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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한국 근대문학 연구와 식민주의
김철·황종연의 담론틀에 관한 비판적 검토
김흥규 金興圭
고려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문학과 역사적 인간』 『한국 고전문학과 비평의 성찰』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등이 있음. gardener@korea.ac.kr
- 이 글의 초고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HK월요모임(2010.1.11)에서 발표되었다. 그날의 토론자 정병호 교수와 한국문화연구단 동료 교수들이 베풀어준 논평·조언에 감사한다.
1. 논의의 출발점
한국문학 연구는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그 앞 시기와 뚜렷이 구별되는, 그리고 그러한 차별성을 적극 강조하는 학문적 지향에 의해 주도되어왔다. 이 새로운 조류에서 비판 대상이 된 선행단계의 문제성은 ‘민족이라는 인식단위에 집착한 연구, 근대를 향한 단선적 진보사관, 그리고 이들을 희망적으로 결합시킨 내재적 발전론의 구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하여 별다른 논쟁 없이 학계에 안착하고, 2000년대 중엽에는 주류적 담론의 위상을 차지했다. 이와 병행하여 조선후기 문학 연구의 좌표가 모호해지고, 근대문학이 한국문학 연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아울러, 근대문학의 여러 국면들은 ‘번역된 근대’와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개념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담론 공간에 재배치되고 있다.
1960년대의 후반부터 80년대까지 한국문학 연구를 주도한 내재적 발전론이 90년대에 와서 심각한 회의와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거세게 쏟아진 비판의 내용이 모두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내재적 발전론이 20여년간의 공헌과 더불어 산출하거나 넘어서지 못한 문제들 또한 가볍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논란은 내재적 발전론의 기본 지향에 동의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미 80년대부터 오가고 있었으나, 패러다임의 외부로 완전히 나가지 않은 토론으로는 환골탈태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90년대 후반 이래의 한국문학 연구에 등장한 새로운 흐름은 문제설정 방식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촉구하는 저항담론으로서 기여한 바가 중대하다. 비판적 언사의 격렬함이나 논리의 편향성이 다소 있었다 해도 별로 문제될 바는 아니다.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적절하게 다루지 못한 문제들을 부각시키고 주류담론의 전일적(全一的) 타당성을 문제삼기 위해 전략적 강조가 과도하게 구사되는 것은 학문적 변혁의 국면에 흔히 있는 일이다.
다만 저항담론이 성장하여 주류적 담론의 위상을 획득하게 될 때, 당초의 의도와 무관하게 새로운 책임이 발생한다. 주류담론은 해당 학문분야에서 현저하게 우월한 전망을 보유하고 의제와 그 실현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내재적 발전론은, 그 이월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별도로 하고, 살아있는 담론틀로서의 역할을 떠나 이제 연구사의 일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90년대 후반 이래의 새로운 연구동향 속에 새로운 주류담론으로서의 설득력과 전망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아울러, 그것이 저항담론으로 기능하던 단계에 대한 관용은 이제 폭넓은 연구를 이끄는 담론틀로서의 역량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글은 그런 시각에서 김철(金哲), 황종연(黃鍾淵)이 90년대 후반 이래의 연구에서 제출한 주요 논점과 명제들을 ‘담론틀’의 차원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물론 해당 시기의 한국 근현대문학 연구가 모두 이들의 영향력 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두 학자 사이에 학문적 지향의 동질성이 크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함께 거론하는 이유는 위에 언급한바, 내재적 발전론과 ‘민족주의적 국문학 연구’에 대한 비판에서 협력의 실질이 뚜렷할 뿐 아니라, 대안적 사유의 주요 항목으로서 ‘타자로부터의 작용’을 중시한다는 점에 있다.
이들의 학문적 성과를 담론틀의 차원에서 고찰한다는 것은 특정 논저의 타당성을 개별 연구의 차원에서 다루기보다 그것이 함축하는 전제와 문제인식 구도에 주목하고, 그 범례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뜻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문제를 제출하는 방식은 담론의 방향과 귀결에 대한 한정을 내포하며, 그러면서도 그 한정성은 담론 내부자의 시야에서 안 보이기 쉽다. 내가 희망하는 바는 두 학자의 담론틀을 이웃의 시각에서 살핌으로써 오늘날의 한국문학 연구가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2. 식민주의의 특권화
김철과 황종연은 학문적 개성과 관심사가 상당히 다른 학자들이다. 김동리(金東里)의 「황토기」에 대한 해석에서 그 차이가 예각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김철은 이 작품에서 파시즘의 야수성과 파괴·소모의 미학을 읽어냈고,1 황종연은 작중인물들의 “자멸에 이르는 행동은 바로 그 소모적인 성격을 특별히 강조하는 서사적 절차 때문에” 파시즘 같은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의심과 반성의 거리를 두고 지각하게 만든다”고 옹호했다.2 이런저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약속되지 않은 협력’이 가능했던 까닭은 80년대까지의 ‘국문학’ 연구에 대한 비판에서 입장과 논리구성 방식이 유사하거나 상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문제화하는 저항담론으로서의 의의가 충분했다.
이하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지적 도전이 주류적 담론틀의 위상을 가지게 된 시점에서 피할 수 없는 ‘포괄적 적용력’의 문제다. 이 장에서는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관점을 먼저 다루고, 다음 장에서 황종연의 개별적 논리를 따로 검토하기로 한다.3
김철과 황종연은 민족주의와 근대문학이 모두 식민지시대의 산물일 뿐 아니라, 식민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모두 식민 기원(紀元) 이후의 것이며 식민성의 발현형태라는 인식이 담론틀의 대전제가 된다. 김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가 읽고 쓰고 말하는 한국어와 한국문학은 일제 식민지 기간에 그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고 자리가 잡혔다. 식민지가 근대며 근대는 식민지이다.4
위의 인용에서 첫 문장은 자강운동기(1890~1900년대)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절하하면서 식민지시대의 변화를 강조하기 위한 얼마간의 과장으로 이해될 법하다. 그러나 “식민지가 근대며 근대는 식민지”라는 명제로써 김철은 이러한 수사학적 양해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식민지〓근대’라는 구획을 선언한다. 윤해동(尹海東) 역시 “모든 근대는 당연히 식민지 근대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5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를 두루 포괄하는 이 전칭명제의 논거나 참조된 연구의 출처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황종연은 같은 생각을 공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민족문학론의 소재는 물론 민족에 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바로 민족문학으로 인식하는 기술 또한 민족에 내재한다고 보는 것은 검증이 필요한 생각이다. 민족문학론은 근대적 민족을 ‘발명’하는 모든 정치적, 문화적 기술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에티엔느 발리바르는 민족 형식의 발생을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의 서열적 편성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근대적 민족은 식민지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언제나 얼마만큼은 식민지가 되었거나 아니면 식민지를 가졌으며, 때로는 식민지가 되는 동시에 식민지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출처표시 생략-인용자〕 민족문학의 담론을 포함한 모든 민족의 테크놀로지는 어쩌면 식민주의의 산물인지 모른다.6
인용된 마지막 문장에서 “…인지 모른다”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후일에 쓴 글들까지 참조하면 황종연의 입장은 확신에 가깝다. 그렇게 보도록 하는 근거가 발리바르의 말인데, 내가 보기에 이 대목은 부적절하게 전용(轉用)된 혐의가 있다.
월러스틴과의 공저에서 발리바르는 근대세계의 민족국가(nation)가 대두하는 요인을 논하기 위해 우선 맑스주의적 접근방법을 비판하고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전개했다.7 ‘민족(국가) 형성을 일국(내지 한정된 지역) 내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기초한 부르주아의 기획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브로델과 월러스틴의 견해처럼, 세계체제의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의 지배 속에 상호간의 경쟁적 도구로서 민족국가들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부르주아가 선택하는 국가형태는 역사의 국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민족부르주아가, 산업혁명 이전일지라도,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은 그들이 현존하는 국가의 무력(武力)을 국내외적으로 구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농민과 변두리 시골까지를 새로운 경제질서에 복속시킴으로써 시장과 “자유로운” 노동력의 공급처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민족국가 형성은 순수한 경제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나라마다 다른 역사와 사회적 변화를 동반한 계급투쟁의 구체적 결과다.’
황종연이 인용한 대목은 이 중에서 ‘세계체제의 불평등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경쟁이 민족국가 형성을 촉발했다’는 내용 뒤에 첨부된 수사학적 보충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In a sense)’이라는 표현이 명시하듯이 그것은 사실명제가 아니라 세계체제의 불평등성이 전지구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과장 내지 비유일 따름이다. 이 대목을 앞뒤의 맥락으로부터 분리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의 유보적 기능이 모호해지고 인용문은 사실명제처럼 오인되는데, 황종연의 논리는 바로 이 어긋남의 자리에 발딛고 있다.
식민지를 가졌거나 식민지인 지역에서만 민족주의가 발생한다는 주장은 몇몇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아도 지탱될 수 없다. 16세기부터 시작되는 근대 식민지경영의 역사에서 가장 앞섰던 스페인의 경우를 보자. 한때는 아메리카대륙에 최대의 식민지를 보유했던 스페인 역사에서 민족주의의 모습은 매우 늦고도 희미하다. 스페인은 식민제국의 영광이 참혹하게 추락한 뒤 1807년에는 나뽈레옹의 지배 아래 놓였으며, 1820년대에는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했다.8 그런 가운데서 19세기 중엽에 까딸루냐와 에우스까디(바스끄) 지역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움직임이 형성되었으나, 그것은 스페인 국가의 일체성에 균열을 초래하는 것이었다.9 1821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된 멕시코는 파란만장한 내전과 외부세력의 침략을 겪은 뒤 20세기 초에 와서 멕시코혁명(1910~17)에 성공했다. 그 앞의 시대에 조성된 원형적 민족주의(proto-nationalism)가 있기는 해도, 본격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혁명기 및 그후의 현상이다.10
좀더 주목할 일은 인도, 베트남, 한국, 중국의 비교에서 드러난다. 이들 지역에서는 대체로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민족주의운동이 대두했다. 이같은 현상은 민족주의를 식민주의의 필연적 부산물로만 보는 경우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도 민족주의의 주역은 오랜 동안의 식민체제 아래서 성장하고 식민 본국의 언어로 교육받은 중간계급 지식인들이었다.11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는 1858~85년 사이에 프랑스에 복속되었는데, 그 민족운동의 초기 지도자인 판 보이 쩌우(1867~1940)는 유교적 교육을 받았고 1885년의 근왕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뒤 민족주의로 전환하여, “전근대적인 반식민주의 투쟁과 근대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연결하는 교량”12 역할을 했다. 아직 식민지가 아니었던 1890년대에 형성되어 반식민지 상태인 1900년대 후반까지 급속하게 성장한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전통적 교육의 기반 위에 근대지식을 접합했으며, 이 시기의 신교육은 대한제국의 ‘국민 만들기’와 민간 영역의 자강운동 프로젝트 속에 있었다.13 중국 역시 제국주의 열강에 수많은 이권과 조차지(租借地)를 빼앗겼지만 특정세력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민국혁명(1911), 5·4운동(1919)으로 나아갔다. 요컨대, 민족주의가 식민지라는 자궁 안에서 제국주의의 씨를 받아 회임(懷妊)·발육하는 것이 필연적이며 다른 경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정식화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을 세계체제의 불균등한 역학 속에서 파악하는 발리바르-월러스틴의 관점에 동의할 수는 있어도, 황종연의 인용과 논법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는 민족적 자기인식과 표현을 식민성의 계보학 속에서 규정하려는 의욕이 과잉한 나머지 문일평(文一平)의 신라통일 요인론을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의 받아쓰기로 논한 적이 있거니와,143·1운동의 ‘만세’행위에 대해서도 놀라운 추론을 제시했다. 즉 그것은 1889년에 일본제국 헌법이 공표될 때 메이지 텐노오(明治天皇)를 송축한 ‘반자이(萬歲)’에서 왔을 공산이 크고, ‘반자이’는 또 유럽인들의 ‘후레이(hooray)’에서 왔으니, “이러한 만세 의식의 바탕에 흐르는 모방의 심리는 민족국가의 이념에 대해서 무엇인가 중요한 암시를 한”다는 것이다.15
이것은 어쩌다 생긴 실수라고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오류다. ‘만세’는 한문문화권에서 군왕의 덕과 영광을 송축하기 위해 일찍부터 쓰인 관용어로서, 한국의 용례 또한 풍부하다.163·1운동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저항일 뿐 아니라, 군주에 대한 충성의 어휘 ‘만세’를 ‘조선 독립’이라는 공동체 주권의 열망에 귀속시킨 결정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시위자들은 고종(高宗)과 함께 왕조적 질서에 대한 역사의 장례를 치렀던 셈이다. 이런 맥락을 시야에서 차단하고 3·1운동의 ‘만세’를 ‘후레이, 반자이’의 모방으로 보는 발상법 자체에 대해 나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황종연은 위의 추리에 이어서 “개인의 경우에든, 집단의 경우에든, 주체의 욕망은 모방된 욕망, 결국의 타자의 욕망”이며 이것이 “민족 주체의 아이러니”라 했다.17 그처럼 모든 반식민운동과 민족담론들을 제국주의가 발신하는 일방적 회로 속의 반사체(反射體)로, 그리고 대개는 저급한 복제품으로 전제하는 담론틀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도 아울러 의심스럽다.18
김철은 동질적인 입장에서 좀더 뚜렷하게 식민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종속적 학습관계와 이에 따른 상동성(相同性)을 주장한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자신의 적(제국주의)으로부터 배우면서 성장”했으며, “배우면 배울수록, 그는 적의 모습에 가까워질”19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식민지에서의 근대적 지식의 생산이 식민 종주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라는20 확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전제 위에서 그는 식민지시대의 ‘조선학’이 지니는 제국 예속성의 필연을 주장한다.
주시경·김두봉 등의 어문 연구, 최남선의 조선사, 안확·정인보·신채호 등의 국수(國粹),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등의 ‘조선(학)’이 각각의 편차와 개성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경유한 근대적 학적 체계라는 ‘보편’의 매개를 통해 자신을 정립해갔던 것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이 못된다. (…) 일본 제국주의의 다민족주의적 지배 아래서 조선민족의 자기확립이란, 제국의 영토 안에서 민족의 ‘특수한’ 영역을 분절(分節, articulate)함으로써 ‘민족주체’를 명료(articulate)하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제국이 랑그(langue)라면 민족은 빠롤(parole)인 것이다. 이 영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헤게모니의 쟁투, 그것이 이른바 ‘민족운동’인 것이다. (…) 결국 분절화를 통해 확립되는 민족의 정체성은 보다 근원적인 구조, 즉 제국의 존재를 불문에 붙이면서 그 대가로 민족 영역의 자율성 및 특수성을 보장받음으로써 확보되는 것이다.21
식민지하의 민족주의나 조선학이 식민자로부터 배우고 모방한 바가 많으며, 불가피하게 혼종적이라는 견해라면 나로서도 아무 이의가 없다. 그 혼종성의 내력을 은폐함으로써 민족주체의 순결함을 강변해온 논법들을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식민체제에 저항하거나 전면적 굴종 이외의 길을 찾으려 했던 여러 모색들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만 배우고, 그것을 닮는 방향으로만 움직였다고 총체화할 수 있는가는 의문스럽다. 김철은 민족주의와 민족적 자기탐구로서의 조선학(1946년 이후의 국학)을 비판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들을 손쉽게 본질화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종속적 파생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닐까.
김철의 논리가 지닌 첫째 문제는 당대의 상황을 ‘제국 일본 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구도로만 상정하고, 그 외부 영역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19세기말 이래로 세계는 조선인들의 사고와 담론 영역에 들어와 있었다.22 『혈의 루』(1906)에서 옥련과 구완서는 서양문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으며, 『무정』(1917)에서 이형식과 김선형은 시카고대학으로, 김병욱은 베를린으로 유학했다. 이광수(李光洙)는 처지가 그들만 못한 박영채를 일본에 유학시켰다. 그런 소설적 처리가 유치하다고 일소에 붙일 일은 아니다. 위의 행선지들이 보여주는 것은 당대인들의 의식 속에 그려진 문명적 위계의 지도이며, 그 속에서 일본은 반주변부화되어 있다. 샹하이 등의 동아시아 도시들은 제국주의시대의 다단한 역학관계와 갈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열려 있었다. 각종 매체를 통해 오가거나 은밀하게 유통되는 바깥세계의 정보·지식들은 총독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량과 식민주의를 상대적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동아일보』 등의 신문은 3·1운동 이후 3월이 올 때마다 인도, 필리핀, 아일랜드, 중국 관련 기사와 논설을 통해 조선 문제에 국제적 상상과 비유를 부여했다.23 이처럼 현실의 차원에서든 관념·상상의 차원에서든 작용하는 다자(多者)관계의 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역사를 보는 것은 의도에 관계없이 식민-피식민의 폐쇄회로 속에서 식민주의를 특권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둘째 문제는 식민체제 속에서 움직이는 행위자들을 제국 일본의 지배구도에 갇힌 종속적 존재로만 보려는 경향이다. 근대적 분과학문 체계에 따른 지식 추구가 식민지시대에 창출된 것인가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일본을 경유한 학문체제의 매개를 전제할 경우에도 그 분과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적 활동의 의미를 반드시 식민체제에 종속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앞의 인용문이 주시경·김두봉·안확·정인보·신채호를 위치짓는 방식은 납득하기 어렵다. 지식은 억압과 포섭의 힘이면서 동시에 균열을 만들고 이탈하며 저항하는 힘일 수 있다. 후자의 역할과 기억만을 강조한 ‘국(문)학’의 나르씨시즘을 비판한다고 해서 전자의 작용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제국을 통합적 전일체로, 식민지의 민족들을 그 개별적 실현태로 설정하는 것은 제국주의가 특정 국면에서 취하는 전략일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1923~45)에 설치된 조선어문학 전공이 그런 계산의 일환이었으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졸업생인 조윤제·김재철·고정옥(그리고 원래 중국문학 전공이었던 김태준) 등과 구학문 세대인 주시경·정인보 등을 포함하여, 식민지시대의 조선학 연구자들이 “제국의 존재를 불문에 붙이면서 그 대가로 민족 영역의 자율성 및 특수성을 보장받”는 분절화에 봉사했다는 논법은 매우 의심스럽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기획만이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관철된다는 것을 전제해야 가능한 일반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주장하기 위해 김철이 ‘articulate’라는 영어단어를 활용한 것은 흥미로운 착상이지만 논리적 설득력은 희박하다. 이 단어에 함축된 ‘분절’이란 어떤 물체의 절합(節合)된 일부분으로서의 ‘마디’에 의미 근거를 둔 것이며,‘(음절을 나누어) 분명하게 발음하다’라는 용법 또한 문장 혹은 단어의 전체성을 전제로 한다. 이런 함축성을 이용하여 ‘민족주체를 명료하게’ 하는 것과 ‘그것을 제국의 일부로서 분절·인정’하는 것이 상통한다는 논법은 이미 정해진 믿음을 수사학적으로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립적 공동체의 자격을 부인당한 집단의 지식인들이 모멸의 현재 저편에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려 했던 것은 식민주의에 대한 합법적이고도 유효한 저항의 방식이었다. 그것이 지닐 수 있는 문제성에 대한 비판은 따로 필요하더라도, ‘우리는 너희의 일부분이 아니다’라는 지적 모색을 제국화된 지방의 ‘분절, 명료화’로 보는 논의구도에는 찬성할 수 없다.24
김철은 일본어와 조선어로 이중언어 글쓰기를 했던 장혁주·김사량을 논하는 자리에서 “‘협력’/‘저항’의 완고한 이분법적 민족주의적 관점이 포착할 수 없는, 식민지에서의 끝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실상들”을 파악하는 안목을 요망했다. 이들의 이중언어 글쓰기에 나타나는바, “피식민자가 제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무수한 이화(異化)와 뒤섞임들은 제국의 언어적 정체성과 그 권력을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25 이러한 독법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한편으로 나는 김철이 일제하의 조선어 운동과 조선학 연구에 대해 같은 수준의 성찰조차 거절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느낀다. 내가 보기에는 민족주의의 억압성에 대한, 그리고 민족주의-파시즘의 친연성에 대한 확신이 여기에 과도하게 작용한 듯하다. 그 부정적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민족주의 내지 민족담론들을 본질화하고 식민주의의 종속적 산물로 환원하는 것은 매우 명쾌하고 강력한 논리구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담론틀은 당초의 의도와 상관없이 식민주의를 특권화하고, 그 아래 있는 행위자들을 제국 헤게모니의 파생물 혹은 부산물로 간주하는 시선을 도입한다.26 이런 종류의 필연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역사의 중층성과 다면성을 포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번역된 근대’와 소설/노블
근대를 식민 기원(紀元)의 시간구획 속에서 보고 그 외래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역사인식은 김철과 황종연의 문학사 이해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들이 모두 이광수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광수는 「문학의 가치」(1910), 「문학이란 하(何)오」(1916) 등의 평론과 『무정』(1917)을 통해 ‘근대적’ 문학의식과 창작상의 실천을 보인 선구자인 동시에, 그런 문학적 개안(開眼)과 민족담론이 식민상황과 맺었던 수수(授受)관계의 본보기이며, 식민지시대 말기에는 군국주의 일본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력한 문제적 거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90년대 후반 이래 이광수는 식민지 근대성의 전형으로 다시금 각광받으며 의미가 착잡한 정전(正典)의 자리에 배치되었다. 이에 대해 의견이 없지 않지만, 내가 여기서 거론하고 싶은 것은 그를 포함하여 ‘신문학 초창기’를 다루는 방식 내지 담론틀의 문제다.
황종연은 「문학이라는 역어」와 「노블, 청년, 제국」이라는 두 논문에서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에 관해 매우 과감한 인식의 틀을 제시했다. 그 핵심은 1910년 무렵부터 이광수가 주창하고 실천한 ‘문학, 소설’이 각각 ‘literature, novel’의 번역어였으며, 이 새로운 관념과 쯔보우찌 쇼오요오(坪內逍遙, 1859~1935)의 『소설신수(小說神髓)』(1885~86) 등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과거의 소설을 거부하고, 문학의 심미적 자율성과 내면성을 중시하면서 “제국적, 전지구적 근대성의 문화에 적응”하는27 문학의 행로를 한국에서 개시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에서 근대는 서양의 담론들을 수용하고 그것에 비추어 자신을 재인식하고 재구축하는 과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문학이라는 역어의 동아시아적 일반화를 비롯한 번역, 번안, 전유와 그밖의 “통(通)언어적 실천(translingualpractice)”은 그러한 근대화의 필수적인 절차였다. 그런 점에서 한 중국계 미국인 학자가 근대 초기 중국의 서양 및 일본과의 언어적, 문학적 접촉에 관한 연구에서 말한 ‘번역된 근대(translatedmodernity)’는 중국의 근대만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근대에도 들어맞는 것이다.28
노블은 유럽 제국주의의 팽창에 따라 다른 유럽산 상품들과 함께 유럽 대륙의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 소설에서의 근대는 문화에서의 근대와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경계 내에서 독자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국가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 및 문화 교환의 과정에서 형성된다. (…) 한국 근대소설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것의 진정 근대적인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것의 형성에 개입한 통국가간(transnational) 장르, 관념, 실천, 제도에 유념해야 한다.29
동아시아 문학의 근대적 전환기에 19세기 서양의 ‘문학’ 개념과 노블이라는 모델이 매우 중요한 영향원이었음은 분명하다. 이에 관한 ‘통언어적·통국가적’ 성찰, 즉 “국가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 및 문화 교환의 과정”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황종연의 담론틀이 지닌 문제는 이 국면의 핵심인 ‘넘어서’(trans-)의 작용방식, 성격 및 결과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단순하고 일면적이라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번역된 근대’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황종연은 문화간 번역의 투명성 여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논리를 전개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문화로부터 어떤 담론을 수용하고 그것에 비추어 자신을 재인식하고 재구축한다고 할 때, 원천담론과 수용된 담론은 등가적(等價的)인가, 아니 등가가 될 수 있는가. 차이가 생긴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며, 작용은 어떠한가. 수용하는 자아와 재인식되는 자아 그리고 재구축되는 자아는 인식·실천의 장에서 순차적으로 대기하는 존재들인가, 아니면 서로 간섭하고 상호작용하는 세력들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리디아 리우의 공헌이30 각별히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황종연은 리우의 용어〔translingual practice, translated modernity〕를 인용하면서도 그녀의 핵심 전제인 ‘언어적 횡단의 불투명성’에는 주의하지 않은 채, 번역을 원천언어가 문화의 경계를 수월하게 관통하여 목표언어에 의미의 식민지를 창출하는 행위인 것처럼 논했다. 리우는 이런 유형의 번역관념이 초래할 수 있는 서구중심적 왜곡을 비판하며, 원천언어(source language)를 ‘손님언어’로, 목표언어(target language)를 ‘주인언어’로 바꾸어 사용한다.
넓게 정의하자면, 언어횡단적 실천에 관한 연구는 손님언어(guest language)와의 접촉/충돌에 의해, 혹은 그것에도 불구하고 주인언어(host language) 내부에서 새로운 단어·의미·담론·재현 양식이 생성되고 유포되며 합법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조사하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 손님언어에서 주인언어로 옮아갈 때 그 의미는 ‘변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주인언어의 현지 환경 속에서 창안/발명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번역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경쟁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중립적 사건일 수 없다. 번역은 바로 그러한 투쟁이 진행되는 장이 된다. 여기서 손님언어는 주인언어와 조우하도록 강제되며, 이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 사이에 대결이 이루어지고, 권위가 불러들여지거나 도전받으며, 애매성이 해소되기도 하고 생성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주인언어 자체에 새로운 단어와 의미가 부상한다.31
마찬가지 문제의식을 안고 『소설신수』를 검토해보면 쯔보우찌 쇼오요오가 추구한 바는 노블을 모형으로 삼아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는 것이기보다는 당시까지의 일본 소설을 ‘근대적’으로 개량하는 것이었음을 우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32 서구의 노블과 예술 담론들은 여기에 초대된 유력한 손님이자, 쇼오요오가 제출한 견해를 권위화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 전체는 소량의 서구 예술론, 문학론, 수사학 서적으로부터 얻은 지식만의 구성물이 아니다. 쇼오요오는 모또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의 ‘모노노아와레’론과, 쿄꾸떼이 바낀(曲亭馬琴, 1767~1848) 등의 에도시대 소설 유산을 다각도로 활용하여 새로운 소설이 지향해야 할 본질과 방법에 관한 논의를 구체화했다.33 간명하게 말하자면 『소설신수』는 당시까지의 일본 문학유산과 서구적 노블·예술 관념 사이에서 빚어진 긴장과 타협의 산물이다. 쇼오요오는 에도시대의 소설, 즉 게사꾸(戱作) 체험을 자양분으로 성장했으나 그것의 재생에만 머무를 수 없는 변화의 욕구에 직면했다. 이 욕구가 노블이라는 모델을 불러들이면서 새로운 소설의 모색으로 나아갔지만, 그 담론 구성은 게사꾸의 유산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참조하고 ‘인정(人情), 세태(世態)’같은 재래적 어휘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34 『소설신수』에 자주 등장하는바, ‘노블〓진정한 모노가따리·소설·패사(稗史)’라는 개념 결합은 188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메이지문학 장에서 전개된 언어횡단적 착종의 한 매듭이다. 근래의 『소설신수』론을 대표할 만한 저작에서 카메이 히데오(龜井秀雄)는 종래의 “근대/전근대라는 이분법”이 조장한 근대주의적 사시(斜視)를 비판하고, 좀더 균형된 시야를 촉구한다. 쇼오요오가 “인간의 진실을 사적인 영역에서 구하는 ‘근대적’인 문학관”을 제창했다는 점과 함께, “바낀을 비판하면서 바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35 것이 그의 음미할 만한 논점이다.
이처럼 복합적인 관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황종연이 취하는 입장은 ‘손님언어-주인언어’의 구도가 아니라 재래적 번역론과 비교문학의 ‘원천언어-목표언어’ 내지 ‘발신자-수신자’모델에 가깝다. 다음의 진술을 좀더 살펴보자.
유럽 부르주아 계급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의 연관 속에서 성장한 노블은 유럽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를 통하여 그 기원에서 떨어져 나와 비유럽사회에 침투하고 적응했으며, 그런 결과 그 사회의 근대적 문화 내에서 우세한 서사양식의 자리를 차지했다. 중남미, 아랍, 아시아 제국에서 노블은 전(前) 노블적 서사와 충돌하거나 타협하여 그 나름의 변별적 형태를 낳으면서 때로는 헤게모니에 대한 복종을 조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항을 촉진하기도 하는 서사적 테크놀러지가 되었다.36
위의 글에서 줄곧 문법적 주어의 자리를 차지한 ‘노블’은 한국문학을 포함한 비서구권 문학에 대한 황종연의 인식틀에서도 생성의 주어가 된다. ‘전(前) 노블적 서사와의 충돌, 타협’이나 그로 인해 생겨나는 ‘변별적 형태’가 원론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한국 및 동아시아 근대소설에 관한 황종연의 논의에서 이런 현상에 대한 실질적 성찰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의 담론틀은 노블이라는 방사체(放射體)가 세계 각지에 침투·적응하여 장르적 식민화를 달성한다는 ‘노블 제국주의’의 보편성에 대한 방법론적 의심을 별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입장을 취할 경우 노블은 비서구의 근대소설에 대해 생성의 원천이자, 가치의 전거(典據)가 되기 쉽다. 그렇다면 특정 문학에서 언어횡단적 실천의 결과 노블로부터 어떤 거리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수신자 문화의 결함 내지 미숙성의 징표일 것이다. 실제로 황종연은 그런 시각에서 접근한다. 쇼오요오는 작가의 초월적 전능성이 과도하게 구사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황종연은 “허구 창작 주체의 전능함을 비판한 쇼오요오의 발언은 (…) 노블형 허구의 이해를 제약한 일본 자체의 서사적, 문화적 전통의 맥락에서 검토할” 만한 문제점이라는 시사를 던진다. 일본 사소설에 대하여 “허구 주체의 개념이 허약한 리얼리즘은 서양 노블과 같은 형식의 달성을 아무래도 어렵게 만든다”고37 한 것도 동일한 관점이다. 그는 작가의 신적(神的) 권위를 주장한 김동인의 소설관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 작품에서는 “톨스토이의 노블처럼 장대한 허구적,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잘해봤자 그것의 미니어처에 불과한 단편소설”에 능했을 뿐이라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38
위의 사례들에서 우리는 노블 형성론에 잠재해 있던 척도(尺度)의 제국주의가 떠오르는 모습을 본다. 쇼오요오의 작가 권능 제한론이 창작-비평의 원리로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일본 사소설에 어떤 특장이나 문제성이 있는지는 여기서 논할 사항이 아니다. 내가 의문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것을 한계 내지 허약성으로 인지하는 담론의 시선이다. 어떤 소설론이나 작품군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숙성과 문제를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미숙성을 규정하는 권위의 원천, 미숙하게 된 요인을 설명하는 논법의 행로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 A와 문화 B의 만남에서 어떤 혼종이 발생했을 때, 그것의 높이는 A의 척도에 의해 측정되고,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차이는 A와의 비교에 따라 문제성 여부가 판정되며, 이 경우의 귀책사유는 B의 전통에서 구하는 시선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노블을 A의 자리에, 비서구 소설을 B의 자리에 배치하는 처분의 정당성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매체환경과 독자층, 그리고 선행하거나 경쟁하는 장르·담론들을 포함한 문학 장(場)의 역학을 떠나서는 소설의 내부와 외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미의식과 비평의 척도는 초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이러한 장에서 생성되고 또 그것에 작용하는 문화적 구성물이다. 이를 외면한 채 삶의 경험·상상·기억들을 소통하는 이야기 방식들을 노블이라는 목적론적 주형(鑄型) 안에서만 다룬다면 많은 소설들이 질식하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노블 중심적 사고는 1960년대 후반부터 도전받기 시작했다. 숄즈와 켈로그는 『서사의 본질』(1966)에서 20세기 중엽의 서사문학 연구가 무분별하게 노블 중심적이 되었으며, 모든 서사 장르들을 노블과의 근접도에 따라 위치짓고 평가하는 획일주의가 성행한다고 비판했다. 경험적 서사와 허구적 서사의 다양한 양식들이 시공간적 광폭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며 서로 교섭하거나 전이되는 양상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대안적 명제였다.39 그로부터 활성화된 서사학(narratology)이 매우 풍부한 성과를 낳은 것은 물론, 소설론의 진전에도 크게 공헌했다. 서구의 소설사 안에서도 특정 시대·군집의 작품들을 ‘진정한 노블’(the Novel)로 규범화하는 사고로 인해 소설 경험의 다양성이 왜곡되는 데 대한 문제제기가 등장했다.40
아울러 주목할 것은 유럽문학에 원천적 권위를 부여하는 편향도 이런 추세 속에 흔들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도전의 한 사례는 일본소설에 관한 논란으로부터 나왔다. 미요시는 일본 근대소설을 노블이라 하지 않고 ‘쇼오세쯔’(shòsetsu, 小說)라 지칭하며, 서구의 노블을 진화론적 귀착점 및 가치평가의 준거로 삼는 관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41 문제의 근원은 일본 근대소설의 성격 내지 본질을 보여준다고 할 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소설(私小說)이다. 노블의 전형을 기준으로 삼을 때 무엇인가 빗나가거나 결핍된 변종으로 간주될 법한 이 양식에 대해 일본 안에서도 간헐적인 논쟁이 이어졌거니와,42 영어권에 일본문학이 번역 소개되면서도 그 ‘비정상성’이 비평의 도마 위에 오르내렸다. 미요시는 이에 대한 변호 여부의 차원을 넘어 비평적 시선을 탈중심화하고, 쇼오세쯔는 물론 중국, 아랍, 우르두 등 주변부의 문학을 그 생성과 운동의 맥락 위에서 보자고 제안한다. “만약 다양한 나라의 산문 서사양식들을 노블이라는 유일한 범주에 귀속시킨다면, 그것들의 발달과정에서 역사적 변수들이 각인해낸 상이한 형식자질들과 힘을 간과하”리라는 것이 그 이유다.43 또다른 논자는 ‘서구 대 비서구, 근대성 대 전통’이라는 위계적 이분법과 그 속에 함축된 선형적 역사모델을 불식하지 않는 한 일본문학사의 근대성에 대한 해명이 온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44
내가 의도하는 바는 이런 발언들에 기대서 한국과 비서구 세계의 근대소설들을 형성론 및 평가의 차원에서 배타적으로 국지화(局地化)하자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서유럽과 러시아의 소설적 성취에는 제국주의시대의 문명담론이 엮어넣은 허울을 다 벗겨내고도 뚜렷이 남을 만한 실질이 있다. 그런 작품들과 서구의 소설담론이 각국에서 언제, 왜, 어떻게 주목되었으며, 이에 따른 언어·문화적 횡단에서 어떤 해석·변이·융합이 일어났는가를 문학 장의 변동역학 속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담론틀은 이에 대한 탐구를 역사적으로나 위계적으로 미리 한정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literature, novel’이라는 어휘의 도착 시점 이후로 시야를 제한하고 그것들의 관통력을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한, ‘번역된 근대’의 문학적 실상을 포착하기는 요원하다.45
소설은 성립과 전개 과정에서 끊임없이 주변의 서사적·담론적 자원을 흡수하고 버리면서 유동해온, 그래서 “그 장르 기억이 형태의 계보학에 국한되지 않는” 특이한 장르다.46 바흐찐의 비종결성(unfinalizability), 다성성(多聲性) 같은 개념들이 소설론에서 각별히 주목받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 근대소설의 형성·전개에 관한 연구가 노블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은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전근대 소설의 연속적 진화라는 기대와 19세기 서구소설 모델의 이입(移入)·토착화라는 설명방식을 모두 접어놓은 지점에서 우리의 문제의식을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래에 인용하는 장 롱시(張隆溪)의 말은 어쩌면 낯익은 원론의 반복처럼 여겨질 듯하다. 그러나, 이를 진부하다고 생략할 만큼 한국문학 연구의 탈식민화가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상이한 문화적·문학적 체계 속에 있는 기초자료, 관심사, 경험들로부터 이론적 질문들이 떠오르는 방식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비서구에 대한 서구이론의 단순 적용을 피하고, 이론적 차원에서 서양이 동양을 식민지화하는 행태의 아이러니컬한 반복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47
4. 맺음말
근대가 지닌 폭력성과 억압을 넘어서기 위한 성찰이 긴요하다는 김철의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대문학이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자기를 새롭게 정의하고 재구성해온 과정이라는 황종연의 대전제에도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입장을 구체화하는 담론들이 근대를 식민 기원(紀元)의 시간으로 규정하고 식민주의를 특권화하는 경향에 대하여는 수긍하기 어렵다. 아울러, 근대 동아시아 문학의 변혁에 대한 이해에서 문학 장의 여러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는 동적 양상을 외면하고 ‘literature, novel’ 개념의 관통으로 구도를 단순화하는 데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담론틀은 문학과 사회의 대변동이 일어난 자강운동기(근대계몽기)조차 성찰의 범위에서 주변화하고, 근대문학의 형성·전개를 식민지시대의 종속적 회로 안에서만 보는 약시(弱視) 내지 시야협착증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세계적 수준에서든 특정 식민지의 상황에서든, 물리적 우월성을 점유한 세력이 담론과 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했고 또 적잖이 성공했다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은 숱한 실패를 눈가림하고 미봉책으로 꿰매면서야 가능했고, 균열과 전복의 가능성을 내포했으며,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영역들을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우리의 연구에 쓰이는 담론틀은 이런 시공간 속의 행위자와 문학양식 및 표상체들을 다면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시야를 제공해야 한다.
민족이라는 거대 주체의 필연으로 역사와 문학을 보려 한 것이 과거의 문제였다면, 최근 10여년 내의 근대사와 문학연구 동향은 식민체제를 파놉티콘(panopticon)처럼 전능화하면서 또다른 필연의 논리에 기울어진 느낌을 준다. 내재적 발전론이 집착했던 1국사의 시야는 이런 추세 속에서 1.5국사(제국+식민지)의 종속적 구도로 환치되는데, 이것을 역사인식의 확장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제국주의-식민주의를 발광체로 놓고 피식민자를 반사체로 가정하는 논법이 1.5국사의 구도와 공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을 넘어설 만한 담론틀이 필요하다.
│덧글│
이 글을 준비하는 도중에 내 선행논문(「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의 발명인가」,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에 대한 반론으로 윤선태(尹善泰)의 「‘통일신라론’을 다시 말한다」(『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가 발표되었다. 따라서 이 글의 집필을 미루고 그에 답하고자 했으나, 막상 읽어본 반론에서는 지리멸렬한 변명과 험한 말들 외에 새로운 실질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주장에 대한 답은 이미 내가 발표한 논문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새삼스러이 답변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보아, 원래 예정했던 글을 발표하기로 했다.
다만, 독자들을 위해 논점의 골자와 한가지 새로운 정보를 여기에 제시한다. 윤선태는 원래 다음의 두가지 어긋나는 주장을 폈다. ‘①신라통일 담론은 19세기말 이전의 한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②당(唐)이 요동으로 퇴각한 시점(문무왕 16년, 676)에 신라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견해는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를 따른 것이다.’이 중에서 ①은 그가 더이상 주장하지 않으니 다행이고, ②의 실체성이 문제로 남는다. 그런데 『초오센시(朝鮮史)』 어디에도 신라가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676년’에 통일을 성취했다는 내용이 없으니, 윤선태의 주장은 한국 민족주의 사학을 식민주의의 계보에 편입시키려는 무고에 불과하다. 당을 축출한 시점에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견해는 신채호에게서 처음 나온 듯하다. 최근에 내 동료교수가 발견하여 알려준 자료인데,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쓴 논설에서 “신라 문무왕이 당병(唐兵)을 격파하고 본국 통일한 공을 이소적대(以小敵大)로 폄(貶)”한 데 대해 김부식을 혹독하게 비판했다.(「許多古人之罪惡審判」, 1908.8.8) 연대가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이 내용에 부합하는 시점은 676년일 수밖에 없다. 신채호는 삼국 간의 쟁패를 민족 내부의 전쟁으로 보고, 고구려 멸망(668)보다는 신라가 당과의 싸움에 이겨서 영토의 통합적 지배를 달성한 시기에 〔불완전하나마〕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본 것이다. 윤선태는 김택영의 『동사집략』을 『초오센시』의 역술(譯述)이라 하기도 했으니, 이제 신채호를 하야시의 계보에 넣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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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 「김동리와 파시즘」, 『국문학을 넘어서』(국학자료원 2000), 31~59면.↩
- 황종연 「문학의 옹호」, 『문학동네』 2001년 봄호, 396~98면.↩
- 이것은 지면 제한 때문에 김철의 ‘민족주의-파시즘’구도에 대한 검토를 본고에서 유보한 결과일 뿐, 두 사람의 학문적 공헌도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다.↩
- 김철 『복화술사들: 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문학과지성사 2008), 9면.↩
- 윤해동 외 엮음 『근대를 다시 읽는다』 1권(역사비평사 2006), 31면.↩
- 황종연 「문학이라는 譯語: ‘문학이란 何오’ 혹은 한국 근대 문학론의 성립에 관한 고찰」, 『동악어문논집』 32호(동악어문학회 1997), 473면.↩
- Étienne Balibar, “The Nation Form: History and Ideology,” Étienne Balibar and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s (London: Verso 1991). 이하의 내용은 87~91면 요약.↩
- 레이몬드 카 외 『스페인사』, 김원중·황영조 옮김(까치 2006), 246~57면 참조.↩
- Anthony D. Smith, National Identity (Reno: University of Nevada Press 1991), 59면.↩
- 이성형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민족주의』(길 2009), 64~69면; Douglas W. Richmond, “Nationalism and Class Conflict in Mexico, 1910-1920,” The Americas, Vol. 43, No. 3(1987) 참조.↩
- 조길태 『인도 민족주의 운동사』(신서원 1993), 27~68면 참조.↩
- 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이산 2002), 318면. 다음 논문도 함께 주목할 만하다. 노영순 「러일전쟁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유신운동」, 『역사교육』 90호(역사교육연구회 2004).↩
- YoonmiLee, Modern Education, Textbooks and the Image of the Nation: Politics of Modernization and Nationalism in Korean Education, 1880-1910 (New York: Garland Publishing 2000) 참조.↩
- 김흥규 「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의 발명인가」,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390~93면 참조.↩
- 황종연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 97~98면.↩
- ‘三呼萬歲’ ‘呼萬歲’ ‘山呼萬歲’ ‘嵩呼萬歲’의 형태로 구문화된 용례만도 『조선왕조실록』에 30회, 19세기초 이전 인물들의 문집에 75회가 발견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첫 용례로는 고려 우왕(禑王) 6년(1380) 8월에 왜구가 남해안을 침범했을 때, 이성계의 부대가 이를 물리치고 잔치를 벌이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09년 7월 5일에는 순종(純宗)이 동적전(東籍田)에 나가 보리 베는 의식을 행한 뒤 “관리와 백성들이 일제히 만세 환호를 했다”는 것이 『실록』에 기록된 마지막 사례다. 太祖實錄 總序, 辛禑六年 八月; 純宗實錄 2年 7月 5日 참조.↩
- 황종연 『비루한 것의 카니발』, 98면.↩
- 이런 의문과 함께 아래의 견해들을 음미해보는 것도 유익할 듯하다. “유럽의 식민지들은 유럽의 이미지에 따라서 제작되거나 그 이익에 맞게 조형될 수 있도록 텅 빈 공간들이 아니었으며, 유럽국가들 또한 특정 시점에서 해외에 투사된 자기완결적 실체들이 아니었다.” Ann Laura Stoler and Frederick Cooper, “Between Metropole and Colony: Rethinking a Research Agenda,” Tensions of Empire: Colonial Cultures in a Bourgeois World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1면.↩
- 김철 『‘국민’이라는 노예』(삼인 2005), 37면.↩
- 김철 「갱생의 道, 혹은 미로」, 『민족문학사연구』 28호(민족문학사학회 2005), 343면.↩
- 김철 「‘결여’로서의 국(문)학」, 『사이』 1호(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06), 35~37면.↩
- 김명호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역사비평사 2005); 최덕수 『대한제국과 국제환경』(선인 2005); 나가타 아키후미 『일본의 조선 통치와 국제관계』, 박환무 옮김(일조각 2008); 유선영 「일제 식민 지배와 헤게모니 탈구」, 『사회와 역사』 82호(한국사회사학회 2009) 참조.↩
- 류시현 「1920년대 삼일운동에 관한 기억」, 『역사와현실』 74호(한국역사연구회 2009.12), 188~89면 참조.↩
-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음미해볼 만하다. “식민지 조선의 형성, 발전, 통치에서 피식민주체들은 단순한 배경막이 아니었다. (…) 섬〔일본-인용자〕과 반도〔조선-인용자〕 사이의 상호작용(즉 ‘충격’에 대한 ‘반응’이라는 도식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역학적 관계)에 유의해야 우리는 일본 제국 연구를 압도해온 중심부 위주 시각의 문제점들을 피할 수 있다.” Andre Schmid, “Colonialism and the ‘Korea Problem’ in the Historiography of Modern Japan: A Review Article,”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59, No. 4 (November 2000), 973면.↩
- 김철 「두 개의 거울: 민족담론의 자화상 그리기」, 『상허학보』 17호(상허학회 2006.6), 164면.↩
- 나는 민족주의 자체를 옹호하거나, 저항적·침략적인 것을 나누어 선별적으로 긍정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바는 긍정/부정의 본질론을 떠나 그것을 담론적 현상들로 역사화하자는 것이다. 이 경우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기표를 중심적 자원으로 동원하는 담론들의 집합’ 정도가 될 것이다. 그 담론들이 상이한 계기 속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권위화/도구화되며 전유·상속·폐기되는지를 살피는 역사적 시각이 긴요하다. 임지현이 민족주의를 ‘2차적 이데올로기’라 한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착안인데, 지속적인 탐구가 제시되지 않아서 아쉽다.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소나무 1999), 9면 참조.↩
- 「노블, 청년, 제국: 한국 근대소설의 通國家間 시작」, 상허학회 엮음 『한국문학과 탈식민주의』(깊은샘 2005), 292면.↩
- 「문학이라는 역어」, 459면. Lydia Liu 참조 각주는 인용에서 생략했다.↩
- 「노블, 청년, 제국」, 266~68면.↩
- Lydia H. Liu, Translingual Practice: Literature, National Culture, and Translated Modernity-China, 1900-1937 (1995), 민정기 옮김, 『언어횡단적 실천』(소명출판 2005). ‘translingual’은 국역본처럼 ‘언어횡단적’으로 옮기는 것이 저자의 의도에 부합할 것이다.↩
- 리디아 리우, 앞의 책 60~61면.↩
- 그는 서문에서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제부터 우리 소설의 개량진보를 기도하면서 결국에는 서양소설(노블)을 능가하여 회화, 음악, 시가와 더불어 미술〔예술-인용자〕의 최고 위치에 있는 찬란한 우리들의 모노가타리를 보기를 바란다.” 쓰보우치 쇼요 『소설신수』, 정병호 옮김(고려대 출판부 2007), 17면.↩
- 그는 게사꾸(戱作)를 탐독하고 그 주요 작가 중 하나인 쿄꾸떼이 바낀을 특히 좋아해서, 『소설신수』가 나오기 4년 전인 1881년경에는 ‘바낀류’를 흉내낸 소설 창작을 시도한 적도 있다. 스즈키 사다미 『일본의 문학 개념』, 김채수 옮김(보고사 2001), 288면; 김순전 「일본 근대소설의 이론과 실제: 쓰보우치 쇼요와 후타바테이 시메이를 중심으로」, 『일본학보』 49호(한국일본학회 2001), 306면 참조.↩
- ‘인정, 세태’는 조선후기와 자강운동기의 소설론에서도 자주 등장한 핵심 개념이다. 김흥규 「조선후기와 애국계몽기 비평의 人情物態論」, 『한국 고전문학과 비평의 성찰』(고려대출판부 2002); 김경미 『소설의 매혹: 조선후기 소설비평과 소설론』(월인 2003) 참조.↩
- 가메이 히데오 『‘소설’론: <소설신수>와 근대』, 신인섭 옮김(건국대출판부 2006), 109, 282면.↩
- 황종연 「낭만적 주체성의 소설: 한국 근대소설에서 김동인의 위치」, 문학사와 비평학회 엮음 『김동인 문학의 재조명』(새미 2001), 103~104면.↩
- 「노블, 청년, 제국」, 270~71면.↩
- 「낭만적 주체성의 소설」, 105면.↩
- Robert Scholes and Robert Kellogg, The Nature of Narrativ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6), 8~9, 211~14면 참조.↩
- J. Paul Hunter, “Novels and ‘The Novel’: The Poetics of Embarrassment,” Modern Philology, Vol. 85, No. 4 (May 1988) 참조.↩
- Masao Miyoshi, “Against the Native Grain: The Japanese Novel and the ‘Postmodern’ West,” Masao Miyoshi and H. D. Harootunian eds., Postmodernism and Japa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89).↩
- 일본 사소설 담론에 대한 논의로는 토미 스즈키 『이야기된 자기: 일본 근대성의 형성과 사소설 담론』, 한일문화연구회 옮김(생각의나무 2004); 카시하라 오사무 「사소설론과 일본 근대문학 연구의 문제」, 이금재 옮김, 『일본 근대문학: 연구와 비평』 4호(한국일본근대문학회 2005) 참조.↩
- Masao Miyoshi, “Turn to the Planet: Literature, Diversity, and Totality,” Comparative Literature, Vol. 53, No. 4 (Autumn 2001), 285~86면 참조.↩
- Tomiko Yoda, “First-Person Narration and Citizen-Subject: The Modernity of Ògai’s ‘The Dancing Girl’,”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65, No. 2 (May 2006), 277면.↩
- 이와 관련하여, 황종연이 조선후기와 1890~1900년대의 문학적 추이에 대해 관심이 희박하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이 시기에 대한 그의 이해는 노블 도착 이전의 한국문학에 허구적 서사에 대한 인식과 창작·수용의 축적이 극히 박약했다는 의문스러운 가정에 머물러 있다. 그는 조선시대에 ‘소설’이 허구적 서사물이라는 의미로 안정되지 않은 채 “패설(稗說), 전기(傳奇), 연의(演義), 잡기(雜記)” 등과 혼용되다가, “19세기의 어느 시점에서는 국문과 한문 양쪽의 허구적 서사물을 일반적으로 가리키게 되었다고 추정된다”고 했다.(「노블, 청년, 제국」, 264면), 이 추정에는 아무런 참조 근거도 없을뿐더러, 조선후기 소설과 소설론에 관한 다량의 자료 및 연구성과와도 크게 어긋난다.↩
- Michael Holoquist and Walter Reed, “Six Theses on the Novel, and Some Metaphors,” New Literary History, Vol. 11, No. 3 (Spring 1980).↩
- Zhang Longxi, “Penser d’un dehors: Notes on the 2004 ACLA Report,” Haun Saussy ed., Comparative Literature in an Age of Globalization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6), 2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