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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무엇이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인가
지난호 황정아의 비판에 대한 반론
서동욱 徐東煜
서강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차이와 타자: 현대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들뢰즈의 철학: 사상과 그 원천』 『일상의 모험: 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등이 있음. dwseo@sogang.ac.kr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의 글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은 어리둥절함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무고(誣告)가 가능할까? 만일 적절히 대응하려고 든다면 우선 각 요점별로 무수한 인용들과 어떻게 내 입장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그가 지적했는지를 하나하나 지루하게 설명해야 하는 따분한 일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슬라보예 지젝1
1. 외국이론 수용을 점검하기
지난호 『창작과비평』(2009년 여름호) 인문학 특집에 실린 황정아(黃靜雅)의 글 「묻혀버린 질문: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이하‘황’으로 표시)는 부제가 알려주는 대로‘외국이론 수용의 문제’를 다룬다. 문학과 사회의 여러 현안을 이해하고 문제들을 타개해나갈 사유의 자양분을 얻기 위해 많은 비평가들은 외국이론 공부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런 관심은 단지 최근 우리의 경우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 일반이 성장해나가는 방식 자체의 근본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외국이론이 올바로 수용되고 있는지‘점검’하는 일은 상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작업이며, 나아가 그 자체가 외국이론 수용의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 점검작업이 외국이론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잘못된 비판을 내용으로 할 경우엔, 그 자체 하나의 심각한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가 되며, 비판의 대상이 된 다른 이들의 작업조차 부당하게 훼손된다. 이 글은 황정아가 수행한 점검작업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황정아가 비판적 점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바디우(A. Badiou)나 아감벤(G. Agamben) 등을 다룬 국내 학자와 비평가들의 글이다. 이 글의 필자도 그 가운데 하나다. 황정아는 “〔바디우, 아감벤 등등의〕 이론가를 매개삼아 등장하는 〔국내 논자들의〕 급진적 언사들이 얼마나 탄탄한 인식에 근거하는가를 점검하려는 것”(황, 117면)이 자신의 의도라고 말한다. 이 글 역시 황정아의 저 의도를 충실히 따르면서, 외국이론 수용에서 진정으로 탄탄한 인식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밝혀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떤 면에선 황정아가 수행한 외국이론 수용 문제에 대한 점검에 협력해서, 얼마간이라도 그것을 더 완성에 근접하게 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젝(S. Zizek)의 저 구절에서처럼,‘어떻게 그렇게 많은 무고(誣告)가 가능할까’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황정아의 글이 가진 모든 문제들을 드러내자면, 문장들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 비판하는 긴 글쓰기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을 지치게 할 이 이상적 글쓰기에 욕심을 내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황정아의 외국이론 수용 점검의 기본 문제점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핵심적인 지점들을, 필자에 대한 황정아의 비판을 주로 검토하면서 드러내고자 한다.
2. 아감벤과 법의 위반
계간 『세계의 문학』(2008년 가을호)은 세계적으로 국가 및 법의 차원에서 소외되고 있는 외국인들을 다각적으로 조명해보려는 뜻에서‘외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특집을 꾸민 바 있다. 황정아가 비판하는 필자의 글은 이 특집의 일부로 마련된 「사도 바울, 메시아, 외국인」(이하‘서’로 표시)이다. 외국인들의 사도라고도 불렸던 바울과 메시아주의에 대한 철학적 사색들과 더불어 법과 이방인 문제를 생각해보려는 의도를 가진 글이며, 부제‘익명적 주체 또는 보편주의’가 알려주듯, 메시아적 주체 개념을 통해‘익명성’이란 개념을 숙고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2
필자의 글에 대한 황정아의 비판, 그리고 법과 관련된 제안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주의와‘법의 위반’이란 주제는 관계가 없는데 필자는 그렇게 본다는 것, 바디우와 관련해‘법의 철폐’라는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데 필자는 그렇게 본다는 것, 부당하게 바디우의 메시아론과 레비나스(E. Levinas)의 그것을 연관시킨다는 것, 법의 영역을 천착하기 위해 바디우나 아감벤과는 다른 지젝을 참조하자는 것 등이다. 이 모든 비판과 제안에 문제가 있다. 이제 보겠지만, 황정아는 바디우와 아감벤 등과 관련해서는 그들의 텍스트에 실제 기록된 내용과 반대되는 잘못된 비판을 하고 있으며, 지젝과 관련해서는‘위험한 발상’이라고 스스로 비판했던 사상을 대안적으로 제안하는 이해 못할 일을 수행하면서, “실정적인 법(으로 대표되는 권력기제)”(황, 117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한다. 요컨대 “외국이론을 인용한 몇몇‘윤리’비평이 상당히 급진적인 수사를 동반하는 데 비해 치밀한 점검을 생략하고”(황, 120면) 있다는 황정아의 비판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이 확인할 문제겠지만, 황정아 자신이 돌려받아야 할 평가라고 생각된다.
아감벤부터 살펴보자. 황정아는 말한다. “메시아주의적 주체와‘율법’의 관계가 서동욱이 주장하듯 (그에 따르면 바디우와 더불어)‘아감벤에서 반복(즉결심판)을 통한 토라〔율법〕의 완성은 사실 율법을‘위반’하고‘금지’하는 일이다’는 것으로 귀결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황, 115면). 그리고 결론적으로 황정아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감벤이 메시아주의와 법의 관계를 폐지나 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사실은 분명해진다”(황, 116면). 이러한 황정아의 주장과 달리 아감벤은 메시아주의에서 다음과 같이‘율법의 위반’-더 정확히는‘율법의 위반을 통한 율법의 완성’-을 강조한다.
오히려 그것은 토라의 완성이란 그것의 위반과 일치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급진적인 메시아주의 운동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확신하는 내용으로서, 예컨대 사바타이 제비의 메시아주의 운동은‘토라의 완성은 그것의 위반이다’라는 구호를 내건 바 있다.3
위 국역본 인용(그리고 아래에 나오는 또다른 인용)에서‘위반’은 아감벤의 이딸리아어판 원본에서‘trasgressione’이며,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위반’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4 법의 위반이 법을 완성시키는 일이라는‘역설’을 아감벤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며, 이를 “모든 진정한 메시아주의 전통”(같은 책 134면)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메시아의 도래라는‘예외상태’5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예외상태의 여러가지 역설들 중의 하나는 바로 예외상태에서는 법의 위반과 법의 집행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규칙에 부합되는 것과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전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 이것이 바로 유대교 전통(실제로는 모든 진정한 메시아주의 전통)에서 메시아가 도래하는 순간 벌어지는 상황이다(같은 책 134면).
필자의 글에서(서, 269면) 이미 인용하고 분석하기도 했던 위 구절들이 알려주듯 황정아가 비판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율법의 완성은 그것을 위반하는 일이다’라는 주장은 실은 필자의 것이 아니라, 아감벤 자신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주의가 함축한 율법의 위반이란 주제를 비판한다는 것은 아감벤의 이름을 걸고 아감벤을 비판하는 일이다. 결국 황정아는 필자의 글뿐 아니라 자신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의 텍스트도 잘 읽지 않고 비판하고 있다.
법의 완성은 법의 위반을 통해 달성된다는 것을 아감벤은 잠재성으로서 믿음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과 관련해 이렇게 쓰기도 한다. “그것은 (…) 사실상의 사태들이나 율법상의 사태들을 폐지하고 버리는 데서 작동하고, 그 사태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6 황정아는 메시아주의와 법의 관계를‘폐지’로 볼 수 없다고 말했지만(황, 116면), 아감벤은 문자 그대로‘폐지’라는 표현을 쓰며, 법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폐지를 통해 자유롭게 사용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 번역문에서‘폐지’로 옮긴 말은 이딸리아어 원문으로는‘decreare’이고,7 황정아가 사용한 영역본으로는‘de-create’이다. 말 그대로‘창조(create)’를 접두사‘de’를 통해‘부정’하는 일,‘폐지’의 뜻이다(아감벤이 성찰하는‘법의 폐지와 완성의 일치’라는 메시아주의 사상은‘폐지하다aufhören lassen’와‘보존하다aufbewahren’라는 이중적 의미를 함축하는 헤겔의‘지양aufheben’개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서구 정신의 심오한 유산이기도 하다(A, 99면 참조)). 이렇게 법을 위반하거나 폐지함으로써 법을 성취하는 일을 필자는 황정아가 비판한 논문에서 아감벤의 또다른 개념‘즉결심판’을 사용해 이렇게 정리하기도 했다. “아감벤에서처럼 법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에 대한 즉결심판 또는 그것의 폭발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서, 274면). 즉결심판을 통해 법의 과거적 의미를 폭발시키듯 청산함으로써‘법의 진정한 의미’는 얻어진다는 것이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다.8 하얀 것은 하얗고 파란 것은 파란 이 모든 분명한 사실 속에서 황정아는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
3. 바디우와 법의 철폐
바디우와 관련된 황정아의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점 역시 바디우 자신의 문장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황정아가 필자를 비판하는 요지는 필자가 바디우의 바울론에서 보편주의를 율법의 파괴 및 철폐와 관련해 해석한다는 점이다. “서동욱은 보편주의의 의미를 주로 (율)법의‘파괴’와‘철폐’라는 견지에서 해석해낸다”(황, 107면). 그런데 이와 달리 바디우의 바울론에 나오는 문장들은 “‘법의 철폐’ 같은 도식이 성립하기 어려움을 확인시”(황, 108면)켜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당하게도 필자에 의해서 “바디우의 보편주의는‘(타자/외국인을 차별하는) 율법 철폐’로 환원되는 절차를 거”(황, 109면)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정아의 주장과 반대로 바디우의 바울론은 문자 그대로 법의 철폐를 강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게다가 그리스도라는 사건은 본질적으로 단지 죽음의 제국일 뿐인 율법에 대한 폐지이다.9
그냥‘곁다리로’, 부수적으로 율법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정확하게, 문자 그대로(proprement)” 율법을‘철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디우가 이해한 그리스도라는 사건이다. 위 국역본에서‘율법에 대한 폐지’라고 옮긴 말은 원문에 “l’abolition de la loi”10라고 되어 있으며, 황정아가 참조한 영역본에도 “abolition of the law”라고 되어 있다(영역본 86면).‘abolition’은 우리가 손쉽게 확인할 수 있듯 프랑스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나‘철폐’나‘폐지’라고 뜻을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바디우의 저 표현은 세 나라 말로 된 바디우의 책 가운데 어떤 것에 입각하건‘법의 철폐’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도리가 없다.
바울에게서 법의 철폐가 불가피한 근본적인 이유는 진리가 기존의 법에 포섭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정아는 바디우에서 법과 진리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리와 법의 관계를 시원하게 해명해주기보다는 더욱 의심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황, 108면). 이런 불분명한 말은 아무런 인식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쁘게는 진리가 적극적으로 법에 비판적으로 대항한다라는 바디우의 바울론의 문장들을 가려버린다. “그것〔진리〕은 구조적인 것도 아니요, 공리적인 것도, 법적인 것도 아니다. (…) 진리의 법(loi)이란 존재할 수 없다”(『사도 바울』 32면). 여기까지는 황정아도 동의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바디우의 바울론은 법이 진리와 다르다 또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적극적인‘논박’과‘비판’의 대상으로 겨냥한다(그리고 이렇게 법에 대한 비판과 폐지라는 과제가 먼저 수립되기에 법에 대한 전술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생성을 법에 포섭시키려는 모든 것을 논박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폐기되고 유해한 유대적인 율법과(…)‘그리스적 법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불가피하다”(『사도 바울』 33~34면). 법은‘근본적인 비판’(unecritiqueradicale)과‘논박’의 대상이다. “바울의 계획은 보편적인 구원론은 어떠한 법(…)과도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사도 바울』 85면).
바디우가 긍정하는 법이 있는데, 그 법은‘사랑의 법’으로서 이것은 그 성격상, 철폐되어야 할 율법과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된다(설령 사랑이 “정치적 동맹의 확장의 기회를 놓치지 않”(『사도 바울』 171면)기 위해 기존의 율법을‘전술’의 차원에서 활용하는 경우는 있더라도 말이다(서, 268면 참조). 그러나 이 전술은 다음과 같은 율법과의 단절을 위해 마련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사람에게 사랑은 그가 이행한 율법과의 단절을 완성한다”(『사도 바울』 171면)). 황정아 자신도 사랑의 법이‘기존의’율법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바디우의 바울론을 다룬 논문 「보편주의와 공동체」에서 인정하고 있다. “이 사랑의 법은 기존의 율법과 달리‘금지가 아닌 긍정’이며, 신앙을 지닌 주체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진리의 효력을 발휘하게 하는 역할만 담당한다고 본다”11(우리는 황정아의 이 논문을 뒤에 다른 맥락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보편주의’의 근본이 되는 이 사랑의 법을‘기존의 질서’를 구성하는 율법과 구분하여 바디우는 “문자를 넘어서는 법”(『사도 바울』 167면) “문자적이지 않은 법”(『사도 바울』 168면)이라 부르기도 한다. 메시아주의의 심오한 유산인 탈문자화된 법, 국지적인 지역에 소속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성문화된 법을 극복하는 보편적인 법,‘법이 깨어질 때 도달하는 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런‘역설적 면모’를 지닌 법의 형태를 메시아주의에 대한 오랜 연구 성과인 레비나스의 작품들과 더불어 이해해보려 했다. 바디우와 마찬가지로 레비나스는‘문자로 기록된 법의 파열로부터 시작되는 보편주의’를 이렇게 기록한다. “보편주의는 〔선민(選民)적인〕 특수주의적 문자〔율법〕를 능가한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보편주의는 이 문자를 균열시킨다. 왜냐하면 보편주의는 폭발하는 형태로 이 문자 안에서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12(서, 274면 참조) 유대인의 선민주의를 지탱하고 있던 문자(율법)가‘보편주의의’진정한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 문자는 깨어져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황정아는 필자가 레비나스의 메시아주의에 대한 구절들을 바디우와 아감벤의 메시아주의에 대한 구절들과 관련시켜 논점을 부각시키는 것에 대해 “정치적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솟는다”(황, 109면)고 말한다. 반드시 해명되어야 할 것인데, 도대체‘정치적’정답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학자를 정치적 고려에 따라 정답을 조정하는 자로 취급하려는 듯한 황정아의 저 놀라운 표현은 사실 개념으로서는 성립불가능한데,‘정답’이란 개념은 자기완결적일 뿐 본질적으로 어떤 수식어도 허용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비난을 위한 수사(修辭)가 목적일 경우에 저 말은 제값을 다할 것이다. 바디우 및 아감벤의 메시아주의에 관한 텍스트를, 그들과 비슷한 시대에 현대 유럽사상에서 매우 진지하게 메시아주의를 연구한 학자의 사상과 비교해서 공부하는 것이 왜‘정치적’이란 말을 들어야 하는가? 물론 우리는 레비나스와 바디우 사이의 차이를 잘 알기에 “바디우의 텍스트 곳곳에서 암시되는 레비나스에 대한 반감”(서, 272면)이 있다는 사실을 명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차이는 바디우와 아감벤 사이에도 있다는 것 역시 명시된다(서, 265면 참조). 그러나 이런 차이를 늘 표시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사상들 간의 비교작업은 사상들이 서로 다르다는 전제를 그 자체 안에 함축한다. 근본적인 이유는, 어떤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 채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그 사상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평등을 비롯한 몇가지 개념에 대해 필자가 바디우와 어긋나는 접근을 한다는 황정아의 지적(황, 109면 참조)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어긋나는 주장을 한다’는 지적은 황정아처럼 바디우나 아감벤의 텍스트 자체를 사실과 다르게 전달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 효력을 갖는 것이지, 애초에 어긋나는 사상들을 대질시키는 작업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바디우와 레비나스 철학이 어긋난다는 황정아의 저 지적은 잘 알려진 사실에 대한 확인에 불과하다. 어떤 사상에 대한 비판이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그 사상을 수립하는 내적 논리의 문제점이 겨냥되었을 때일 것이다. 그런데 황정아는 중요한 내적 논리를 문제삼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중지한다. “‘환대’와‘낮은 위치’의 연결이 갖는 논리적 문제점 같은 것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황, 109면).
상반된 텍스트들의 비교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주는 것은 정치적인 일도 나쁜 일도 아니며, 공부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텍스트들끼리 대화하게 만들고 그것들이 숨기고 있는 의미를 쏟아내게 만들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텍스트를 그대로 복사하는 작업인 필경(筆耕)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학자가 되기보다 필경사가 되는 일은, 부바르와 뻬뀌셰가 그랬듯 온갖 사상을 동원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서 만사가 시들해진 뒤에 선택해도 늦지 않는다.
4. 황정아의 두 글과 지젝
황정아는 글의 말미에서 지젝을 참조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 그 글은‘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에 관한 것인데, 이 지젝에 관한 부분만큼 외국이론 수용의 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황정아는 논의를, “법의 영역을 천착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황, 118면)라고 마무리지으며, “법의 편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황, 118면)를 변호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디우나 아감벤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접근한 지젝을 참조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지 모른다”(황, 119면)고 제안한다. 바디우나 아감벤과 전혀 다른 태도를 가졌다고 강조하면서 황정아가 지젝을 내세우는 까닭은, 황정아 자신이 말하듯 “〔바디우나 아감벤에게는 진리나 메시아와 구별되는〕‘법’의 영역에서 이러저러한 입장을 취하고 변화를 도모하는 일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황, 118면)이다. 앞서 우리가 얻은 성찰을 황정아의 이 문장에 요약적으로 덧붙이면,‘기존의’법의 영역 안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저 전제로부터 아감벤과 바디우는 메시아주의와 바울을 다루며 법의 위반(을 통한 완성)과 법의 철폐(를 통한 사랑의 법 구현)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과 더불어 법의 편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바디우와 아감벤을 비판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아감벤에 대해서는 하고 있다. 황정아는 “왕성하게 활동중인 이들〔바디우와 아감벤〕의 진면목이나 사상사적 중요성을 짚어낼 능력은 없”(황, 102면)다고 말하지만, 이 말과 달리 중대한 비판을 내놓고 있다. 아감벤에 대해, “그가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또다른 대립을 들여오고 한 층위에서 발생한 일을 수습하기 위해 또다른 층위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끝없이 물러나기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황, 117면)을 받는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황정아의 이 비판은, 충분히 해명해야 할 중요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위 문장 이상의 설명이 없어서 우리는 황정아가 무엇 때문에, 어떤 근거로 비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감벤 철학에 대해 끝없이 물러나기만 하는‘무한퇴행’의 혐의, 즉 논리적 취약성의 혐의를 두지만 어떤 점에서 그런지 설명은 전혀 해주고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감벤에 대한 황정아의 저 비판이 정당한 것인지 평가하기 위해선 황정아의 설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으며, 이 글에서는 다만 지젝을 참조하자는 황정아의 주장이 가지는 문제점만을 지적할 수밖에 없겠다.
황정아는, 법에 대한 지젝의 발언이 “기존의 질서가 암묵적으로 금지하지만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에 철저히 충실하게 따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전복적이라는 주장과 연결되고‘인권’같은 개념에도 결과적으로 더 적극적인 평가를 내리는 과정을 세세히 따라가는 일이 필요하다”(황, 119면)고 제안한다. 법의 영역을 천착한다는 목적 아래, 철학자들끼리의 “더 정확한 비교를 위해”(같은 면) 그리고 “‘보편주의’와‘평등’이라는 오래된 주제와 다시금 씨름하고 이 주제를 새롭게 조명하”(같은 면)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질서가 암묵적으로 금지하지만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에 철저히 충실하게 따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전복적이라는 주장”은 황정아에 따르면, 지젝의 책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13의 147면에서 150면에 나오는 내용이다(황, 119면 각주 16 참조).
그런데 황정아는 지젝에 관한 자신의 글 「보편주의와 공동체」 말미에서‘결론을 대신하는 몇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면서(황정아, 482면), 지젝의 저 책의 똑같은 페이지의 동일한 내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실상 지젝이 말한‘언플러깅’〔일거에 이루어지는 단절〕이나 내적 위반의 금지로서의 사랑은 다분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잘라내는 윤리적 행위를 강조할 때(FA, 150면) 드러나는 정치적 선명함과 전투성은 한편으로 우리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덕목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떤 억지가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억지는 제아무리 단호해도‘단절’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을 그냥 무시하고 밀어붙이기 때문에 생기며 그런 밀어붙이기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황정아, 482면).
위 인용에 나온 지젝의‘언플러깅’(마치 플러그를 뽑듯 일거에 이루어지는 단절)이라는 개념은 황정아가 설명하고 있듯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잘라내”고 “철저히 법이 외적으로 허용하는 것만 하는 일”(황정아, 472면)을 뜻한다. 이런 일의 예는 지젝이 말하듯, 적들에게 인질로 잡힌 자신의 부인과 딸(“자신에게 가장 귀중한 것”(FA, 150면))을 모두 쏘아죽이고 자신이 따라야 할 원칙대로 행동한 카이저 소제(영화 「유주얼 써스펙트」의 주인공)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FA, 149~50면 참조). 황정아는 이런 식으로 법을 충실히 따르는 일을, 위 인용에서 보듯‘다분히 위험한 발상’‘억지’‘단절로는 해결 안되는 것을 그냥 무시하고 밀어붙여서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는 것’등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호 『창비』 인문학 특집에 실린 「묻혀버린 질문」에선 저 비판을 말 그대로 묻어버리고서, 자신이 비판한 지젝의 주장을‘세세히 따라가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권장하고 있다. 동일한 책의 동일한 페이지의 동일한 내용이 한편에선 억지와 위험한 발상으로 평가절하되고, 다른 한편에선 따라가볼 필요가 있는 대안적 사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결국 위험한 발상이며 억지라고 자신이 판정한 물약을 우리에게 복용해보라고 권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묻혀버린 질문」의 부제가 제기하고 있는, 황정아의‘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이다. 「묻혀버린 질문」의 필자는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라는 화두를 잘 제기했으나, 외국이론을 그때그때 말을 바꿔가며 수용하는 자기 자신이 바로 그 문제라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사안일지도 모르겠는데, 「묻혀버린 질문」의 문제설정과 관련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황정아가 법에 대한 위의 이론을 세세히 따라가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까닭은‘궁극적으로’, “한편에서 계속 발목을 붙잡는 엄연하고 실정적인‘법(으로 대표되는 권력기제)의 영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이다”(황, 117면). 그렇다면 황정아는 자신이 억지라고 평가한 위의 이론이, 실정적인 법을 취급하는 데 실제로 어떤 도움을 주는지 역시 해명해야만 할 것이다. 요컨대 “실정적인‘법’(으로 대표되는 권력기제)”와 대면하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잘라내”(황정아, 482면)고 “철저히 법이 외적으로 허용하는 것만 하는 일”(황정아, 472면), “기존의 질서가(…)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에 충실하게 따르는 일이야말로”(황, 119면) 어떻게 “가장 전복적”인지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가장 전복적’인 결과를 가져올, 기존 질서와 법이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에 충실히 따르는 일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가령 얼마 전, 어떤 사람들은 법대로 잘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던 검찰의 충실한 활동 같은 것도 이런 일에 속하는가?14
5. 나가면서
갑작스레 찾아드는 문제들 때문에 당황하는 우리에게 이론이란 누군가 말했듯 필요한 도구들을 꺼낼 수 있는 기분 좋은 공구상자와 같다. 문제들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무엇이든 찾아내 휘둘러야 한다. 그래서 학자와 비평가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이들의 공부는 바디우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화폐적 추상이 날뛰는 동안 실추된 사유 일반’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사유함의 실추’는 여러가지 얼굴을 하고서 찾아오는데, 가령 얼마 전 우리 주변에선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알려오기도 했다. 실추를 만회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으로 지난호 『창비』 특집은‘이 시대는 어떤 인문학을 요구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으리라. 이런 물음과 더불어,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서로 이야기해보는 것은 늘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근거없는 비판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우리가 방황해야 될 우회로는 쓸모없이 더욱더 길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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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 지젝 「“혹자가 부르기를…”: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에 대한 답변」, 강수영 옮김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인간사랑 2008), 237면. 이하의 모든 인용에서 원저자의 강조는‘ ’로, 인용자의 강조는 고딕체로 표기한다. 〔 〕 안의 말은 뜻을 잘 통하게 하기 위해 인용자가 집어넣은 것이다.↩
- 참고로‘익명성’은 몇년 전부터 필자의 공부의 중심적 화두인데, 가령 「익명의 밤: 최근 시 읽기」(『세계의 문학』 2007년 가을호)에서는 강정, 이원, 조연호, 김행숙, 황병승 등이 보여준 최근 시의 핵심으로‘익명성’을 제시했다. 익명성이 최근 시의 핵심이라는 필자의 생각은 그 뒤에 다른 비평가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익명의 밤」이 쓰인 이듬해에 발표된 이광호의 「익명적 사랑, 비인칭의 복화술」(『현대한국시』 2008년 여름호)이 그렇다. 이광호는 이 글을 최근 출간된 평론집의 표제작으로 삼기도 했는데, 이런 결정은 최근 우리 시에서 익명성이 가지는 중요성을 얼마간 간접적으로 확인해준다.↩
-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옮김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 135면.↩
- G. Agamben, Homo sacer,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Torino: Giulio Einaudi editore s.p.a., 1995 e 2005), 66, 67면.↩
- 이 예외상태는 기존의 권력이 만들어내는 예외상태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르다. “유효한 권력이 그러한 예외상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전복시키는 메시아가 그것을 선포한다는 차이가 있〔다〕”(『호모 사케르』 135면).↩
- G. Agamben, P. Dailey (tr.), The Time That Remains-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 Press 2005), 137면(이하‘A’로 표시).↩
- G. Agamben, Il tempo che resta-Un commento alla Lettera ai Romani(Torino: Bollati Boringhieri 2000), 127면.↩
- 여기서‘즉결심판’이라 번역한‘summary judgment’는 단어들의 뜻 그대로 충실히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텍스트가 이 개념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서」 13: 9~10). 율법들은‘사랑’으로 요약(summary)되고,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지도록‘판정(judgment)’받는 것이다(서, 266~67면 참조). 이렇게 율법에서 과거의 의미들이‘폐지’되고‘하나의’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 즉결심판이 뜻하는 바다.↩
- 알랭 바디우, 현성환 옮김 『사도 바울』(새물결 2008), 165면.↩
- A. Badiou, Saint Paul-La fondation de l’universalisme(Paris: PUF 1997), 91면.↩
- 황정아 「보편주의와 공동체: 기독교를 둘러싼 바디우, 지젝, 니체의 논의」, 『안과밖』 21호(영미문학연구회 편 2006), 465~66면(이하‘황정아’로 표시).↩
- E. Levinas, Quatre lectures talmudiques(Paris: Éd. deminuit 1968), 61면.↩
- S. Zizek, The Fragile Absolute or,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New York: Verso 2000)(이하‘FA’로 표시).↩
- 황정아의 제안과 다른 식으로 현실적인 권력과 법, 그리고 무엇보다‘전복’의 문제를 취급하는 방식들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창비』 같은호 서평에 실린 김종엽의 다음과 같은 가설적 형태의 착상이 눈길을 끈다. “80년 5월에 광주 시민군의 폭력은 법보존적 폭력으로 분식된 법정립적 폭력에 대항하여 국가-법을 파괴하려고 한 (벤야민적 의미에서) ‘신적 폭력’이었던 것은 아닐까?”(39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