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온다 리꾸 『어제의 세계』, 북폴리오 2009

“뭔가의 끝은 언제나 뭔가의 시작이다”

 

 

강영숙 姜英淑

소설가 bbum21@hanmail.net

 

 

고교생들의 야간보행 체험을 다룬 소설 『밤의 피크닉』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2005년 이후, 30권이 넘는 온다 리꾸(恩田陸)의 작품이 국내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그중에서도 『어제의 세계』(きのうの世界, 권남희 옮김)는 작가 스스로 “내 문학세계를 집대성한 책”이라고 해서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구 때문에 바쁜 일을 제쳐두고 읽기 시작했다가 “과대광고”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독자도 있고, “노스탤지어의 마법사, 역시 온다 리꾸의 작품은 놀라워”라며 경외감을 표하는 독자들도 있다. 한 일본 독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비 오는 날, 세계 금융위기를 걱정하면서, 고양이와 같이 누워서 온다 여사의 책 Another Yesterday를 읽고 있다”고 유머러스하게 썼다.

신문 연재 당시 작가는 이 소설의 제목을‘미나즈끼(水無月) 다리 살인사건’으로 붙이고 싶었다고 한다. 자기가 물어뜯은 남자의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왼쪽 귀로 생명이 콸콸 쏟아져나간다”고 썼던 어느 단편의 제목이 「스페인의 이끼」였던 게 얼른 기억나는데, 이처럼 온다 리꾸 소설의 장점 중 하나는 감각적이고 흡인력있는 제목이다. 특이한 제목은 곧바로 특이한 상황으로 이어지는데, 이럴 때 작가는‘나타난다’‘안내한다’‘초대한다’같은 동사를 즐겨 사용한다. 독자들은 죽은 자들이 모여 파티를 벌이는 곳으로 초대되기도 하고(『네크로폴리스』), 하룻밤 동안 대량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일본의 한 명문가의 저택 안으로 쏙 들어가보기도 하는 것이다(『유지니아』).

『어제의 세계』는 내비게이션을 파는 토오꾜오의 한 회사 직원인 독신남 이찌가와가 어느 겨울날, M마을의 미나즈끼 다리 위에서 날카로운 유리파편에 복부가 찔린 채 죽어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M마을은 토오꾜오 인근에 위치한 탑과 수로의 고장으로, 이찌가와의 어머니가 죽기 직전 말해준 아버지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이찌가와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교직에서 물러나 역사책 읽기를 취미로 하며 지내던 향토사학자 타나까 켄조오인데, 그 역시 사건 발생 2주 만에 죽어버린다.

여기서부터 작가는‘당신’이라는 2인칭 시점을 구사한다. 주머니에서 캐러멜을 꺼내 먹으며 이찌가와의 죽음을 추적하는 시선은 줄곧‘당신’의 것이다. “당신은 두리번거리면서 길을 걸어간다. 조금씩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25면)‘당신’은 점점 M마을을 향해 다가간다. 어떻게 보면 독자들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읽는이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준다.‘당신’은 이찌가와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쌍둥이 동생도 만나지만 그마저 호텔에서 돌연사함으로써 M마을의 폐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비해 M마을에서 이찌가와와 조금이라도 스쳤던 사람들의 기억은 3인칭으로 서술된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두 할머니 자매, 모닥불 귀신을 믿는 고등학생, 커피숍 여주인, 역무원 등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만났던 이찌가와에 대해 회고한다. 길고 반복적인 느낌마저 드는 3인칭 화자들의 얘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M마을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것, 그 비밀은 절대 발설되지 않으며 이 마을에만 있는 특이한 것도 아니라는 모호한 느낌 정도가 전부이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죽은 이찌가와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자기 입으로 말하는 제18장‘나의 사건’이다. 독자들이 기억하는 앞부분의 퍼즐조각들을 맞춰보라는 게임 같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특이한 여행일정표를 따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찌가와는 M마을이 “주위에 문자가 없”(467면)어 살기 좋다면서 “이곳은 내 마을”(485면)이라고 말한다. 최신형 내비게이션을 파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보화사회의 물질만능주의와 각종 표상에 지쳐 어느 순간 “내 정신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469면)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소설의 후반으로 오면 주인공은 이찌가와가 아니라 그가 서른여덟이란 나이에 홀연히 돌아온 곳, 최신형 내비게이션에는 나타나지 않는 세개의 탑이 있는 M마을이라는 걸 알게 된다. 공통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 터부시되는 무엇인가를 오랜 세월 지켜온 듯한 M마을은 천둥과 함께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비에 잠긴다.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은 수로의 처리 용량을 넘어서고 탑이 무너진다. 그리고 소설 속 화자들은 흐린 물속으로 가라앉는 M마을을 보며 중얼거린다. “이 세계의 씨스템은 바뀌는 걸까?”(414면) “언제부터 세계는 이렇게 불안정해진 걸까.”(420면) “최근 십여년의 기후변화, 세계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458면) 다소 직설적인 감이 없지 않으나 작가는 어쩌면 이 소설에서 그런 얘기들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19장‘미나즈끼 다리 살인사건’이 에필로그처럼 홀로 남아 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의식이 몸 밖으로 나가버리다니”(496면)라고 한 이찌가와의 말 때문에 나는 이 부분을 일종의 근사(近死)체험, 유체이탈로 이해했다. 죽음학(thantaology)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약 2만 5000건의 근사체험 사례가 수집되었다고 한다.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생사의 기로에 서면 일시적인 거주지였던 육체로부터 실재하는(real) 영원불멸의 자기 자신이 분리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뿐 아니라 위기가 닥쳤을 때, 극도로 지쳤을 때, 잠들었을 때, 우리 스스로 몸을 벗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설명이다(E. 퀴블러로스 『사후생』). 그렇다면 이찌가와는 유체이탈 체험을 통해 어제의 세계를 벗고 새로운 세계에 이른 것일까. 다소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488면)라는 이찌가와의 심경 고백 때문에 그렇게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찌가와가 미나즈끼 다리 위에 죽어 있는 모습은 지금까지 끌어온 복잡한 서사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그는 영원한 잠에 든 참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푹 잘 수 있게 된 것이다.”(515면)

모든 데이터와 증상과 비밀이 백일하에 다 드러나도 어느 것이 진실인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어제의 세계』의 M마을은 소설이 끝난 후에도 구체성이 없이 모호한 채로 남는다. 이찌가와의 죽음에 대해서도 작가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럼에도 미스터리, 스릴러, SF, 호러를 넘나드는 현란한 기법으로 현실에서 한발짝 벗어나게 만드는 강한 스토리텔링은 온다 리꾸 소설의 큰 장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다시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 안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일종의 치유와 긍정의 기능, 바로 그때문에 그녀의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