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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명인 金明仁
1946년 경북 울진 출생.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동두천』 『물 건너는 사람』 『길의 침묵』 『파문』 등이 있음. mikim@korea.ac.kr
속수무책
빈농(貧農)을 먹칠하러 오는
저녁나절의 빗소리여, 산막(山幕) 후드리는
속수무책(束手無策) 소슬바람이여!
구부렸을 고개만큼 절삭당한
키 큰 수숫대가
서걱서걱 먹구름들 썰어 넘기고 있다
그 소리에 불려오는지
수수밭 뭉갠 검은
화판에 새기듯
빗살무늬 희끗희끗 흩뿌린다
사과밭
주렁주렁 사과들이 매달린
과수나무숲 이쪽에는 인기척이 없다
한 가지에 눌러앉았던
딱새일까 작은 부피 하나 허공을
떨어뜨리고 날아간다 홰치던
푸드덕거림이 사과나무 잔가지를 잠깐
감쌌다 놓아버린다
그 새가 방금 품었던 온기인 듯
가지에 난생(卵生)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고랑 저쪽에서 인부 둘이서
노란 플라스틱 궤짝을 마주 들고 와
막 부화된 설화들을 하나씩 따 담는다
시간에도 고통이 따랐을까
사과 알들은 핏빛 그득 머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