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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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金重一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이 있음. ppooeett@naver.com

 

 

 

아무튼 씨 미안해요

 

 

1

막사로 기어들어오려는 새끼 표범 한마리를 쐈더니 목구멍에서 가는 신트림이 가르랑 올라온다 하얗게 저물어가는 새벽의 거대한 궁둥이를 향해 할 말이 있다

엽사는 개머리판을 잡고 있던 손바닥에 찬 땀을 바지춤에 닦으려다가 멈춘다 자신의 굵은 손금을 따라 붉은 초원을 횡단하는 새까만 누(gnu)떼가 보인다 그들은 첨벙첨벙 엽사의 손금에 발 담그고, 목 축이고, 계속 행군한다

엽사는 무리 중 한마리를 잽싸게 조준한다 암사자에게 공격받아 개껌처럼 짓뭉개진 오른팔 대신, 엽총을 어깨에 걸고, 총구에서 기필코 오른손이 불쑥 튀어나와 악수를 청할 때까지, 엽총을 단단히 틀어잡고, 숨을 멈추고…… 사실 엽총 따윈 없다

죽는 건 죽이는 것보다 항상 먼저 벌어지는 일 멸종위기종을 죽이고 얻은 밤들은 당연하게도 조금씩 멸종되고 있다

엽사는 광활한 새벽을 무성한 털처럼 뒤덮고 있는 잿빛 안개에 기대 목마른 기린의 길게 늘어지는 엿가락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

모두들 그곳에서는 안녕하시오오?

모두들 그곳에서는 안전하시오오오?

한번은 하늘을 빼곡히 메운 새들을 모두 명중시킨 적이 있다 땅에 떨어진 새들을 헤아려보니 한마리가 사라져 행방이 묘연했다 결국 찾지 못하고 새의 장례마저 포기하자 다음날부터 아내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분만중 아내는 아이와 함께 죽었다 뒤늦게나마 새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엽사는 낡은 엽총을 분해소제한다 엽총에 나사처럼 박힌 나선형의 바람과 함께 유체이탈한 짐승들의 영혼이 화약 열기와 뒤섞여 풀려나온다

늙은 사냥개의 건조한 콧등처럼 씩씩대는 쌍발 엽총의 총구로, 여전히 사냥감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새까만 총구로, 대초원의 가장 거대한 짐승 모든 짐승들의 아버지 새벽의 무성한 털 잿빛 안개를 구석구석 헤집는다

총구에서 잃어버린 손이 활짝 피어나 용서의 악수를 청할 때까지 엽총을 놓지 않으며, 숨을 멈추고, 하나 두울 세엣…… 이미 엽총 따윈 없다

외팔이 엽사는 건조하게 웃는다 웃음은 초원의 모래바람과 함께 금세 흩어진다 아무튼 웃는다 아무튼 말한다

 

 

2

나의 총알이 궁둥이에 박히고도 평화롭게 진흙목욕을 즐기는 코끼리가 있었소. 솔직히 말하면 그건 실수였소. 그 두툼한 갑주 같은 궁둥이에 값비싼 은탄을 박아넣은 거 말이오. 아무튼 그 코끼리는 백일 밤낮을 지독한 건기의 대초원에서 마지막 남은 워터홀 주위를 떠나지 않았소. 아무튼 작은 씨앗처럼 은탄이 심겨진 궁둥이 부근에서는 급기야 자작나무 밑동으로 추정되는 엉치뼈가 드러나기 시작했소. 아무튼 단속반에게 그것을 건기의 극심한 가뭄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도 없었는데, 궁둥이에 잎이 나고 지고 나고 지고 잎이 지며 진물이 뚝뚝 떨어졌소. 아무튼 총알을 맞고도 목숨이 붙어 있다면 그때부턴 식물의 시간을 사는 겁니다. 아무튼 덤 같은 거죠. 아무튼 이번 생은 소원하던 대로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자작나무의 우듬지가, 코끼리 코 옆으로 삐죽하게 솟아 있는 걸 맙소사, 엽사 인생 반백년 만에 발견한 것이었소.

아무튼 코끼리는 그저 평화로워 보였소. 고독해 보였지만 고요해 보였소. 그런 합체, 아무튼 나는 이상하고도 엄청난 고독에 압도당하여 나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야 말았소. 유감스럽게도, 아무튼 코끼리에게는 아니오. 가물고 가물어 쩍쩍 갈라지고 터진 초원의 한줌 땅덩어리 같은 코끼리, 아무튼 씨의 궁둥이에 사과했소. 목마름에 대열을 이탈한 어린 누처럼, 한밤에 쏴죽인 새끼 표범처럼, 그 새처럼, 먼 대륙의 군락지에서 훠이훠이 날아와 한마리 거대한 짐승의 몸속에 깃들고 움트고 잠든 자작나무, 아무튼 씨에게 사과했소.

자작나무의 말로 코끼리의 말로 우물쭈물하다가, 자작나무의 핼쑥한 얼굴을 하고 코끼리의 잿빛 장화를 신은 채 아무튼의 갈라진 입술로 아무튼 씨에게

아무튼 씨 미안해요

제가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입니다.

 

 

 

새벽의 후렴

 

새벽의 악장(樂長)을 맡아온 오리는

창틀 위에 쪼그려 앉아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도 않는 먼 산을 보고 있었다

그날 새벽도 폭설을 뚫고 온 삼단 우산처럼

작고 뭉뚝하고 낡은 그림자를 접어 문설주 옆에 세워두고

오리는 융커튼 같은 폭설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오리(里) 앞의 강을 보고 있었다 강 너머에 두고 온

오리나무숲의 주검들을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매일밤 음악적 신념을 갖고 꼬박꼬박 찾아오는

오리의 눈뭉치처럼 자그맣고 찬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내 코앞까지 끌어당기며 물었다

이봐 너의 눈에는 그 어떤 슬픔도 찾아볼 수 없구나,

주둥이 대신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오리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나의 두 손에 작은 머리를 내맡긴 채

콩자반같이 반들거리는 동공 가득 나를 담고 있었다

 

하필 손가락은 왜 다섯개인가

한번은 다섯손가락을 힘껏 펴고

성에 낀 새벽의 창문을 움켜쥔 적이 있었다

내가 움켜쥐었던 창문에 난 자국들은

곧 새벽과 함께 흘러내릴 오선지, 텅 빈 악보였다

 

오선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오리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고심하는 오리

언제나 꽥꽥 꽥꽥꽥 습관적 리듬에 맞춰

가래를 톺거나 창작의 고통을 토해내는 오리

오늘도 후렴이나 메아리처럼 날 찾아오는 오리와

넌 몇살이니? 서로 물으면서

빈집을 찾아들어가 손잡고 나란히 누워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등 밑에서 도돌이표처럼

달라붙어 있는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를

세상의 모든 후렴들의 소각장으로 등 떠밀 것이란 걸

 

곧 성벽 같은 새벽을 철거하기 위해

철거반이 들이닥치겠지만

그들을 피해 골방의 턴테이블이

불법노점상 같은 빈집을 어디론가 굴려가는 사이

오리는 아래 나는 그 조금 위,

문설주에 돌쩌귀처럼 나란히 달라붙어

세간들이 소집된 빈집 마당을 내다보며

꺽꺽 꺽꺽꺽 거리고만 있을 테지

 

가구에 가려졌던 벽지에서는

끝내 아무런 지령도 발견되지 않았고

포승줄에 포박되어 줄줄이 끌려나간

합창단원들은 하나같이 눈이 가려지고

노래할 수 없도록 재갈이 물려졌으며

오르간은 충치 가득한 이빨로

 

오늘의 악보를 게걸스럽게 뜯어먹다가

새벽이란 후렴구만 앙상히 남기고

쫓기듯 강 쪽으로 도주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