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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분단과 갈등을 넘어서기 위하여

『만인보』 완간의 문학사적 의의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로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모래 위의 시간』 등이 있음. mwyom@ynu.ac.kr

 

* 이 글은 2010년 4월 9일 한국프레스쎈터에서 열린 ‘『만인보』 완간 기념 심포지엄’에서 기조발제문으로 발표된 원고를 필자가 수정·보완한 것이다.

 

 

1

 

1986년에 첫걸음을 내디딘 『만인보』 대장정이 4반세기의 노정을 끝내고 마침내 대미에 이르렀다. 그동안 고은(高銀) 시인이 보여온 예측불허의 생산력을 감안하더라도 이 대작의 완성은 경탄을 자아내기 족하며, 문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축하를 받는다고 해서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제20권의 발문에서 김병익(金炳翼)은 『만인보』에 ‘민족사적 벽화’라는 적절한 찬사를 보낸 바 있지만, ‘민족사적’이란 수식어에 어울리는 이 대작을 위해 수많은 낮과 밤을 원고지 앞에서 보낸 시인의 공력과 노고는 오직 경의에 값한다.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분단과 전쟁을 거쳐 치열한 민주화투쟁의 시점에 이르는 한국현대사의 파란만장한 흐름을 배경으로 민족의 고난과 민중의 생명력을 대규모의 서사적 화폭 안에 담아낸 작품의 완성을 두고 민족문학의 위대한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일 수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 근대문학의 역사에서 서사적 성격의 장시는 낯선 장르가 아니다. 주지하듯이 1920년대 중반에 발표된 김동환(金東煥)의 『국경의 밤』과 『승천하는 청춘』은 식민지 민족현실의 형상화를 시도한 ‘서사시’로서, 감정표현 위주의 자유시가 주류를 이루었던 초창기 우리 시단에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카프 결성에 따른 문단의 분화로 말미암아 김동환의 문제의식은 그 자신에 의해서나 다른 좌우파 시인들에 의해서나 더 진전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서사시’가 오랜 잠복기간 끝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신동엽(申東曄)의 『금강』(1967) 출간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김지하(金芝河)의 「오적」(1970)을 비롯한 일련의 ‘담시’와 신경림(申庚林)의 「새재」(1978) 「남한강」(1981) 등 역작들이 잇달아 발표됨으로써 이런 유형의 ‘서사시’는 당시 고조되던 민족·민주운동에 호응하는 민중문학 발흥의 지표로서 문단과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시기적으로 좀 뒤지만, 고은의 『백두산』(1987~94)과 이동순(李東洵)의 『홍범도』(2003)는 구한말 의병투쟁부터 일제시대 독립전쟁에 이르는 민족운동사의 근간을 장대한 규모의 서사시로 승화시킨 역작으로서, 이같은 창작의 흐름이 어떤 절정에 이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장편소설과 달리 장시는 독자가 쉽게 친숙해질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장편소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대중의 통속적 취향을 기반으로 발전했고, 활자문화가 번창함에 따라 오늘의 영화나 연속극처럼 자본주의적 유통구조를 매개로 소비되는 대중적 인기상품으로 되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토지』 『장길산』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은 더이상 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1 반면에 서사시는 장편소설의 역사적 전신(前身)이었다는 데서 짐작되듯 고대·중세에 있어 민족국가 형성의 고난과 영광을 노래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짐하는 제의적 요소를 지닌 장르로서, 개인적 독서가 아니라 집단적 향수의 대상이었다. 키르기스스탄 같은 나라에서는 지금도 영웅서사시 「마나스」가 축제 때 마나스치(Manaschi)라고 불리는 전문적 창자에 의해 군중 앞에서 반주에 맞추어 낭송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경우에는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편으로 민족의 집단적 기억이 대다수 민중에게 강제되는 ‘서사시적’ 현실을 살면서, 다른 한편 산업화·개방화·도시화의 과정을 통해 농촌공동체의 해체와 구비문학 전통의 소멸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에게 민족문학적 영감을 고취하고 『금강』이나 『백두산』 같은 서사시의 창작을 촉구하는 현실과 그런 장편서사시의 대중적 향유를 방해하는 현실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하나의 공간 안에서 공존·충돌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세계화현실의 본격도래와 더불어 이제 서사시와 대하소설 같은 ‘무거운’ 장르들의 역사적 소임은 종말에 가까워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백두산』과 함께 『만인보』가 처음 구상된 것은 저자가 여러 곳에서 밝힌 대로 1980년 겨울 육군형무소 감방 안에서였다. 지극히 억압적인 상황 한가운데서 도리어 호방한 문학적 상상력이 작동한 셈인데, 실은 한국의 1970~80년대는 군사독재의 광풍을 온몸으로 헤쳐나간 고은 같은 시인에게만이 아니라 폭압의 현실과 역설적 관계를 맺었던 문인들에게도 일찍이 없던 ‘거대서사’의 시대였다. 그런데 고은의 경우 주목할 것은 두 작품의 기획이 동일한 근원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문학적 형상화의 방식에서는 아주 대조적인 길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질곡과 시의 질곡이 하나라는 사실로 인식됨으로써 나는 시가 역사의 산물임을 터득한 것이다”(『만인보』 1권 ‘시인의 말’)라는 언명과 “이제야 나는 고려의 자식이다. 이 시와 더불어”(『백두산』 1권 머리말)라는 고백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에 근거한 동일한 체험의 표현이다. 이 나라에서 유신체제의 강행부터 6월항쟁의 승리에 이르는 십수년의 기간은 그만큼 역사와 문학의 분리가 힘들었던 일치의 시대였다. 그러나 앞의 ‘시인의 말’에서 이미 시인은 “서사시 『백두산』은 사람을 총체화하는 것인 반면 『만인보』는 민족을 개체의 생명성으로부터 귀납하는”작품이라고 명백하게 구별하고 있다. 거대서사의 영광이 황혼에 이른 오늘의 시점에서 돌아본다면 인간의 총체성을 목표로 했던 서사시가 넘기 힘든 절벽에 부딪쳤던 것과 달리 개체의 생명성으로부터 민족을 귀납하고자 했던 시도가 우람한 성취에 이른 것은 역사현실의 상황과 문학형식의 선택 사이에 개재된 연관의 불가피성을 확인케 한다.

어떻든 『만인보』는 민족사의 총체적 인식을 겨냥하는 서사시적 충동과 거대서사의 해체를 압박하는 세계사적 현실 간의 화해불능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고안된 독특하면서도 야심적인 실험인 셈이었다. 애초의 구상보다 훨씬 줄여 3천명의 인물을 시로 쓴다는 첫 발표 때의 계획만도 믿기 힘든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계획보다 훨씬 더 늘어나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대작이 되었다. 이 4천편의 작품들 모두가 개별작품으로서의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만인보』는 집합명사이지만, 동시에 4천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응집되어 일종의 서사적 통합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만인보』는 한 작품을 지칭하는 단수명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수많은 개인들의 갖가지 행적과 이력, 운명과 개성을 각각의 독립적 서정시 안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만인보』는 독립된 단시들의 모음, 즉 하나의 거대한 시집이다. 따라서 우리는 딴 시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데나 펼쳐서 한편 한편을 그것 자체의 자기완결성을 전제로 읽을 수 있고 굳이 통독의 의무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시집 전체는 단시들의 누가적(累加的)인 축적을 통해 개인들의 사적 일상과 개별적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보편적 운명에 귀속되도록 배치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만인보』는 독특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물론 서사적 구성과 거리가 먼 보통의 서정시집에도 은연중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적 또는 방법적 일관성이 있게 마련이고, 또 반대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이 어느정도 분명한 장편소설에서도 ‘부분의 상대적 독자성’이 인지되는 수가 적지 않다. 하지만 『만인보』의 이중성은 전혀 이와 다른 의식성의 소산인 것으로 보인다. 되풀이하자면 시집의 각 편들은 독립적 단시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개별성에 손상받음 없이 시집 전체를 포괄하는 또다른 차원에 연결되며, 이 새로운 차원과의 결합을 통해 더 넓은 시공간적 좌표 즉 더 높은 역사성과 사회성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만인보』의 거대한 규모는 당연히 이 작품을 단일한 시선, 단일한 목소리, 단일한 감성이 지배하는 균질적인 텍스트로 유지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시인 자신이 이 점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가령 그는 작품 중반을 넘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나는 시 속의 화자에 대한 회의를 일으킨다. 1인칭 ‘나’로 하여금 어떻게 시의 수많은 은유적 자아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그것으로 타자들의 가없는 하나하나의 진실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나’는 언제까지 밑도 끝도 없이 나일 수 있는가.”(16권 ‘시인의 말’) 이것은 말하자면 『만인보』 집필의 방법론적 고민의 일단을 토로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주관적 장르라고 말해지고 있고, 시의 표면적 화자와 내부적 자아가 명백히 구별되는 경우에도 텍스트의 모든 언술은 근본적으로 서정적 자기동일성에 회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사성을 지향하는 인물시 내지 이야기시의 경우 화자의 주도적 역할은 많은 경우 등장인물에게 양도될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만인보』와 같은 장대한 텍스트에서는 각 시 속의 1인칭 화자와 그 화자를 통해 형상화되는 수많은 ‘은유적 자아’들 및 작품 바깥의 시인 자신 간의 관계에 수많은 변형과 변주들이 발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작품에서 허다한 예문을 동원할 수 있을 터인데, 이런 면과 관련하여 유희석(柳熙錫)은 ‘『만인보』 형식의 무정형성’을 지적하면서 “인물시 특유의 극적 긴장을 유장하게 잇는 전술이 필수적이다”(「시와 시대, 그리고 인간」,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유장한 전술’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갖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읽기에 『만인보』는 한편으로 ‘형식의 무정형성’처럼 보이는 측면을 의도적으로 방임하면서 다른 한편 ‘타자들의 가없는 하나하나의 진실’에 닿기 위한 그 나름의 효과적인 전략을 개척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작품 한편 한편은 고은 특유의 능란한 언어와 번뜩이는 안광이 발현된 단형의 인물시이되 시집 전체는 유장하게 흘러가는 서사적 장시의 성격을 갖는 이중성의 구현이 그것이다.

 

 

2

 

『만인보』 같은 엄청난 대작에는 당연히 형식문제를 둘러싼 곤란이 따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4천편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시들을 하나의 표제 아래 묶여 있도록 하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무엇이 필요한 측면도 있는 반면에, 거꾸로 단일한 서술자의 틀에 박힌 관점이 조성할 천편일률적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형식의 무정형성’이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정형성이라는 것 자체가 작품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상대적 기준일 뿐이며, 때로는 생동하는 진실에 닿기 위해 정형의 파괴를 무릅써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수천명의 등장인물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몇개의 커다란 계열로 성층화(成層化)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본단위는 물론 개별작품들이다. 그리고 각 작품들은 일정한 서술형식만을 따르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작품을 포괄하는 단일한 정형은 있을 수 없다. 앞의 인용문에서 시인이 “시 속의 화자에 대한 회의”라고 토로한 것은 단일 화자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의식한 발언일 터인데, 왜냐하면 시에 목소리의 일관성 내지 시선의 단일성을 부여하는 초점의 기능은 화자의 고정적 위치를 통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단일 화자의 고정성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며, 그것이 형식의 무정형성, 다른 말로 형식의 개방성을 결과하는 것이다. 다음 작품들에서 보듯이 고은 자신이 주인공인 경우에도 경험은 화자의 미묘한 변형을 통해 다양한 색조로 굴절되어 제시된다.

 

외삼촌은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갔다

어이할 수 없어라

나의 절반은 이미 외삼촌이었다

가다가

내 발이 바퀴살에 걸려서 다쳤다

신풍리 주재소 앞에서 옥도정기 얻어 발랐다

외삼촌은 달리며 말했다

머스매가 멀리 갈 줄 알아야 한다

-「외삼촌」 앞부분(1권)

 

세상이

사람이

죽을 지경으로 부끄럽기만 한 아이

처서 지나

큰바람 비바람 몰아쳐오면

그때야말로 살아난다

소나무 가지 짝 찢어지고

개가죽나무 뿌리째 뽑혀버리면

그때야말로 살아난다

온갖 부끄러움 다 버리고

식은 몸뚱이 힘차게 불타오르며 살아난다

-「어린 은태」 앞부분(2권)

 

경남 해인사

첩첩산중 계곡

두개골 여섯 개

세찬 물살에 떠내려오다 바위에 턱 걸렸다

 

1953년

가야산 빨치산 사망자의 해골이신가

 

일초선사

그 해골 옮겨다가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그중의 한 두개골

방 안에 모셔놓고

근본불교

고골관(枯骨觀)의 선정(禪定)에 덤으로 들어보았다

 

바깥 감나무에

감 한 개 툭 떨어졌다

 

일초선사

해골 눈구멍에서

푸른빛 뿜어져나오는 것 보았다

카아!

-「사라호 해골」 중간부분(21권)

 

「외삼촌」은 성장소설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하는 정통적인 1인칭 서술이다. “어이할 수 없어라/나의 절반은 이미 외삼촌이었다”라는 절묘한 구절이 끼여 있는 것을 제외하면 감정이입이 차단된 평범한 산문적 진술이다. 외삼촌에게 자전거 얻어탄 일화는 여러 시에 되풀이될 만큼 소년 고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 이때 자전거는 외삼촌의 인격의 표상이자 안일과 정지를 거부하는 활동적 정신의 객관상관물이다. 그런데 그 외삼촌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일본 유학생으로 고등문관시험에도 합격했으나 관직을 거부하고 혁명운동에 종사하다가 결국 네번째 감옥에서 옥사한다. “나는 15세부터/외삼촌의 사회주의자였다”.(「빨갱이 3」, 16권) 그러나 일곱살 어린 고은에게 외삼촌은 자전거 태워주는 멋진 어른일 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외삼촌」의 1인칭 서술은 담백하고 직설적이다.

「어린 은태」도 성장담의 일부이다. 지나칠 만큼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타던 소년이 어떤 계기를 만나 갑자기 격정적인 인물로 변신하는 예는 종종 목격되는 바이다. 그런데 이 시는 어린 주인공의 감정의 돌연한 상승을 묘사할 뿐, 객관적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처서 지나/큰바람 비바람 몰아쳐오면”에서 ‘처서’가 실제의 절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어떤 상징적 사건에 연관된 것인지 단정짓기 어렵다. 제목으로 보건대 어린 시절의 시인 자신의 내면세계를 회상한 것이지만, 1인칭 서술에 의하지 않고 ‘아이’라고 호칭함으로써 자신을 극화하고 있다.

「사라호 해골」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주지하듯 사라호는 1959년 9월 삼남을 강타한 태풍이었는데, 그 때문에 가야산 계곡에 묻혀 있던 빨치산 해골이 물에 떠내려온다. 당시 해인사 스님이었던 일초선사는 바위에 걸린 해골들을 모아 위령제를 지낸다. 이 일화를 소재로 한 작품 「사라호 해골」은 오도송(悟道頌)과 진혼가(鎭魂歌)의 양면을 겸한 시라고 할 수 있는데, 두개골을 방에 안치하고 선정에 들었다가 “바깥 감나무에/감 한 개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카아!” 하고 탄식을 내지르는 부분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그 부분을 포함한 시 전체는 남부군 전투에서 산화한 주검을 달래는 진혼의 노래이다. 이 작품에 담긴 이런 처절한 비극성을 공적 공간으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객관적 시선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 은태」에서 주인공이 아이 뒤에 몸을 감춘 ‘숨은 나’라면 「사라호 해골」에서 그는 승복을 차려입고 의식을 집행하는 ‘변장한 나’이다.

이러한 검토에서 드러나듯이 화자의 자유로운 변형은 작품의 정형성 여부와 관련된 형식문제가 아니다. 개개의 시 한편 한편은 “타자들의 가없는 진실 하나하나”에 닿기 위한 형식적 개방을, 때로는 정형의 타파를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형식의 무제약적 자유가 자동적으로 타자의 진실에 이르는 길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인보』에서 일관되게 보는 것은 그 어떤 도덕적·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 속에서가 아니라 질병과 궁핍, 공포와 절망, 살육과 도주 같은 현대사의 구체적인 물질적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구현해나가는-또는 실존의 구현을 거부당하는-개인적·민족적 진실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수천명 등장인물들은 역사 자체의 리듬에 따라 일정하게 성층권을 형성하게 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이 거대한 작품의 지정학을 구성하게 된다.

 

 

3

 

『만인보』는 내용상 6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집필 순서(즉, 출간 순서)대로 과감하게 명명해보면, ①고향시편(1~9권), ②70년대 시편(10~15권), ③전쟁시편(16~20권), ④혁명시편(21~23권), ⑤불교시편(24~26권), 그리고 마지막으로 ⑥항쟁시편(27~30권)이 된다. 이 편제와 상관없이 군데군데에 멀리 삼국시대부터 가까이 독립운동기에 이르는 역사상의 인물들이 배치되어 “전체 작품에 변화를 주면서 독자의 역사의식을 돕기도 한다.”(백낙청, 3권 발문) 사실 『만인보』의 특이한 점은 개별작품들이 각자 독립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수백편, 때로는 1천여편으로 이루어진 각 시편들도 독자적인 시집의 면모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2백여편의 역사시들이 산재해 있어 과거와 현재 간의 내적 긴장을 조성하고 느슨한 대로 30권 전체를 아우르는 일정한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가운데 ① ② ③ ④에 대해서만 개괄적인 언급을 하는 데 그치려 한다.

고향시편: 1권부터 9권까지의 1천여편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시대를 배경으로 이제는 거의 사라져 볼 수 없게 된 농촌공동체의 풍경과 풍물을 다채롭게 제시한다. 시인이 ‘내 어린 시절의 기초환경’이라고 불렀던 고향과 인근 마을의 멀고 가까운 친척들, 낯익은 할머니와 아저씨들, 금강 하류의 농촌과 시장터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각양각색 민초들의 인생사가 때로는 해학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으로 묘사된다. 뒤로 갈수록 무대가 넓어져 막판에는 「이문구」의 대천까지 북상하는데, 한두편 감상해보자.

 

충청도 장항에서 흐린 물 느린 물 건너

삐거덕 돛배에 가마 태워 시집온 이래 그 고생길 이래

된장 간장 한 단지 갖추지 못한 시집살이에 몸담아

첫아들 낳은 뒤 이틀 만에 그놈의 보리방아 찧어

두벌 김매는 논에 광주리밥 해서 이고 나가니

산후 피 펑펑 쏟아 말 못할 속곳 다섯 벌 빨아야 했다

그러나 바지랑대 걸음걸이 한번 씨원씨원해서

보라 동부새바람 따위 일으켜 벌써 저만큼 가고 있구나

갖가지 일에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하고 보릿고개 봄 다 가고

여름 밭 그대로 두면 범의 새끼 열 마리 기르는 폭 아닌가

우거진 풀 가운데서 가난 가운데서 그놈의 일 가운데서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찌 나의 어머니인가

-「어머니」 뒷부분(1권)

 

달치포구도 포구라고

밴댕이젓 나부랭이 아니면

눈꼽조개껍데기나 흩어진 것도 포구라고

거기 선술집 다정옥 있다

다정옥 춘자란 년

꼭 단호박같이 생긴 년

작달막한 것이

챙길 것은

여간내기 아니게 챙기고 나서

한번 누워주었다 하면

요분질로 밤새워

사내 피 다 말리는 춘자

바람 되게 불어쌓는 밤

웬만한 사내 둘은 거뜬히 죽어나는 밤

땀 식은 껄껄한 몸 가득히

신새벽 담배연기 힘껏 빨아들이는

그 담배맛에 죽었다 깨어나는 밤

-「달치포구 다정옥」 전문(9권)

 

「어머니」에는 가난한 집에 시집와 노역과 희생으로 일생을 보내는 조선 여인의 전형이, 「달치포구 다정옥」에는 악착같이 돈을 챙기는 주막집 작부의 막장 인생이 그야말로 실감있게 그려져 있다. 전통시대의 어머니는 무심한 자식들의 뒤늦은 회한 속에서 거의 종교적 감정을 유발하는 존재로 살아나게 마련이므로, 고향정서에 뿌리 둔 시인치고 어머니에 대한 간절함을 노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찌 나의 어머니인가”라는 감탄형 의문문으로 시가 끝나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어머니는 고은의 타고난 능변조차 무력하게 만든다. 시장 자락이나 포구 근처에는 으레 선술집이 있게 마련이고, 다정옥도 그런 곳이다. 그집 작부 춘자 역시 눈에 선하게 떠오를 만큼 전형적이다. “꼭 단호박같이 생긴 년”이란 표현에는 단지 외모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천대 속의 악착스런 삶에 대한 시인의 은근한 애정도 들어 있다. “땀 식은 껄껄한 몸 가득히/신새벽 담배연기 힘껏 빨아들이는/그 담배맛에 죽었다 깨어나는 밤”은 고된 성노동 뒤끝의 신산함과 처연함을 놀랍도록 절실하게 부각시키고 있어, 서사적 문맥을 넘어선 뛰어난 절창으로 승화되고 있다. 두 작품은 등장인물과 화자 간의 거리가 다른 만큼 작품의 정조(情操)도 비극과 희극 사이처럼 상반된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은 역경을 뚫고 살아가는 강인한 생명력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만인보』의 저자가 수많은 인물들의 삶의 이력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적극적 민중사관이다.

개별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 한결같지 않지만, 어떻든 이런 작품이 1천편쯤 모이게 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서사적 풍요’(백낙청, 앞의 발문)라 불리어 마땅하다. 그것은 저자 고은의 경험의 원천이고 감성의 뿌리에 해당하는 세계인데, 놀라운 점은 그가 이 풍요한 유년기 체험의 문학화를 오랫동안 미루어왔다는 사실이다. 긴 발효기간을 거쳐 태어난 고향세계의 풍요를 두고 백낙청은 이문구의 『관촌수필』 같은 소설적 성취에 견주어 언급하기도 했지만(앞의 발문), 식민지시대의 농촌풍경이라는 점에서는 이기영·채만식의 장편과 이효석·김유정·오영수의 단편을 떠올릴 수도 있고, 해방후의 농촌묘사로서는 방영웅(方榮雄)의 『분례기』(1967)나 박정요의 『어른도 길을 잃는다』(1998) 및 송기숙의 여러 장단편도 비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떻든 시에 이루어진 ‘서사적 풍요’란 아무래도 소설에서의 그것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으며, 더구나 『만인보』에 재현된 농촌공동체가 실은 60, 70년 전의 것이었다는 점도 냉정하게 따져볼 일이다.

전쟁시편: 16권부터 20권까지의 7백여편은 분단과 전쟁의 가공할 참극, 지독한 궁핍과 황량한 폐허, 그리고 ‘여러 지역과 사회’에 걸친 시인 자신의 ‘편력시대’를 보여주는 시편들이다. 일찍이 고은은 『1950년대』(1972), 『고사(古寺)편력-나의 방랑 나의 산하』(1974) 등의 산문에서 전후의 폐허시대를 돌아본 적이 있지만, 6·25전쟁 자체의 광기와 잔혹을 정면으로 다룬 것은 이 시편들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생각해보면 6·25전쟁의 성격과 본질은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비극의 출발점이라는 점일 것이다. 김구 선생 같은 애국자들이 이미 경고했듯이 남북 단독정부의 수립은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든 전쟁의 참화는 너무 끔찍하고 그 영향은 너무 파괴적이어서,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전쟁의 현실적·이념적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전쟁과 문학의 관계는 단순치 않다. 포연 속에서 청춘을 탕진한 세대들의 생생한 체험적 문학이 ‘전후문학’이란 명칭으로 불린 것은 잘 알려진 바이고, 고은 자신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金宗三·金光林·全鳳健, 1957)는 참전세대의 대표적인 시집인데, 제목에 보이듯 모더니즘적 겉멋에 들려 민족사적 비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오히려 『보병(步兵)과 더불어』(柳致環, 1951), 『초토(焦土)의 시』(具常, 1956), 『역사 앞에서』(趙芝薰, 1959)처럼 종군경험에 바탕한 선배시인들의 작품이 좀더 실속있는 업적이었다. 어떻든 1960년대 이후 시에서는 6·25가 멀어진 반면, 소설에서는 더욱 심층적인 탐구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호철·박완서·홍성원·황석영·김원일·이문열 등 많은 작가들이 분단의 비극과 전후현실의 참상을 깊이있게 그려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인보』는 ‘전후문학’ 시대의 전쟁시편을 넘어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 쪽의 성과와도 구별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업적이다. 여기에는 분단 직후의 이념대결, 정치가들의 무책임과 비열함, 장군과 병졸들의 기구한 참전동기, 전투가 휩쓸고 간 지역 민간인들의 터무니없는 불행, 억울한 죽음과 빗나간 복수극, 전후의 가난과 황폐 등 망각의 지표면 아래 묻힌 수많은 사연들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령, 「엄항섭의 눈물」(20권)은 1950년 8월 15일 밤 시청 강당에서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계의 초청으로 김규식·조소앙·엄항섭 등 임정 요인과 안재홍·정인보 등 애국인사들이 참석하여 개최된 해방경축연회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참석자들의 엇갈리는 정치적 운명이 급박한 전시상황의 급박한 분위기에 겹쳐지면서 시대의 역설을 참담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중학교 5년생 김명규는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거듭된 전투 끝에 겨우 살아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과부 어머니도 형도 공산당에게 학살당하고 없었다. 그는 무덤에서 하루를 보내고서 한밤중 자살한다.(「귀향」, 16권) 나무꾼 오진걸은 남덕유산 산판에서 일하고 내려오다 비를 만나 바위굴에 들어갔다. 그리고 불을 피우다가 빨치산 혐의자로 토벌대에 체포되어 사형수가 된다.(「제비꽃」, 19권) 1950년 12월 전남 함평군 월야면에서는 이 마을 저 마을 군인들이 나타나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을 쏘았다.“중대 지휘장교가 말했다.//살아남은 사람은/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모두 살려주겠다고//이 말에 주검 속에서/살아 있는/53명이 일어났다//장교가 사격명령을 내렸다”(「하느님」, 20권). 마침내 전쟁은 인간의 광기에 그치지 않고 생태계의 파괴에까지 이른다. “전쟁이/소도 바꿔놓았다/개도 바꿔놓았다//전쟁이/사람만이 아니라/짐승도 눈에 핏발 서게 만들었다 (…) 전쟁으로/사람이 미치더니/소까지 미쳐버렸다”(「1953년 강릉 황소」, 18권).

혁명시편: 21권부터 23권까지의 4백여편은 시인으로 하여금 “나는 6·25로 산에 들어갔고 4·19로 산에서 내려왔다. 역사는 이런 나의 삶에 각성을 요구했다”(1권 ‘시인의 말’)고 고백하게 만든 그 4·19혁명을 다루고 있다. 많은 역사적 사건들 중에서도 4·19는 유난히 동시대 서정시인들의 감성과 의식을 자극한 기폭제였던 것 같다. 데모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투고시와 기성시인들의 발표시를 모아 혁명 당년에 이미 여러권의 기념시집이 출간된 것과 같은 사례는 아마 4·19가 유일할 것이다.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박두진) 「푸른 하늘을」(김수영) 「아 神話같이 다비데群들」(신동문)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박봉우) 등 4·19의 여운 속에서 씌어진 시들 중에는 지금도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 적지 않다. 반면에 4월혁명을 소재 또는 주제로 삼은 소설로서 진지한 업적이라 할 만한 작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시의 경우에도 달아올랐던 열기가 5·16쿠데타의 철퇴로 냉각됨에 따라 4·19 찬양시는 자취를 감추고, 다만 후배세대의 시인들에 의해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방편으로 4·19를 음미하는 시가 간간이 이어졌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만인보』가 ‘4월의 영령’한 사람 한 사람을 문학적 기념비의 형상 속에 집단적으로 호명한 것은 특별한 의의가 있으며, 더욱이 혁명 50주년을 열흘 앞둔 시점에 『만인보』 완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린 것은 마치 혁명기념식을 앞당겨 여는 것과도 같은 감명을 준다. 그러나 4·19의 희생자들을 다룬 시 자체는 소재의 성격상 6·25전쟁이나 광주항쟁을 다룬 시들에 비해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70년대 시편: 10권은 「함석헌」 「전태일」 「육영수」…, 11권은 「박정희」 「오윤」 「문익환」…, 12권은 「이병린」 「김영삼」… 각각 이렇게 시작하고 있고 13~15권은 표지에 ‘70년대 사람들’이라고 못박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10~15권의 7백여편은 시인이 문단활동·민주화운동에 동분서주하면서 접촉한 인물들의 열전이다. 대부분 직접 교유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고 다수가 생존인사들이어서, 역사상의 인물이나 향촌의 민초들을 다룰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역사의 공식적 기록이 전해줄 수 없는 숨은 일화들, 사건의 이면에 놓여 있는 주인공들의 인품과 성격들이 기막힐 만큼 예리하게 포착되고 있어, 그러한 관찰들 자체가 7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미시사적 현장보고의 생동성을 띤다. 가령, 다음에 인용하는 아주 짧은 두 편의 비교에서도 드러나듯이, 시인은 한 노동자의 죽음에서 ‘나의 시작’이 발원함을 고백하며, 마침내 그것이 ‘우리들의 시작’으로 확장되고 ‘아침바다의 시작’으로 심화됨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 노동자가 비슷한 시기에 죽어간 사실을 놓치지 않으며, 똑같은 두 죽음이 왜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조명을 받는지에 대한 물음을 피하지 않는다. ‘역사는 정의가 실현되는 자리인가’라는 물음으로 치환될 수 있는 이 문제의식은 『만인보』의 저자가 수많은 비극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이다.

 

그의 죽음은

너의 시작이었다

나의 시작이었다

하나둘 모여들어

희뿌옇게

아침바다의 시작이었다

 

그의 숯덩이 주검 한밤중에도 우리들의 시작이었다

-「전태일」 전문(10권)

 

1971년 3월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가

드라이버에

머리 찔려 병원으로 실려갔다

실려가

두 달 지나서 죽었다 피습 사망이었다

지난해 전태일의 분신 이후의 일

 

사람들은 하나는 섬기고 하나는 저버렸다

-「노동자 김진수」 전문(10권)

 

 

4

 

『만인보』가 원체 대작이므로 이를 통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조리있는 작품론을 구성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글을 준비하느라고 찾아본 바에 따르면, 당연한 노릇이지만, 13~15권(1997)이 출간되고 난 다음해와 16~20권(2004)이 출간된 후에 『만인보』를 논하는 글이 여럿 발표되었다. 그중 내가 주의깊게 읽은 논문은 황종연·유희석·이시영의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황종연(黃鍾淵)의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에 나의 논지와 연관하여 간단히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황종연의 논문은 부제(「고은 『만인보』의 민중·민족주의 비판」)에 밝힌 바와 같이 『만인보』 비판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그 성과를 인정하는 데에도 인색한 글이 아니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사회 하층민의 생활은 가난의 인습에 시달리는 가운데 역사의 재앙까지 입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강한 의지로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돌보는 여성들의 도덕이 원천이 되어 그 척박함과는 판이한 세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상호부조의 도덕이 일상생활에 배어 있는 세계이다. 『만인보』에 그려진 인간초상 중에는 각자 딱한 처지임에도 서로 기대고 도우며 살아가는 하층민들의 얼굴이 곳곳에 박혀 있다. 저자는 그 하층민들의 겉으로 보이는 초라함, 비천함, 난폭함의 이면에 공생을 위한 도덕이 살아 있음을 자주 강조한다.” 또 그는 이렇게도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만인보』는, 적어도 그 하층민의 형상에 있어서는, 7, 80년대를 통해 고은 자신을 비롯한 많은 문학인, 학자, 예술가, 종교인들의 노력으로 정립된 민중상의 자유로운 종합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황종연의 이 지적이 설사 비판을 위한 숨고르기로서 나온 것이라 해도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인 것은 사실이다. 짐작건대 이것은 그가 70, 80년대 민중운동과 민족문학의 역사적 공헌을 일정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응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황종연의 사고는 “현재 한국 민주주의를 둘러싼 상황은 민주화 이전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간단히 말해서 지난날 민주화에 기여했던 민중·민족주의가 이제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위험요소로 되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의 논문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최장집(崔章集)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가 한국 민주화의 보수적 귀결을 역사적으로 점검하면서 70, 80년대의 민주화투쟁이 자유주의적 가치를 포용할 여유를 갖지 못했음을 아쉬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황종연은 여기서 더 나아가 개인주의·다원주의의 절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자유주의 자신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지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대척점에 있다고 간주되는 민족주의·집단주의가 새로운 시대에 있어 “안심하고 수긍할 만한 민주사회의 비전”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한국 민주주의를 둘러싼 상황이 1987년을 계기로 본질적으로 변화했다는 황종연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명박정권 출범 이후의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자본과 권력의 기득권연합이 자신들의 맨얼굴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쓴 가면으로서의 다원주의·자유주의를 언제든지 벗어버릴 용의가 있다는 것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민족주의가 여전히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위한 최장집 교수의 고민을 뒤늦게 접하고서 내가 배운 것이 황종연의 그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데에 나는 놀랄 뿐이다.

내가 보기에 황종연의 『만인보』 비판은 『만인보』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황종연에 의해 해석된 『만인보』 비판이다. 그는 『만인보』와 관련하여 “민중의 온갖 정체성들을 민족사의 일의적 서사 속으로 합병하는 민족시인의 정치적 상상력”이라고도 말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만인보』 저자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이다. “한국전쟁기에 ‘새 세상’이 왔다고 느낀 민중들의 광란에 명분을 제공한 것은 민족의 해방과 통일이라는 관념이 아니었던가?”-황종연의 이 의혹에서는 심지어 반공주의자의 상투적 모략조차 감지할 수 있다. 『만인보』에도 여기저기 묘사되어 있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개인적 복수와 사리사욕을 위해 온갖 미명을 내걸고 만행을 저지른 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간악한 자들의 광란에 명분을 주기 않기 위해 해방과 통일의 이념조차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비이성일 뿐이다. 그렇다면 『만인보』가 근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감동적 서사들 중에서 지금 내게 기억되는 것 한두 편을 예로 해서 생각해보자. 「다섯 시간의 결혼식 강좌」(16권)는 “6·25사변 1년째/경인국도 오류동에는/평안북도 일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미군 통역 노연택의 집 한 채에/모여 살았습니다”에서 보듯이 전쟁 때의 피난생활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함석헌 형제, 송두용, 유달영 등 알 만한 인물들이다. “그런 피난공동체에도 결혼식이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평소의 허름한 옷 그대로 걸상에 앉아 있고, 신부의 아버지 함석헌을 비롯한 하객들은 차례로 긴 축사를 늘어놓는다. “오전 열시부터/한 사람/한 사람의 축사가/오후 세시에야 겨우 끝났습니다/다섯 시간을/신부신랑은 꼼짝 못하고/오줌도 못 싸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혼식을 올린 “그 신혼부부 바로 자식들 낳으니/대구 동촌에서 낳으니 동일이/포항 영일만에서 낳으니 영일이/서울서 낳으니 경일이 응일이/너무 순해서 순일이/너무 착해서 선일이/아들 하나 딸 다섯이었습니다”. 또다른 작품은 「옥순이 옥분이 자매」(16권)이다. 1953년 휴전 직전 하루 두번 왕복하는 광주-순천행 버스가 비포장 자갈길을 달리다가 가파른 고개 위에서 고장이 났다. 운전수와 조수가 수리를 하는 동안 한 노파를 시작으로 승객들이 노래를 부르며 지루한 시간을 ‘꿀처럼 달게’ 견딘다. 여순사건 때 부모를 잃고 외가에서 자라던 옥순이와 옥분이는 처음으로 태어난 고장에 가던 길이었다. 열한살 열세살 그들도 “해는 져서 어두운데…” 하고 애틋한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고 승객들은 박수를 친다. 드디어 버스는 달리기 시작하며, 그리하여 이제 시인은 희망을 말한다. “그 전란이 휩쓸고 간 땅/그 좌와 우/미움과 주검 널리던 땅/어디에도/옛정이 남아 있지 않은 땅/차 고장으로/옛정이 처음으로 묻어나/서로 노래하고 춤추는/한 세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두 작품 모두 참담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읽는 이에게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고 밝은 색조가 넘친다. 한창 전쟁이 진행중인 상황이고 고향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피난민 신세인데, 그런 와중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흐뭇한 사건이다. 게다가 다섯 시간 동안의 축사라니, 얼마나 대단한 예식인가. 이것은 전쟁의 불합리와 잔혹성에 대한 원천적인 무효청구이며, 인간생존의 지속성에 대한 기초적인 권리선언이 아닐 수 없다. 광주-순천행 버스에서 벌어진 사건은 좀더 민중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회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한 노파가 노래를 시작하고 다른 노인이 노래를 이어받아 30여명 승객들 저마다 가수가 됨으로써 고장난 시골버스 안은 ‘좌와 우/미움과 주검 널리던 땅’으로부터 화해와 상생의 공간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시의 바탕에 있는 것이 소박한 공동체주의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수준의 공동체정신은 현실을 끌고나가는 힘으로 실재한다기보다 망가진 현재를 위한 ‘오래된 미래’의 비전으로만 우리에게 빛을 발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대안의 구상을 위한 초석임을 분명히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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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찍이 벽초의 『임꺽정』(1928~40)이 대하소설의 전범으로 제시된 이후, 많은 작가들이 허다한 역작을 발표했다. 주요 작품을 연재완료 또는 완간 순으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남과 북』(홍성원, 1970~77), 『지리산』(이병주, 1972~78), 『객주』(김주영, 1979~81), 『장길산』(황석영, 1976~84), 『갑오농민전쟁』(박태원, 1977~86), 『타오르는 강』(문순태, 1975~89), 『태백산맥』(조정래, 1983~89), 『늘푸른 소나무』(김원일, 1993), 『토지』(박경리, 1969~94), 『녹두장군』(송기숙, 1981~94), 『혼불』(최명희, 1981~96), 『변경』(이문열, 1986~98) 등. 이 대하소설들과 『금강』 『남한강』 『백두산』 등 우리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장시들이 주로 1970~90년대에 씌어졌다는 사실과 그 시대가 민족·민주운동의 고조기라는 사실 사이에는 중대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