 그 환영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 훨씬 더 또렷했다. 그리고 성모님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는 바다를 건너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나라의 말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아마도.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