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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부조리한 이야기에서 주체적인 삶으로

천명관 장편소설 『고령화 가족』

 

 

김남혁 金南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거대서사 이전에 쓰이고 거대서사 이후에 도착하는 서사」 「제국기계 앞에서 눈감는 소설」등이 있음. theclassic@hanmail.net

 

 

천명관이 첫 장편 『고래』(문학동네 2004)를 통해 독자들에게 제시한 명제는 “이야기는 계속된다”(406면)였다. 『고래』의 거침없는 이야기는 장르들 간의 혼종적인 접속을 유도했고, 그 접속은 소설의 규범을 교란했으며, 그 교란은 거대서사의 그늘 아래 가려졌던 작은 이야기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그렇기에 『고래』의 화자는 전지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일관성이니 통일성이니 하는 이성적인 질서에 맞게 이야기를 지배하는 자라기보다 그것을 한바탕 풀어주고 해방하는 이야기꾼에 가까웠다. 여담과 중심서사를 가르는 권위적인 기준이 사라진 이 소설에서 화자는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310면)이자 진실에 대한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어떤 사태에 대한 해석을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406면)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독자들이 정해진 답으로 이끌리는 불편함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공감과 해방감을 느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처럼 ‘이야기는 계속된다’라는 명제를 내세웠던 천명관은 흥미롭게도 『고령화 가족』(문학동네 2010)에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286면)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이제 그는 우연하고 부조리한 삶의 이야기를 포기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거대서사를 비껴나는 이야기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 행동을 방기하는 데 알리바이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포기한 것이다.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행동이 진실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주체적인 행동을 포기하는 구실이 된 현상황에서 그는 주체적인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거대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삶의 부조리한 이야기들이 『고래』의 핵심이었다면, 삶의 부조리한 성격을 변명 삼아 주체적인 행동을 포기한 주인공의 기만과 그 기만에서 벗어나게 되는 주인공의 성장이 『고령화 가족』의 핵심이다. 『고령화 가족』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48세의 영화감독으로 현재 경제적으로 파산상태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떠났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이유는 단지 내 데뷔작이 흥행에 실패했다는 데 있다. 영화사 관계자들은 흥행에 실패한 나를 시종 “관객과의 의리”를 지키지 않은 “배신자”라며 몰아세운다. 이 소설에서 ‘배신’ ‘의리’ ‘정리(情理)’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발화하는 일종의 키워드다. 주인공 나는 이렇게 낭만적인 단어가 인간마저도 교환가치의 대상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사회의 냉정한 씨스템을 감추기 위한 허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낭만적인 수사를 믿지 않기에 수자씨의 미용실에 씌어 있는 릴케의 낭만적인 싯구를 보고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고, 신파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비웃는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자본주의사회의 낭만적인 수사를 단순히 냉소한다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문제는 스스로 그렇게도 신랄하게 냉소했던 자본주의의 기만적인 씨스템과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나 역시 타인과 관계맺어왔다는 데 있다. 내가 엄마의 집에 들어와서 진정 알게 되는 것은 엄마의 불륜행위와 형제들의 출생 비밀이라기보다, 이제껏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보고 싶은 점만 보려 했으며 그들의 진짜 삶에 한번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태도다. 중년인 내가 미성년처럼 보이는 이유도 이런 태도에서 비롯한다. 나는 낭만적인 인식이 기만적이며 현실은 부조리하다는 점을 빌미로, 어떠한 주체적인 결단도 미루는 미성숙의 인물이다.

영화사 사람들이 ‘의리’니 ‘정리’니 하는 말들을 기만적으로 사용한다면, 나의 가족들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엄마에게 정리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함께 가정을 꾸렸던 죽은 남편을 끝까지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자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들마저도 평생 보살피려는 헌신과 다르지 않고, 형 오함마에게 의리는 가출한 조카를 찾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전존재를 거는 행위와 같다. 이들에게 의리란 이것저것 재고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한 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의 이익이 없더라도 가족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려는 맹목적인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엄마와 오함마를 가족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볼 수는 없다. 이들은 가족을 혈연공동체로서 숭고하게 미화하기 위해 의리를 내세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와 오함마는 가족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허용될 수 없는 것도 의리와 정리를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실천한다. 엄마는 죽은 남편을 평생토록 잊지 않으면서도 가족을 해체시켰던 전파상 구씨에 대한 사랑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오함마는 가출한 민경이 단순히 가족이라서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결백을 유일하게 믿어준 존재이기에 찾는다. 엄마와 오함마에게 정리와 의리는 가족이데올로기를 포장하기 위한 허울뿐인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사랑과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결기이자 오기를 표현한 말이다. 엄격히 말해 그들이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믿음은 가족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켜내는 가족은 폐쇄적인 혈연공동체를 미화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에게 가족은 개방적인 인간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을 때 이루어지는 하나의 결실이다.

이 소설이 인간들 사이의 의리 운운하는 무거운 주제를 시종 유쾌한 화법으로 그려내는 것도 나의 가족들이 추구하는 의리의 독특한 성격에서 비롯된다. 이는 죽은 아버지가 중고 오토바이로 배달일을 하면서도 사계절 내내 카우보이 롱부츠를 벗지 않았던 고집과 비슷하고, 신체적으로 허약했지만 지휘관이 되어 병사들을 진두지휘하길 원했던 헤밍웨이의 허영과도 닮았다. 고집스럽고 허영심에 빠진 그들의 모습은 남들에게는 상식 밖의 “우스꽝스러운 행동”(203면)으로 보이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어떠한 상식과도 타협할 수 없는 숭고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엄마의 정리와 오함마의 의리는 가족이데올로기와 겹쳐 보이면서도 가족이데올로기의 환상을 가로지르고, 숭고하면서도 유쾌하다. 나의 성장은 이처럼 독특한 성격을 지니는 의리를 깨닫고 실천할 때 이루어진다. 그 실천의 한 예는 내가 캐서린과 인간적인 관계 없이 성적인 관계만 맺었던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그 이상의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상대의 이질적인 성격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도탑게 살아가는 이 성장의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엄마가 말했던 인간적인 정리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열정적인 사랑보다 더 차원 높고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285면)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품이 모성을 신화화하는 소설이라든가, 어머니 안에 있는 여성적 욕망을 탐색하는 소설이라든가, 가족이데올로기를 신비화하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령화 가족』은 부조리한 삶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주체적인 결단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인간의 의리를 탐구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사회변혁에 대한 희망이 희박해진 지금 이 시대는 어쩌면 타인과의 절절한 사랑을 추구하던 청년기가 지나고 홀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중년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천명관은 그 한가운데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