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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김나영 金娜詠
문학평론가.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신(新)-자궁에 흐르는 세 혈맥(血脈)」 등이 있음. kfbs4@naver.com
상상의 공동체(空洞體)로부터
이영주 시집 『언니에게』
새삼스럽게도 시는 시인의 몸에서 태어난다는 말을 해야겠다. 대부분의 좋은 시는 죽은 듯한 기억이 시인의 몸을 숙주로 삼아 생생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의 몸은 시와 시인의 불가분한 관계를 증명하는 유일한 실체다. 시가 태어나는 자리로서 시인의 몸은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시의 기원이 될 뿐 아니라 투명한 낙관처럼 시에 찍힌다. 우리가 시를 읽으며 눈으로는 알지 못했던, 가령 행간의 여백과 낱낱의 문장부호에서 느꼈던 무언의 흔적이 과연 질언(質言)이라 할 만한 시인의 몸이다. 우리는 이 투명한 몸을 통과해서 비로소 시로부터의 감전(感傳)을 경험하게 된다.
이영주(李映姝)의 시에서 오래된 수족관 속을 유영하는 ‘전기해파리’는 시인 자신의 비유로서 절묘하거니와, 시의 화자를 곧장 시인 자신으로 등치하는 오류를 의도적으로 범하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몸이다. 르네 마그리뜨(RenMagritte)는 자주 화판을 창문에 겹쳐 그림으로써 유리창 밖의 풍경과 화폭 위의 그림을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그림 그리기에 대한 자의식을 보여주었다. 「전기해파리」에서 기형적으로 긴 팔(“내 몸에서 가장 긴 부위는 팔”)을 가진 화자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미지의 일부를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관념을 비틀고 의식 이면의 것을 환기시킴으로써 작가의 메씨지를 전달하는 초현실주의 그림 속 인물처럼 보인다. 여기, 화자의 몸에 길게 늘어진 팔이 있다.
화자는 그 “두 팔을 천천히 휘저으며” “그의 오래된 수족관”으로 간다. 수족관의 “물결 사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화자의 이 자발적인 응시는 한순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밖의 화자와 안의 해파리를 겹쳐놓는다(“두 개의 그림자가 한 몸으로 수영을 한다”). 해파리의 촉수(“얇고 긴 털”)처럼 긴 팔을 지닌 화자가 해파리를 응시하는 일은 곧, 해파리와 화자가 서로의 촉수에 찔리는 일처럼 보인다(“해파리들이 몸을 대고 서로 찌르고 있다”). 이 일상과 상상이 뒤섞인 체험으로 인해 화자는 해파리가 되고(“물속으로 들어간다”), 시인이 된다(“끈끈한 혀끝에서 활자들이 번진다”). 이렇게 이영주 시의 화자는 그 자신 마그리뜨의 화판이 된다. 여기, 유리벽처럼 투명한 화자의 몸이 있다.
투명 안의 투명, 투명 밖의 투명. 물속의 해파리, 자꾸만 뒤집어지는 그 투명한 몸에서 안팎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영주 시의 화자가 해파리 같은 몸을 갖고 있다고 상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투명한 촉수”다. 그것은 몸 밖으로 뻗어나와 제 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다른 몸을 위협한다. 심해를 유유히 헤엄치던 그 몸이 문득 수면에 떠올랐을 때, 육지의 허름한 수족관에 그 몸이 갇혀 있을 때 그것을 보는 우리는 동시에 두 몸의 안위를 염려한다. 전시된 그 몸이 우리로 하여금 위기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마치 저 몸의 촉수를 감지하는 우리 몸의 촉수로부터 발생하는 듯하다.
이영주의 시가 그렇게 있다. 이번 시집 언니에게(민음사 2010)에서 안팎을 구분하고 드나듦을 의미하는 용언이 자주 쓰인 점을 주목해보자. 이영주 시의 화자들은 우선, 통사적으로 쓰는 안팎의 정의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드나듦과 같은 매끄러운 이해를 유도한다. 핵심은 그 다음에 있다. 그들은 내부와 외부를 각각 “내상(內傷)”과 피상으로 뒤집는다. 화자의 “피부”에 있는 “이빨 자국”(「빛나는 사람」)과 마음의 상처는 서로를 증명한다. 이 투명한 몸에서 선후나 인과관계의 구분은 무용하다. 아무리 뒤집어도 투명한 몸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여기서 이영주 시 특유의 시적 공간이 구축된다. 화자는 방위를 구분하며 입장을 만드는 대신, 제 몸을 반복해서 뒤집을 뿐이다(“나는 사방을 버리고 안쪽과 바깥쪽을 왔다 갔다 하지”, 「월식」). 그들에게 모든 축을 수렴하는 원점은 다시, 자신이다.
투명한 촉수들, 그 독이 “정점마다 구멍을 뚫”는다(「빛나는 사람」). 그것은 이영주의 시집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창문이다. 누구에게나 빽빽한 어둠속에서 저 혼자 불 켜진 방의 창문을, 혹은 환한 대낮에 심연처럼 보이는 창문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창문은 그 속에 무언가가 들어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하고도 유혹적인 것이다. 이영주의 시에서 역시 창문은 안과 밖을 차단하는 동시에 소통하게 하는 매개다. 화자는 차갑고 어두운 겨울밤, 성에 낀 어느 방의 창문을 바라보며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을 생각한다(“겨울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언니에게」). 이때 주목할 것은 창문이 구분하는 안팎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하려는 이의 결연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곧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를 스스로 지우려는 노력(“손잡이가 있으면 한 번쯤 돌려 보고 배꼽을 눌러 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볼 수 있을 텐데”)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실상 마음이라는 방은 누군가가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문득 밖이 된다. 이는 “아무도 자신을 본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이가 거울을 볼 때, 그 속에서 다만 “진열장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안쪽 부위들을 진열”(「사령선」)하는 자신을 대면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보는 일이 그러한데, 하물며 다른 이를 마음에 들이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 일은 무수한 촉수에 무방비로 노출될 때처럼 생사를 건 긴장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이영주 시의 화자들은 그 일을 유리창에 비친 안팎의 풍경을 기록함으로써(“풍경은 몸으로 만들어진다고 소녀는 공책에 적었다”, 「력(曆)의 기원」) 기어코 해낸다. 그들은 자신을 찌르고 끝내 중독시키는 것들을 온몸으로 만난다. 이렇게 창틀에 가둬지고 유리창에 비친 풍경이야말로 화자의 투명한 몸을 통과하는 “너의 원자들”(「폐교의 연혁」)이다.
그러니 그 몸이 외로운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그 투명한 몸들은 “세상의 모든 물과 똑같은 원자가 되”어 자취도 없이 흘러다닐 것이다. 이영주의 시를 읽는 일에도 “찬란한 착란의 시간”(「빛나는 사람」)을 겪은 후 찾아오는 고독이 있다. 이 기분 역시 모르는 사이에 어떤 투명한 몸이 나를 찌르고 지나갔다는, 시인의 투명한 상상에 감염되는 경험일 것이다. 이렇듯 이영주의 시는 현실보다 고독한 세계는 상상 속의 그곳임을 보여준다. 포자처럼 떠도는 상상의 몸은 대개 현실에 치명적인 고독(苦毒)을 품고 있기 마련이고, 그 촉수에 찔려 중독된 몸들은 저마다 다른 상상으로 고립되기를 자처한다(“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언니에게」). 그럼에도 어쩌면, 이영주는 투명하고 독을 품고 계속해서 뒤집어지는, 이 몸을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렇게 썼다. “나는 많은 것이 되었다가,/많은 것으로 흩어졌다”(自序). 상상에 감염된 공동체로서 우리는 다만 저 말의 질감을 믿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