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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전철희 田哲熙
1986년생. 한양대 국어교육학과 4학년.
kjturi@hanmail.net
- 이 글의 논지는 지금까지 단행본으로 출간된 박민규의 모든 소설에 적용된다. 그중에서 특히 중점적으로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 2003, 이하 『삼미』), 『핑퐁』(창비 200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 이하 『파반느』) 및 단편집 『카스테라』(문학동네 2005)에 수록된 「카스테라」 「헤드락」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이하 「너구리」).
87년체제의 문학적 돌파
박민규론
1. 87년체제의 복권을 위하여
1987년 6월, 100만여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호헌철폐·독재타도를 외쳤다. 자유를 갈망한 국민들의 투쟁은 군부독재를 끝장내고 폐쇄적인 ‘체육관 선거’를 직접선거제로 변화시켰다. 그래서 87년은 권위주의 국가였던 한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로의 체질 개선에 성공한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분기점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와 함께 시작된 1990년대에는 변혁적 사회과학의 퇴조로 6월항쟁의 의미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가 자리할 곳이 없었다. 시간 속에 묻혀가던 6월항쟁의 의미가 재조명된 것은, 97년 IMF 구제금융을 시작으로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드러나고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21세기의 벽두에 들어서였다. 형식적 민주주의(정치적 자유)를 쟁취한 ‘87년체제’의 사회에 남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은 이제야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다.
90년대에 6월항쟁의 흔적이 사라진 것은 문학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4·19와 5·18이 당시의 작가들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 혹은 무거운 부채를 남겼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리얼리즘이 퇴조하고 개인의 내면에 탐닉했던 90년대의 한국문단 내에서는 6월항쟁도 별다른 자취를 남길 수 없었다.
그렇게 한국문학이 6월항쟁의 의미를 거의 잊어갈 무렵이던 2003년, 박민규(朴珉奎)가 문단에 홀연히 등장했다. ‘무규칙 이종 소설가’를 자처한 그는 묵직한 사회적 문제들을 경쾌한 알레고리로 그려냈다. 많은 비평가들은 박민규의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 새로운 문체와 소재에 열광했다. 그의 소설은 문학의 사회성을 중시(리얼리즘)하는 사람에게도, 문학의 새로운 징후 포착에 예민(모더니즘)한 사람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박민규의 작품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소설을 치열한 리얼리즘으로 평가하기에는 문체의 가벼움과 모호한 결말이 미덥지 못하고, 새로운 문학의 징후를 선고하는 데 그치기에는 소설에 잠재해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이 너무나 매섭기 때문이다. 이런 박민규 소설의 이중성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시각으로 작금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지부터 천천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는 다수결이다. (…) 누군가가 인기의 정상에 서는 것도, 누군가가 투신자살을 하는 것도, 누군가가 선출되고 기여를 하는 것도, 실은 다수결이다. 알고 보면 그렇다.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주인공을 괴롭히는 동급생 무리의 우두머리-인용자)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냉풍이 다시 폭포처럼, 송풍구에서 쏟아져내렸다.
-『핑퐁』 28~29면
그의 눈은 다수결사회에도 남아 있는 차별을 응시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한 6월항쟁으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따돌림은 존재한다. 돈(직장), 학벌, 외모 등에 대한 차별도 지난 20여년 동안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심화되어왔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에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이에 대한 박민규의 대답은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라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인식의 전환점은 87년 6월이었다. 그전까지의 실질적인 독재사회에서는 모든 억압과 착취를 지배자(치수)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지닌 ‘87년체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87년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일어나는 차별은 다수의 동의에 기반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수결사회’에서 다수가 불합리한 차별을 거부한다면 차별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차별을 거부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오히려 다수 속에 자신을 숨긴 채 차별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박민규의 문제제기는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흘러가버린 독재 시대가 아닌, 형식적 민주주의를 얻은 87년체제의 문제를 치밀하게 논증해낸다. 그는 독재시대의 리얼리즘과 구별되는 다수결시대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창조해냈다. 따라서 그의 소설이 지닌 새로운 특징들(소재, 문체, 사회문제를 보는 관점 등)을 온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박민규가 87년체제의 문제를 논증하는 작가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2. 루저의 탄생
박민규의 최근작 『파반느』에는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82면)가 살아가면서 받는 “남과는 다른 취급”(268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녀의 유년시절은 친구들로부터의 격리와 시비로 얼룩져 있다. 중학교로 진학한 뒤 눈에 보이는 시비는 사라지지만 더욱 은밀해진 조소가 그 빈자리를 대신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지만 면접에서는 항상 떨어지고, 간신히 들어간 직장에서도 상사나 남자직원들이 대화조차 거부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묵묵히 일만 하는 직원이 되”(279면)기를 강요받는다. 너나할 것 없이 사회 전체가 그녀를 따돌리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추녀들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 그에 비례하여 미녀들은 환대받는 이유를 요한의 입을 빌려 설명한다.
진짜 미녀라고 할 만한 여자도, 진짜 추녀라 불릴 만한 여자도 실은 1%야. 나머진 모두 평범한 여자들이지. (…)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파반느』 173~74면
박민규에게 현재는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는 사회이다. 만약 99%의 평범한 사람들이 외모지상주의를 부정한다면 외모지상주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천민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가진 돈에 따라서 차별받고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된 비인간적인 체제를 모두가 부정한다면, 인간보다 돈이 우선시되는 잔혹한 이데올로기는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회는 한층 평등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외모지상주의와 천민자본주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건재하다. 현대인들이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들보다 낮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경쟁체제를 거부하기보다는, 남을 밟고 상층부로 올라가 언젠가 대다수를 굽어보는 상위 1%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이런 속물적인 희망 때문에 현대인들은 외모지상주의와 천민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인간적인 체제는 존속된다. 다수가 원하는 일은 실현된다는 것이 다수결시대의 룰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독재시대가 아니다. 누구를 탓하랴. 경쟁체제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욕심 때문인 것을.
이렇게 성장한 경쟁체제는 끊임없이 승자와 패자를 재생산한다. 박민규는 이때 생긴 패자들의 입을 빌려 다수결시대로 위장된 무한경쟁체제를 폭로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만년 꼴찌 야구팀의 팬(「삼미」), 인턴사원(「너구리」),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파반느』) 등은 모두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지만 기존의 민중소설에 나왔던 인물들, 예컨대 임금이 체불된 노동자, 부당하게 학교를 떠나야 했던 전교조 교사, 국가의 결정에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철거민과는 구별된다. 후자가 소수의 지배자들에 의해 억압되고 약탈당한 이들이라면, 전자는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차별의 피해자들이고 피억압민중이라기보다는 “세계가 〈깜빡〉한 인간들”(『핑퐁』 219면)이다. 시쳇말로 ‘루저’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컴퓨터게임 캐릭터(「너구리」), 만화 히어로(『지구영웅전설』), 프로레슬링 캐릭터(「헤드락」) 등 써브컬처(sub-culture)적 요소들은 의도된 미장쎈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써브컬처는 고급예술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지향점을 완벽하게 모사한다. 고급예술이 인간 삶의 복합성과 난해함을 드러내려 한다면, 써브컬처는 삶의 그런 요소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킨다. 써브컬처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과 가장 이상적인 능력들만이 드러난다. 프로레슬링은 지나치게 강한 자들만의 세계이고, 만화 속 히어로는 초인적 능력의 소유자이며, 컴퓨터게임 역시 현실의 고통은 드러내지 않는다. 현실과 써브컬처의 경계가 모호한 박민규의 소설 속 세계는, 때문에 공상에 빠져 현실의 고통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루저들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다.
3. 다수결체제의 역습
박민규는 차별을 생성해내는 우리의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야박하게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헤드락’은 자본주의가 폭력을 전염시키는 과정에 관한 은유다. 자본주의 경쟁체제는 어느날 프로레슬러 헐크 호건처럼 갑자기 다가와서 주인공에게 헤드락을 거는 존재이다. 이 황당한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몰래 카메라”(「헤드락」 250면)를 의심해보아도 소용없다. 이 사회는 헤드락을 금지하기는커녕 “어느정도 헤드락을 묵인하거나 권장”(262면)하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경쟁체제에서 헤드락을 당하지 않으려면 남에게 먼저 헤드락을 걸어야 하는 것을 깨닫는 사이, 어느새 “폭력의 대상”이었던 그는 “폭력의 주체”(259면)가 되어버리고 만다.
실제로 지금의 자본주의사회는 언제 어디서 ‘헤드락’을 당할지 모르는 약육강식의 경쟁체제다. 이 사회에서 남들보다 능력(돈)이 없다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경쟁체제는 하루에도 몇번씩 ‘강자가 되어 남을 짓밟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협박과 회유를 우리에게 반복해댄다. 이 압박에 견디지 못한 이들은 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모하고, 좌절한 이들은 ‘루저’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다수결사회로 위장된 경쟁체제는 ‘강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모든 이들의 전장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런데 이 끝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이가 생존을 위하여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어지간한 노력으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해야 하고, 중산층이라는 이름표를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도 “눈코 뜰 새 없이 노력”(『삼미』 126면)해야 한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이 전쟁에 열중하는 것 자체가 결국은 경쟁체제의 농간에 놀아나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파반느』 308면
글쎄요. 아무리, 어떤 노력을 해도 이 세계의 우승 팀은 따로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였죠?
-『삼미』 284면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나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진다. 우리가 흘리는 피와 땀에 비례하여 자본주의는 성장하고, 인간은 일하는 기계로 전락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프로테스탄트 윤리 덕택이라는 막스 베버의 말은 유효기간이 끝났다. 현대 자본주의, “미친 스펙의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은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절대다수”(『파반느』 418면)이다.
따라서 우리가 6월항쟁으로 얻은 가시적인 정치적 자유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폭력과 억압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은밀해졌을 뿐이다. 독재자가 사라진 세계에서 돈은 교환의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권력이 되었다. 예전에는 ‘보이는 주먹’이 우리의 삶을 억압했다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손’이 교묘하게 우리를 무한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87년체제는 현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속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요하는 거대한 쳇바퀴다.
박민규는 이렇게 87년체제하에서 경쟁이 자가증식하는 끔찍한 과정을 논증해냈다. 당연히 그의 눈에 현대사회가 미더울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사회의 단면을 그려내는 것을 넘어 지구를 언인스톨하고(『핑퐁』), 한국을 떠나고(『파반느』), 만년 꼴찌 야구팀의 마지막 팬클럽을 만드는(『삼미』) 등 무한경쟁체제를 거부하는 삶을 살자고 설득하는 데까지 이른다. 68년생에 87학번인 박민규는 자신의 세대를 논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이 체제를 거부하라고 행동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4. 계몽주의를 위한 변명
박민규의 소설은 늘 독특한 특징들로 화제가 되어왔다. 그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행갈이를 해서 강조했고, 소설을 시처럼 운문으로 끝낸 적도 있었다(「카스테라」). 또한 이야기 진행에 꼭 필요하지는 않은 그림을 삽입하는가 하면(『핑퐁』) 말하는 어조를 표현하기 위해서 글자의 크기를 조정하기도 했다(『핑퐁』). 전통적인 소설형식을 탈피한 그의 소설은 문학의 새로운 징후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의 발랄한 문체는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묵직한 주제의식을 희화화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벼워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알레고리와 키치적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는 점 역시 문학적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 우려에 ‘조까라, 마이싱’이라고 정면으로 도전이라도 하듯, 그는 최신작 『파반느』에서 여전히 대중적이면서도 발랄한 실험으로 가득 찬 글쓰기를 선보인다.
힘들게 이런 걸 왜 짰어요?/뜨개질을 잘 못해서... 그래도 목도리는 제일 쉬운 거예요.(원문에서 빗금 앞의 글자는 하늘색, 그 뒤는 분홍색-인용자)
그런데 왜 아직 서로 말을 높이지? 나이도 같잖아? 요한이 추궁했었다.
-『파반느』 197면
『파반느』는 그의 어느 소설보다도 대중에게 편하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이다. 『파반느』가 여타의 소설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이전 작품들처럼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행갈이를 했다. ②글자에 색깔을 넣어서(여자의 말은 분홍색, 주인공의 말은 하늘색으로 처리했다) 따옴표를 생략한 채 인물들의 대화를 표현했다. ③책의 뒷면에는 소설의 BGM(Background music)까지 동봉했다. ④『파반느』는 사회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독자가 생각할 여지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의 페르쏘나인 ‘요한’의 입을 통해 외모지상주의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이 특징들은 박민규의 소설에서 문학 고유의 함축성이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에서 살펴본 『파반느』의 특징들은 블로그의 포스팅에나 어울릴 만한 것들이다. 블로그의 글도 중요한 부분에는 행갈이, 색깔, 굵기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배경음악을 삽입하고, 블로거의 생각을 직접 드러낸다. 광대한 인터넷 공간에서 짧은 시간 안에 독자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가벼운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파반느』가 원래 인터넷에 연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한가지 이유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온전한 설명을 위해서는 애초에 박민규가 다른 소설가들과 글을 쓰는 목표를 달리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다수결체제’의 명암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에 대한 평가를 내리며, 심지어 독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침’까지 제시해주는 일종의 계몽주의자다. 문학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향유되어도 좋은 문학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한 계몽은 실패에 불과하다. 따라서 계몽주의자는 글을 쉽게 써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친절함을 갖춰야 할 의무가 있다. 근대의 계몽주의자 최남선(崔南善)의 예를 떠올려보자. 그는 신체시를 쓴 후에 문학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유시를 쓰기보다는 다시 정형시(창가, 시조)로 돌아가 자신의 사상이 노래로 공유될 수 있도록 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박민규가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쓰면서 ‘대중에 영합’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노동계급 대중의 눈으로 보기에 형식적 세련화-문학과 연극에서 이것은 난해함으로 연결된다-는 아마추어들을 떼어버리려는 의도나 (…) 아마추어들에게 “머리 꼭대기에서” 이야기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주는 징표의 하나일 뿐이다.
-삐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上』 새물결 2006, 75~76면(강조는 원문)
부르디외의 말대로 고도의 문학성은 일반인들에게 높은 벽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현대인들은 모호하고 난해한 개념에 관한 사변에 빠질 여유가 없다. 이 때문에 그들은 문자의 나열만으로 끝나는 소설보다는 글자에 색깔을 집어넣고 BGM을 동봉한 감각적인 글을 더 친숙하게 느낀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글, 무리하게 행을 구분해서라도 중요한 부분을 강조해주는 글에 더 쉽게 공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박민규 소설에 기존의 고급문학의 특징이 없다는 비판은 애초에 번지수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민규가 새로운(그러나 친숙한) 소재로 사람들에게 흥미를 부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쉽게 그리고 명료하게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의 문학에 접근하기 쉽게 만들기 위함이다. 때문에 박민규는 문학의 미덕을 포기한 비겁한 소설가라기보다는, 계몽을 실행하기 위해서 콧대높은 문학인으로서의 자세를 버린 소설가로 봐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파격적인 구성에 모두 면죄부를 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앞서 언급한 네가지 특징들은 박민규가 자신의 생각에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자기 소설을 진화시켜온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박민규의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 진화의 흔적에 꼬투리를 잡기보다는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씨지의 타당성에 주목하는 편이 더 유용하다.
5. ‘사랑’의 함정
박민규가 꿈꾸는 대안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애쓰지 않으며 모두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평범한 삶”(『삼미』 126면)이다. 평범한 삶은 “할 만큼의 일을 하고, 먹을 만큼의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자”(『삼미』 277면)는 삶을 의미한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끔찍한 경쟁체제는 이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삼미』에서는 ‘나’와 조성훈의 연대가, 『핑퐁』에서는 못과 모아이의 연대가, 『파반느』에서는 ‘나’와 요한의 연대가 있었기에 그들은 경쟁체제를 거부하는 삶을 상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의 최근작 『파반느』에서는 ‘연대’의 한 형태인 사랑이 경쟁체제의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된다.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파반느』 228면
우리의 손에 들려진 유일한 열쇠는 〈사랑〉입니다. 어떤 독재자보다도, 권력을 쥔 그 누구보다도…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파반느』 작가의 말 중에서
이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그의 주장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던 이들조차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너무 순진하지 않은가. 경쟁체제의 메커니즘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눈을 보여주었던 그가 최종 대안으로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내놓는 것은 식상함의 문제를 넘어서 뜬금없다는 느낌까지 받게 만든다.
박민규는 우리가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며’ 경쟁체제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적 기제를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그가 그려냈듯 자발적 동의에 의해 구축된 경쟁체제는 너무나 견고하다. 그런데 이런 냉철한 분석을 보여주었던 그가 결말에 와서는 현대인들의 의지와 사랑만으로 이 체제의 협박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매듭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금의 체제가 가진 힘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는 반증이 되지 않는가. 박민규는 자기모순에 빠져버렸다.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연대와 사랑만으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까? 그것만으로 이 체제의 압력을 이겨내고 자신의 이상을 좇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물론 네차례의 이직 후에 훌쩍 삼천포로 떠나 자신의 진정한 꿈이었던 집필을 시작하고 몇년 만에 성공한 작가 본인과 같은 사례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인간이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생물만이 비로소 얻게 되는 이름”(「헤드락」 290면)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찾기 이전에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만도 너무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사람들이 넘치지만 그들 중 다수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청년실업자가 되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한다.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88만원세대’는 잔업과 야근의 홍수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금세 회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경쟁체제는 사람들에게 꿈꿀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이런 생활 속에서 대체 어느 틈에 경쟁체제를 거부하는 사랑과 연대라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실제로 인류의 유구한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뀐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모든 사회체제가 그랬듯, 지금의 경쟁체제도 사람들 사이에 내면화되고 사회경제적으로 구조화되어 견고히 쌓아올려져 있다. 경쟁체제의 헤게모니가 개인의 의식적 각성만으로 변화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전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문학이 사회문제에 대해 엄밀하고 실현 가능한 대안과 해결책을 내야 할 의무는 없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신경림의 『농무』에 구체적인 해결책이 부재하다고 비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학의 진중함을 어느정도 포기하면서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알리려고 한 계몽주의 작가로서 박민규는 자신이 내놓은 추상적이고 낙관적인 결론에 대해 비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의 대안이 이렇듯 추상적 낙관론으로 귀결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다수결체제가 시작된 87년에 대한 박민규의 회상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이하 인용은 『삼미』 138~39면). 6월항쟁의 열기가 식은 87년 대선 날, 그는 “6월의 그 뜨거운 항쟁이 오늘 비로소 그 결실을 맺게” 되리라고 기대에 부푼다. 그러나 당선된 것은 여당의 대표였다. 그래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날의 함성은 다시 세상을 뒤흔들”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혁명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그는 “혁명의 주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서민층과 중산층이, 실은 그 지층이 더욱 다져지길 원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실제로 6월항쟁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서민과 중산층은 최소한의 참정권을 원했을 뿐이며, 적당한 자유(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하자 다시 생활이라는 제1의 투쟁을 위해 일터로 돌아가버렸다. 너무나 허무하게 꺼져버린 혁명의 불씨를 목격한 박민규에게 87년은 치열하게 문제를 증명해야 할 가증스러운 다수결시대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다시는 혁명이란 거짓말을 믿지 않기로” 결심하며 사회변혁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버린 해이기도 했다.
혁명적인 혹은 정치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된 그에게 남은 대안은 없었다. 그가 참정권에 한정된 자유를 확대해석해 87년체제를 다수결시대라고 정의한 채, 모두가 ‘럭키’라고 외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핑퐁』) 경쟁을 거부한다면 경쟁체제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결론에 다다른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박민규에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자유민주주의’가 실은 무한경쟁체제에 불과함을 간파한 그조차 이 체제의 가시적 자유에 대한 기대를 끝내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87년체제의 위장(僞裝)이 얼마나 완벽한지를 재확인시키는 증거일 뿐이다.
6. 다시,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87년 이후의 한국을 민주주의라고 정의하는 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6월항쟁은 형식적 민주주의(정치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나 실질적 민주주의(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었다. 독재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국가’로의 전환은 약육강식 경쟁체제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87년 6월에 울려퍼진 시민들의 외침은 훗날 있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천민자본주의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2008년 한국을 뒤흔들 촛불항쟁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어 6월항쟁의 유지를 받들고 사회과학자들은 87년체제의 성격에 대해 이론적 논증을 했다면, 박민규는 문학의 힘을 빌려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상에 감춰진 경쟁체제의 이면을 언어로써 그려내는 작업에 성공했다. 그의 소설은 87년체제에 대한 문학적 증명이자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 대한 고발장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에는 87년체제의 이중성을 완벽하게 넘어서지 못했다는 한계 또한 존재한다. 잔혹한 경쟁체제의 본질을 냉철하게 분석한 그였지만, 역시 87년체제가 보여주는 가시적인 ‘자유’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의식적 각성으로 사회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아포리즘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소설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소설 속에서 살아숨쉬는 87년체제의 어두운 단면뿐 아니라 가해자 혹은 루저가 되어버린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을 마주할 수 있다. 어쩌면 훗날, 우리는 추상적인 낙관론에 빠졌음에도 87년체제의 명암을 정확하게 투시한 그의 소설을 ‘위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라 명명해야 할지 모른다.
평론 | 심사평
이번 응모작은 총 14편, 그런데 순전한 영화평론이 2편 섞였으니 실질로는 12편인 셈이다. 다시 한번 강조컨대 이 분야는 어디까지나 문학평론이 대상이다. 물론 문학평론이라고 해서 영화를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끌어 쓸 수는 있겠지만 중심은 문학이라는 점에 유의해주기 바란다.
응모작들을 통독한 뒤 떠오른 첫 감상은 나쁘지 않았다. 문학의 생산과 유통의 현장을 응시하는 비평가적 시선이 제법 미쁘다. 그런데 서구이론에 의존해서 한국문학을 재단하는 기성 평단의 악습을 모방하는 기풍이 센 것이 역시 문제다. 요즘 한국평단은 왕년의 해외문학파 전성기, 그 서구주의 시절로 복귀한 형국인데, 그 폐습이 젊은이들까지 오염시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 오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글들을 예의 검토하니, 최종적으로 김중혁을 논변한 「‘오타쿠적 인간들’이 사는 다섯가지 방식」과 박민규를 다룬 「87년체제의 문학적 돌파」, 이 두편의 글이 눈에 띄었다.
‘정치성의 결여’로 특징지어지는 2000년대 소설에 대한 일반적 평가를 거슬러, 오따꾸(オタク)를 열쇳말로 김중혁을 분석함으로써 ‘다른 정치성’을 변별하려고 시도한 전자는 우선 뛰어난 논술력이 돋보인다. 대학생답지 않은 세련된 글쓰기를 바탕으로 대상 작가의 작품세계를 분석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런데 정작 비평의 생명이랄 수 있는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작가와 비평가가 합체되어 어디까지가 작가의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비평가의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된다. 인상비평의 현대적 버전으로 시종하기 일쑤인 요즘 평론의 경향에 편승하고 있는 점이 걸린다.
이에 비해 후자는 투박하기조차 하다. 그는 “6월항쟁의 의미를 거의 잊어갈 무렵이던 2003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이분법에 잘 포획되지 않는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박민규의 등장이 갖는 의의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소수자 문제를 일관되게 추적함으로써 6월항쟁의 열매로 얻은 정치적 자유, 즉 다수결시대가 실은 차별이 더욱 내면화하는 무서운 시대임을 증언하는 박민규의 소설작업은 이 점에서 87년체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라는 점을 분석한 후자는 그런데 단지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박민규 문학의 추상적 낙관론을 한계로 지적하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비평의 기본기가 그런 대로 갖춰진 글을 만난 셈이다. 두 글 가운데, 비록 문장이 덜 세련되고 논증이 덜 여물었을지라도, 비평의 몫을 제대로 포옹하려는 자세를 갖춘 후자를 수상작으로 삼는다. 축하한다.
최원식
평론 | 수상소감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맞지 않는 글 아닐까 하는 우려 속에서 용기를 내어 출품한 글이 상까지 받게 되니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졸고를 뽑아주신 최원식 선생님과 과분한 상을 주신 대산문화재단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생각해보니 그밖에도 감사할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친절하게 상담해주신 장경희 교수님께, 저의 가치관을 만들어 주신 박재성, 최승권, 최은정, 전수현 선생님께, 늘 편안한 과와 동아리의 친구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은 한양대를 오는 L형에게, 문학의 매력을 가르쳐준 D.Q.에게, 문학을 보는 눈을 넓혀주신 김미영 교수님과 정재찬 교수님께, 그리고 누구보다 인생의 힘이 되어 주는 미도리, 어머님 아버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글에 조금이라도 뛰어난 부분이 있었다면 전부 그대들의 덕이라 생각합니다. 그대들에게 받은 것들을 이렇게밖에 못 풀어내서 죄송합니다. 사과의 뜻으로 더 치열하게 쓰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전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