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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훈 소설집 『강산무진』, 문학동네 2006

김훈을 넘어선 김훈을 꿈꾸며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강산무진

그를 키운 8할의 에너지는 세상과의 불화였다. 나머지 2할은 고독일 것이다. 제도와 불화하고 무리 속에서 고독했던 그이기에, 어쩌면 그를 소설가로 다시 태어나게 한 힘은 제도의 횡포와 군중의 호들갑이었겠다. 김훈(金薰)의 작품에 깔린 ‘고독’은 누군가와 살을 맞댐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외로움’이 아니다. 그의 고독은 ‘다만 홀로 있음’으로써 세계의 불합리를 견디며 기꺼이 스스로의 생을 연소시키는 능동적 행위에 가깝다. 전작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2001)에서 도드라진 것은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관객도 아군도 없이 세계 전체와 맨몸으로 독대하는 한 인간의 준엄한 내면의 무늬였다. 『칼의 노래』는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한 세계를 오롯이 건축하려는 작가의 집요한 의지를 담고 있다. 수사학적 탐미주의를 넘어 문장의 건축술 자체를 극단으로 밀어붙임으로써 문체 자체가 세계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열정, 그것이야말로 김훈적 영역이었을 것이다.

『칼의 노래』의 장엄한 스케일과 고해의 치열성에 매료되었던 독자에게 『강산무진』은 싱겁거나 무료할 것이다. 무사로서 최후의 존엄을 간직한 채 장렬하게 죽어가는 전사의 독백에 비한다면 『강산무진』은 세상의 오물을 묵묵히 뒤집어쓴 자들의 비애어린 독백에 가깝다. 『강산무진』은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신을 더럽힌 인간들을 향한 치밀한 관찰자의 기록이다. 『칼의 노래』는 화살로 몸을 뚫고 칼로 살을 베는 치열한 직접성의 세계였다. 『강산무진』은 인간의 모든 욕망이 철저히 화폐나 언어로 매개되는 간접성의 세계다. 「배웅」의 택시운전기사, 「항로표지」의 등대장과 전직 전자회사 직원, 「화장」 「언니의 폐경」 「강산무진」의 대기업 임원 등, 그들이 겪는 생활의 피로와 내면의 갈등을 어김없이 가로지르는 빗장은 ‘화폐’다. 칼과 방패가 사라진 자리에 화폐와 언어가 들어앉는 순간, 김훈 소설의 정서는 ‘삼엄한 숭고미’에서 ‘지리멸렬한 권태’로 탈바꿈한다.

『강산무진』의 주인공들은 아내가 죽거나 자신의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에도 은행의 잔고와 회사의 부채를 꼼꼼히 계산해야 하는 자신의 ‘책임’을 어김없이 실천한다. 그들에게는 죽음을 애도할 여유도, 너무 늦게 찾아온 사랑을 읊조릴 낭만도 없다. 종잡을 수 없는 내면의 물컹물컹한 출렁임을 반드시 ‘언어’의 형식을 통해 표현해야 하는 세계에서, 개인의 진심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54면)로 스러져갈 뿐이다. 『강산무진』의 인물들은 “뛰고 또 뛰어서 뛴 만큼만 벌어먹고 산다”(20면)는 생존의 잔혹성을 온몸으로 증거한다. 생로병사에 대한 모든 낭만적 허영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건조한 문장의 여백 사이로, 차라리 애잔한, 현대인의 삶 자체에 대한 연민이 서린다. 자본의 검은 혀가 일상의 곳곳을 핥고 지나간 자리에서, 『칼의 노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들이 탄생한다. 예컨대 「뼈」의 오문수는 기존의 김훈 소설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던 코믹한 세속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김훈적인 요소 또한 『강산무진』의 중저음으로 깔려 있다. 어떤 거대담론이나 통계적 수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개별성’을 파고드는 김훈의 붓끝은 변함없이 집요하다. 다만 인간의 개별성을 짓밟는 요소가 하나같이 화폐와 연루된다는 점, 훨씬 더 비열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개별성의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화장」에서 주인공의 회사는 여성의 질 세척제를 개발하여 새 활로를 개척하려 하지만, “수많은 질들의 개별성을 극복하기가 어렵다.”(51면) 논리나 물증을 통해 밝혀질 수 없는 시간의 심연, 제도나 유행으로는 캐낼 수 없는 존재의 개별성, 이것이야말로 김훈의 특허 모티프임은 여전하다. 구원 없는 세계의 삭막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개인의 침묵이야말로 김훈이 ‘편애’하는 인간의 소중한 개별성이다. 그들은 모욕과 배신으로 점철된 세속의 한복판에서 패배도 승리도 없는 일상을 묵묵히 견디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칼조차 쥘 수 없는 이 시대 정신적 무사들의 처연한 생존방식이다.

한편 『강산무진』에서 묘사되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그 육체적 싱그러움으로 인한 매혹의 대상이거나 세계에 대한 무지몽매함으로 인해 사물화된 존재로 묘사된다. 김훈 소설의 젊은이들은 어미와 아비의 죽음 앞에서도 좀처럼 일상의 리듬을 허물지 않으며, ‘고뇌하여, 그리하여 살아 있는’주체로 묘사되지 않는다. 김훈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디지털미디어 세대의 감각을 ‘계통 없는’것으로 치부함으로써 그들을 향한 소통의 몸짓 자체를 차단하는 것은 아닌지. 그는 변화무쌍한, 그래서 ‘계통 없어 보이는’당대성 자체에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닌지. 위엄과 격조를 갖춘 과거의 인물, 비밀과 신성을 갖춘 사물에만 매료되는 작가적 시선이라면, 과거의 존재를 다룰 때 빛나던 언어가 당대적 일상으로 옮겨오면 빛을 잃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김훈이 혐오하는 ‘계통 없는 존재’들은 차라리 계통의 ‘복잡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계통 없음에 대한 증오는 계보를 추적하기 어려운 ‘하이브리드’적 존재들에 대한 혐오, 나아가 정신적 귀족주의나 순혈주의는 아닌가. 『강산무진』의 화자는 이제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 자의, 삶 자체에 대한 거대한 조감도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이 시점은 이미 ‘세상을 다 읽은 자’의 눈길, 세상 모든 것을 굽어보는 자의 초월적 시선은 아닌가.

불화를 불화인 채로 견디는 의지, 그것은 김훈 소설의 힘이었다. 그러나 『강산무진』의 주인공들은 예전만큼 강렬하게 불화와 불화하지 않는다. 독자가 꿈꾸는 김훈은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김훈’을 넘어, ‘김훈을 넘어선 김훈’이다. 나는 그가 다시, 순연한 아마추어의 무구함으로 프로페셔널의 격자화된 세계를 가격하는 망치로서의 소설을 쓰길 원한다. 그는 또다시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339면) 앞에 홀로 서 있어야 한다. 그의 작품에서 또다른 칼의 절규가, 타인이 아닌 자신을 찌르는 칼의 순정성이 뿜어나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