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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아이폰과 트위터와 외로운 시민들

 

 

이상술 李相述

창비 문학출판부 편집자

 

 

아이폰을 사고부터 밤잠이 부족해졌다. 새벽까지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겨우 잠드는 때가 많다. 낮에도 손에서 한시도 놓지 못하고, 그 때문에 여러번 주위의 핀잔을 듣기도 한다. 이게 아이폰 중독인가 싶다. 아이폰(정확히는 아이폰을 위시한 스마트폰)만 있으면 데스크톱에서 하는 거의 모든 일을 걸어다니면서도 할 수 있고, 어디서나 항상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 아이폰이 잠시라도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게 되면 안절부절못한다. 일종의 분리불안, 휴대폰 중독과 인터넷 중독이 결합된 꼴이다.

아이폰으로 트위터를 접하고 증상은 더 심해졌다. 잠들기 전엔 꼭 미적대며 자리에 누워 멍하니 트위터를 훑어본다. 내가 따라읽는 이들의 일상사와 잡담과 소식과 논평과 유머와 잠언과, 괜찮은 기사와 블로그 포스트를 추천하는 단문의 재잘거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차단당하지 않는 한 누구의 말이든 따라읽을 수 있고, 내 말도 누구나 따라읽을 수 있다. 이 사람을 따라읽는 사람을 따라읽는 사람을 따라읽는 사람…을 계속 따라가면 끝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과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어떤 말들은 그 거미줄을 따라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한다. 아이띠 지진도 그래서 TV나 신문보다 트위터를 통해 먼저 알려졌다던가. 꼭 그 때문이 아니라도, 낚시질과 나팔질로 어지러운 포털과 신문을 보고 앉았느니 트위터를 통해 유통되는 소식만 보아도 충분하고 그게 정신건강에 이롭기까지 하니, 언론매체들이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기존의 언론매체가 대형마트라면 블로그는 좌판이고 트위터는 행상쯤 될 텐데, 인터넷세계는 거꾸로 행상이 대형마트를 위협하는 기이한 형국인 셈이다. 하기야 원래 언론이란 게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식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겠나.

하지만 트위터를 대안적인 미디어로 보는 건 언론의 호들갑인 듯하고, 체감하기에 트위터는 그보다는 이를테면 거대한 파티장을 연상시킨다. 파티에 참석하면 누구나 이 사람 저 사람과 자유롭게 말을 섞을 수 있고, 그래서 평범한 여고생이 노회찬이니 박경림이니 박중훈이니 하는 유명인들을 손쉽게 직접 인터뷰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실제 파티와 마찬가지로 트위터에서도 쉴새없이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만히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가끔씩 맞장구만 쳐주는 사람도 있다. 유명한 사람 주위에 항상 사람들이 드글거리는 것도, 자선모금운동 같은 것이 벌어지기 쉬운 것도 파티를 닮았다. 애초에 쏘셜네트워크써비스(SNS)라는 말을 보아도 그렇다. SNS를 대개는 ‘사회관계망 써비스’나 ‘인맥구축 써비스’로 풀이하는데, ‘사회관계망’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히 거창하고 어려운 물건인 것만 같고 ‘인맥’이라고 하면 폐쇄적인 정실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그보다는 ‘사교’가, 왠지 ‘상류층’이나 ‘불륜’ 같은 단어를 연상시키긴 하지만, 더 어울린다. 애초에 ‘society’의 번역어가 ‘사회(社會)’로 안착되기 이전에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가 쓴 말도 ‘교제(交際)’였잖은가. ‘인민의 교제’ 운운. 덕분에 트위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괜히 ‘개인’과 ‘사회’의 기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또는 우리 식으로 치면, 폐쇄적인 정실주의와 거창한 집단주의 사이의 빈 곳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본래 정치가, 민주주의가 발생하는 곳이 여기였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 우리에게 그런 공간이 있었던가, 하고.

트위터가 폭발적으로 유행하면서 트위터를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의 광장으로 이해하고 여기서 참여민주주의의 확대 가능성을 읽어내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법한 것이, 트위터에서는 (읽고 쓰기를 할 수 있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한에서) 성별, 나이, 재산, 지위, 종교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일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평등한 사회적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 어디까지 그런지는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렇게 평등한 주체란, 한편으로 적어도 트위터 내에서는 실제 세계의 복잡한 속성이 배제된 추상적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시민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일종의 가상이야말로 형식적 민주주의의 이념을 성립케 하는 토대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러니 트위터만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재확인하는 것 이상의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추상적인 시민으로서의 개인은 집단을 이루고 세력을 만들지 않으니까. 다만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듣고, 남들과의 관계를 확인할 뿐이니까. 어쩌면 트위터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듣고 남들과의 관계를 확인하지 않으면 추상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잠을 설치면서까지 트위터를 기웃거리는지도.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트위터를 닫는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는다. 세계 곳곳의 공개 웹캠 화면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아이폰 어플을 켜고 미야기현의 펭귄들을 본다. 펭귄들은 모두 잠들어 있고 종종 한두 녀석이 파닥거리며 잠을 설친다. 오카리나 어플을 연다. 노르웨이에서 누군가가 「예스터데이」를 오카리나로 서툴게 연주하는 소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화면에 비치는 지구는 늘 어디나 밤이고, 늘 누군가 고즈넉하게 오카리나를 불고 있다. 이번에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에 부가정보를 제공하는 가상물체를 겹쳐 보이게 만드는 것) 어플 중 하나를 켜고 내 주위를 한바퀴 둘러본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트위트가 아이폰 카메라 화면에 둥둥 떠 있다. 닫힌 내 방 창문 너머, 저기 서교동에서 누군가 맥주를 마시며 축구경기를 보고 있다. 멀리 누군가는 오랜만에 월드컵공원을 찾았던 모양이고, 또 저기 누군가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주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딱히 나에게 하는 말들은 아니지만, 저들과 이어진 누군가는 저 지저귐들을 듣고 있을 테고, 누군가는 거기에 응답할 것이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다. 다시 다른 어플을 켠다. 별자리를 보여주는 어플. 맥주를 마시며 축구경기를 보던 사람이 있던 방향으로 거문고자리가 떠 있다. 그 옆으로 용자리와 작은곰자리, 기린자리가 보인다. 창을 열어도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 별들이 마치 트위트처럼 카메라 화면에 둥둥 떠 있다.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있는 수많은 별들이 임의적으로 서로 가늘게 이어져 별자리를 그리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트위터란 것도, 저 별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서로 임의적으로, 별자리처럼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 게 아닐까. 서로의 중력에 휘말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래서 모두가 어느만큼 사회적인 시민들이지만, 모두가 별처럼 외로운 게 아닐까. 외로워서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알리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아이폰을 손에서 놓기 어렵다. 아이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