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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그녀의 눈물이 토성의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김소연 시집 『눈물이라는 뼈』
김영희 金伶熙
문학평론가. 제16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 주요 평론으로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 진은영 시의 ‘감성’과 ‘정치’」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눈물이라는 뼈』(문지 2009)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주 우울한 개인의 환영과 마주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 시인은 토성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서양 점성술에서 토성적인 기질은 느림, 몽상, 슬픔, 우울 등으로 설명되곤 한다. 쑤전 쏜택은 벤야민의 기질을 토성적인 것이라는 관점으로 분석한 흥미로운 글(「토성의 영향 아래」, 1978)에서 “프랑스인들은 벤야민을 ‘슬픈 사람un triste’이라고 불렀다”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김소연(金素延)은 슬픔을 “생의 속옷”(산문집 『마음사전』, 2008)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그녀에 따르면 슬픔이란 우리가 평생 몸 가장 깊숙한 곳에 매설하고 살아야 하는 근원적인 감성이다. 더불어 시집 곳곳에서 드러나는 느리다, 고독하다, 기억하다, 반항하다, 몰입하다, 여행하다 등의 표지들 또한 토성적인 것의 일부를 이룬다.
이같은 토성의 표지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기호는 바로 ‘눈물’이다. 눈물을 ‘몸의 언어’라고 말해볼 수 있을까. 눈물을, 고독을 증언하고(「고독에 대한 해석」) 고통을 증명하기(「고통을 발명하다」) 위해 몸이 송신하는 메씨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김소연의 시에서 울음이 발화되는 생의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눈물이 몸의 메씨지라면 그것은 일종의 기호로서 특정한 수신자를 고려하게 마련이다. 『눈물이라는 뼈』는 시인이 ‘나’를 수신자로 하여 타전한 눈물이라는 기호가 ‘보편적인’ 울림을 획득하여, 끝내는 ‘우리’라는 수신자에게로 수렴되는 ‘흐름’을 보여준다. 눈물이 ‘뼈’를 갖게 된 까닭은 그것이 시인의 내부로 은폐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발화되었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수신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불망(不忘) 카페」)은 비로소 고독과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단단한 마음들을 얻는다.
김소연의 시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과 사적인 감정들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녀가 말하는 고통스럽고 우울한 소재들은 우리의 보편적 감수성 속으로 유연하게 흡수된다. 그녀는 존재하지만 잊고 있었던 원초적 감성들을 이곳으로 불러내 공명하게 한다. 시인의 감성이 이토록 넓은 울림을 지니게 된 내력은 울음의 형식보다는 내용에서, 즉 사회현실의 문제부터 사적인 관계의 문제까지를 아우르는 울음의 동인(動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섭생을 위해 타인을 살생해야 하는 운명에 내몰린 이들은 ‘늑대의 눈물’을 흘린다. 시인이 들려주는 늑대 이야기는 황금사슬에 매달려 무한생존경쟁을 펼치는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우화로 읽힌다. 늑대 이야기에 밑줄을 그으며 악몽을 꾸던 아이가 “늑대의 섭생”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눈물이라는 뼈」). 늑대의 섭생을 체득한 어른은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이것은 사람이 할 말」)을 듣게도 될 것이며, 자신의 몸의 ‘궁극이 곧 폐허’(「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임을 깨닫게도 될 것이다. 그러니 나비도, 말매미도, 십장생의 사물들도 모두 “한통속이 되어” 내생(來生)에서 “사람이 아니기를”(「사람이 아니기를」) 꿈꾸어보는 것인데 이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즉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우리들의 꿈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당신과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전기, 그 “접착 불가능한 해후”(「뒤척이지 말아줘」)를 몸으로 체득한 이들은 ‘검은 피의 눈물’을 흘린다. “우리라는 자명한 실패”를 당신은 사랑이라 하고 나는 모독이라고 불렀을 때 그 역설적인 호명 속에서 우리라는 관계는 제 공간을 잃는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명(虛名)을 “당신의 두려움과 나의 두려움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피”(「투명해지는 육체」)의 형상으로 토로했다. 그럼에도 끝내 “죽일 수도 때릴 수도 없었던”(「명왕성으로」) 사랑의 열렬함과 통증을 정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마침내 대면해야 할 것은 “기억이나 슬픔 같은 것”(「고통을 발명하다」)이 매개하는 추억이다. “나이만큼 무한 증식하는 추억” 속에서 시인은 우울과 악의의 궤도를 지독하게 배회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자신의 눈물을 뼈 속에 새겨, 결국 눈물과 뼈를 동일한 몸으로 묶어내는 시인의 감각이다. ‘눈물이라는 뼈’는 그 자체로 이질적인 것들의 미적인 일치를 보여준다. 이 표현을 통해 눈물과 뼈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들의 대립과 긴장은 서로의 아우라를 훼손하지 않은 채 ‘지양’된다. 이는 눈물이라는 혹은 뼈라는 대상이 지닌 일반적인 의미연관을 파괴하고 이들을 등치시킴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미적 자극을 선사한다. 그러니 이제 김소연의 ‘눈물이라는 뼈’는 우리에게 눈물의 다른 형상, 즉 자신 안에 뼈라는 내적 동인을 지닌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뼈의 실체는 다름아닌 ‘자책’이다. 시인은 금세 후회하고 말지만 여전히 자책을 사모하여 밤을 새우고, 자책을 사모하여 강물만 바라본다(「만족한 얼굴로」). 시인이 자책을 반복하는 이유는 ‘절실한’ 무엇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절실함의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시인 자신일 텐데, 김소연의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스스로를 하나의 텍스트로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인이 자책을 반복하는 이상 ‘자아’라는 텍스트는 언제나 실패의 운명을 내장하게 될 터이지만 다행히도 김소연은 ‘실패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이다. 이는 자신의 눈물로 점액질을 만들어 느리지만 꾸준하게 생을 견인하는 동력인데(「투명해지는 육체」), 이 눈물이 범람하면 자본과 거짓말이 유령처럼 떠도는 빙산의 지형을 바꿀 수도 있다(「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그러니 시인에게 절망이란 “너무나 안전하므로 차마 디딜 수 없는”(「만족한 얼굴로」) 영토다. 우리는 시인에게서 자책하지만 절망하지 않는 ‘용기’를 배운다.
이제 우리는 그녀가 점차 토성의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과 만나게 된다. 이는 뼈라는 동인을 가진 김소연의 눈물이 생의 ‘열렬함’과 ‘통증’ 사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물로 살림살이의 등때를 헹궈주기 시작한다/인간의 등에 대해 기록하느라 그녀는 청춘을 썼다 이것은/사물들이 그녀에게 유독 등을 맡기려는 이유이며/그녀가 울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이유이다”(「그녀의 눈물 사용법」). 누군가의 등을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 혹은 등을 구부리고 앉아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시인이 왜 등에서 고독을 해석해내는지를(「고독에 대한 해석」), 외롭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어디에서 발성되는지를(「모른다」) 말이다. 하지만 고독의 거처로서의 등은 유일하게 제 몸에 개방해놓은 타인의 공간이기도 하다. “살림살이의 등때”는 타인에게 등을 맡기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지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별이/별과 함께 별자리를” 만드는 법이며, 나무와 나무가 몇억 광년의 시간을 거슬러 서로에게 가지로 닿고자 하는 이유이다(「위로」). 시인이 별과 나무가 만드는 우리의 공간에 ‘위로’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우연일까. 역설적이게도, 『눈물이라는 뼈』는 “내게 뼈를 보여주신 당신께” 눈물의, 통증과 열렬함을 담아 전하는 ‘위로’의 한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