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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민영 閔暎
1934년 강원도 철원 출생. 1959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단장』『용인 지나는 길에』『냉이를 캐며』『엉겅퀴꽃』『해지기 전의 사랑』『방울새에게』등이 있음.
흔적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그는 떠나고
흔적조차 없었다
묻지 마라!
호궁소리
모래바람 날리는 막북의 땅을 지나
은성한 도읍의 성문 앞에 섰을 때
호궁1 켜는 노인이 내게 물었다.
- 어디로 가는 길인가?
- 어디로 가는지 저도 모릅니다.
- 저도 모르면서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가?
- 집 잃은 자의 길이 다 그런 게 아닐까요.
- 옳거니, 자네하고는 말이 되는 것 같군.
그러더니 노인은
배꼽 밑에 찬 낡은 자루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었다.
- 그게 뭡니까?
- 불에 볶은 호밀가루야.
성문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가면
늙은 회화나무 아래 샘이 있을걸세.
그 물에 이 가루를 타 마시고
길을 떠나게나.
- 고맙습니다, 사부님!
여러 날 동안 굶은 내가
노인이 주는 선물을
허겁지겁 받아들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은성한 고을의 크나큰 성문도
호궁 켜는 노인도 자취없이 사라지고
두 손에 받아 든 호밀가루만이
바람에 흐느끼듯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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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궁(胡弓): 대나무로 만든 통에 짐승 가죽을 입히고 줄을 건 후 말총으로 된 활로 연주하는 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