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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W. 워런 와거 『인류의 미래사』, 교양인 2006
역사가에게 듣는 미래 이야기
송충기 宋忠起
공주대 교수, 서양사학 ms2991@kongju.ac.kr
최근 ‘근대’를 모태로 하는 개념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미래라는 새로운 형식의 사회적 시간이 발명된 것도 근대이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과 진보의 개념으로 이제 인간은 운명을 자기 손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미래사회 예측과 인생설계가 가능해짐에 따라, 새로 탄생된 ‘미래’는 인간의 생활에 더 깊숙이 파고들게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매뉴얼 월러스틴(I. Wallerstein)이 유토피아 대신 ‘유토피스틱스’(Utopistics)라는 용어를 들고 나온 것은 반길 만한 일이다. ‘유토피스틱스’란 미래에 대한 역사적인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그것의 실질적인 합리성을 따져보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는 막연히 꿈꾸는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보던 전통적인 유토피아의 개념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훨씬 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인 것이다. 뉴욕주립대 빙엄턴 대학교수를 지낸 W. 워런 와거(Walter Warren Wager)가 쓴 『인류의 미래사』(A Short History of the Future, 이순호 옮김)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월러스틴이 ‘여는 글’을 쓴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역사가가 그려보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머리말에서 역사가가 미래의 역사를 쓰지 말란 법은 없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과거의 역사를 쓰는 것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이며, 미래의 역사가가 사용할 사료 가운데 일부는 이미 우리 수중에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 또한 은근히 미래학의 중요성과 의미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는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책임감 있게 예측하는 것”(17면)이 인류가 운명을 더 잘 개척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래도 역사가의 직업의식 때문인지, 저자는 현재의 관점에서 미래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가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어찌 보면 전통적인 역사서술 기법을 따르고 있다. 미래에 사는 한 역사가가 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말이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하는 싯점이 현재가 아닌 23세기 초일 뿐이다. 그의 씨나리오에 따르면, 앞으로 인류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다. 우선 20세기 끝자락에서 시작된 인류의 ‘극단의 시대’는 결국 21세기 중반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대파국으로 마무리된다. 인구의 태반을 앗아간 전쟁으로 인해 세계화된 자본주의도 결국 종말을 고하고,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은 세계연방정부를 만들어 ‘평등의 시대’를 펼친다. 하지만 이 시대도 오래가지 못한다. 현실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작은당’의 반란을 꾀하고 새로운 ‘자유의 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이 책은 분명 SF소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언뜻 보면 미래에 대한 무한한 상상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두 진지한 모색들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미덕은 미래의 변화상만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SF소설은 미래가 어떻게 도래하는지에 대해서 도통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은 변화해가는 ‘과정’자체를 그리고 있다. 그것도 온갖 수치와 다양한 ‘사료’를 동원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여기에서는 그다지 낯설거나 예측불허인 사건이 없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여러 ‘대안’만이 존재할 뿐이다.
게다가 이 책은 미래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초대기업의 영향력 확대와 세계정부의 수립, 에너지 및 환경 문제, 우주식민지 개발, 세계전쟁, 유전공학 및 가족의 변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주제가 언급된다. 그렇다고 사회구조의 뼈대를 이루는 거대담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에 편지, 공문서, 토론 등 다양한 형식을 빌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온갖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심지어 북한여성의 생생한 목소리도 들어볼 수 있다. 사실 미래학은 이처럼 사회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면서 일관되게 서술하는 범상치 않은 재주를 뽐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력과 이야기 솜씨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 그 이유는 자본의 광기, 인종주의, 성차별 등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진지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방식이 어쩐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인류가 직면한 여러 난제들이 세계전쟁과 과학기술의 진전 등 극단적이고 ‘케케묵은’ 방식으로 해결된다거나, 지난세기에는 좌파와 환경론자들이 서로 대결하는 바람에 풀지 못했던 문제가 이제는 이들이 서로 협력하게 됨으로써 해결된다는 식이다.
이것은 저자가 가까운 미래만을 다루기 때문에 생겨난 불가피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저자의 논의가 서구의 인식지평에서 한걸음도 더 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책에서 ‘동양’은 없다. 아니 ‘아랍’도 없다. ‘세계화된’ 미래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18세기 서구 계몽주의의 곰팡내가 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 책의 도처에서 맑스(결코 맑스주의가 아니라!)의 희미한 그림자를 접하게 된다. 책의 구성만 보아도 그렇다. 자본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고도로 발달하여 끝내 위기를 겪고(‘극단의 시대’), 또다른 제국주의 전쟁을 거쳐 독재적인 사회주의체제(‘평등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이나, 그 독재적인 사회주의체제에 만족하지 않고 진정한 공산주의(‘자유의 시대’)에 이르도록 한 것도 결코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항상 위험하다. 저자는 이 책의 초판(1989년)을 낸 뒤 10년 사이에 개정판 작업을 두 차례나 했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가 그보다 적게 수정되었다고 그 누가 주장할 수 있으랴. 저자의 ‘선배’인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 과거를 지배한다’고 말했던가. 앞으로는 미래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