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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마티 2009

혁명을 바라지 않는 서구 좌파들에게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shkim@swu.ac.kr

 

 

시차적관점데리다를 능가하는 기세로 저작들을 쏟아내온 지젝(S. Zizek)이 자신의‘대표작’이라고 칭한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김서영 옮김)이 번역되어 나왔다.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다. 번역본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지면에는 칸트와 헤겔을 비롯한 고전 철학자에서 바디우와 아감벤 같은‘현역’까지 포괄하는 숱한 사상가들의 이름이 쉴틈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 사이사이를 존재와 진리, 욕망과 욕동(欲動), 자유, 주체, 윤리, 자본주의, 파시즘, 유물론, 기독교와 선불교, 뇌과학 등의 변화무쌍한 주제와 현실과 예술에서 취한 무수한 사례를 손에 쥔 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철학, 정신분석, 과학, 종교, 정치는 더이상 자신만의 코드를 지닌 별개의 영역으로 남지 못한다. 유물론은 신학으로, 욕동은 자본주의로 변신한다. 『까다로운 주체』 이후 우리에게 친숙해진 이런‘횡단’의 글쓰기는 『시차적 관점』에서 어떤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지없이‘문체는 사람이다.’영역화된 사유들, 장르들, 현실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지젝의 글쓰기 방식은 현재의 담론 지형에서 그가 취하는 입장의 독특성 혹은 희귀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등을 거쳐 『시차적 관점』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선명하게 제시된 (따라서‘대표작’에 새롭게 등장한다고는 볼 수 없는) 지젝의 기획은 단적으로 말해 진보적 담론 안에 보편성의 범주와 변증법적 유물론, 그리고 계급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의 이면에는 1968년 이후 서구에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 대세가 된 다원주의와 그 지류들-다문화주의,‘문화연구’혹은‘문화전쟁’, PC투쟁, 급진민주주의를 포함한 각종‘민주주의적’기획-이 특유의‘부정성/소극성의 정치’로써 궁극적으로 세계자본주의에 봉사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다원주의에 대한 싸움은 그것이 자신의 이론적 적수에 대한 통념, 가령 헤겔의 주체나 보편성에 대한‘표준적 이해’의 근본적 해체를 동반한다.

그러므로 싸움은 항상 이중적이다. 다원주의자들의 귀에 대고 지젝은 거리낌없이‘헤겔적 진리’를 외쳐댄다-누가 뭐래도 현실은 전체이며 전체는 주체이다. 그러나 헤겔의 친구가 되기는 다원주의자의 적이 되기보다 어렵다. 혹은, 다원주의자가 원하는 적이 아니라 정말 맞붙기 싫어하는 적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한 적이 되는 데에 먼저 필요한 것은‘다원주의자의 적’이라는 바로 그 이미지, 다름아닌 다원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공격당해온, 흉악하지만 만만한‘적’의 이미지를 허무는 일이다. 다원주의자로 하여금 그 이미지 대신 자신의 상상적 전장(戰場)에 머물지 않는 적의 실재를 불안 속에 대면케 하라. 그리하여 지젝은 말한다. 헤겔이 가르친바 현실은 전체며 전체는 주체지만, 이 전체로서의 주체는 현존하는 실체가 아니다. 주체는 실체 내의 틈새, 혹은 부재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말하면‘존재’는 존재자 중의 하나가 아니다. 즉‘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질서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337면). “주체는 그것이 스스로에게 나타날 때에만 현존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주체성의‘진정한 중심’을 현상 이면에서 찾는 것은 틀린 것이다”(414면).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지젝의 글쓰기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 전체,‘시차적 간극’또는‘존재의 틈새’를 통해서만 현상/현존하는 전체를 향한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에 정확히 상응하지 않는가? 글쓰기 주체로서의 지젝은 바로 그러한 운동 속에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지 않는가?

‘시차’는 이처럼 자신을 결코 직접 드러내지 않는 전체, 드러난 실체의 세계에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전체에 대한 종합 불가능한 관점들의 공존에 관계한다. 헤겔의‘매개’나 라깡의‘실재’와‘왜상(歪像)’개념이 그 바탕에 놓여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시차’가 이들을 넘어 하이데거의‘존재론적 차이’나 바디우의‘사건’등을 (또는 그‘합리적 핵심’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승격되는 것에는 적잖은 논란이 뒤따를 법하다.‘시차’와 유물론의 연관도 마찬가지이다. 지젝은‘필연’의 유물론적 개념을‘현상 뒤의 은밀한 조종자’에서 “환원 불가능한 우연성으로 특징지어진, 일관성이 없는 비전체의‘전체’그 자체”(164면)로 다시 규정하는데, 알뛰쎄르를 급진화한 듯한 이런 규정에서 한 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전체는‘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칸트를 빌려 지젝은 실체로 지각될 수 없는 전체-필연이 자유로운 행위를 펼친 행위자의‘사후적 승인’에 의해 필연으로‘구성된다’고 말함으로써(410면) 필연을 한층 더‘개방적인’범주로 만든다. 어쨌거나 관념론적 결정론을 피한 것 같기는 한데, 필연에 대한 지젝의 규정, 그리고 그와 연관된‘자유’와‘행위’의 관념은 어떤 의미에서‘유물론적’인가?

“기본적인 윤리적 〔제스처는〕 부정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직접적인 의향을 저지하는 〔제스처〕이다”(405면)라거나 “이 자유로운 〔행위는〕 근본적으로 전체 상황의 좌표를 바꾼다”(406면, 〔 〕는 인용자의 재번역)는 지젝의 말은 자유와 윤리적 행위를 주어진 상황을 구성하는 가능성들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선택으로, 다시 말해‘없는 것의 선택’으로서의 혁명적 행위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그런데 자기 의향의 저지 또는 상황 자체의 거절을 가능케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만일 행위가 오로지 결단의 산물이라면 필연은 선험적으로 전제된 자유의지에, 그리고 정치는 윤리에 종속되는 게 아닌가?

독자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책을 읽는 재미로 치면 사실 지젝의 존재, 필연, 자유 등에 관한 철학적 주장이나 새롭게 시도하는 뇌과학에 관한 논의보다는 서구 지식계의 사태에 대한 신랄한 논평들 쪽이 훨씬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 궁극적 기능이 체계가 더욱 부드럽게 가동되도록 만드는 (…)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오늘날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사이비 능동성, 즉‘활동’하고‘참여’하면서 진행되는 일의 무위를 은폐하려는 충동이다〕”(653면). 요컨대 서구 좌파들의‘민주주의’투쟁에는 심히 자기기만적인 데가 있어서, 그들은 입으로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영구한 지속을 한탄하지만 진정으로 혁명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에 체제의‘수리공’역할을 하는 가운데 급진적 실천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철학적 주장들 이상으로 논란이 될 만한 대목이지만, 오늘날‘진보적 담론’의 부정할 수 없는 일면을 포착한 것만은 분명하다.

번역에 관해 몇마디 첨언하고자 한다. 이 정도 분량의 번역이 얼마나 고되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저자가 지젝 아닌가! 그러나 미안함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현재의 번역으로 저자의 원래 의도가 독자에게 무난히 전달되리라고 기대하기는 무리다.‘claustrophobic’(밀실공포적)을 “재난적”(538면)으로,‘obscene’(외설적)을 “외상적”(715면)으로 옮긴 것은 순간적 실수일 수 있다. 하지만‘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식의 해결책을 제안하는 것 역시 충분치 않다’(Neither is it enough to propose the Ernesto Laclau solution)라고 해야 할 대목을 “이것 역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하다”(705면)라고 엉뚱하게 표현한 것은 순간적 실수로 넘기기 어렵다. 문제는 오역의 사례가 앞의 두가지 유형 모두 적지 않다는 점이다. 세심한 수정으로 역자의 공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