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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알랭 바디우 『비미학』, 이학사 2010

플라톤보다 더 플라톤주의적인 예술론

 

 

진태원 陳泰元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jspinoza@empal.com

 

 

5472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곧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에서 체계적인 철학자다. 유럽철학과 영미철학을 막론하고 오늘날 저술활동을 하는 이들 중 알랭 바디우만큼 체계성을 철학의 핵심으로, 철학이 포기할 수 없는 권리이자 의무로 간주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비미학』(Petit manuel dinesthtique, 장태순 옮김)은 그의 철학의 체계성이 두드러지는 책들 중 하나다.

먼저 ‘비미학(非美學)’이라는 특이한 제목이 관심을 끈다. 바디우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비미학은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관계에서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도 예술을 철학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5면). 어떤 의미에서 본서 전체는 이 정의에 대한 부연설명이자, 이 정의의 예시 또는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의 첫 부분은 이 책의 관심이 철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재정립에 있음을 시사한다. 바디우는 이 관계에 대한 세가지 전통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첫째로 지도적(플라톤적) 도식의 테제는 예술이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것 또는 모든 진리는 예술 밖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가장하는 직접적인 진리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고 철학이 예술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 낭만적(해석학적) 도식에 따르면 예술만이 진리를 담을 수 있으며, 예술은 참의 현실체다. 마지막으로 고전적(아리스토텔레스적) 도식에서 역시 예술은 진리를 담을 수 없지만, 이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술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카타르씨스며, 예술의 규범은 영혼의 감정을 다스리는 유용성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이 세가지 도식은 각각 예술에 대한 맑스주의적(지도적), 정신분석적(고전적), 해석학적(낭만적) 관점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 바디우의 핵심 테제는, 이 세 도식이 오늘날 포화상태에 이르렀으며, 이제 “새로운 도식, 철학과 예술을 맺는 네번째 도식을 제안”(22면)해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네번째 도식, 곧 비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철학을 위한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바디우는 이것을 내재성과 독특성이라는 범주로 규정한다. 곧 진리는 예술작품의 예술적 효과 안에 있지 외부에서 예술작품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술과 진리의 관계는 내재적이다. 또한 예술이 말하는 진리는 절대적으로 예술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다. 따라서 비미학은 매우 역설적인 또는 매우 기묘한 철학적 과제가 된다.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지만, 그러한 진리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게 될 것 같다. 왜 예술이 이러한 진리를 필요로 할까, 그것은 철학의 관심사가 아닐까? 또는 바디우 자신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그것은 철학이 예술을 통제 내지 포섭하려는 시도, 진리 생산의 권리를 예술에 전적으로 부여하는만큼 더욱더 교묘해지는 포섭의 시도가 아닐까? 이것은 비미학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해명되어야 할 의혹이다.

따라서 2장 이하에서 시와 산문, 연극, 춤, 영화 같은 실제 작품들에 대한 분석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책에서 특히 부각되는 것은 말라르메(S. Mallarm)와 베케트(S. Beckett)이며,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말라르메의 시다. 바디우는 말라르메의 시와 베케트의 산문 사이에는 (거의) 완전한 대응이 존재하지만(222면), 그럼에도 한가지 차이가 남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설가가 “죽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잠을 허용하지 않는” 데 반해, “말라르메의 경우에는 시적인 작업 이후에도 물음의 중지, 즉 구원적인 중단을 통해 그림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227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이 책을 비롯한 바디우의 여러 텍스트에서 말라르메의 시가 예술의 전범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라르메야말로 ‘사유로서의 예술’을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시인이며, 시 자신의 정체성이 사유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라르메로 대표되는 현대시가 “언어의 살 속에서 선사된 어떤 사유의 실제적 존재”가 아니라 “이 사유가 스스로를 사유하는 데 쓰이는 모든 작용의 집합체”(43면, 번역은 인용자)라는 점을 의미한다. 곧 현대시는 세계를 모방(또는 반영)하거나 기술하지 않고 어떤 의미를 표현하지도 않으며, 철학적인 설명이나 해석을 필요로 하지도 않은 채, “언어의 한계에서 도래하는 현전으로서의 다수에 관한 진리를 만들어낸다”(46면). 시는 “있음”(il y a)의 순수관념을 현재화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바디우의 비미학이란 플라톤주의적 예술론, 따라서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 반(反)리얼리즘적인 예술론임을 말해준다. 시 또는 예술을 세계의 모방이나 반영과 무관한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현전 그 자체의 구현이 아니라 “사라지려는 것을 붙잡아놓음을 통해 사건을 명명하는 모든 행위”(55면)를 시적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러한 예술의 과제, 이러한 활동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진리의 능력이 없는, 따라서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플라톤이 진리의 이름으로 예술을 추방하려 했던 것에 비해 바디우는 오히려 진리의 이름으로 예술을 복원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론은 플라톤보다 더 플라톤적인 예술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미학은 예술 일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어떤 예술, 예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예술들, 또는 그것에 속할 만한 몇몇 작품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절차 및 짜임에 관한 이론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의 비미학은, 그의 철학 자체와 마찬가지로 매우 폭력적이다. 그는 독자들을 무관심하게 놓아두지 않으며, 선택을 강제한다. 예수가, 루쏘가 자유를 강제했듯이, 그는 진리를 강제한다. 『비미학』은 그 강압의 힘과 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물론 아쉽게도 그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의 비미학 역시 많은 추종자를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을 필연화하는 것이 또다른 사유의 의무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공들인 번역이고 가독성도 무난한 편이지만, 간혹 몇몇 개념들을 너무 풀어쓰는 바람에 그 개념의 소통 가능성이 오히려 제약받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예술의 철학적 정체성 찾기”(23면)에서 ‘정체성 찾기’는 ‘identification’의 번역인데, 이런 번역은 개념만이 아니라 문장의 의미 전달까지도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identification’은 ‘정체성 부여’로 고치고, 해당 구절은 “예술에 대한 철학의 정체성 부여”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