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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소설 형식의 시국선언과 기억의 윤리

공지영 장편소설 『도가니』론

 

정혜경 鄭惠瓊

문학평론가, 순천향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매혹과 곤혹』『한국 현대소설의 서사와 서술』등이 있음. kornovel21@hanmail.net

 

 

1.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알레고리

 

국가인권위원회조차 독립성이 흔들리고 기구가 강제적으로 축소되는 곳에서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하루아침에 내쳐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절규하고, 억울하게 불타버린 가족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반년을 투쟁해온 용산참사의 현장은 무관심 속에 고립되어 있다. 이밖에도 시장경제원리를 최고의 가치로 받드는 권력에 의해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생명과 인권이 내몰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강행처리된 미디어법은 앞으로 우리의 귀와 입을 막아버리려고 할 것이니,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농아(聾啞)들의 고통을 소재로 한 공지영(孔枝泳) 장편소설 『도가니』(창비 2009)는 지금 이 시대의 초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인터넷 포털의 연재를 마치고 최근 발간되어 다시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도가니』는 광주 인화학교에서 교장과 행정실장, 보육교사가 청각장애아들을 성적으로 유린한 실제 사건을 토대로 했다.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가 3년여 동안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온 힘을 쏟은 결과 이 사건은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되었으나, 정권이 바뀐 후 2008년 7월 항소심에서 가해자들이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었다. 작가는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는 기사를 읽는 순간, 그들의 비명소리를 듣는 듯했고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작가의 말」)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들의 독서공간에서‘텍스트’로 존재 전이를 한다는 점에서 모든 문학은 텍스트 발생론적 측면과 사회문화적인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밀리언쎌러를 기록한 바 있는 작가 공지영의 경우는 이런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1988년 등단 이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를 시작으로 그녀의 많은 작품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켜 베스트쎌러에 올랐다. 특히 2000년대에 쓴 장편소설 가운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은 윤리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사형제 폐지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즐거운 나의 집』(2007)은 현실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다양한 가족형태를 수용하고 다문화사회로 향하는 데 필요한 담론을 제공하면서 2008년 호주제 폐지를 알리는 서막이 되기도 했다.

공지영의 최근작들이 우리사회의 변화에 따른 이슈를 포착하고 담론 생산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이른바 386세대의 자의식의 흔적을 작가가 자신의 독자층을 의식하면서 소명의식 혹은 작가의 윤리로 발전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작품이 가지를 쳐서‘위로의 수사학’을 전폭적으로 보여준 산문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2008)와 인터뷰집 『괜찮다, 다 괜찮다』(2008)나 자신의 일상에서 소소한 에피쏘드를 건져올린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2009)의 성공이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공지영의 텍스트에는 독서시장의 출판마케팅 메커니즘이 분명히 작동했고 또 작가 스스로도 베스트쎌러에 대한 유혹 혹은 강박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해 동안 재소자들을 만나왔고 청각장애아들과 연대하는 등의 개인적 실천에도 나타나는 소명의식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매도할 이유는 없다.

『도가니』 역시 「작가의 말」과 각종 인터뷰를 살펴보면 “상상을 벗어나는 이 현실”(294면)을 드러내 부조리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작가의 분명한 계몽적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처음 구상했을 때는 낙후된 지역의 야만적 폭력과 그것에 눈감은 지방 토호들을 고발하려는 의도였는데, 소설을 쓰는 동안 나라 전체가 소설무대인‘무진’으로 변한 것 같아서 스스로도 놀랐어요. 감시 없는 권력은 필히 폭력화하고 부패한다는 점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1라는 작가의 진술은 당면한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을 표명한다. 이러한 취지에 독자들은 이미 이 소설이 인터넷에 연재될 때부터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누적 조회수 1100만을 넘는 가운데 연재물에 달린 댓글에서부터 단행본 출간 후 온라인서점 독자평이나 블로그 서평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의 가장 공통된 감상은 바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분노’다. 분노의 감정은‘공감(共感)’의 한 형식이며, 이 공감은 공지영의 글쓰기가 실천하고자 하는‘소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정국과 관련하여‘미학(문학)과 정치’라는 화두가 다시 생성되고 있다.‘촛불’과‘시국선언’등에 나타난 민주주의의 위기의식에서 배태된 것은 물론이다. 각종 문학잡지의 기획에서부터 대중과 함께하는 인문학적 실천(지행네트워크, 연구공간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등의 활동), 다양한 작가들의 느슨한 연대인‘6.9작가선언’참여작가들의 용산참사 항의 릴레이 1인시위 등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사회적 역할 혹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관심은‘시대와의 소통’이라는 맥락을 갖는다. 이 지점에서 “미학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 사이의 일치를 정립하기 위한 기준은 없다. 선택들만이 있을 뿐이다”2라는 말은 귀 기울일 만하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논의가 자칫 텅 빈 논의의 반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실제 텍스트들에서 그 화두를 구체화해보는 편이 생산적인 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공지영은 『도가니』에서 당대성의 문제를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 이 소설이 장애인의 인권이라는‘정치적 올바름’의 소재에서 출발한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문학과 어떻게 만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앞서 말한 문학적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공지영의 글쓰기 행위를 좀더 천착해보는 일인 것이다. 물론‘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학 앞에 미학적 잣대는 무력한 것인가? 혹은 윤리적 명분 속에 또다른 이데올로기가 잠복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비판적 질문과의 동행 역시 중요한 항목이라고 생각한다. 김승옥의 1960년대 단편소설 “「무진기행」에 대한 오마주(hommage)”3이자 2000년대적 패러디인 『도가니』의 내부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2. 광란의 도가니: 농아들의 비명과 말할 수 있는 자들의 침묵

 

『도가니』는 공지영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작가가 2000년대에 쓴 소설들이 대부분 긍정과 위로의 문학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부정(否定)과 분노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등단작 「동트는 새벽」을 비롯해 『인간에 대한 예의』에 실린 단편들과 『무쇠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에 나타났던‘대결의지’라는 공지영의 초심을 상기하게 한다. 『도가니』는 위안의 수사를 절제하는 만큼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이 시대 사회현실, 즉‘광란의 도가니’를 부각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도입부에서는 “깊은 물속 같”(9면)은 고요와 소음(종소리, 기차소리, 비명)을 대비시키고, 안개가 짙게 깔리는 무진의 일상과 선로 위 한 남자아이의 죽음을 병치시켜 마치 공포영화의 인트로처럼 긴장감있는 장면을 선보인다. 이 “붉은빛”(9면) 죽음이 응축하고 있는 거대한 폭력을 주인공 강인호는 무진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징후적으로 감지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반(半)수면 상태로 무진에 진입해가면서 두려움과 욕망 등의 다중적인 감정과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윤희중과 달리, 『도가니』의 강인호는 무진으로 가는 음험한 안개 터널에 싸여 “터무니없는 공포”(14면)에 사로잡혀 있다. 혁명이 좌절된 불우한 1960년대 현실을‘분열된 내면’속에 음영(陰影)으로 그려넣은 김승옥 소설과 다른 길을 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다중적인 측면들을 지우고 공포를 전면화함으로써 작가는 이 공포를 발생시키는 근원, 그 폭력의 근원을 파헤치는 데 전력투구한다. 이 작품이 매우 속도감있게 진행되는 것은 긴박한 사건 자체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같은 서사적 목표에 의해 추동되었기 때문이다.

교장에게 성추행당한 청각장애아 연두의 신고를 기점으로 청각장애아 두명의 의문사와 유리, 연두, 민수 등에게 가해진 성폭력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침묵의 카르텔”(196면), 혹은 세련된 합리화 뒤에 숨겨진 권력의 잔인한 네트워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청각장애아들을 위한 교육사업이라는 명목으로 40억 이상을 수령하고도 아이들의 복지사업은커녕 그들을 성적으로 학대해온 자애학원 교장과 행정실장, 생활지도사의 만행은 장애와 가난을 볼모로 한 착취이다. 작가는 이것이 개인적 차원의 폭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학교, 경찰, 검찰, 교육청, 시청, 병원, 변호사, 판사, 교회 등에 이르는 거대한 기득권층의 권력 담합현장을 세세히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입담과 에피쏘드 배치의 묘미가 결합해 속도감을 내면서 기득권층의 위선이 폭로된다. 자기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는 동료교사, 좀처럼 수사를 시작하지 않는 담당형사, 서로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교육청과 시청, 지연(地緣)으로 유착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기 다른 진술서를 쓰는 산부인과 의사, 전관예우를 통해 공소사건을 해결하려 드는 변호사, 성폭행 사실이 입증됐는데도 교장 형제의 과거 공적이라는 것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는 판사 등 그들의 위선적인 진술은 공판을 전후로 하여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교장과 행정실장이 집사로 활동하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목사의 설교는 이익집단으로 전락해버린 교회가 타락한 윤리를 어떻게 재생산해내는지 잘 보여준다. 이것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구원을 찾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기득권층의 횡포는 더욱 증폭된다.

공지영은 『도가니』에서 두가지를 부정의 대상으로 놓는다. 하나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표현한 권력의 교묘하고 잔인한 네트워크이다.‘농아들의 비명’은‘말할 수 있는 자들의 침묵’위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제도권 정치에 이용당하면서 형해화(形骸化)되어가는 현상을 부정한다. 이는 결말에서 자애학원 대책위의 농성 천막이 뜯겨져나간 이유와 관계된 것이다. 인권을 외면하는 불합리한 판결에 항의하기 위해 교육청 앞에 마련한 대책위의 천막은 무진 민주화운동 28주년 기념식을 위해 철거되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메카이며 인권신장의 발상지, 무진에 오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286면)로 시작하는 국무총리의 기념사는 청각장애아 시위대에 물대포를 쏘는 장면과 마주치면서 그 허구성을 드러낸다. 기득권 세력들의 권력적 유착과 민주화운동의 희화화를 부정함으로써 『도가니』는 현정국을 향한 소설 형식의 시국선언이 된다.

이와같이 『도가니』의 비판의식이 잘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고 불투명한 것을 선명하게 그려내려는 작가적 노력 덕분이다. 경계를 지워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만듦으로써 인식을 무기력하게 하는 무진의 안개가 시사하듯이 공지영이 무엇보다 부각하고 싶었던 것은 선명한 현실인식이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선택된 것이 이분법적 대립구도이다. 그녀의 여타 작품들 역시 개별적 특징을 감안하더라도 대체로 대립구도를 잘 활용하고 있다.4 『도가니』에도 여러개의 대립구도가 가로놓여 있다.‘성폭행당한 청각장애아들과 가해자인 교육자들’에서부터‘무진인권쎈터에 모인 사람들과 무진의 기득권층’‘인권쎈터 일을 돕는 최목사와 무진영광제일교회의 젊은 목사’등에 이르기까지 선명한 대립구도가 잡혀 있다. 물론 이것은 90년대 이후 더욱 복잡하고 불투명해진 현실을 가시화하는 데 유효한 인식방법이다. 그러나 세계의 복합성이나 다양한 면모들을 털어내는 이분법의 미망(迷妄)을 근본적으로 떨쳐내기는 어렵다.

좀더 문제적인 것은 『도가니』의 이분법이 한쪽의 자명한 폭력성을 부각하기 위해 다른 한쪽을 희생양으로(만)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성폭행의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는 청각장애아가 권력자들의 희생양이라는 스토리 층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의’희생양(감추어진 구조 원칙)”이다. 이때 희생양은 “하나의 테마가 아니라 하나의‘구조화하는(structurant)’메커니즘”이며 그러한 텍스트는 “희생양 효과에 의해 지배받”5는다. 이 작품은 사건 발생과 공판 과정을 뼈대로 하여 가해자들과‘침묵의 카르텔’을 폭로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자애학원에서 벌어진 성폭력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므로 독자의 분노지수를 상승시킬 수 있는 요소는 권력의 네트워크가 보여주는 위선의 농밀함이다. 그리하여 청각장애아들의 형상은 작가의 비판의식이 가지고 있는 서사적 목표에 복무한다. 예컨대 사건의 핵심인물인 장애아 유리는 처참한 공포에 떨거나 무연한 얼굴로 과자를 먹거나 혹은 천사로 그려지고, 유리의 존재는 권력의 폭력성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킨다. 강인호에게 유리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의 첫만남부터 “파사삭, 파사삭거리며” 부서지는 과자 소리와 “자음과 모음으로 표기되지 않는 그 비명소리”(15면)로 기억된다. 청각장애2급, 지적장애3급의 중복장애를 가진 유리가 형상화되는 방식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상한 비명”(104면), “그애의 입에 남은 마지막 과자가 파삭, 하고 부서졌다”(42면), “연두의 수화를 빤히 바라보며 과자를 파삭파삭 먹고 있었다”(114면) 등 동어반복의 활용이다. 또한 유리는 “발걸음은 놀랍게도 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유리는 작은 천사처럼 가벼이 복도 위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55면)와 같이 천사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유리뿐 아니라 연두나 민수 등도 지속적으로‘맑은 눈빛’‘천사’등으로 묘사되며, 그들은 특별한 갈등이나 의문 없이 강인호 선생의 과거사에 쏟아지는 악플을 댓글로 물리치는‘착한’청소년들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 청각장애아들의 형상은 대체로 기능적 역할에 제한되는 텍스트의 희생양이라고 할 만하다. 처참함과 잔인함은 결국 한쌍이되 이 작품에서는 전자가 후자를 떠받침으로써 우리들의 공분(公憤)을 지속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3. 시련의 도가니: 초월의 욕망과 소시민적 절망

 

“미친…… 광란의 도가니”(225면)에서 보듯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도가니’라는 어휘는 일차적으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놓고 보면‘광란’은 곧‘시련’이기 때문이다. 시련이란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한 단련이 아닌가? 도가니에 해당하는 영어‘crucible’이 십자가나 시련을 뜻하는 라틴어‘crux’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강인호와 서유진에게 무진은‘광란의 도가니’이자‘시련의 도가니’인 것이다. 이 두 축이 『도가니』를 떠받치고 있다.

작가는 실상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소설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서울에서 내려간 기간제교사 강인호를 주목함으로써‘개인의 윤리’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고등학생 제자와 관련된 과거사를 문제삼는 가해자 측 변호사로 인해 강인호가 돌연 절망에 빠져 갈등하다가 결국 인권운동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되는 결말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인호와 서유진이라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중심으로 하는‘시련의 도가니’축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것도 두렵지 않고 고통도 그리 무섭지 않아. 내게 가해진 모든 평판들 소문들도 자기네들끼리 실컷 지껄이라지. 하지만 의미가 사라지는 것, 뭐랄까, 우리의 삶이 그냥 먹고 싸는 것, 돈을 모으고 옷을 사고 하는 그 너머의 무엇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나는 확인하고 싶어. 그렇지 않다면 살아가는 걸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강선생.”(227면)

 

“서선배, 나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나름대로 비겁했기에 별탈없이 대학 마쳤고 별탈없이 살아왔어. 서선배, 그 청렴하고 올바르시기로 유명하던 서목사님 돌아가시고 가난 때문에 힘겨웠다고 했지? 난 모르겠어. 나 하나라면 싸울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 새미…… 내 알량한 정의 지키자고 우리 새미 불쌍하고 불행하게 만들 용기가 내겐 없어.”(262면)

 

첫번째 인용문은 서유진이 강인호에게, 두번째 인용문은 강인호가 서유진에게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부분이다. 이 둘은 마치 거울의 이쪽과 저쪽 같아 보인다. 무진 인권운동쎈터에서 일하는 대학선배 서유진6은 실상 강인호와 짝패로, 그의 한쪽 내면 혹은 거울 저쪽을 형상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존재는 강인호의 편지에서 “정의(正義) 혹은 신성(神性) 혹은 좀더 존귀한 것에 대한 갈망”(280~81면)이라고 표현되고, 서유진의 말에서는 “그 너머의 무엇”이라고 언급되는‘초월의 욕망’을 담지한다. 이것은 속물적인 일상을 뛰어넘는, 생존 이상의 것, 이른바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며 신 없는 신학이라 불리는‘숭고’와 관련된 것이다. 광란의 도가니를 보면서 독자들이 느꼈던 분노의 감정 역시 평소에는 발현될 수 없었던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바꿔 말하면 숭고 체험으로 끌어당겨진 것일 수 있다. 학교에 취직하기 위한‘기부금’을 내는 등 모욕적인 것까지도 참아낸 강인호가 청각장애아의 비명소리에 연루되면서 “존엄한 생명들을 짓밟는 자들과 싸우고 싶어졌”(281면)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거울 이편에 있는 강인호는 그간의 희망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일상적 생존과 타협의 원리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 특히 제대로 결별하지 못한 과거사가 자신을 공격하자 금방 허물어져버리고, 이제 그만 생활인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경고 속에서 도움을 청하는 서유진의 긴급한 문자메씨지를 외면하고 소시민의 생존논리에 무릎 꿇는다. 빗속에서 서유진들이 북소리를 울리며 무진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으로 시위행진을 하는 장면과 강인호가 도망치듯 서울로 돌아가는 장면의 병치는 뚜렷한 대비를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는 이 지점에서 「무진기행」의 편지 모띠프를 변형시켜 희망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한통의 편지는 아내에게 쓴 것인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달라고 고백하지만 결국 이를 찢어버린다. 「무진기행」에서는 윤희중이 하인숙에게 썼던 편지를 찢어버림으로써 무진과 결별하지만, 『도가니』에서는 강인호가 아내에게 썼던 편지를 찢어버린다. 자기가 쓴 편지를 찢는 행위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지만,‘소통’이라는 편지의 장르적 속성을 생각하면 이 행위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찢는 행위는 (서울행을 권하는) 아내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강인호의 내면을 무진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서울로 가면서도 연두의 편지를 끝내 버리지 않는 행동 역시 이를 증명한다. 다른 한통의 편지는 무진에서 온 것이다. 「무진기행」에서는 무진이 침묵하지만, 공지영 소설에서는 무진이‘말’을 한다. 서유진의 편지는 청각장애아들이 자기존중을 배우게 되었고 힘겹지만 운동은 계속되고 있으며‘홀더(홀로 또 더불어)’라는 공동체를 통해 서서히 희망을 실현하고 있음을 전한다. 여기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 네가 우리를 잊었다 해도 우리는 네가 늘 그리울 거야”(290~91면)라는 포용과 사랑의‘말’이다. 공지영은 지식인의 두가지 유형 혹은 한 개인의 두가지 내면의 배치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윤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도가니』는‘지향해야 할 윤리’를 원경(遠景)에 놓는 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희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동시에‘지양해야 할 현재’를 전경화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부끄러움이라는 윤리를 보여준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작품에 위로의 수사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서유진의 편지가 그를 감싸안고 있지 않은가?‘위로’는 투사일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향하고 있는데 이‘위로’가 서술 층위에서도 진행됨으로써 강인호에 대한 연민이 두드러진다.

 

재수생인 명희가 이 주말 부대 앞으로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았지만 그는 당시 자신을 괴롭히던 상사와의 불화 때문에 거의 날마다 살인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억제하는 데 온 힘을 쓰고 있었다. (…) 스물다섯살의 대한민국 육군 보병인 그는 미래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고, 더구나 그 미래 속에 명희까지 넣어 생각하는 것은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주 명희가 찾아왔을 때 병을 핑계로 면회를 거절했다. (…) 그러던 어느날 그는 아마도 마지막이 될 편지를 받았다. 또 대학을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는데 말투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래서 그 담담함을 핑계로 그는 이제 그녀를 잊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죄책감을 덜었다. 가끔은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빌기도 했다. 그랬다. 그런데 그가 제대한 뒤, 학교에 같이 근무하던 선생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녀가 그 겨울의 초입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이다.(259~60면)

 

위 인용문은 강인호가 간과하고 망각했던 사실들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고등학교 제자였던 명희와 자신의 과거사를 회상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스토리 바깥의 존재로 전통적 용어로는 이른바 전지적 작가시점을 보여준다. 『도가니』의 서술자는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인물들의 진술을 직접 보여주거나 행동을 객관적으로 묘사하였으나) 대체로 강인호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초점화(focalization) 방식을 선택했다. 특히 갈등하는 그의 내면을 서술할 때는 위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리(distance) 감각을 살리지 않고 그에게 밀착하여 서술하고 있다. 단적으로 “이 주말”이라는 것도 강인호의 입장에서 서술된 표현이고, 대부분의 내용 역시 당시 행위를 변호하는 어조로 구성되고 있으며, 명희의 자살도 자기와는 관계없는 간접화법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한다. 위의 진술은 비망록 혹은 과거에 대한 알리바이는 될 수 있을지라도‘참회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강인호의 성찰이 자기 존재를 뒤흔들어 윤리를 확보하기보다는 흔들리는 자신을 추스르고 싶은 자기연민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기연민은 강인호에 대한 서술자의 연민 혹은 위로와 직결된 것이며 이는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도가니-되기’를 향하여: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의 윤리

 

서울로 돌아간 강인호에게‘광란의 도가니’와‘시련의 도가니’는 결과적으로 도가니 바깥에서 바라본 인식론적 도가니였다. 과연 쇠붙이를 녹이는‘존재론적 도가니’는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사실 이 작품 곳곳에는 이러한‘도가니-되기’가 실현될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강인호는 순간 어떤 뜨거운 것이 끝없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 그는 자신이 이 아이들과 이미 하나가 되었으며 이들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210면)라든가 “서유진의 얼굴에서는 그녀가 등지고 선 하늘처럼 푸른빛 같은 것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155면)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부로부터 올라오는‘어떤 뜨거운 것’이나 뿜어져나오는‘푸른빛’같은 것은 쇠붙이를 녹이는 도가니의 이미지를 표상한다. 부패한 권력의 네트워크를 부정하면서 작가 공지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도가니-되기’라는 존재론적 전환이다.

그러나 작가는 무진에서 온 서유진의 편지를 “먼 등대 불빛처럼 깜빡거”(278면)리게 원경으로 놓아두되 대다수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한다. 생존논리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이미 이 소설의 도입부에 이렇게 암시되어 있었다. “안개의 품에 빨려들어간 사물들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에 윤곽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버렸다”(7면). 이 문장은 사물들을 병사로 의인화하여 주어로 등장시키고 자기파괴라는 형식으로 안개에 싸인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도가니』의 결말과 호응을 이룬다. 무진을 떠났어도 공감적 윤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곳도 안개 자욱한 무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이라면 「무진기행」에서 이미 보았던 것인데 공지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떼고 있다.

 

서유진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창밖을 응시하는 강인호의 눈이 어룽지면서 잔디밭에 앉은 흰 와이셔츠들이 그의 시야에서 뿌옇게 번져갔다.

그것은 안개 같았다.(291면)

 

강인호의 눈물로 흰 와이셔츠들의 풍경이 뭉개져 무진의 안개 같아졌다는 진술은 한편으로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표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진을‘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바로 앞에 서유진의 목소리가, 그녀의‘말’이 들리지 않던가. 타자의 얼굴을 통해 타자의 윤리학을 주장한 레비나스의 언급은 여기에서 참조할 만하다. “얼굴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며 당신을 저 너머로 인도한다. (…) 얼굴과의 관계는 곧바로 윤리다. 얼굴과 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얼굴은 말한다. (…)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인사요 다른 사람에게 인사한다는 것은 이미 그를 책임지는 것이다. (…) 말을 하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요 그를 책임지는 것이다.”7 서유진의 목소리, 그녀의 말은 레비나스가 언급한‘말하기’의 윤리가 되어 타자에게 응답한다. 무진을 떠나간 강인호에게 서유진은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을 건네고, 강인호는 잊지 않겠다는 것으로 응답한다. 자애학원 청각장애아들과의 첫 대면에서 강인호가 들려주었던 자끄 프레베르의 시 「밤의 빠리」 역시 “너를 내 품에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는‘기억’의 키워드를 내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부끄러움의 윤리는‘기억의 윤리’로 변환되면서 희망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에서 터져나왔던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응답’을 떠올려보면, 그것이‘기억해야 할’대상인 한, 무진의 서유진과 청각장애아들 역시‘당신’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공지영은 『도가니』에서 문학의 정치성을‘윤리’의 문제로 구체화한다. 작가가 추구하는 윤리는 씨뮬라크르 너머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무엇이든 개인이 선택하면 곧 가치가 된다는 개인적 상대주의를 부정하며, 어떤 것이든 취향의 문제로 상대화하여 공준(公準)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이 시대를 비판한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곧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는 논리는 힘의 논리를 애써 외면한 것일 뿐이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얻으려는 공리주의도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서야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도가니』의 형상적 사유가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문화정치가 구닥다리로 만들어놓은 것들을 지금 불러오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공지영이 경계해야 할 함정이 있다. 윤리 그 자체가 문학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바, 윤리가 서사를 압박하거나 서사적 목표가 인물들의 살아 있는 면면을 놓쳐버려 동시대를 사는 시민으로서의 새로운 진실을 끊임없이 발견해나가지 못한다면 결국 문학의 존재의의에서 멀어지거나 심지어는 과거를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작가가 품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자신의 산문집 제목처럼‘괜찮다, 다 괜찮다’라는 무조건적인 연민의 그물에 포획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1980년대 문학을 겪은 바 있는 공지영은 일단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자 한다. 당시 문학이 놓쳤던 것, 즉 개인을 억압하는 공동체주의를 지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이 한국사회의 경직된 보수층과 기득권층의 자기보존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는 동시에 개인의 윤리 문제를 점검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당장의 실천력에서 보면 매우 미약하거나 무력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촛불을 경험한 우리에게, 또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간직하고 있는 작가 공지영에게‘잊지 않겠다’는 강한 부정은 윤리를 구성하면서 하나의 행위가 된다. 그리하여 공지영의 『도가니』는 이 쿨한 척하는 사회를 거스르며 도가니-되기라는 매력적인 미래를 향해 뜨거워지고 싶어하는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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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재봉「‘기득권의 승리’너무나 불편했던 결말」 한겨레 2009.6.30. 『도가니』 출간기념 기자인터뷰를 각 신문사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헤드라인을 비교해보면 무척 흥미롭다. 경향신문의 경우 “나라 전체가 안개도시가 되는 느낌”, 한겨레신문은 “‘기득권의 승리’너무나 불편했던 결말”, 한국일보는 “견제 없는 권력은 폭력으로 이어져,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 주시”를 각각 표제로 삼아 소설의 당대성을 부각한 반면, 중앙일보는 “포털에 연재한 『도가니』 책으로 출간한 소설가 공지영”이라고 객관적 사실만을 뽑았고, 조선일보는 “그늘에 가려졌던 성폭력, 맞설 것인가”라고 하여 성폭력의 문제로 제한했으며, 동아일보의 경우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이 날 움직였다”고 추상화했고, 문화일보는 “독자들은 또‘신드롬’에 빠진다: 베스트쎌러 소설가 3인 신작 잇따라”라고 하여 베스트쎌러에 초점을 맞춘 저널적 관심사만을 드러냈다.
  2. 자끄 랑씨에르,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 도서출판 b 2008, 86면.
  3. 이왕구 「견제 없는 권력은 폭력으로 이어져,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 주시」, 한국일보 2009.7.1.
  4. 최근작 『즐거운 나의 집』을 예로 들어보면,‘엄마’의 세계에 대한 동일시는‘규범적 질서와 경직된 이성’을 뜻하는‘아빠’의 세계를 거부함으로써 가능했다. 졸고 「2000년대 가족서사에 나타난 다문화주의의 딜레마」, 『현대소설연구』 40호, 2009.4.
  5. 르네 지라르 『희생양』, 김진석 옮김, 민음사 1998, 194~96면.
  6. 강인호의 한해 선배 서유진은 서른다섯살로 386세대와는 거리가 멀지만 마치 1980년대 소설 속에서 자주 마주치던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작가는 그녀를 과거와는 다른 인물로 그리기 위해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태어난 아이를 중심으로 일상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어떤 사태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평면적 인물로 형상화된다.
  7.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다산글방 2000, 111~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