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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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吳鐸藩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 등이 있음. sianws@hanmail.net

 

 

 

哺乳圖

 

 

밭 가는 어미소 따라

강동강동 뛰는 송아지를

-네미! 네미!

할머니가 부르며

등에 업은 아기를 추스른다

밭에서 일하던 며느리는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에미! 에미!

저 부르는 말인 줄 알고

밭두둑으로 냉큼 올라온다

-음마! 음마!

아기가 방싯방싯 웃는다

 

-저라! 저라!

-어뎌! 어뎌!

소 모는 힘찬 소리에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내딛는

어미소 따라가며

-음매! 음매!

송아지가 젖 보채며 운다

배냇머리같이 보드라운

금빛 털이 함함하게 빛난다

 

-음마! 음마!

에미 젖 먹는 아기를 보며

할머니가

어미소 모는 애비에게 말한다

-송아지도 젖 보채누나

할머니의 말을 알아들은 듯

-음매! 음매!

어미소가 송아지를

송아지가 어미소를

서로서로 부른다

젖 먹던 아기가 옹알이하며

쇠젖 먹는 송아지를

도렷도렷 쳐다본다

 

 

 

絶世美人

 

 

-2006년 3월 21일 오후 3시

조선시대 다식판 하나 사려고

앙성면 골동품 가게에 들렀는데

늙은 주인은 어디 가고

갓 스물 된 아가씨가 손님을 맞는다

볼우물이 고운 복숭아빛 뺨과

몽실몽실한 가슴을 보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희고 미끈한 종아리는

왜무처럼 한입 베어먹고 싶었다

다식판은 보는 둥 마는 둥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4시 반

천등산 손두부집에 들렀는데

삼원색 요란한 월남치마에

발목 다 보이는 나일론 양말 신은

젊은 아낙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한다

브래지어 한쪽 컵이 망가졌는지

짝짝이 가슴이 붕긋봉곳한

주근깨도 예쁜 아낙의 얼굴을 보며

식사 주문도 잊은 채

정신이 휑하니 아득해졌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6시 반

늙은 느티나무가 새잎을 피우고

저녁놀이 서녘 하늘 물들일 때

내내 방망이질한 가슴 진정시키려고

솔잎술 한잔 마시며

옛 사진첩을 그냥 뒤적거렸다

내가 서른여섯살 되던 가을

서른한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술잔을 엎질렀다

골동품 가게 아가씨보다도

손두부집 젊은 아낙보다도

몇곱절 예쁜 젊은날의 아내가

방긋 웃으며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날부터 지갑 속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며

아침저녁 새새틈틈 보고 또 본다

어느날 다따가

絶世美人이 된 줄도 모르는

아내는

달팽이관이 고장나서

메슥메슥 입덧하듯 토하고 있다

아아 아득히 흘러간 젊은 시절

아내가 아기 배고 입덧할 때

귤 하나 사다줄 생각 못했던 나를

호되게 벌주고 있다

-2007년 1월 12일 오전 9시

새해 들어 입덧 더 심해진

絶世美人의 손을 꼭 잡고

영하 12도 눈보라 치는 날

춘천 성심병원 이비인후과로 간다