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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연속기획 · 한국사 100년 다시 보기 ②

 

광주민중항쟁과 죽음의 자각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교수, 한국현대사. 저서로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특강』 『대한민국사』(전4권) 등이 있음. hongkoo@skhu.ac.kr

 

  • 이 논문은 2008년도 (재)5·18기념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된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5·18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정말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사건이다. 광주 이전의 운동과 광주를 겪은 이후의 운동은 여러 면에서 뚜렷이 달라졌다. 1970년대의 운동이 소수의 지식인·종교인들과 대학생 엘리뜨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광주의 학살과 저항을 겪은 이후 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는 이전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참가자 수와 폭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투쟁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크게 달라졌다. 학살자 전두환이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젊은 영혼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광주의 살인마를 처단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누구와도 손잡지 못할 바가 없었으며 어떤 급진이론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바가 없었다.

광주가 그후의 민족민주운동에 미친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원천은 분명 광주였다. 처절하게 패배한 싸움인 광주가 왜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독보적인 규정력을 갖는 것일까? 그 답은 죽음에 있다. 광주를 통해 죽음이 우리 곁에 온 것이다. 광주의 죽음이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 속에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에서만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광주의 죽음은 특별하게 다가왔을까? 왜 광주의 기억이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을까? 무엇이 광주를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었을까? 광주의 죽음을 기억한 사람들의 삶은, 그들의 이념과 투쟁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을까?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의 운동은 어떻게 달랐을까?

 

 

2. 죽음을 죽인 한국현대사

 

예나 지금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광주 이전의 한국현대사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정치적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죽음을 한 사건에 대해서도 유가족조차 이야기할 수 없었고, 그 흔한 추모비 하나 세울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한국현대사는 죽음조차 죽여버린 잔인한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민간인학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이 시기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그 전모를 파악하는 작업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몇몇 지역에서는 유골이 발굴되었지만 그 주인이 누구인지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1960년대 충남의 한 경찰서가 배포한 「간첩식별요령」을 보면 “과거의 악질 부역자 처단자 가족과 남몰래 가까이 교제하는 자”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 민간인학살 희생자 가족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만으로 간첩으로 몰릴 수 있는 형편이다 보니, 민간인학살 유가족 중에는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까지 네 아버지는 빨갱이들 손에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1 참으로 처절한 ‘이 땅에 살기 위하여’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민간인학살’이란 말이 널리 쓰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양민학살’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양민학살’이란 말은 희생자가 빨갱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측이 빨갱이로 오인해 잘못 죽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은 문제지만 빨갱이는 죽여도 좋고, 죽일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엄청난 민간인학살에 대해 1950년대의 정치인 중 제대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피해대중 단결하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조봉암(曺奉岩)뿐이었다. 조봉암은 보도연맹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다만 살기 위한 욕구로서, 또 무식의 수치로서, 이리저리 이 단체 저 단체에 가입하였다가 탈퇴한 그들이 이런 참변을 당하고 보니, 그 얼마나 본인들이 억울할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가엾은 일인가, 목숨을 가진 백성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 것밖에 그 무슨 다른 죄가 있으랴”고 주장했다.2 그러나 독재자 이승만은 ‘피해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주장해온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죽여버렸다.

민간인학살 문제는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거창에서는 1960년 5월 11일 민간인학살 유가족 70여명이 학살 당시의 면장 박모씨를 돌로 때려 실신케 한 다음 불태워 죽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조선일보 1960.5.12). 당시 경찰은 유가족 20여명을 살인혐의로 연행해 조사했지만 200여명의 유족이 몰려들어 우리가 죽였으니 다 잡아가라고 소동을 부리는 통에 연행자들을 석방해야 했다. 거창 출신 학생들도 연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학살원흉을 처단하라고 데모를 벌였다(조선일보 1960.5.13, 5.15, 5.19). 이런 분위기에서 제4대 국회는 양민학살사건조사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의 경찰 출신이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해 여러 제약 때문에 조사특위의 활동은 부진했다.3 거창학살 유가족들은 1960년 12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웠지만, 1961년 군사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몰아 간부 17명을 구속하고, 애써 만든 위령비는 불도저로 무너뜨려 땅에 묻고, 합동묘역을 파헤쳤다.4 당시 군사정권은 합동묘역의 유골을 희생자 수대로 배분해버렸다. 학살의 희생자들은 한번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살해당했고, 끊임없이 모욕당했고, 끊임없이 매장되었다.

민간인학살이 가져온 공포와 피해의식은 극우반공체제하에서 대중으로 하여금 대단히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학살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한 대중을 상대로 민간인학살의 진상을 왜곡하거나 역사를 날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학살은 거론해서는 안되는 터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가 되면 한국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가 교육의 주요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군경이나 우익단체가 자행한 학살을 직접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이들은 지속적으로 좌익이나 인민군이 행한 학살과 가혹행위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이런 주입식 교육의 결과,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에 관한 그림은 전적으로 좌익과 인민군의 소행으로 그려졌다. 극우반공체제의 이데올로기가 대중에게 내면화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장기간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한국 초중고생들의 반공의식은 1950년대의 청소년들에 비해 “훨씬 더 반이성적이며 비인간적이고 병적인 것”5으로 변해갔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우리 주변 여기저기서 수많은 죽음,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죽음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권력은 이런 죽음이 알려지는 것을 통제했고,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고, 사회는 알려 하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으로 약 5000명의 군인이 사망했건만, 언론은 사망자 수가 300명을 넘어서자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거두고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로 시작되는 흥겨운 노래만 신나게 틀어댔다. 1960, 70년대에는 베트남전 사망자를 제외하고도 한국군에서 매년 1400~15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때였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한국군은 2년마다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군대니까 그러려니 하고 무심히 지나갔다.

한국전쟁 이후 죽음에 대한 기억이 극단적으로 억눌린 한국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감수성이 발달할 수 없었다. 현기영(玄基榮)의 『순이삼촌』이 상징하듯 죽음의 한과 슬픔은 타인과 나눠서는 안되는 것이었기에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3. 실감되지 않는 죽음과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이승만과 박정희 등 독재권력의 폭압성은 어떤 극우반공 독재권력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후 한국에서 정치적 이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다른 독재국가에서의 희생자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이는 독재권력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박정희정권은 기본적으로 분단과 민간인학살로 인하여 한국사회에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바꾸어 말하면 독재권력이 잡아죽여야 할 사람들을 이미 다 죽여놓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미 제거해버린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6한국의 독재권력이 다스려야 했던 대중은 상당히 길들여진 사람들이었다. 국가권력은 물샐틈없는 감시망으로 대중을 통제했다. 무장투쟁이 일상화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볼 때 한국의 저항세력이 동원하는 폭력이란 맨손이거나 겨우 짱돌과 화염병 정도였을 뿐이다. 그마저 극렬 과격행동이라 비난받는 상황에서 저항운동이 총이나 폭탄을 드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길들여진 대중이 일정한 선을 넘지 않고 저항폭력을 거의 동원하지 않으면서 민주화운동을 벌였음에도 박정희의 집권기간 계엄령은 모두 3회 실시되어 총 31개월간 지속되었고, 위수령 역시 3회 실시되어 총 5개월간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모두 9차례에 걸쳐 발동되어 69개월간 지속됐다. 박정희가 집권한 220개월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05개월 동안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등 비상수단이 상시화돼 있었던 것이다.7

박정희는 정권유지를 위해 군대와 탱크를 동원해 헌법을 무력화하고, 수업을 빼먹으면 최고 사형까지 가능한 황당한 악법(「긴급조치 4호」)을 공포했지만, 학생이나 노동자를 향해 발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이는 상황이 군사정권에서 먼저 발포를 감행할 만큼 위급하게 전개되지 않았다는 측면도 있지만, 박정희정권이 대규모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자제력을 발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다 1970년대가 되자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1973년 10월 19일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은 중앙정보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간첩행위를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지만 광주 이후와 비교할 때 민주화운동세력이 아직 죽음을 실감하고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유신정권은 서슬 푸른 긴급조치 4호를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려 했다. 유신정권은 학생과 지식인 수백명을 체포해 인혁당 사건 관련자 일곱명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일곱명에게 각각 사형을 구형했다(조선일보 1974.7.9, 7.11). “영광입니다.” 이 말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서울대 상대 3학년 김병곤이 사형을 구형받은 뒤에 한 최후진술의 첫마디였다.

김지하는 “영광입니다”라는 말이 “죽음을 이긴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8 유신의 법정에서 울려퍼진 “영광입니다”라는 말에는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스물두살의 김병곤이 당당하게 “영광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형을 선고받은 민청학련 관련자 모두가 항소를 포기해버렸다. 1심 사형판결 열흘 뒤인 7월 20일 비상군법회의 관할관인 국방부장관 서종철은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연결고리로 지목된 여정남을 제외한 여섯명의 형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경감했다(조선일보 1974.7.21). 만약 김병곤 등이 박정희정권이 자신을 진짜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리고 그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음을 실감했다면 감히 “영광입니다”라고 호기를 부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그림자는 엉뚱한 곳에서 예상 못한 방식으로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재일동포 문세광이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했는데 부인 육영수가 피격 사망한 것이다. 박정희는 목숨을 건졌지만 아내를 잃고 큰 충격에 빠졌다. 박정희만이 아니라 중앙정보부, 청와대 경호실 등 정권 전체가 완전히 평정심을 잃었다. 특히,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와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유신정권을 극한으로 몰고갔다. 싸이공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간 1975년 4월 9일, 유신정권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여덟명의 사형을 전격적으로 집행했다.9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의 일이었다. 박정희정권이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무더기로 사형을 집행한 것은 정권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한 학생들에게 뭔가 본보기를 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까닭이다.

그런데 박정희의 겁주기 전략은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권이 사형자들 중에 인혁당 재건위 소속이 아닌 경북대생 여정남을 포함시켰음에도 학생들은 처형당한 사람들을 자신들과는 무관한 ‘빨갱이’로 여겼다. 간첩이나 빨갱이의 죽음은 반공규율사회 한국에서 애도해서는 안되는 죽음, 죽여도 죽인 것이 아닌 그런 비인격적인 죽음이었다. 통혁당 사건 같은 조직사건이나 간첩사건과 관련된 죽음을 우리 사회는 슬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1970년대의 학생들은 1980년대의 급진적인 학생활동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실천이 이념적인 면에서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선을 그어놓는 적이 많았다. 서울대생 김상진이 인혁당 사건 관련자 처형 직후인 4월 11일 할복자살했는데, 당시 학생들은 김상진의 죽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인혁당 관련자들의 처형에는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전까지의 긴급조치 내용을 집대성한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고 학원에 사복경찰과 전투경찰을 상주시키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이런 숨막히는 탄압 속에서 학생운동은 일시 소강상태에 빠진 듯 보였지만, 이는 폭풍 전야의 고요일 뿐이었다. 유신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어도 저항세력은 저항세력대로, 독재권력은 독재권력대로 저항과 탄압에서 나름대로 유지해온 자제규율을 지키지 않게 되었다. 1979년 8월 9일 YH노동조합 여성노동자 187명은 회사의 위장폐업에 대한 항의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정부는 농성 시작 이틀 만인 8월 11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전격적인 강제해산을 단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YH노조 대의원 김경숙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김경숙이 진압작전 개시 30분 전에 동맥을 끊고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으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경찰의 발표는 모두 조작된 것이고, 김경숙은 진압과정에서 머리에 심한 가격을 당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10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정국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부마항쟁 발발, 10·26사건 발발로 급속히 치달았다.

민간인학살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당시의 학생들은 김경숙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정권이 학생들이나 저항세력에게 총을 겨눌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자 부산의 학생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위가 확산되자 정부는 10월 18일 밤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20일에는 마산·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부마항쟁 자체는 군병력을 투입해 무력진압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 사건은 박정희 죽음과 유신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11 부마항쟁은 학생들의 선도적인 데모가 학내에 머물지 않고 가두로 나와서 시민들의 지지와 동참으로 세가 매우 커진 사건이었다. 학생들의 데모와 시민의 합세라는 모델은 1960년 4월혁명 이후 박정희정권이 가장 경계해온 것으로, 긴급조치 기간에는 내내 학생들을 학내에 꼼짝 못하게 묶어두었는데 이제 학생들의 가두진출과 시민들의 합세가 현실화된 것이다. 더구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 현장을 직접 다녀온 뒤 이 데모는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으며 서울을 비롯한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박정희는 이런 보고에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며 역정을 냈고, 같은 자리에 동석한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 아는데 “박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다고 덧붙였다.12 김재규는 4·19 같은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박정희를 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전혀 없었”다고 재판 기간 누누이 강조했다.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은 유신정권의 종말을 가져왔지만, 군사독재의 종식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그가 온몸을 던져 막고자 했던 대규모 유혈사태 역시 발생 시점이 6개월 정도 연기되고 장소가 바뀌었을 뿐, 끝내 일어나고 말았다. 1980년 5월 전두환을 수괴로 한 신군부세력은 자신들의 불법적 정권탈취 기도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광주시민들을 상대로 학살을 감행했다.

 

 

4. 광주, 그리고 죽음과의 만남

 

군사독재시절의 한국정치사는 기본적으로 과대성장한 국가기구 대 과소성장한 시민사회의 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기구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것은 군부였고, 시민사회 내에서 국가권력과 대결할 수 있었던 집단은 학생들이었다. 군과 학생의 대결은 5·16군사반란 이후 20년간의 현대사에서 기본축을 이루는 대립관계였지만 그 대립이 직접적인 유혈사태로 발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달랐다. 전남대에 진주한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거리에서도 공수부대는 학원이나 극장 등에까지 쳐들어가 젊은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연행했다.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강용주는 5월 18일 도청을 거쳐 동명동 로터리에서 공수부대와 처음 마주쳤다. 군인들은 각목을 휘두르며 돌진해왔고 시위대는 그 기세에 눌려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다. 강용주는 공수부대에게 쫓길 때는 무서운 생각뿐이었지만 일단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고 난 뒤에는 진압군이 사람들을 때리고 무차별 폭행하고 찌르던 모습을 떠올리며 엄청난 분노를 가누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친구들이 모두 시민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가만 있어서는 안된다고 뭔가 행동을 하자며 학교에서 데모 하기를 제의했다. 그날의 데모는 학교당국이 학생들을 일찍 귀가시켜 무산되었지만 몇몇 친구들은 며칠간 계속 모임을 갖고 학생들의 동원을 상의했다고 한다. 그때 이미 여러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강용주도 친구들과 모여 시위 나가기 전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서 모아두기도 했다고 한다. 시위현장에서 자신들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

공수부대의 만행을 겪은 광주시민들이 죽음과 한발 더 가까이 대면한 것은 5월 21일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부터다.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시민들은 지켜봐야 했다. 강용주에 따르면 옆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니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엄청난 분노가 몰려왔다고 한다. 강용주는 쓰러진 사람을 다른 청년과 함께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는데 막상 도착해 간호사가 살펴보더니 그가 이미 죽었다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간호사는 강용주의 손을 치료해야겠다고 말했는데, 그제야 강용주는 자신의 양손이 모두 찢어져 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같은 인터뷰) 생과 사가 갈리던 그 순간은 그렇게 정신이 없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무기를 사고 월급을 받는 군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았다는 사실에 혼란과 분노가 엄습했고(정용화 인터뷰, 2009.1.22, 재단), 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 체육관에 관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낯설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조진태, 2009.1.23, 재단) 광주 사람들이 이렇게 혼돈 속에서 죽음과 대면하고 그러면서도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신군부측은 광주의 죽음을 또다시 죽이려 시도했다. 당시 광주는 처절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광주 밖에서는 광주가 폭도들에게 장악되었고 폭도들은 간첩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실제로 5월 23일에는 광주사태를 선동하기 위해 남파된 북한 간첩 이창룡을 서울역에서 검거했다는 말도 안되는 경찰의 조작간첩사건 발표가 있었다.14 이같은 신군부의 시도는 광주에서의 항쟁과 죽음이 갖는 의미에 빨간 칠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흔들리지 않고 죽음과 정직하게 대면하고자 했다. 모든 광주시민이, 모든 시민군이 똑같이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날이 다가올 때 도청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전남대 복학생 최용식(가명)은 25일 도청으로 갔다. 총을 쏘아본 사람이 없어서 전경으로 군복무를 마친 그가 소대장이 되어 경비책임을 맡았다. 소대원은 모두 18명이었는데 26일이 되니 16명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조선대 의예과에 다니던 학생과 자신 둘만 남았다고 했다. 최용식은 26일 아침부터 하나둘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죽음이 두렵긴 두려운 거구나 하고 느꼈다. 그는 꼭 죽을 각오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거기 있었다는 것,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회고했다. 최용식은 왜 그 자리를 뜨지 않았냐는 질문에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면서 그런 상황이 있었는데 이 땅에 남아 누군가 죽지 않으면 (우리 현실이) 어떻게 됐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계엄군이 27일 새벽이 아니고 28일 새벽에 온다고 생각했으면 자신도 집에 갔을 거라고 덧붙였다.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총을 들고 남아 있었지만, 솔직히 너무 두려워 돌아가고 싶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스크를 쓴 그를 알아보지 못한 어머니가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고 했다.(최용식, 2009.1.22, 재단)

고등학생 강용주는 26일 밤 저녁을 먹은 뒤 교련복을 차려입고 어머니께 큰절을 한 뒤 도청을 지키러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연히 어머니는 깜짝 놀라 아들을 말렸고, 아들은 어머니에게 그럼 이 나라 민주주의는 누가 지키냐고 대들었다. 어머니는 한참을 울다가 “그래 니 맘대로 해라” 하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나가서 담배 두갑을 사왔다. 강용주가 큰절을 드리고 “갈게요”라고 하자 어머니는 계속 우셨는데 그때는 강용주나 어머니나 살아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마지막 가는 자식에게 담배 두갑을 사주신 것이다.(강용주, 앞의 인터뷰)

그날의 광주는 죽고 사는 것,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잘 싸울 수 있을까? 그것만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상호는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헌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신기하게도 머리가 텅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15

 

그 자리를 지킨 시민군 중 과연 죽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다들 광주시민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살아서 ‘해방 광주’를 이어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미국 항공모함 코럴시 호가 한반도를 향해 항진중인 목적이 광주시민을 돕기 위해서라고16 헛된 기대를 한 것도, 그런 일이라도 벌어져야 다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김산이 『아리랑』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역사는 때로 가장 평범한 사람에게서 가장 견결한 투사를 끌어내는 법이다. 그날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에도 광주는 없었을 것이다.

수습대책위에서는 무기를 반납하고 군당국과 타협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군대와 끝까지 싸워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대책위는 대책위대로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무기를 반납하고 ‘사태를 수습’할 것이냐 끝까지 싸울 것이냐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산 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대책위에서 떠날 사람은 떠났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이대로 항복할 수 없다는 사람들, 텅 빈 도청을 계엄군에게 내줄 수는 없다는 사람들, “죽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만 남았다. 그 중심에 윤상원이 있었다.17 들불야학에서 윤상원에게 배웠던 용접공 나명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들이닥쳤는데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역사가 1980년 광주를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상원이 형을 비롯해 도청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 때문에 5·18이 폭동이 아니라 민중항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겁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말입니다.18

 

승산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광주의 마지막 밤과 새벽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유격대의 힘찬 진군나팔 소리는 없었다. 그곳에는 역사에서 지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처연함과 쓸쓸함이 흐르고 있었다. 광주는 이렇게 우리 곁에, 아니 우리 가슴속에 들어왔다. 광주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동시대의 깨어 있던 사람들은 죽음과 대면해야 했다. 더이상 죽음은 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광주를 겪으며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져갔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만이 투쟁에 나서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싸우는 정권이 살인정권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19

 

 

5. 죽음을 껴안고

 

5월 27일, 윤상원을 비롯해 죽고자 했던 사람들이 죽은 그 아침에도 해는 어김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천천히 시작되었다. 그 슬픔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신군부의 악선전에 속아넘어가 광주의 진실을 모른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 광주의 학살자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있을 수 없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시작했다.

광주가 진압당하고 꼭 사흘 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그 아래에 서 있는 탱크 옆으로 청년 한명이 투신했다. 서강대생 김의기였다. 그는 건물에서 몸을 날리며 뿌린 「동포에게 드리는 글」에서 이렇게 물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의기가 유서에서 지적했듯이 광주의 진실은 광주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광주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리려 자신의 몸을 내던진 것이었지만, ‘새 시대’의 언론은 우표딱지만하게라도 이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다. 친구들조차 김의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노동운동가 하종강은 기독학생회 활동을 통해 김의기를 알고 지냈는데, 80년 5월에는 학내문제로 수배돼 있던 상태였다. 그도 나중에 수배가 풀린 뒤에야 김의기가 투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식을 전해준 선배는 울먹이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니들 똑똑한 것들은 다 나쁜 놈들이야. 의기가 죽었는데 운구할 놈이 없더라. 멍청한 놈들만 모아서 장례 치렀어. 니들은 다 나쁜 놈들이야.”(하종강, 2009.3.2, 평화박물관) ‘멍청한 놈들’만 모여 김의기의 장례를 치른 며칠 뒤인 6월 7일에는 노동자 김종태가 신촌에서 “광주사태의 책임전가와 왜곡보도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규탄하면서 분신했다.

광주가 진압되고 꼭 1년 뒤인 1981년 5월 27일 서울대생들이 교내에서 광주항쟁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려 하자 경찰이 저지, 이에 1천여명이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때 도서관 6층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태훈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세번 외치고 자신의 몸을 던졌다. 김태훈은 이날 위령제를 준비한 측도 아니고 미리 투신을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광주 출신이기는 했지만, 이른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1981년 3월 19일과 4월 14일 두차례에 걸쳐 서울대에서 학내시위를 주동했던 유기홍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운동권 학생들은 광주항쟁 소식에 오히려 숨어버렸는데 오히려 일반 학생들에게서 저항이 끓어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김태훈 같은 얌전한 학생이 몸을 내던질 정도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 그것이 바로 광주의 저력이었다고 회고했다.(유기홍, 2009.1.19, 평화박물관) 그의 죽음에 대해 한 기록은 이렇게 남겼다.

 

선혈을 내쏟으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널브러진 아직도 살아 있는 그의 몸 위로, 헤아릴 수도 없는 최루탄이 쏟아져내렸다. 수천의 광주민중을 학살한 그들에게 한갓 한 사람의 생명쯤이야. “사람 죽었다” “비겁한 놈들아 나와 싸우자” 비명소리, 절규, 분노, 최루탄 연기, 폭음, 81년 5월 27일 오후 3시경 많은 학우들의 피눈물 속에 또 한 생명이 민주의 제단에 바쳐졌다. 이제 그 누가 다시 제단에 바쳐질지 아무도 몰랐다. 그 누구도 자신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80년 이후 암흑기였다.20

 

김태훈이 도서관에서 떨어져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을 때, 주변의 학생들이 달려가자 경찰은 최루탄을 뿌려댔다. 김태훈의 꿈틀거리는 몸뚱이로 하얗게 최루탄 가루가 덮였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의 죽음, 그 기억은 1982년 10월 12일 광주교도소에서 80년 5월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이 오랜 단식 끝에 숨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번 소환되었다. 운명의 5월 18일 오전 10시, 항쟁이 처음 시작되던 전남대 교문 앞에 그동안 시위를 이끌어온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보이지 않았다. 박관현은 신군부의 행동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17일 저녁 일단 피신했다가 18일 오전 학교 앞에 나왔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보고 여수로 피신했다고 한다. 박관현은 그때로부터 근 2년을 은신하다가 체포되었다. 가까운 후배 임낙평은 박관현이 체포되기 직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에게는 그날 시민·학생들과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이 혹처럼 남아 있는 듯 느꼈다고 회고했다. 박관현은 옥중에서 단식을 거듭했다. 광주의 죽음에 대한 항의로, “교도관들의 폭력이 난무하고, 부정부패가 만연된 교도소에서 모든 재소자들이 비인간적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항의로, 그는 여러차례 단식을 거듭했다. 2주일의 단식으로 박관현은 앙상한 뼈만 남아 대기실 의자에 길게 누워 있어야 할 만큼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법정에 나와 최후진술을 했다.

 

언젠가 역사는 이 정권을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 시민들이, 아니 항쟁이 거리를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시민들과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구천으로 떠나가 아직도 너무 원통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내 동포, 내 형제의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분명히 우리는 정확히 심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관현은 광주교도소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광주의 아들이라 불리던 박관현이 죽은 뒤 광주에서는 80년 이후 최대의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의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당국이 시신을 탈취하여 고향인 영광으로 보내 가족장을 치르게 한 것이다.(임낙평, 2009.1.22, 재단)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최정기는 80년 5월 전남대 1학년생으로 박관현을 호위했는데, 군대에서 사촌동생의 편지를 통해 “박관현이 죽어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편지를 보는 순간 “그래도 이분이 끝까지 지킬 건 지켰구나” 하는 생각에 그냥 눈물이 죽 흘렀다. 자꾸 눈물이 났지만 내무반에서 제법 고참이 된 덕에 동기들에게 “박관현이 죽었대. 나 오늘 술 한잔 해야겠다. 조의는 표해야지”라고 말하고 술을 마셨다. 동기들은 주번사관에게 적당히 둘러대어 그가 박관현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해줬다. 최정기는 그렇게 살벌한 5공시절 군대에서 박관현을 떠나보냈다. 그는 지금도 수업시간에 5·18이나 박관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기도 한다고 말했다.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최정기, 2009.1.21, 광주 소재 음식점)

 

 

6. 죽음의 문화

 

이렇게 하나둘 사람들이 죽어갔고 죽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망월동에 묻혔다. 광주는, 그리고 망월동은 1980년에 멈춰 있지 않았다. 학살자들은 광주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려고 했다. 그들에게는 망월동이 저렇게 남아 있는 것만도 몹시 불편했다. 저들은 광주 희생자 유가족들을 어르고 달래고 눙치고 협박해서 망월동에 모신 유해를 다른 데로 이장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런 속에서도 해마다 5월이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망월동을 찾았다. 군사정권은 사람들이 망월동을 찾아가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겨 5월 18일에는 망월동 일대에 전투경찰을 풀어 길목을 봉쇄했다.(조진태, 2009.1.23, 재단) 광주에서의 죽음, 그리고 광주에서 비롯된 죽음은 이미 우리 곁에, 우리 안에 들어와 있었지만 죽은 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경찰의 저지선을 이리저리 피해야 하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왜 경찰의 제지를 뚫고서라도 망월동을 찾았을까? 꼭 5월 18일이 아니어도 좋았다. 광주 사람들은 때때로 망월동을 찾았다. 어떤 이는 답답하고 힘들고 욕심 생기고 이럴 때 망월동 가면 좀 나아지더라고 했고(조계선, 2009.1.22, 재단), 또 어떤 이는 1980년 6월에 처음 망월동을 찾아 파묘를 해 선배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겪으며 마음속으로 “다시는 안 온다, 일을 해야지, 싸워야지, 다시는 안 온다”고 결심했으면서도 힘들 때면 또 이곳을 찾아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매번 망월동을 찾을 때마다 밖에서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이 강박관념처럼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임낙평, 2009.1.22, 재단)

광주의 죽음에서 비롯된 ‘열사’들이 하나하나 늘어가니 사람들은 광주를 잊을 수 없었고, 잊으려 하지도 않았다. 광주의 죽음 위에 다른 죽음이 쌓이고 그 위에 또다른 죽음이 쌓이는 일이 되풀이됐다. 1987년 7월 9일 연세대에서 이한열의 장례식이 열렸을 때 전날 진주교도소에서 출옥한 문익환 목사가 조사(弔辭)를 하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아침이었지만 햇살은 따가웠고, 군사정권이 시신을 탈취해 갈까봐 며칠을 한데서 지새운 청년학생들은 장례식장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때 문익환 목사는 갑자기 큰 소리로 “전태일 열사여!”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가 무엇 때문에 소리치는지 어리둥절해했다. 문익환 목사는 계속 소리쳤다.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상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이천여 영령이여!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전태일에서 시작해서 ‘광주 이천여 영령’을 거쳐 이한열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의 이름은 곧 한국현대사가 직면했던 가슴 아픈 죽음이었다. 한마디 군더더기 설명 없이 이름을 부른다는 것만으로 ‘초혼(招魂)’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더운 날씨에 피곤에 절어 꾸벅꾸벅 졸던 사람들마저 저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순서 없이 터져나오는 대로 불렀던 그 이름들. 그 이름들을 떠올리는 것은 하나의 죽음에 또하나의 죽음을 더해온 한국현대사를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더이상 한국현대사는 ‘죽음마저 죽여버린’ 비인간적인 역사일 수 없었다. 하나씩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통곡했다. 그날 그 자리를 지킨 사람들은 나름대로 광주의 기억 속에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문익환 목사가 다만 이름만 읊었을 뿐인데, 그것을 자신들이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역사로 읽어냈던 것이다.

1981년 3월 신학기가 되자 고3으로서 혹은 재수를 하면서 직접 광주를 겪은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81학번들은 눈빛부터 달랐다. 목숨을 걸 수 없는 자는 나서지 말아야 했다. 언젠가부터 광주는 후배들이 선배를 ‘갈구는’ 술주정과 시비와 비판의 무기가 되어 있었다.

사실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광주시민들이 자기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 아니었던가. 당시의 언론은 신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새 시대 찬가만 부르고 있을 때였다. 타지 사람들 대부분이 광주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은 타지에 와서 그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자신이 목격한 참상에 분해 울고,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무심함에 또 한번 울어야 했다. 하종강은 광주 출신의 한 청년이 광주 이야기를 하다가 식칼을 들더니 내 말 안 믿으면 여기서 죽어버리겠다고 소동을 벌인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하종강, 2009.3.2, 평화박물관)

광주의 죽음은 이렇게 살아 있는 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인터뷰에 응했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죽음을 끼고 살았다”는 식으로 당시의 분위기와 심경을 표현했다. 문용식의 개인적인 체험은 조금 더 강렬했다. 그는 “죽을 용기는 솔직히 없어도, 재수없어 죽어도 어쩔 수 없지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냐? 그 운동 때문에 정말 주변사람이 죽더라”고 회고했다. 1981년 5월 서울대 도서관에서 투신한 김태훈은 그의 고등학교 동문이었고, 1983년 11월 서울대 도서관에서 시위를 주동하다 떨어져 죽은 황정하는 그의 써클 후배였고, 1985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우종원은 그의 하부조직원이었다.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하다 숨진 박종철도 문용식의 하부조직원인 박종운의 소재를 찾다가 잘못된 것이었다.(문용식, 2009.1.19, 평화박물관)

‘깃발’ 사건으로 자신도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문용식의 체험은 험했던 80년대에도 조금은 유별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동시대인들에게도 죽음은 정말 가까이 와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가 대학에 들어와 처음 접하게 된 82학번 정일준, 83학번 주진우, 83학번 차미경 등도 이 정권과 싸우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금방 자각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차미경, 2009.1.19; 정일준, 2009.1.20; 주진우, 2009.3.9, 이상 평화박물관)

광주를 겪고, 죽음을 겪고, 또 죽음이 내 곁에 가까이 와 있음을 느끼면서 운동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사람들이 운동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주정립은 당신의 대학생들이 광주의 학살자 전두환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고 회고했다.(주정립, 2009.1.21, 재단). 이제 정권과 운동진영 사이는 ‘완전한 적대관계’로 치달았고,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식의 사생결단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운동은 죽음마저 각오해야 하는 치열함을 점차 요구하게 되었다. 문용식은 박정희시절에는 유신타도는 외쳐도 박정희를 처단해야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지만, 광주를 겪으면서 전두환 처단은 너무나 당연한 운동의 목표가 되었다고 말했다.(문용식, 2009.1.19, 평화박물관)

물론 80년대를 통틀어 전두환을 물리적으로 처단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민주화세력의 대응폭력이라고는 겨우 짱돌 정도에 머물렀던 한국에서 이제 「아방타방(我方他方)」 「진로」 같은 지하 팸플릿은 무장투쟁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총을 들었던 경험이 한국의 운동에서 이후에 재현되지는 않았지만, 총을 잡았던 기억은 그보다 수위가 낮은 다른 투쟁형태에 대한 금기를 깨뜨렸다.

이런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운동은 당연히 이념적으로도 대단히 급진화되고 과격해졌다. 문용식은 70년대와 80년대를 이렇게 비교했다. “70년대에 혁명 얘기를 했다 해도 그때야 소수의, 그야말로 소수의 점(點)이 있었던 것이고, 80년 광주를 거치고 나서는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화되는 것이지. 이건 점이 다 이어져서 선이 된 정도가 아니라 면(面)을 만들게 되었다고나 할까? 70년대 선배들 보면 전국의 운동권이 대개 서로 알고 지내는데, 80년대에는 이제 세력의 크기라는 게 쉽게 백만학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커진 거잖아.”(문용식, 같은 인터뷰) 이렇게 주체가 확립되고, 세력이 생기니 전략과 전술에 대한 논쟁과 대립이 치열해졌고, 또 이런 논쟁을 통해 급진조직들이 만들어지곤 했다. 70년대에 네오맑스주의나 종속이론 수준에 머물렀던 학생운동진영의 이론범위는 80년 광주를 거치면서 마오 쩌뚱 저작, 맑스-레닌주의 교과서를 지나 스딸린 저작을 거쳐 마침내 주체사상과 북한의 원전들로 치달았다. 반미(反美)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은 광주를 거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격렬한 반미운동이 벌어지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70년대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가 당사자들이 그 어떤 형태의 조직도 만들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국가단체로 조작된 것이었다면, 80년대에는 급진적인 청년학생이나 노동자들이 혁명의 참모부인 지하당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광주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넘어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강박관념은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뭔가를 해야 하고, 치열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다그치게 만들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했다. 정일준은 대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한다는 게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멀어져야 한다는 게 결단이 필요”했던 시기라면서 “그 시절 우리의 삶은 광주에 의해 일정하게 지배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정일준, 2009.1.20, 평화박물관) 그 시절, 운동진영에 몸담고 나름 열심히 싸우고자 하는 사람의 삶은 언제나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했고, 광주의 죽음을 가슴속 깊이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정용화는 그런 상태를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라고 표현했다.(정용화, 2009.1.22, 재단) 그 시절의 투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산 것이 아니라 죽어간 이들의 삶을 어느정도 대신 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하기 위해서 결단이 필요했던 시대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투쟁의 현장에 선 투사들은 정녕 겁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차미경은 매번 ‘가투(가두투쟁)’에 나갈 때마다 너무 무서웠고, 최루탄도 너무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백골단에 쫓겨 도망치다가 넘어진 그를 ‘동지들’이 밟고 지나간 아픈 기억은 그때 생긴 흉터와 함께 아직도 남아 있다.(차미경, 2009.1.19, 평화박물관) 주진우는 전두환 같은 학살자는 당시의 구호대로 ‘찢어죽이는’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저 자를 찢다가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훨씬 더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가두시위에 많이 나갔지만, 혹시 나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무서움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런 두려움을 동료나 선후배들과 같이 나눴냐는 물음에 전두환에 대한 증오는 서로 쉽게 확인했지만, 공포는 “지극히 내적인 문제”라서 내놓고 얘기한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거리에서 데모하다가 사복경찰이 나타나면 일단 다 도망갔다면서, 「흔들리지 않게」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가다가도 검거조가 나타나면 너무 무서워서 정신없이 도망가기 바빴다고 그때를 씁쓸히 회상했다.(주진우, 2009.3.9, 평화박물관)

80년대는 내가 얼만큼 나 자신을 운동에 내던지느냐, 얼만큼 깊이 개입하느냐의 차이는 있었지만, 운동의 대의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대학가에서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가슴 가득 두려움을 안고 투쟁현장으로 나가는 운동권 학생들 중에는 자신이 수업과제를 제출하거나 시험을 보지 않고도 학점을 따고 졸업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당시에 누가 경찰서에 잡혀가서 시험을 못 보거나 과제를 제출하지 못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선배와 친구들이 대신 해주었다는 것이다.(정일준, 2009.1.20, 평화박물관) 이들 선배와 친구들은 투쟁의 일선이 아닌 ‘안전지대’에 있었지만, 투쟁의 현장에 자신을 내던지는 선후배나 친구들에 대해 부채의식을 갖고 안쓰러워하면서 뭔가 도움을 주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했다는 것이다.(주진우, 같은 인터뷰)

광주의 힘, 죽음으로 광주를 만든 사람들이 가진 힘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이 변화는 사람들 스스로가 기꺼이 자신을 광주의 요구에, 광주의 충격에 맞췄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기홍은 1980년 5월 17일 밤 집에 있다가 계엄당국에 검거되었다.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광주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이 집에 멍하게 있다가 잡혀와 포로로 있는 동안 밖에서 동지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박정희가 죽고 이제 좋은 세상이 왔으니 자신도 대학원에 가서 전공공부를 깊이 하고 싶었는데, 5·18 소식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지워버렸다고 말했다.(유기홍, 2009.1.19, 평화박물관)

하종강은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이 훗날 김의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가 “너 그때 뭐하고 있었냐?”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잘 숨어 있었다는 것밖에는 없다는 사실에 몹시 슬펐다면서, “난 너처럼 죽진 못했어도 열심히 살았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시시때때로 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만일 그때 광주에 있었다면 도청에 갔을까라는 질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종강은 지금도 책상머리에 있는 칠판에 “총을 들었을까?”라는 글귀를 써놓고 있다고 한다. 하종강은 윤상원처럼 죽을 걸 알면서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이 없었다면 광주는 그냥 200여명 죽고 만 사건이 되었을 것이라면서, “그래서 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게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작은 원칙이라는 거거든”이라고 덧붙였다.(하종강 인터뷰, 2009.3.2, 평화박물관)

1980년 5월 당시 박관현의 호위대원이었다가 항쟁 발발 이후 가족들이 시골의 친척집으로 피신시켜 ‘안전’하게 항쟁기간을 보낸 최정기는 오래도록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광주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 중에 가족의 보호를 받는 대학생은 별로 없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가까운 친구 중엔 죽은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결국 내 친구란 게 부모가 다 보호하는 친구들이니까. 부모가 보호하는 친구들은 안 죽어. 나처럼 시골로 피신시키거나 집에서 잡고 안 놔줘버리거나. 대부분 자취생이고, 학생들은 실은 많이 안 죽어. 잘 도망 다니고.” 그는 대학원에 진학한 후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가톨릭 쪽으로부터 5·18을 주제로 한 최초의 설문조사에 동참할 것을 부탁받았다. 이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 준비중인 석사논문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석사논문을 포기한 채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그는 공부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유혹이 있을 수 있는데, 광주의 체험이 자신에게 “최소한 이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염치의 기준이 되었다고 말했다. 2000년 그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비전향장기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1992년 논문 준비를 시작할 때의 분위기로는 그 주제로 논문을 쓰면 이후 대학에 자리잡을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최정기는 이 주제를 밀고나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계산하고 싶지 않았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옳다고 생각한 일이니까.” 그날 도청에 들어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계산기가 멈춰버린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7. 맺음말

 

광주는 오랫동안 동시대인들의 삶을 규정했고, 많은 사람들이 또 기꺼이 광주가 규정해주는 삶을 살았다. 광주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1980년 5월 그날 도청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원죄나 다름없었는지 모른다. 80년대에 운동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광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는 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의 삶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광주의 학살자들과 싸우다 죽을 수 있다는 자각과 공포가 짙게 배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백골단과 최루탄의 공포 속에서도 투쟁의 현장을 비켜가지 않았고, 또 비켜갈 수도 없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와는 달리 운동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지역 출신인가에 따라 다르지 않았다. 광주는 처음부터 ‘전국구’였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이 광주의 힘이었다. 기꺼이 자기 삶을 광주의, 도청의 부름에 호응하도록 내던지는 치열한 자세가 결국 광주를 계승한 6월항쟁을 만들어냈고, 이 땅에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광주를 계승해 군사정권과 싸워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사했고, 분신하고 투신하고 할복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운동진영의 투사들은 민주화, 민족통일, 민족자주, 민중해방 같은 높은 목표를 추구하면서 ‘당위’로써 죽음을 ‘극복’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인 죽음은 운동진영 내에서 이런 식으로 ‘극복’되었고, 죽은 이들은 ‘열사’라는 이름으로 애도만이 아니라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분신이니 투신이니 할복이니 하는 것들은 운동사적으로 전술적으로 소수운동권을 각성시키고, 결집시키고 순간적인 동력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을지 몰라도, 대중들에게는 무섭고 이상한 것”이었다. 문용식은 먹고사는 일상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욕구를 인정하지 않고 “당위로 죽음을 극복한다는 게 국민들에게는 시쳇말로 ‘좌빨’이 되는 거거든. 생각이 뭐든 간에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회의 위험세력으로 비칠 가능성이 많고 그런 선전선동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지”라고 지적했다.(문용식, 2009.1.19, 평화박물관) 똑같은 죽음이지만 분신을 택했던 김세진, 이재호의 죽음보다 대공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숨진 박종철의 죽음이 대중의 엄청난 공분을 끌어낸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죽음은 다 같은 죽음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같은 죽음이 아니다. 죽은 사람과 나의 관계에 따라, 그밖에도 크고작은 변수들은 각각을 ‘등가의 죽음’이 아니라 서로 의미가 매우 다른 죽음으로 만든다. 광주에서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헌신적인 투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투사들은 그 ‘헌신성’ 때문에 일반 국민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그 당시 투사들은 광주를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 광주를 외면하는 사람들, 나아가 광주를 모르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원망했다. 극심한 언론통제에 집단적인 죽음이라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주제까지 겹친 터에 일반인들이 광주에 대해 잘 모르거나 폭동이라는 편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는 일반 국민들은 광주 문제에 목을 매는 운동진영을 당연히 이상한 사람들로 여겼다. 운동진영의 투사들도 늘 ‘대중성’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광주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미운 건 미운 거였다. 광주의 죽음을 자기 삶 속으로 받아들인 사람들과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은 상호소외의 길을 걸었다.

한국은 동서냉전이 끝나기 전인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민주화의 궤도에 들어섰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한국에서 냉전이 끝나기 전에 민주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87년이라면 광주에서의 처절한 패배가 있고 겨우 7년이 지난 때였다. 처절한 패배를 짧은 시간 내에 승리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죽음을 끼고 산 광주의 자식들이 이룬 성취였다. 광주의 자식들이 주역이 된 민주화운동은 1997년에는 마침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민주세력은 10년간 집권한 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여 권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광주의 자식들의 맏형 격이던 노무현 대통령은 벼랑 끝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무현의 죽음은 민주화운동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제 광주가 낳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온 사람들의 세대는 끝나버렸다. 이명박정권의 등장 이후 민주주의의 역행이 심각하다고는 하지만, 광주의 자식들이 주역이 되어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다. 죽음을 끼고 살아야 했던 광주의 자식들은 참으로 열심히 싸웠고 많은 것을 성취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것도 많았고, 이상해진 사람들도 많았다. 민주화가 그들만의 민주화로 끝나버리는 사이,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지금 한국사회의 최대 문제로 부상한 비정규직은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문제는 민주정권 시기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갔다. 민주화운동 세대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것의 해결에도 무능했다. 이 땅에 민주정권이 들어섰다는 것은 광주의 죽음과 삶을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광주의 자식들이 추구해온 꿈이 일단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주정권하에서 민주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은 이제 광주의 자식들보다도 일자리, 집값, 교육비 같은 문제에 죽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아니 시장에서 콩나물값 100원에 당장 연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게 되었다. 민주화돼서 살림살이가 나아졌는가? 이 점에서 민주운동세력은 대중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광주의 자식들이 주역이던 민주화운동의 시대는 27일 새벽 도청에서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노무현의 죽음으로 끝났다. 광주시대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매개로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날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죽음에서 노무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30년, 그 한 세대 동안 한국현대사는 많은 죽음과 대면해야 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좌절과 패배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 패배의 상당부분은 도청을 덮쳐왔던 계엄군 세력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광주의 죽음을 끼고 산 사람들과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은 분명 상호소외의 길을 걸었지만, 소외가 여기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10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 129일간의 고공농성 끝에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맸을 때, 노무현은 이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단호히 얘기했다. 광주의 자식들이 아직은 완전히 갈라지지 않았던 1994년, 김주익이 LNG선상파업으로 구속되었을 때 노무현은 김주익의 변호사였다. 과연 광주에서는,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져온 죽음의 행렬에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죽는 것 빼놓고는 안해본 것 없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 올랐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을 뿐이다. “야, 기분 좋다!”라며 귀향했던 노무현마저 1년 남짓 후 몸을 내던졌다. 광주의 자식들은 김주익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 사이의 거리만큼, 딱 그만큼 서로 소외되어 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꿈꾸던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민주주의가 살아넘치는 한국, 그 한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민주세력이 10년간 집권했던 대한민국에서 장래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적는 아이들이 있다면 도대체 그날 도청에서 그들은 왜 죽어야 했던 것일까? 그 새벽, 그들의 죽음을 숭고한 것이라고 미화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우리 손으로 뒤늦게 개죽음을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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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령경 「KoreanWar전후 좌익관련 여성유족의 경험연구」, 성공회대 NGO대학원 석사논문 2003.
  2.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피해대중과 학살의 정치학』하, 역사비평사 1999, 531~39면, 702~31면.
  3. 김기진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2002, 247~79면.
  4. 당시 유족회의 활동과 그들이 받은 박해에 대해서는 한상구 「피학살자 유가족 문제」,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한길사 1990) 참조.
  5. 서중석, 앞의 책 726면.
  6. 6) 졸고 「죽음을 죽인 한국현대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기 보고서 『진실을 향한 험난한 여정』, 2004.

  7. 조연현 「긴급조치 30년과 한국의 민주주의」, 『긴급조치, 그 악마의 시대』,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동지 10주기 기념토론회 자료집, 2004년 8월, 20면.
  8. 김지하 「고행: 1974」, 『동아일보』 1975.2.26.
  9. 인혁당 피의자들의 전격적인 사형집행 경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인민혁명당 및 민청학련 사건 진실규명」, 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제2권(주요의혹사건편 상권), 2007, 258~69면 참조.
  10. 「YH노조 김경숙 사망관련 조작의혹 사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8.
  11. 『부산민주운동사』,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387~430면.
  12. 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10·26 재평가를 위한 자료모음』,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 2000, 124~26면. 「항소이유보충서」는 김재규 자신이 쓴 것으로 변호인단이 작성한 「항소이유서」에 비해 그의 생각이 더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13. 강용주 인터뷰, 2008.12.9, 서울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이하 인용에서는 인터뷰 대상자의 이름과 날짜, 장소를 본문의 괄호 안에 적는다. 인터뷰는 서울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이하 평화박물관)와 광주 5·18기념재단(이하 재단)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14. 「시위선동 남파간첩 1명 검거」, 조선일보 1980.5.25.
  15. 이정환 「시민군 윤상원과 광주민중항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말』 2005년 6월호, 106~11면.
  16. 1980년 5월 25일 제3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에서 배포된 「광주시민 여러분께」라는 유인물은 미 7함대 항공모함 6척이 부산에 정박하여 전두환 일파의 더이상의 무모한 만행을 견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찬승 「선언문, 성명서, 소식지를 통해 본 5·18」, 광주광역시5·18사료편찬위원회 『5·18민주항쟁사』, 393면.
  17. 윤상원에 대해서는 박호재·임낙평 『윤상원 평전』, 풀빛 2007 참조.
  18. 하종강 홈페이지 ‘하종강의 노동과 꿈’(www.hadream.com)에서 재인용.
  19. 한홍구, 앞의 글.
  20. 사이버민주·인권정보관 http://cyberhumanrights.com/Kor/Information/1st/PERSONVIEW.html?code1= HCL07&lang=KOR&lpage=33&no=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