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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덕규 李德圭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가 있음. cloudfactory@hanmail.net
복상사(腹上死)
쟁기질하던 낡은 경운기 한대가 보습을 흙 속에 박은 채, 밭 가운데 그대로 멈춰서 있다
평생 흙 위에서 헐떡거리다가
한순간 숨이 멈춰버린 늙은 오입꾼처럼
평소 그에게 시달렸던 잡초들 우북이 달라붙어 그를 헐뜯는 동안
마지막 남은 양기를 한끝에 모아
땅속 깊숙이 쥐어짜 넣듯 일의 뒤를 즐기고 있다
어디든 오래 묵어 자빠진 비알 밭의 속살에 탱탱하게 선 날을 밀어넣으면
고압 전류에 감전된 짐승처럼 심장이 터져라 부르르 떨며 달려가던,
그가 지나온 이랑마다 푸른 정전기 일듯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던가
어느 집도의(執刀醫)가 급하게 열었다 대충 봉합해버린 가슴 언저리 볼트 몇개가 느슨하게 풀려서
무시로 드나드는 바람을 따라 그의 몽롱한 의식 속으로 들어서면
조용하다, 먼지 한톨 없는 엔진실
이모노 합금 바닥에 아직 남아 굳어가는 검은 기름의 침묵이
꺼진 흑백 화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거기, 한 사내가 이제 막 일을 마친 듯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묵한 눈망울을 굴리다 간다
걸음마 걸음마
이른 봄 과수원에
거름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버려진 사과 알들도 속속들이
머금었던 단물을
주르르 내뱉으며 썩고 있다
악취를 풍기며
한뼘 한치 흙 속으로 스며들어가
이제 먼 길 떠나는
섬약한 사과나무의
마른 발등을 적셔주고 있다
지금 저 나무들은
썩고 썩은 세상의 구린 뒷맛을
온몸으로 짚고 일어서는 중이다
봄바람에 지물거리는 눈을
반짝 뜨고
허공을 저으며 조심조심 맨발을 떼는
잔가지 연둣빛 어린싹들의
흔들림 앞에
닿을 듯 닿을 듯 뒷걸음질로
거름을 내며 멀어져가는 한 사내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따라
아장아장 사과나무들이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