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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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차병직 車炳直

변호사. 주요 저서로 상식의 힘 인권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공저) 등이 있음. bjcha@hklaw.co.kr

 
 

유행하는 부정의와 외로운 정의

손아람 장편소설 『소수의견』

 

 

3357소송을 제기한 조각가는 뭔가 분노에 차서 판사에게 대들었다. “여기는 정의를 다루는 법정이 아니란 말인가요!” “아닙니다.” 재판장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여기는 법을 다루는 법정입니다. 정의란 진리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입니다. 당신이 끌과 망치로 미를 완성하려는 것처럼, 우리는 법률을 도구로 정의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멋진 대사의 한토막이다. 대개 그렇듯이 연극의 장면은 현실에도 존재한다. 서초동의 높은 건물이 아닌 전체로서의 추상적 법정을 사법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 사법체계는 법률체계와 중첩하는 동시에, 그 내부에 현실의 법정을 안고 있다. 사법체계는 법률가, 법, 법정 그리고 한숨과 눈물 따위의 구체적 실물들로 구성된 추상적 조직이자 기계다. 실제 시간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로 만든 환상 같은 것이다. 정의가 그렇지 않은가, 이름으로는 아주 분명하지만 정체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은 사법체계라는 울타리 안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다. 거기에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의의 문제가 다루어진다고 알기 때문이다. 정의가 직접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적어도 부당한 손해를 입히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저마다 정의를 지지하고 선호한다. 그런데 사법체계의 벽은 높고 단단하다. 정의가 일상의 현장에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 소통이 쉽지 않은 사법체계 내부에서 주조된다는 형식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시민의 생활관계를 사건이란 이름으로 공적 상품화한 뒤 법률의 체로 거르는 공정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러한 보통사람들의 사법체계에 대한 의구심이나 호기심을 해소해주는 수단은 무엇인가. 사법부의 홍보나 법관의 야심찬 노력이나 수임료에 조종되는 변호사의 친절 따위는 모두 체계내 기능의 일부라서 흐릿하긴 마찬가지다. 차라리 사법체계에 모종의 의심이나 적의를 품고 덤벼드는 외부의 시선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재판을 다루는 법정소설도 그 중 하나다.

손아람의 소수의견(들녁 2010)20091월에 벌어진 용산 철거민 참사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 뉴타운 개발사업 대상 지역의 철거민들이 현장을 점거하여 망루를 세우고 농성하는데, 경찰이 들이닥쳐 무리한 진압을 시도했다. 철거민 한사람과 경찰 한사람이 사망했다. 철거민 가족 중 한 젊은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경찰의 무참한 가격이었으며, 그 장면을 목격한 젊은이의 아버지는 분격하여 경찰을 향해 치명타를 날렸다. 공무 집행중인 경찰을 살해한 피고인에 대한 재판과정이 소설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교하게 펼쳐진다. 그렇다고 사건 하나의 재판기록을 서사화한 드라마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은 경찰이 아닌 시공사의 용역업체 직원이 뒤집어썼다. 진실의 일말을 품고 있는 수사기록은 감춰지고, 정부와 검사와 경찰 그리고 재개발 조합원들의 협공에 홀로 맞선 자는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국선전담변호사다. 그것이 대결구도의 전부라면 애당초 균형이 너무 기운 싸움일 테다. 스스로 소수자라고 인식하는 단신의 변호사에게도 시민단체, 사법연수원 교수, 유력한 법학자, 거대 로펌과 정치인과 언론이 조금씩 가세한다. 결정적 증거의 제시를 위한 트릭으로 조직폭력배 두목도 등장한다. 복잡한 모든 장치가 법정과 재판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작가가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여 철거민을 둘러싼 사회문제 의식이 실종한 것은 아니다. 어느 독자든 소설을 읽는 순간 그 현실의 고통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의 주제를 전면에 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얽히고설킨 요소들을 표현하는 가운데 필요한 때마다 배어나게 하고 있다. 두번째 장편소설을 내는 작가의 능력이다.

이 소설은 법정소설로서의 몇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세밀한 취재와 공부를 바탕으로 법률용어 구사와 상황 묘사가 놀랍도록 정확하다. 형사절차에 마련된 모든 제도, 예를 들면 재정신청, 항고, 국민참여재판 등을 사건 전개의 분절과 연결을 위한 도구로 능숙하게 사용한다. 심지어 유도신문을 허용하는 형사소송규칙까지 동원한다. 국가배상제도의 실태와 제소전 화해에 대한 비판을 소도구처럼 다루면서, 검찰의 변호사 징계청구를 집어넣어 리얼리티를 높인다. 감정을 드러낸 4번 배심원의 퇴장 장면(382면)은 분노의 위트다. 그러면서 감각을 잃지 않는 문장은 미덕이다. “진실을 말한다고 했지. 하지만 진실을 꼭 그렇게 우렁찬 목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잖소?”(221면) 스토리를 이어가는 기능에 덧붙여 필요한 메씨지를 함축하는 중의적 문장 역시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다. “거짓말은 쉽지만, 거짓말을 변호하는 건 어렵습니다”(220면)에 이르면 사법체계를 꿰뚫는 통찰이 엿보인다. 소설적 묘미를 더하는 구성도 심각하면서 재치있다. 공소시효제도를 이용하여 “무죄를 주장하면 유죄가 되고, 유죄를 주장하면 무죄가 된다”(223면)는 역설적 현실을 화두처럼 던진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가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Der Richter und sein Henker)에서 보여준 “법이 보는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그 범죄를 증명할 수 없게 한다”는 아이디어에 필적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소설이란 형식으로 독자에게 사법체계의 밝고 어두운 구석을 두루 보여주는 데 성공적인가. 적어도 근년에 나온 유사한 저작들에 비교하면 월등한 면이 있다. 법학자가 상재한 연구서 형태의 에쎄이나 변호사가 쓴 소설보다 현실과 제도를 동시에 보며 짧은 촌평을 문장 사이에 심어놓는 솜씨가 탁월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만족스런 건 아니다. 사건을 다루는 국가 씨스템의 결함에 대안을 제시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섣불리 정의를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통렬하도록 날카롭게 날렸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문장의 밀도를 조금 높이거나 지적 사유를 바탕에 더 깔아두는 방식이 떠오른다.

소설의 주인공은 스스로 소수의견자로 자처한다(13면, 71면). 소수의견은 공표는 허용되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다. 동시에 다수의견에 맞서는 항변이다. 사회체계에서 포섭되지 못하고 배제된 소외자의 저항인 셈이다. 다수와 소수의 의견은 서로 대립하지만 양자의 목표는 모두 정의라는 게 현실의 아이러니다. 어느새 정의의 추구는 유행하는 만성질환처럼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 부정의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면 충분할 터이다. 작가는 잘못된 정의가 구체적 개인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습성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의문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스스로 책날개에 “개인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쓴다”라고 밝혔다. 논리를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구축한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