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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홍
1978년 서울 출생. 2007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 장편소설 『걸프렌즈』 『성탄 피크닉』 등이 있음.
나의 메인스타디움
장미모종의 여린 뿌리들이 깊은 땅 밑에서 마녀의 머리카락처럼 구불구불 자라는 동안 아이는 아홉살이 되었다. 아이의 세번째 탄생일을 기념하여 시멘트 담장 아래 심어놓은 장미는 그해에도 피처럼 붉은빛으로 만개했고 가시들은 더없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장미로 에워싸인 정원에 덩그마니 앉아 있던 아이는 기역자로 꺾어올린 무릎에 수첩을 올려두었다. 스프링 달린 수첩에 적힌 두개의 문장은 카세트 스피커에 귀를 바짝 붙이고 암기한 이국의 언어를 한글로 옮겨둔 것이었다. 짧은 두개의 문장은 자신을 소개하고 서울에 온 낯선 외국인에게 환영하는 마음을 전달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혀 밑에 고인 말간 침을 습- 삼키고 아이는 글자를 따라읽었다. 이국의 언어를 내뱉고 나면 피가 고인 듯 입천장이 비릿해지고 가시가 박힌 것처럼 혀뿌리가 깔깔해졌다. 수십번이나 발음해도 이질적인 언어는 혀에 착 감기지 않고 엉켜버렸다. 스스로의 발음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떨어져내린 장미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정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장미꽃잎이 짓이겨질까봐 발돋움을 하고 부엌으로 겅중겅중 뛰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튜브형 오뚜기 마요네즈를 집어들고 정원으로 나와서 입안에 마요네즈를 가득 짜넣었다. 쓴 약을 먹을 때처럼 숨을 참고 느끼한 덩어리를 단숨에 꿀꺽 삼켰다. 하늘을 향해 둥글게 벌린 목구멍으로 저 멀리 창공을 지나던 날파리만한 비행기가 날아든 듯했다. 내장을 타고 착륙한 비행기의 문이 스르륵 열리고, 바글거리는 외국인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자신감이 차오른 아이는 큰 소리로 외쳐보았다. 마요네즈 박 선. 웰컴 투 코리아!
예순여덟명의 학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교실에서 아이는 손을 번쩍 들었다. 국민학교 2학년 2학기 임원선거가 실시되고 있는 2교시였다. 키 순서에 따라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는, 앞에서 흔들거리는 수많은 손에 자신의 손이 가려질까봐 의자에 붙인 엉덩이를 아주 조금 들어올렸다. 손을 든 학생은 무려 스무명이었다. 스무개의 이름들이 모두 칠판에 적혔다. 맨 앞자리부터 조악한 질감의 회색 쪽지가 책상에서 책상으로 전해지면서 교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빨간 학교직인이 찍힌 쪽지에는 칠판에 적힌 스무개의 이름들 중에서 단 한개의 이름만 기입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적어도 무방했다. 아이는 자신의 성을 반쯤 적다가 성이 같은 다른 아이의 이름을 휘갈겼다. 하필 그 순간에 짝이 제 쪽지를 힐끔 엿본 탓이었다. 두번 접힌 쪽지는 각 줄 맨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걷어갔다. 곧바로 투표함이 열렸고 칠판 하단에 적힌 아이의 이름 옆에는 ‘正’자에서 한 획이 빈 채로 갸우뚱하게 서 있었다. 두 눈을 꾹 감고 있는 동안 마지막 쪽지가 펼쳐졌다. 이윽고 아이의 이름 옆으로 ‘正’자가 완성되었고, 그해 가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아이는 2학기 여자부반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원선거를 마치고 난 쉬는 시간에 초록색 플라스틱 우유박스가 교실로 배달되었다. 우유급식 신청서에 아이의 엄마가 도장을 찍어서 보냈고, 2교시가 끝나는 쉬는 시간마다 아이는 우유를 받았다. 이 나라 어린이들의 평균 신장을 올리자는 명목으로 ‘흰우유 먹기’가 붐이었다. 학교에선 한달치 우유급식비를 낼 수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흰우유를 먹어야 했다. 쉬는 시간에 흰우유를 받아 먹는 아이들은 서양인들처럼 키가 커지고 피부색이 하얘진다고 믿었다. 우유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부러운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거나 주뼛거리며 화장실에 갔다. 아이는 교탁 앞으로 나가서 우유를 받아와 가방에 집어넣었다. 흰우유를 먹는 건 언제나 아이에게 고역이었다. 대중목욕탕이나 슈퍼마켓에서라면 색소가 첨가된 딸기우유나 초코우유나 커피우유를 골랐겠으나 학교에선 그럴 수 없었고, 다른 친구에게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자신이 흰우유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들통날 수 있었다. 아이는 하굣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우유를 버리곤 했다.
종례 종이 울리고 아이는 새로 선출된 반장과 남자부반장과 함께 교무실로 내려갔다. 담임선생님들 책상 앞으로 각반의 2학기 임원들이 불려와 있었다. 때마침 교감선생님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교무실로 들어왔다. 몇몇 선생님이 웅성거리며 교감선생님 자리로 몰려갔다. 아이는 발돋움을 하고 선생님들의 어깨를 넘겨다보았다. 교감선생님이 상자를 풀더니 두 손을 들어올렸다. 교감선생님의 두 손엔 창문에 달린 모기장과 흡사한 푸른 천에 금박 수가 화려하게 놓인 옷이 들려 있었다. 한복도 아니고, 일상복과 전혀 다른 종류였지만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한눈에 쏙 들어오는 아름다운 옷이었다.
“엄마, 나 2학기 부반장 됐어!”
집으로 돌아간 아이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현관 앞까지 나온 엄마는 기세등등해진 아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어주며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왕 하는 거 반장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이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서 책가방을 벗어던졌다. 학습지 선생님이 숙제로 내준 구구단 문제지가 일주일치나 밀려 있었다. 학교 숙제인 그림일기도 써야 했다. 화장실로 가서 주홍색 다이얼 비누로 깨끗이 손을 씻고 변기 앞 타일 벽에 붙어 있는 종이를 휙 뜯어서 제 방으로 가져갔다. 코팅된 종이엔 구구단 2단부터 9단까지의 답이 모두 적혀 있었다.
일주일치 구구단의 답을 써낸 아이는 그림일기장을 펼쳐놓고 무얼 그릴까 고민하면서 뭉툭해진 연필심을 자동연필깎기에 밀어넣었다. 유치원에 다닐 적부터 일주일에 한번, 미술학원에 다녔으나 그림엔 영 소질이 없는 아이였다. 뱀이나 닭을 그려도 죄다 둥그런 빈대떡처럼 그려졌고 심지어 개미를 그려놓아도 코끼리처럼 뚱뚱해 보였다. 연필심이 가시처럼 뾰족해지는 동안 아이의 머릿속으로 난데없이 교무실에서 곁눈질한 옷이 떠올랐다. 금박으로 수놓아진 푸른 옷. 그러나 아이가 판단하기에 그건 오늘의 일과와 특별한 관계가 없었고, 일기란 그날 있었던 일을 정직하게 써내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옷을 그린 다음엔 뭐라고 쓴단 말인가. 그냥 그런 옷을 보았다고? 그게 무슨 옷인지 궁금했다고? 아이는 포니테일로 묶은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일기장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교탁 위에 놓인 투표함을 그린 후에 색연필로 꼼꼼하게 칠했다. 그런데도 투표함처럼 보이지 않아서 검은 색연필로 ‘투표함’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그림 하단의 네모칸들을 채워나갔다.
나는 정직하고 올바른 부반장이 될 것이다.
날이 기울고 아이는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갔다. 화면에는 새로 짓고 있는 각종 운동경기시설 건축물들이 파노라마로 지나갔다. 빠른 속도로 완공되어가는 시멘트빛 경기장들을 보고 있자니 콧날이 시큰해졌다. 어떤 날엔 글러브로 쌘드백을 쳐대는 권투선수가, 어떤 날엔 트랙을 달리는 육상선수가 나왔고, 또 어떤 날엔 고무처럼 자유자재로 몸을 굽혔다 펴는 체조선수가 저녁밥상 앞에서 새처럼 날아다녔다. 종목을 달리한 국가대표 선수들이 등장해서 구슬땀을 내비칠 적마다 애국가가 잔잔하게 깔렸고 그때마다 아이는 애국조회시간에 그랬던 것처럼 숟가락을 내려놓고 제 손바닥을 가슴께로 갖다댔다.
텔레비전 화면은 거리 인터뷰로 이어졌다. 마이크 앞에 선 시민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국제적인 큰 행사를 치르게 된 게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경사죠, 경사! 인터뷰를 마친 리포터는 이렇듯 대대적이고 국제적인 행사를 맞아서 거리청결에 힘써야 한다고 마지막 멘트를 읊었다.
“쳇, 눈 가리기지 뭐.”
엄마가 밥상 위에 팔팔 끓어오르는 생태찌개 냄비를 내려놓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유치원생인 여동생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눈을 가려? 누가 숨바꼭질 하는 거야? 아빠가 엄마에게 눈을 부라리며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호통을 쳤다. 엄마가 그게 왜 쓸데없는 소리냐고 따지고 들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프로야구 씨즌이면 아빠는 열렬한 OB팬이었고, 엄마는 선동렬이 투수로 있는 해태를 응원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아빠는 무조건 1번을 외쳤고, 엄마는 무조건 3번을 찍겠다고 했다. 그러다 아빠와 엄마의 사소한 말다툼은 격렬한 싸움이 되었다. 프로야구 씨즌이나 선거철마다 아빠 엄마의 싸움이 잦아져서 아이는 프로야구나 선거가 좋아질 수 없었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깨어난 아이는 다른 때보다 공들여 오래도록 이를 닦았다. 담임선생님이 무슨 인터뷰라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오늘 2교시에 임원을 맡은 2학년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장실에서 인터뷰를 할 거라고 했다. 교무실에 모여 있던 2학기 임원들은 그게 교감선생님이 들어 보인 푸른색 옷과 관련된 인터뷰일 거라고 추측했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옷장과 서랍장에 들어 있는 옷을 몽땅 방바닥으로 꺼내 펼쳤다. 하얀 반달칼라가 달린 연보라색 김민제 원피스와 검정색 벨벳 천에 하얀 프릴이 달린 원아동복 원피스를 두고 갈팡질팡하다가, 옷더미 밑에서 비죽 튀어나온 블라우스를 끄집어냈다. 목밑까지 바짝 단추를 잠그게끔 되어 있는 단정한 하얀 블라우스는 언젠가 이모네 집에 놀러갔을 때 외사촌언니가 외교관 면접을 보러 간다며 입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학교 갈 채비를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옻칠된 화장대 서랍장을 열었다. 그곳엔 늘 비상금으로 만원짜리 몇장이 포개져 있었다. 아이는 만원짜리 한장을 빼내어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다. 학교 가는 길에 ‘헤어쎈스’간판이 붙은 미장원 문을 열었다. 문에 달린 종이 쨍그랑 울리고서야 뒷방에서 미용사가 눈곱을 떼면서 나왔다. 기다란 전신거울 앞 의자에 앉자마자 잠이 덜 깬 미용사가 엄마는? 하고 물어왔다. 당당하게 주머니에서 만원짜리를 꺼내보였다. 부스스한 머리모양의 미용사에게 신뢰가 가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 동네에서 아는 미장원은 이곳뿐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싶니?”
“아니요. 오늘 중요한 날이니까 예쁘게 해주셔야 해요.”
미용사가 고데기를 기계에 넣고 예열했다. 뜨겁게 달궈진 고데기를 가위처럼 벌려 잡고 철컥거린 다음 코 가까이 대어보았다. 아이의 긴 머리카락 위로 아지랑이 같은 김이 피어올랐다. 거울 속 아이의 머리카락들이 구불구불해졌다. 미용사는 아이의 정수리에 곧게 가르마를 타서 양 갈래로 나눈 다음, 머리에 노란 고무줄을 묶어주었다. 심하게 조여 묶은 탓에 눈이 관자놀이 쪽으로 쓸려올라갔다. 아이는 신경질적으로 도리질쳤다.
“왜? 요즘 유행하는 캔디 머린데.”
“전 캔디 머리 싫어요. 그건 애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얘는 참, 너도 애잖니. 그럼 어떤 머리를 하고 싶은 건데?”
“이라이자처럼 늘어뜨려주세요.”
1교시가 끝나고서야 아이는 교실에 도착했다. 담임선생님이 왜 지각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됐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다른 반 선생님들과 복도에 모여서 뭔가 상의하느라 바빴고, 각반의 임원을 맡은 여학생들이 복도로 불려나가고 있었다. 교실 밖으로 불려나간 여학생들은 선생님들 지시에 따라 벽 쪽으로 줄을 섰다. 당연히 그 줄에 서게 될 줄 알았던 아이는 복도로 걸어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줄을 선 아이들이 모두 반장들이었기 때문이다.
일곱명의 반장 여학생들이 전원 탈락된 까닭에 3교시엔 각반의 여자부반장들이 교장실로 소집되었다. 대리석들이 진열된 대형 장식장 앞에서 아이는 반 순서대로 줄의 맨끝에 섰다. 아이는 앞반 여자부반장에게 속삭여 물었다.
“여기에 왜 온 건지 아니?”
“아니, 나도 잘 몰라. 근데 되게 중요한 일인가봐.”
교장선생님은 정년퇴임을 코앞에 둔 할머니였다. 짧은 파마머리는 눈이 쌓인 것처럼 백발이었고 몸집은 왜소했지만 목소리만큼은 기운이 넘쳤다. 쏘파에 앉은 교장선생님이 일렬로 선 아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자, 여러분. 이곳에 모인 이유는 자랑스러운 86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가할 학생을 뽑기 위해서예요. 아랍에미리트 대사관에서 우리 학교로 전통의상을 보내왔어요. 여러분 중에서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가할 영예의 여학생 두명을 뽑을 겁니다.”
2학년 1반의 여자부반장부터 차례로 교장선생님과 짧은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교장선생님의 질문은 아홉살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어른들이 늘상 던지는 평범한 질문과 다를 게 없었다. 가족관계, 취미활동, 장래희망, 존경하는 인물에 관해서였다. 인터뷰가 끝나면 노래 한곡씩을 부르라고 했다. 대부분은 교과서에 수록된 동요를 불렀다. 그중 한명이 이선희의 「J에게」를 불렀다가 교장선생님의 눈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아이는 실내화를 오므려 붙이고 차렷자세를 유지하며 앞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아이들의 대답을 귀담아들었다. 바로 앞반 여자부반장의 문답이 시작되었다. 앞반 여자부반장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두살 위의 오빠가 있다고 했고, 취미는 책읽기, 장래희망은 선생님이라고 했다. 무난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곁눈질로 살펴본 교장선생님의 얼굴은 대낮의 식곤증이 밀려오는 듯 졸린 표정이었다.
“그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죠?”
앞반의 여자부반장이 대답하는 순간 졸음이 가득했던 교장선생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장식장에 진열돼 있던 대리석이 아이의 정수리로 쿵 떨어진 듯했다. 캄캄해진 머릿속으로 교과서에 실린 그 사진이 떠올랐다. 훌러덩 벗겨진 이마를 수없이 문지른 것처럼 빛나던 대머리. 교장선생님의 눈도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누구라고요? 교장선생님이 되물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이십니다! 앞반 여자부반장이 다부지게 내뱉은 대답이 환청처럼 아이의 귓속을 맴돌았다.
그보다 더 좋은 대답은 없을 듯했다. 교과서에 사진이 수록된 인물들 중에서 현직 대통령보다 더 크게 얼굴이 나온 사람은 없었으니 그러했다. 앞반 여자부반장 또한 자신이 교장선생님에게 점수를 땄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두 손을 가슴까지 높이 모아붙이고 활기차게 노래를 불렀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아이의 순서가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먼저 가족관계를 물었다. 아이는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행복하게’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취미로는 떠오르는 게 없어서 여동생의 숙제를 도와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장래희망으로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교장선생님이 다소 의아해하며 기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느냐, 왜 기자가 되고 싶으냐 물었고,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지금도 모 소년일간지의 비둘기기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가장 걱정하던 질문이 나왔다.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죠? 앞선 학생들이 위인전에 나오는 에이브러햄 링컨, 에디슨, 헬렌 켈러, 나이팅게일을 존경한다고 이미 말해버렸기에 알고 있는 다른 위인이 거의 없는데다가 앞반 여자부반장보다 더 좋은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오래 뜸을 들였다. 차오른 숨을 내뱉지 못해서 아이의 목밑을 짓누르는 단추가 떨어져나갈 듯했다. 하얀 블라우스 칼라에 땀이 배었다. 교장선생님은 앞반 여자부반장에게 각별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는 교장선생님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저는 이세상에서 저희 할아버지를 가장 존경합니다.”
가족 중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대답은 처음이었다. 앞반 여자부반장을 바라보던 교장선생님의 시선이 아이에게 부드럽게 옮겨왔다.
“왜죠?”
“저는 할아버지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그동안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들이 우리 가족에게 행복을 선물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늘 할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에게 감사합니다.”
정신없이 내뱉어놓고는 뭔가 어색해서 뺨이 홧홧 달아올랐다. 하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교장실 밖으로 나가서 대기중이던 아이는 오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환히 웃을 수 있었다. 며칠 후면 금박이 수놓인 아랍에미리트 전통의상을 입고 국제적 행사에 참여하는 영예를 누리게 될 것이었다. 바야흐로 일평생 고생해서 머리가 하얗게 센 소시민의 이야기가 교과서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빛나는 대머리의 권위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빠와 엄마는 또 한바탕 싸우는 중이었고 버릇처럼 이혼을 들먹였다. 이번엔 프로야구나 선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하찮은 ‘눈 가리기’ 때문에 또다시 이혼을 입에 담는 아빠와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흔한 일이었기에 아빠와 엄마가 불쑥 방으로 들어와서 둘 중 누구와 살고 싶으냐고 난감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잠자코 앉아 그림일기를 쓰려고 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아빠 엄마에게 하는 수 없이 말했다. 나 86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가하게 됐어. 아빠가 아이를 번쩍 안아올리더니 당장 개막식 입장권을 구입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아이의 등을 부둥켜안은 엄마도 개막식에 가져갈 카메라와 중계방송을 녹화할 비디오를 새로 들여놓겠다고 수선을 떨었다. 걸핏하면 이혼하자고 했다가 번번이 취소해왔던 아빠 엄마였지만, 지금처럼 아이의 능력으로 그들의 싸움을 단숨에 끝낸 적은 없었다. 86아시안게임 개막식 참가는 아이에게 자신이 뭔가 해낸 것 같은 최초의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 안은 소란스러웠다. 반 친구들은 짬짬이 국가대표 운동선수를 흉내내느라 분주했다. 교실 뒤에서 여자애들은 연필에 기다란 리본을 묶어 마치 지난번에 아이가 미장원에 들러서 한 머리모양처럼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흔들었고, 남자애들은 운동장으로 나가서 축구시합을 했고, 수업이 끝나면 다들 섞여서 백미터 달리기나 릴레이경주를 벌였다. 학교 안은 미니 태릉선수촌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리본체조 흉내나 달리기 시합 따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절로 어깨가 펴지고 톡톡 끊기는 도도한 어조로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이는 함께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가할 앞반 여자부반장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앞반 여자부반장은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노란빛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코는 아이의 코보다 두배는 높아보였다. 입술은 방금 체리를 깨문 것처럼 언제나 새빨갰다. 다른 친구들이 앞반 여자부반장을 보고 누구냐고 물으면 아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단짝이라고 소개했다. 쉬는시간 종이 울리면 그 애가 있는 10반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아이가 찾아가지 않으면 그쪽에서 찾아왔다. 둘이서 꼭 붙어다녔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전혀 다른데도 한 사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꼭 붙잡고 흔들며 보란 듯 운동장을 걸어나갔다.
아시안게임 개막식을 이주일 앞두고 아이와 아이의 단짝친구가 교무실로 불려갔다. 또 한벌의 아랍에미리트 전통의상이 도착해 있었다. 먼저 도착한 것과 마찬가지로 금박 수가 놓여 있었는데 이번엔 검은색이었다.
“어머, 이건 왜 이렇게 작아.”
“대사관에서 싸이즈가 다른 것을 보낼 거라고 얘기했었나요?”
“금시초문인데.”
상자 안에서 꺼낸 검은색 전통의상을 내려다보던 선생님들은 적잖이 난감한 듯 보였다. 아이의 눈에도 검은 옷은 1학년 중에서도 맨 앞줄에 서는 꼬마나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치맛단이 짧아보였다. 푸른 옷은 아직 아무도 입어보지 못했을 때였다. 크기가 다른 두벌의 옷 주위로 모여든 선생님들이 아이와 단짝친구에게 키를 재보라고 했다. 둘은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등을 돌리고 서야 했다.
“거의 비슷한데요.”
그 순간 10반 선생님이 눈을 치켜떴다. 자고로 옷이란 입어봐야 누구 것인지 알 수 있죠. 10반 선생님이 단짝친구의 품에 푸른 옷을 떡하니 안겨주었다.
화장실에서 푸른색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 애는 눈부셨다. 마치 처음부터 그 애를 위해 제작된 옷인 듯했다. 선명한 푸른 옷 위로 하얀 얼굴과 빨간 입술이 도드라졌다. 아이뿐 아니라 선생님들도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교무실 안에는 이내 정적이 흘렀다. 아이의 등덜미로 식은땀 한줄기가 흘러내리는데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저거 봐요.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잖아요.”
아이는 그 애와 나란히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아이와 그 애는 선생님들 말마따나 정말로 키가 비슷했다. 서로 다른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잠그기까지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 애가 부스럭거리며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아이는 변기 위에 앉아서 푸른 옷을 기다렸다. 그 애가 입었을 때 치맛단이 끌렸다면 자기가 입어도 끌릴지 모른다. 그러면 교장실에서 인터뷰를 다시 할 수도 있다. 이번엔 학급부장을 맡은 여학생들이 불려갈 것이고, 키 큰 여학생이 뽑힐 것이다. 그동안 흰우유를 먹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또래 중에서는 큰 편에 속해서 키 때문에 아쉬운 적은 없었으나 흰우유를 먹었다면 족히 몇쎈티미터는 더 자랐을 것이다. 그러면 치맛단도 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눈가가 뜨겁게 젖었다. 멍하니 두루마리 휴지를 죽죽 끌어당겼다. 뜯어낸 휴지를 구겨서 젖은 눈가를 닦아냈다. 휴지뭉치가 젖어드는 걸 내려다보면서 실내화에서 발을 빼냈다. 아이는 실내화 바닥의 뒤꿈치가 닿는 부위에 망설임 없이 젖은 휴지뭉치를 쑤셔넣었다.
아이는 흰우유를 버리지 않고 마시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유 맛은 역겨웠고, 마시고 나면 장이 뒤틀려서 화장실에 들락거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으나 꾹 참았다. 등하굣길에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동네를 걷다가 아이는 문득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도처에서 아시안게임과 관련된 크고작은 행사들이 개최되었고 연일 축제분위기였다. 도로변엔 ‘축! 86아시안게임’플래카드가 힘차게 나부꼈다. 집값이 상승하고 덩달아 물가도 뛰었다는 뉴스가 속속 보도되었다. 슈퍼에서 파는 과자나 음료수엔 죄다 아시안게임 마크가 붙어 있었다. 집 근처에 대규모의 선수촌 아파트가 완공되었다. 경기일정 동안 외국인선수들이 지낼 아파트였다.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줄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은 여느 때보다 깨끗했다. 아이가 가족들과 배드민턴을 치거나 바람을 쐬러 놀러나갔던 석촌호수 주변의 주홍색 천막을 두른 포장마차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아이는 식구들과 나란히 앉아 뜨끈한 가락국수를 맛볼 수 없게 된 점 따위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외국인을 만나면 어떻게 대화를 나눌까?
아직 영어를 배운 적 없는 아이에게 외국인과의 소통은 최대 고민거리였다. 아이가 아는 영어라곤 알파벳과 ‘about’뿐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간 외사촌언니에게서 물려받은 그림영어사전의 첫장에 적힌 단어가 ‘about’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영어를 할 줄 몰랐으나 영어로 외국인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about’다음 장에 적힌 ‘apple’을 외우기 시작했다. 등하굣길에 애플, 애플, 애플,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발음하며 익히는 데 사흘이 걸렸다. 개막식까지는 고작 열흘 남았고 애플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를 붙잡고 ‘나는 선이다, 한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를 영어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한글맞춤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소처럼 두 눈을 끔뻑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튿날 저녁,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금빛 포장지로 싸인 네모난 것을 건네며 집에 오는 길에 광화문 대형서점에 들러서 사온 선물이라고 했다. 재빨리 포장지를 뜯었다. 공책 반절 크기의 영어책에 카세트테이프가 부록으로 들어 있었다. 서둘러 책과 테이프를 들고 제 방으로 달려갔다. 카세트에 테이프를 꽂고 책을 펼쳐보니 영어문장 아래에 한글로 표기된 영어발음과 한국어로 해석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이는 재생버튼을 누르고 스피커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댔다. 마요네즈 마이클! 책에는 분명 마이 네임 이즈 마이클,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카세트 스피커를 통해 듣기론 마이 네임 이즈,보다는 마요네즈에 가까웠다. 한국어로 표기된 영어발음을 영 믿을 수 없던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수첩에 마요네즈라고 적었다. 마이클에서 마이클을 빼고 제 이름, 박 선을 마요네즈 뒤에 이어붙였다. 그리고 웰컴 투 코리아를 옮겨적자 모든 게 완벽했다.
엄마가 쓰러져 인근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엄마는 곧 고려대학병원으로 옮겨갔다. 재작년에도 엄마는 국내에서 밝혀지지 않은 신종 바이러스가 신장에 퍼져서 장기입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기 위해선 의술이 더 발달한 미국으로 가야 한다고 담당의사가 권유했지만 엄마는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는 것보다도 하늘 높이 떠오르는 비행기를 타고 홀로 먼 나라에 가는 걸 훨씬 두려워했다.
병문안을 가기 위해서 할아버지와 여동생과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택시는 잠실을 지나고 있었다. 아이가 차창 밖으로 집게손가락을 쳐들었다.
“할아버지 저거예요!”
“뭐가 말이냐?”
차창에 붙인 아이의 집게손가락이 툭 떨어졌다. 하려던 말이 터져나오지 못하고 목구멍 속으로 쑥 미끄러져내렸다. 메인스타디움 앞에는 장미꽃잎처럼 빨간 머리띠를 두른 대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몰려나와 있었다. 플래카드 위에 ‘아시안게임 개최를 취소하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근거리의 도로변엔 경찰버스가 몇대 서 있었고 버스에서 내린 전경들이 방패를 들고 신속하게 일렬횡대를 이루었다. 분위기가 삼엄했다. 중년의 택시운전사는 왜 아시안게임 반대시위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아이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아시안게임 개최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경들의 진압이 시작됐다. 차창에 찍힌 아이의 조그만 지문 너머로 핏방울 같은 장미꽃잎이 맥없이 길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병실에 도착하자 엄마는 침상에 맥없이 누워 있었다. 며칠새 여위고 누렇게 뜬 얼굴이었다. 팔이나 손등의 혈관이 미약해 링거 바늘을 발등에 꽂고 있었다. 가습기 주둥이에서 흘러나온 수증기가 엄마의 얼굴 위로 희붐하게 쏟아졌다. 입원실로 들어간 아이는 먼저 냉장고 문을 열고 오렌지쌕쌕 캔뚜껑을 땄다. 오렌지 알갱이를 씹으며 아이는 걱정을 늘어놓았다. 이대로라면 엄마가 개막식 구경을 오는 건 어려웠다. 자신이 아랍에미리트 전통의상을 입은 걸 볼 수 없었다. 엄마가 처연한 낯빛으로 미소지었다.
“텔레비전이 있으니까 걱정 마. 저걸로 꼭 볼게.”
아이는 잠실 메인스타디움 앞을 지나다 본 대학생들이 생각나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번엔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수증기가 고인 탓인지 가물가물한 눈꺼풀 속 엄마의 눈이 조금 젖어 있었다. 아이는 가습기 주둥이를 엄마의 얼굴 반대편으로 돌렸다.
저녁 어스름이 되어 아빠가 아이와 동생을 데리러 왔다. 며칠간 코빼기도 구경하지 못했던 아빠의 넓적한 얼굴은 훤해 보였다. 야외주차장으로 나가자 아빠가 원래 타고 다니던 쏘나타가 그랜저로 바뀌어 있었다. 우와! 아이와 동생이 탄성을 질렀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도 하고 올림픽도 한다는데, 좀팽이처럼 구닥다리 차를 타고 다닐 순 없어서, 이 아빠가 너희를 위해 근사한 차를 쫙 뽑아왔다. 어때, 마음에 들지? 차안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울렸다. 아이와 동생이 깔깔대며 박수를 치는 동안 아빠의 새 차는 잠실 메인스타디움 앞의 드넓고 황량한 8차선 도로를 질주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이, 아이의 작고 여린 어깨 옆으로 빠르게, 너무나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낯선 언어를 외우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등굣길이었다. 마요네즈 박 선, 뇌까리는데, 시큼하고 고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풍겨 팔을 들고 겨드랑이 냄새를 맡아보았다. 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뒤로 턱을 돌리자 냄새는 더 강렬해졌다. 몇걸음 걷다가 제 실내화주머니 속으로 동그란 콧방울을 들이밀었다. 특유의 고무냄새와 왁스냄새가 나긴 했으나 구역질나는 냄새는 결코 아니었다. 몇걸음 더 걸었을 때 엉덩이 쪽이 축축해져서 뒤돌아보니, 자신이 걸어온 길에 하얀 점액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황급히 책가방을 벗어 땅바닥에 내려놓은 아이는 가방을 열자마자 냉큼 코를 비틀어쥐었다. 교과서와 공책은 흠뻑 젖어 있었다. 책가방 밑에 숨겨둔 우유를 미처 버리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다. 버리는 것을 잊고 지나치면 책가방 속에서 우유가 부패해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다가 펑 터지곤 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그대로 학교에 갈 순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전봇대 뒤에 책가방을 던졌다. 몇걸음 가다가 되돌아가서 손가락 끝으로 책가방 손잡이를 잡고 다른 골목으로 우회했다. 교과서와 공책과 필통엔 아이의 반과 이름이 적혀 있었으므로, 누군가 썩은 우유 냄새를 풍기는 책가방을 발견하게 되면 집이나 학교로 책가방을 들고 찾아올 수 있었다. 아이는 한강으로 이어진 탄천까지 달려가서 책가방을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이는 언제나처럼 새 책가방과 새 학용품을 받았다.
9월 21일 토요일 아침은 우중충했다. 잿빛 구름이 하늘에 가득했다. 아이는 설빔에 받쳐입는 하얀 속치마에다 교장선생님과의 인터뷰 때 골랐던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어제 종례 이후 담임선생님에게서 받은 푸른색 아랍에미리트 전통의상을 덧입었다. 욕실로 가선 학교 화장실에서처럼 두루마리 화장지를 죽죽 잡아당겼다. 그런데 이번엔 기다려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세면대 수도꼭지를 비틀었다. 오목하게 모은 손바닥 안에 흘러내리는 물을 담았다. 눈물처럼 물 몇방울을 떨어뜨려서 휴지뭉치를 적시고 실내화 바닥 뒤꿈치 쪽에 쑤셔넣었다. 미장원에 들러서는 구불구불하게 늘어지는 웨이브 머리를 하고 양쪽으로 헤어핀을 찔렀다. 학교에 도착한 아이는 교실에 들르지 않고 곧장 교무실로 가서 검은색 전통의상을 입은 1학년 여자아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키가 아이보다 한뼘 정도 작은 이 1학년 아이와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면접을 보지 않고 별도로 선발된 이 1학년 아이는 산수선생님의 딸이었다. 두 아이는 교무실을 한바퀴 돌며 선생님들의 격려를 받고서야 체육선생님의 차를 타고 잠실로 향했다.
메인스타디움은 멀리서 지나가며 보았을 때보다 훨씬 거대했다. 정문에서 체육선생님은 행사에서 통역을 맡아줄 청년을 두 아이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는 외국어대 3학년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했다. 엄마의 병문안을 가던 날 메인스타디움 앞에서 아시안게임 개최 반대시위를 하던 대학생들이 떠올라 아이는 그가 대학생이라는 사실이 마뜩치 않았다. 아이와 1학년 여자아이를 통역 대학생에게 인계해주고 학교로 되돌아가던 체육선생님은 개막식을 마칠 시간쯤에 다시 데리러 올 거라고 했다. 통역 대학생은 벙싯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아이는 통역 대학생이 멘 갈색 크로스백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크로스백 안엔 아시안게임 개막식을 엉망으로 만들 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지도 몰라서였다.
그를 따라 메인스타디움 게이트로 입장했다. 사방으로 뚫린 게이트와 완만하게 구부러진 복도와 계단들은 죄다 비슷비슷했다. 게이트와 복도와 계단을 구분하는 기호가 붙어 있긴 했으나 그 숫자와 문자를 몇시간 만에 외우는 건 불가능했다.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불길한 갈색 가방을 멘 통역 대학생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1학년 여자아이는 주눅든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의 등 뒤로 숨어서 오들오들 떨어댔다. 누군가 말 한마디 걸라치면 울음보를 터뜨릴 듯 눈물을 글썽였고, 고래 뱃속에 갇힌 피노키오처럼 어깨를 옹송그렸다. 아이는 1학년 여자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아랍에미리트 선수들이 말 거는데 그렇게 입 꼭 다물고 있으면 큰일 나. 알겠니? 1학년 여자아이가 아이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두리번거리던 통역 대학생이 둘에게 남A-112 게이트 앞 계단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한복을 입은 여대생들과 속닥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보였고, 아이는 통역 대학생이 미덥지 않아서 그를 쫓아갔다. 언제까지 계단에 앉아 있어야 해요? 통역 대학생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여대생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곤 1학년 여자아이가 앉은 계단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우물쭈물하더니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스탠드에서 민속무용단이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데 거기 가서 메이크업을 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이는 날 선 목소리로 어린이는 화장을 하면 안된다고 따지고 들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여대생을 힐끗거리던 그가 기왕 텔레비전에 나가는 거 예쁘게 나가면 좋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며 둘의 손을 잡아끌었다.
스탠드로 나간 아이와 1학년 여자아이는 화장을 하는 민속무용단 틈에 끼어 앉았다. 둘은 조금 다른 톤으로 화장을 받았다. 1학년 여자아이는 수줍은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하얀 분가루를 두텁게 칠하고 빨간 립스틱까지 발랐고, 여름방학 내내 바닷가의 뜨거운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해진 아이는 그에 어울린다는 브라운톤 화장을 받았다. 화장을 마치고 들어간 실내는 스태프와 봉사활동을 나온 대학생들과 각국 선수단까지 도착해서 북적거렸다. 통역 대학생은 그때까지도 한복을 입은 여대생과 속닥거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고, 아이는 1학년 여자아이를 데리고 화장을 받으러 가기 전에 앉아 있던 차가운 돌계단에 다시 앉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피해서 벽 가까이 붙었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는 통역 대학생의 갈색 크로스백을 흘긋거리며 1학년 여자아이에게 영어로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외국선수들이 말을 걸면, 이렇게 대답하면 돼. 별로 어렵지 않아. 자, 따라해봐. 마요네즈 신지혜. 웰컴 투 코리아. 알겠니?”
1학년 여자아이가 겁에 질린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한 화장 탓에 1학년 여자아이의 두려움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어서 따라해봐. 마요네즈 신지혜. 웰컴 투 코리아. 응? 1학년 여자아이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곤대며 아이의 발음을 따라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내성적이긴 했지만 꽤 명석한 것 같았다. 아이가 일주일 걸려서 겨우 암기한 영어문장을 1학년 여자아이는 서너번 발음하더니 신통하게 곧바로 외워서 말할 줄 알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길이 많아지자 1학년 여자아이가 집에 가고 싶다며 보챘다. 울먹이는 1학년 여자아이를 보다 못해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옷 속으로 메고 있던 끈 달린 손지갑에서 십원짜리 동전을 꺼내 투입구에 넣었다. 1학년 여자아이의 집 전화번호를 물어서 전화를 걸어주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훌쩍이던 1학년 여자아이는 막상 통화를 하더니 울음을 멈추고 응, 응, 응,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수화기를 아이에게 건네주고선 참았던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이는 1학년 여자아이를 다독이면서 가족이 출발했는지 확인하려고 제 집으로도 전화를 걸어보았다. 가족들은 오늘 메인스타디움 관중석에서 아이를 지켜보기로 했었다. 그러기 위해서 수소문한 끝에 입장권의 원래 가격보다 세배나 비싼 암표까지 구한 터였다.
“너희 엄마 수술이 갑자기 오늘 오후로 앞당겨졌지 뭐냐. 그래도 가족 중 한명은 꼭 가서 너를 지켜볼 테니 잘해내야 한다.”
전화를 끊고서 1학년 여자아이를 시무룩하게 내려다보던 아이는 동전 냄새가 밴 손가락으로 1학년 여자아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때 한 무리의 아랍선수단이 줄을 지어 지나갔다. 그들이 아랍에미리트 선수단인지 다른 아랍국가 선수단인지 알 수는 없었다. 피부색이 완연하게 다른 그들이 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1학년 여자아이는 그들이 앞에서 서성인다는 이유로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되자 안절부절 못하며 또다시 눈물을 보였다. 아이는 한복을 입은 여대생과 무언가 적은 쪽지를 비밀스럽게 주고받는 통역 대학생을 내리 째려보다가, 1학년 여자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2층 화장실로 갔다.
변기뚜껑을 내리고 앉은 아이는 실내화 속에서 발을 빼냈다. 실내화 바닥에 쑤셔넣은 휴지뭉치가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뒤꿈치가 아팠다. 저릿저릿한 종아리와 발을 주무르는 동안 병상에 누운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현듯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엄마는 푸른색 옷을 입은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학교에선 옷이 손상될까봐 마지막날까지 내어주지 않았고, 아직 엄마 앞에서 아름다운 푸른색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엄마는 텔레비전으로도 개막식을 보지 못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와 원래 있던 1층 계단 밑으로 내려왔을 때 모퉁이에 서 있던 통역 대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던 한복 입은 여대생도 보이지 않았다.
계단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는 1학년 아이의 손을 잡고 뛰었다. 사방으로 뚫린 게이트 중에서 어느 것이 들어왔던 게이트였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들어왔던 게이트가 있었으니 나가는 게이트도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1학년 여자아이가 덩달아 뛰면서 어딜 가는 거냐고 물어왔다. 우리 둘 다 여기서 나갈 거야! 1학년 여자아이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아이보다 더 신나하며 뛰기 시작했다. 게이트 앞에 설 때마다 아이는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게이트 밖이나 안이나 죄다 시멘트빛이어서 아까 들어온 게이트가 어디였는지 헷갈렸다. 계속 뛰다보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조금 더 뛰다가 아이는 코카콜라 로고가 박힌 음료수 자판기를 발견했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언뜻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 옆이 출구였다. 서둘러 게이트를 향해 뛰어가던 아이가 갑자기 뜀박질을 멈췄다. 학교로 배달되는 우유회사 광고판 앞이었다. 화장실 안에서 칸막이 너머로 푸른색 옷을 기다렸던 아득한 시간이 아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이와 1학년 여자아이가 환하게 쏟아지는 우유 광고판 빛 속에 가만히 서서 숨을 몰아쉬는 동안 이제 막 입장하기 시작한 엄청난 숫자의 한국선수단에 의해 출구가 가로막혔다.
아랍선수단이 아이와 1학년 여자아이 앞을 지나갔다. 아이가 여름 바닷가 햇볕에 그을린 것보다도 피부색이 더 어두웠다. 그들은 아이와 1학년 여자아이에게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자신들의 전통의상을 입어서 반가운 모양이었다. 키가 더 작아서 더 어려 보이는 1학년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었는데, 1학년 여자아이는 그 앞에서 입술을 앙다물어버렸다. 1학년 여자아이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언니, 우리 여기서 언제 나가? 아이는 1학년 여자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까 가르쳐줬잖아. 그대로만 해. 지금은 그걸 해야 돼. 아이는 아랍선수들 앞으로 1학년 여자아이의 등을 살며시 떠밀었다.
“마요네즈 신지혜. 웰컴 투 코리아.”
고개를 숙인 1학년 여자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랍선수들이 키들키들 웃어댔다. 본능적으로 아이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감지했다. 멈칫한 아이가 1학년 여자아이에게서 한발 뒤로 물러섰다. 어리둥절해진 1학년 여자아이가 흘긋 뒤돌아보곤 이번엔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마요네즈 신지혜!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1학년 여자아이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 자리에서 달아나 기둥 뒤로 숨어들었다. 아랍선수들이 아이에게 사진기를 내보이며 뭐라고 떠들었으나 무슨 말인지 좀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방금 전 1학년 여자아이가 망신을 당한 영어를 되풀이할 순 없었다. 아랍선수들 틈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던 아이는 특유의 그 냄새를 맡고서 움찔했다. 하지만 아이는 책가방 속에서 상한 우유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코를 잡지는 않았다.
연거푸 몇장의 사진을 찍은 후에, 아이는 기둥 뒤로 숨은 1학년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1학년 여자아이는 이전과 달리 아이를 경계하는 듯했다. 행여 잃어버릴까봐 멀리 떨어지진 않았지만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아이에게 찰싹 달라붙지 않았다. 그제야 갈색 크로스백을 손에 쥔 통역 대학생이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너희들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통역 대학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랍선수들이 통역 대학생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통역 대학생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사타구니를 더듬으며 영어로 어물어물 대답했다. 통역 대학생도 제대로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랍선수들은 접시를 받쳐 든 것처럼 양 손을 들어올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의 말을 당최 알아듣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아이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머저리.”
소스라치게 놀란 통역 대학생이 들고 있던 크로스백을 떨어뜨렸다. 백 속에 있던 그의 소지품들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아이가 상상했던 무전기나 빨간 머리띠나 화염병 따위는 없었다. 바닥으로 쏟아진 통역 대학생의 소지품은 일회용 카메라, 지갑, 모나미 볼펜, 수첩, 그리고 손바닥보다 작은 포켓 영어사전이었다.
천둥 같은 환호성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아이는 메인스타디움 밖으로 나가는 게이트 안쪽에 서서, 한복을 입은 피켓걸 뒤에 붙어, 아랍에미리트 선수단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아랍에미리트가 호명되면 밖으로 나가서 트랙을 돌아야 했다. 오전에 예행연습을 해봤지만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었다. 한복을 입은 피켓걸 뒤만 따라가면 되었고, 트랙 위의 하얀 선을 이탈하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바로 앞 국가인 예멘 선수단이 게이트로 우르르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아이는 1학년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던 1학년 여자아이가 아이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조금 전 아랍선수들 앞에서 아이가 일부러 저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라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게이트 밖으로 나가야 했고, 트랙을 돌 땐 아이와 1학년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기로 약속돼 있었다. 다급해진 아이는 1학년 여자아이를 다그쳤다.
“빨리 손 잡아. 우리보고 손잡고 걸어나라고 했잖아.”
1학년 여자아이는 고집스럽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두 발을 지탱하고 서 있는 땅바닥이 어쩐지 허전했다. 치맛단 속의 실내화가 헐렁했다. 화장실에서 휴지뭉치를 빼놓고 다시 넣는다는 걸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쑤셔넣어둔 휴지뭉치 때문에 원래 싸이즈보다 반 치수 쯤 늘어난 실내화는 아이의 발을 폭 감싸주지 않았다. 당장 화장실에 가서 실내화 속에 휴지뭉치를 넣어야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군데군데 음료수와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져 지저분해진 바닥에 금박 수가 놓아진 푸른색 치맛단이 끌리고 있었다.
아랍에미리트!
게이트 안에서 바라본 트랙은 붉은 장미꽃잎을 흩뿌려놓은 듯 핏빛이었다. 휘어지는 트랙을 따라서 그어진 하얀색 선은 또렷했다. 아이가 1학년 여자아이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마지못해 손이 잡힌 1학년 여자아이가 손을 빼내려고 손목을 비틀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럴수록 아이의 손아귀로 뜨거운 피가 몰렸다. 앞장선 피켓걸이 하얀색 여덟 폭 치맛단을 출렁이며 게이트 밖으로 걸어나갔다. 하나하나 모아져 큰 덩어리가 된 함성은 오래오래 굶주린 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가족들 중 누가 왔는지 찾아보려고 관중석을 휘 둘러보던 아이의 눈살이 오므라들었다. 플래시 때문에 관중석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얼핏 올려다보니 메인스타디움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장미꽃밭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며 하- 벌려보았던 아이의 공허한 목구멍처럼 그 구멍은 잿빛 하늘을 향해 나 있었다. 뻥 뚫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부슬비가 아이의 이마와 눈가와 뺨을 적셨다. 눈두덩과 뺨에 칠한 불긋한 가루가 빗물에 얼룩져 뭉개지고 흘러내렸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트랙 빛깔은 점점 더 짙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트랙 위의 하얀색 선이 파란색 치맛단 쪽으로 달려들었다. 치맛단은 끌리지 않았으나 걷는 내내 아이의 종아리와 발등이 떨리고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그대로 하얀색 선을 이탈하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끝없는 트랙 위에서 아이의 뒤꿈치는 3센티미터쯤 떠 있었다.
가시처럼 날카로운 플래시와 핏빛 트랙을 지나지 않고선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