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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삼혜 全三惠
1987년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ishumir@naver.com
딱
내가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우리 집엔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유치원에 입학할 때도, 초등학교 졸업식 때도 올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대걸레로 교무실 유리창을 부순 날, ‘부모님 모셔와!’라는 호통에 나는 당당하게 ‘어머니밖에 없는데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호적을 떼어보면 ‘부’와 ‘모’, 합쳐서 ‘부모’가 번듯하게 있는 가정이었지만 나는 늘 우리 집이 편모가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엄마의 설명도 한몫 거들었다.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는 궁금해서, 굵어진 후에는 심술 삼아 엄마에게 묻곤 했다. 엄마, 나는 왜 아빠가 없어?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밀이라도 말하듯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빠는 지금 멀리에서 백화점을 만들고 있어. 해가 바뀔 때마다 아버지가 짓는 것은 다리가 되기도 했고 빌딩이 되기도 했다. 싼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부터 나는 엄마 앞에서 대놓고 투덜거렸다. 차라리 로봇 기지를 짓고 있다고 하지? 매해 바뀌다시피 하는 아버지의 일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리를 짓고 있다고 한 해는 한강다리 하나가 무너진 해였고, 백화점을 짓고 있다고 한 해는 백화점 건물이 폭삭 주저앉은 해였다. 엄마는 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한다니까. 멜빵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여섯살의 내가 엄마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내 볼을 문질렀다. 로봇 기지라. 그것도 괜찮겠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변변한 반항기마저 가질 수 없었다.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가출을 하거나 폭주족에 가담하기엔 너무 ‘쪽팔렸다.’ 코흘리개 때부터 ‘아빠가 없다는 게 뭐 대수야? 엄마 힘내’라며 엄마 어깨를 두드렸던 내가 아닌가. 내가 할 수 있는 사춘기 처방이라곤 학교 뒤 언덕에서 B와 함께 입담배를 피우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B에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한 동네에서 초중고를 같이 나온 이 녀석은 어느날부터 무협지도 성인잡지도 아닌 이상한 책들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인물 이름 옆에 대사만 죽죽 써진 그 책을 녀석은 신주단지라도 되는 듯 아끼고 살폈다. 야,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그러냐? 구멍가게에서 오백원 더 주고 사온 담뱃갑을 뜯으며 내가 묻자 녀석은 눈을 지그시 감고 대답했다. 커트 보네거트께서 말씀하시길, 부모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자신이 없으면 예술을 하라더라고. 나는 하마터면 필터에 불을 붙일 뻔했다. 이 새끼야. 그래서 게이가 되고 싶었다는 거냐? 아니. B는 멋쩍게 히히 웃으며 퉁퉁한 손으로 내 입에 물린 담배를 바로잡았다.
그러니까 내가 TV를 보다가 밥그릇을 떨어뜨린 것 정도는 애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스물이 되던 그 해에도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아빠가 없어? 엄마는 이제 까치발을 해야 간신히 손이 닿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빠는 멀리에서 도서관을 짓고 있단다. 나는 엄마를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여태까지 지은 것 중에 가장 학구적인 건물이네. 그 전해에는 피씨방, 그 전해에는 별장, 그 전해에는 펜션. 최근 몇년간은 아버지의 사업이 좀 퇴폐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차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왕 재수하기로 한 거, 돈을 열심히 벌어 엄마를 재혼전문 상담소에 데려가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찾던 참이었다.
그런데 TV에 아버지가 나타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앞에 ‘건축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내 휴양지 펜션의 동향인지 뭔지를 다루는 아침 프로그램에 나온 그 사람은 분명 아버지였다. 호적등본에서 본 이름을 자막으로 깐 화면에 나타난, 기르다 만 콧수염에 뿔테 안경을 쓴 얼굴은 묘하게 나와 닮아 있었다. 밥그릇 깨지는 소리에 놀라 방에서 나온 엄마는 화면을 보고 딱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어머, 이번엔 저기 가 있었네. 택배를 분류하다가 주문자 이름에 ‘싼타클로스’가 적힌 걸 보면 기분이 이럴까. 나는 깨진 밥그릇 조각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B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아무래도 TV에 아버지가 나온 것 같아. 아침식사 중이었는지 우물거리는 소리로 B가 대답했다. 있잖아. 너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공통점이 뭔지 아냐? 이건 또 무슨 싼타클로스 빨간 내복 주문하는 소리야.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물 들이켜는 소리가 넘어온 후, 한결 개운해진 발음으로 B가 말했다. 남의 말에 귀가 얇아서 지 인생을 말아먹는 거란다. 네놈이 매해 세뇌당하더니 드디어 돌았구나.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끊어. 나는 끊긴 수화기를 들고 TV 화면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뒷머리를 득득 긁으며 어느 산장 앞에서 리포터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매정한 새끼, 진짜라니까. 나는 구시렁거리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아버지가 집에 왔다. TV 밖에서는 처음 보는 건데도 설레지는 않았다. 다만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아버지를 보고 멍청하게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다. 진짜 아버지가 있었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 그러기에 엄마 말 안 믿고 뭐 했어? 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동생이라도 만들었으면 내가 믿었지. 어머니가 눈을 크게 뜨고 반박했다. 얘 좀 봐. 만들기는 했어. 낳지를 못했을 뿐이지. 아버지가 추임새를 넣었다. 두번. 네가 여섯살 때, 여덟살 때. 그때 참 미안했어, 여보. 뭘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팔짱이 더 단단해졌다. 저 아르바이트 다녀올게요. 나는 겉옷을 집어들고 집을 나섰다.
B와 나는 택배를 배송지별로 분류했다. 이건 서울, 이건 경기, 이건 경남. 크고작은 상자들을 지역별로 쌓으며 나는 투덜거렸다. 아니, 이건 뭐 서울에서 출발해서 부산 찍고 일산 오는 택배도 아니고. 무슨 아버지가 20년 만에 돌아오냐? 옆에서 B가 말을 받았다. 동생도 생겼었다며. 돌아왔는데 너 모르는 사이에 왔다가신 모양이다. 그런가 보더라. 나는 수신지가 울산인 택배를 ‘경남’ 쪽으로 밀어놓았다. B가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너 G랑은 어떻게 됐어? 요새 통 안 보이더라.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셨겠어요. 걔 부산으로 대학 갔다.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B가 혀를 찼다. 너, 차였구나. 나는 대답 대신 박스 하나를 B 쪽으로 밀쳤다. 재수생하고는 만나기 싫대. B가 상자를 바닥으로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대학생인데 왜 안 만나주냐. 몰라. 부산에서 캠퍼스 커플이나 하겠지. 넌? B가 멍청하게 되받았다. 내가 뭐? 나는 작업대 위의 테이프 조각을 쓸어담아 B의 등에 붙였다. 너네 학과 여자 많다며. 넌 뭐 없냐? B가 손이 닿지 않는 곳의 테이프를 떼어내느라 낑낑댔다. 여자는 많은데 내 여자는 없더라.
4월 초인데도 한밤의 골목길은 싸늘했다. 나와 B는 편의점에서 캔커피 두개를 샀다. 딱, 소리가 나며 따진 캔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며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제 너네 아버지는 뭐 하실 거래?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물어봤다. B가 내 뒤통수를 쳤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새끼가. 지난주까지만 해도 몰랐거든? B가 다 마신 캔을 길옆으로 던지면서 나에게 달라붙었다. 야, 나 니네 아버지 보러 가면 안되냐? 이 새끼는 우리 아버지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냐. 그럼 뭐 하시는지라도 알려줘. 알았어. 나는 파리를 떼어내듯 팔을 휘저어 B를 쫓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주앉아 마늘을 까고 있었다. 마치 한 삼십년 붙어산 다정한 부부 같은 모양새였다. 나는 떨떠름하게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는 휘파람을 불며 깐 마늘을 통에 던져넣었다. 아버지는 내 쪽을 보고 훅, 바람을 불었다. 입에서 마늘 냄새가 났다. 재수한다며? 아버지로서의 위엄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말투에 나는 그렇게 됐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뭐 할래? 돈 좀 벌려고요. 아버지는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트로트 메들리였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뭐 하세요? 엄마가 마늘 껍질을 손에서 떼며 말했다. 도서관 짓는다니까. 아버지가 어머니의 얼굴에 붙은 껍질 조각을 떼어냈다. 그건 다 지었어. 그러신가요. 나는 턱을 괸 채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마늘 껍질 조각을 튕기며 말했다. 같이 갈래?
B는 극구 토요일에 가자고 우겼다. 수업 때문에 주말이 아니면 시간이 안 난다는 거였다. 내가 우리 아버지하고 어디 가는데 왜 네 허락을 받아야 되냐,고 쏘아붙였지만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주말은 안되나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타고 온 구형 승합차에 B와 내가 올라탔다. B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잔뜩 들떠 있었다. 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설 때쯤 아버지가 룸미러로 뒷자리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쟤는 누구니? 나는 B를 소개할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게이가 될 용기가 없어서 예술을 하는 친구예요,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대답하기 전에 B가 내 말을 가로챘다. 막역한 사이죠. 애인 같은.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둘다 여자친구가 없는 모양이지? 그렇죠 뭐. 나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주말 치고는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았다. 나는 B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너, 요새 예술이 잘 안되냐? B는 히히, 웃으며 까먹던 귤을 내 입 안에 처넣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B의 물음에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다. 경주. 부산하고 가까워요? 가깝지. 가깝단다. B가 나를 보고 말했다. 가깝든 말든. 나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그동안 다리하고 백화점을 지었어요? 아버지는 그으럼,이라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왜, 엄마가 말 안해주디? 말은 해줬는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사고가 날 때마다 그 종류만 짓는다고 하니까 이상하잖아요. 이상할 것도 많다. 아버지가 서산휴게소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다리 사고 나면 다리 보수공사 많아지는 거고, 백화점 무너지면 백화점 보수공사 많아지는 거지. 수요와 공급 같은 거 안 배우니? B가 화장실로 뛰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대학생 공급이 많아져서 재수생은 연애를 못하게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아버지가 화장실에 간 사이 B와 나는 파라솔 아래에서 담배를 피웠다. 하얀 속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봐라, 나 도넛 만들 수 있다. B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니까 G가 널 안 만나주는 거야. 나는 괜스레 면박을 주었다. 지는. B가 삐죽거렸다.
그런데 정말 왜 헤어진 거야? B가 버터오징어 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재수생하곤 만나기 싫다고 했다니까. 길게 찢은 오징어가 B의 입술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그럼 네가 일방적으로 차인 거네? 나는 B의 입 안으로 오징어를 밀어넣었다. 그래. 사실은 아니었다. 수능성적이 어정쩡하게 나오자 뭘 해야 할지 자신이 없어진 건 내 쪽이었다. 부산에 있는 국립대 갈 거야,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G에게 나는 ‘잘 가’라고 했다. 그때 G의 표정이나 교복 바지 안으로 들어오던 냉기 같은 걸 떠올리면, 배가 불러도 속이 쓰렸다. 저 멀리에서 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B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경주에 진입하자 집들이 급격히 낮아졌다. 문화재 보호구역인가 그래. 높은 집을 못 짓게 해놨다. 아버지의 설명을 들은 B의 입이 헤벌어졌다. 기와지붕들 사이로 낡은 봉고차가 털털거리며 빠져나갔다. 한참을 요리조리 헤맨 끝에 아버지가 비슷비슷한 집들 앞에 차를 세웠다. 자, 내려라. 다 왔다. 도서관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B는 퉁퉁한 몸집으로 차 안의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끼어 오느라 힘들었는지 연신 다리를 주물렀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여기가 도서관이야. 사설 도서관. 양철 대문이 쩔그렁, 소리를 내며 열렸다. 뭐 해? 어서 안 들어오고. 아버지가 고개만 내민 채 나와 B를 재촉했다.
마당에선 흙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바깥쪽으로 난 문을 열어젖히자 책장 가득 쌓인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적은 수는 아니었다. 도서관이라고 해서 건물을 지은 줄 알았어요. 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낄낄거렸다. 그건 일이고, 이건 내 도서관. B는 자기 집인 양 이 책 저 책을 꺼내서 펄럭거렸다. 나도 책 한권을 들어 푸르르 책장을 넘겼다. 창문들을 열던 아버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거 본격적으로 읽는 건 힘들 텐데. 왜요? 재수생이라서요? 내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아버지가 다가와 책의 어느 한부분을 펴들었다. 이거 전부 파본이거든. 책의 한중간에 덩그러니 백지가 들어 있었다. B가 자신이 읽던 책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것도 파본인데요. 전부 파본이라니까.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전부 파본만 모여 있는 셈이야. 도서관 안에 있는 책 전부.
B와 나는 시험 삼아 책 몇권을 더 꺼내 펼쳐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빈 장이 없는 책을 들이대면 아버지는 척척 대답했다. 그건 한쪽이 빠졌어. 그건 오자가 많아서 반품. 그건 표지가 잘못 인쇄됐지. 줄잡아 팔백권가량의 책이 모두 파본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자 머리가 아파왔다. 왜 그런 걸 모았어요? B가 물었다.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값이 싸거든. 무료로 얻을 수도 있고. 정말 그 이유로 이 많은 걸 다 모았다고요? 내가 추궁하자 아버지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정말이야. 조금만 손보면 못쓸 책도 아니고.
도서관을 만들고 싶었거든. 계속 남의 도서관만 지어주다보니까 내 것도 하나쯤은 갖고 싶더라고. 그런데 건물을 살 만큼의 돈은 모였지만 책이 없잖아. 아버지가 수줍게 웃었다. 그래서 지었던 도서관마다 돌아다니면서 버리는 파본이 있으면 달라고 했어. 달라 그러면 줘요? 안 주면 어쩔 수 없지 뭐. 헌책방에서 모아오기도 하고. 뭐 그래. 아버지가 벽장을 열더니 서류가방 하나를 내려놓았다. 빠진 낱장은 전부 복사해서 같이 받아왔어. 이것들만 붙이면 어느정도는 읽을 만하지 않을까? 가방 안에는 사전 두께만큼의 종이가 묶여 있었다. 그래서, 이걸 다 붙이겠다고요?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아버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넌 정말 네 엄마랑 많이 닮았구나. 어이가 없어서 찡그린 얼굴을 풀자 아버지가 책 한권을 내밀었다. 바닥에 있는 것만 해줘. 같이 하면 금방 끝나.
아버지는 종이 한뭉치를 들고 옆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만큼은 옆방에 있어. 그럼 부탁 좀 할게. 나와 B는 책더미와 종이뭉치 사이에 남겨졌다. 목장갑하고 풀은 옆 서랍에 있어! 문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어떡하지? 나는 B의 눈치를 보았다. B는 서랍을 열어 나에게 목장갑을 건네주었다. 하자. 우리 둘은 책더미에서 책을 뽑아 맞는 종이를 찾기 시작했다.
하다 보니 이것도 택배 분류하고 비슷하네. B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페이지는 여기. 저건 저기. 차라리 택배가 낫지. 그건 글자수라도 적잖아. 내가 투덜거리자 B가 낄낄댔다. 어차피 서울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잖아. 주말이라고 데이트할 것도 아니고. 아, 너 진짜. 나는 풀을 든 손을 쳐들어 B를 위협했다. B가 숨 넘어갈 듯 웃어댔다. 야, 종이 다 날아가. 나는 B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G가 뭐라고 말하면서 너 찼어? B는 끈질겼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응, 나한텐 중요한 문제야. B가 둥글둥글한 얼굴에 눈을 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연애지 니 연애냐. 니 연애니까 내 연애도 되지. 닥쳐. 나는 인상을 쓰며 B를 바라보았지만 표정으로 하는 위협은 먹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찬 걸지도 모르는데. G가 뭐라고 했더라. 나는 수능 이후로 가장 머리를 빠르게 돌려 G가 한 말들을 기억해냈다. 나, 부산에 있는 대학 갈 거야. 그 다음에 무슨 말인가 한마디를 더 했는데. 내가 잘 가라고 한 다음에. 나는 4월 땅바닥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머리에서 김이 날 때까지 기억을 들쑤셨고, 간신히 G가 했던 말을 찾아냈다.
너랑 나는 안 맞아,라고 하더라. B가 되물었다. 그게 전부야? 응.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차인 게 맞았구나. 손으로는 책장에 풀을 발라 책에 끼워넣으면서 나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이상하지 않냐. 그전까지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거든. 내가 수능을 못 보고 걔가 잘 봤든, 걔가 대학을 가고 난 못 갔든. 그런데 걔한테서 안 맞는다는 말을 들으니까 딱, 세계가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거야. 나는 쥐고 있던 책을 양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입으로 ‘딱’ 소리를 냈다. 야, 그러다 그 책 진짜 갈라져. B가 혀를 찼다. 그러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책장에 풀을 발랐다. 야, 그런데 맞는지 안 맞는지 어떻게 알아? B가 다시 물었다. 나도 몰라. 안 맞는다고 하니까 진짜 안 맞는 것 같아. 그게 끝. 정말 맞는지 안 맞는지 눈에 보이면 좋을 텐데. B가 다 붙인 책에 입김을 불었다. 그러게. 그러면 좀 편하겠다. 나는 풀 때문에 운 자리를 꼼꼼히 손으로 폈다. 재수가 그렇게 큰 잘못이냐? B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단 예전부터 사이가 안 좋다가 재수 하나 때문에 일이 터진 것 같다. 어차피 네가 재수 안했어도 걔는 부산으로 대학 갔을 거 아냐? 그것도 그러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진짜 딱 소리 났으면 좋겠어. 딱 맞든 딱 안 맞든. B가 작업이 끝난 책을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애매하다. 정말.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아버지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방 저쪽에서 머리만 내밀었다. 짬뽕이요. 우리 둘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경주 짬뽕은 서울하고 다를 줄 알았는데. B가 젓가락을 집으며 입맛을 다셨다. 중화요리야 어딜 가든 비슷하지. 나는 써비스로 따라온 군만두 접시의 랩을 벗겼다. 아니야. 전국 각지의 짜장면을 다 먹어본 내가 장담하마. 아버지가 부엌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왔다. 저건 얼마나 더 걸릴 것 같니? B의 짬뽕 국물을 들이켜며 아버지가 물었다. 한 두어시간 정도요. 그럼 오늘내로 다 하고 서울에 올라가면 새벽이겠네. 나는 두 손바닥 사이에 나무젓가락을 끼고 비볐다. 이렇게 하면 더 잘 뜯어져요. 나는 양손에 힘을 주어 나무젓가락을 뜯었다. 딱, 소리가 났다. 불발이네. 나무젓가락 한쪽에만 끄트머리가 달려나온 것을 보고 B가 이죽거렸다. 아버지가 내 앞으로 젓가락을 바꾸어 내놓았다. 양쪽이 가지런한 젓가락이었다.
빈 그릇들을 마당에 내놓고 아버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와 B는 남은 책의 권수를 세어보았다. 이백권 정도네. 오늘 다 못할 것 같지 않아? B와 나는 각각 한무더기씩의 책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파일에서 종이 꺼내고, 맞는 책을 찾고, 붙이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두꺼운 소설책을 고치던 B가 입을 열었다. G는 그렇다 치고, 넌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냐? 나는 다 고친 자기계발서로 B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몰라. B가 머리를 감싸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진짜 몰라. 갑자기 아버지라고 불쑥 찾아와서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아버지를 따라온 건지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건지. B가 붙인 책장을 손으로 눌렀다. 하긴. 나는 다리를 뻗어 B의 발을 건드렸다. 니가 읽는 책들이 이런 경우에 대해선 뭐라 얘기 안해주든? B는 딱풀 끄트머리로 콧잔등을 긁었다. 글쎄.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은 게 자주 나오긴 하는데. 친아버지든 의붓아버지든. 오이디푸스, 햄릿, 리어왕.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걔네는 그걸 어떻게 버티냐? B가 눈을 껌벅거렸다. 모르겠는데. 다 죽거든. 넌 뭐 그런 책들만 읽냐. 내가 투덜거리자 B가 히히, 웃었다. 죽기 전에 화해하는 것도 있는데, 그건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서. 한마디로 답이 없다는 소리군. 나는 새로 한무더기의 책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넌 왜 그러고 사는데? 그 학과 나오면 취직도 잘 안된다고 담임이 말렸잖아. B는 눈을 지그시 감고 대답했다. 얼굴살에 눈두덩이 파묻힐 것 같은, 작은 눈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말했잖아. 게이가 될 용기는 없었다니까. 말을 말자. 나는 B에게도 한무더기의 책을 밀어주었다.
저녁이 되자 우리 둘 앞에 있는 책 무더기는 끝이 났다. 어려운 건 너네 아버지가 가져가시니까 빨리 끝났다, 그치? B가 책을 책장에 꽂아놓고 흡족하게 웃었다. 흠, 뭐 그러네. 나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 으쓱댔다. 다 끝났니? 아버지가 옆방에서 건너와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잘 꽂았구나. 그런데 이건 뭐냐? 아버지가 바닥에서 종이 한장을 집어들었다. 바닥에는 복사된 종이를 책 크기에 맞게 오려내느라 가위와 풀과 종잇조각들이 뒹굴고 있었다. 내가 책하고 종이를 딱 맞춰서 놓고 갔는데. B가 얼른 책 하나를 뽑아왔다. 이 책인가 봐요. 그렇구나. 아버지가 한손에는 풀을 들고 다른 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여기 뭐가 붙어 있는데? 나와 B는 동시에 고개를 쭉 빼 책을 넘겨다보았다. 어, 정말이네. 맥 빠진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말이다. 아버지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페이지가 이 책에 붙을 게 아닌 것 같다. 봐, 이 페이지는 328인데 네가 붙인 페이지는 225잖아. 그럼 이 페이지는 어디 가 붙어야 하냐면 말이다. 아버지가 고개를 숙여 책장 맨 아래칸에서 책 한권을 뽑았다. 여기가 붙어야 하는데. 아버지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여기도 엉뚱한 게 붙어 있네. 어우, 뭐야. 나와 B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맥이 빠졌다.
나와 B는 책 목록을 보고 책장에서 책을 빼냈다. 아,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나와 B가 동시에 투덜거렸다. 니가 한 건지 내가 한 건지 구분이 안 가서 원망도 못하겠어. B가 책 한권을 찾아내며 말했다. 참 그러네. 아버지는 이걸 다 어떻게 알아냈지. 내 목소리가 컸는지 아버지가 옆방에서 소리쳤다. 내용을 보고 붙여야 될 거 아니니. 네에. 나와 B는 다시 책과 가위와 풀과 종이들 사이에 파묻혔다. 아무래도 오늘 내로 다 못 하겠는데요. 자고 가야겠다. B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이불을 꺼내왔다. 이 방에서 자라고요? 다른 방도 대충 비슷한데, 옮길래? 아버지가 이불을 든 채 엉거주춤하게 섰다. 됐어요. 나는 아버지의 팔에서 이불을 넘겨받았다. 내일은 불국사 갈까? 다 끝나면. B가 이불을 펴며 대꾸했다. 불국사는 지금 보수공사중이래요. 나는 고개를 모로 틀어 아버지를 보았다. 건축가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면 어떻게 해요? 인마, 너는 서점 주인이면 다른 서점 가도 책 잘 찾는 줄 아니? 아버지는 내 등을 툭 치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잘 자라. 나와 B는 이불을 나란히 깔고 누웠다. 방이 좁고 잡다한 것들이 많아서 멀리 떨어져 자기도 힘들어 보였다. 너, 제발 예술만 해라. 내가 눈을 치켜뜨며 B에게 말했다. 너랑 있으면 예술밖에 할 게 없어. B가 받아치며 돌아누웠다. 둥글둥글한 B의 몸이 숨소리를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꿈속에서 나는 수백장의 종이에 쫓기고 있었다. 종이들은 이 자리가 아니라며 나를 타박했고, 너덜거리는 책장을 질질 끌며 발목에 매달렸다. 아, 정말!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수능 이후로 글자가 절반 이상인 책은 안 봤단 말이에요. 잘한다, 그게 재수하는 놈이 할 소리냐? 서울에 있을 엄마가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내년에는 아빠가 대학을 지을 거란다. 그것 참 잘됐네요. 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갔다. 종이들은 나보다 한발, 아니, 한장쯤 빨랐다. 종이들이 후루룩 모여들더니 지점토처럼 뭉쳤다. 곧 종이들은 종이교복을 입은 G 모양의 종이인형이 되었다. G는 종이 한장을 떼어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나랑 잘 안 맞는 것 같아.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맞게 되는데? 꿈속의 나는 현실에서와 영 다른 말을 했다. G는 놀란 토끼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G가 다시 종이들로 변해 흩어지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인마, 내용을 보고 해야 할 거 아니냐. 인마 인마 하지 마요. 아버지 아들 이름은 인마가 아니라 강정구라고요. 나는 두번째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볼에 뜨뜻하고 축축한 게 느껴졌다. B의 손이었다. 두 팔을 뻗어 만세 자세로 자고 있는 B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이 새끼 참 예술적으로 잔다.
자고 있는 B와 책 더미를 깨우지 않게 나는 발끝으로 마루에 나왔다. 담요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나는 어깻죽지를 문질렀다. 담배에 불을 붙여 빨아들이자 추위가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몇번 빨아들이기도 전에 담뱃불이 꺼졌다. 에이씨. 나는 라이터를 마당에 집어던졌다. 라이터를 던진 게 신호라도 되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B는 차 안에서 경주와 부산이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고 물었다. 글쎄, 한시간정도? 아버지의 말이 맞는다면 어쩌면 부산에도 비가 내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새벽 4시 40분. 검은 화면에 흰색 글씨가 번쩍거렸다. 그렇게 병신같이 굴 게 뭐야. 나는 마루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찌질하게.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책과 딱풀, 가위를 챙겨 나왔다. 일이라도 하면 실연의 아픔이 좀 가실 거야. 택배 분류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첫날 돌아오면서 그렇게 말했지. 실연의 아픔은 안 가시고 팔만 무지하게 아프네. 양쪽 방에서 자고 있는 B와 아버지가 깰세라 나는 처마에 켜놓은 전등불에만 의지해 책장을 잘라냈다. 딱 한번만 더 보고 붙였으면 이런 귀찮은 일 없잖아. 나는 잘라낸 책장들을 옆으로 밀어놓으며 구시렁거렸다. 번개가 딱, 소리를 내며 마당에 떨어졌다. 이중창처럼 아버지와 B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 한번만. 그렇게 말했으면 좀 달라졌을까. G가 수능을 잘봤다고 했을 때 주변 친구들은 모두 나를 놀려댔다. B만 빼고. B는 한창 원서 문제로 담임과 다투는 중이었다. 주변의 모두는 입을 모아 ‘이제 네가 차일 차례네?’라고 했다. 나는 제대로 된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 말들을 엉거주춤 떠안았다. 결국 나는 졸업식날 추운 운동장 한구석에서 차였다. 아마 나는 G가 돌아선 후, 종잇장처럼 얇은 마음을 안고 한참 운동장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잘못 붙여진 종이 같은 마음을. 셰익스피어인지 섹스피아인지. 귀가 얇아서 인생을 말아먹는다고? 인생은 아니라도 연애 한번은 말아먹을 수 있나 보네. 나는 책 한권을 베고 누웠다. 누워 있는 옆으로 굵은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B였다. 야, 나도 담배 한대만. 나는 담배를 건네주었다. 습기 먹었나봐. 불 꺼지더라. B가 담배를 입에 물고 웅얼거렸다. 야, 라이터는? 저기. 나는 물웅덩이가 생긴 마당 한복판을 가리켰다. 삼백원짜리 가스라이터가 빗물에 목욕을 하고 있었다. 저거 아까 벼락도 맞은 것 같던데. B는 투덜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라이터를 들고 나왔다.
야, 니가 그때 했던 얘기 있잖아. B는 바람을 막으며 담뱃불을 붙이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때? 그래. 내가 TV에 아버지 나왔다고 했을 때. 아, 밥 먹을 때. B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때 말이야. 나는 몸을 돌려 B쪽으로 누웠다. 귀가 얇으면 인생 말아먹는다며. 그러면 귀가 안 얇았으면 그 얘기들은 다 어떻게 되냐? B가 담배를 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몰라. 왜 몰라? 얘기 자체가 성립이 안돼. B의 담배는 내 담배와 달리 얄밉게도 끝까지 타들어갔다. 그게 다 귀가 얇아서 얘기가 시작되는 거라서, 귀가 두꺼워서 남의 말을 안 들으면 해피엔딩이고 배드엔딩이고 나올 수가 없어. 뭐 그러냐. 나는 바닥에 엎드렸다. B가 내 허리에 걸터앉아 나를 내리눌렀다. 뭔 싸움이 있어야 얘기가 시작되지. 저기 있는 책들도 다 싸움이 반일걸? 나는 항복의 뜻으로 바닥을 탕탕 쳤다. B가 엉덩이를 비비며 내 허리를 압박했다.
마루에서 뒹굴다 선잠이 들었는가 싶더니 아버지가 내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빨리 해야겠다. 갑자기 책을 빌리러 온다는 손님이 생겼네. 여기서 다른 사람도 책 빌릴 수 있어요? B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럼 너는 내가 혼자 이 많은 책을 다 읽으려고 모았다고 생각했니? 나는 쑤시는 어깨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파본을. 아니, 무슨 도서관이 개관 날짜까지 준비도 안해요? 어제 우리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낸들 아니. 아버지가 기르다 만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원래 개관일은 다음주야. 그런데 애 하나가 꼭 동화책이 보고 싶다고 나한테 전화까지 하는데 어떡하니. 나는 B에게 눌렸던 허리를 쭉 폈다. 그렇다고 개관도 안 한 도서관에 손님을 받아요? 손님은 누구든 다 중요한 법이야, 인마. 아버지가 딱풀로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 인마라고 하지 마요. 나는 머리를 감쌌다. 강정구라고요. 강정구. 알았다, 강정구씨. 일단 동화책 쪽만 빨리 끝내자.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동화책 더미를 꺼내왔다. 의외로 얼마 안되니까 아침 먹기 전에 끝날 거야. 딱 이것만.
나와 B는 아침밥이 될 때까지 동화책을 붙였다. 아침을 다 먹자 꼬마애 두명이 손을 잡고 대문간을 기웃거렸다. 저기요, 예가 도서관입니꺼? 갈래머리를 한 여자애 입에서 걸쭉한 사투리가 튀어나와 B와 나는 한참을 웃었다. 예, 도서관임더. 아버지가 능청스러운 사투리로 손님을 맞았다. 갈래머리 꼬마와 단발 꼬마는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동화책 두권씩을 집어들었다. 어, 저거 아직 안 붙인 것 같은데. B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돌려주면 됩니꺼? 다음주까집니더. 아버지가 단발머리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기, 그런데. B가 헛기침을 했다. 그게 저기, 파본이라서. 꼬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본이 뭔데예? 그러니까, 책 읽다가 갑자기 다른 내용이 나올 수도 있다고. 꼬마가 활짝 웃었다. 괜찮아예. 뭔진 몰라도 재밌겠네예.
꼬마들은 장화로 찰박찰박 흙탕물을 튀기며 골목 너머로 걸어갔다. 정리하고 올라가자. 아버지와 B가 교대로 내 어깨를 한번씩 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처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댓돌에 맞고 튀어올라 다시 내 발치를 적셨다. 축축한 발끝을 내려다보니 손톱만한 종이조각이 붙어 있었다. 나는 꽤 착실하게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종잇조각을 다른 발로 툭툭 건드렸다. 강정구씨, 밥 안 먹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잇조각을 억지로 떼어내고 밥을 먹으러 들어가는 대신,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경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차가 언제 있어요? 작은 눈을 억지로 크게 뜨고 고개를 내민 B에게 나는 씩 웃어주었다. 꼭 확인해 보고 싶은 페이지가 있어요. 그저 파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페이지 때문에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딱 한 번만 더.
소설 | 심사평
즐거웠다, 그러나 힘들었다. 300여편의 소설을 읽은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소회였다. 응모작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을 적절한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사소한 일상, 달콤한 연애사, 삶의 고단함 등 현실과 직접 맥이 닿은 이야기들과, SF영화나 무협지 혹은 판타지소설에 나옴직한 환상과 비현실의 공간이 골고루 섞여 있어 우리 소설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짧고 경쾌한 문장, 자유로운 줄바꾸기, 환상적 공간으로의 이동 등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박민규 김애란 황정은 등의 영향이 아닌가 짐작해볼 대목이었다. 「사(絲)」 「그림자 사냥꾼」 「카이로로부터 일과 이분의 일센티미터」 「당신의 등 뒤에」 「소파」 「딱」 외 10여편의 작품이 일단 수준급으로 평가되었다.
최종 논의대상은 「당신의 등 뒤에」 「소파」 「딱」 3편이었다. 「당신의 등 뒤에」의 장점은 작가가 소설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장은 매끄럽고 묘사는 치밀하며 소재 또한 특이하여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제대로 내고 있다. 남편의 등 뒤에서 나온 얼굴, 그 여자의 얼굴이 점차 자라나고 그 욕망이 점층적으로 상승하면서 화자를 압박해가는 과정이 흥미를 유발하고, ‘등 뒤의 얼굴’이라는 알레고리에 대한 다층적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다만 이 작품의 문제는 ‘어디선가 본 듯한’ 분위기, ‘누군가 얘기한 듯한’ 주제라는 점이다.
「소파」를 앞에 두고 심사위원들은 공통적인 궁금증을 품었다. 이 작가가 대체 몇살일까 하는. 그만큼 「소파」에는 삶에 대한 깊이가 서려 있다. 어머니와 아들, 며느리가 그려나가는 정경이 자연스러운 우리 이웃의 모습이며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이다. 도난을 의심하는 어머니를 위해 설치한 폐쇄 카메라, 그를 통해 비로소 어머니의 진실을 발견하는 아들, 소파에 난 흠집과 어머니의 상처를 연결시키는 솜씨는 기성작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수준의 것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혀 대학생스럽지 않다는 것.
「딱」은 앞서 논의한 두 작품에 비해 좀 가볍지 않은가, ‘딱’이라는 표현을 지나치게 자주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견이 있었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인생 뭐 있어, 그냥 한방이지’ 하는 듯한 장난기, 아버지의 부재, 도서관이란 공간의 낯익음 또한 우려된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결정하게 한 힘은 경쾌함이다. 아버지, 나, 어머니, 친구가 그려내는 광경은 매우 일상적이지만 그 일상에는 추레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칫 들뜬 듯 보일 염려의 소지를 작가는 ‘파본수집 도서관’이라는 독특한 이야기로 비껴간다. 삶이란 가볍기 그지없어서, ‘딱’ 소리 하나에 바뀔 수 있을 만큼 하찮은 것이지만 ‘딱’이라 여겨야 견뎌낼 수 있는, 안고 가야 할 상처 같은 것이 아닌가. 너그러운 읽기를 가능하게 한 것 역시 파본을 손질하는 화자와 친구, 잘못 이어붙인 책장(冊張) 다시 맞추기 등의 설정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시선처리 방식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싶은 화자를 따라가는 동안 독자 또한 무장해제되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이 장점은 고스란히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도 같은 것.
그리하여 심사위원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딱」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대학생 작가’를 찾는 이유에 가장 부합된다는 점이 이 작품에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앞으로 응모할 젊은 작가들이 유의할 사항이다. 더불어 유의할 사항이 있으니 자기 작품이 심사평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해서 풀죽을 일이 아니라는 것. 쓰기만 하면, 읽어줄 사람은 무한하다는 것. 기회는 항상 열려있다는 것……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정진을 바란다.
구효서 서하진 신경숙
소설 | 수상소감
벚꽃이 다 지기 전에 밥이나 같이 먹자고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오지 않았다. 2009년 4월 이전의 일들은 글이나 말이 없던 시대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먼 기억 속에서 경주를 끌어내 소설을 쓰고 덜컥 상을 받았다. 수상소식을 들은 날 다시 한번 문자를 보냈다.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도저히 펼 수 없는 『촛불의 미학』을 보며 그애 이름을 불렀다.
감정표현이 느리고 무딘 나를 대신해 기뻐해주신 분들께 고개를 숙인다. 소설을 가르쳐준 ‘엄마’ 신수정 교수님, 박범신 교수님. 문장을 사랑하게 해주신 남진우, 김석환, 이재명 교수님. 긴 시간 4년, 내 소설을 읽어준 수연과 수진, 효진언니와 유미언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문영 선생님과 글틴의 동생,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2월의 경주를 자전거로 함께 달렸던 혜지와 내 질투의 대상이 되어준 서련에게, 부산에서 멀리 있는 나를 도닥여주는 아저씨에게 뒤늦게 사랑한다 말한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으니 욕먹고 욕먹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나아져야겠다. 갚을 길이 아득한 마음들을 갈무리한다.
얼마나 길지, 얼마나 짧을지 모르는 앞날들이 막막해서 두렵다.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다시 한번 그애의 이름을 부른다. 윤희야.
가볍게 쓴다는 첫 심사평을 손에 쥐고 한발을 뗀다. 내 글이 날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전삼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