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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고병권 외 『리영희 프리즘』, 사계절 2010

‘사상의 은사’를 투과하는 무지갯빛 교양

 

 

정연주 鄭淵珠

언론인 yunjoo46@gmail.com

 

 

요즘 리영희(李泳禧) 선생님, 많이 편찮으시다. 육신의 큰 고통과 매일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신다. 야만의 시대 군사정권에 의해 아홉번의 강제연행, 다섯번의 감방생활, 언론과 대학에서 각각 두번 강제해직된 그의 삶에서 보듯 역사와 시대의 무게, 아픔, 고난을 감당해온 그의 육신이 지금 큰 고통에 갇혀 있다.

비록 육신은 병마에 갇혀 있더라도 그의 사상은 세대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활보한다. 이를 증명하듯 나온 책이 바로 『리영희 프리즘』이다. 생각하기(고병권), 책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사회과학(은수미), 청년세대(한윤형), 인터뷰(김현진)까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세대의 필자들이 ‘리영희 경험’을 이야기하고, ‘리영희’를 분석하고, 그런 프리즘을 통해 각자의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고병권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16면)에 ‘사상의 은사(恩師)’라는 이름이 리영희에게 주어졌다고 했다. 그러니까 야만의 시대가 강요한 ‘우상’과 ‘신화’에 맞서서 살아온 리영희의 구체적인 삶과 치열한 글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진정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해준 것이다. 고병권의 말을 빌리면 ‘우상’과 ‘신화’는 “생각 없음” “생각하지 못하게 함”인데, 리영희는 그것을 깨뜨리는 ‘우상파괴자’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체적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반대는 “동물도, 식물도, 무생물도 아니다. 그〔리영희〕는 인간의 부정을 ‘노예’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유야말로 인간 존재의 전부라고 했다. 따라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노예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30~31면). 리영희 사상과 중심가치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자유’를 가장 잘 압축한 말이다. 그리고 구술 자서전 『대화』(한길사 2005) 머리말에서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한편 ‘책읽기’라는 주제로 리영희를 이야기한 천정환은 짧은 글 속에서 리영희의 독서경력, 70~80년대 정신사, 386세대, 오늘의 세대까지를 참으로 예리하게 분석·정리한다. 그러면서 리영희 자신의 책읽기, 리영희가 쓴 책 읽기, 리영희가 쓴 책을 읽지 않기 등으로 영역을 나눠 종횡무진으로 주제를 풀어간다. ‘리영희의 책읽기’에서는 리영희의 사상적, 지적 토양이 된 소년·청년·장년기의 책읽기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훌륭한 독서목록을 소개한 셈이다. 소년·청년기에 리영희가 읽은 책은 대부분 문학작품이었다. ‘열렬한 문학독자’인 리영희는 이때 나라 안팎의 소설을 섭렵했고, 특히 외국문학의 경우 원서로 읽음으로써 그의 인문학적 어학실력의 토양을 마련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병영과 참호 속에서도 영어판 도스또옙스끼 작품들을 비롯한 고전을 읽었다.

천정환은 이어 ‘리영희 읽기’에서 『전환시대의 논리』의 힘을 언급하고, ‘리영희 읽지 않기’에서는 6월항쟁 전후 세대가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같은 책 대신 어떤 서적들에 탐닉했는지, 그리고 그 치열한 이념의 현장은 어떠했는지 정리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지금 세대의 고뇌와 세태를 나름의 틀로 분석했다.

지금 세대의 고뇌와 실태는 한윤형과 김현진의 글에서 아주 생생하게, 때로는 도발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한윤형은 리영희를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오늘의 이십대는 1980년대생이니, ‘사상의 은사’인 리영희의 손자뻘이다. 한윤형은 리영희 세례를 받고 의식화된 젊은 세대와 통·블·생(통기타, 블루진, 생맥주)의 청년문화 사이를 짚으면서, 이 둘의 관계를 통해 시대를 분석한다. 70년대에는 청년문화와 리영희가 긴장관계에 있었고, 80년대 후반에는 후자가 승리했다고 본다. 그런데 운동권 주도의 ‘민중문화’가 대중문화를 압도하던 이때부터 “리영희는 종착역이 아니라 교착지”였다. 맑스주의 시대였던 당시, “리영희의 책을 읽고 정신이 깨인 젊은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진정한 사회주의자로 거듭나야 했”(199면)으며, 그러기 위해 독서의 영역은 엄청난 질적 변화를 보였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한 90년에 들어서면 정반대의 역전현상이 벌어져 학생운동권은 침체의 늪으로 빠지고, 대중문화는 전성기로 치닫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어떠한가. 한윤형은 “리영희와 청년문화의 대립항 자체가 상실된” 채 “각자의 고립된 공간에서 고립된 주체로 살아간다”고 본다. 그리고 자기 세대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함께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리영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런 답을 내놓는다. “우상과 이성이 구별되지 않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섣부른 근본주의나 간편한 냉소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객관화하려는 성찰 그 자체다. 이전의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그런 성찰 속에서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이 가졌던 치열함은 우리에게 그런 성찰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닐까.”(209면)

마지막 장에서 김현진은 젊은 세대의 필체로 ‘리영희 스타일’을 해석하며 선생과의 귀한 대화록을 남겼다. 2009년 팔순잔치를 차려드리려는 후배들의 정성을 “엄혹할 만큼 반듯”하게 거절한 에피쏘드나, “나는 평생을 두고 독불장군으로, 외로운 늑대처럼 소리 지르는 처지였다”는 『대화』의 한구절처럼 한국전쟁 7년 동안 향로봉과 지하벙커 등지에서, 그후에는 형무소 감방이나 지하실 감방에서 많은 날들을 보낸 그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선생님은 고독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일인자였다. 고독할 바에야 아주 끝장을 보듯 고독한 것, 그 역시 ‘리영희 스타일’이었다”(214면)고 적었다. 그뒤에는 리영희와 나눈 길고 생생한 대화가 이어진다. 김현진은 역시 요즘 세대다웠다. 글 마지막에 그는 리영희를 ‘오빠’라 불렀다. “조용필이 영원한 오빠인 것은 그가 부른 노래가 영원히 젊은 채로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의식화의 원흉, 사상의 은사, 살아있는 신화, 성찰의 대부, 그리고 살그머니 ‘사상의 오빠’라고 남몰래 불러본다”.(237면)

『리영희 프리즘』은 이밖에도 전쟁, 종교, 영어공부,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등 다양한 영역과 주제에서 리영희를 조명하고, 때로 뛰어넘으려 시도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선생과 관련해 독립주제로 다뤄지지 않은 중요한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리영희와 글쓰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리영희의 글쓰기에 대한 대목이 있다. 그러나 선생은 특히 아름답고 쉽고 정확한 글을 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왔기에 별도의 주제로 다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000년 그의 몸이 무너지게 된 것도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무리를 하다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내 글이 문학은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을 쓰도록 노력해왔다. 그래서 200자 원고지에 혹 같은 낱말이 들어 있으면 다른 낱말로 대체하고, 한 문장의 길이가 200자 원고지 세줄 정도를 넘지 않도록 신경을 써왔다. 문장은 가능하면 짧게 하고, 긴 문장이 나온 뒤에는 짧은 문장이 두세개쯤 나와서 독자가 한숨 돌릴 수 있도록 구성을 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좀 긴 문장을 쓰고, 핵심을 담고 있는 문장은 짧게 끊어서 쓰곤 했다. 문장이 길면 읽는 사람의 호흡이 가쁘고, 앞뒤 의미의 연결에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지.”(김민웅의 리영희 인터뷰, 『프레시안』 2005.3.29)

리영희 선생의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명징성은 그의 글쓰는 자세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 스승은 우리 곁에 그냥 있어만 주어도 마음이 넉넉하고 든든한 법이다. 선생님의 건강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