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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이문 『둥지의 철학』, 생각의 나무 2010
시와 철학으로 ‘언어적 둥지’ 짓기
장회익 張會翼
서울대 명예교수, 물리학 zm530@hanmail.net
일생을 철학적 사고에 바친 한 원로 철학자가 스스로의 삶의 의미까지를 담아낸 총체적 자기 철학의 결실을 한권의 책으로 요약해주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우리의 관심사가 될 만하다. 평생 지혜를 찾아서 온 세상을 헤매다닌 사람이 이것이 내가 찾아낸 것의 전부요 하고 그 지혜의 바구니를 풀어 보인다고 할 때, 우리는 일단 그 내용물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팔순을 넘긴 원로 철학자이며 시인이기도 한 박이문(朴異汶) 교수의 신간 『둥지의 철학』이 바로 그런 책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철학을 “언어적 둥지 짓기”라고 하면서 이를 ‘둥지의 철학’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언어적 둥지 짓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철학자이기 전에 시인인 저자는 자신의 철학을 ‘둥지’라는 시적 메타포에 연결지어 설명한다. 새들이 둥지를 틀듯 사람은 철학이라는 관념적 둥지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그가 일차적으로 제시하는 철학의 이미지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은 합리적 논변을 통해 표출되기 이전에 이러한 이미지 혹은 메타포를 통해 먼저 형상화되고 있다. 이 이미지 덕분에 그는 굳이 길게 서술하지 않고도 철학이 삶을 위한 것이며 그것도 가장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 등 중요한 몇가지 기본 전제를 자연스럽게 바탕에 두고 출발하게 된다. 독자들 또한 그의 철학이 그가 내세우는 둥지의 이미지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하나의 독법을 머리에 그릴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철학이 어떤 점에서 둥지와 같다는 것인가? 그는 인간의 “인식이 그 대상의 수동적 발견이나 반영이 아니라 언어라는 매체로 짜맞춘 관념적 구축물이며, 지식의 긍정적 값으로서의 ‘진리’는 우주의 일부로서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의 역동적 활동으로 창조된 산물”(275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둥지가 단순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새들이 제 몸으로 직접 엮어 만든 제작품이듯, 인간의 철학 또한 자기 삶을 위해 스스로 짜맞춘 구축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들이 자기 형편에 따라 제각각 다른 둥지를 짓듯이 우리의 인식 내용 또한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구성된 것이냐에 따라 아주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영원불변한 단 하나의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진리의 상대성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현실적으로 어떤 인식에 대한 진위, 어떤 세계관·인생관 혹은 철학에 대한 좋고 나쁨, 적절성과 부적절성을 판단해야 하는데, 그 기준으로 그는 건축물의 메타포가 적절하다고 본다. 우리가 세계관이라는 관념적 건축물을 구상하고 설계하며 구축할 때, 항상 그리고 근본적으로 염두에 둘 것은 가장 귀중한 인간의 가치로서 몸과 마음의 안전과 평화, 정신과 감성의 자유와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런 가치가 최대한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거처로서의 이상적 모델로, 동물 특히 조류가 자신의 거처로서 구축하는 ‘둥지’가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 그는 모든 둥지는 언제나 시적이며 아름답고 따뜻해 보이는데, 지금까지의 그 어떤 철학, 그 어떤 세계관도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그리하여 가장 바람직한 세계관,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할 수 있는 관념적 거처로서의 둥지를 틀려면 지금과는 다른 자료를 써서 다른 식으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 모델이 바로 뛰어난 건축가인 새들의 둥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만든 둥지 안에는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는가? 그는 기존의 철학적, 종교적, 예술적 및 과학적 세계관은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세계관’으로서의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자연물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물학적, 지적, 정서적 요구를 최대한으로 충족시키고자 억지로 자신의 욕망, 힘, 기술을 삽입해 만든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며, 반자연적, 반생태학적, 반환경적이라고 비판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원천적으로 갈등이 불가피하나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연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인간과 자연 간의 조화의 정신을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대립과 투쟁이 아니라 화해와 통합의 정치학을, 관용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사회학을 지향해야 하며, 획일적・규범적・이성적 윤리학이 아니라 다원적・감상적・상황적 윤리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가치의 궁극적 바탕인 ‘행복’이 인간중심이 아닌 생태중심적인 일원적 세계관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며, 개념적・논리적・과학적・기하학적 사유에 앞서 감각적・미학적・은유적・시적 언어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인식이 대상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보면서도, 모든 것의 궁극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라는 색소를 통해 드러나는 그 어떤 바탕으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론과 존재론은 그가 말하는 ‘존재-의미 매트릭스’(onto-semantical matrix) 형태의 일원론적 형이상학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스피노자(B.Spinoza)의 관점이면서, 더 자세히는 메를로뽕띠(M.Merleau-Ponty)가 말하는 마음과 몸으로 양분되기 전의 ‘날 존재’ 혹은 ‘야생의 사유’에 해당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와 함께 그는 우주 존재 일반을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무한히 다양한 것들이 역동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영원한 소용돌이의 유동적 과정이라고 하면서, 존재와 인식은 모든 것의 시작인 동시에 끝이며, 끝인 동시에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얼마나 동의할 것인가 하는 점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둥지는 그 자신의 둥지이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 둥지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이 만들어준 둥지 안에 들어가 사는 새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단지 그가 말하는 그의 둥지를 보며 그가 자신의 둥지에 얼마나 만족해하는지를 관찰할 뿐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이 이를 통해 각자 자신의 둥지를 어떻게 틀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면, 이것이 아마도 저자가 의도한 바에 가장 근접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