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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발명인가

식민주의의 특권화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김흥규 金興圭

고려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문학과 역사적 인간』『한국 고전문학과 비평의 성찰』『한국 현대시를 찾아서』등이 있음. gardener@korea.ac.kr

 

 

1. 문제제기

 

본고는‘통일신라’라는 관념이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발명이라는 최근의 주장을 비판하고,‘삼한/삼국통일’담론이 7세기 말의 신라에서 형성되어 조선후기까지 여러차례 재편성과 전위(轉位) 과정을 거치면서 동적으로 존속해왔음을 해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근년의 탈민족주의 논의가 근대 및 식민주의를 특권화하고 역사이해를 부적절하게 단순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1

논의의 시발점은 황종연(黃鍾淵)·윤선태(尹善泰)가 협업적 구도 속에서 나란히 제출한 두편의 논문이다.2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라가 조선반도의 영토 지배라는 점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위상을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일본인 동양사가들의 연구에서였”으며,3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라는 담론은 “일본 근대역사학의 도움으로 등장한” “근대의 발명품”이었고,4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그 자긍심과 달리 식민주의 담론의 차용에 의존해 비로소 민족통일의 위대한 과거를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 1854~1922)의 『초오센시』(朝鮮史, 1892)가 바로 이런 논의의 거점으로 제시되었다.5

사실이 그렇다면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발견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와 반대로서, 윤선태는 7세기 이래의 수많은 증거와 담론들을 무시하면서 그릇된 논증을 만들어냈고, 황종연은 이를 참조하여 민족주의적 관념과 상상의 피식민성을 논하는 주요 근거로 삼았다. 이것이 특정 사실에 관한 시비에 그친다면 나 같은 고전문학도가 굳이 참견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별적 논점의 차원을 넘어 전근대와 근대를 관통하는 한국사상사 이해에 맞물려 있으며, 식민지 근대성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대표권을 다투는 요즘의 한국 근현대사·문학연구 상황과도 직결된다. 그런 점에서 본고는 한국사의 특정 국면에 대한 논의와 함께 근간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담론 상황에 대한 범례적 문제제기를 지향한다.6

본고를 통해서 나는 민족을 상고시대 이래의 항구적 실재라고 보는 원초적 민족주의를 옹호하려 하지 않는다. 본고의 입장은 어떤 종류의 정체성도 사회적 구성 작용과 담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정체성 형성에 관여하는 담론들은 근대세계에서만 생산되지 않으며, 더구나 식민권력 등의 특권적 주체에 의해 독점된다고 정식화할 수 없다. 민족이라는 거대주체의 서사로 단선화된 역사인식을 비판한 것은 1990대 후반 이래의 포스트주의적 시각과 탈민족주의론이 가져온 값진 성과였고, 황종연이 이에 공헌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진전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근대와 식민주의를 또다른 거대주체로 특권화하여 역사의 복잡한 얽힘을 모두 그 밑에 몰아넣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할 국면에 이르렀다.

 

 

2. 『삼국사기』와 『초오센시』

 

윤선태와 황종연이 제출한‘식민주의 역사학에 의한 신라통일 발명’론의 주요 문제점은 다음 네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째, 하야시 타이스께의 영향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강운동기의 대다수 역사서들을 논의에서 제외했다. 둘째, 하야시 『초오센시』의 신라통일 서술을 과장 해석하고, 해당 대목에 『삼국사기』가 다량으로 차용된 것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했다. 셋째, 7세기 말 이래의 각종 자료와 역사서에 풍부하게 나타나는 삼국통일 담론을 외면했다. 넷째, 전근대 사서들을 살피지 않고 문일평(文一平, 1888~1939)의 신라통일 요인론을 하야시의 차용이라 간주했다.

이 중에서 뒤의 두가지는 각각 3, 4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앞의 둘만을 먼저 논한다. 먼저 첫째의 문제. 윤선태는 자강운동기에 나온 한국사 교과서들의 개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서 논의를 전개했다.

 

〔국사교육의 시급성을 강조한, 1895년 3월의 내무아문 훈시 이후〕‘국민 만들기’구상의 일환으로 등장한 역사교과서가 바로 1902년 김택영의 『동사집략』, 그리고 현채의 『동국사략』(1906), 『중등교과 동국사략』(1908) 등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이 역사교과서들은 김택영이나 현채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하야시 타이스께의 『조선사』(1892)를 거의 그대로 역술(譯述)한 것들이다.7

 

1895년부터 1910년 4월까지 나온 약 20종의 한국사 교과서를8‘… 등’이라는 모호한 표현 아래 묻어두고 윤선태는 하야시의 『초오센시』가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한‘신라통일의 발명’만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여타의 역사 교과서들에서도 신라의 통일이라는 내용은 하야시의 영향과 무관하게 자주 등장했다. 예컨대, 학부(學部)에서 편찬한 『조선역사』(1895)는 668년의 고구려 멸망 기사에 “이 뒤에 신라가 통일하니라”라고 덧붙였고,9 『동국역사』(현채 1899)는‘신라기(新羅紀)’서두의 문무왕 재위기간 설명 뒤에 “통일 전 7년은 삼국기를 보라”고 했다.10 『신정 동국역사』(1906)와 『대동역사략』(1906)은 본문 기사에서 문무왕 8년(668)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서술했다.11 이른바 신사체(新史體)로 씌어진 『초등 대한역사』(1908)는 조금 특이하게 문무왕 10년에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12 이밖에도 대다수의 편년체 교과서들은 통일기를 뜻하는‘신라기’를 그 이전의‘삼국기’와 분리함으로써 체제상으로 신라통일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윤선태는 이 모두를 논의에서 제외하고, 『초오센시』의 역술에 의한 저작은 3건이나 되는 것처럼 과장함으로써 이 시기의 역사 이해를 작위적으로 단순화했다.13

둘째로, 그는 『초오센시』를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원으로 만들기 위해 무리한 논증과 해석을 여러차례 감행했다. 그중에서 우선 주목할 두가지 논점은‘일통삼한(一統三韓)’의 의미와, 삼국통일 시점의 설정 문제다. 이에 관한 그의 주장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통일신라’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은 “하야시가 발명한 것이며, 『조선사』는 그 최초의 역사서”다. 신라 때의‘일통삼한’의식이 조선후기의 신라정통론으로 채택되고 오늘날의 통일신라론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나, “전통시대의 신라정통론과 하야시의 그것”(신라통일론)은 분명히 다르다.

② 『동국통감』 등의 역사서들이 문무왕 8년(668, 고구려 멸망) 이후를‘신라기’로 독립시킨 체제에서 “분명히 신라통일의 의의를 크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하야시의 견해는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시점에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전근대의 신라통일론과 다르면서 민족주의 사학의 내용과 같다.14

 

위의 두 입론은 우선 서로 충돌한다. ①의 주장은 하야시의 『초오센시』 이전에‘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는 관념 내지 담론이 없었다는 것인 데 비해, ②의 주장은 전근대의 신라통일론이 있었으나 통일 시점에 대한 인식에서 하야시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①의 입론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개념을 삽입했다. 일통삼한론(a)과 신라통일론(c) 사이에 신라정통론(b)을 끼워넣고, b와 c가 다르니 a와 c도 같지 않다는 논법이다. 하지만 그런 매개단위가 필요 없이,‘일통삼한’이라는 명제에 동사적 용법으로 쓰인‘일통(一統)’은 곧 통일이며,15‘삼한을 일통하다’라는 구절은 그 자체로서‘삼국을 통일하다’와 지시적 의미의 등가관계가 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터이므로 여기서는 요점만을 지적해두고, 윤선태의 주장 중②의 검토로 넘어가고자 한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하야시가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시점에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의 인용에서 확인되듯이 하야시는 약간의 군사적 충돌 이상의 “전쟁”을 언급한 바 없으며, 따라서 신라의 “승리”라는 것도 거론되지 않았다. 당의 세력이 요동으로 철수한 사실도, 시기도 『초오센시』에는 서술되지 않았다. 황종연이 말한바 당의 군현을 반도에서 “축출”했다는16 내용도 찾을 수 없다.17 요컨대 하야시는 신라·당 사이의 치열한 전쟁과 신라의 승리 및 당 세력의 축출을 의도적으로 서술에서 배제했고, 그 귀결 시점도 언급하지 않은 채 모호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내용이 『초오센시』에 있다고 한 것은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일반적 견해를 투사한 착시(錯視) 내지‘읽어넣기’로 보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초오센시』의 신라통일 경과에 관한 서술 전부를 살펴보자.

 

신라가 당(唐)과 힘을 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했지만, 당은 그 땅을 나누어서 도독(都督) 등의 관직을 설치하고 다스렸다. 신라는 점차 백제의 땅을 취하여 차지하고, 또 고구려의 반란하는 무리들〔叛衆〕을 받아들였다. 당이 누차 꾸짖었으나, 신라가 또한 복종하지 않아서 마침내 병사들이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당이 노하여 〔문무〕왕의 작위를 삭탈하고, 유인궤(劉仁軌)로 하여금 가서 치도록 하였다. 〔문무〕왕은 이에 사신을 보내서 사죄했지만, 마침내 고구려의 남쪽 영역까지를 주군(州郡)으로 삼았다. 대개 무열왕·문무왕 때에 김유신이 충성과 힘을 다해 그를 보좌하고 당 및 백제·고구려 사이에서 외교〔周旋〕를 펼친 끝에 통일의 업을 이루게 된 것이다. 꼴 베는 아이와 목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공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18

 

위의 대목을 인용하고 나서 윤선태는 이것이 “나당전쟁의 승리를 삼국통일의 시점으로 새롭게 설정”하고 “나·당의 대립을 강조”한 새로운 담론이라 했다.19 그러나 『삼국사기』 등의 전통적 사서들과 비교해 볼 때 하야시는 오히려 전후(戰後) 처리에 관한 양국 사이의 갈등과 이로 인한 7년간의 본격적 전쟁을 소규모 군사충돌인 것처럼 희석시켰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초오센시』는‘당이 백제·고구려를 멸한 뒤 그 영토를 지배했으나 신라가 이를 슬그머니 차지했다’는 관점에서, 신라의 영토 점유를 적극적 투쟁이 아닌 절취(竊取)의 결과로 기술한 것이다. 김유신에 관해서도 군사적 활동은 전혀 말하지 않고, 김춘추의 역할에 해당하는 외교를 그의 공적이라 했으니, 이 역시‘나당전쟁’이라는 개념을 회피하려는 은폐수법이다. 이런 관점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920년에 나온 일본사 보충교재 중‘신라 일통’부분의 지도요령은 다음과 같다.

 

신라 문무왕은 반도에서 당의 영토를 잠식(蠶食)하여, 백제의 옛땅 전부와 고구려 옛땅의 일부를 차지하여 통치했고, 나중에 당의 공인을 받았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선태는 하야시의 관점을‘나·당의 갈등’에 결부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야시는 나·당의 갈등 속에서, 당 세력의 대척점에 신라만이 아닌‘백제의 땅(과 인민)’과‘고구려의 반중(叛衆)’이라는 조건을 새롭게 포착하여 배치하였다. 이는 후술하지만 하야시 이후 식민지시대 역사가들에게‘삼국 인민의 융합’으로 형성된 새로운 역사공동체, 즉‘통일신라’를 상상하는 필수장치로 기능한다. 조공·책봉의 사대질서 속에 있었던 전통시대에는 애초 신라의 통일을 나·당의 대립국면에서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21

 

그러나 그가 하야시의 새로운 담론이라고 강조한 “신라가 점차 백제의 땅을 취하여 차지하고, 또 고구려의 반란하는 무리들〔叛衆〕을 받아들였다”는 대목은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기사의 일부이며, 같은 책 「김유신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22 뿐만 아니라 이 대목은 조선시대의 많은 역사서에 거듭 수록되었다.23“조공·책봉의 사대질서” 속에 불가능하던 것을 하야시가 새롭게 포착했다고 윤선태가 단언한 내용이 사실은 전근대 한국 역사서들의 공통 유산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왜 이 많은 자료들이 보이지 않은 것일까.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가 의도한 바는 “신라의 통일을 나·당의 대립국면에서 찾”는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 사실은 하야시의 발명을 받아 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해석을 실제 증거와 결합하면 12세기의 김부식이 민족주의 역사학의 선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7세기 말의 상황과 삼한통일 담론

 

위에 논한 문제점만으로도 하야시의 『초오센시』가 신라통일론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무너진다. 그러나 이왕 거론된 논점을 좀더 충실히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삼한통일’담론이 7세기 말에 생성된 내력과 그 정치적 함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통일/일통’의 목적어로 쓰인‘삼한(三韓)’의 의미를 먼저 짚어보자. 삼한이란 삼국시대 이전에 있었던 마한·진한·변한의 합칭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이다. 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이 말이 흔히 고구려·백제·신라의 합칭으로, 혹은 이 세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하(遼河)의 동쪽과 한반도지역 전체의 통칭으로 쓰였고, 그러한 용법이 고려·조선시대까지도 널리 계승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노태돈(盧泰敦)이 상세히 논한 바 있으므로24 여기서는 7~8세기에 편찬된 중국·일본 역사서와 국내외 금석문, 외교문서 등에서 삼한이 흔히 삼국(의 강역)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는 점만을 강조해둔다.25 그중에서도 다음의 두가지 예를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 공〔부여융〕은 그 기세가 삼한을 뒤덮었고(氣蓋三韓)… <夫餘隆 墓誌, 682>

• 증조인 대조(大祚)는 본국〔고구려〕에서 막리지에 임용되었으며, 병권을 장악하여 기세가 삼한을 제압하고(氣壓三韓)… <泉獻誠 墓誌, 701>26

 

백제의 마지막 태자였던 부여융, 그리고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연대조를 탁월한 영웅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글들은 모두 삼한이라는 공간을 환기했다. 삼한은 이들이 속한 왕조의 경계를 넘어서되 당·왜국 등과는 구별되는, 초국가적 지역 단위로 인지되었다.

이런 의미의 삼한은 신라·고구려·백제의 합칭인 삼국과 지시적 의미가 대등하면서 좀더 깊은 역사적 함축을 내포한다. 즉 먼 옛날 삼한 시절부터 삼국이 병립한 당시까지의 시간적 깊이가 세 나라를 포괄한 공간관념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이것이 7세기 중엽 정도의 단계에서 뚜렷한 역사적 동일체 의식에까지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삼한이라는 지역 외부의 타자들(중국, 일본, 기타 북방세력)과 구별되는 지리적·역사적·풍속적 친연성에 대한 인식이 삼국 사이에, 그리고 외부의 타자들과 삼국 간에 어느정도 조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27 그러나 642년 백제 의자왕의 대야성 공략 이후 본격화된 26년의 전쟁기간에 이 친연성의 인식은 삼국 간의 적개심과 패권적 욕구를 조금도 중재하지 못했다. 신라가 7세기 중엽 이전부터‘통일’의 목표의식을 견지했다는 예전의 해석은 민족주의적 관념으로 인과관계를 역산한 것이라 본다.28

삼한통일이라는 관념 내지 정치적 수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669년(문무왕 9년)부터 686년(신문왕 6년) 사이로 추정된다. 당(唐)과 협력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귀환한 이듬해(669), 문무왕은 교서(敎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날 우리 신라는 두 나라〔백제, 고구려〕와 사이가 벌어져 북쪽을 치고 서쪽을 침공하느라 잠시도 평안한 해가 없었다. 군사들은 뼈를 드러낸 채 들에 쌓이고 몸뚱이와 머리가 서로 멀리 나뉘어 뒹굴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가엾게 여기시어 임금의 존귀함도 잊으시고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고자 대궐에 이르셨거니와, 이는 본디 두 나라를 평정해 길이 싸움을 없이 하고, 여러 대 동안 깊이 맺힌 원한을 씻으며, 백성들의 가련한 목숨을 보전하고자 함이었다. (…) 이제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고 사방이 잠잠하고 태평해졌다.29

 

그해 2월 21일 이전의 모든 죄수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을 널리 구휼하는 등 은전을 베풀며 역사적 대업의 완수를 천명한 이 문서에 삼한통일에 해당하는 용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두 적국을 평정했다(兩敵旣平)는 말이 상황인식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당시까지‘평정’은 신라 정권의 지상목표였고,‘통일’이라는 더 상위의 명분을 위한 수단으로 담론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와 대조하여, 686년에 세워진 「청주시 운천동 사적비」에서 “삼한을 통합하여 땅을 넓히고, 창해에 자리잡아 위엄을 떨쳤도다(合三韓而廣地, 居滄海而振威)”라는30 구절이 주목된다. 여기서‘평정’이라는 군사적 행위는 언표의 뒤로 물러나고‘통합’이라는 궁극적 성취가 부각되었으며, 바다로 둘러싸인 영역 전체를 통할하는 국가의 자부심이 강조되고 있다. 옛 백제지역에 건립되는 한 사원의 비문에 담긴 이 단서는 신라 정권의 중앙부에서 이미‘평정으로부터 통일로’의 담론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신문왕(재위 681~91) 집권 초기에 당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태종무열왕 묘호 시비가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신라는 무열왕이 661년에 사망한 뒤‘태종무열왕’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그런데‘태종(太宗)’이라는 칭호는 당 태종(재위 626~49)과 같은 것이어서, 이를 고치라고 당이 요구하는 사태가 신문왕 초기에 발생했다.31 이에 대해 신라는 수용할 수 없다고 응답했는데, 그 이유는 무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했으므로‘태종’이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32 그런데 무열왕은 백제를 멸하고 난 이듬해에 사망했고, 당시 고구려는 어떤 세력에게도 만만치 않은 국가로 엄연히 존재했다. 따라서 그의 업적을 삼국통일이라 내세운 것은 문무왕 때의 고구려 공파(攻破)까지 무열왕의 유산으로 이해한 것이 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통일이라는 명분가치의 소급현상이다. 즉 무열왕은 숙적 백제를 제거한 업적으로 태종이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670년에서 681년 사이의 기간에 백제·고구려와의 전쟁과 당의 축출이라는 과정 전체를 통일이라는 더 숭고하고 지속적인 명분으로 흡수하는‘기억의 재편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같은 변화가 그저 수사학적 필요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삼한통일이라는 명제는 669년 이후 신라가 절박한 상황적 계기들에 대응하면서 필요성을 느끼게 된 설득, 회유, 수습의 언어적 상관물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했으며, 676년에 당이 삼한지역 지배욕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먼 훗날까지의 경과를 알고 작성한 연표 위의 지식이다. 당시의 상황은 모든 관련 세력들에게 불확실했고, 적과 우군의 경계가 유동적이었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한 뒤에도 백제 부흥세력의 저항은 치열했다. 당은 그 영토의 직접 지배를 꾀하면서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하게 했다. 그가 죽고 나서는 손자 부여경이 명목뿐이지만 왕위를 이었다(686). 또다른 왕자 부여풍과 함께 백제 부흥세력을 지원했던 왜(倭)는 663년의 백강구 전투에서 패퇴했으나, 다시 신라의 배후를 치지 않으리라고 안심할 수 없었다. 당은 평양성 함락 때 포로가 된 보장왕〔高藏〕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옛 고구려지역에 대한 영향력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에 봉했다(686).33 보장왕의 외손 안승(安勝)은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에 의해 추대되어 왕으로 즉위했다가 전략적 이견 때문에 그를 죽인 뒤 신라로 투항했다.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지역기반이 다른 금마저(金馬渚, 현재의 전북 익산)에 그 집단을 자리잡게 했으며, 왜국에 이 소고구려의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34 한반도에서 퇴각한 당은 678년에도 신라‘정벌’을 단행하려다가 티베트 전선의 부담 때문에 포기했다.35

요컨대 백제·고구려의 패망 이후 다양하게 출몰하는 저항집단과 신라와 당의 대결상황은 극히 복잡한 다자관계를 조성했다. 이처럼 불안정한 상황에서 백제·고구려의 잔존 저항세력을 약화시키고 지역 지배층과 유민들을 흡수하려는 노력이 삼한통일이라는 명제의 모태가 되었다.

삼한이라는 집합명사에 삼투되어 있던 지리적·경험적 친연성의 기억은 이를 위해 매우 유용했을 것이다. 근년에 여러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7세기 후반의 이 전쟁은 신라, 백제, 고구려, 당, 일본이 직접 참여하고, 티베트 등의 북방세력이 간접적 변수로 작용한 동북아시아 국제전의 양상을 지닌다. 삼한통일이라는 개념은 이 다자 사이의 관계를 삼한의 내부와 외부로 구획하고, 내부적 통합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담론 구도를 가능하게 했다.‘통일/일통’의 목적어로서‘삼국’보다‘삼한’이 훨씬 더 많이 쓰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삼한통일 담론은 7세기 후반 이래 신라의 왕권 강화에도 중요한 몫을 하여, 무열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 중대(中代)의 전제왕권이 신문왕 대에 와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무열왕·문무왕은 삼한통일의 위업을 이룬 군주로서, 신문왕은 그것을 계승하고 수호하는 군주로서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통일적 왕권체제를 강화해나갔다.

이후의 신라사에서도 삼한통일은 종종 강조되었다. 금석문 자료만을 들자면 「성덕대왕신종명」(771) 「황룡사 구층탑 찰주본기」(872) 「봉암사 지증대사탑비」(893) 「월광사 원랑선사탑비」(890) 등이 그 잔존 증거들이다. 이 중에서 속칭 에밀레종으로 널리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銘文) 일부를 보자.

 

紫極懸象 黃輿啓方 하늘에 천문이 걸리고 대지에 방위가 열렸으며,

山河鎭列 區宇分張 산과 물이 자리잡으매, 강역(疆域)이 나뉘어 펼쳐졌다.

東海之上 衆仙所藏 동해 가에 뭇 신선이 숨은 곳,

地居桃壑 界接扶桑 땅은 복숭아 골짜기에 머물고 경계는 해뜨는 곳에 닿았는데

爰有我國 合爲一鄕 이에 우리나라가 있어, 합하여 한 고을이 되었다.36

 

천지개벽의 시점에서부터 웅장하게 시작하는 이 글에서 제3, 4구가 각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산과 물이라는 자연조건에 의해 인접지역과 나뉜 삼한세계를 하나의 풍토적 영역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자연적 구역은 제9, 10구가 노래한 통합에 의해 정치적으로도 타자들과 구별되고 또 길이 유지되어야 할 공동체의 공간〔一鄕〕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지리적 자연성을 인문적 통합으로 완수한 것이라는 서사에 의해 삼한통일은 깊은 내력과 당위성을 지닌 업적으로 기억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그러한 통일관이 신라사회에 폭넓게 수용되었는지, 혹은 “경주 중심의 지배층인 골품귀족의 의식이었을 뿐”37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신라에 의한 삼한/삼국통일이라는 관념이 670년대 무렵에 등장하여 여러가지 담론 행위와 매체를 통해 한국사의 공간에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북방에서 발해(698~926)가 등장한 것은 삼한통일 관념의 완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 난처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혹은 이 도전의 압박 때문에, 신라 조정과 지식인들은 발해를 애써 말갈(靺鞨)과 연관시키면서 삼한통일의 명분을 견지해갔다.38

고려 건국기의 삼한통일론은 이러한 유산을 상속하여 고구려 중심적 시각으로 재편성했다.39 삼한이라는 명사는 고려 때에 와서‘왕조와 시대의 경계를 넘어선 역사적 동류집단과 그 영토’라는 의미가 더욱 뚜렷해졌고,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그러한 당위적 일체의 분열을 극복한 위업으로 강조되었다. 이를 통해 좀더 뚜렷해진 정체성 정치의 구도 위에서 고려는 중앙집권적 통합을 추구하고, 송·거란·금·원 등의 타자들과 긴장·교섭하면서 독립된 정치적 강역을 유지하고자 했다.

조선왕조는 출발단계에서부터 신라와 고려에 의한 통합의 상속자로서 역사적 계보의식을 분명히했다. 그러한 의식은 「국조오례의」 등의 국가제례와 각종 역사서 및 문집들에 풍부하게 나타난다. 고구려, 발해의 강역이 일실된 데 대한 비판과 함께 통일의 불완전성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그러한 담론 자체가 통일의 당위성을 전제한 위에서 생성된 것이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1778)은 역사지도로서 「신라통일도」를 「고려통일도」와 함께 제시했다(지도 참조). 삼국/삼한통일이라는 기억과 주요 인물, 사건, 장소들은 수많은 한시문에서 회상되고, 「삼한습유」 같은 소설의 낭만적 공간으로 채용되었으며, 다양한 민간전승과 신앙으로도 전이되었다.

 

『동사강목』의 신라통일도

『동사강목』의 신라통일도

 

4. 하야시 타이스께, 『동국통감』, 문일평

 

위에 논한 것처럼 풍부한 자료가 있음에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인식이 하야시 타이스께의 발명이라는 윤선태의 주장은 황종연에게도 수용되었다. 그리고 황종연은 일본인들이 근대 조선인들에게 “통일신라라는 관념을 확립시키고”, 신라를 “자기인식과 자기개조의 주요 수단으로” 발견할 여건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40

그런 관점에서 황종연이 장편소설 『무영탑』(현진건)과 『원효대사』(이광수)를 해석한 내용에 대하여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두 작품의 논의에는 매우 흥미로운 가운데 일부 공감하기 어려운 국면들이 있지만, 소설에 관한 이견은 흔히 순환론의 대립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보다 위의 작품들에 접근하는 시각의 모형으로 거론된, 문일평의 신라통일 요인론과 하야시 타이스께의 관련 문제를 검증해보고 싶다. 이 경우에는 시각의 타당성을 검토할 만한 기반이 분명하다. 황종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일평은 하야시 타이스께와 같은 방식으로 신라의 통일을 설명한 글에서 “신라의 인화(人和)”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 화합의 도덕이 “의열무용(義烈武勇)의 정신”과 결합하여 발휘된 까닭에 신라는 원래 약소국임에도 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신라인의 화합에 대한 그의 언급이 식민지 정부하의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쩌면 야마또(大和)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를 포함하고 있을지 모를, 정치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암시한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처럼 일본인이 발견한 신라로부터 당대 조선을 위한 의미와 상징의 저장소를 만들어내는 것, 일본인이 구축한 신라라는 상상계를 조선민족의 문화적 자원으로 전유하는 것은 1930년대가 지나는 동안 조선인의 지적·예술적 작업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41

 

위의 대목은 문일평의 신라통일 요인론이 “일본인이 발견한 신라로부터” 나온 것이며, 이처럼 식민주의 담론에서 차용된 재료로 민족적 상상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한국 민족주의와 그 실천의 불가피한 식민성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문일평의 신라통일론은 과연 『초오센시』로부터 나온 것인가? 이에 답하기 전에 『초오센시』의 신라통일 요인론을 직접 살펴보자.

 

①고구려·백제는 나라를 세운 것이 신라보다 나중이고, 멸망한 것은 신라에 앞선다. 신라가 홀로 남아 260여년의 국맥을 더 보존한 것은 어째서인가? ②땅의 넓이에서 고구려·백제는 모두 컸고 신라는 그 반쯤이었다. 군대의 수를 비교해도 또한 반드시 두 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때문에 침범의 화를 입어서 쉴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신라가 두 나라보다 나은 것이 있었으니, 곧 인화(人和)와 지리(地利)다. ③신라는 군주가 어질어서 백성을 사랑하고 신료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겼다. *그 법에 전사한 이를 후하게 장사지내고 관작과 상을 내려서 일족에 미치게 했다. ④이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충신(忠信)을 중시하고 절의를 숭상했다. 전투에 임하여는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삼고, 물러나 사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⑤백제가 멸망할 때는 다만 계백(階伯)이 있었고, 고구려가 멸망할 때는 한 사람도 충절에 죽는 이가 없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전쟁을 벌인 이래 왕사(王事)에 죽는 이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니(귀산, 추항, 찬덕 부자, 해론, 눌최, 동소, 죽죽, 비령자 부자, 김흠운, 예파, 적득, 보용나, 반굴, 관창, 필부, 아진금, 소나, 김영윤, 취도, 부과, 탈기, 선백, 실모의 무리는 모두 죽음의 절의를 다한 신하로서 더욱 빛나는 이들이다), 이 두 나라가 결코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42

 

위의 대목에 보이는 하야시의 역사론은 자못 조리있고, 구체적 예시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글은 그의 학식에서 생성된 논술이 아니라 『동국통감』(1484)의 3개 사론(史論)에서 발췌한 네 토막과 『삼국사기』의 한 구절을 짜깁기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 중 머리에 *표 한 문장을 빼고는 다음의 원전을 번역한 데 불과하다.43

 

①新羅爲國, 兵衆不如麗濟, 土地不如麗濟, 形勢不如麗濟. 卒之二國先滅, 而新羅獨存, 何耶?(권7, 을묘년〔565〕); ②甲兵之衆, 土地之廣, 羅不及麗濟. 只以地利人和, 僅守疆域, 今日敗於濟, 明日敗於麗.(권9, 계유년〔673〕); ③新羅, 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김유신전」, 『삼국사기』); ④大抵新羅之俗, 尙忠信, 崇節義, 臨戰則以進死爲榮, 退生爲辱.(권7, 을묘년〔565〕); ⑤新羅自麗濟構兵以來, 其俗以進死爲榮, 退生爲辱. 死於王事者, 悉未縷擧. 曰貴山, 曰夈項, 曰讚德父子, 曰奚論, 曰訥催, 曰東所, 曰竹竹, 曰丕寧子父子, 曰金欽運, 曰穢破, 曰狄得, 曰寶用那, 曰盤屈, 曰官昌, 曰匹夫, 曰阿珍金, 曰素那, 曰金令胤, 曰逼實, 曰驟徒, 曰未果, 曰脫起, 曰仙伯, 曰悉毛, 此其章章者. 其餘死節亦多. 百濟之亡, 只有階伯, 高麗之亡, 無一死節者.(권9, 갑신년〔684〕)

 

일본 근대사학이 한국 민족주의 사학에 끼친 영향을 주장하는 데 쓰인 위의 논거가 사실은 15세기 조선 사대부들의 담론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의 흥망과 관련하여 인화의 중요성을 거론한 것은 『삼국사기』부터라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보장왕 27년 기사에 붙인 사론에서 “천시와 지리가 인화만 못하다”(天時地利, 不如人和)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고, 고구려가 폭정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지배층 내부의 분열로 패망했다고 논했다. 이런 관점이 조선시대에 상속되어 신라통일 요인론으로 확장된 것이다. 문일평은 맹자의 이 구절을 거론하고, 그 다음 문단에서는 『삼국사기』의 「김유신전」에 등장하는 소정방의 말을 한문으로 인용하면서 인화가 신라의 성공을 가져온 중심요인이라고 결론지었다.44 이를 종합해볼 때 문일평의 신라통일-인화론은 『삼국사기』를 주로 참고하고, 『동국통감』 등의 사론을 참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위에서 검증한 바는 특별히 심오한 난제가 아니다. 전근대 한국의 역사학 전통과 담론 유산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초오센시』의 문제 대목이 근대의 창신(創新)일까라는 의문이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황종연이 동료 역사학자와 함께 아무런 의심 없이 하야시 발명론으로 기울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근대와 식민주의를 특권화하는 방법론적 유혹이 여기에 개재하지 않았는가 하고 나는 염려한다. 다시 말하면, 역사연구에서 전근대의 유산과 기억이라는 요인은 하찮게 여기면서 근대의 발명·변혁을 강조하고, 근대라는 시공간에서는 식민주의 헤게모니를 역사적 운동의 제1원인으로 가정하는 논법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이다.

이제는 경박한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발명’이라는 술어에 그러한 편향이 배어 있다. 이 말은 역사의 다선적 얽힘과 중층성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한다. 그리고 발명 이후의 국면을 그 앞시기에 대해 특권화하고, 발명의 권력/주체를 여타 행위자들에 대해 특권화한다. 두아라(P. Duara)는 이런 발명 관념이 역사연구에서 성행하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이 상투어에는 “과거가 발휘하는 인과적 효과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연속성과 변화가 매우 미묘하고도 복잡하게 얽힌 과정들을 무시하는 단순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45

차크라바르티(D. Chakrabarty)는 『근대성의 거울: 근대 일본의 발명된 전통들』이라는 논집에 붙인 비평적 후기에서 수록 논문들의 의의를 긍정하면서도, 근대적 발명론의 과잉에 대해서는 뼈아픈 비판을 제시했다.

 

발명된 전통들이 그것들 자체의 결과성에 대한 계보학을 필요로 한다 해도, 그러한 계보학의 어느 것도 사상들의 목록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사상은 육체적 실천의 역사를 통해 물질성을 획득한다. 사상들은 논리로써 설득하기 때문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감각을 문화적으로 훈련하는 길고도 이질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의 내분비선과 근육과 신경망에 관련을 형성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억(memory)의 작용이다. 우리가 이 말의 의미를 외우기(remembering)라는 단순하고 의식화된 심적 행동의 뜻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과거는 감각들을 훈련하는 긴 과정을 통해 구현되는 것인바,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이 다른 면에서 계발적이기는 해도, 내가 아쉽게 여기는 점은 일본적 근대성의 주체가 지닌 이런 측면의 깊은 역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46

 

이런 입장에서 그는 “근대 일본의 자본주의적, 국가주의적 조건 아래 발명된 전통들”에 관한 연구에 “체화(體化)된 실천들의 연쇄로서의 과거”가 삽입되기를 요망했다.47 자료와 논증이 취약한‘통일신라 근대발명론’에 동일한 주문을 하기란 과분한 감이 들지만, 그런 결함을 피했더라도 위와 같은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은 앞으로의 진전을 위해 말해두고 싶다.

 

 

5. 맺는 말

 

‘신라통일’이라는 관념은 하야시 타이스께의 『초오센시』에서 발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백제·고구려 붕괴 이후 동북아시아의 불안정한 정황 속에 신라가 당과 대립하면서‘삼한’이라는 역사지리적 어휘의 함축성을 불러내고 정치적 내부와 외부를 구획하는 담론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성립했다. 삼국의 영토 전부를 포용하지 못한 점에서 그 개념 실질은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삼한통일의 자긍심을 강조했다. 고려는 이러한 유산을 재편성하면서 정체성의 근거를 심화하고자 했고, 조선시대에도 삼한통일론의 기억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환기, 재조정되었다. 이를 도외시한 채 삼국통일과 관련된 신라사 인식이 모두 식민주의의 산물이며 민족주의 역사학은 이를 받아쓴 데 불과하다고 보는 것은 자료상으로 지탱될 수 없고, 방법론적으로도 식민주의의 특권화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흔히‘식민지 근대성론’이라 불리는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은 근대의 왜곡된 가치와 문제를 넘어서는 데 그들의 목표가 있다고 말한다. 동감할 만한 목표 설정이다. 그러나 이를 위한 실천에서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복잡한 작용과 역사의 중층성을 근대중심적으로 단순화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던가? 식민 상황의 헤게모니 구도 속에서도 식민지인이 단순히 수용·반응의 2차적 주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 나름의 기억과 욕구를 가진 능동적 행위자일 수 있다는 것이 소홀히 여겨지지는 않았던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접두사‘post’가‘넘어서’의 방향이 아니라‘다시’(re-colonialism)의 길로 구부러진 적은 없었던가? 글을 마치면서 이런 질문이 다시금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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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의 초고에 대해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동료 학자들이 보내준 논평과 조언에 감사한다.
  2. 황종연 「신라의 발견: 근대 한국의 민족적 상상물의 식민지적 기원」, 황종연 엮음 『신라의 발견』(동국대출판부 2008), 13~51면; 윤선태 「‘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역사학의 성립」, 같은 책 53~80면.
  3. 황종연, 앞의 책 21면.
  4. 윤선태, 앞의 책 69, 78면.
  5. 하야시 타이스께의 『朝鮮史』를 같은 이름의 역사서나 일반명사와 구분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그 일본어 발음대로 『초오센시』라 표기한다.
  6. 이와 관련한 선행 논문으로 김흥규 「정치적 공동체의 상상과 기억: 단절적 근대주의를 넘어선 한국/동아시아 민족 담론을 위하여」, 『현대비평과 이론』 30호(한신문화사 2008년 가을) 참조.
  7. 윤선태, 앞의 글 57면.
  8. 이들은 대부분 『한국 개화기 교과서 총서』(아세아문화사 1977) 제11~20권에 수록되어 있다.
  9.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1권(아세아문화사 1977), 58면.
  10.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4권, 121면.
  11.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9권, 65면;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8권, 111면.
  12.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4권, 385면.
  13. 이와 관련하여 윤선태는 두가지 오류를 범했다. 첫째, 김택영의 『동사집략』은 총 570면이 넘는 규모로 고조선부터 고려말까지를 다룬 편년체 순한문 역사서로서, 『초오센시』의 역술이 아니다. 『동사집략』의 단군 기사와 임나일본부설 등 일부에 하야시 또는 일본 사서를 수용한 곳이 있기는 하나(조동걸 『현대한국사학사』, 나남 1998, 92~94면 참조), 이 책을 『초오센시』의 역술이라 함은 실제 자료를 살피지 않았다는 고백에 불과하다. 둘째, 현채가 낸 두 책은 동일 저술의 선후 관계로서, 1906년의 초판에 1894년 이래의 역사를 추가하여 1908년의 증보판이 나온 것이다.
  14. 윤선태, 앞의 글 58~59면.
  15. 『漢韓大辭典』(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99)은‘一統’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①하나로 합침. ②한 계통, 같은 계통. ③비석 따위의 일 좌(座). ④전한의 유흠이 만든 삼통력에서의 소주기, 곧 1539년.” 이 중에서 동사적 용법이 가능한 것은 ①뿐이며, 그 의미는‘統一, 混一’과 대등하다. 『漢語大詞典』(2002)도 이와 같다.
  16. 황종연, 앞의 글 21면.
  17. 이 여러 사항들은 하야시가 1912년에 낸 『朝鮮通史』(東京: 富山房)에서도 같다.
  18. 林泰輔 『朝鮮史』(東京: 吉川半七 1892), 권2, 장32. 번역은 원문의 뜻을 유지하되, 비교를 위해 윤선태의 번역문과 가깝도록 조정했다. 이 번역을 포함하여 일본어 자료 해석을 도와준 박종우 연구교수께 감사한다.
  19. 윤선태, 앞의 책 60면.
  20. 조선교재연구회 엮음 『尋常小學日本歷史補充敎材 敎授參考書』 권1(조선총독부 1920), 62~63면. 신라통일에 관한 일제 총독부의 입장은 신라가 성덕왕 34년(735)에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하사”받음으로써 “일통의 업이 명실공히 온전하게 되었다”는 쪽이었다. 같은 책 67면 참조.
  21. 윤선태, 앞의 책 60면. 괄호 속에 삽입된‘인민’은 『초오센시』에 없다.
  22. “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使人守之”(문무왕 14년); “法敏王, 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有之”(「김유신전」). 고구려 땅 남부 점거 사실과 “꼴 베는 아이” 대목도 다음 구절들을 옮긴 것이다. “遂抵高句麗南境爲州郡”(문무왕 15년), “鄕人稱頌之, 至今不亡. (…) 至於栴童牧豎, 亦能知之.”(「김유신전」)
  23. 다음의 주요 사서들이 모두 그러하다. 『三國史節要』(1476) 『東國通鑑』(1485) 『東國史略』(朴祥, 16세기초) 『東史簒要』(1614) 『東史補遺』(1646) 『東國通鑑提綱』(1672) 『東史綱目』(1778) 『海東繹史』(19세기초).
  24.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풀빛 1998), 73~116면 참조.
  25. 『隋書』(636) 「虞綽傳」 「高句麗傳」; 『日本書紀』(720) 卷十応神天皇卽位前紀, 卷十九欽明天皇十三年, 卷二五大化四年二月壬子朔 등 여러 곳; 「泉男生墓誌」(679); 「夫餘隆墓誌」(682); 「淸州市雲天洞寺蹟碑」(686); 「泉獻誠墓誌」(701) 등.
  26.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엮음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I(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519, 547면.
  27. 『梁書』(629)를 비롯하여 『隋書』(636) 『北史』(659) 『舊唐書』(945) 등 중국의 사서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풍속·의복·형법·조세제도 등의 친근성을 기록한 것도 삼국 안팎의 이런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28. 이같은 비판적 인식은 노태돈, 서영교 등의 근간 저작에 구체화되어 있다.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서울대출판부 2009); 서영교 『나당전쟁사 연구』(아세아문화사 2006) 참조.
  29.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6, 문무왕 9년조. 번역문은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 I, 한길사 1998, 176면.
  30.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II, 144면.
  31. 이 사건이 『삼국사기』에는 신문왕 12년(692) 당 중종이 사신을 보내서 발단한 것으로, 『삼국유사』에는 신문왕 초기에 해당하는 당 고종(재위 649~683) 때의 일로 기록되었다. 전자는 중종이 당시 폐위상태였던 점에서 연대의 신빙성이 희박하고 후자의 상황적 개연성이 높으므로 이를 신문왕 1년(681)의 사건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따른다. 서영교, 앞의 책 306~307면; 노태돈, 앞의 책 278~79면 참조.
  32. 『삼국유사』 권1, 紀異1, 太宗春秋公;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12년. 전자는‘一統三國’, 후자는‘一統三韓’으로 표현했다.
  33.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I, 541면 참조.
  34. 소고구려 및 그 후신인 보덕국과, 왜국의 사신 왕래는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280~83면 참조.
  35. 『舊唐書』 권85, 張文瓘傳; 『資治統監』 권202, 唐 高宗 儀鳳 3년 참조.
  36.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III, 387, 391면 참조. 번역문은 일부를 수정했다.
  37. 김영하 『신라 중대사회 연구』(일지사 2007), 242면.
  38. 이강래 「삼국사기의 말갈 인식: 통일기 신라인의 인식을 매개로」, 백산학회 엮음 『통일신라의 대외관계와 사상 연구』(백산자료원 2000), 183~212면 참조.
  39. 이하의 두 문단은 지면 제약으로 인해 고려, 조선시대에 관한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40. 황종연, 앞의 책 50면.
  41. 황종연, 앞의 책 29면.
  42. 林泰輔 『朝鮮史』 권2, 장32~33. 원문자 번호와 *표는 비교를 위해 첨가했다.
  43. 고구려 멸망에 관한 『초오센시』의 논평 여섯줄도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의 보장왕 27년 기사 뒤에 있는 권근(1352~1409)의 사론 일부를 옮긴 것이다. 林泰輔 『朝鮮史』 권2, 장17~18 참조.
  44. “新羅, 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 如父兄.” 문일평 「정치상의 의미 깊은 신라의 국가적 발전」〔한빛 1928.7〕, 『호암 문일평 전집 5: 신문·보유편』(민속원 1995), 238면.
  45. Prasenjit Duara, “Why is History Antitheoretical?,” Modern China, Vol.24 No.2 (April 1998), 114면.
  46. Dipesh Chakrabarty, “Afterword: Revisiting Tradition/Modernity Binary,” Stephen Vlastos ed., Mirror of Modernity: Invented Traditions of Modern Japan(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294~95면.
  47. 같은 책 29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