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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광호 평론집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문학과지성사 2006

대타의식을 넘어설 비평작업의 아쉬움

 

 

김명환 金明煥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kmh@snu.ac.kr

 

 

이토록 사소한

이광호(李光鎬)는 소위 80년대식의 정치성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다양성 안에 존재하는 ‘사소한’ 정치성에 주목하며, 2000년대 문학의 특질과 진로를 규명하는 작업에 힘을 다한다. 저자가 볼 때 최근 등장한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정치적 죄의식과 역사적 현실의 중력과는 무관한 자리로부터 글쓰기의 존재를 설정할 수 있게 된”(101면) 존재이다. 따라서 (80년대의 문학과 다를뿐더러) 90년대 문학이 짊어졌던 부담인 80년대 문학에 대한 환멸과 저항마저도 털어버렸다는 점에서 일종의 “무중력 공간”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은 2000년대 문학을 단지 가벼운 문학으로 설정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지만, “한국사회의 역사적 인력(引力)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이들은 탈국가주의적인 문명적 차원의 개체적 비전을 모색한다”(101면)는 평가가 이 책을 통해 풍부하게 입증되지는 못한 것 같다. 저자의 논법 앞에서 문학은 그것이 처한 사회적·역사적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상식적인 일반론을 존중해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작가들이 현실의 구속을 정면으로 부정하거나 등 돌리고 탈출하려 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창조적 세계에 의연히 작용하는 역사적 규정력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것이 ‘정치성’을 파고드는 비평의 본령이 아닐까?

물론 저자의 분석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90년대 문학이 과연 사생활을 일차원적으로 드러내는 차원을 넘어서, 사생활의 ‘정치학’을 적극적으로 탐구했다고 볼 수 있을까? (…) 그러니까 사생활의 발견을 생활세계의 정치학으로 밀고나가는 작업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선은 새로운 문법과 언술을 요구하고 있다”(284면)는 대목은 그의 조심스러운 예민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최근 젊은 작가들의 새로움은 우리 문학사에서 근원적인 전환에 값한다고 언명하는 가운데,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의 ‘개인의 목소리’는 타자를 배제한 독백이 아니라, 타자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공간을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대화적 관계를 구성한다. 우리가 이 낯선 문학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공적인 담론의 억압 아래 오래 침묵하던 사사로운 인간의 언어”(284면)라고 하는 주장은 다소 허술해 보인다.

우선 90년대 이전 문학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이 타자를 배제한 독백의 목소리였다고 일반화할 수 있을까? 80년대 운동과 거리를 둔 훌륭한 작가들도 없지 않았을뿐더러 설령 80년대적 민중운동의 논리를 추수하고 만 작가라 하더라도 뜻있는 성취를 이룬 작품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시 없을 존엄한 개인의 목소리를 빚어냄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90년대 문학이 80년대에 대한 환멸과 부정을 주조로 한다는 발상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때 창작의 전반적 경향이 그러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80년대에 대한 반발을 은연중에 민중운동이나 그것과 연결된 민족문학과 리얼리즘문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몽땅 환원하는 설명방식은 좀 무리인 듯하다. 그러다보니 우리 문학의 역사적 흐름을 진단하는 저자의 발상법이 부지불식간에 우리 문학의 구체적인 성과를 따지는 정말 중요한 작업을 자꾸 뒷전으로 밀어내는 형국이다. 안타깝게도 저자의 평론작업 자체가 자신이 주관적으로 상정한 80년대 문학에 대한 대타의식에 치우친 나머지 뜻하지 않게 자기 입론의 구축에 흠집을 내고 만다.

저자는 리얼리즘도 모더니즘도 아닌 새로운 미학이념을 찾는 작업은 “텍스트에 대한 열린 독해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63면)고 말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작품론 중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다. ‘민중시’에서 “민중계급의 캐릭터를 정형화하고 남성주체의 시각적 특권을 관철하는 미학적 메커니즘”(40면)을 발견하면서 그 사례의 하나로 신경림 「농무」의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를 지목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곤란하다. 이 대목이야말로 당시 현실에서 하릴없는 가난한 처녀들의 실제 모습을 이념적 편견 없이 묘파한 리얼한 구절이 아니던가. ‘민중시’ 중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공격받기 쉬운 시를 골라 꼬집는 가운데 「농무」를 폄하한 것이 실수가 아니라 비판대상을 무조건 격하하는 자세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반면에 지나친 고평도 없지 않다. 저자는 성석제의 파괴력이 “근대적 리얼리즘 소설의 문법을 단숨에 뛰어넘어, 한국 근대서사의 엄숙주의와 남성적 지사주의, 그리고 여성적 고백서사의 자폐의 수사학을 동시에 돌파했다는 점에 있다”(72면)고 칭찬한다. 다른 대목에서 성석제의 단편 「통속」을 비교적 상세히 논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한국 근대서사의 본질적인 한계(한계의 명명법도 타당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를 돌파했다는 과감한 진단은 증명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타의식을 과도하게 드러내면서 이광호의 평론은 시대가 요구하는 비평을 위한 나름의 개성적인 기여에 난관을 조성한다는 느낌이다. 배수아나 박민규의 소설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자신이 공격하는 정치성과 대립되는 다른 차원의 정치성을 부각시키지만, 소재적인 다양성이나 차이 외에 저자의 ‘정치성’이 과연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지 독자를 설득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예컨대 배수아의 『철수』가 “일상적 삶의 끔찍한 도식성과 속악함이라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배체제와 중산층 공간에 대한 날카로운 미적 저항을 담고 있는 정치적 소설로 해석될 수 있다”(81면)는 발언은 흥미롭다. 그러나 “일인칭 화자의 자기모멸적 화법과 마조히즘적 육성”(152면)이 최승자나 장정일을 연상시키면서도 그들보다 “처절하게 ‘사실적’”(153면)이라는 판단에 공감하지만 그 정치성과 사실성의 남다른 진상에 대한 무게있는 해명을 더 기대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