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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광선 金光善
1961년 전남 고흥 출생. 2003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겨울삽화』가 있음. kgs0049@hanmail.net
봉숭아
결국은 문을 닫았다, 맛만 있으면
손님이 몰려올 거라 믿었던 칠년여 영업
이미 기울은 봄날
새학기에 얻어온 봉숭아씨를 아이는 깊이 묻었다
음식쓰레기 간기에 절어
기미 낀 여인처럼 거무죽죽 수채 근처 자투리땅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제 호기심을 확인하려는 듯 꼭꼭 누른다
너무 누르지 마라, 씨도 숨을 쉬어야 한단다
깊이 묻으면 새싹이 트는 날도
그만큼 멀단다, 아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광우병, 지구 반대편
이 나라 쇠고기 반 이상을 조달한다는
미국에서 터진, 날이면 날마다
비척비척 쓰러지는 소를 화면으로 내보내다
그것도 지치면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하는 소들의 무덤을 아이가 볼까
우리들은 오줌 누듯 묵묵히 뒷마당
간혹 지나가는 개미를 발로 으깨며 물을 뿌렸다
우리 이제 장사 안해요? 펄펄 뛰는 아이들
신난 아이들
봉숭아 꽃잎들이 환하게 핀다, 더는 돌보지 못하고
뭉게뭉게 떠나갈 아이들이
눈길 떼지 못하고 애써 피운 꽃잎
만지작거리다 가슴 철렁 홑잎으로 질까 두렵다
내년 새봄에 이 자리
더욱더 많은 봉숭아가 필 거야, 그러니까 이제 가자
뒷좌석에 올라탄 아이들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빙판
만두소의 주재료가 되는 칠천원어치 두부 일곱모와 갈은 돼지고기 네근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 상가를 나서는 길, 중심을 잃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손에 든 것 패대기치지 않으려
팔을 높이 들었을 뿐인데
두부 한모는 벌써 허옇게 부서지고
푸르뎅뎅한 길바닥 낭자하게 뒹굴고
주섬주섬 챙길 수도 없이,
늘 젖은 채로 살았기에 한번 뒹굴면
맨땅에서 건져질 수 없는 것들
순간 부끄러웠다, 양지뜸 한가한 햇살
모두들 서서 담소를 나누는 자리 그 앞에서
손에 든 것 놓지 못하여 한참을
짚을 곳 없어 버르적거린 서툰 몸뚱이
알처럼 뒹굴며 노른자를 쏟았다
넘어지고 보니, 서 있는 모든 이들
까만 절벽으로 보여
팔꿈치 통증도 잊은 채
먹을 수도 없는 흙투성이 챙겨 서둘러 피했으나
잠시 주춤, 거기엔
등줄기 땀인 줄로만 알았던
내가 지고 다닌 장막이 짙게 서리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