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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왜 연암(燕巖)인가?

박지원의 저술과 그 번역서들

 

송재소 宋載卲

성균관대 명예교수, 한문학. 저서로 『다산시연구』 『한국 한문학의 사상적 지평』 『한시 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이 있음. skjisan@hanmail.net

 

 

최근 연암 박지원(朴趾源) 저작의 번역서와 그에 대한 연구논문, 연구저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정확한 통계를 내보진 않았지만 아마 단일 인물에 대해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경우가 연암일 것이다. 근자에 출간된 번역서 『연암집』(신호열·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과 『열하일기』(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는 이러한 ‘연암 열기’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업적이다. 이 두 번역서의 출간을 계기로 우리가 왜 오늘날 연암을 떠올려야 하는가를 짚어보고자 한다.

 

 

1. 연암문학의 비의(秘義)

 

연암의 손을 거쳐 씌어진 작품들은 한결같이 신선한 매력을 풍긴다. 그는 마치 언어의 마술사처럼 어떠한 주제, 어떠한 종류의 글에도 생기를 불어넣는다. 서(序)·기(記)·발(跋)·묘지명(墓誌銘)·전(傳) 등 거의 모든 한문학 장르의 글이 연암이라는 용광로를 거쳐 나오면 정채(精彩)를 발한다. 이 마술적인 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일차적으로는 연암의 선진적인 실학사상(實學思想)이 기본 바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문학적 매력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위대한 사상을 담고 있지만, 위대한 사상이 반드시 위대한 예술을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암문학의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여기니, 그 사물 자체는 본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자기 혼자 화를 내고, 한가지 일이라도 자기 생각과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조리 모함하려 든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빛을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취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고정지으려 하는구나.(「능양시집서」, 『연암집』 下, 61~62면)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까마귀가 검은 것은 사실이지만 광선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까마귀는 검은 것’이라는 인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까마귀의 참모습을 인식할 수 없다는 논리다. 마치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론과도 흡사하다. 모네가 「루앙 성당」 연작에서 성당의 색조를 회색, 청색, 백색, 갈색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한 것은 성당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까마귀를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서는 푸른 까마귀, 붉은 까마귀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암의 의도가 까마귀의 색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인상파 화가들은 까마귀를 그릴 때 푸르게도 붉게도 그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는 일로 그들의 목표는 달성된다. 연암의 경우, 까마귀의 색은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다. 연암은 까마귀를 예로 들어 문예창작의 이론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문(文)은 반드시 양한(兩漢)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시(詩)는 성당(盛唐)을 본받아야 한다’는 고식적이고 인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연암의 의도이다. 까마귀는 검은색밖에 없다는 사고는, 시의 모범은 성당(盛唐)뿐이라는 폐쇄적인 사고와 궤를 같이한다. 이런 사고로는 참다운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다. 양한의 문과 성당의 시가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만 집착하면 기껏해야 한(漢), 당(唐)의 아류가 될 뿐 창조적인 글을 쓸 수 없다. 여기에 연암문학의 비의가 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사고하고 기존의 창작방법으로부터 탈피하여 글을 쓸 때 비로소 창조적인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의 극단적인 모형은 어린이의 순진무구함이다.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주다가, 읽기를 싫어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더니, 그 애가 하는 말이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天’이란 글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싫어하는 겁니다” 하였소.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蒼)로 하여금 기가 죽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창애에게 답함 3」, 『연암집』 中, 379면)

 

창힐은 한자(漢字)를 처음 만들었다는 사람인데, 글쓰는 자는 모름지기 창힐이 처음 문자를 만들 때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연암은 줄곧 말했다. 창힐이 처음으로 글자를 만든 것은 과거의 어느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고 자연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 이치를 깊이 터득하여 나름의 새로운 창조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연암에게 창힐은, 과거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기존의 관습에 얽매임 없이 참다운 창조를 이룩한 전범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네 아이의 발상이 그 창힐을 기죽일 만하다고 했다. ‘天’이라는 글자에 얹힌 도덕적·형이상학적 제관념(諸觀念)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하늘’이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어린이의 태도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는 경이롭고 신선하다. 그리고 대상에 덧붙여진 기존의 의미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기 때문에 대상의 참모습을 옳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다.

이렇게 모방을 버리고 참다운 창조를 하려는 데 연암문학의 마술적인 힘이 있다. 이 마술적인 힘은 연암이 쓴 거의 모든 글에서 읽을 수 있다. 한 예로 그가 쓴 묘지명(墓誌銘)을 들 수 있는데, 묘지명은 한문학 문체 중에서도 가장 격식화된 글이다. 그런데 그는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연암집』 上, 330면)에서 종래의 격식을 과감히 깨뜨렸다. 죽은 누이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진솔하게 토로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규격적인 틀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 묘지명은 연암의 글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작품이 되었다. 높은 비평적 안목을 지녔던 그의 처남 이재성(李在誠)은 이 글을 두고 “인정을 따른 것이 지극한 예(禮)가 되었고 눈앞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 참문장이 되었다. 문장에 어찌 일정한 법이 있었던가?”라고 평했다.

연암의 창조정신은 문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순정(淳正)한 고문만 구사하지 않고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라 불리는 신문체를 즐겨 사용했다. 새롭고 창조적인 내용을 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연암체’라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문체를 구사하여 정조로부터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이후로 문체가 이와같이 되었다”는 질책을 받았고, 급기야 이는 저 유명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연암은 사상의 내용면에서나 창작 자세에서나 문체에서 늘 창조적인 것을 추구하여 그만의 독특한 글을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고전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현대인도 본받아야 할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2. 북학(北學)을 주장한 진보적 학자

 

연암은 위대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걸출한 실학자이다. 그리고 실학자로서의 연암사상의 핵심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바탕으로 한 북학론(北學論)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은 이른바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淸)을 정벌하자는 북벌론(北伐論)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라고 해서 청을 야만시하여 그 실체를 부정하고 이미 망한 명(明)을 존숭하는 시대착오적인 사고가 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청을 ‘배우자’고 주장한 연암은 매우 진보적이고 용감한 학자이다.

이러한 북학론은 『열하일기』에 집중적으로 개진되어 있다. 이 책은 그의 나이 마흔넷이던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조선 사신 일행을 따라 중국대륙을 여행하고 나서 쓴 일종의 기행문이다. 그러나 결코 평범한 기행문이 아니다. 그는 서울을 출발할 때 말안장 양쪽에 주머니를 걸고 왼쪽에는 벼루를, 오른쪽에는 거울과 붓, 먹, 공책을 넣어 갔다고 한다. 이러한 행장을 보아서도 중국에 가는 그의 의도와 결의를 읽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중국이 곧 세계였다. 그리고 중국은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뿐만 아니라 공자, 맹자의 나라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연암에게 중국여행은 세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천하의 정세를 살필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가 중국에서 본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곳의 발달한 문명이었다. 그가 본 청나라는 결코 야만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너 첫발을 디딘 곳이 책문(柵門)이었는데, 동쪽 변두리의 작은 고을임에도 수준높은 문물을 접한 후 그는 “홀연히 기가 꺾여 문득 여기서 바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열하일기』 1권 61면)고 했다. 책문의 어느 술집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점포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단정하고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고, 한가지도 구차하거나 미봉으로 한 법이 없고, 한가지 물건도 삐뚤고 난잡한 모양이 없다. 비록 외양간, 돼지우리라도 널찍하고 곧아서 법도가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장작더미나 거름구덩이까지도 모두 정밀하고 고와서 마치 그림과 같았다. 아하! 제도가 이렇게 된 뒤라야만 비로소 이용(利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용을 한 연후라야 후생(厚生)을 할 수 있고, 후생을 한 연후라야 정덕(正德)을 할 수 있겠다.(『열하일기』 1권 69면)

 

이 책문의 술집에서 연암사상의 핵이라 할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의 뼈대가 구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후의 여행과정에서 청의 문물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기록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수레, 벽돌, 목축, 선박을 들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도 수레를 사용하여 물자를 유통시켜 상업을 발달시켜야 하고, 벽돌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야 함을 역설했다. 말하자면 『열하일기』는 북쪽에 있는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배워 우리도 부강한 나라가 되자는 부국론(富國論)이라 할 수 있다.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와 더불어 『열하일기』를 이용후생학의 대표적 저술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연암은 또한 길지 않은 여행에서 거대한 제국 청의 허와 실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그는 청나라 지식인들과 필담하며 청에 대한 한족 지식인들의 저항의식을 읽었고,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의 편찬을 통해 저항적인 지식인들을 평생 교정과 편찬사업에 종사하게 한 이른바 ‘문자옥(文字獄)’의 실상을 꿰뚫어보았다. 또한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 등 이민족과의 갈등이 심하다는 사실도 간파해, 황제가 해마다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머무는 것을 티베트와 몽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열하일기』 2권 168면 참조). 여러 어려움을 딛고 거대 제국을 이끌어가려는 청의 지배, 통치방식을 날카롭게 꿰뚫어본 연암은 청의 몰락까지도 어렴풋이 예견하고 있다.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우주론을 전개하며 중국이 결코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탈중화주의(脫中華主義)적 사상도 『열하일기』 곳곳에 산견된다. 그리고 이것은 연암의 민족주체의식으로 이어진다.

『열하일기』가 우리 민족의 영원한 고전이 된 데는 사상성 못지않게 예술성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에는 마부나 하급관리, 평범한 서민들에서부터 당대 최고의 지식인, 황제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난 다양한 인간유형이 생동감있게 묘사된다. 그러기 위해서 대화체의 문장을 많이 구사했는데, 중국인들의 말은 가급적 백화체(白話體)로 인용하고 조선사람의 말도 구어체(口語體)를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소설적 문체가 현장감을 살리고 또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기행문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연암

 

 

3. 번역서 『연암집』과 『열하일기』

 

2007년에 번역 출간된 『연암집』은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편한 활자본 『연암집』 중에서 『열하일기』와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제외한 연암의 시문 전체를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연암의 저작들은 그동안 부분적으로 번역된 적은 있지만 전체가 완역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 예술적 수준과 사상적 깊이에 있어서 한국 최대의 문호라 할 수 있는 연암의 저작이 신호열(辛鎬烈)과 김명호(金明昊)의 번역을 만나 비로소 현대인에게 그 진가를 드러낸다.

신호열 선생은 1978년부터 매주 자택에서 연암집 강독회를 열었는데, 선생이 구술하고 제자들이 원고지에 받아적는 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독회에 참석했던 필자의 기억으로는 한글 문체와 맞춤법 등의 문제로 약간의 마찰이 있긴 했지만, 신호열 선생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큰 작업이었다. 이렇게 초고가 완성된 지 얼마 후 선생이 작고하고, 원고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제자들 사이에서 원고를 정리해서 출판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한문 번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주석(註釋)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 어려운 마무리작업을 김명호 교수가 자임하고 나서서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감히 외람되게 야구에 비유하자면, 한국 최고의 선발투수와 한국 최고의 마무리투수가 합작하여 승리로 이끈 경기라 할 수 있겠다.

신호열 선생의 번역에 대해서는 천학비재(淺學非才)한 필자가 첨언할 필요를 느끼지 않거니와 김교수의 마무리가 없었다면 신호열 선생의 번역도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만하다. 김명호 교수가 해제에서 밝힌 대로 이 책은 그야말로 ‘전문적 학술번역서’다. 이 책에는 총 4천여개에 달하는 주석이 달려 있다. 고경(古經)의 전고(典故)를 종횡무진으로 일일이 밝혀놓은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본(異本)들을 대조하여 오탈자를 바로잡았음은 물론이고 방대하고 치밀한 고증을 거쳐 연암의 실수까지 정확히 짚어냈다. ‘還他本分’을 ‘본분으로 돌아가 지키라’는 뜻의 ‘還守本分’으로 바로잡았고(『연암집』 中, 377면 주1), 연암이 ‘天王’을 ‘天主’로 잘못 인용했다는 주석(『연암집』 上, 310면 주28)이 그 한 예이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다.

뿐만 아니라 각 작품의 창작시기와 창작배경 등을 일일이 고증하여 연암 연구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텍스트로 만들어놓았다. 또한 원문을 교정하고 구두(句讀)를 정확히 정리했으며 하권 끝에 총색인을 첨부하여 ‘전문적 학술번역서’로서 손색이 없다.

한편 이번에 출간된 『열하일기』는 남북한을 통틀어 10여종 이상의 번역본이 나와 있어 얼핏 더이상의 번역이 필요없다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혈조(金血祚) 교수의 새로운 번역은 왜 『열하일기』가 다시 번역되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선 이 책은 기존 번역서의 오역과 적당히 얼버무린 부분을 가능한 한 바로잡았다. 무릇 완전한 번역은 있을 수 없지만, 한번 오역된 것을 그대로 베껴서 오역을 대물림하고 전고를 밝히지 못해 얼버무려놓은 곳을 역자는 치밀한 고증을 통하여 일일이 정정했다. 지금까지 악곡(樂曲) 명칭으로 번역되어온 ‘萬寶常’을 음악가 이름으로 고쳐 번역한 것이 한 예이다.(2권 300면)

이렇게 상세한 주석작업을 한 것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인물, 제도, 풍속, 지리, 동식물, 역사적 사실 등에 대한 자세한 주석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예를 들어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주에 “의무려는 여진족의 말로 크다는 뜻이다”라 밝혔고(1권 231면), ‘반선(班禪)’에 대해서는 “본래는 대학자라는 의미를 가진 티베트어이다”라는 주가 달려 있다.(2권 169면) 또한 “지금의 반선” 부분에 주를 달아 “연암이 중국에 있던 당시 열하에 왔던 반선 액이덕니는 제6세 반선이고 본명은 羅桑貝丹益西(1738~1780)이다”라고 고증했다. 이같은 주석은 기존 번역서 어디에도 없는 놀라운 것이다. 원문의 오자도 섬세하게 교정했다. ‘看車’를 ‘趕車’로(1권 208면), ‘養閒’을 ‘養漢’으로(1권 374면) 바로잡은 것 등을 비롯해서 연암이 실수했을 법한 인명의 표기도 수없이 교정해놓았다.

시원한 판형과 시각적인 편집도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내가 알기로는 역자가 중국에 1년간 체류하면서 『열하일기』 관련 지역을 일일이 답사하여 사진을 찍었는데, 이 책에는 그 생생한 현장사진이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인물, 문물, 복식, 식물, 악기, 고기(古器), 건물 등의 사진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 그야말로 읽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가감 없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수준 높은 학술적 연구번역임과 동시에 일반독자가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도록 편집한 책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연암집』과 『열하일기』는 단순한 번역서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연암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명호 교수와 김혈조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암 전문가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연암 연구에서 축적된 지식을 이 번역서에 모두 쏟아부었다. 이 글에서는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연암을 연구하면서 만나는 여러 문제들이 이 번역서에서 특히 주석을 통해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 연암 전문가의 안목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두 책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고 ‘학술적 연구번역서’라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연암 연구의 수준이 한층 높아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