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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동양평화론」으로 본 안중근의 「장부가(丈夫歌)」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저서로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문학의 귀환』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 이 글은 원래 2009년 10월 26일 따롄대(大連大)에서 개최된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 주최의 안중근의거100주년 기념학술회의 ‘안중근과 동북아평화’에 제출한 발제문이다. 그뒤 개제(改題)·개고(改稿)하여 『민족문학사연구』 41호(2009)에 실었다. 이번에 다시 다듬었는데, 이것이 정본이다.

 

 

1. 동아시아론의 남상(濫觴)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지만,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아는 이는 많다고 하기 어렵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삔(哈爾濱) 역두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꼬꼬프체프(Kokopchev)와 만난 일본의 노정객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저격했다는 사건만 덩그렇고 그 문맥은 실종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적으로서 싸웠던 일본과 러시아가 전후에는, 만주개방을 요구하는 영·미와 만주회복을 꿈꾸는 중국 민족주의의 위협에 맞서, 오히려 연합하는1 모양을 보노라면 국익, 실상은 자본의 요구에 따라 춤추는 근대 국가이성의 마성(魔性)이 끔찍하다. 이 때문에, 만주를 두 나라가 대등하게 갈라 지배하는 데 합의하면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러시아의 외몽골 이익을 보장하는2 악마의 거래가 하얼삔회담인 점에서 이또오만 겨눈 안중근 의거의 의의는 제한될 수도 있다. 뒤에 이 사건의 문맥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에게 떠오른 감상 또한 그랬다. 대의가 빛나더라도 암살이란 방법을 조건 없이 긍정할 수 없다는 내 마음의 주저도 일조하였을 터다.

「동양평화론」(1910)이야말로 그의 진면목이다. 서문의 한 대목에서 나는 어느결에 옷깃을 여미게 되었다. “청년들을 훈련하여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령들이 희생처럼 버려졌으니, 피가 냇물을 이루고 시체가 땅을 뒤덮음이 날마다 그치지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상정이거늘, 밝은 세계에서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3 타고난 무골(武骨)로 전장(戰場)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가 실은 반전 또는 비공(非攻)의 평화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테러리스트가 결코 아니다. 집필 도중 형집행으로 미완에 그친 이 산문의 끝문장이 아프다. “아! 그러므로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의 환란을 기필코 면치 못할 것이다.”(215면) ‘독부(獨夫)4의 환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그는 아시아와 함께 서양의 침략을 저지하는 길이 아니라 거꾸로 서양의 앞잡이로서 아시아 이웃을 침략한 일본이 종국에는 자멸로 떨어질 것을 날카롭게 예언한다. 승승장구 속 득의양양한 외관에 일본의 안팎이 모두 현혹된 미망(迷妄)의 때에 그는 이또오를 처단함으로써 일본에 온몸의 경고를 발했던 것이다. 이또오뿐만 아니라 꼬꼬프체프에게도, 나아가 모든 약소민족을 이익의 제물로 삼으려는 모든 제국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서늘하고도 단호한 경종이 될 것은 물론이겠다.

지금 이 산문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은 황백인종의 경쟁”(206면)이라는 대목에서 보이듯 사태의 복잡성을 인종주의로 단순 환원한 점, “수백년 이래 악을 행하던 백인종의 선봉”(207면)으로서 러시아를 지목하는 방아론(防俄論)에 일방적으로 의존한 점, 일본에 대한 기대가 과잉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동학당을 “조선국의 서절배(鼠竊輩)”(208면) 즉 좀도둑으로 여전히 폄하한 점 등, 부르주아민족주의자 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자의 한계가 뚜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양평화론」은 조선의 독립이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해자인 일본에조차 이로운 동아시아 평화의 초석이란 점을 당당하게 밝힌 우리 동아시아론의 남상이다.5 요컨대 일본의 설득을 주목적으로 하되 그 결과 중국을 한층 감동시킨 그의 작은 독립전쟁은 인명살상을 최소로 제한한 평화의 전투, 또는 ‘동양평화’를 위해, 차마 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행한 소극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2. 우덕순의 「거의가(擧義歌)」

 

나는 그가 순국한 중국의 동북(東北)에서 열리는 이 드문 기념의 자리에서 안중근 노래를 다시 읽는 것으로 의거 100주년을 기억하고 싶다. 안중근 문학 가운데서도 결행을 앞둔 장부의 심사를 노래한 거사가(擧事歌)가 백미다. 그런데 이 노래는 안중근의 제1동지 우덕순(禹德淳, 1876~1950)의 화답가가 짝이다. 천주교도 안중근의 「장부가」에 대한 개신교도 우덕순의 「거의가」, 의거 직전 끓어오르는 격정을 다스리며 고매한 뜻을 함께 확인하는 두 동지의 교통이 아름답다.6

그럼에도 이 두 노래는 한국근대문학사의 바깥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친일개화론자 이인직(李人稙)의 『혈의루(血의淚)』(1906)를 근대문학의 효시로 떠받드는 오랜 관행 속에 애국자들의 노래는 설 자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노래들은 4월혁명(1960)을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전진과 함께 오랜 망명에서 귀환했다. 그 결정적 계기가 의병장들의 시가를 비롯한 저항시의 숨은 광맥을 본격적으로 발굴한 『항일민족시집』(1971)의 출간이다. 편자는 민족학교, 발행사는 사상사, 서문·발문이 무기명이란 점에서 짐작되듯이, 이 책은 거의 지하출판에 가깝다. 우리는 무기명의 발문을 통해서 이 시집이 함석헌(咸錫憲)·장준하(張俊河)·백기완(白基琓)·김지하(金芝河) 등 당대 민주파의 집합적 작업의 산물이란 점을 깨닫게 된다.7 민주파는 왜 항일시가들을 발굴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는가? 만주 인맥에 기반한 당대 개발독재파에 대한 저항의 정통성을 민주파는 친일개화론 또는 근대화론에 의해 침묵당한 다른 전통의 들어올림에서 구했던 것인데, 그 반향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드러남 자체가 경이였던 이 시집의 역사적 출현 속에서 안중근과 우덕순의 거사가 역시 빛을 발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두 노래 모두 정본이 확정적이지 않아, 무엇보다 앞서 원전비평이 요구된다. 그중 나는 먼저, 불완전하게 전승된 우덕순 노래의 복원을 통한 정본화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1994). 이 노래는 송상도(宋相濤, 1871~1946)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 국한혼용문으로 채록되어 실림으로써 인멸의 위기를 넘겼는데, 안타깝게도 전문을 수록하지 않았다.

 

맛낫도다맛낫도다,怨讐,너를맛낫도다,너를한번맛나고자,一平生에願했지만,何相見之晩也런고,너를한번만나랴고,水陸으로幾萬里를,或은輪船或은火車,千辛萬苦거듭하야,露淸兩地지낼때에,안질때나셨쓸때나,仰天하고祈禱하길,살피소셔살피소셔,主耶蘇여살피소서,東半島의大帝國을,내願대로救하소서,於乎라奸惡한老賊아,우리民族二千萬을,滅亡까지씩혀노코,錦繡江山三千里를,소리없이뺏노라고,窮凶極惡네手段을-中略-至今네命끊어지니,너도寃痛하리로다,甲午獨立씩혀노코,乙巳締約한然後에,오날네가北向할줄,나도亦是몰낫도다,德딱그면德이오고,罪犯하면罪가온다,네뿐인쭐아지마라,너의同胞五千萬을,오날붓터始作하야,하나둘식보난대로,내손으로죽이리라,8

 

그런데 정교(鄭喬, 1856~1925)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이 노래가 한역(漢譯)으로 실려 있음을 발견했다. 두 본을 대조해보니 국한혼용문에는 중략 부분 이외에도 마지막 결사가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이 노래의 전모를 확인하게 되었다.

 

중략: 大公無私至仁極愛我之主,大韓民族二千萬,如均爲愛憐,使逢彼老賊於如此停車場,千萬番祈禱,忘晝夜而欲逢,竟逢伊藤,

결사: 嗚呼我同胞,一心專結後,恢復我國權,圖富國强兵,世界有誰壓迫,我等之自由爲下等之冷遇,速速爲合心持勇敢之力,盡國民之義務,9

 

거의 완벽한 4음보 가사체에, 잣수도 거의 정연한 4·4조라는 점에 근거하여 우덕순 노래를 다음과 같이 복원했던 것이다. 가능한 한 구어의 맛을 살려 현대표기법으로 고치고, 음보를 단위로 띄어쓰기하고, 새로 찾아낸 부분을 다시 손본 내용은 괄호로 표시했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너를 만났도다

너를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 만야런고10 너를한번 만나랴고

수륙으로 기만리를 혹은윤선 혹은화차

천신만고 거듭하야 노청양지 지낼때에

앉일때나 셨을때나 앙천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야소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원대로 구하소서

어호라 간악한 노적아

우리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없이 뺏노라고

궁흉극악 네수단을

(대공무사 지인극애 우리주님 대한민족

이천만을 고루고루 사랑하사 저노적을

이역에서 만납시사 천만번을 기도하고

밤낮잊고 보잤더니 마침이등 만났구나)

지금네명 끊어지니 너도원통 하리로다

갑오독립 시켜놓고 을사체약

한연후에 오날네가 북향할줄 나도역시

몰랐도다 덕닦으면 덕이오고 죄범하면

죄가온다 네뿐인줄 아지마라 너의동포

오천만을 오날부터 시작하야 하나둘씩

보난대로 내손으로 죽이리라 (오호라

우리동포 일심으로 전결한후 우리국권

회복하고 부국강병 도모하면 이세계에

그누구가 우리자유 압박하여 하등으로

냉우할고 빨리빨리 합심하여 용감력을

가지고서 국민의무 다해보세)11

 

이 노래는 애국적 직절성(直截性)이 핵이다. 특히 느낌의 현재에서 붓을 일으킨 그 서두는 탁월하다. 평화의 이름으로 조국을 침략한 ‘이등’에 대한 울울한 감정이 일시에 폭발한 듯, 시적 자아는 바로 그를 만난다. 아니 이미 그를 만났다. 얼마나 간절했기에 상상이 바로 현실로 이행하고 마는가? 그런데 노래 전체는 재발견 당시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역시 감정의 직접적 고조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감정을 관통하는 기하학적 추상이 너무 단순한 민족주의다. 이또오 히로부미와 일본민족에 대해 거의 종족적 수준의 원한 또는 복수에 지펴 있기도 하거니와, 시적 자아가 꿈꾸는 ‘부국강병’ 또한 제국주의의 극복이라기보다는 그 추종에 가깝다.12

 

 

3. 안중근의 「장부가」

 

이 점에서도 안중근의 거사가가 주목된다. 그런데 안중근의 노래 역시 본(本)마다 이동(異同)이 없지 않다. 그중 그가 옥중에서 직접 쓴 한문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1909~10)에 실린 것이 가장 믿을 만한데, “때에, 나그네 등불 차가운 침상 위에 홀로 앉아, 잠깐 장차 할 일을 생각하매, 강개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우연히 한 노래를 읊어 가로되,(時, 獨坐於客燈寒塔上, 暫思將行之事, 不勝慷慨之心, 偶吟一歌曰,)”라고 이 노래의 유로(流露)경위가 생생히 드러난 점이 더욱 아름답다. 다만 3행과 2행이 바뀌어 있는 등 보통 유행하는 본과 약간 다른 게 문제다.13 다행히 제3의 자료가 있다. 이은상(李殷相)이 언급한 “일본 법정에서 압수된” 친필로 쓴 한문본과 한글본 거사가14가 그것이다. 이 자료들을 나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출간한 도록에서 확인한바, ‘明治 四十二年 檢領 第一號’와 ‘安應七 作歌’가 앞뒤로 붙은 이 문서에 수록된 거사가가 정본이라고 해도 좋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처세혜 기지대의)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시조영웅혜 영웅조시)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웅시천하혜 하일성업)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동풍점한혜 장사의열)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분개일거혜 필성목적)

鼠掏○○兮 豈肯比命 (서절○○혜 기긍비명)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기탁지차혜 사세고연)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동포혜 속성대업)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만세혜 대한독립)

萬歲萬萬歲 大韓同胞 (만세만만세 대한동포15)

 

더욱이 이 노래 한글본의 존재야말로 소중하다. 그의 거사가에 대해 아쉬웠던 점이 바로 한시라는 데 있었으니, 역시 근대문학은 한문학의 해체 위에서 꽃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부가세상에쳐ᄒᆞᆷ이여 그ᄯᅳᆺ이크도다

ᄯᆡ가령웅을지음이여 령웅이ᄯᆡᄅᆞᆯ지으리로다

텬하를웅시ᄒᆞᆷ이여 어니날에업을일울고

동풍이졈졈차미여 장사에의긔가ᄯᅳ겁도다

분ᄀᆡ히한번가미여 반다시목을이루리로다

쥐도젹 ○○이여 엇지즐겨목숨을비길고

엇지이에이를쥴을시아려스리요 사셰가고연ᄒᆞ도다

동포동포여 속히ᄃᆡ업을이룰지어다

만셰만셰여 ᄃᆡ한독립이로다

만셰만만셰여 ᄃᆡ한동포로다16

 

한문본과 한글본 둘을 비교하면 역시 전자가 먼저임을 알겠다. 그러니까 후자는 전자의 번역이다. 그런데 안중근 자신이 한글본을 직접 만들었다는 점이 종요롭다. 한문본의 뜻을 시인 자신의 의도대로 정확히 알게 해준다는 점뿐만 아니라, 근대 국문시가의 연진(演進)과정에서 차지하는 바 의의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도 최남선(崔南善)의 신체시「海에게서 少年에게」(1908)를 한국 신시의 효시인 양 떠받드는 관행이 통용되곤 하지만,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이 작품은 근대시는커녕 시로서도 미달이다. 주로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마지막 광망(光芒)을 뿌린 애국적 한시들을 차치하고도, 이 시기의 국문시가는 옛 형식(시조와 가사)에 애국의 의기를 담은 노래들이 주류였다는 점에서, 안중근의 한글거사가야말로 그 백미다. 이상주의적 열정이 오랜 형식과 만나면서, 더구나 한글로 번역되는 경로를 통해서 이룩된 미묘한 이행의 자리에 위치한 이 한글거사가는 근대자유시로 가는 길에서 흥미로운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다. 한시의 번역과정에서 태어난 이 노래와 함께 주목할 작품이 호세 리살(José Rizal)의 「임종사」다. 1898년 스페인총독부에 의해 처형된 필리핀의 고매한 애국자가 남긴 이 절명시는 안국선(安國善)이 번역한 『비율빈전사(比律賓戰史)』(1907)에 수록되었는데, 아마도 한국에 소개된 최초의 근대자유시일 것이다.17 이때 뿌려진 씨앗들이 성숙한 형상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네이션(nation) 탄생을 고지한 3·1운동(1919)을 기다려야 했다. “꽃은 떨어진다/님은 탄식한다”, 이처럼 인상적인 마무리를 선보인 김억(金億)의 「봄은 간다」(1918)와,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로 시작되는 황석우(黃錫禹)의 「봄」(1918), 이미 자유시의 효시로서 모자람이 없지만 아직은 상징시의 번역풍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이 두 시를 결정적인 고비로, 주요한(朱曜翰)의 「불놀이」(1919) 이후 한국근대시는 마침내 자유와 해방의 격정을 폭포수 같은 리듬에 실어 분출하였던 것이다.

우리 근대시 탄생의 숨은 씨앗의 하나인 안중근의 노래를 작품으로서 분석하기 전에 그 주변을 잠깐 살펴보자. “몸은 삼한에 있어도 이름은 만국(身在三韓名萬國)”18이라고 기린 위안 스카이(袁世凱)를 비롯하여 장 삥린(章炳麟)·량 치차오(梁啓超) 등 유수한 중국 지식인들이 안중근의 실천을 높이 들어올렸는데, 전국시대의 위대한 자객 형가(荊軻, BC 227년 몰)와 예양(豫讓)에 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량 치차오의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은 대표적이다.

 

萬里窮追豫讓橋 千金深襲夫人匕19

만리까지 추적한 끝에 예양은 다리 아래 숨고

천금으로 얻은 부인의 비수를 옷 속 깊이 갈무리했네

 

앞의 행은 천신만고 끝에 조양자(趙襄子)를 죽일 기회를 잡았지만 말이 날뛰어 결국 실패하고 자살한 예양의 고사(故事)고, 뒤의 행은 연태자(燕太子) 단(丹)이 서(徐)부인의 비수를 사 진시황(秦始皇)을 시해하러 가는 형가에게 준 고사를 취한 것이다. 이 모두 사마 천(司馬遷)의 빛나는 문필로 후세에 전해진 천고의 자객들인데, 특히 후자는 거사가를 남긴 점에서 안중근과 더 직접적으로 연계된다.

 

風蕭蕭兮 바람소리 쓸쓸함이여

易水寒 역수물 차가와라

壯士一去兮 장사 한번 감이여

不復還 다시 오지 못하리니20

 

간결함으로 자객의 고독한 자세가 더욱 묻어나는 이 노래를 안중근의 것과 비교하면 후자가 긍정적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양자 모두 거사 뒤를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자는 적막하고 후자는 생동적인가? 전자는 실패하고 후자는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닐 터인데, 아마도 후자가 단순한 자객이 아니라 경륜을 지닌 장부라는 데 그 까닭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중근에게는 큰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형가의 「역수가」와 함께, 한 고조(漢高祖, BC 247~BC 195)의 「대풍가(大風歌)」도 관여하고 있는 느낌이다.

 

大風起兮 雲飛揚 큰바람 일어남이여 구름이 날리도다

威加海內兮 歸故鄕 위엄 해내에 더함이여 고향에 돌아오도다

安得猛士兮 守四方 어찌 용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꼬21

 

형가의 「역수가」와 한 고조의 「대풍가」를 염두에 두고 안중근의 「장부가」를 다시 읊조려 보면, 「장부가」가 「역수가」의 비장함과 「대풍가」의 헌앙(軒昻)함을 함께 지닌 특이한 작품이란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선 앞에 인용한 한글본의 행 앞에 번호를 붙이고, 가능한 한 현대 맞춤법으로 고쳐놓고 그 숨결을 따라가보자.

 

1-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2-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3-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이룰꼬

4-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5-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다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6-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7-어찌 이에 이를 줄을 시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8-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9-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10-만세 만만세여 대한동포로다

 

우선 3행의 ‘어니날’의 ‘어니’는 표준말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살렸다. 표준말 ‘어느’ 보다 구어체 ‘어니’가 한글본 노래의 호흡에 더 맞춤하다. 5행의 ‘반다시’도 구어체를 그대로 살렸다. 표준말 ‘반드시’ 보다 ‘반다시’가 더 의지적이다. 6행의 ‘○○’은 물론 이또오 히로부미를 가리킨다. 왜 안중근은 그의 이름을 숨겼을까?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일인지라 뭔가 두려워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닐 터이다. 나는 ‘○○’에서 안중근의 착잡한 심경을 본다. 처단대상일지라도 그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자칫 테러로 보일 우려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알다시피 안중근은 복수로 이또오를 저격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한편 이또오를 연민하는 안중근의 그 마음을 접수하면서 ‘○○’을 풀기로 했다. ‘이또오’가 아니라 ‘이등’을 선택했다. 한자로 된 일본의 고유명사를 일본식으로 독음하게 된 것이 최근이라는 점에서 안중근도 ‘伊藤’을 ‘이또오’가 아니라 ‘이등’으로 읽었을 것이 거의 틀림없을 터다. 7행의 ‘시아렸으리오’도 3, 5행의 예를 따라 표준말 ‘헤아렸으리오’로 고치지 않고 구어체로 두었다.

그럼 이제 이 노래를 무엇보다 작품으로서 접근해보자. 총 10행으로 이루어진 이 노래는 뜻이 큰 장부로 시적 자아를 조정하는 시작부터 기상이 높다. 그 기상은 2행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영웅과 때가 쌍방향적이라는 당당한 언술을 통해서 인간의 시간적 피구속성(被拘束性)을 승인하면서도 시간을 창조할 수도 있는 인간의 주동성을 더욱 강조하는 인식의 틀을 엿보게 한다.22그리하여 그는 천하를 웅시한다. 영웅의 눈으로 세상을 봄을 가리키는 ‘웅시’에서 짐작되듯, 그는 세계 형세를 예의 주시하며 ‘업’을 이룰 그날을 헤아린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업’이란 이 노래의 끝부분에 보이듯, ‘대한독립’이다. 그런데 ‘대한독립’이 동양평화의 기초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것이 단순한 민족주의의 실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대한독립을 기틀로 삼아 동양의 연대를 이룩함으로써 서양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는 한편 더 나아가 평화의 공동체 건설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3행을 마무리하는 의문문에 묻은 한점의 회의가 한걸음 진전된 4행에서 돌연 어조가 바뀐다.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의기의 대비란 사실 어떤 초조함의 표출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등’을 처단할 목표 아래 분개히 떨쳐나서서 그 완수를 다짐한다(5행). 6행이 까다롭다.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득이 ‘이등’을 처단하는 데 목숨을 쓰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 일은 목숨 걸 정도가 아니라는 그의 높은 자부심이 차라리 쓸쓸하다. 그는 끝내 이또오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일에 불편함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그 불편한 심사는 7행으로 이어진다. ‘나도 사태가 이에 이를 줄은 몰랐다’는 탄식처럼 동양평화를 내다보며 한국 독립전쟁에 참여할 것을 꿈꾼 그가 결국 그 큰뜻을 접고 ‘이등’을 쏘아 죽이는 일에 나설 수밖에 없는 사정을 침통히 수용한다. ‘일의 형세가 본디 그러하다’ 또는 ‘일의 형세가 정말로 그렇다’로 풀 “사세가 고연하도다”에 짙게 밴 체념은 더 적극적으로 보면 자유와 필연이 만나는 일종의 운명애(amor fati)가 아닐까. 그런데 7행은 중의적(重意的)이기도 하다. 숨은 주어를 안중근이 아니라 이또오로 상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안팎을 횡행하며 이웃나라들을 핍박하던 권력놀음에 빠져 자신의 돌연한 죽음을 예견조차 못한 이또오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또한 착잡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또오의 죽음을 ‘본디 그러한’일, 즉 필연의 사태임을 냉엄히 지적한다.23 8행은 말하자면 동포들에게 남기는 유언이다. 그가 못 이룬 대업, 즉 한국독립을 기초로 한 동아시아의 평화가 깃들이는 날의 도래를 위해 매진해줄 것을 위촉하던 것이다. 그리하여 9, 10행은 미래의 대한독립과 대한동포에 대한 가장 열렬한 헌사로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대한독립보다 대한동포가 뒤에 온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독립사업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뒤에 약속처럼 도래할 평화의 세상을 열어가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9행과 10행에서 반복되는 ‘만세’가 약간 변주되는데, 이는 안중근의 예민한 감각을 잘 보여준다. 9행의 “만세 만세여”를 10행에서 “만세 만만세여”로 변형함으로써 이 노래에 종지부를 찍은 것인데, 그는 노래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를 본능적으로 체득하던 것이다.

이상의 성근 분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한글본 「장부가」는 만만치 않은 문학성을 내장하고 있다. 그 문학성이 동양평화론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친일개화론 또는 무국적의 근대화론, 그리고 복벽(復ᄋᆞᆫ)의 항일론 또는 저항적 민족주의에 지배된 시가들이 양산된 시대에 출현한 이 노래는 이미 21세기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4. 21세기의 ‘동양평화론’을 위하여

 

「동양평화론」의 눈으로 한글본 「장부가」를 음미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듯이, 안중근은 고독한 자객이 아니다. 그는 독립전쟁의 명예로운 전사였다. 그럼에도 안팎으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결국 이또오를 저격하는 궁핍한 방법, 즉 자객의 형식을 부득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거사 전후에 그가 왕성한 문서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일에 열중한 것도 오해를 저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객으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전쟁포로의 신분에 합당하게 대접하라는 안중근의 요구는 일본에 의해 묵살되었거니와, 이 사건을 대한제국의 식민화를 다그치는 데 재빨리 악용한 약삭빠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에 횡행했다. 테러는 조직적인 반혁명을 초래한다는 원칙을 확인해주듯이, 사건 발생 1년도 지나지 않아 이루어진 국치로 말미암아 더욱 그는 테러리스트로 규정되곤 하였다. 그런데 이는 단견이다. “중-조 인민의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본세기 초 안중근이 하얼삔에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격살한 때로부터 시작됐다”24는 저우 언라이(周恩來)의 지적대로 안중근의 거사는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의 운동에 있어서도 그 싱싱한 자극으로 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그는 성공한 형가나 예양이 아니다.

이또오를 처단한 그 마지막 전투 또한 테러의 형식을 빌린 독립전쟁이었다. 그런데 그의 독립전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한국의 독립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동양평화’로 가는 새 역사의 출발일 뿐이다. 그 사상의 고갱이를 담은 「동양평화론」과 한글본 「장부가」야말로 그가 목숨으로써 우리에게 전달한 위대한 유산이다. 21세기의 동양평화론, 즉 한반도의 통일과정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론을 창발적으로 구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오늘날 안중근을 진정으로 계승하는 길임을 명념하고 싶다. 지역평화의 기초로 되는 남북 국가연합(confederation) 건설을 위한 ‘대한동포’들의 분발과 이웃나라 시민들의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형국에 열리는 이번 회의가 그 종요로운 디딤돌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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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古屋哲夫 『日露戰爭』, 東京: 中央公論社 1980, 230면. 알다시피 러일전쟁에서 영·미는 만주개방을 약속한 일본을 지지했다.
  2. 같은 책 237면.
  3. 안중근 「동양평화론」, 최원식·백영서 엮음 『동아시아인의 ‘동양’인식: 19-20세기』, 문학과지성사 2005, 205면. 이하 이 글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4. ‘독부’란 인심을 잃어 도움받을 곳 없는 외로운 남자 또는 폭정으로 백성에게 외면당한 군주로,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5. 국치(1910)를 바로 눈앞에 둔 절박한 시점에 출현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이어, 3·1운동(1919)의 열기를 계승한 신채호(申采浩)의 「조선독립급동양평화(朝鮮獨立及東洋平和)」(1921), 그리고 해방의 이상과 분단의 현실 사이에서 건국의 길을 모색한 안재홍(安在鴻)의 「신민족주의의 과학성과 독립의 과제」(1949)가 주목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저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2009)의 163~65면과 152~53면을 참고할 것.
  6. 안중근과 우덕순은 거사 4일전 하얼삔에 도착하여 동지 유동하(劉東夏)의 친척 김성백(金聖伯) 집에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노래를 불러 다짐했다. 이 노래들은 1909년 10월 23일 하얼삔의 김성백 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안중근 연보」, 『의거 순국 100년 安重根』 예술의전당 2009, 200면.
  7. 「부끄러움을 삼키며」, 민족학교 엮음 『항일민족시집』, 사상사 1971, 134~35면.
  8.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74, 155~56면.
  9. 정교 『대한계년사: 하』, 국사편찬위원회 1974, 365면
  10. ‘何相見之 晩也런고’는 ‘서로 보는 게 어찌 그리 늦었는고’란 뜻.
  11. 졸고 「우덕순 노래의 복원」(1994)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소명 2003, 265~66면. 신용하(愼鏞廈) 엮음 『안중근 유고집』, 역민사 1995, 230~31면에는 출처 불명의 이본(異本)이 실려 있는데, 장황하게 길어졌다. 윤병석(尹炳奭) 편저 『대한국인 안중근: 사진과 유묵』, 안중근의사숭모회 2001에도 이본 두 종류(「우덕순가」와 「거의가」)가 수록되었는데, 전자는 축약본이고 후자는 신용하 책에 실린 것과 같다. 구전되면서 생긴 이본들로 추정된다.
  12. 참고로 이번에 확인한 거사 이후 우덕순의 행적을 간략히 덧붙인다. 안중근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만주에서 머물다가 1945년 12월에 귀국한(『동아일보』 1945.12.17) 그는 일민주의(一民主義)를 내건 대한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다가(『대동신문』 1948.11.16) 6·25때 납북되어 1950년 9월에 처형되었다(『조선일보』 1950.11.10)고 한다. 이로써 보건대 당시 그는 극우에 가깝다.
  13. 「安應七歷史」, 신용하 엮음, 앞의 책 154면.
  14. 이은상 옮김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중근의사숭모회 1982, 168면.
  15. 윤병석 편저, 앞의 책 187면.
  16. 같은 곳. 이 노래 말미에 한글로 쓴 ‘안응칠 작가’가 뚜렷하다. ‘작가’는 물론 ‘作歌’일 것이다.
  17. 졸고 「아시아의 연대: 『비율빈전사』에 대하여」(1987)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소명 2002, 204~10면.
  18. 이은상 옮김, 앞의 책 591면. 전문은 다음과 같다.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安重根義士 輓」. 그런데 뤼순감옥 기념관에서 이 시와 유사한 쑨 원(孫文)의 시를 발견했다. “功蓋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弱國罪人强國相 縱然易地亦藤侯”. 고증이 필요한 대목인데, 후일을 기약한다.
  19. 박은식(朴殷植) 『안중근』, 이동원(李東源) 옮김, 한국일보사 1994, 93면. 번역은 내가 다시 다듬은 것. 이는 백암(白巖) 박은식이 중국에서 발간한 『안중근전』(1920)을 번역한 책인데, 이 책에는 중국지식인들의 안중근 관련 시문들이 다수 수습되어 있다.
  20. 『史記』 「刺客傳」, 『二十五史』1, 上海古籍出版社 1991, 284면. 번역은 나의 것.
  21. 『古文眞寶』 前集 卷之八, 世昌書館 1966, 66면. 번역은 나의 것.
  22. 이 대목은 영웅과 시세(時勢)의 관계에 대한 동아시아 계몽주의자들의 논의를 연상케 한다.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가 영웅이라는 항해사보다 시세라는 증기선을 더 강조한 반면, 량 치차오는 시세라는 거대한 바람보다 파도를 만들어내는 교룡(蛟龍)/고래라는 영웅의 역할에 더 주목한 것을 상기할 때(백지운 「『자유서』를 구성하는 텍스트들」, 『중국현대문학』 제31호, 2004, 92~99면), 영웅이 때를 만든다는 데 방점을 둔 안중근은 량 치차오에 더 가깝다.
  23. 장 삥린 또한 시 「弔伊藤博文」에서 이또오를 제가 만든 법에 치여 결국 죽음에 이른 진(秦)의 재상 상앙(商ᄡᅡᆨ)에 비유한 바 있다. 박은식, 앞의 책 168~69면.
  24. 따롄대 유병호(劉秉虎) 교수에 의하면 이 말은 북조선의 최용건(崔庸健, 1900~76)이 1964년 하얼삔을 찾았을 때 회동한 저우 언라이 수상의 발언이라고 한다. 동북항일연군에서 활약한 최용건은 해방후 북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등의 핵심 요직을 거쳐서 1972년 국가 부주석에 취임한 군인정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