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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완득이』 이후

 

 

오세란 吳世蘭

어린이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역사를 소재로 한 어린이문학, 새롭게 읽기」 등이 있다. bookyoh@hanmail.net

* 이 글은 2009년 11월 세교연구소 정기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당일 토론에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1. 청소년문학은 없다?

 

‘청소년문학’은 대체 무엇인가. 청소년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도 청소년문학의 개념은 머리 아픈 문제다. “아동청소년문학의 개념은 아동청소년의 경험을, 아동청소년의 관점에서, 아동청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표현한 문학으로, 아동청소년을 독자로 상정하고 창작된 작품”1 또는 “특별한 소설 문법을 따로 가진다기보다는 청소년을 주체로 혹은 독자로 주목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인 장르이며, 청소년을 당당한 자의식을 가진 주체로 인정하고 접근하려는 의지가 청소년문학의 본질적인 부분”2이라는 정의는 참으로 피상적인 문구다. 외국처럼 청소년을 위한 소설장르가 질적·양적으로 성숙해 독립된 영역으로 자리잡은 상황도 아니니 때로는 우리에게 “청소년문학은 없다”는 냉정한 판단에 그냥 손을 들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청소년문학은 성립이 어렵다고 단정하기에는 뭔가 미진함이 남는다. 오랫동안 청소년에게 제공되던 ‘교육으로서의 문학’만 계속 강요하는 것은 어른 세대가 청소년에게 가하는 일종의 문화폭력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청소년주체도 빠져 있고 독자에게도 다가서지 못하는 근현대 한국소설이나 어른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작품만을 재활용한다면 청소년은 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와 안식, 그리고 감동을 어디서 찾을까 싶은 것이다.

재작년 김려령(金呂玲)의 『완득이』(창비 2008)가 청소년소설의 붐을 일으켰을 즈음에 나온 또하나의 작품이 있다. 황석영의 성장소설 『개밥바라기 별』(문학동네 2008)이 그것으로, 작가는 후기에서 “『바리데기』를 출간한 후 전혀 새로운 젊고 어린 독자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작품”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과연 이 소설과 청소년 독자는 얼마나 교감할 수 있을까 싶은데, 언론에서는 이 작품을 청소년을 위한 작품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소설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시에 서술자의 시선에 의해 그 사건이 해석되어 독자에게 전달된다. 성인이 되어 십대 때의 자신을 돌아보는 ‘회고담’류 성장소설에서는 소설 속 미세한 시선의 낙차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생성한다. 『개밥바라기 별』 역시 십대의 경험자아 ‘준’과 이미 성인이 되어 청소년 시절의 준을 돌아보는 서술자아로 소통 층위를 나눌 수 있으며, 준과 그의 친구들이 번갈아 서술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시선은 준에 대한 집중조명을 통해 준의 젊은 시절을 낭만적으로 윤색한다. 십대인 경험자아의 고민이 독자에게 전달되기보다 이 모든 사건을 뛰어넘어 성장한 성인 서술자가 들려주는 나르씨시즘이 강한 회고가 주를 이루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되돌아보는 자에게는 그 고통조차 ‘기쁜 우리 젊은 날’로 왜곡 기억되게 마련이다. 결국 『개밥바라기 별』은 십대를 주체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 준의 기억 속에서 ‘대상화된 십대’를 그린 작품이다. 나는 『개밥바라기 별』이 청소년소설이라는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 작품은 또하나의 성장소설일 뿐이며, 한국에서 청소년소설을 대하는 시선은 이렇듯 여전히 혼란스럽다.

현재 청소년문학이라는 용어는 발견된 것도, 연구된 것도 아니며 ‘기획’된 것이라는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3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청소년문학은 1990년대 후반부터 청소년문화를 위해 꼭 필요한 장르라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치열하게 개척된 면도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척을 통해 비로소 청소년을 위한 문학적 장이 형성되었다. 사실 청소년문학은 2008년에 출간된 『완득이』 이전부터 성장해왔다. 그러다 『완득이』에 이르러 비로소 청소년독자를 포함한 일반 독자들에게 큰 파급력으로 다가왔다. 『완득이』는 실제로 폭넓은 독자층에게 ‘청소년문학’이라는 장르를 알린 첫 작품이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현장에서 사용되는 학생용 추천도서 목록에 청소년소설이 실리는 비율은 아직 미미한 형편인데, 『완득이』만은 거의 모든 학교가 추천도서로 채택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모든 작품에 성과와 한계가 있듯 『완득이』에도 장단점이 공존한다. 그런데 『완득이』에 대한 비평에는 작품 외적인 담론이 몇가지 존재한다. 그것은 첫째, 『완득이』를 통해 청소년소설을 눈여겨보게 된 외부의 평가로 과연 청소년소설이 성장소설과 무엇이 다른가의 문제이며 둘째, 『완득이』를 기점으로 발생한 청소년소설이 대중독자를 의식한 장르문학에 가까워지는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마지막으로 『완득이』 이후로 청소년소설이 계속 채워나가야 할 부분에 대한 검토이다.

 

 

2. 청소년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완득이』 이후 텔레비전 독서 프로그램이나 신문 서평에서 청소년소설을 다루는 경우가 생겼다. 그런데 이럴 때 청소년소설이라는 단어 대신 주로 ‘성장소설’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저널리즘의 속성상 대중에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라 짐작되지만 아직까지 청소년을 위한 소설은 곧 성장소설이라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학계에서도 상황은 비슷한데, 비슷한 텍스트를 분석하면서도 ‘성장소설 연구’나 ‘소년소설 연구’ ‘청소년소설 연구’ 등 논문의 제목마저 혼란스럽다. 청소년소설의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까닭도 있겠으나 새로운 문학장르를 학문의 장으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계의 경직되고 보수적인 관습 때문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등장인물이 사건을 겪어가며 변화 혹은 성숙에 이르는 장르다. 근대소설 속 주인공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지배이념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추구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따라서 근대소설은 본래 성장소설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성장이 단지 청소년만의 특징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청소년소설을 ‘성장소설’이라 부르는 이유는 대략 두가지인데, 하나는 청소년소설이 성장소설 장르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청소년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성장’이라는 통념을 가진 경우다.

청소년소설에서 성장을 다루는 작업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성장의 기의(記意)는 사실상 고정돼 있지 않으며, 시대나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 가령 통과의례의 개념을 주조로 하는 ‘이니시에이션 스토리’(initiation story)가 복잡한 현대사회에 여전히 절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는 고민해볼 문제다. 성장은 우리 시대에서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으로, 다양하게 의미화되어 표출되기 때문에 그것을 다룬 작품의 주제와 내용, 형식, 인물, 사건, 배경 등도 그만큼 다양해지고, 성장의 기의 역시 다양하게 환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니시에이션 스토리와 함께 성장소설의 대표적 갈래인 교양소설의 경우 주인공이 근대적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진입하기 위한 문화적 교양과 주체 정립의 시련을 겪는 과정을 제시하는 유형이다. 따라서 근대를 형성한 철학을 깊숙이 내면화했으며 근대사회를 이룬 가치들이 바탕이 된다. 성장소설의 이러한 측면 때문에 현대사회에서는 주체가 근대적 욕망을 회의하며 성장의 의미를 재고하는 반성장소설이 출현하게 된다. 이는 성장소설에 내재된 근대성이 어떤 의미로든 재평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장소설에 내재된 철학은 오늘날 청소년소설에서 고민해야 할 담론보다 훨씬 좁은 스펙트럼을 지닌다. 청소년소설은 성장소설의 근대적 성격에서 출발해, 근대사회의 산물인 ‘성장’에 대한 개념 자체를 회의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현대 청소년소설은 근대사회에서 발생한 청소년의 개념을 한층 넓은 각도에서 조망하기 때문이다. 성장소설이 근대의 산물이라면 청소년소설은 근대와 탈근대의 철학을 모두 품을 수 있는 장르이며 이것은 좀더 세밀하게 탐색되어야 할 부분이다.

구병모(具竝模)의 『위저드 베이커리』(창비 2009)는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며 대중문학적 코드로 변환된 청소년소설이지만 이 소설에서 정작 주목할 점은 기법이 아니라 메씨지다. 작품은 독자들에게 성장에 관한 기존의 따뜻하고 낭만적인 환상을 전혀 제공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어두움과 악, 불행을 견디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이 작품이 기존 성장소설과 변별되는 지점은 힘든 통과의례를 거쳐 나의 성장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를 지나서도 여전히 견뎌야 할 시간은 지속된다는 것을 환기하는 데 있다. 그것이 낭만과 결별한 어른에게 찾아드는 과제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죽고, 어린아이가 품었던 가족의 환상도 깨진 자리에서 개인이 탄생한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어른들을 완벽하게 불신했기에 탯줄을 끊을 수 있었던 ‘나’가 살아가는 방식은 두가지로 제시된다. 자신이 원하는 과거로 돌아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법과자 머랭 쿠키를 먹는 y의 방식은 과거의 기억을 바꾸는 것이다. 머랭 쿠키를 먹지 않는 n의 방식은 현실을 견디는 것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과거를 바꿀 수는 없기에 결국 이 자리를 지키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오늘을 버티라고 명한다.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악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살아야 함을 각인한다는 점에서 성장은 비극성을 내포한다.

얼마전까지 청소년소설과 함께 출판계를 흔들었던 칙릿(chicklit) 역시 성인 여성의 성장담이다. 칙릿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성장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성장이 청소년의 전유물이나 청소년기에 완수되어야 할 과정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남겨진 숙제라는 것이다. 전아리의 『직녀의 일기장』(현문미디어 2008)은 칙릿의 고등학생판이다. 작품에서 직녀는 이미 세상이 우습다는 것을 파악해버린 십대다. 조숙한 소녀인 직녀의 마음은 ‘어른들이 기대하는 성장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꿈이 뭐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전국 방방곡곡에 수백대의 음료수 자판기를 세우고 차례로 도시를 순회하며, 자판기에 쌓인 돈을 회수하러 다니는 것”(116면)이라 대답하는 장면은 어른이 청소년에게 기대하는 성장 혹은 이상적인 직업관은 이미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는 막연한 가치임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다음 생에는 바위로 태어나고 싶다. 햇살이 잘 비추는 계곡에 육중한 몸을 풀어놓고 평생 잠만 자는 바위. 무엇보다 바위에 끌리는 것은 입과 귀가 없다는 점이다”(159면)에서 알 수 있듯 직녀는 ‘무엇을 하기’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는’ 나이브한 삶에 더 무게를 둔다. 빨리 어른이 되어 뭔가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꿈꾸기보다는 그냥 ‘날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는 심정의 토로는 어른들이 기대하고 강요하던 기존의 성장을 거절하거나 재고하겠다는 십대의 의사표현이다. 변화하는 성장의 개념을 놓고 보자면 직녀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기대하던 성장이 무너진 자리에 서 있다. 직녀의 모습에서는 ‘성장해서 득될 게 없는’ 조숙한 아이의 속내가 읽힌다. 이같이 변화된 성장의 기의들은 일찍이 1990년대 이후로 일반문학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코드다. 기존 사회의 편입을 거부하는 장정일의 성장소설 『아담이 눈뜰 때』(김영사 1992)나 성장을 거절하고 소녀로 남고자 하는 욕망을 그린 배수아의 작품, 현실을 비껴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주로 등장하는 백민석의 작품이 그러하다.

청소년소설 작가인 이현(以玄)의 단편 「그가 남긴 것」(『영두의 우연한 현실』, 사계절 2009)은 이 작품을 성장소설로 보느냐 청소년소설로 보느냐에 따라 결말에 주인공의 입장이 달라진다. 작품은 병들어 무능하고 책임감도 없던 아버지를 둔, 그래서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큰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정후와 정아 남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아버지의 부재’ 혹은 ‘좋은 아버지의 부재’로 요약되는 한국 성장소설의 속성과 맥을 같이하면서, 그 아버지가 이제는 사라지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원망(願望)을 담고 있다. 다음은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이다.

 

“아빠는…… 우리한테 뭘 남겼을까?”

 

정후가 가만히 물었다. 정아의 흐느낌이 여백을 메웠다. 그래도 뭔가 남겨주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 읽은 책 중에 그 얘기 기억나? 부자 아버지가 삼형제에게 유산을 남겨주잖아. 과수원인지, 밭인지……, 암튼 그 곳에 보물이 숨어 있다고. 그런 것처럼 말이야. 라고 정후가 읊조렸다. 그래서 결국 보물이 있었던가? 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하도 오래전 이야기라 기억이 잘 안 나네(174~75면).

 

정후의 궁금증을 풀어주자면 이야기 속 부자 아버지는 삼형제에게 유형(有形)의 보물은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다만 보물을 찾기 위해 밭을 열심히 파다보니 작물이 알차게 여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사회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보물을 주지도 않고 이야기 속 부자 아버지처럼 밭을 갈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메마르고 거친 땅을 물려주면서도 그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나쁜 아버지들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척박한 땅에서 결국 무언가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 소설을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왔던 성장코드로 읽는 것이다. 반면 청소년소설 속 아이들이라면 ‘나쁜 아버지, 그가 물려준 나쁜 땅 그리고 그의 무덤’에 침이라도 뱉으며 돌아설 것이다.

가벼운 터치로 그려지는 『완득이』가 인물의 성장을 깊이있게 보여주지 못하며 계몽서사적인 측면이 있다는 일간의 평가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완득이가 성장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존 성장소설의 협소한 틀로 청소년소설을 재단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성장(혹은 성숙, 통찰)은 다양한 주제와 내용, 인물, 사건이 결합해 나타나는 결과(혹은 양상)이지 작품의 목적은 될 수 없다. 항상 성장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들이대는 한 청소년소설은 ‘나 이렇게 성장했다’는 식의 계몽서사를 벗어나기 힘들다. 현재 우리 청소년소설 속 아이들은 사회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신나게 달려가다가도 작품의 결말에 이르면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착한 성장으로 봉합되는 수순을 겪는다. 이러한 작품들에 출판사들은 ‘교육적 의도’를 암시하는 ‘성장’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상업적 판매를 시도한다. 이것이 청소년소설이 성장소설에 머무르면 안되는 이유이며 청소년소설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 청소년소설은 장르소설이다?

 

『완득이』가 우리 문학에 가져다준 또 하나의 시사점은 청소년소설이 독자와의 교감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 아동청소년문학이 일반문학과 다른 점은 ‘독자’를 상정하고 창작된다는 점이다. 아동문학 비평에서 자주 쓰이는 ‘재미와 감동’이라는 표현도 독자의 입장을 고려한 어휘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명칭 역시 독자를 의식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소설이 독자를 의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창작 미학만으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속성이 내재함을 뜻한다. 그렇다고 청소년소설이 특정하고 도식적인 서사문법을 구사하여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르문학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본격문학사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독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청소년 캐릭터 중 한명은 ‘얄개’다. 조흔파(趙欣坡)의 명랑소설 『얄개전』(1964), 최요안(崔要安)의 『남궁동자』 『억만이의 미소』는 당시 인기가 높던 청소년소설이지만 통속물이라는 비판 아래 아동문학사에서도 배제되고 일반문학사에서도 대중소설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던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얄개’나 ‘억만이’가 하찮게 다뤄져서는 안되는 까닭은, 그 시대 청소년 독자들이 그 캐릭터들에게 보내준 사랑이 역사적 진실이며 거기에는 분명한 요인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독자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명랑소설’이라는 장르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당시 청소년독자들이 읽던 순수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대적으로 친근한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즉 당대성의 발견이다. 이렇듯 청소년에게 사랑받았던 문학을 보면 청소년소설의 독자들은 문학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기준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청소년소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당대 청소년독자와의 교감을 필요로 한다.

『완득이』 역시 작품에서 보여주는 개성있는 캐릭터와 요즘 아이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쿨한 서술이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장애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가난하고 외로운 어린시절 등 완득이를 둘러싼 환경은 세상과 거리를 두려는 완득이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 완득이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문장들은 그러한 성격을 잘 드러낸다. 가령 어머니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 삽입된 난데없는 라면 욕심은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완득이의 성격을 완곡하게 반영한다.4 완득이의 삶 자체는 지독히 외롭지만 작품은 의도적으로 그것에 거리를 두고 접근한다. 완득이를 세상에 불러내는 역할을 하는 ‘똥주 선생’ 역시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악역 캐릭터지만 사실 그의 겉모습은 따뜻한 속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장치다. 『완득이』를 통해 청소년문학은 당대성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한발 나아가 대중성까지 획득하게 된다. 청소년문학에서 당대성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오래된 숙제였으며 이경혜의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창비 2004)나 신여랑의 『몽구스 크루』(사계절 2006) 등에서 비로소 획득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 책들을 과연 청소년들은 어떻게 읽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확실치 않았는데 『완득이』에 이르러 청소년독자와의 교감에 확신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청소년문학은 드디어 ‘당대 독자’와 ‘대중 독자’를 동시에 발견한다. 문제는 이후 우리 청소년소설의 방향이 급속하게 명랑함 혹은 재미를 전략으로 삼아 대중서사의 코드로 기울어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코드를 빌려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용해 작품의 재미를 불러일으키고 독자와 교감을 나눌 수 있다면 일종의 전략이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은 대중코드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이므로 그것의 활용은 독자와의 교감을 돕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마르트 로베르(Marthe Robert)는 소설이 자신을 귀족 출신이라고 내세워도 소설은 어디까지나 성공한 평민이며,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룩된 다른 자리를 차지하는 벼락출세자라고 일컫는다. 사실상 작품성의 문제는 소설을 구성하는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 대중서사냐 본격문학이냐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통속성과 대중성 그리고 문학성의 잣대가 이분법적으로 단칼에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본격문학의 장에서 출간되는 작품 중에도 통속적이고 상업적이며 동어반복적 작품은 존재한다. 결국 코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현재 청소년소설이 대중서사의 코드를 활용하려 한다면 그것으로 어떠한 효과를 얻을지에 대한 전략적 고민이 필요하다. 가령 청소년만이 가진 삐딱함으로 세상을 한껏 우습게보고 날카롭게 지적할 수 있는 아이가 청소년소설의 주체가 된다면 그것이 대중코드라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결국 자본주의사회에서 문학이란 자본을 전유하여 세상을 이겨나갈 것인가, 자본에 매몰된 것인가의 기로에서 줄타기를 하는 광대와 같은 장르이니 말이다.

그러나 재미와 웃음이라는 대중코드로 독자에게 다가서려는 현재 청소년문학의 상황이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소설이 대중에게 소비될 것만을 노리는 나머지 서사성마저 무너져서는 안되며, 단지 독자들의 손에 가닿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최근 청소년문학에서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 그 뿌리가 깊지 못해 독자들의 반응에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휩쓸림 현상이다. 현재 대중코드를 가진 작품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작중인물들이 상처를 대하는 방식이다. 김혜정의 『닌자 걸스』(비룡소 2009)에서 고은비는 뚱뚱한 연예인 지망생으로 주위에서 언어폭력에 가까운 조롱을 받는다. 그러나 은비가 받는 상처는 웬일인지 그다지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서술이 워낙 과장되어 있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본격적인 풍자로 보기도 힘들다. 박정애(朴正愛)의 『다섯장의 짧은 다이어리』(웅진주니어 2009)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송송’의 서울 상경기는 같이 사는 ‘아미’로 인해 엉망이 되지만 결과적으로 송송에게 그것은 상처가 되지 않는다. 송송이의 서울 체험은 그녀의 귀향과 더불어 지나간 과거로 남을 뿐이다. 이 역시 전개되는 사건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실을 과장하여 만든 ‘가상사건’들은 일종의 현실왜곡으로 기능해 독자들은 사건을 현실에서 파생된 코미디로 보게 된다. 작중인물이 코미디 속에 있으니 이들의 경험은 상처를 드러내고 극복하는 것과는 동떨어진다. 주체가 상처받지 않음은 곧 진실과의 거리가 멀다는 의미다. 청소년문학에서 상처는 무엇보다 정면으로 마주보아야 할, 놓쳐서는 안될 ‘오브제’다. 가장 대중적인 장르인 만화나 영화에서조차 감동적인 작품은 상처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교차시킨다. 작품이 상처를 외면할 때 작품 속 아이들은 삶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에서 멀어지며 감동 또한 희미해진다. 청소년소설의 대중코드가 소설적 진실까지 놓쳐버린다면 그것은 알맹이를 뺀 공허한 웃음에 불과하다.

 

 

4. 청소년소설은 건전해야 한다?

 

최근 청소년소설은 관계의 문제에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가령 학교에서 일어나는 집단 따돌림현상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양분되는 패턴을 벗어나 가해와 피해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으로 연출되기 시작했다. 청소년이 서로를 경쟁자로만 바라보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 최초에는 누군가가 피해자가 되지만 종국에는 과정에 개입된 모든 이들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복잡한 관계는 상처 혹은 죄의식의 양상으로 표출된다.

김려령의 최근작 『우아한 거짓말』(창비 2009)은 이러한 상황의 단면을 예민하게 포착한 작품이다.『완득이』에서 보여준 다소 성급하고 낙관적이며 건전한 마무리와 달리 이 작품은 인물들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 점이 돋보인다. 서사는 비교적 단순하다. 중학교 1학년 천지의 자살과 죽음 뒤에 감추어진 관계의 고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방식이 미스터리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독자는 이미 주요 맥락을 알고 있다. 따라서 천지가 죽기 전 다섯 사람에게 건넨 빨간 털실뭉치의 행방을 쫓는 만지의 행보는 새로운 비밀을 파헤치려는 의도보다는 털실뭉치를 받은 인물들 속에 존재하는 또다른 상처를 보여주려는 것에 가깝다.

『우아한 거짓말』이 전해주는 바는 아이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천지는 화연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화연은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화연의 행동을 일일이 지적하며 도리어 천지를 불편하게 했던 미라 역시 공격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집안사정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따돌림을 당해 자살한 천지와 그를 괴롭힌 화연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진실치 못한 관계 속에서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들이 있고 그것을 우아하게 감싸고 외면하는 현실이 더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아쉽게도 그러한 주제가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못하다. 일단 작품의 기초를 이루는 스토리가 빈약하여 추리소설 형식의 서사가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또한 천지나 미라, 화연 각각의 처지에서 파헤쳐진 상처를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한다. 따라서 천지의 언니 만지가 화연의 속사정을 챙기며 화연에게도 예정되어 있을지 모를 사고를 예방한다는 착한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와 견주어 최근 출간된 최인석(崔仁碩)의 『약탈이 시작됐다』(창비 2010)는 그동안 청소년소설이 머뭇거려온 몇몇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 이 작품은 겉보기에 과감한 소재를 도입한 듯 보이지만 사실 전통적인 성장의 테마를 다룬다. 성장소설에서 금기와의 충돌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약탈이 시작됐다』는 ‘사랑’을 예로 들어 ‘금기’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지금까지의 성장소설과 다른 점은 아이들이 아닌 어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금선과 서봉석 선생은 여전히 금기라는 시험에 든 어른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마음의 파장을 회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마주하고 사회적 통념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성장의 테마를 안고 살아가는 어른들이다. 서봉석 선생을 금기와 충돌하는 대표 인물로 설정하면서 작품의 무게가 어른에게 쏠리고, 또 그 어른이 지나치게 바람직한 인물이라는 한계는 있으나, 고등학생 성준과 윤지 역시 사건을 함께 겪고 관찰하며 성장해나간다는 점에서 이를 극복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묘미는 무엇보다도 풍부한 문학적 장치의 활용이다. 성준의 눈으로 초점화되어 금선을 묘사하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서봉석 선생과 징계위원회 위원들과의 면담에서 보여주는 풍자적 묘사, 욕망의 분출구로 상징화된 종로라는 배경 설정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작품에서 종로는 금기로 인해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한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가 대리된 욕망으로 나타나는 약탈 공간으로 상징된다. 종로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훔치는 것은 단순히 소유에 대한 욕심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대부분 대리된 욕망인바, 이들의 행위는 누군가에게 반납했던 자신들의 욕망을 되찾아오려는, 순간적으로나마 금기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여러 종류의 금기와 통제로부터의 해방이다. 인간에게는 인생의 시기마다 사회적 금기 혹은 금지로부터 자신을 재정립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약탈이 시작됐다』는 성장소설이면서 청소년소설이 된, 또 청소년소설에서 문학적 장치를 활용하여 효과를 거둔 사례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최근의 청소년소설에 몇가지 시사를 던져준다. 일단 문학적 장치의 활용은 본래 작품이 가진 스토리의 풍부함에서 비롯된다. 몇몇 청소년소설은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창작기법만 실험하는 경향이 있는데, 서사의 중요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둘째, 청소년소설은 ‘청소년문학’일 뿐 아니라 ‘문학’임을 절실히 인식할 때라는 점이다. 청소년소설은 이제 좀더 치열해져야 한다. 여기서 청소년소설이 갖춰야 할 과감함 혹은 치열함은 단지 소재나 주제의 문제가 아니다. 문학의 이름으로 용기있게 표현되어야 할 미학적 결단의 문제이고, 문학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예술적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청소년소설이라는 경계 안에 머물며 미성년독자를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학부모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할 장면이나 서사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청소년소설의 퇴보를 가져올 수 있는 덫이다. 불온하고 불편한 문학만이 독자에게 새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

 

 

5. 청소년문학은 있다!

 

청소년소설의 문법이 일반소설과 다름없다고 한다면 결국 청소년소설은 청소년이라는 독자를 주목하게 된다. 청소년문학이 기획의 산물이듯 ‘청소년’이라는 세대도 기획된 집단이다. 근대 초기 어두운 시대를 헤쳐나갈 시대적 아이콘에서 몇십년 만에 사회 최대의 문제집단으로 전락한 ‘청소년’의 좌표를 들여다보면 기성세대에 의해 끊임없이 조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오늘날 청소년을 문제집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를 그들에게 고스란히 떠안기려는 음모다. 청소년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에서 파생된 국지적인 것임에도 어른들은 ‘청소년문제’를 부각하며 그것에 선행된 여러 문제들을 약화시킨다. 청소년기를 아동과 어른의 중간지대에 끼어 있는, 어서 지나가버려야 할 기간으로 여기는 것도 통념에 불과하다. 청소년기는 인생의 다른 모든 시기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시절이다.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며 통제하려는 시도나 청소년기를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기로만 규정하는 태도도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오래된 생각들이다. 청소년문학이 할 일은 현재 답습되는 이러한 통념들을 청소년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균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소년소설은 어떤 형식으로든 저항성을 내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청소년소설 속 주인공을 의도적으로 ‘주체’라고 부른다. 주인공이나 화자로서 청소년소설 속 아이들은 어른들의 시선에 너무 쉽게 휘둘리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스피박(G. Spivak)의 ‘하위주체’ 개념은 청소년에게도 해당된다. 청소년소설은 하위주체인 청소년을 대변하는 문학이고 청소년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그들의 불온함까지도 허용해야 하는 문학이다.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소설의 불씨가 쉽게 꺼질 수 없는 것은, 이 땅의 청소년들은 할 말이 많기 때문이다. 청소년소설은 한국사회가 빚어낸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릴 저항성을 품고 단선적이고 도식적인 성장담을 지양하면서 독자와의 의미있는 만남을 생성해야 한다. 청소년주체가 우리 사회를 속속들이 전유해 그들의 코드로 세상을 변환하는 것, 그것을 청소년문학에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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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상욱 「전복적 상상력으로서의 청소년문학」, 『내일을 여는 작가』 2009년 여름호 69면.
  2. 졸고 「청소년문학과 청소년문학이 아닌 것」, 『창비어린이』 2009년 봄호 175면.
  3. 강유정 「장르로서의 청소년소설」, 『세계의문학』 2009년 가을호 192면 참조.
  4. “그분은 잠시 주춤하더니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촌스럽게 꽃분홍색 술이 앞에 뭉텅이로 달린 낡은 단화였다. 나는 라면을 끓여 방으로 들어갔다. 생전 처음 그릇에 라면을 옮겨 담아서. 그분은 자기 그릇에 있는 라면을 내게 덜어주었다. 배고팠는데 잘 됐다.”(78면, 강조는 인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